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69)

육체마저도 파괴된 상태다.

이제부터 이원범의 삶을 살아야한다.

후회는 없다.

눈앞에 조선이라는 거대한 원석이 놓여져있다.

진흙에 파뭍혔고 돌덩이보다 못한 존재다.

그러나 세공과 연마에따라 최강의 강국이 될수도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저하.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대감께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수행업무는 종사관과 군관들에게 맡기고 대감은 돌아가 쉬시는게 어떻습니까?”

“아니될 말씀입니다. 신하가 힘들다고 주군을 놔두고 휴식을 취할수 있습니까?”

장우영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다.

관복까지 입고 한여름 날씨에 땀을 뻘뻘흘리며 수행하는게 애처롭다.

장우영은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다.

이원범은 이곳에서 지내며 농사일로 다져진 강인한 체력을 갖고 있었다.

역사에서도 철종은 키도 크고 체격도 장대한 인물이다.

철종으로 즉위한 뒤에도 한동안 잔병조차 없을정도로 건강했던 것이다.

이런 철종도 안동김씨등의 세도가문.

주변의 압력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건강했던 철종도 1864년에 사망한다.

19살에 왕에올라 14년간 왕으로서 스트레스를 받다가 32살의 나이로 세상을떠난 것이다.

설마 나도 32살에 죽는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철종이 사망한 원인중 큰것은 신경쇠약이다.

강화도에서 농사나짓던 범부가 하루아침에 왕이되었다.

현실은 왕이아니라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했다.

그정도 버틴것도 다행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역사속 이원범처럼 무기력한 삶을 살수는 없었다.

나의 앞길을 막는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21세기의 현대인이 얼마나 야비하고 잔인하고 냉혈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땀을흘리던 장우영이 질문했다.

“어디를 가시는지 언질을 주시면 소신과 군관들이 준비를 할것입니다.”

“그럴필요 없습니다. 다왔으니 말이지요.”

“여기는 어디입니까?”

“강화에서 지내는동안 신세를진 민초의 집입니다.”

“그렇군요.”

장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찾아온 장소.

몇시간 전까지 함께 산으로 도망치던 배동석의 집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동석은 이원범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다.

농사짓고 평범한 필부의 삶을 살아가던 이원범.

그에게는 역모죄로 유배왔다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주민들도 심지어는 이원범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주민들에게 이원범은 터부시되는 상대였다.

유일하게 이원범에게 손을내민 친구가 있었다.

배동석이다.

동석의 부모들도 처음에는 아들에게 이원범과 가까이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

그러나 동석은 이원범과 격식없이 지냈다.

나중에는 부모들도 이런 모습을보며 포기했다.

이후에 아들친구인 이원범에게 곡식도 나눠주고 편의도 제공해준 고마운 존재들이다.

지금 동석과 그 부모들에게 이원범은 하늘과도 같은 존재지만 말이다.

예조판서에게 신호했다.

장우영이 우렁찬 음성으로 말한다.

“이리오너라! 초옥에있는 백성은 당장 나오거라!”

“뉘십니까?”

문이열리며 중년아낙이 나온다.

동석의 어머니다.

두눈이 커지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서 한차례 소란이 벌어진다.

이번에는 그녀와 남편이 나왔다.

두사람이 앞에 달려와서 엎드렸다.

얼마전까지 동석의 아버지는 나를향해 이놈, 저놈하시던 걸걸한 분이셨다.

지금은 고개조차 들지못한다.

조선은 철저한 신분사회-

최상위 존재인 국왕이 그들앞에 있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절대 존엄-

“두분다 일어나십시요.”

“어찌 소인들이 전하를 마주대할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고개만이라도 드십시요.”

“망극하옵니다.”

두사람이 엎드린 자세에서 고개를 들었다.

긴장으로 굳어졌고 양손마저 떨리는 중이다.

“동석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조금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뒤뜰에 있는거 같습니다.”

“데려와 주십시요.”

“그놈이 전하께 천벌받을 짓이라도 했습니까? 그렇다면 이 늙은이를 봐서 용서해 주십시요.”

눈물까지 흘리며 애걸한다.

이런 전개를 바란것은 아닌데.

잠시 머쓱해진다.

* * *

“이놈아!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전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이냐?”

아버지에게 꿀밤을 얻어맞은 동석은 죽을맛이다.

뒤뜰에서 장작패던 동석은 아버지 손에끌려 내앞에왔고 엎드렸다.

하룻만에 나와 동석의 신분은 하늘과 땅처럼 멀어졌다.

수년동안 같이지낸 친구지만 주위에는 보는 눈도 많았다.

동석에대해 갖고있는 감정은 어디까지나 이원범의 기억이다.

다만 나에게는 저 친구가 필요했다.

이제까지 강화도에서 지낸 나에게 믿을수있는 동료다.

“동석아!”

“하명하십시요. 전하!”

“이전부터 한양을 구경하고 싶다고하지 않았더냐? 문득 그말이 기억나 소원을 들어주고자 왔느니라.”

“.....”

당황한 모습으로 동석이 나를보았다.

이전에 장난스런 대화에서 한양을 주제로 말한적이 있기는했다.

그러나 동석이 한양을 가고싶다고 한적은 없다.

눈치가 있다면 대응하겠지?

올려다보던 동석이 머리를 숙이며 조아렸다.

“전하께서 소신의 염원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황송하옵니다.”

듬직한 체격에 눈치도 제법이네.

나에겐 근육바보나 뇌가 근육으로된 인간은 필요없다.

방해만 되니까.

그런데 동석이는 대응하며 맞추는 순발력도 있었다.

이정도면 합격점이다.

“명일아침 떠날것이니 준비하여라!”

“성은이 망극합니다.”

동석이 고개를 숙였다.

부모들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그들에게는 내가 여기로 찾아와준 것만도 가문의 영광이다.

조선시대는 국왕이 모든것의 중심이다.

철종때에는 허수아비 국왕으로 전락했다.

세도가문과 권신들이 마음대로 조선을 망쳐놓았다.

그래도 백성들에게 임금은 하늘같은 존재다.

조선의 모든 국토.

조선안에있는 모든 백성들이 국왕에게 귀속된다.

국왕이 백성에게 죽으라고 명령하면 죽는시늉을넘어 팔이라도 잘라야하는 것이다.

평범한 백성들이 임금을향해 가지는 경외심이다.

* * *

뻑뻑-

곰방대를 물고있던 부친 배삼덕이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오늘낮 벌어졌던 상황들은 꿈만 같았다.

아들과 친하게 지내던 19살짜리 소년이 임금이 된것이다.

동석은 이원범보다 두살 많았다.

그럼에도 동석은 이원범을 동생아닌 친구처럼 대했다.

“그녀석! 일찍부터 귀인을 알아본 것인가?”

아들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출세와 입신양명을 위해서는 실력을 길러라.

실력보다 더 강력한 것이 인맥이라고 했던가?

아들은 조선최고의 존엄과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던 것이다.

배동석은 여전히 평범한 필부에 촌놈이다.

그러나 이원범은 조선의 임금이다.

“아부지! 안자고 뭐하십니까?”

“이놈아! 잠이오게 생겼냐?”

“한양으로 떠나면 남아있는 아부지와 어무니는 어떻합니까?”

“걱정마라! 동생이 있지않느냐?”

“꼬맹이 놈이 뭘 알겠습니꺼?”

“이놈아! 전하께서 우리집에 주신 하사품만해도 평생을 너끈하게 먹고살수 있다.”

배동석의 부모들만이 아니라.

이원범이 5년동안 지냈던 화동촌(花同村)에는 풍족한 하사품이 내려졌다.

화동촌에와서 이원범만 데리고 간다면 그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때문에 주민들은 임금의 은총을 받았다고하며 기뻐했다.

가장 큰 은총을 받은곳은 배삼덕의 집이다.

“이제부터 한양으로 가거든 여기에 대한것은 무조건 잊어라!”

“아부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놈아! 전하께서 너를 지목하셨다. 그것이 무슨뜻인지 모르겠느냐?”

“.....”

아버지의 말에 배동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양에는 전하를 노리는 수많은 모리배들과 간신들, 그리고 세도가들이 있다고 들었다. 너의 역활은 그들로부터 전하의 안위를 지키고 보필하는 것이다. 너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여기에있는 우리들이 죽는한이 있더라도 너가 해야할일은 전하를 보필하는 것이다. 무슨뜻인지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아부지!”

“제대로 깨닫고 있구나.”

“제가 가문을 일으켜 세울것입니다.”

“이녀석. 그건 너가 주상전하를 보필하는 역활을하면 알아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원범이, 아니 전하께서 수많은 포졸들과 군관들, 심지어는 대신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하실 줄이야. 전 오금이 저려서 죽는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국왕의 핏줄이다!”

배삼덕이 목소리에 힘을주었다.

이원범이 왕실직계는 아니고 방계지만 그래도 왕족이다. 강화도에서 5년동안 농사짓는 무지렁이 신세로 지냈지만 핏줄은 숨길수 없었던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