다만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오래받을 생각이 없다는 거지만.
“그래서 대왕대비 마마께서 3년간 수렴청정을 하시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예조판서인 장우영이 반박하며 나섰다.
이럴때 목소리를 내주는군.
나름 신뢰할만 하다.
예판인 장우영의 반대에 이조판서 김좌근과 일당들이 냉소를 지었다.
“소신이 말하고 싶은것은 3년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저놈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누구지? 얼굴좀 기억해 놓자.
조금전 발언한 관료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상대가 움찔하는 기세였지만 그것도 잠시.
너의뒤에 안동김씨가 있다는 뜻이겠지?
졸개를시켜 분위기를 띄운뒤에 이번에는 김좌근이 본격적으로 나섰다.
“선대(헌종)께서 계실때에도 대왕대비께서는 8년의 수렴청정을 하시면서 가르침을 주셨소이다. 그리고 선대께서는 어릴때부터 왕세자의 수업을 받으시며 준비를 하셨지요.”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8년도 부족하다는거?
날로 먹으려고 드네.
진짜로 권력에 미친 놈이구만.
“그것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않소?”
“무엇이 다르다는 뜻이요?”
예조판서 장우영도 지지않고 받아친다.
논쟁이 격해지는걸보던 영의정 정원용이 나설려고 할때.
“이보시요. 어찌 오늘같은 자리에 대소신료들은 이미 결정된 것을 다시 꺼내는 것인가?”
음성에 불쾌함이 섞인채로 순원왕후가 나섰다.
양쪽에서 언쟁하던 이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아직까지 그녀의 권위는 충분히 살아있는 것이다.
김좌근과 세력들은 여기서 밀릴수 없다는 모습으로 기세를 높였다.
김좌근이 순원왕후의 남동생이란 사실.
이조판서라는 중책에 있다는걸 믿고 날뛰는 것이지.
“대비마마. 신들의 간청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대비마마의 결정을 번복할려고 시도하는 자들이옵니다.”
양쪽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김좌근 일파들은 나를 앞에두고 완전히 자기들 멋대로다. 한동안 신료들의 언쟁에 혀를차던 순원왕후가 내쪽을 보았다.
“금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원왕후를향해 밑밥을 깐 효과가 있다.
그녀가 첫번째 수렴청정이면 몰라도 이번에는 두번째다.
그녀의 나이도 벌써 61세.
그렇다고 여기서 수렴청정 아예 반대! 라고 외칠수는 없고.
적당히 타협을 봐야겠지.
“아직은 국사를 책임지기 위해서 배울것이 많다고 사료됩니다. 따라서 대왕대비께서 3년후에 다시 판단을내려 주십시요.”
“금상께서 그렇게 말해주시니 본녀도 마음을 놓을수가 있습니다.”
상대를 방심시키는 작전이지.
나의대답에 김좌근 무리들이 조소를 지었다.
일단 3년은 확정된것.
그리고 3년뒤 이런저런 트집을잡아 수렴청정을 더 연장시키거나 실권을 넘기지 않겠다는 수작이지.
하지만 내가 장담한다.
너희들은 1년안에 정리된다.
그렇게 만들테니까 말이지.
잠시후 순원왕후가 언쟁을 벌였던 신하들에게 말했다.
“경들은 금상의 대답을 들었을 것이요. 앞으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이상 거론하지 마시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좌근 무리들이 승자라도 된듯이 엎드려 말한다.
당장은 속으로 좋아죽겠지?
하지만 오래가지 못할거다.
입에서 곡소리 나오게 해줄테니까.
* * *
상대가 날뛰면 날뛸수록 박살낼때의 보람도 커지는 법이지.
머리속으로 얼마전 인정전에서 벌어졌던 즉위식.
김좌근 무리들이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가지고 시비거는 장면들이 스쳐갔다.
녀석들이 목적한 부분을 완전히 성공한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순원왕후를통해 어느정도 양보를 받아냈고 그때문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지금쯤 자기들끼리 모여서 작은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거 같군.
그것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지만 어차피 김좌근 세력들은 내가 머리속으로 생각한 대전략.
큰그림에 비한다면 사소한 잔챙이들에 불과하다.
어차피 김좌근 놈들이 날뛴다고 해봐야 조선 내부의 상황.
하지만 전세계는 제국주의 시대이고 난세와 격동의 시대다.
제국주의 시대에 넘버원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영국이다.
속칭 해가지지 않는 제국.
전세계 영토의 1/4을 넘어가는 해외식민지를 거느린 존재.
독보적인 열강 1위이고 그뒤를 프랑스와 러시아가 뒤쫓고 있다.
얼마전 영국에서 독립한 아메리카의 미국은 개척을 전개하며 자신들의 힘을 키워나가는 상황이다.
글고보니 독일에있는 프로이센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태동하면서 자신들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중이다.
이처럼 힘을 키워가는 국가들이있는 반면에 한때의 영광들이 과거의 기억이 되면서 쇠퇴중인 국가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네델란드, 오스트리아가 그에 해당된다.
중동의 늙은병자인 오스만 제국도 빼놓을수는 없다.
생각해보니 아시아에도 늙은병자가 하나 있다.
청나라-
제 1 차 아편전쟁을통해 양이(서양오랑캐)라고 부르던 영국에게 털린 상황인데도 현실파악이 안되었고 우물안 개구리 신세다.
남쪽으로 눈을돌리면 일본.
이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략을 짜야할까?
가만히 놔두면 원역사에서처럼 힘이 커진뒤에 대동아 공영권, 덴노헤이카를 외치면서 등신짓을 해대겠지?
이처럼 지금은 제국주의 시대이다.
조선주변의 상황, 그리고 세계정세를 생각해보면 김좌근 놈들은 하찮은 것들이다.
하지만 당장 나의발목을 잡는것은 저놈들이니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수는 없었다.
“녹차도 그럭저럭 괜찮긴 하네. 그래도 커피생각이 나는건 어쩔수 없지만.”
씁쓸한 기분을 달래며 일어났다.
오늘의 즉위식을통해 조선의 국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낯설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임금의 생활이긴 한데.
그래서일까? 밤이 되었는데도 잠이 오지않았다.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는것도 좀 그렇고.
가볍게 산책이나 해볼까.
“종걸아!”
“하명하십시요. 전하.”
“잠시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곧 준비를 하겠습니다.”
밖으로 바람쐬러 나가는것.
산책하러 나가는 것에도 담당내관을 불러야했다.
그래야 대기중인 호위무관들도 임금에대한 경호임무를 수행할수 있는것이다.
이처럼 임금은 창덕궁 안에서도 편하게 혼자 다닐수는 없었다.
“후원의 경치는 결경이구나”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인들은 황송할 따름입니다.”
종걸이가 대답했다.
야간이다보니 앞에서는 내관이 등불을 밝혔다.
주위로는 호위를 담당하는 시위들이 따랐다.
종걸이에게 최대한 인원을 적게하라고 지시했다.
야간에 산책나가는 것인데 군사 퍼레이드를 할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했는데도 도열한 호위들의 숫자만해도 최소 10명이다.
이정도는 감수해야지 어쩌겠어.
창덕궁 내부에서도 이정도인데 왕이 궁궐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는 경우에는 더 엄청나다.
호위를위해 도열하는 군사들의 숫자는 몇배, 몇십배로 많아질 것이다.
나를데리러 강화도에온 봉송행렬의 규모만해도 대략 500명 수준이였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창덕궁 후원의 경치가 이정도라니! 역시 오기를 잘했다.’
밤에와서 풍경이 다르기는 했지만 만족할 수준이다.
이후에 시간을내서 낮에 와봐야겠다.
창덕궁에서 지냈던 조선왕들 중에는, 창덕궁 비원(후원)을 자주 이용한 경우도 많았다.
조선후기 개혁군주로 명성이 높았던 정조가 그랬다.
이후에 순조의 아들로 개혁을 시도했던 효명세자도 비원(후원)에서 정사를 논했던 경우가 있었다.
“전하. 밤이깊고 야심하니 희정궁 침소로 돌아가시는것이 어떠하오십니까? 옥체에 냉기를 쐬시면 좋지 않습니다.”
종걸이가 옆에서 건의했다.
그런데 냉기라니?
지금이 7월말인데 그리고 다음주면 8월이다.
현대의 한국이라면 여름때문에 전국민이 덥다고 하면서 에어컨, 선풍기를 틀어놓고 난리칠 상황이다.
밤산책을 나온것도 사실은 더워서다.
그래도 더위에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임금의 복식인 곤룡포를 입으니 더 그랬다.
곤룡포도 하계, 동계로 나뉘어져 있기는했다.
때문에 여름에입는 곤룡포는 옷감이 더 얇은것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반팔에 반바지등의 간편한 차림에 비해서는 찜복의 수준이다.
하다못해 선풍기라도 있었다면 어떻게 편할텐데.
하지만 조선의 기술력, 아니 1840년대의 기술력으로 선풍기를 만들만한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대영제국이라고 떠벌리는 영국조차도 증기기관의 사용은 일반화 되었지만 전기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기초적인 연구만 진행중에 있었다.
그런데 선풍기에 들어가는 전기모터-따위는 아예 개념조차 없는상태지.
그렇게 따진다면 조선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나의정책에 따라서 단시간에 세계최고의 기술선진국이 되는것도 가능하니까.
아무튼 선풍기에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있을때.
그래도 인간 선풍기는 존재하네.
“전하께서 식은땀을 흘리고 계시지 않은가? 너희들은 뭘 하느냐?”
호위를맡은 시위대 군관이 지시하자 같이가던 하급내관 두명이 서둘러 부채를 양손으로 휘두른다.
그래도 인력부채, 아니 인간 선풍기의 도움으로 더위가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다.
과거로 환생해서 왕이되는것.
어찌보면 좋은 인생이긴 하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편안함을 누릴수 없다는건 큰 단점이다.
기왕 죽은 목숨이 그래도 철종의 육체로 환생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지.
아무런 존재감도없는 상민중에 한명인 개똥이, 또는 백정이나 천민으로 태어났어봐.
그건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이다.
희정당으로 돌아가던 길에 머리속을 스쳤다.
“은대(승정원 청사)가 있는곳이 저쪽 방향이였던가?”
“그렇긴 하옵니다.”
일행들이 불안한 눈길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실려고요?
이런 심정들이 느껴졌지만 어쩌겠어.
내가 저들의 사정을 일일이 봐줄수도 없는것이고.
조선의 국왕으로서 필요하다면 칼춤과 피바람까지 일으켜야 하는데 주위에있는 시종들의 사정까지 챙겨줄수는 없었다.
은대(승정원 청사)를 가기로 한것은 다른목적도 있다.
승정원은 왕의 측근과같은 기관이다.
나의 지지세력과 충신들을 늘려가는데 있어서 먼저 공략해야하는 곳이다.
“전하!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소인들이 승정원에대한 방문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내관들의 말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