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로 이웃처럼 지내던 마을 주민들도 보인다.
그들이 한결같이 외치는 말이다.
“원범도련님! 산에서 내려오십시요.”
“한양에서 포졸들과 군관들이 마중하러 왔습니다. 도련님이 오지않으면 촌락민들이 치도곤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제발!”
주민들이 애걸하는 음성까지 들린다.
동석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긴 이해하기 힘들겠지.
역사를 몰랐다면 이 상황에서 무조건 도망치고 싶을것이다.
“저거 믿어도 되는거야? 우리를 함정으로 유인하는거 아냐?”
“우리를 잡을려 했다면 자신들이 있는곳을 드러내지는 않겠지.”
“어쩌면 그렇네. 너의 말을 듣고보니.”
동석이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도망갈 준비를위해 긴장한 모습이다.
동석이를 안심시켜 놓았다.
아래쪽에서 외치는 주민들 음성은 점점 커진다.
한차례 심호홉을 하였다.
강화도령이라니.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눈앞에 벌어진 현실이다.
죽으면 모든게 끝인줄 알았는데 또다른 기회다.
환생이라는것.
예전에는 누군가의 헛소리로 생각했는데.
내가 그것을 경험하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초자연적인 현상은 존재했다.
진실은 저너머에 있다는것.
불안감에떠는 동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래쪽을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숨바꼭질을 끝내야 하니까.
밀리터리 덕후가 조선왕이 되었다???
“영상대감. 이게 무슨 낭패란 말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기껏 약관도안된 청년을 데려가는 간단한 일에 어이없는 소동이 벌어질 줄이야.”
정원용이 수염을 만지며 씁쓸한 표정을 하였다.
지금 한양과 궁궐에서는 조정이 들썩이는 국상이 벌어졌다.
조선의 24대 임금인 헌종.
그가 후계도 남기지 못한채 23살이란 젊은나이에 사망해 버린것이다.
원래부터 몸이 허약한 상태였다.
그래서 주위에서도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헌종이 후사조차 남기지 못한채 일찍 죽을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
헌종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건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다.
순원왕후에게 헌종은 손자였다.
신정왕후는 헌종의 어머니였다.
순원왕후는 헌종이 후사라도 남기도록 노력했다.
몇년전에는 효정왕후 홍씨를 헌종의 계비가 되도록 간택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헌종은 허약한 몸에 병까지 생기면서 며칠전 유명을 달리해버린 것이다.
‘안동김씨 놈들. 나라가 혼란에 빠졌는데 이익만을 위해서 잔머리를 굴리다니.’
장우영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옆에있는 영의정 정원용의 안색을 살폈다.
한양에서 급파된 봉송행렬.
역사에서 강화행렬도라고 불리워질 봉송행렬의 목적은 한가지다.
강화도에서 헌종의 뒤를이어 새임금이될 이원범을 데려가는 것이다.
웃긴것은 따로 있었다.
정원용도 강화도령의 이름만 알고 있을뿐.
다른 정보들은 없다는 것이다.
이원범의 생김새나 나이도 제대로 몰랐다.
정원용이 순원왕후에게 내려받은 지시는 한가지.
강화도에 살고있는 이원범이란 인물을 한양까지 데려오라는 것.
간단한 일이 꼬여버린 것이다.
“영상대감. 소신이 살피지 못한 불충이옵니다.”
“괜찮소이다. 조정에서도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요.”
정원용이 조형복을향해 대답했다.
그렇게 말했지만 조형복의 실책이 없는건 아니다.
그는 강화유수라는 직책이다.
강화도에 관한 책임이 있는것이다.
처음에 정원용은 강화유수 조형복에게 이원범을 데려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조형복조차 이원범이 누구인지.
나이는 몇살이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몰랐다.
탐문을통해 촌락의 위치를 알아내고 찾아갔건만 이원범은 마을에 없는것이다.
주민들을 추궁해 이원범이 마을에 살고있다는 정보는 확인했다.
그런데 마을을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얼마후 주민들중 한명이 고하기를.
이원범이 누군가와함께 급하게 산으로 도망쳤다는게 전부였다.
그때에는 체통을 지키던 영의정 정원용, 동행한 예조판서 장우영도 황당할 정도였다.
그자리에서 화를 참지못하고 소리쳤다.
옆에있던 강화유수 조형복은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갔다.
얼마후 예판인 장우영이 천천히 말했다.
“아무래도 갑자기 군관들이 나타나자 겁을먹고 도망친거 같습니다.”
“하긴 그 집안에 벌어진 사건들을 본다면 어느정도 이해는 가지만 말이지요.”
정원용이 산쪽을 바라보았다.
남은것은 겁먹고 도망친 이원범을 달래서 데려오는것.
때문에 이원범에게 익숙한 주민들을 동원했다.
이것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정말로 도망치고 산속에 숨어 버린다면 낭패다.
조정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는 이원범을 새로운 국왕으로 정해놓고 준비중이다.
그것을 주도하고 있는건 안동김씨 세력이다.
배후에는 같은 안동김씨인 대왕대비가 있었다.
정원용이 삼정승의 하나인 영의정이라도 실패하면 큰 문책을 당할것이다.
어쩌면 스스로 사직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
정원용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며 초조하게 변했다.
그러던중 군관중에 한명이 달려왔다.
“대감! 드디어 찾았습니다.”
“이원범을 발견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군관의 보고를듣자 정원용과 예조판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했던 강화유수 조형복은 목을 몇차례나 잡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 * *
“본관이 이원범인데 무슨일로 찾아온 것인가?”
포졸들을향해 소리쳤다.
사극에서 포졸이라면 삼지창같은 무기를들고 다니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틀리다.
갑옷까지 입었고 허리에는 긴 장도를 차고있는 이들도 많았다.
나의 외침에 동석은 움찔거렸다.
조금전까지 산위에서 도망치던 상태였다.
이제는 포졸들을향해 소리까지 쳤으니 말이다.
후방에서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나왔다.
지위가 있는지 포졸들이 좌우로 갈라진다.
“귀관이 병졸들의 지휘관인가?”
“그러하옵니다. 원범 도련님!”
“그대의 직책과 이름은 무엇인가?”
“종사관 한민규라고 합니다.”
“종사관이면 훈련도감의 소속인가?”
“그러하옵니다.”
한민규가 고개숙이며 대답했다.
그가 흠칫하는게 보였다.
강화도 촌동네에서 지내던 내가 소속관청을 알아냈으니 말이다.
종사관은 중앙군에 속하는 다른 군영에도 있다.
그러나 차기임금을 데려가는 봉송행렬에 참가할 군관들이라면 먼저 선택되는게 훈련도감이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중앙군에서도 위치가 커지던 곳이다.
“훈련도감 종사관인 자네가 무슨일로 여기까지 온것인가?”
모르는 척하고 질문했다.
“한양에서 명을받고 왔습니다.”
“자네만 온것인가? 아니면 자네들의 상관이 더 있는가?”
“영상대감(영의정) 그리고 예판대감(예조판서)도 같이 오셨습니다.”
“조정의 높은 관료들이 여기까지 오다니. 기묘한 일이로군.
”.....“
종사관의 표정이 당황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인다.
이원범이 강화도에서 농사나 짓고있는 신세지만 본래는 한양에서 태어났다.
역사에도 이원범이 강화도에서 지낸 시간은 기껏해야 4년정도다.
본래부터 왕족의 피가 흐르는 인물.
종사관도 그것을 알기에 예를 표한 것이다.
”알겠네. 조정 신료들이 여기까지 왔다고 하니. 그리고 본관을 찾는다고 하니 무슨 연유인지 듣고싶군. 안내를 시작하게.”
“알겠습니다.”
한민규가 고개숙였고 안내를 시작했다.
동석이 불안한 표정으로 내팔을 잡았다.
“원범아! 어떻게 된거야?”
“무엄한 놈. 상것이 귀한분의 손을 잡는것이냐?”
“흐엑~ 아닙니다.”
동석이 포졸의 고함에 놀라면서 잡았던 팔을놓았다.
이것에대해 손을들어 말렸다.
아니였다면 동석이는 포졸들에게 끌려가서 몇대 얻어맞았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일이 전개될지 머리속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동석에게는 말해주기 힘들었다.
어차피 말해도 믿기 힘들테니까.
* * *
웅성거리는 소음들.
한민규의 안내를받아 도착하니 주민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이원범의 영혼이 육체를 떠났지만 기억들은 남아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원범의 영혼도 그대로 있는거 아닐까?
지금은 알수없었다.
정면으로 붉은색 관복을입은 중년사내가 보였다.
긴수염을 늘어뜨렸고 관복과 위세를보니 저 사람이 영의정 정원용으로 짐작되었다.
역사에서도 이원범을 데리러 한양에서온 봉송행렬의 책임자는 정원용이다.
옆에는 정원용을향해 고개를숙인 인물이 있었다.
관복을보니 예조판서로 짐작된다.
안내해온 한민규가 다가가서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