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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겁환상 외전- 진생환상(眞生喚想) -2 (21/21)

전겁환상 외전- 진생환상(眞生喚想) -2  

서현은 어느 때고 원할 때 희사의 몸을 안았다. 그것의 그의 집무실이었을 때도 있었으며, 동궁의 정원일 때도 있었다. 궁녀들이 희사를 보는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아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수치를 주어 더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희사는 점점 서현을 보는 시선이 무감각해져가며 타인을 보는 것같이 바뀌었다. 저자는 자신이 사랑한 서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미워할 수가 없었다. 희사는 반년 이상을 동궁에서 머물렀다. 변한 서현에게 자비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일되는 직장 사정에 의해 저도 모르게 그가 사정하기 전 몸을 뒤로 빼내었을 때 그는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웃었다. ‘그래, 내 것이 네 몸을 더럽히는 것이 끔찍한가.’ 그는 사정하는 대신 자신의 안에 소수(小水)를 했다. 희사는 그 기억을 떠올리자 온몸이 소스라쳤다. 뜨거운 액이 뱃속을 마구 울릴 때의 기분은 여전히 생각조차 끔찍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은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서현이 두려웠다. 언제고 자신의 몸을 정상이 아니도록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서현은 봄이 지나고 겨울이 올 무렵, 자신을 유곽에 팔아버렸다. 실컷 안은 이 몸뚱이에 질린 것 일지도 모른다. 희사는 서현에게 버림받으면서 안도했다. 유곽은 희사로선 처음 보는 환진의 새로움이었다. 자신과 같이 팔려온 유곽의 다른 이들은 매일같이 손님을 수명씩 받았다. 희사의 처소는 야화들의 침소에서도 멀리 떨어져있는 유곽의 뒤채에 마련됐다. 같은 유곽에 있으면서도 희사는 그 야화들도, 그리고 그들을 찾는 손님들도 보는 일이 드물었다. 희사가 만나는 자라면 유곽의 주인과,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지키는 무사인 해훈, 그리고 높은님이 전부였다. 자신이 이렇게 편할 수 있는 것은 높은님이 자신의 시간을 전부 사들였기 때문이라 했다. 희사는 그 높은님이 누구인지 몰랐다. 자주 올 때는 며칠에 한번 드물게 올 때는 보름에 한번 자신을 안으러 오는 자였다. 새까만 어둠속에서 높은님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희사는 어렴풋이 그 손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서현이었다. 

확신하지는 못했으나 얼굴도 한번 못 본 높은님이 자신을 큰돈을 들여 살 리가 없었다. 희사는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았다. 서현이 자신인 것을 알리기 싫어한다면 자신도 모르고 있어야 한다. 높은님이라 부르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에 희사는 서현이 다정했을 때를 떠올렸다. 불과 얼마 흐르지 않았으나 아주 오래전의 일 같았다. 그 때의 그는 독을 담고 웃지 않았다. 마냥 아름답기만 했다. 희사는 문득 자신의 감정이 멀게 느껴졌다. 서현을 사랑했는데도 그가 두려웠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그가 밉기도 했으며, 그렇지 않았으면 그가 죽었을 거란 사실에 가슴이 찢겨졌다. 희사의 두터웠던 마음은 어느 새인가 누군가 갉아먹고 없애버려 얇은 종이 한 장 두께도 안 되게 변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희사는 실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검은 장삼을 입은 자신의 호위무사가 다정스레 말을 건넸다. 희사는 마루에 앉아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그는 서현의 다정했던 때와 닮아있었다. 그의 모습이 아니라 말투나 행동이 비슷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직 날이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발끝까지 차가워지면 들어가겠다. 아직은 아니다.”

희사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쓰러지듯 옆으로 누웠다. 옆으로 누워서 본 세상은 희기만 했다. 유악의 산도 지금은 이렇게 새하얗겠지. 희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차가운 곳에서 자면 죽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뜬다 하던데. 희사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웃었다. 나무 마루 밑에 서있던 해훈이 위로 올라왔다. 희사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희사가 꼼짝하지 않자 들어 올리다시피 해 방의 따끈한 아랫목에 뉘였다. 해훈이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어주자, 희사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에선 어머니가 나왔다. 온몸에서 난자하게 피를 흘린 채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노려보기만 했다. 

내가 너 때문에 죽었는데, 너는 아직 살아있구나. 그렇게라도 삶을 유지하니 만족하느냐. 서현의 품에 안겨서 그 따위 취급을 당해도 만족하느냔 말이다. 

여자는 화를 내다가 곧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 어미는 괴롭다. 너무 괴롭게 죽었으니 어서 네가 와 나를 위로해주어야 하지 않느냐. 희사가 신음했다. 자신의 두터운 마음을 갉아먹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해훈은 희사의 낮잠을 지켜보며 방에 머물렀다. 한가한 날이었다. 황궁에 갈 일도 없었고, 청영이 찾지도 않았다. 이제 희사는 해훈이 현세에서 기억하는 모습과 완전히 같아졌다. 해훈은 희사를 볼 때마다 아주 어렴풋한 옛일을 떠올렸다. 차가웠던 그의 모습. 지금과는 다르다. 현세에서의 희사는 누구보다 무뚝뚝하고 차가웠지만 이곳의 희사는 아니었다. 조금만 손에서 놓치면 어디론가 금세 흐트러져 버릴 만큼 위태했다. 

“어, 어머…어머니.”

곤히 자는 것 같던 희사가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 한겨울에 식은땀을 송글송글 맺혀가며 신음을 했다. 해훈은 희사의 몸을 한차례 흔들었다.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리기에 그의 작은 몸을 안아들었다. 희사는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잠에서 깨었다. 희사는 자신을 안고 있는 해훈을 보고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

시간이 지나갈수록 죄책감은 잊히지 않고 불어났다. 모두가 죽었는데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것이.

“장은 언제 서지?”

“달포가 지나면 입춘이 옵니다. 장사꾼들도 그때가 돼야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군.”

희사는 장이 들어설 때만 유곽에서 나갈 수 있다. 그것은 유곽의 모든 야화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신구와 옷감을 사기 위해 유곽을 나갈 때는 꼭 호위를 대동해야한다. 희사는 유곽의 누구보다 장이 서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을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희사는 해훈의 품에서 벗어나서 다시 아랫목으로 기어들어갔다. 달포라. 먼 시간이었다. 

        

황궁의 충신들이 희사의 존재여부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바람에 서현은 본의 아니게 희사를 유곽으로 보내게 됐다. 역모에 가담한 자를 살려두는 것은 본보기에 좋지 않다며, 시끄럽게 조잘대던 것들이 희사의 신분을 야화로 떨구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굳이 유곽으로 보내지 않고, 그들을 입을 막고자 했으면 충분히 행했을 텐데 그러하지 않았다. 서현 역시도 희사를 계속 곁에 두면 언젠가는 그를 완벽하게 망가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정하게 해주고 싶다. 허나 배신감에 또 다시 눈이 멀어버린다. 시간이 가도 이율배반적인 감정은 서현의 안에서 식지 않았다. 

희사를 유곽으로 보내고 가장 믿을 만 한 자를 뽑아 희사의 곁에 두어야 했는데 그럴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럴 때 서현을 찾아온 것이 해훈이었다. 서궁에 유폐되다시피 했던 2황자는 어느 날부터인가 서현을 포함한 몇몇 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 후로도 서현과 해훈에게 형제간의 의리가 생겼을 리는 없었다. 단지 흑의대라는 무리를 이끄는 해훈이 서현의 밑에서 몇 번 일을 도와주었을 뿐이다. 그것도 값을 치러가면서 말이다. 해훈은 직접 희사의 호위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희사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서현이 절대 허락지 않았을 텐데, 그는 희사가 황궁에서 거주하는 동안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내비쳤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서현은 해훈을 완벽히 믿지 않았다. 단지 해훈이 그러고자하는 꿍꿍이를 알기 위해 희사의 호위를 맡도록 허락한 것뿐이었다. 황궁을 나가 밖을 함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위치를 원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희사에게 딴 마음이 있는 것인지. 사실 그 어느 것이든 서현에겐 불만족스러웠다. 여태껏 서현이 해훈과 그의 어미인 제 1황비를 살려두고있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위협을 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서현은 유곽의 희사를 품으면서 희사가 자신인 것을 모르기에 다정할 수 있었다. 서현은 이제 희사도 믿을 수 없었다. 또다시 마음을 이용당한다면 그의 혀를 뽑고, 팔 다리를 자른 뒤 황궁의 깊은 곳에 숨겨놓을 생각이었다. 그런 일을 사전에 막으려면 희사에게 전처럼 밑도 끝도 없는 총애를 주어선 안됐다. 그러니 그가 모를 동안에는 얼굴 없는 높은님으로서 얼마든지 다정할 수 있다.

서현은 그런 와중에 자신이 한 가지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사가 유곽에서 마음을 둘 곳은 아무데도 없다. 그는 얼마 전까지 귀족이었으며, 가족이 전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자였다. 아무것도 없는 자가 매달릴 것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일뿐이었다. 바로 해훈. 허나 서현은 급히 나서지 않았다. 아무리 매달릴 곳이 필요하다해도 희사가 해훈을 사랑할 리가 없다 여겼다. 그것이 자신의 착각일지라도 확신해야했다.

서현의 예상대로 희사는 해훈에게 마음을 점점 열어갔다. 하지만 쉬이 사랑하진 않았다. 희사는 이제 그 누구를 사랑하기가 두려웠다. 

다라락- 

바닥과 마찰하는 나비의 소리가 예뻤다. 봄이 오고 처음 들어선 장터에서, 해훈이 선물해준 나비 머리 장신구를 이리저리 굴렸다. 자신이 처음부터 해훈을 사랑했더라면, 아무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를 죽일 필요도 누구의 편에 설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자신이 유곽에 오지 않았다면 해훈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와 가정해 보아도 무의미할 뿐이다. 희사는 며칠 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해훈을 생각했다. 희사는 붉은 나비를 보며 위로 받고 있었다.

해훈은 그 시각, 청영의 부름으로 황궁에 가있었다. 청영은 아들과 함께 할 작은 다과를 준비시켰다. 서궁은 오랜만에 나타난 해훈의 출현에도 별다른 소란스러움이 없었다. 여전히 해훈이 2황자인 것을 아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어서오거라.”

청영은 팔을 벌려 아들을 환대했다. 해훈은 청영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해훈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들을 보며, 이제야 조금 사람 같아졌다 생각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던 해훈이 변한 것이다. 청영은 그것이 희사로 인한 변화임을 알았다. 

청영은 오랫동안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던 아들의 비밀을 캐내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 때문에 해훈이 후생에서 넘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혔어야했다. 이기적이라 해도 청영은 자신의 전부인 아들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좀 어떠하더냐.”

“여전히 지켜줘야 할 것 같습니다.”

청영은 누구에게서? 라는 말을 삼켰다. 서궁이라 하더라도 황제의 귀와 눈이 있기 마련이다. 그전엔 청영의 걱정이 아들의 은둔생활이었다면 이번엔 서현과의 마찰이었다. 분명 서현은 희사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황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겐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희사를 살려두는 것도 모자라 황궁의 여러 곳에서 그를 품었다. 모르는 자가 바보일 것이다. 청영은 다기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에게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왜 입니까.”

해훈의 무덤덤한 대꾸에 청영이 들었던 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해훈이 자신의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황제폐하께서 그를 놓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폐하에게서 벗어나고자한다면 저는 그의 뜻을 따를 겁니다.”

해훈의 당돌한 말에 청영의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된다! 내가, 내가 너를 어찌……”

청영은 어찌 다시 살렸는데. 라는 말을 애써 속으로 삼켰다. 서현과 마찰하게 되면 해훈이 죽을 수도 있다. 아들의 정인이 될 자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겐 해훈이 사는 것이 더 중했다. 

“혹,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닐 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를 웃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인 걸 모르는 것이야. 청영은 안타까운 눈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해훈은 청영과 더는 할 말이 없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영이 닫혔던 입을 열어 그를 잡으려 했지만 해훈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더 먼저였다. 

해훈은 별일 없이 황궁에 오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다. 좋던 싫든 황궁을 찾은 이상 서현을 만나는 것이 관례였다. 청영이 부르지 않았으면 해훈은 황궁을 한참동안 찾지 않았을 것이다. 청영 역시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이라면 시간만 낭비했다. 

서현은 하루에 잠자는 시간과 만찬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서현을 만나려면 그를 수소문 하는 것보다 집무실로 직접 가는 것이 현명했다. 해훈이 집무실의 앞에 서자 사황은 해훈이 도착했음을 고했다. 집무실 안은 웬일인지 한가해보였다. 탁상위의 서류들이 평소의 절반도 채 안되었다. 

“근 보름만의 방문이지?”

서현이 웃었으나 뼈가 있는 말이었다. 

“폐하를 이틀 전에 뵈었으니 보름이 아닙니다만.”

서현은 해훈의 말대로 유곽을 찾은 이틀 전 그를 마주했었다. 그 날도 희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서현이 희사를 부드럽게 안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여전히 숨죽이며 서현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안 그래도 부르려 하던 찰나였다.”   

용건이 있다는 서현의 말에 해훈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북방의 제후 규성견이 죽었다. 네가 내 대신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나.”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쭙잖은 충고겠지만 그의 아들 규태휘를 우습게보지 마라. 네가 황손인 것을 알려서 좋을 것도 없으니 그저 내 뜻을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황족중 하나가 북방에 위로 차 방문할 것이 아니라면, 굳이 해훈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서현은 희사의 곁에 해훈이 오래 머물수록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더해갔다. 이 초조함이 극에 달하기 전에 희사를 지키는 호위무사를 갈아치워야겠다 생각했다. 서현은 더는 시간을 둘 필요도 없다 여겼다.

“해훈… 너는 왜 희사를 곁을 지키고 싶어 했지? 아무것도 원치 않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네가, 그것도 내게 직접 요구했다는 사실이 궁금하군.”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라. 내게 안기는 희사를 보면서도 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네 눈빛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아니면 감정을 내게 감쪽같이 숨겨온 것인가?”

서현도 청영과 같이 자신이 희사를 사랑하느냐 돌려 묻고 있었다. 해훈은 답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명확히 정의를 내리지 못한 감정에 대해서.

“폐하께서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해훈은 마음에도 있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서현은 소름끼칠 정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었다. 마치 해훈의 드러나지 않은 마음을 비웃는 것 같았다. 

“뭐 좋다, 초조하면 할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법이지. 바로 북방으로 출발토록 하라.”

탁상의 서랍에서 서신을 꺼내 해훈의 앞으로 밀었다. 해훈은 한걸음 다가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북방에 다녀오려면 일주일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동안 서현은 호위 문제를 천천히 생각해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서현은 검지를 틀어 턱을 톡톡 두들겼다. 집무실에서 흑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 * * 

해훈이 자리를 비운적은 꽤 있어도 이렇듯 긴 시간 돌아오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희사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야화의 호위무사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했다. 가끔씩 다른 일도 한다했는데 아무래도 칼을 쓰는 직업이다 보니, 혹시 어디 다친 것은 아닐지 걱정이 앞섰다. 해훈이 돌아오지 않은 날 동안 높은님은 전과 다름없이 자신을 찾았다. 하루는 자신을 안았으며, 그리고 또 하루는 그저 껴안고 잠을 청하기만 했다. 자고 일어나면 늘 식은 이부자리만 남고 그는 사라졌다. 

희사는 이른 아침에 잠시 깨었다 다시 잠이 들었다. 분명 나비 머리 장신구를 침상 옆에 놔두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어딘가에 있겠지 하며 꿈뻑꿈뻑 존 것이 벌써 한낮이었다. 일주일이 넘어서 돌아온 해훈이 희사를 깨웠다. 나비 장신구를 방안 어디선가 찾았는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희사는 무사히 돌아온 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해훈의 말에 따르면 오늘부터 축일이 시작된다 했다. 유곽에 있다 보면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다. 손님을 받고, 자고 싶을 때자며 장에 나가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축일의 시작이라 함은 그 일로부터 벌써 두 해가 지났다는 소리다. 모두가 죽은 후 맞는 두 번째 축일이다. 희사는 문득 유악산에 오르고 싶었다. 축일엔 늘 유악산에서 불꽃을 봤다. 서현과 함께. 

희사는 점점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를 아직도 그리워했다. 그 때의 서현을 아직도 그리워하며 떠올렸다. 부모님의 제삿날이나 다름없는 날에 그를 먼저 떠올렸다. 죄책감에 자신을 책망했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머릿속을 맴돌던 이야기를 건넸다. 

“유악산을, 산을 오르고 싶다.”

해훈은 뜻밖에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다. 망설임 없이 한달음에 유악으로 데려가 주었다. 희사는 장이 서지 않았는데도 거짓을 고하고 유곽을 나서는 것이 두려웠다. 만일 들킨다면 자신보다 곤욕을 치를 것은 해훈쪽이었다. 그럼에도 유악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희사는 해훈에게 감사했다. 해훈이 아니었으면 유곽에서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불편한 신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업고 산을 올랐다. 

해훈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자객의 칼날을 대신 맞았을 때 서현은 이렇듯 자신을 업고 유악산을 내려갔다. 눈물이 흘렀다. 해훈의 어깨가 축축이 젖었지만 그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희사는 서현과 함께 불꽃의 구경했던 절벽에 섰다. ‘누군가가 그러던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다음 생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그 날의 서현이 말했다. 희사는 딱딱 한 나무 신을 벗었다. 절벽 밑을 보며 희사가 쓸쓸이 중얼거렸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으로 말입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태어난다 했다.”

“그럼 다음 생엔 쥐로 태어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뛰어내리면 되는 겁니까?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해훈의 말에 쓰게 웃었다. 

“그 이야기는 누가 해주었습니까?”

“글쎄…. 모르겠다.”

서현, 난 왜 당신을 완벽하게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인지. 차라리 내가 당신을 정말 배신하려 했고, 증오했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거야. 차라리, 그래 차라리. 희사는 뒤에 선 해훈을 바라봤다. 

해훈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희사는 맨발로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갔다. 해훈은 희사가 다칠 새라 다시 번쩍 그를 업었다. 해훈은 북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유곽부터 찾았다. 서현이 알게 된다면 길길이 날뛸지도 모르는 일이다. 해훈은 올라온 것보다 더 더디게 산길을 밟았다. 해훈은 그의 쓸쓸함 속에서 진정한 희사의 웃음을 보고 싶었다. 자신을 보며 슬프게 웃는 얼굴 따위 말고, 정말 행복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해훈은 등 뒤로 느껴지는 희사의 온기에 가슴언저리가 뜨거워졌다. 현세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희사만이 자신의 가슴속을 파고들어왔다. 해훈은 황궁에서 처음 희사를 본 순간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어졌다.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닐까, 원래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늘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를 위해, 그의 웃음을 위해 살아가고 싶었다. 그랬기에 늘 희사의 앞에선 밝게 있을 수 있었다. 

해훈은 유곽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북방에 가 있는 동안 계속 생각해왔던 것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희사도 서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늘 제자리다.

“희사님, 난 희사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함께지 않느냐.”

희사가 뜬금없는 해훈의 말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희사도 해훈이 자신을 연모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긴 했다. 확신하진 못했다. 그리고 자신은 해훈에게 마음을 주긴 했으나 그것은 사랑이라고 하기엔 먼 감정이었다. 

“희사님은 나를 믿고 따라올 수 있으십니까?”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둘이 도망가자는 말입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둘이서 말입니다.”

해훈의 말에 희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혹적이고 달콤한 말이다. 도망친다면, 그의 말대로 아주 멀리 떠나버린다면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서현 당신을 향한 마음도 사라지는 것일까…. 

희사는 무사히 도망치지 못할 시 해훈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임을 알았다. 서현이 자신들을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희사님은 나와 함께 하고 싶지 않습니까?” 

“함께…. 나도 너와 함께하고 싶다. 행여나 붙잡히게 되면 넌 죽을 것이다. 난 그래서 싫다. 안 된다.”

해훈 마저 잃을 순 없었다. 하지만 해훈은 완강한 태도로 희사를 설득시켰다. 희사는 이미 한참이나 마음이 기울어있었다. 힘들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다. 해훈과 함께 도망친다면 어쩌면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이토록 이기적인 인간이 자신이란 말인가.

“지금 당장 답을 달란 것이 아닙니다. 나흘 후 자시에 유곽의 뒷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행여 오지 않는다면 난 희사님을 전처럼 호위할 것이고, 오신다면 아무도 찾는 않는 곳으로 희사님과 도망가겠습니다. 혹 오지 않으신다하여, 전처럼 희사님을 호위한다 해도 제 마음은 괴로울 것입니다.”

희사는 해훈이 왜 자신을 데리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두려웠다. 해훈은 희사의 얼굴 표정을 보며 그도 도망치고 싶어함을 깨달았다. 희사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따위는 상관없었다. 부족한 만큼 자신이 채워주면 그만인 것이다. 해훈은 희사의 상기된 뺨을 다정히 쓸었다. 희사는 그 손길 속에서 과거의 서현을 엿봤다. 

해훈은 희사를 유곽으로 보낸 뒤 재빨리 황궁으로 향했다. 북방의 규태휘가 보낸 감사 서신을 서현에게 전달해야했다. 평소와 같이 달렸다면 유곽에서 황궁까지 사흘이 걸렸을 테지만, 잠도 쪼개가며 달린 터라 이틀 만에 황궁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해가 기울고 나서야 서현은 황궁의 내실에 도착했다. 복면을 쓴 채로 서현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 문 앞을 경비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폐하는?”

“동궁에 계십니다.”

해훈은 다시 내궁을 나서서 동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현이 아직 동궁으로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해훈은 동궁의 앞에서 경비에 의해 입실을 저지당했다. 

“폐하를 뵈러왔으니 비켜라.”

“들라 이르라.”

경비 뒤에 얼굴만 빼곰히 보이는 서현의 측근 사황이 쉰 목소리를 냈다. 무엇인데 서현의 수하들이 다 동궁에 배치된 것이지. 해훈은 앞장 선 사황을 뒤따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사황이 문득 선 곳은 희사가 동궁에서 거주했던 황후의 방이었다. 문은 이미 해훈이 올 것을 알았는지 활짝 열려있었다. 다홍빛 침상에 서현이 앉아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화려한 다홍은 가히 장관이라 할 정도로 멋들어지게 어우러졌다. 

“고단할 텐데 나를 일찍도 찾으셨군.”

“북방 공자의 서신입니다. 방문한 랑쿤의 태자도 폐하께 안부를 전했습니다.”

해훈에게서 서신을 건네받은 서현은 그것을 읽어보지도 않고 침상위에 내던졌다. 서현은 일주일간 생각했던 것도 보람 없이 결국엔 같은 결정을 선택한지 오래였다. 

“해훈, 이제 희사의 호위에서 물러나도 좋다. 다시 그를 황궁으로 불러들이기로 결정했으니.”

해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기가 막힌 우연이다. 도망가기로 결심한 날 희사를 다시 황궁으로 데려오겠다니. 

“알겠습니다. 유곽의 제 신변을 정리토록 하겠습니다.” 

해훈은 서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했다. 서현은 다시 이방에 돌아올 희사를 그리듯 침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서현의 앞에선 인내심을 발휘해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서궁으로 향하는 해훈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도 급했다. 행동력은 자신만큼이나 서현도 재빨랐다. 그러니 서둘러야했다.

해훈은 서궁의 궁녀들이 뭐라 고할 새도 없이 청영의 방으로 들이 닥쳤다. 청영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던 궁녀들이 깜짝 놀라 빗을 떨어뜨렸다. 청영이 가벼운 손짓으로 그녀들을 물렀다. 해훈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복면의 흔들림이 전에 없이 잦았다. 

“어머니.”

청영은 장신대에 앉은 상태로 입을 벌렸다. 후생에서 온 해훈은 한 번도 청영을 어머니라 부른 적이 없었다. 청영이 너무 놀라 손을 떨며 해훈에게 다가갔다. 혹시 아이 때의 기억이 돌아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허나 그것은 지나친 억측이었다.

“떠나겠습니다. 제가 떠날 때까지만 흑의대가 저를 따르게 해주십시오.”

“이미 그들은 너를 따르고 있지 않느냐.”

“그들을 이끌 뿐이지 명령은 내릴 수 없습니다.”

청영은 차가운 손으로 아들의 눈가를 훑었다. 떠나겠다니. 청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희사와 함께 떠나겠습니다.”

“안 된다. 안 돼.”

“실은 저는 이곳의 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내세라 부르는 후생에서 왔습니다. 제가 미쳤다 여기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저는 이제 그가 슬퍼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를… 그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제 감정에 충실치 못해서 이 모든 상황이 증오스러웠기에 한치 앞도 보지 못했습니다. 인정한 이상 그의 웃음이 보고 싶습니다.”

해훈은 태어나 처음으로 그의 감정을 천하에 외치고 있었다. 청영은 그런 해훈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었다. 청영은 뭐든 해훈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의 품에서 떠나가는 것일지라도.

“절대 죽어선 안 된다. 네가 선택한 이상 꼭 행복해야 한다.”

해훈은 청영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를 한번 껴안았다. 청영은 해훈의 가슴을 미약한 손으로 밀었다. 이리 바삐 온 것을 보니 시간을 지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해훈은 청영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크게 호령했다.

“흑의대를 소집하라!”

제각기 수련과 서책을 읽던 흑의대들이 순식간에 서궁의 뒷손원에 몰려들었다. 청영은 흑의대의 최고 노장 감인령에게 마지막 부탁을 전했다. 흑의대중에서도 감인령만이 해훈이 흑영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청영이 직접 해훈을 흑의대에 소속시키면서 감인령에게는 사실을 전했던 것이다. 감인령은 청영과 흑영의 아이인 해훈을 누구보다 아꼈다. 그녀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해훈의 부탁이라면 뭐든 혼자서도 따랐을 것이다.

“나는 오늘 이후로 흑의대의 수장이 아니다.”

해훈의 충격적인 발언에 흑의대 전원이 술렁거렸다. 그렇다면 원래 수장이었던 감인령이 다시 복귀하는 것이 된다.

“그대들은 마지막으로 내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한다. 나는 오늘, 황성(皇城)떠나 북방으로 향한다. 그리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북방으로 향할 동안 그대들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내 마지막 부탁이다.”

해훈은 자신의 욕심을 차리고자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미안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희사의 존재가 더욱 커져버렸다. 흑의대는 술렁술렁 거리더니 청영의 모습을 보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청영은 침묵했으나 감인령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청영도 허락한 이상 흑의대는 더 이상 토를 달 것이 없었다. 그저 따를 뿐이다. 해훈이 무엇 때문에 도망가는 것인지 다른 흑의대원들은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이유를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해훈은 감인령만을 따로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 감인령의 표정도 역시 좋지는 못했다. 아예 떠나겠다는 해훈의 말이 못내 섭섭했다.

“북방으로 가셔서 또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북방으로 도망쳐봐야 환진의 손바닥인 것을 알았다. 해훈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랑쿤으로 갈 것이다.”

감인령이 눈을 찢어질 듯 키웠다.

“랑쿤이라니요! 그곳이 더 위험합니다. 환진의 치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치안과 관련되어 위험에 처할 자던가.”

해훈의 말이 맞았다. 해훈은 웬만한 장수보다 더 뛰어난 무예를 자랑했다. 해훈은 가만히 서궁에 틀어박혀서 밥만 축냈던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감인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해훈은 어릴 때부터 서궁에 칩거했지만, 게으르게 지내는 법은 없었다. 

“대체 왜 도망을 가시는 것입니까!”

감인령은 일국의 황자인 해훈이 도망가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지 못했다.

“희사와 함께 환진을 뜰 것이다.”

“희사? 희사라면 그 유악 제후의 공자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은 이미 황제폐하께서……”

감인령이 말을 멈췄다. 해훈의 씁쓸한 웃음에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서현에게서 희사를 데리고 도망치겠다는 것이었다. 감인령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서현이 황제인 것은 허울뿐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 무서운 자였다. 자비는 필요한 자들에게만 적당히 베풀었으며, 간신들에겐 오로지 죽음만을 선사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있어선 성군이었지만 귀족들에겐 폭군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도와 달라 청한 것이다. 나 혼자선 어디든 갈 수 있으나 희사를 데리고 가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갑자기! 갑자기 왜 그분께 마음을 홀리신 것입니까!”

“갑자기가 아니다.”

해훈은 더는 희사에 대해 이야기를 섞고 싶다 않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

“나는 바로 유곽으로 가겠다. 황제가 먼저 사람을 보냈을 수도 있으니…… 만일 그렇다면 전면전은 피할 수 없다.”

“청영님 생각은 안하십니까. 흑의대가 황제폐하와 맞서게 된다면 서궁은 초토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흑의를 입어선 안 된다. 서궁에서 한두 명씩 평상복을 입혀 내보낸 다음 이틀 후 자시까지 유성주의 마을로 모이게 하라. 그 후엔 내가 직접 그대들을 찾도록 하겠다.”

해훈은 그 말을 끝으로 감인령을 내보냈다. 감인령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해훈은 탁상 안 서랍에 담겨있던 검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금주화가 수십 개나 담겨있었다. 금주화 한 개면 일반 백성들도 일하지 않고도 반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양이다. 해훈은 안에서 짤랑거리는 그것을 가슴 안속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일이 틀어지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서현은 희사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해훈은 차라리 이 마음을 포기할까 싶었으면서도 서현에게 억매인 희사를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해훈은 허리춤에 매달린 칼집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서궁의 마구간으로 달려가 천둥이를 불렀다. 똑똑한 놈이라 주인의 소리에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해훈은 말의 안장에 올라타 최대한 속도로 유곽을 향해 달렸다. 서궁은 청영이 주인으로 들어선 이후 최고로 분주한 한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해훈이 유곽에 도착한 것은 약속한 날의 자시가 되기 바로 전이었다. 희사의 방에 촛농이 밝혀있었다. 아직 유곽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서현보다는 해훈의 행동이 더 빨랐다. 해훈은 한숨을 돌리며, 유곽의 뒷문에서 미리 희사를 기다렸다. 헌데 그 순간 머릿속이 싸해졌다. 희사는 자신에게 도망가겠다 확답을 주지 않았다. 만일 그가 정말로 나오지 않는다면? 두려워서, 또는 서현에게 그대로 얽매어 있기를 원한다면? 생각해보니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기가 막혔다. 

서현이 희사를 황궁으로 다시 부르겠다는 말에 앞뒤 안보고 행동을 개시했다. 해훈은 그래도 희사를 기다리기로 했다. 만일 그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초조함이 극에 달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바스락거리는 인영의 소리에 해훈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둠속에서도 알아 볼 수 있었다. 분명 희사였다.

“오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이제 이곳에 있기 싫다. 너와 함께 가고 싶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다.” 

희사는 이기적인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해훈은 희사를 천둥이의 안장에 들어 앉혔다. 희사는 낙마한 경험이 있어 말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희사가 해훈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말은 짙은 어둠속을 한낮의 거리처럼 거침없이 달렸다. 끝이 없는 어두운 밤길은 간간히 마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홍등만이 반짝거렸다. 푸륵거리는 말의 숨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말이 속도를 줄였을 때 희사는 말이 힘에 부쳐 조금 쉬려는지 알았다. 그만큼 쉴 새 없이 달린 것이다. 거센 바람에 감을 수밖에 없었던 눈을 뜨자 유악산의 비석이 보였다. 놀라운 따름이다. 마차를 타고 올 때보다 곱절은 빨랐다. 해훈은 유악산을 넘어 도망간다 했다. 따라 나온 희사는 그냥 해훈에게 맡길 뿐이었다. 요깃거리를 사러 해훈이 마을로 내려갔음에도 희사는 그저 천둥이라는 말과 함께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해훈의 지시대로 유성주 마을엔 각기의 의복을 입은 흑의대가 무리지어 있었다. 어두운 밤이기에 그 무리들이 눈에 띄진 않았다. 해훈은 제각각 모인 흑의대를 전부 유악산으로 이동시켰다. 희사와 자신이 산을 넘는 동안 혹시라도 따라올 황궁의 경비를 막아야했다. 자신들이 유악산을 타고 북방으로 갈 것임을 서현이 예견할 가능성은 적었다.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했다. 해훈은 불안한 마음에 요깃거리는 하나도 구하지 못하고, 희사가 있는 산의 입구로 다시 향했다. 

        

서현의 사람이 유곽에 도착한 것은 해훈과 희사가 도망간 후 한끝차이였다. 서현은 이미 해훈에게 붙인 간자와 매를 통해 그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도 해훈과 희사가 유악산의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까지. 유곽으로 향하던 방향을 틀어 그들을 잡으러 나서는 서현이 낄낄댔다. 희사, 이렇게 도망치면 안 되지. 나는 아직 분을 풀지 못했는데, 희사 네가 다시 배신을 하면 나는 또 어떤 괴물이 되야 하는 것이지? 서현의 웃음소리는 울음과도 닮아있었다. 서현의 뒤를 따르는 수하들은 황제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저 말발굽 소리만 지축을 뒤흔들었다. 

서현과 유악산으로 향하는 직속 근위대 다섯은 황제의 그림자였다. 황제는 어디든 혼자서 이동할 수 없었으며, 늘 그들을 대동해야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들은 어딘가에 존재했다. 물론 이번엔 서현이 그들만을 대동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급작스런 출타에 바로 따라나선 자들은 직속 근위대뿐이었지만, 나머지 황궁에 남아있던 근위병들은 채비를 마친 뒤 사황의 지시에 따라 바로 유악산으로 출발했다. 

서현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싸늘했지만 그 안은 용암이 끓어오르는 것보다 뜨거웠다. 희사 혼자 유곽에서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희사를 꼬여낸 가장 유력한 자는 해훈 단 하나다. 어쩌면 서현은 해훈이 이 지경까지 일을 만들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나라에 직계 황손은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해훈을 명분 없이는 죽일 수 없으니 친왕(親王)의 자리만 하사한 뒤 가만 둔 것뿐이다. 해훈이 이끄는 흑의대도 부릴 때는 편하나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다면 골치 아파질 무리였다.

저 멀리 새까만 어둠속에 먹힐 듯한 작은 인영이 보였다. 뒷모습만으로도, 그 향기만으로도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자다. 자신들이 오는 말발굽 소리에 급해진 희사가 말에 올라타려 했다. 서현은 달리는 말 위에서 석궁을 조준했다. 희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가 올라 타려하는 흑마(黑馬)를 향해 거침없이 화살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표물에 꽂혔다. 엉덩이에 화살을 맞은 흑마는 괴이한 짐승의 소리를 질렀다. 희사를 땅에 내팽개쳐두고 화살을 맞은 고통을 덜고자 완벽한 어둠속으로 달려 사라졌다. 멀어지는 흑마와는 반대로 서현은 희사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꽤나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군.”

서현이 이죽였다. 바닥에 엎어진 희사는 떨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했다. 서현은 주변을 둘러 다른 한사람의 인영을 찾았다. 어둠속에 희사만 달랑 남겨져 있을 뿐 해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 희사 너 혼자 도망갈 리가 없다!

“왜 그런 표정이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나?”

서현은 희사가 해훈과 함께 도망치려 한 것이기를 바랐다. 정녕 자신이 끔찍해서 홀로 도망가려 한 것이라면…… 서현의 눈시울이 뜨겁게 타올랐다. 제발, 나를 또 배신하려 하지 마. 이젠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제게, 제게 이러는 이유가 무어십니까.”

“내 소유의 물건이 도망갔는데 당연히 쫒아야하지 않겠어?”

“나를 유곽에 팔았으니 나는 폐하의 소유가 아닙니다.”  

“네가 유곽의 것이라고? 대체 누가 그러더냐. 유곽에 판 것도 나이며, 다시 널 산 것도 나 하나뿐인걸 여태껏 몰랐단 말이냐.” 

희사는 예감하고 있었다. 서현이 알리지 않는 이상 자신도 모른다 여길 뿐. 차라리 이대로 자신을 보내주면 서현 당신도 편해질 텐데. 서로 사랑했음에도 이제는 그 감정이 변질돼 각자의 심장만을 갉아먹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아니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이겠지. 자신처럼. 

자신을 놓지 않을 것이라면 어서 빨리 어디로든 데려가 주는 것이 좋았다. 해훈이라도 오게 된다면, 자신 때문에 또 죽음을 맞이할 자가 늘어나게 될 것이다. 희사의 마음을 배반하듯 뒤에서 여유로운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서현은 그 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서현은 속으로 웃었다. 다행이다 희사, 저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내가 너를 어찌했을지 모르니.

“말의 근육이 찢기진 않았나보군.”

“아무리 폐하라도 천둥이에게 활을 쏘신 건 너무하셨습니다.”

서현이 해훈의 등 뒤를 봤다. 따라오는 자는 없다. 허나 저자가 아무 준비도 없이 희사를 도망시켰을 리는 만무하다.

“해훈, 그 동안 야화의 호위 따위로 있느라 참으로 수고해주었다.”

서현이 비웃으며 말을 건넸다. 해훈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아닙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유곽의 제 신변을 정리하는 사이, 조금 장난 끼가 발동되어서 말입니다.”

“장난 끼라니?”

“저 야화가 저를 너무 믿기에 조금 골려준 것뿐입니다. 이년을 같이 지냈는데 저 역시 잠깐의 재미라도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저 자가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말입니다.”

처세술 한번 좋다. 과연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둘이 도망가려 한 사실을 자신에게 들킨다면 자신이 앞뒤보지 않고 달려들 것이라 생각한 것인가? 서현은 가늘게 눈을 떴다. 

“저 자는 내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재미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해훈 역시 믿는 구석이 있는 듯 생각보다 덤덤히 행동했다. 흑의대가 이곳어딘가에 있거나 오고 있는 중일 가능성이 컸다. 해훈의 저 여유작작한 표정을 보아하니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서현 역시 황궁의 근위병들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해훈은 서현과의 전면전을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흑의대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 대체….”

희사는 저 둘이 대체 어찌 아는 사이인지 짐작키도 힘들었다. 해훈은 그저 야화의 호위무사였다. 서현과는 아는 사이일 리가 없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희사님. 아니 이젠 존대할 필요가 없나.”

해훈은 차갑게 말하며, 희사가 자신의 본심을 알아주길 바랐다. 단지 서현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임기응변임을. 틈이 보인다면 희사를 데리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해훈의 뜻과는 다르게 희사의 머릿속은 폭풍이 한차례 쓸고 지나간 마냥 뒤죽박죽이었다. 해훈이 왜 서현을 알고, 서현 역시 해훈을 알고 있는지. 혹시 처음부터 해훈이 서현의 사람이었는지. 그렇다면 왜 자신과 함께 도망가자고 한 것인지. 희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혹 서현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감정의 배신을 맛보게 해주려 한 것인가. 그래서, 그래서 과거의 다정한 서현을 닮은 해훈을 보낸 것일 지도 모른다. 희사는 해훈을 믿었다. 그런 자신을 보면서 저 둘은 얼마나 비웃고 또 즐거워했을런가. 손바닥 안에서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며 가지고 놀았다.  

이것은 전부 죄책감의 무게에서 도망치려한 자신에 대한 벌이었다. 자신의 부모가 전부 비참한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도 마찬가지로 죽었어야 했다. 서현이 저렇게 변해버리기 전에, 해훈에게 믿음을 주기 전에……

희사는 그 둘을 두고 미친 듯이 유악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쫓아 오는 자들의 소리가 들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기란 쉽지 않았다. 희사는 몇 번을 미끄러지고 무릎이 깨져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왜 달리고 있는 것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어디 한군데 성할 곳 없이 생채기가 났다. 희사는 절벽 앞에 멈춰서고 나서야 뜀박질을 멈췄다. 저도 모르는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그저 한 사람을 사랑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다. 

“희사님.”

숨이 턱까지 찬 희사와는 다르게 바짝 뒤에 선 해훈의 숨결은 평이했다.

“희사님 저는.”

“내게 왜 그랬지? 내가 네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믿음을 주고 이렇게 나락으로 빠뜨리는 건지….”

“떨어지겠습니다. 제발 이리로. 같이 이곳을 떠나자 했던 말은 진심입니다. 그러니 제발.”

희사는 해훈의 내민 손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것이 진심이었다 한들 네가 서현의 사람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리와, 희사.”

어둠속에서 서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희사는 눈물이 울컥울컥 넘어왔다. 더는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서현……”

희사가 서현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았다. 서현은 절벽 앞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대는 희사에게 다가가려했다.

“그만, 다가오지 마.”

“내게 와, 희사. 넌 내 소유야.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만, 이제 그만! 내게 복수를 하려했다면 이미 충분해. 당신이 내 감정을 배신이라 치부했을 때부터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겼어. 그래, 내 부모와 당신사이에서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한 나야! 결국 그들은 나 때문에 죽었는데……”

“아니, 희사 너 때문이 아니다.”

“그럼에도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이상해서, 차라리 당신을 증오하고 싶었어. 사랑했던 감정조차 지워버리고 싶었던 거야. 너무 괴로웠으니까, 내 부모와 친족들을 죽인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어. 그만큼 당신이 두려웠기도 해.”

희사의 울부짖음에 서현은 목이 멨다.

“그렇다면 내게서 왜 도망가려 하는 것인지 말해! 나를 사랑한다면 배신하지 말았어야한다. 어쩌면 넌 해훈을 살리고 싶어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잠을…… 잠을 잘 수가 없어. 모두가 나를 원망해.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내게 손짓해. 이번엔 너도 죽어야한다고.”

희사가 마치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꾹꾹 참아온 감정들이 지금 이 순간 폭발하고 있었다. 해훈은 희사가 여전히 서현을 사랑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희사의 말대로 그의 부모와 친족들을 죽인 자다. 그럼에도 희사는 서현을 완벽히 미워하지 못했다. 하물며 감정의 잔재들은 여전히 희사의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해훈이 쓸쓸하게 자소했다. 바스락 거리며 절벽 밑으로 자갈들이 떨어졌다. 해훈이 한 발짝 다가갔다. 희사는 휘청하는 상태로 가슴을 웅크렸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 반발 짝만 내딛어도 절벽으로 낙하해버린다.

“서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그 다음 생에는 원하는 것으로 태어난다했지?”

희사의 말에 서현과 해훈은 동시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말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아, 안 돼. 희사 제발 내게 이러지 마.”

희사를 한계까지 몰고 간 것은 서현이다. 하지만 서현 조차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폭주였다. 해훈은 원망스러웠다. 뒤늦게야 희사를 발견한 자신이, 그리고 그를 향한 감정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것이. 서현이 아슬아슬한 희사를 잡으려 몸을 앞으로 뻗었다. 그와 동시에 희사가 천천히 뒤로 발을 뻗었다. 작은 몸이 크게 휘청했다. 희사의 소맷자락을 간신히 잡았건만 야속한 천은 쉽게 뜯겨나갔다. 

서현은 꿈만 같았다. 삽시간에 희사가 절벽 아래로 낙하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서현이 어둠속에 사라지는 희사를 보며 절규했다. 해훈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비어버린 손은 칼자루를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칼날은 어느새 절벽 앞에서 오열하는 서현을 향해 있었다.

낙하하는 희사에게 서현의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알겠다. 가슴이 찢기는 것보다 쓸모없는 몸뚱이가 찢기는 것이 낫다. 이렇게 쉽게 끝날 것을 왜 그렇게 질질 끌어왔는지. 희사의 눈 위로 불꽃들이 피어올랐다. 눈을 감지 않도록 힘을 주어야했다. 아름답게 피어올라 순식간에 사라지는 불꽃을 하나하나 눈에 박아 넣으려면. 

아무걱정도 없이 서현과 유악산을 올라 폭죽을 보던 날이 떠올랐다. 행복했던 그 날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희사는 이제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지 몸에서 피를 쏟는지 감각조차 없어졌다.   

생이 이렇게 괴로울 것이라면 영영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 다시 태어나, 또다시 서현 당신을 사랑해선 안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래 차라리 나는 당신을 증오하겠다. 그것만이 당신과 내가 이토록 고통스러운 끝맺음을 맞이하지 않아도 될 방법일 테니. 

그래도, 그래도…… 당신을 향했던 이 모든 감정을 지울 수가 없다. 먼지 한 톨도 없이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는 언제고 당신을 사랑하게 될지 모른다. 서현 혹시라도 다음 생에서 내가 당신을 증오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 진심이 아니란 것을 당신은 알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몰라준다면 그것으로 더 좋지 않으려나. 

나는 그저 서현 당신과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왜 어째서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게 됐냐고 묻는다면 답할 것은 단 하나다. 당신이기에. 마음이 당신을 사랑하라 시키기에. 

희사는 생각을 멈췄다. 아니 더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작게 새어나오던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왜 그랬지! 대체 왜 그를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인지 말해!”

서현의 원망은 해훈을 향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임에도 눈앞의 남자에게 책임을 전가해야했다. 자신 때문에 희사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 역시 희사를 가지고 싶었다. 그것보다 더 큰 감정은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었지. 넌 정말 희사를 사랑하긴 했는가, 그를 함부로 품고 네 마음대로 휘두른 것에 만족감을 느낀 것이라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서현은 희사를 사랑함으로써 독점에 가까운 소유욕을 숨겼고 그것이 드러나자마자 서서히 파국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해훈은 희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다. 아니 행복까진 아니어도 편하게 해줄 수는 있었다. 해훈 역시 서현이 원망스러웠다. 

절규하던 서현이 갑작스레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광인과도 같았다.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음에도 기괴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그의 눈물조차 처연하다 했을 것이다. 그 안의 가득한 독들은 모른 채.  

“그래, 네가 죽어서라도 벗어나겠다면 같이 가면 그만이지. 무엇을 망설이는가.”

서현이 이미 사라져버린 희사에게 말하듯 쓸쓸이 중얼거렸다. 잔잔한 바람이 서현의 몸을 한차례 쓸어갔다. 서현은 그 바람에 모든 것을 맡긴 채 희사에게로 몸을 던졌다. 해훈의 칼날이 서현을 찢기도 전이었다. 서현은 희사가 떨어지면서 어떤 것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서현 자신은 죽음의 앞에서 그 어떤 것을 바라지도 소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확신했을 뿐이다. 

다음 생에서도 그 다음 생에서도 너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 또다시 이런 일들이 반복돼도… 그래서 네가 상처받더라도… 난 그래도 놓칠 수 없다. 그래, 희사 네가 나를 떠나 죽겠다면, 같이 죽으면 그만이다. 지옥의 끝까지라도 따라가 주겠다. 

삶의 끝에서 서현이 웃었다. 

해훈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절벽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표를 잃은 칼날은 바닥에 떨어진지 오래다. 지독하다. 저리 지독하게 사랑해서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도 그를 따라갔다. 해훈의 삶의 이유가 됐던 희사를 그는 망설임 없이 따라갔다. 

“하하하.하하.하……”

해훈은 모든 것이 꿈같았다. 눈을 뜨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있지는 않을까. 밤하늘을 수놓던 폭죽은 그 둘의 죽음에도 신이나 타올랐다. 해훈이 비척비척 걸어 절벽의 끝에 섰다. 이제 이 세계에서의 미련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뿐인 희사라는 미련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해훈!!!”

해훈은 폭죽소리에 가려진 여자의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청영이다. 해훈과 서현이 비슷한 시각에 황궁에서 유곽을 향해 출발했다는 소리에 청영은 부리나케 서궁을 나왔다. 만일 그대로 해훈을 보낸다면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청영의 불안은 맞아떨어졌다. 뒤도 안보고 올라선 유악산에는 해훈의 모습만 달랑 혼자 남아있었다. 너무 늦은 것인가……. 텅 비어버린 아들의 표정에 청영이 일이 크게 틀어졌음을 알았다.

“그들은, 희사는 어찌 된 것이냐!”

“죽었습니다.”

해훈이 발밑의 절벽아래를 내려 보며 말했다. 청영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해훈아, 이 어미에게로 오거라. 절대! 절대, 다른 생각을 품어선 안 된다.”

해훈은 이대로 뛰어내리고 나면, 한숨자고 원래의 곳에서 깨어날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래 그러면 그곳엔 희사가 있다. 해훈이 청영을 뒤돌아봤다. 뜻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작게 웃더니 망설임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안 돼!!!! 

청영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유악산을 울렸다. 밤잠을 자던 짐승들도 그 절규에 하나같이 잠을 깨었다. 청영이 비틀거리며 아들이 뛰어내린 쪽으로 다가갔다. 그대로 주저앉아 흙바닥을 긁었다. 예쁘게 기른 손톱이 부러지고 뒤틀렸다. 청영은 믿기지가 않았다. 흑영의 생을 버려 구한 아들이다. 그녀는 눈을 뜬 채 악몽을 꾸고 있었다. 청영 역시 절벽의 낭떠러지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일으켜 안았다.   

“청영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해훈! 해훈이!! 아아악!!”

감인령이 그녀의 흐느끼는 몸을 위로했다. 해훈의 칼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있는 것을 봤다. 청영이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음에도 그가 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알았다. 감인령은 해훈이 죽어야 했던 영문도 모르는 채 눈물을 흘렸다.

“해훈을……그들을, 다시 불러…들이겠다.”

청영은 너무나 극심한 상실감에 내장이 타들어갔다. 이대로 보낼 순 없다. 자신과 흑영으로 인해 악연이 된 저들을 운명의 파도 속에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안됩니다! 흑영님께서도…”

감인령의 수많은 주름을 타고 한이 흘러내렸다. 청영은 감인령의 몸을 밀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아들의 칼을 쥐었다. 무겁다. 해훈은 늘 이 무게를 달고 살아왔다. 이제는 그것을 덜어줘야 한다. 청영은 칼자루를 자신의 안쪽으로 향했다. 두 손으로 칼자루를 꼭 쥔 채 자신의 배를 향해서 찔러 넣었다. 감인령은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무엇이든 그녀의 뜻을 따라야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었다. 청영이 무릎을 꿇었다. 사선으로 세워진 칼자루가 바닥에 닿아, 그녀를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게 지탱했다. 그 반동으로 인해 칼날은 더욱 깊숙이 여자의 뱃속을 뚫었다. 정해진 운명을 되돌리는 방법. 

그것은 희사(僖詞)의 희생이다. 

물론 운명을 일그러뜨리는 것도 가능했다. 흑영이 해훈의 운명을 망가뜨렸듯이. 청영은 영영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자신으로 인해 운명이 뒤틀린 그들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자신에게 남은 모든 생들이 해훈에게로 이어짐을 느낌과 동시에 청영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자는 흑영이었다. 영생을 살아도 오로지 한명 뿐인 자신의 정인. 청영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어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깨어난 유악산의 짐승들과 감인령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 마치 저마다 다른 곡소리를 읊는 듯 그 소리들은 한없이 구슬펐다. 

청영의 온몸에서 피가 전부 빠졌을 때쯤 그 소리들은 점점 잦아지고 세계는 닫혀갔다. 그리고 또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는 그녀의 희생으로 얻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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