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69)

그런데 손자의 재주를 감상하는 할아버지처럼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하였다.

처음에는 예조판서도 몰랐지만 이제는 이해했다.

‘영상대감도 생각이 있으신 것이군.’

장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조정에서 명을받고 영의정과함께 강화도로 갈때.

안동김씨가 허수아비 국왕을 내세운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권세를쥐고 흔들기에 좋은 장남감으로 말이다.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인물이 새로운 국왕으로 추존되었으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불과 며칠동안 옆에서 지켜봤는데 강화도령 이원범은 그가 생각했던 인물과는 달랐다.

아무것도 모를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다.

조금전 환송나온 한양의 민초들을향해 일부러 드러내는것은 파격적인 부분이다.

계산이 깔려있는 행동이다.

그것이 단순한 패기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는 알수없었다.

이제는 예조판서인 장우영도 내부에서 뭔가가 울컥하는 느낌이 생겼다.

‘안동김씨 놈들. 강화도에서 잠자던 맹호를 한양으로 데려왔구나.’

통곡쇼도 힘드네

저곳이 앞으로 지낼 곳이란 말이지?

눈앞으로 창덕궁의 웅장한 위세가 드러났다.

한성부의 서쪽에있는 돈의문부터 창덕궁까지 도착하는 거리에는 민초들이 길에나와 엎드렸다.

그들을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조금전 그들을향해 큰소리 쳤는데 제대로 할수있을까?

헛된 기대감만 준것은 아닐까라는 느낌도 들었다.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조선의 운명을건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한 것이니까 말이다. 이윽고 종사관이 나의 눈치를 봤고 예조판서인 장우영이 다가왔다.

표정이 행렬의 한쪽에있던 동석이를 번갈아본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강화도에서 같이 따라온 시종은 궁궐로 들어갈수 없을듯 하옵니다.”

“그런가.”

예조판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좀 서운했지만 곧바로 이해했다.

“예판대감. 부탁이 있소.”

“하명 하십시요.”

“강화도에서 같이온 시종에게 궁궐밖에서 적당히 기거할 장소를 찾아줬으면 좋겠군요.”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예판이 지시를 내렸다.

동석이를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빠른 녀석인지 말뜻을 이해한거 같다.

동석이가 내쪽을향해 절을하더니 일어났다.

‘지금은 실력을 쌓으면서 기다려라. 이후에 너를 다시 부를테니까.’

배동석은 지시를받은 관리와함께 어딘가로 향했다. 장우영을통해 지시를 받았으니 적당한 숙소를 마련해줄 것으로 예상된다.

예조판서가 무관들을향해 명령했다.

“입궐을 시작한다!”

문관 출신인데도 목소리가 우렁차다.

지시에따라 시위들이 절도있게 움직인다.

돈화문에있던 수문장들이 문을열었다.

좌우로 개방된 돈화문.

내부로 창덕궁의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위대와함께 말을타고 이동했다.

돈화문에있던 수문장들은 임금이 말을타고 나타난 사실에 놀라며 당황했다.

뭘 그렇게 놀라시나?

이런 모습은 자주 보게 될건데 말이야.

그들을향해 시선을주며 나아갔다.

이제부터 스위트 홈(Sweet Home)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런데 스위트 홈?

뭐랄까 호랑이 굴속에 들어가는 느낌이긴 한데.

* * *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만한 곳이다.’

창덕궁에 들어가면서 느낀 소감이다.

한국에서 지낼때 경복궁은 가본적이 있지만 창덕궁은 처음이다.

돈화문을 통과해 도착한 인정전-

내관을 포함해 다수의 관원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임금의 입궐이라고 하지만 궁궐내 분위기는 숙연했다.

그것도 당연하다.

창덕궁에는 전대 임금인 헌종이 사망했고 상중이였기 때문이다.

한양내 민초들은 새로운 국왕의 행렬에 환영을 표시했다.

다만 여기서는 대놓고 그럴수가 없는것.

이후에 인정전에서 즉위식을하고 난뒤에는 대궐의 상황도 변할것이다.

그전까지는 어쩔수 없었다.

“선대(헌종)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예조판서 장우영이 앞장섰다.

도착한 곳은 헌종의 시신이있는 빈전이다.

헌종-

역사에서 기구한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23살이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빈전에는 헌종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다.

창덕궁에 도착한뒤 여기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궁궐내에는 권한과 위치를가진 두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순원왕후와 신정왕후.

순원왕후는 헌종의 할머니.

신정왕후는 헌종의 어머니다.

그녀들은 헌종이 어린나이에 사망하면서 충격에 빠져있었다.

따라서 그녀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필요가 있지.

빈전에 도착해 헌종의 시신이 안치된 관을 보는순간.

허벅지를 꼬집었다.

윽- 너무 아프네.

어쩔수없다.

여기서는 대놓고 대성통곡하며 울어야 한다.

“전하! 어찌하여 유명을 달리하셨단 말입니까? 이제부터 왕실과 조선백성들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눈물까지 쥐어짜며 통곡쇼를 시작했다.

같이왔던 예조판서와 신하들도 통곡을 시작한다.

정치적인 쇼맨쉽도 필요하지.

먼저떠난 선대왕을향해 우는것.

조선왕들에게 요구되는 품성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나름대로 감정이입을 하며 울었다.

진짜로 눈이 퉁퉁 부을때까지 말이다.

이쯤되면 너희들도 따라울지만 말고 뭔가 행동을 해봐.

언제까지 해야되는 거야.

통곡하던 예조판서가 콧물을 흘리며 나에게 간청했다.

“저하, 지금은 옥체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저하마저 슬픔에젖어 병환이 생기시면 왕실과 종묘사직에는 큰 우환이 될것입니다. 이제 그만 울음을 멈추시고...”

“아니다! 아까운 나이에 돌아가신 선대의 넋을 위로해야 한다.”

눈물을 흘리며 몇번 손을 뿌리쳤다.

주위에있던 신하들과 관원들이 감동먹은 표정이다.

바로 이거지.

군주는 때때로 거짓눈물도 흘릴줄 알아야 하지.

뿌리치자 예조판서가 명령했다.

“여봐라. 저하를 모셔라.”

시위들에게 명령했고 반강제로 끌려나갔다.

더 버틸수 있지만 이쯤에서 못이기는척 해야지.

땀을흘리는 시위들의 모습을보며 이쯤에서 져주기로 하였다.

얼마후 통곡쇼를하며 밖으로 끌려나온 나의 모습에 모두가 감동하고 있었다.

이정도면 충분히 성공이네.

* * *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소인은 종걸이라 하옵니다. 저하-”

“종걸이라. 괜찮은 이름이구나.”

“황송하옵니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엎드렸다.

겉모습은 남자인데 목소리는 하이톤에 간드러진다.

반쪽짜리 역사학도로서 내시(내관)에대해 알고는 있었다.

다만 눈앞에서 보니까 너무 낯설다.

조선시대의 내시는 중국의 환관들과는 다르게 남자의 거시기에서 모든걸 자르지는 않았다.

고환만 제거하는 방식인데.

중국에서 환관을 만들때에 사용하는 방법에 비해서는 좀 인도적이라 볼수있다.

그렇다해도 호르몬 불균형이 나오다보니 목소리가 여성처럼 변하는건 어쩔수없다.

“궁에 들어온지는 얼마나 되었나?”

“소인의 집안형편이 좋지않아 어릴때부터 들어왔습니다.”

종걸이는 12살때부터 내시가된 경우다.

대다수 내시들이 성년이 되기전 아이들이 선택되는게 보통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짬이있기에 이제 22살의 나이인데도 희정당에 배속된 상황이였다.

창덕궁에서 지냈던 조선왕들 중에는 희정당에서 업무를 보는것을 자주했던 임금들도 있었다.

그외에도 조선왕들이 개별적인 업무를위해 사용하는 장소들은 창덕궁내의 여러곳에 있었다.

왕도 인간인데 공적으로 정해진 장소에서만 집무를 봐야한다면

지겨울 테니까 말이다.

“아직도 선대왕의 승하소식을 믿을수가 없구나.”

“옥체를 보전하시옵소서. 저하. 그런데, 상복이 옥체에 맞으시옵니까?”

“그런것을 따질때가 아니다.”

“실언을 용서하십시요.”

종걸이가 엎드렸다.

희정당에 도착한뒤 처음 한것은 피로에지친 몸을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였다.

얼마후 예조판서 장우영이 들어왔다.

뭣때문에 온것인지 알겠다.

“궁의 어르신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잘 오셨소. 안그래도 예판대감을 부를려던 참이였는데.”

대답을하며 일어났다.

빈전에서 나올때 예조판서 장우영에게 넌지시 귀띰을 주었다.

그가 신속하게 준비를한거 같았다.

궁의 어르신들이란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다.

서열로는 순원왕후가 더 높다.

먼저 순원왕후에게 가는것이 첫번째.

그 다음에 신정왕후 쪽이다.

첫만남과 첫인상이 중요한데.

주먹을 쥐었다.

조선의 임금이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수 있는건 아니다. 역사에서도 조선임금은 이런저런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더 많았다.

어떤왕들은 그런것을 신경안쓰고 내앞에 다 꿇어! 해버리는 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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