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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겁환상 외전- 진생환상(眞生喚想) -1 (20/21)

전겁환상 외전- 진생환상(眞生喚想) -1

본편에 앞서, 진생환상은 희사의 본 전생 이야기 입니다. 

하편을 읽기 전에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생환상(眞生喚想)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생기 가득한 얼굴의 두 청년이 서로의 손을 잡고, 두 발은 지는 낙엽을 융단삼아 산길을 올랐다. 두 청년은 조금 빠른 속도로 걸었지만 그 걸음걸이에선 경박함이라곤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

“힘들어? 조금 쉬었다 갈까?”

“괜찮아.”

두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초가을 쓸쓸한 바람이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유악산은 험하디 험하지만 오르고 난 뒤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을 두 청년은 이미 수십 차례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아, 혹 어디가 아픈 거야?”

“조금.”

체구가 작은 청년의 목소리에 그의 손을 붙들고 있던 다른 한 청년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럼, 내키지 않으면 내려갈까? 희사 네가 원한다면….”

키가 좀 큰 청년은 갑작스레 손에 실린 힘에 비해 제법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희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미 한참을 올라온 터라 다시 내려가는 것이 더 큰 수고로움이었다. 희사의 가슴엔 사실 한낱 수고로움보다 더 큰 불안함이 잔재해있었다. 희사는 자신보다 조금 앞서 걷고 있는 청년의 얼굴을 올려봤다. 아름다운 옆모습. 태자는 마치 환진의 모든 아름다움만을 모아 만들어낸 피조물과 같았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환진의 최고 미인이라 자자했던 황후의 아들다웠다. 현성 역시 서현과 지나치게 닮은 얼굴이나 그 둘은 풍기는 분위기부터 남달랐다. 현성보다는 서현이 좀 더 남자다웠고 믿음직했다. 아직 현성이 어리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희사는 숨이 가빠짐과 동시에 명치가 지끈거렸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이 불안함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도 다른 생각을 꺼냈지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서현은 희사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힘을 주어 희사의 손을 이끌고 성큼성큼 유악산을 오를 뿐이었다.

“희사, 이제 거의 다 왔어.”

서현은 숨이 차 볼이 발개진 희사를 돌아봤다. 작년도 제작년도 황제의 축일엔 늘 서현과 함께였다. 태자로써 황궁의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당연지사였으나, 서현은 어느 때인가부터 늘 희사와 함께 유악산에서 축일을 맞이했다. 다행히도 황제는 탄생일 따위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며 그런 서현을 나무라진 않았다. 

서현은 오래전,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희사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서현은 불꽃놀이보다 희사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헌데 오늘은 무언가가 이상했다. 산을 모르며 마냥 기뻐하기만 하던 전과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희사가 무언가를 불안해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서현은 산을 오를 때부터 이상한 희사의 태도에 그저 기우이려니 하고 마음을 추슬렀다. 서현의 머릿속에선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 다른 무엇일거라 울려댔지만 서현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악산의 중간쯤 되는 절벽 앞에 섰을 때 이미 해는 전부 기울어져있었다. 반시진만 더 있으면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희사는 허리쯤에 오는 바위에 엉덩이를 붙인 채 숨을 골랐다. 깨끗한 소매를 들어 서현이 희사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희사는 이렇듯 서현의 다정한 손길이 좋았다. 서현은 언제나 다정했으며 한결같았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자신을 향한 마음도 부드러웠다. 그 오랜 시간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동생인 현성을 더 챙기긴 했지만 희사에게 있어서 서현도 그 이상으로 소중한 존재였다. 희사의 뺨에 서현의 입술이 닿았다. 발갛게 익은 얼굴을 식히듯 서현의 입술은 서늘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가벼운 입맞춤에 머뭇거리며 희사의 눈치를 보던 서현이 이번엔 과감히 입술을 부딪혀왔다. 희사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친우 이상의 것임을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다. 허나 그래서 그만큼 더 두려웠다. 두려운 것은 자신의 마음이 아닌 지금의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서현을 없애고 싶어 했다. 현성을 태자로 책봉시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 

희사는 그 누구도 배신하기 싫었다. 허나 늘 가까이 있는 것은 서현보다는 어머니였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매와 뜻을 따르지 않는 자신에 대한 분노는 자다가도 깨어 몸서리칠 정도였다. 첩자를 부려 서현이 방심한 사이에 없애버리라는 그녀의 말을, 희사는 마지못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일단은 따르는 척을 했다. 그녀의 뜻대로 자객을 샀으나 그 자객에게 절대 서현을 베어서는 안 된다 일렀다. 어느 정도의 위협만 주고 자신들을 떠나달라고. 자객은 의아해했으나 토를 달진 않았다. 그런데도 이 불안함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희사는 괴로운 눈을 들어 어느새 입맞춤을 끝낸 서현을 바라봤다. 서현이 다정히 웃었다. 희사도 그를 마주하고 애써 미소를 만들어냈다.

“계속 내 곁에 있어줄 거지? 내가 황제가 되거나 그렇지 못해도 희사 너는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주었으면 해.”

서현은 마치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듯 목소리에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희사는 서현의 말대로 그의 곁에 항상 머무를 수 있었으면 했다. 서현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은 그다지 틀릴 것이 없었다. 

“나도 그러기를 항상 바라고 있어. 서현.”

희사의 답에 서현이 마음을 다해 끌어안았다. 희사는 조심히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꽤나 긴 시간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안은 채로 멈춰있었다. 희사는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 2년이었다.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척 서현을 끌어내리려 연기해온 것이 말이다. 

“혹시 내가, 내가 아니게 되도 그건 절대 내 본심이 아니야.”

희사의 의미심장한 말에 서현은 품에 안았던 희사를 떼어냈다. 좀 전부터 산의 소리와도 비슷하지만 그 속에 묻힌 사람의 인기척은 여실이 느껴졌다. 서현은 이미 자신들을 따라붙었던 인영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다가오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자객이었다. 서현은 몇 번이나 자객의 위협을 받았었다. 그때마다 살아남았던 것은 누구보다 뛰어난 그의 감각 덕분이었다. 희사의 앞에선 검을 쓸 일이 없었으나 서현은 웬만한 무장보다도 더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일국의 태자로서 조금이나마 편히 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서현은 희사의 불안함이 자객과는 상관없기를 바랐다. 현성의 친족들이 황후를 없앤 것이라 확신했지만 물증은 없었다. 서현을 없애려한 여러 번의 암살시도도 현성의 친족들이 가장 유력했지만 그 역시 물증은 없다. 서현은 그 모든 일에 당연히 희사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거라 여겼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서현은 얼굴위에 진한 웃음을 덧붙였다.

“너를 믿어. 그러니 너 역시 나를 믿어야해.”

희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현은 다시 한 번 희사를 안은 채로 말을 이었다.

“혹 너도 그것을 알고 있어?”

희사는 어깨에 기댔던 시선을 올려 서현을 응시했다. 의문에 담겨있는 시선에 서현이 희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누군가가 그러던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다음 생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목숨을 끊는 것이잖아.”

“아니, 그렇다고 했어. 혹시 네가 지금의 내 모습이 싫다면, 난 주저 없이 네가 원하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어.”

마치 지금이라도 뛰어내리겠다는 심산에 희사는 서현을 꼭 붙들어 안았다.

“그렇지 않아. 난 지금의 네가 더없이 소중해.”

“하하, 행복해서 무섭다는 말을 이럴 때 실감하는구나.”

서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애써 기척을 숨기고 있던 자객이 빠르게 둘을 향해 덮쳐들었다. 서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희사의 앞을 막았다. 눈 아래까지 검은 복면을 쓴 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눈가의 주름으로 꽤나 연륜이 있는 자임을 암시했다. 얼마나 많은 자들을 죽였는지 그의 눈동자에 생기와 살인에 대한 흔들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현은 그가 이곳에서 죽임을 당하면 저자에게 죽임을 당했던 망자들에게 저 자의 영혼은 갈가리 찢겨질 거란 생각을 했다. 이만큼의 잡생각을 심어줄 상대라면 승부는 이미 한참 전에 판가름이 나있었다. 

희사는 불안한 눈으로 서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시선을 그대로 올려 떨리는 눈꺼풀로 자객과 눈을 마주했다. 겁만 주고 사라지라는 자신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이미 서현을 향해 공격태세를 잔뜩 갖추고 있었다. 혹여나 자객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른 소리를 들은 것이라면…. 제발, 제발 아니기를. 자객은 희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희사는 자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만일 저자가 이대로 서현을 공격한다면 그래서 서현이 죽게 된다면! 희사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자객이 날카롭게 세웠던 칼날을 서현을 향해 내리쳤다. 서현도 허리춤에 달린 칼을 스릉하고 순식간에 빼들었다. 허나 그것보다 빠르게 서현의 눈앞을 막아선 것은 뒤에 있을 거라 생각한 희사의 몸이었다. 자객이 휘두른 칼은 희사의 어깨를 스쳤고 뜨거운 피가 솟구치며 서현의 얼굴에 튀었다. 서현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어깨를 쥔 채 무너지는 희사를 봤다. 자객은 잠시 움찔하더니 다시 칼을 세워 서현을 향해 달려왔다. 서현은 달려드는 칼날을 막지도 않고 상체만 숙인 채 자객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었다. 편히 죽여줄 생각은 없다. 그렇게 말하듯 서현은 옆구리에 박힌 칼날을 틀어 자객의 몸을 일자로 찢었다. 딱딱해진 자객의 뱃가죽에 칼이 끼긱댔지만, 서현은 그보다 더 큰 힘을 주어 자객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분리된 두덩어리의 몸은 아직 살아있음을 반영하듯 연방 꿈틀거렸다. 서현은 몇 번이나 자객의 몸을 쑤셨다. 

생기 한 톨마저 전부 사라질 때까지 그의 몸을 도륙하다 시피 했다. 희사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사람이라는 형체도 알아 볼 수 없도록 망가뜨린 후에야 칼을 거두었을 것이다. 서현은 정신을 잃어가는 희사를 들쳐 업었다. 분명 어깨를 관통하진 않았다. 스쳐지나갔음에도 길게 찢어진 살에선 피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그 작은 몸에서 뽑아낼 수 있는 피를 전부 쏟아버릴 것만 같았다. 서현은 빠른 속도로 희사를 업고 유악산을 내려갔다. 뒤에서는 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서현은 불꽃놀이가 다 끝날 쯤에야 유악 제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나온 시종들이 깜짝 놀라 피칠갑이 된 서현에게 달려들었다. 서현은 그들을 전부 밀치고 의원이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정좌를 하고 앉아 서책을 읽던 의원이 크게 눈을 떴다. 언뜻 보아도 서현의 어깨부터 가슴팍을 흥건히 적신 피는 그의 것이 아니라 뒤에 업힌 희사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서현이 희사를 침상 위에 서둘러 눕혔다. 의원은 팔을 걷어붙이고 급히 희사의 옷자락을 벗어젖혔다. 

“태, 태자 전하 어쩌다.”

“말은 필요 없다. 당장 그를 치료하도록 하라.”

서현은 초조한 걸음으로 의원의 뒤를 연신 오갔다. 희사의 잔뜩 찌푸려진 얼굴에 서현은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바보같이 그걸 왜 막아서서. 내가 너의 보호를 받아야 할 만큼 약해보였단 말이야! 서현은 원망과 괴로움이 섞인 눈으로 희사를 쳐다봤다. 목숨에 지장은 없겠으나 희사가 받아야할 고통에 서현은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어느새 소식을 접했는지 의원의 방으로 제후의 아내가 뛰어 들어왔다. 서현은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응대했다. 유악에서 자객을 부릴 사람은 현성의 친인척인 저 여자뿐이다. 설사 그럴 리가 없다하더라도 서현과 그녀는 서로에게 눈엣가시인 존재였다. 서현은 희사에게 달려드는 그녀를 제지했다.  

“의원이 치료하고 있으니 그만 다가가거라.”

서현의 말에 여자가 표독스러운 눈매를 들어 건방지게 노려봤다. 그 눈빛에는 네가 같이 있었으면서 왜 희사를 다치게 했느냐는 원망이 담겨있었다. 아니면 네가 아니라 왜 희사가 이리 다쳤냐는 눈빛일 수도 있다. 분명, 희사가 자신의 앞을 막아섰을 때 자객은 서둘러 칼을 들어올렸다. 그랬기에 칼이 희사의 어깨를 관통하지 않고 스쳐지나간 것이다. 서현은 제후의 아내를 쳐다보며 끓어올랐던 머리를 천천히 식혔다. 눈에 띄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자객은 분명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니 유악의 제후 쪽에서 보낸 자객일 가능성이 가장 농후했다. 이들과 관련된 자객이 아니었다면 희사가 막아섰을 때 그는 분명 망설임 없이 희사를 찢었을 것이다. 생각이 정리될수록 서현은 더욱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태, 태자 전하. 그래도 제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입니다. 어떠한 상황인지라도 봐야겠습니다. 그러니…….”

“나의 의원이 그를 죽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금은 그대의 걱정스러운 시선보다 의원의 치료가 더 먼저다. 물러가 있거라.”

서현의 강경한 태도에 여자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한동안 의원과 서현을 번갈아보던 여자는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서현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누구도 볼 수 없었던 다정한 얼굴로 희사를 내려 봤다.

“어떤가, 많이 다친 것인가?”

상처를 살핀 의원이 침상 옆 작은 함을 들어올렸다. 그 안에는 약초와 흰천 그리고 환약들이 가득했다. 

“크게 심려할 수준은 아닙니다만, 상처가 아물려면 보름이상은 갈 듯 싶습니다. 찢어진 곳은 깊지 않으나 상처가 꽤 넓습니다.”

의원의 말에 서현은 적어도 한숨을 돌렸다. 서현은 탁상에 주저앉듯이 몸을 기댔다. 그 자객을 고용한 것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려면 아무리 화가 나도 그 자객을 죽여서는 안됐다. 허나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의 몸을 더 도륙했으면 했지 살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 정성을 다해 치료하겠으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태자 전하.”

동궁의 의원을 같이 대동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런 촌구석 의원에게 희사의 몸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현은 의원이 모든 치료를 마칠 때까지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희사의 이마를 쓰다듬고 밤잠을 설쳐가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로부터 희사는 삼일이란 시간이 흐르고서야 눈을 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정신이 돌아오는데 생각보다 꽤 긴 시간이 걸린 것이다. 희사는 눈을 뜨자마자 침상의 옆 탁상 위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 보는 서현의 모습이 보였다. 서현은 희사가 정신을 차린 지도 모르는 채 잔뜩 인상만 쓰고 희사의 발치를 내려 보고 있었다. 희사는 그의 괴로운 이마를 펴주고자 손을 들었다.

“아악….”

저도 모르게 쉰 목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졌다. 서현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많이 아플 거야.”

희사는 마치 서현이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표정이 슬퍼보였다.

“괜찮아. 서현, 너는 다친데 없는 거지?”

“다시는 그러지마. 네가 감싸줄 정도로 난 절대 약하지 않으니까….”

당부하듯 말했지만 서현의 말엔 힘이 없었다. 희사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괜찮아, 그래도 네가 아닌 내가 다쳤으니. 만일 서현 네가 죽었다면…. 그랬다면 그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희사는 서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인가 이렇듯 부풀어 올랐는지 그 마음의 크기만큼이나 가슴이 저렸다. 희사는 현성도 서현도 그 어느 쪽을 택할 수 없었다. 분명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희사는 바로 눈앞에 닥친 폭풍에 대비하지 못한 채 거친 돌풍을 그대로 막아서고 있었다. 서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는 희사를 가만히 응시하다 방을 나섰다. 서현이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가 들어섰을 때 희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자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냐.”

아들을 걱정하는 여자의 목소리엔 일말의 진심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선 이제 자신의 핏줄도 한낱 조종해야할 말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은 짧은 시간 안에 그녀를 미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일부러 그런 것이야, 아니면 상황이 그러하지 못했던 것이야.”

여자의 낮은 음성은 희사를 향한 질타를 가득 담고 있었다. 희사는 어머니의 말에 굳게 다문 입을 더 꽉 물었다. 몇 번의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눈을 떴다. 

“어머니, 그의 자리를 뺏으셔야 합니까? 그를 죽이셔야 어머니의 계획대로 되는 것입니까?”

“내가 나만을 위해 이 지경까지 왔다 생각하느냐?! 정녕 우리 상공님과 너를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말이야!”

“저와 아버지는 원치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사람이 죽고, 또 사람이 죽어나갑니다. 그것으로 얻는 권력이라면 저는 더더욱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여자는 희사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희사는 변해버린 어머니만큼이나 그녀의 욕심이 두려웠다. 

“어찌 너는 네 무능력한 아비를 쏙 빼닮았단 말이냐!”

희사는 분통을 토하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더는 이야기해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반역에 가담했고,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반역이 실패한다면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유악의 식솔들마저 전부 참수 당한다. 그런 무시무시한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반역을 행했다는 것은, 이미 여자에게 어떠한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뜻했다. 여자는 분에 못이긴 숨을 씩씩대더니 거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제야 혼자 남은 희사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눈가가 타올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그녀의 말이 맞다. 무능하여 이도저도 안되며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하는 한심한 작자다. 서현을 사랑하나 가족을 버릴 순 없다. 현성에게도 몇 번이나 반역에 가담한 자들의 마음을 돌리게 해 달라 사정했지만, 현성 역시 태자의 자리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희사는 혼자 속으로 고통을 삼켜야만 했다. 그 후로도 몇 년이나 서현에게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었지만 속은 이미 자객이 휘두른 칼보다도 예리한 칼날에 전부 헤져있었다. 희사는 반역이라는 무리에 얕게 발만 담군 채로 가슴 속으로 서현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당신께 고하고 용서를 해 달라 빌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나는 당신도 내 부모도 버리지 못하니까.

현성의 친족들은 서현을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서현은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미리 생각하고 행동했다. 몇 번이나 자객과 음식에 독약을 탄 것이 현성 친가의 일임을 밝혀낼 수 있었지만 서현은 희사를 위해 입을 다물었다. 허나 서현 역시 황제의 자리를 그저 현성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현성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한 순간 자신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태자로 태어나 황제가 될 것이 분명했던 서현은 살기 위해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켰다. 황제가 되면, 그렇게 되면 희사를 위해 모든 것이든 할 수 있게 된다. 대를 잇는 것 따위는 중요치 않다. 제후의 아내는 권력에 미쳐있었고, 서현과 희사는 서로에게 미쳐있었다. 미쳐있는 것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모든 것이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은 서현이 황제가 되는 날까지도 지겹게 이어졌다.

서현과 희사가 18세가 되었을 때, 어느 순간부터 급작스럽게 몸이 나빠진 황제는 노환을 이기지못하고 세상을 떴다. 환진의 법도를 따르자면 황제의 국상은 꼬박 세 달을 채워야했다. 희사는 황제의 국상이 치러지는 동안 내내 황궁에 머물렀다. 유악에서 어머니의 서신이 수차례 당도했지만 희사는 그것을 전부 불에 태워버렸다. 서현이 황제가 되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은 끝나는 것이다. 세 달이 지나고 국상의복을 벗는 날 서현은 황제로서 즉위식을 올렸다. 희사는 서현의 즉위식이 있는 이른 오전, 유악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차마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자신은 어머니를 배신한 것이다. 단지 방관한 것뿐이나 그녀에게 있어선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됐다.

서현은 희사가 떠날 것임을 알지 못했다. 희사는 서현이 동궁에서 황궁의 내실로 이동한 뒤 조금 늦게 동궁에서 빠져나왔다. 동궁의 아름다운 정원을 한번 둘러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대기시킨 마차를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황제의 즉위식 덕에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터라 희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복면을 한 검은 의복의 남자가 주변인들보다는 조금 느린 걸음으로 황궁의 내실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는 희사와 반대방향을 가는 중이었기에 눈을 마주할 시간은 충분했다. 희사는 복면에 살짝 드러난 눈과 마주쳤다. 마치 자신이 부렸던 자객과도 비슷한 옷차림. 그러나 어두운 기운은 그 자객보다 눈앞의 남자가 더 강했다. 희사와 마주친 남자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했다. 남자는 마치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계속 서서 눈을 떼지 않았다. 희사는 강렬한 눈빛에 조금 쑥스럽게 웃고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한발자국을 옮기기 전, 휙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남자는 거칠게 희사를 잡아 세웠다. 희사는 조금 놀란 눈으로 남자를 올려봤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남자는 희사의 목소리를 듣더니 더욱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희사는 남자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혹 저를 아십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희사는 남자가 이상하다 여겼다. 정신이 나간 것인가? 아니면 자신과 꼭 닮은 사람을 아는 것인가? 허나 남자의 목소리는 그냥 지나쳐가기엔 너무 진지하고 애달팠다.    

“저는 유악 제후의 아들입니다.”

“그럼, 그대는 이곳의 사람입니까?”

“무슨?”

희사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서 남자를 향해 반문했다. 남자는 힘이 빠지듯 희사의 팔목을 잡은 손을 놓았다. 희사는 작게 고개를 꾸벅하곤 갈 길을 다시 재촉했다. 마음이 찝찝해 다시 뒤를 돌자 복면의 남자는 아직도 이쪽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서 있는 그 지점만 여전히 시간이 멈춘듯해 보였다. 희사는 대수롭지 않게 분명 정신이 이상한 자라 여겼다. 그와 동시에 마음의 병이 있다는 2황자를 떠올렸으나 마차의 올라타서는 이내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희사는 유악까지 도달하는 사나흘의 시간이 마치 순식간 같았다. 황궁은 축제 분위기였으나 유악 제후의 집은 가히 초상집 분위기였다. 세 달 만에 집을 찾은 자식을 향해 보란 듯이 여자는, 집안의 온갖 도자기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말리는 제후도 시종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희사는 넓은 마당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가 한계까지의 성을 내는 것을 끝까지 받아들였다. 

“네 놈이! 네 놈이 그러고도 어찌 내 자식이라 칭한단 말이냐! 네가 우리 집안을 말아먹은 것이다!”

희사는 도자기가 발치에서 부서져도 꼼짝도 않았다. 그저 그가 황제가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을 뿐. 하지만 그것은 희사의 단순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현성, 그리고 서현. 전 그 누구도 배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는 이미 나를 배신했다. 함부로 그 입 놀리지 말거라!”

여자의 분노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역모에 가담했다 알려지는 것도 상관치 않을 정도로 여자는 큰소리로 희사를 나무랐다.   

“이후로 어머니가 원하시는 모든 일을 들어드리겠습니다.”

희사는 이제 그가 황제가 되었으니, 당신도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라 여겼다. 여자는 희사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더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여전히 화가 식지 않은 채로 안채를 향했다. 희사의 곁으로 두 명의 시종이 다가와 그를 일으켰다. 희사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들의 손을 만류했다. 

서현은 황제가 된 후 황궁을 떠난 희사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서신을 전달하는 서현의 매가 희사를 그리듯 허공에서 구슬프게 울어댔다. 희사는 그의 매만을 황궁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로 어머니가 원한 것은 서현을 만나지 않는 것과, 자신이 직접 어머니의 말과 귀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현성의 친족들과 여자가 여전히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서현이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어머니에게 못 이겨 그저 서찰을 관리하는 것에 그쳤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여자가 전하고자하는 바를 그들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받아 여자에게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여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역모에 얕게 발만 담그고 있던 아들을 가슴께까지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모든 것은 너와 네 아버지를 위한 것이라 여자는 누누이 당부했다. 희사는 유악에서 늘 가슴으로 바랄 뿐이었다. 어서 이 전쟁과도 같은 역모가 끝나고, 서현 역시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희사가 오래도록 바라는 희망이었다. 여전히 아무런 선택도 못한 채 힘이 없는 자신을 저주하면서.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다. 음모는 오래가지 못하고 진실은 거짓의 그림자에서 불현 듯 제자리를 찾는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수를 범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다. 서현은 태자 때와는 다르게 자유로이 운신을 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황궁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서현은 반년 째 연락을 두절하고 있는 희사를 찾아 유악을 향했다. 그 날은 바로 서현의 축일 전 날이었다. 희사를 품에 안고 유악의 절벽에 올라 불꽃놀이를 보고 싶었다. 서현은 따라나서는 인원을 최대한으로 줄여 조용히 희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심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장 나 그를 향해 미칠 듯이 뛰었다. 보고 싶다. 희사 네가 보고 싶어. 유악으로 향하는 익숙한 풍경이 다가올수록 그 외침은 더 거세졌다. 

서현이 미리 연락을 취하지 않은 터라 도착한 유악의 집은 고요했다. 서현은 희사를 만나기 위해 한달음에 구름다리를 건넜다. 마당에서 비질을 하던 어린 시종이 깜짝 놀라며 서현에게 다가왔다. 서현은 간단한 손짓으로 아이를 만류했다. 자신이 왔다는 사실을 직접 희사에게 알리고 싶었다. 자신을 보고 기뻐할 것을 상상한 서현은 방문을 활짝 열고나서야 실망감을 가득 맛봤다. 어딘가에 출타를 했는지 희사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서현의 손짓에 시종은 희사의 외출 소식도 고할 수가 없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이 급했나싶어 서현이 쓰게 웃었다. 

서현은 조금의 여유를 찾자고 생각하며 책장에 가지런지 정리된 서책들과 먼지 한 톨 없는 그의 방을 죽 둘렀다. 희사다웠다. 희사가 없음에도 방에선 그의 손길이 가득 느껴졌다. 서현은 그제야 마음의 두근거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침상으로 다가가 희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서현의 발치에 타닥하고 작은 함이 부딪혔다. 서현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수롭지 않게 그 함을 안아들었다. 그리곤 침상에 앉아 함의 뚜껑을 열었다. 자물쇠가 있는 함이건만 웬일인지 함은 잠겨있지 않았다. 희사가 급하게 어디를 나간 것이라 짐작했다. 

서현은 그 안에 빼곡히 들어있는 서찰들을 펼쳐 보았다. 가라앉았던 심장은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그 서찰은 바로 자신의 문체였다. 그를 그리며 황궁에서 보낸 서찰들. 서현이 보낸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함에 담겨있었다. 희사가 오면 물어볼 생각으로 그것을 전부 침상위에 꺼내놓았다. 너 역시 분명 나를 그리워했으면서 어찌 연락한번 없었는지, 핀잔을 담아 쓰게 웃었다. 함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으려는데 겉에서 보는 함의 높이에 비해 안의 함의 깊이는 얕았다. 겉에서 본 함의 크기가 두 뼘 정도 된다면 실질적으로 안의 깊이는 한 뼘도 채 안됐다. 서현이 손을 집어넣어 함의 모서리에서 엄지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크기의 홈이 파여 있는 것을 찾아냈다.

열지 마, 열어선 안 되는 것이다. 서현의 머리에서 위험 가득한 신호가 울렸다. 서현은 엄지손가락을 몇 번이나 주저하다 결국 홈에 끼워 넣어 함의 중간을 막은 나무판을 들어올렸다. 그 안에도 역시 서찰들이 빼곡했다. 함부로 서찰 속에서 굴러다니는 인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서현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익히 알고 있는 문양. 날아오르는 승천용을 물어뜯을 것은 오로지 하나, 백호 뿐. 서현이 그 인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서찰들을 펼쳤다. 현성, 제 2황비. 그리고 그들의 친족들과 내통한 사실들이 지금 서현의 눈앞에 펼쳐있었다. 황제가 된 이후론 태자일 적보다 죽음의 위협은 적었다. 그것은 이자들이 조용히 뒤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현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 이렇듯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사실이었다. 미칠 것 같은 화가 전신을 새까맣게 태웠다. 희사는 자신을 사랑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희사의 눈빛엔 거짓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를 향한 마음이 너무 커서 그가 역모를 꾸민 부모의 자식이라는 것까지도 덮어두었다. 희사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오래전부터 희사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왔던 것이다. 이것이 진실인데 말이다.

“그래, 그래서 내가 황제가 되던 날 황궁을 떠났고, 내가 기어이 황제가 된 이후에는 나를 보지 않았던 것인가? 현성을 죽일 수도 있었다. 허나 너를 위해 살려두었어. 결국 내가, 현성이 아닌 내가 황제가 되어 희사 네 계획이 틀어졌던 것인가? 그래서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내버려두었단 말이야!”

서현은 신음과도 같은 외침을 터뜨렸다. 왜 이토록 너를 사랑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인가. 너의 바람대로 현성을 황제로 만들었다면 넌 그전과 같이 웃어주었을까? 

서현은 분명 이 모든 것이 오해이기를 바랐다. 그 동안 병신같이 당하고도 또다시 속아주고자 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만큼 희사를 사랑했다.

서현은 그 때 그날 자객이 휘두른 칼에 자신의 앞을 막아섰던 희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마저도 너를 믿게 하려는 수작이었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줄도 모르고…….  

서현은 침상위에 마구 굴러져 다니는 서찰들을 차분한 손길로 정리했다. 마음이 끓어오를수록 늘 머리는 차가워졌다. 그것은 전 황제에게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었다. 서현은 애써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단 한 장의 서찰을 제외하곤 함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그 함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이전까지 서현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한기가 서려있었다. 서현은 진이 빠진 사람처럼 침상에 엎드렸다. 희사의 베개에서 여전히 사랑스러운 향이 묻어나왔다. 증오하고 싶지 않다. 그저 아끼고 사랑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아니라고 희사 네 입에서 아니란 것을 듣고 싶다. 이렇게 나를 배신하지 마.

        

희사는 황제의 축일을 준비하려 장이 선 유성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서현을 만날 순 없지만 혼자라도 유악에 올라 불꽃을 볼 심산이었다. 희사는 방에 놓을 향초와 랑쿤에서 힘들게 들여온 서책들을 몇 권 구입해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보는 화려한 마차가 중문 옆에 서있었다. 희사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친구가 방문했나 싶어 의아함을 띄고 정원을 가로 질렀다. 헌데 집 안의 분위기는 서현이 황제가 되던 날 느꼈던 때와 비슷했다. 

내일이 축일이니 어쩔 수 없으려나, 서현과 관련된 것이라면 진저리치는 어머니이니. 

희사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마루 밑에 신이 가지런히 벗겨있는 것을 보았다. 희사는 눈을 크게 떴다. 신발의 양 옆선에는 황금으로 수놓아진 용이 꿈틀거렸다. 용과 관련된 문양을 쓰는 자는 환진에서 오직 하나. 황제인 서현뿐이었다. 희사는 자신의 신발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벗어젖히곤 방안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눈에 보이도록 방치해 놓은 함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단지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서현이 그동안 서찰만 보냈다는 것은 그 역시 황궁에서 쉬이 나오지 못함을 뜻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희사가 급히 방문을 열자 침상에 몸을 뉘이고 있는 서현이 보였다. 벅찬 가슴에 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이렇게도 서현 당신을 그리는데 어찌 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희사는 최대한의 차분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베개 밖으로 힐끔 보이는 서현의 옆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자신을 올려보는 서현의 다정한 눈길을 기대하며 그를 불렀다.

“서현….”

희사의 부름에 서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에 부드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서현의 눈빛만은 어느 때보다 차가웠지만 희사는 그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어디를 다녀온 거야.”

서현은 마치 어제 본 연인을 대하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일이 너의 생일이기에 장에 다녀왔어. 그런데 황궁을 비워도 되는 거야? 바로 내일이 축일인데.”

“너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어.”

서현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희사에게 다가왔다. 그대로 희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희사는 서현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오랜만에 느끼는 서현의 온기에 더는 그를 멀리해야할 자신이 없어졌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그 날로 돌아간 것 같다.”

서현이 말하는 그 날이 언제인지 희사 역시 알았다. 아직 전 황제가 살아있을 적 불꽃놀이를 보러 간 때를 말했다. 자객이 휘두른 칼에 자신이 다치긴 했지만 벌써 상처는 아문지 오래다.

“그동안 어찌 연락이 없었지?”

서현은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어조로 희사에게 물었을 뿐이다. 희사는 차마 어머니 때문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네가 많이 바쁠 것 같아서. 그래서….”

“괜찮아, 이렇게라도 봤으니.”

서현이 희사를 떼어냈다. 희사는 조금 더 그의 품에 있고 싶었으나 채근하지 않았다. 

“집에는 왜 아무도 없어?”

“아마 다들 장에 갔을 거야. 온다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준비라고 했을 텐데.”

희사는 문득 침상 발치에 놓아진 함에 시선이 다다랐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혹 서현이 저 함을 열어본 것이라면? 아니 열어보았다 하더라도 겉에는 서현의 서신뿐이다. 서현의 서신 밑에는 반역에 관련한 문서들이 있지만. 

희사는 그 문서들을 밑에 숨기고, 위에 놓인 서현의 서신을 읽으며 늘 그가 안전하길 바랐다. 어쩌면 서현의 서신으로써 희사 자신의 마음을 달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반역에 관련한 서신을 전부 읽는 희사로선 아직 서현에게 해를 가하려는 기미가 없기에 여태 잠자코 있었다. 만일 또 다시 서현을 암살하려 했다면 아마 자신은 다시 서현을 구하러 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희사는 서현을 지나쳐걸어 자연스레 함을 책장 옆에 밀어두었다. 서현의 시선이 함을 향했다.

“그 함은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내가 보낸 서신들을 모아놓은 건 아니고? 하하.”

기분 좋은 서현의 말에 희사는 심장이 다시금 철렁 내려앉았다. 희사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서현의 앞에 다시 섰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도 돼? 나는 오래도록 있었으면 좋겠지만.”

서현이 마치 비웃는 듯 입 꼬리를 올렸다. 희사는 그 웃음이 조금 이상하다 여겨졌다.

“왜 대답을 하지 않지?”

“무엇을.”

“저 함에 대해서 말이야.”

“네 말이 맞아. 네 서신을 담아 둔 것이라 쑥스러워 그래.”

“과연. 그것뿐인가?”

서현이 희사의 눈을 그대로 쏘아봤다. 희사는 올곧게 자신을 직시하는 서현의 눈빛에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혹시, 그가 안의 서신 본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그리고 어색함을 알아챈 것은 그와 동시였다. 지나치게 고요한 집안.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 어머니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집안의 식솔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 장에 나섰다 하여도 두어 명은 집안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한차례 떨었다.

“참 이상하다.”

서현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희사는 아무 말도 그에게 건넬 수 없었다. 그가 모든 서신을 본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던 것이다.

“너를 전부 알았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든 것이 내 착각이었나?”

“…….”

“희사 내게 진실을 말해봐.”

희사는 그제야 직감했다. 그가 함안의 서신을 모두 봤다는 것을. 그 함을 아무데나 내버려둔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언젠가는 그에게 알려야하고 또는 들켜야했던 일이다. 그럼에도 부모와 서현 중 그 어느 쪽을 버릴 수 없는 희사기에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반역은 국법으로 다스린다. 그것은 황제의 아내일지라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서현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이상 반역에 가담한 자들은 전부 참수 당한다. 그것은 희사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정말 네가 나를 배신한 것인지, 네 입을 통해 듣고 싶어. 그게 아니라면 내가 납득할만한 변명을 해.”

서현의 목소리는 떠나가는 연인을 붙잡으려는 어느 남자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희사는 차라리 자신도 처형당해 서현이 편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서현을 배신한 것은 사실이다. 서현에게 모든 전말을 고해 그가 자신만을 살려둔다 하더라도 기쁘게 살아갈 순 없다.  

희사는 침상에 주저앉았다. 서현이 희사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일국의 황제가 한낱 반역자의 앞에서 몸을 낮추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희사가 바닥으로 주저앉으려 하자 서현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희사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희사, 계속 내 곁에 있어줄 거지? 내가 황제가 되거나 그렇지 못해도 너는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주었으면 해.’ 실제론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으나 맞닿은 얇은 천 사이로 그날의 서현이 속삭이고 있었다. 희사는 눈 안이 시큰거렸다.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어. 아니 내가 한 행동은 이미 당신을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난 용서도 애원도 하지 않아. 그저 우리가 사라짐으로써 당신이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 난 결국 당신도 내 부모도 배신하는 꼴이 되어 버렸어.    

“희사, 무슨 말이라도 해봐.”

서현은 희사를 올려다보지 못한 채 애원했다.

“내가 황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이 자리를 현성에게 양보해주었으면 진정 네가 나를 사랑해주었을까?”

희사는 서현의 말에서 그동안 자신이 그를 사랑한 척 연기해왔다고 오해하는 것을 깨달았다. 희사의 입은 여전히 굳게 다물어 있었다. 대답 없는 희사의 무릎에서 얼굴을 떼어낸 서현이 천천히 일어섰다. 서현이 희사를 눈에 박아 넣듯 쳐다봤다. 그 눈빛엔 그 전 같은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희사는 이기적이지만 그에게서 이율배반감을 느꼈다. 혹시라도 서현이 자신을 배신했다면 몇 번이든 용서했을 것이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야만 했기에 자신을 배신한 거라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허나 서현은 서신만으로 이미 자신의 마음까지 부정하고 있었다. 

서현, 너는 정말 내 마음이 그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어찌 당신을 배신하기 위해 내 마음까지 지어낸 것이라 생각할 수가 있어. 나는 당신과 내 부모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에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했는데. 희사는 자신이 가장 원망스러웠지만 이렇듯 쉽게 자신의 져버리는 서현도 원망스러웠다. 서현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은 진심이었기에 이기적인 마음을 품는 것이었다.

“너를 위해 현성의 친족을 전부 살려두었다. 허나, 이젠 그러지 않겠어. 그래봐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서현은 최후통첩을 하듯 소리쳤다. 희사는 여전히 침묵했다.

“재미있더냐? 그래, 내 마음을 가지고 놀면서 현성들과 작당하니 아주 우스웠겠지.”

이를 갈며 말하는 서현의 눈에는 분노보다 더 큰 슬픔이 서려있었다. 희사는 그가 소리칠수록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살고 싶다면 애원해. 그러면 너만이라도 살려주겠으니.”

애원은 희사가 아닌 서현이 하고 있었다. 희사는 시큰거리는 눈을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보냈다.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잠깐의 시간만으로 얼굴을 온통 적시는데 충분했다. 서현은 그것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현은 그가 슬퍼서 우는 건지, 분해서 우는 건지 이젠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졌다. 그 작은 몸에서 한껏 피를 흘렸던 그 날처럼 몸 안의 수분을 전부 빼내고 나서야 희사가 일어섰다. 

“내 가족은?”

결국 전할 말이 고작 그것뿐인가. 서현은 순간 희사의 얼굴을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그래 네 그 잘난 가족이 환진의 황제를 죽이려 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치러야겠지. 물론 너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래.”

서현은 희사의 입에서 진실이든 거짓이든 듣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를 정말 사랑하기는 했느냐고. 허나 희사는 아무 대답도 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서현은 저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다정하게 쓸어주고 싶지만 그와 반대로 전부 망가뜨리고 몸뚱이만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순수하게 희사를 사랑했던 감정은 그의 배신으로 인해 자신역시 변질되고 있었다. 

내가 네게 있어선 죽어도 될 만큼의 존재였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해하려고 해도 용서할 수가 없어. 네가 만일 네 부모에 의해서, 타의로 말미암아 동조하게 된 일이라 해도 난 여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렇다면 네가 나보다 네 부모를 우선했다는 것 또한 내겐 배신으로 다가와. 그런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사실 이제와 네가 아무리 내게 애원한다 해도 더 이상 현성과 네 부모를 살려둘 생각은 없어. 그들을 살려두면 넌 내가 아닌 그들에게 돌아가겠지. 그리곤 또 나를 배신할 것이라 확신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너를 원해.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어. 그러니 네 눈앞에서 그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현성의 본질을 보여주겠다. 네가 그리도 아꼈던 현성이 죽음과 너 사이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자행할지 궁금하지 않아? 

서현은 희사를 사랑하면서 이제껏 내면의 흉포한 본성은 꼭꼭 감춰왔었다. 감췄다기보다는 비춰질 일이 없었다. 서현은 방안에 멀거니 서있는 희사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황제의 수행병사 두 명이 서현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이는 희사가 오기 전 이미 연행됐다. 환진의 각 지역 제후들은 북방을 제외하곤 사병을 거느릴 수 없었다. 유악의 치안을 지키는 경비 역시 제후의 소속이 아니라 황제의 수하였다. 희사의 부모는 자신들을 신변을 보호했던 자들에 의해 붙들려갔다. 참 우스운 일이다. 

서현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병사 둘이 방으로 사라졌다. 서현은 희사가 포박되어 나오는 꼴을 그대로 지켜볼까하다 그만두었다. 희사의 배신은 가슴이 무너지다 못해 증오스러웠다. 서현은 황궁에 당도하는 시간동안 단 한 번도 희사를 찾아보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그의 식솔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희사 역시 망가뜨릴 충동을 참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서현은 수년간 자신을 배신한 대가를 그렇게 간단하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미치면 한치 앞의 일은 물론이거니와 상대방이 자신을 위하는 마음의 깊이까지도 보지 못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서현 역시 보통 사람과 같이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나흘을 내리 달려서 도착한 황궁에는 이미 서현의 지시를 받은 측근 사황(事黃)이 현성과 그 무리들을 하옥시켰다. 옥에 갇힌 내내 역모의 증거를 대라는 2황비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미약한 쇳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서현은 가장 먼저 동궁으로 향했다. 자신의 어미를 죽인 현성들은 꼭 동궁 안에서 죽여줄 생각이었다. 희사의 배신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어미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루지 않아도 되었다. 서현은 자조적인 웃음만 흘러나왔다. 그동안 내 어미를 위한 복수마저 눈 덮을 정도로 그리도 네가 사랑스러웠단 말이냐. 허나 이제 그 안이함도 끝이다. 서현은 동궁의 중앙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서현은 황제임에도 황궁 내부에서 자는 일이 드물었다. 암살의 위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동궁이기 때문이다. 침상의 몇 곱절은 되는 옥으로 만든 욕조에 몸을 담갔다. 궁녀들을 전부 물리고, 흐트러지지 않도록 머리를 뒤로 늘여 묶은 얇은 본견 끈을 끌어내렸다. 나른한 얼굴로 욕조에 등을 기댔다. 흉포하게 변해가는 그의 내면과는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손 댈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어렸을 때는 그저 아름답기만 했던 서현은 남자의 나이가 가까워올수록 보는 이로 하여금 환상에 가까운 욕망을 품게 하는 미남자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허나 황궁의 모든 이는 알고 있다. 그것은 달콤한 꿀이 아니라 독에 가깝다는 것을. 황제로선 더없이 현명한 성왕이나, 한 인간으로선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되는 자였다. 

서현은 쉬이 사람을 믿지 않으며, 희사를 제외한 자들에게는 진정한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현성의 무리들이 더욱이 희사를 이용하려 한 것일지도 몰랐다.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욕조에 담구고 있던 서현이 불현 듯 몸을 일으켰다. 그 세찬 물소리에 밖에서 대기하던 궁녀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서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들이 마무리를 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직 물기가 잔재한 머리를 말리는 손길을 거두게 했다. 

“어차피 곧 피를 씻어 내릴 것이니 그리 할 필요 없다.” 

한기가 서려있는 서현의 말에 궁녀들의 등 뒤로 식은땀이 솟았다. 서현은 축축한 손으로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현성들이 있는 동궁의 빈방으로 움직였다. 그곳은 황후가 비단 의복을 걸치고 죽은 채 발견된 곳이었다. 그 후로 방안은 전부 비워졌고, 붉은 칠로 문을 도색했다. 그러고는 암살당한 황후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라 하여 침적혈(侵赤血)이라 불렀다. 바늘에 묻은 붉은 피를 뜻했다. 그 문 앞에 이미 사황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축축이 젖어있는 서현의 머리를 보고 놀란 듯 하였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죄인들을 전부 옮겨두었습니다.”

“그는?”

사황은 서현이 말하는 그가 누군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분 역시 지시대로 하였습니다.”

서현은 답 없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오랜 시간 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문이 끼긱거리며 괴이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많기도 하군.”

서현의 등장에 앞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현성의 친족들이 더욱 몸을 움츠리며 긴장했다. 서현은 그 수많은 죄인들 틈에서 희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이들은 전부 포박되어 있었으나 희사만이 자유로운 상태였다. 희사는 서현을 올려보지 못했다. 사나흘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했을 뿐더러, 설사 기운이 있더라도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폐, 폐하. 오해십니다. 저는 폐하를 단 한 번도 해치려 한 적이 없습니다. 부디 오해를 거두어주십시오.”

2황비가 아직 서슬 퍼런 눈을 들어 서현을 마주했다. 서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사황이 뒤에서 서현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2황비는 그 누런색의 종이가 무엇인지 직감했다. 밀서(密書)였다. 그 밀서를 읽는 서현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침착했다. 

-커다란 암캐 한 마리를 죽였으니 이제 그 개의 자식만이 남았다. 작은 암캐는 제 새끼가 성하지 못하여 걱정할 것이 없다. 짐새의 독을 마신 자는 망각의 강을 건너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허나 큰 암캐의 자식이 교활하니 쉬이 없앨 수가 없다. 개잡이 조차 그 미친개를 당해내지 못하니 다른 방도를 찾아야한다-

“내용이 어떠한가. 내가 보기엔 바로 그대의 글 솜씨 같은데 말이지.”

2황비의 어깨가 파르르 경련했다. 희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현의 눈빛은 어느새 희사에게로 옮겨있었다. 희사는 서현의 외침을 들었다. 나를 봐, 대체 네가 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보란 말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참아 와야 했던 것들 또한 직접 네 눈으로 봐! 희사는 크나큰 괴로움에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폐하. 오해십니다. 그것은 저의 필체가 아닙니다. 제 필체와 비교해보십시오!”

“그럼 이 글은 대체 누가 지었단 말이지?”

2황비는 한차례 서현의 눈을 보고 유악 제후의 아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받은 여자가 눈을 부릅떴다. 2황비는 혼자라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희사의 어미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어 실핏줄이 불거진 눈만 분함을 대신 토해내고 있었다. 서현은 눈앞이 상황들이 참 우스웠다. 2황비의 옆에 꿇어앉은 현성에게로 다가갔다.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들자 2황비가 서현의 앞으로 기었다. 서현은 그녀를 내려 보지도 않고 현성의 허벅지에 칼을 찔러 넣었다. 현성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형님, 형님!” 애원하며 부르는 소리는 아랑곳 않고 다른 쪽 허벅지에도 칼을 찔러 넣었다. 희사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밭은 숨만 내뱉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너와 현성만은 살려주겠다. 현성의 목이 잘리는 것을 네 눈으로 정히 보고 싶다면 거짓을 고해도 좋다.”

서현의 말이 분명 거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2황비는 썩은 밧줄이라도 잡아야했다. 그것은 현성 역시 마찬가지다.

“형님, 저것들이!! 저것들이 저와 제 어머니를 꼬여냈습니다. 유악의 것들이 형님을 암살하려 했으며 저를 억지로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 했습니다. 저는 절대로 형님을 배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그렇군.”

“그. 그러니 형님 저와, 컥.”

현성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칼이 현성을 목을 꿰뚫었다. 뾰족한 사선의 칼날이 현성의 뒷덜미를 관통했다. 칼을 쑥 빼내자 피가 솟구치며 현성의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부들부들 경련하는 현성의 모습에 2황비가 소리를 내질렀다. 서현은 그것 역시 듣기 싫다는 듯 곧바로 여자의 숨까지 거두어버렸다. 한번 여자의 심장을 관통한 칼은 주저 없이 그녀의 몸을 벗어났다. 바닥에 흥건히 흩어지는 피는 고인빗물처럼 불어났고, 솟구쳤던 피는 서현의 몸을 제멋대로 수놓았다. 

“거짓을 고하면 죽이겠다 미리 말했지 않은가.”

서현이 쓰러진 시체를 보고 웃었다. 희사는 그제야 서현을 올려보았다. 희사의 눈앞에 피를 뒤집어쓴 서현은 마치 자신이 아는 그가 아닌 것만 같았다. 저리도 잔인한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늘 다정했던 서현이다. 그런 것을 자신이 바뀌어놨단 말인가. 

“유악의 자들만 남기고 전부 끌고 나가라.”

사황에게 지시하자 현성과 2황비의 시체까지 포함해 전부 방 밖으로 끌려 나갔다. 재갈이 물려있는 자들이 서현을 보며 울부짖었다. 서현의 손에 죽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결말은 곧 죽음인 것을 잘 알았다. 서현은 그들에게는 눈길하나 주지 않고 희사의 몸을 일으켰다. 남은 것은 희사와 희사의 부모뿐이었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세상과 단절됨을 뜻하듯 거침없었다. 서현은 희사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희사의 목덜미를 아무렇게나 어지럽힌 머리칼마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품에 안긴 희사의 입이 달싹거렸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에 서현이 희사의 얼굴에 귀를 가져다댔다. 

“…만 해.”

서현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희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스러우나 향기마저도 증오스럽다. 아니 증오하지도 못한다. 그저 그를 가지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만이 커질 뿐이다. 

“희사, 다시 말해봐.”

“이제, 끝내. 그만 해 서현.”

서현이 희사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만하라니? 내가 무엇을 했기에 그만하라는 말인가. 네가 그리 아끼는 현성을 개죽음으로 만들어서, 그래서 분해 우는 것인가? 그렇다면야 더더욱 그만둘 수는 없지. 서현은 눈앞이 새까맣게 변한지 오래였다. 

“이제 그만 죽고 싶어?”

희사의 턱 앞에 칼을 드밀었다. 희사는 체념한 사람 마냥 힘없이 주저앉아있었다.

“아니, 그렇게 쉽게 죽일 순 없지. 네가 나를 몇 년이나 속여오고 능멸했는데, 난 이 찰나의 시간으로 겨우 복수를 끝내라는 건가.”

“그렇지 않아.”

희사가 서현의 눈을 들여 보았다. 진심을 알아주길 원하진 않는다. 하물며 삶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혹여나 죽어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서현 당신과 아무 접점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싶을 뿐이다. 이제 이런 연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서현의 칼이 희사의 정수리 위로 들렸다. 마치 죽음을 결심한 듯한 희사의 눈에 서현은 소리치며 칼을 내리그었다. 희사는 그와 동시에 눈을 감았다. 푹, 하고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칼의 울음이 희사의 귓가를 괴롭혔다. 

“흐으으으으!”

여자의 막힌 신음 소리에 놀란 희사의 얼굴이 재빨리 어머니를 향했다. 여자의 부푼 가슴에 서현의 칼이 반쯤 처박혀있었다. 유악의 제후 역시 자신의 아내를 보고 끅끅거리며 흐느꼈다. 희사가 경악에 질려 서현을 올려봤다.

“왜? 네가 내 어미를 죽였는데, 나라고 그러지 못할 것이 있더냐.”

“서현, 제발….”

“나를 서현이라 부르지 마라, 넌 역모에 가담한 죄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서현이 차갑게 말하며 희사의 얼굴을 내리쳤다. 화끈한 통증에 희사는 눈앞이 핑 돌았다.

“나를 배신하는데 이정도의 보복도 생각하지 않았단 말인가. 혹, 내가 너를 특별히 여겨 너의 부모까지 그리 여길 거라 착각한 것은 아니겠지?”

서현이 칼을 빼내어 다시 여자의 반대쪽 가슴에 찔러 넣었다. 부릅뜬 여자의 눈과 마주친 희사는 눈물을 마구 쏟아냈다. 여자가 말하고 있었다.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제대로 해주었으면 내가 이런 죽음을 맞이할 필요도 없었을 터인데! 원해서 서현을 암살하려는 집안에 태어난 것도 아니며, 또한 원해서 역모에 가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자의 대한 죄책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주 어렸을 적에는 서현만큼이나 다정했던 여자였다. 희사는 피를 뒤집어 쓴 서현의 모습에서 이 방안의 그 누구도 쉽게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희사가 서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제발… 서현.”

서현 역시 희사가 삶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죽이더라도 단 번에 죽여 달라는 뜻이었다. 허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다시 여자의 가슴을 난자했다. 고통스럽게 죽이려면 뱃가죽을 뚫는 것보다 두꺼운 살덩이를 찌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뱃가죽 안의 장기가 찢겨지면 사람의 목숨을 쉽게 끝나나, 살이 많은 다른 부위는 다르다. 찢기는 고통의 정도는 같지만 그 시간은 길다. 서현이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허나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대가가 필요하지. 안 그런가?”

여자는 이미 검은자가 뒤집혔고, 재갈엔 역류한 피가 흥건했다. 희사는 서현의 발밑에 고개를 숙였다. 그가 기라면 길수도 있다. 아버지마저 저리 고통스럽게 떠난다면…… 희사는 상상만으로도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탓이었다. 서현이 저렇게 된 것도 부모가 이리 죽어가는 것도.

“제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할 테니. 그러니 제발 더는 고통스럽지 않게……서현 제발.”

서현이 허리를 굽혀 희사의 머리채를 잡았다. 힘없이 들린 얼굴은 이미 눈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서현이 희사의 뺨을 내리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아닌 둔탁한 소리가 퍼졌다. 희사의 얼굴이 함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를 서현이라 부르지 말라했다. 이곳에서 서현이라 부를 수 있는 자는 이제 아무도 없다.”

희사가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서현의 말이 아파서, 이렇게까지 온 자신들이 불쌍해서 슬픔이 흘렀다.

“폐, 폐하. 제…어머니를 부디….”

“내가 한번이라도 너의 폐하였던 적이 있었나? 진정 나를. 너의 황제로 생각한 적이 있었느냔 말이다!”

서현은 상대를 바꾸어 유악 제후의 팔을 썽둥 잘라냈다. 피를 잔뜩 머금은 날카로운 칼은 어디든지 한 번에 자를 수 있게 보였다. 유악 제후는 바닥을 미친 듯이 기었다. 잘려진 어깨에서부터 바닥에 한 폭의 적색 그림이 그려졌다.

“그만!!! 그만!!!! 폐하, 폐하. 제발 자비를!”

희사가 서현의 발밑에서 기며 울었다. 서현은 그럼에도 마음이 충족되지 못했다. 이런 것을 원한 것은 아니다. 아니 이런 것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서현은 희사의 울부짖음에 다정히 그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희사, 나와 자고 싶어?”

희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젖은 눈을 들었다. 서현의 뺨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들이 뚝뚝 흘렀다. 

“자고 싶다고 말해봐. 내 것을 네 안에 처박고 싶다고 말해보란 말이다.”

희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을 참는 모양새에 서현이 유악 제후의 남은 팔마저 잘라냈다. 이번에는 깨끗하게 잘라내지 못하여 팔과 어깨를 이은 근육이 늘어졌다. 잘리다만 팔이 제후의 어깨에서 대롱거렸다.

“아……아!”

희사는 흐느낌에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 허나 서현은 인내심 있게 희사의 말을 기다렸다. 유악 제후의 다리마저 자르려는 순간 희사가 입을 열었다.

“폐하와! 폐하와…자고 싶습니다. 당신의 것을 제 안에 넣기를 원합니다.”

“하.하. 하하하.”

서현이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희사는 머리가 이상해 질 것만 같았다. 서현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면 이리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똑같았을까. 희사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서현이 두려웠다. 자신이 사랑한 자가 분명한데도 그가 무섭게만 느껴졌다.

서현이 희사의 옷을 젖은 칼로 찢었다. 장포 자락이 칼이 지나가는 곳마다 쉽게 갈라졌다. 드러난 희사의 가슴을 서현이 혀를 내밀어 핥았다. 소름이 돋으며 유두가 단단히 섰다. 서현은 참을 수 없는 욕망에 그의 가슴을 이로 물었다. 희사가 고통에 신음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함부로 양 유두의 살을 깨물었다. 넝마가 된 천이 서현의 얼굴을 간질였다. 

“들어, 이러라고 네 손을 자유롭게 해준 것이니까.”

서현은 희사의 양 손에 찢긴 천을 그러쥐게 해 어깨까지 들게 만들었다. 희사가 직접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에 서현은 더 큰 욕망이 서렸다. 희사는 몸까지 떨어가며 흐느꼈다. 서현이 바지자락을 풀어 단단히 선 기둥을 내밀었다. 희사는 이 상황에서 발기한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서현은 희사의 입에 자신의 기둥을 갖다 댔다. 희사가 입을 벌리지 않자 다시 제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희사가 그것을 보고 그의 것을 재빨리 물었다. 발기한 커다란 것은 혀를 아래로 누르며 입안으로 들어왔다. 서현은 자신의 기둥이 희사의 부드러운 혀와 가볍게 마찰되는 입천장을 느끼며 허리를 흔들었다. 가슴을 스스로 드러낸 채 입에 한가득 기둥을 물고 있는 희사의 모습에 서현은 더 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처음은 다정하게 해주고 싶었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속지 않는다. 

점점 커지는 서현의 것에 희사는 부르튼 입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한번도, 단 한 번도 서현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할 것이라곤 꿈에서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서현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희사 역시 분명 육체적인 것도 있었다. 허나 피바다 속에서 그것도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죽음 앞에서 이럴 것이라곤 결코 예상치 못했었다. 점점 깊이 파고 들어오는 서현의 기둥에 두 구슬이 턱까지 닿았다. 

목구멍을 마구 헤집는 바람에 목젖이 계속 뒤로 밀려났다. 헛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서현의 것을 빼낼 수가 없었다. 삼키지 못한 침이 서현의 움직임을 더 용이하게 만들었다. 콜록거리며 목 안쪽의 점막이 귀두를 조일 때마다 사정의 기운이 가까워오는지 서현은 더욱 거세게 입안을 헤집었다. 희사가 퍽퍽 부딪히는 반동에 못 이겨 가슴을 드러냈던 손을 내렸다. 

흔들거리는 몸을 지탱하려 서현의 허벅다리를 부여잡았다. 서현이 희사의 머리채를 깊숙이 사타구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뜨거운 액이 열린 목구멍으로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비릿하고 물컹한 정액이 속수무책으로 넘어갔다. 희사가 연신 막힌 기침을 해댔지만 서현은 사정이 다 끝날 때까지 희사를 놓아주지 않았다. 수차례에 걸친 사정이 끝나고 희사의 입에서 여운을 즐기던 서현이 그제야 기둥을 빼냈다. 묽은 타액과 서현의 흰 정액이 뒤섞여 긴 실을 만들어냈다. 희사가 서현의 다리를 잡은 손을 놓고 주저앉아 밭은 숨을 쉬었다. 마저 삼키지 못한 정액이 희사의 입가를 더럽혔다. 서현은 그것을 검지 손으로 훑어 희사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희사가 서현은 손목을 잡았다.

“왜. 왜…”

“그러는 너는 왜, 대체 왜 나를 사랑한다 했지?”

서현은 희사의 대답을 듣기 전, 인간 같지도 않은 신음을 내뱉던 유악 제후와 그의 아내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어차피 극심한 고통에 제정신이 나간 지 오래였다.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숨통을 끊어주었으니 만족스러운가.”

볼 일을 다 마친 자처럼 옷매무새를 정리한 서현이 몸을 틀었다. 미련 없이 방을 나서려는 서현의 다리를 희사가 부여잡았다. 서현이 그것을 무감각하게 내려다 봤다. 

“나를, 나도…”

희사의 입가를 촉촉이 적시는 액들에 의해 서현은 다시 한 번 아래가 발기하는 것을 느꼈다. 

“널 죽이진 않겠다. 혹, 저들과 같이 괴롭게 죽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분명 말했다. 나를 배신한 대가는 짧은 시간으로 보상할 수 없다고.”

번복 없는 서현의 말에 희사가 힘없이 잡은 그의 바짓단을 놓았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눈동자가 텅 비었다. 서현은 그를 방에 두고 나오면서 일렀다. 

“만 하루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또 나오지도 못하도록 하라.”

“분부 받들겠습니다. 폐하.”

동궁 경비가 허리를 굽혔다. 서현은 사람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복종시키는지, 또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지. 희사에게 있어서 죽음은 늘 먼 존재였을 것이다. 서현의 눈앞엔 늘 죽음의 위협이 잔재해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죽는 모습을 보는 것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가장 처음 자신이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남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저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라는 철칙 하에 움직일 뿐. 

희사의 눈앞에 가장 처음 닥친 죽음은 바로 공포다. 고통에 몸부림쳐가며 정신을 잃어도 사람의 목숨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죽음에 의연한 자라도 눈앞에서 고통에 절규하는 자를 보면 공포에 머리가 안돌아가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일 경우에는 더더욱. 희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다. 죽음보다 더 가까운 것은 극심한 고통이라는 것을 잘 깨달았을 테니까. 방으로 돌아온 서현은 피로 엉망이 된 겉옷을 벗었다. 금실로 놓아진 용은 이미 제 색을 잃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서현은 뜨겁게 달궈진 욕조에 다시 몸을 담갔다. 피 칠갑이 되어 돌아온 황제를 보고 방안의 궁녀들 중 그 누구도 쉽사리 서현의 시중을 들러 들어가는 이는 없었다.

         

* * *

서현의 예상을 대변하듯 희사는 갇힌 방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피비린내는 시간이 갈수록 더 진해졌다. 피 냄새는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벽의 한 면을 장식한 불투명한 창을 통해, 기우는 해가 방안의 어둠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희사는 마구 난자당한 부모의 시체를 보며 끅끅거렸다. 죽음을 각오했으나 이렇게 끔찍한 결말일 줄은 몰랐다. 아니 몰랐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늘 다정한 서현만 봐왔기에 죽음에도 분명 자비가 있을 것이라 자만한 것이다. 

그를 죽이려 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니 그것이야말로 모순이었다. 희사의 온몸이 떨렸다. 서현이 자신을 살려두겠다는 말에 가슴 한구석에서 분명 안도하고 있었다. 그럴 순 없다. 자신도 같이 죽었어야했다. 희사는 두려웠다. 죽음보다 고통이, 그리고 그 고통을 줄 서현이 두려웠다. 자신의 무기력함과 우유부단함이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희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부모의 시체 앞에서 그저 울기만 했다. 눈이 뒤집힌 여자가 희사를 노려봤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죽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아아아아. 희사가 절규했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희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피 웅덩이 속에서 흐느끼는 것뿐이었다.   

희사가 살육의 방에서 꺼내진 것은 그 다음날 동이 트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단 하루만인데도 희사의 모습은 방 안의 시체와 다름없었다. 궁녀들의 손에 의해 몸이 닦이고 고운 환진의 비단 의복이 입혀질 때까지도 희사는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멍했다. 소매가 길고 허리의 선이 돋보이게 들어가며 발등을 감싸는 길이의 겉옷은 희사를 더 아슬아슬하게 보이게 했다. 단장을 마친 희사는 서현의 방으로 옮겨졌다. 익숙한 방안 풍경이었다. 침상을 마주하는 벽에는 황태자의 상징인 승천용이 꿈틀거렸고, 서현이 황제가 되고 난 뒤 왼쪽 벽에는 위용한 자태를 자랑하는 용이 새겨졌다. 그 용은 희사를 그대로 쏘아보고 있었다. 

희사는 고개를 내려 손등을 전부 덮은 소매를 내려 봤다. 고운 다홍색의 비단 천에는 황제의 용만큼이나 수려한 꽃들이 봄의 향연처럼 수놓고 있었다. 희사의 머리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다. 자신이 입은 옷은 혼인을 하지 않은 여자가 입을 법한 환진 의복이었다. 희사가 깜짝 놀라 겉옷을 벗어 내렸다. 그 안엔 가슴에서부터 허벅다리 중간까지만 감싼 촘촘한 망사천이 드러났다. 기가 막힌 안의 모습에 희사는 다시 윗옷을 걸쳤다. 동시에 문이 열리며 서현이 들어왔다.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린 미남자는 희사를 보더니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썩 나쁘진 않군.”

친우이자 연인과도 같았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위에 군림하려하고 있었다. 다가온 서현이 희사의 겉옷을 뒤로 쓱 밀었다. 미끌거리는 비단천이 지는 목련처럼 빠르게 낙하했다. 서현은 드러난 희사의 몸을 감상 중이었다. 망사 안으로 보이는 흰 살결은 그대로 전부 먹어치워도 달콤할 것만 같았다. 광폭한 생각들이 서현의 머리를 지배했다. 지배라기 보단 꾹 눌러왔던 서현의 본성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태껏 그 서현의 본성을 막은 것은 희사였다. 그리고 그 본성을 다시 일깨운 것도 희사였다. 

서현이 몸을 기울이자 희사의 몸이 침상으로 쓰러졌다. 엉덩이부터 털썩 주저앉은 희사가 연신 떨리는 눈으로 서현을 올려봤다. 서현이 이다음엔 무슨 짓을 할 것인지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차라리 내가 싫다 말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네 마음을 가지기 위해 현성에게 황위를 주었을 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희사는 침상에 쓰러진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서현이 그 모습에 이를 갈았다. 나와는 이제 아무런 대화도 하기 싫다 이건가. 뭐 좋아. 그 입은 얼마든지 열게 할 수 있으니. 

서현이 희사의 몸에서 거칠게 망사천을 뜯어냈다. 부욱하는 소리와 함께 희사는 너무도 쉽게 전라가 됐다. 서현이 희사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분명 온몸을 깨끗이 씻어냈음에도 피냄새가 아직도 서려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작은 젖꼭지 위로 몇 해 전 자신을 감싸다 찢겨진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상처의 잔해에 이를 세워 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상처를 다시 파고들었다. 까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희사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서현은 깊이 박혔던 송곳니를 떼었다. 찐득한 피가 솟아나 희사의 어깨로 흩어졌다. 그것을 혀로 담아 서현이 쓸어 올렸다. 희사의 피가 서현의 아랫입술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상체를 조금 세운 서현이 희사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포갰다. 또다시 시작되는 피냄새에 위액이 역류할 것 같았다. 

서현은 입을 떼려는 희사의 양 뺨을 그러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혀를 안쪽까지 놀리며 희사의 작은 혀까지 빨아들였다. 희사는 혀가 뿌리까지 뽑혀나가는 고통에 서현의 품으로 바짝 붙을 수밖에 없었다. 희사가 서현의 소매를 꽉 쥐었다. 서현은 그 손목을 붙들어 옮겨와 자신의 것을 만지게 했다. 얇은 하의 밖으로 꼿꼿이 선 기둥이 느껴졌다. 맥박까지 여실히 느껴지는 바람에 희사는 손을 떼려했다. 서현의 힘이 더 셌기에 꼼짝할 수 없었다. 

서현이 희사의 양 발목을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희사의 하체가 적나라하게 서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축 쳐진 기둥을 동그란 두 주머니가 받치고 있었다. 다리를 더 위로 끌어올리자 힘없이 흔들리는 것이 달랑거리며 배 위로 넘어갔다. 해훈은 엄지손을 들어 굳게 닫힌 구멍을 만졌다. 메말라있는 구멍은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밖에 누구 있는가!”

희사의 하체를 빤히 바라보던 서현이 소리쳤다. 서현의 방 앞을 지키는 궁녀중 하나가 서현의 부름에 들어섰다. 희사는 깜짝 놀라 몸을 버둥거렸다. 이것이 말이나 될법한가. 전라인 자신을 수치스러운 자세로 만들어놓고 다른 이를 불러들이다니. 희사는 믿을 수 없는 서현의 태도에 입술을 꽉 물었다. 궁녀도 눈앞의 상황에 꽤나 놀란 눈치였지만, 동궁에서 가장 잔뼈가 굵은 자답게 침착함을 유지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밑을 부드럽게 할 만한 것을 가져오라.”

황제가 뜻하는 밑이라는 것은 깔려있는 남자의 구멍을 뜻했다. 궁녀는 허리를 굽힌 후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서현은 연신 발버둥치는 희사는 악력으로 붙잡았다. 희사는 여전히 다리를 한껏 벌린 채 아래를 다 드러내고 있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어찌 내게.”

서현이 웃었다.      

“거기서 더 뻔뻔한 말을 지껄인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안아주겠다.”

서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야. 내가 아는 서현은 어디로 간 것이란 말이야. 그동안 서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맞았는지조차 헷갈렸다. 

“폐하, 안으로 들겠습니다.”

궁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희사는 서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서현이 그 모습을 보며 이죽였다.

“들라.”

궁녀는 최대한 시선을 피한 채로 서현에게 유액즙을 건넸다. 처녀와 관계를 하거나 남자의 뒤를 쓸 때 황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액이었다. 중지만한 크기의 도자기에 담긴 유액을 서현이 받아들었다. 궁녀는 그 언제보다 빠르게 방밖으로 사라졌다. 궁녀도 황제의 밑에 깔린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유악제후의 공자. 감히 자신은 유악 공자의 전라를 볼 수는 없는 위치였다. 그는 유곽의 남창도 아니었으며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귀족이었다. 그런 자가 궁녀가 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능욕 당하다니. 

다른 젊은 궁녀였다면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고도 남았을 테지만, 이 늙은 궁녀는 자신이 본 것을 다른 이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유악 공자는 자신이 그런 꼴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죽을 만큼의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궁녀는 서현의 문밖에 서서 황제가 다시 자신을 부를 일이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양귀비 유액인가.”

서현이 도자기의 덮개를 벗겨내고 향기를 맡았다. 그것을 거꾸로 들어 희사의 고환에 쏟아 부었다. 차가운 유액이 몸의 중심을 건드리자 온몸이 바들하고 떨렸다. 서현이 오른손을 펼쳐 고환과 가운데의 쳐진 기둥을 그러쥐어 부드럽게 마찰시켰다. 희사의 몸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희사 역시 귀족의 자식이다. 희사에게도 하인과 귀족의 위치는 너무도 당연히 나뉘어져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이런 꼴을 보였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서현은 아무리해도 희사가 발기할 생각을 안 하자 미끌거리는 손을 엉덩이 안쪽으로 내렸다. 액을 가득 묻힌 엄지손가락은 너무도 쉽게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느끼는 이물감에 희사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서현은 엄지로 살살 희사의 구멍 주름을 핀 다음 중지와 검지를 한 번에 쑤셔 넣었다. 

“흐앗.”

벌어지는 구멍에 희사는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서현이 엉덩이를 때리자 살과 축축한 유액이 만나 찰싹 거리며 큰 소리가 울렸다. 희사가 올려보는 서현의 눈 안엔 이미 다른 것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욕정뿐이었다. 희사의 안쪽 내벽을 긁어내리는 손이 거침없었다. 안의 면적을 넓히듯 후벼 파는 손가락에 아래가 당겼다. 조금 풀어진 구멍에 세 번째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 그만. 그만.”

희사가 서현의 손목을 잡았다. 이 기세라면 서현이 자신의 손가락을 전부 넣을 것만 같았다. 액은 쉽게 마르지 않아 서현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행하고도 남았다. 희사가 겁에 질리자 서현이 허벅다리에 입술을 가져댔다. 파들거리는 허벅지가 사랑스러웠다. 혀로 약한 살을 애무하자 손을 문 희사의 구멍이 움찔거렸다. 안쪽의 가랑이를 살짝 이로 깨물었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비음을 흘렸다. 서현은 조금 더 천천히 희사를 맛보고 싶었으나 앞으로도 얼마든지 마음껏 탐할 수 있었다. 지금은 우선 저 안을 꿰뚫고 싶은 욕심뿐이었다. 서현이 아랫단을 풀어헤쳤다. 단단히 선 기둥이 드러나자 희사의 구멍에서 손을 빼냈다. 아직 손에 남아 미끌거리는 액을 잔뜩 성난 기둥에 쓱쓱 묻혔다. 

희사는 서현의 것을 보며 숨을 삼켰다. 입에 담았을 때는 제대로 볼 수 없었기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저것은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는 어울리는 않는 것이었다. 희사가 몸을 뒤로 빼자 다시 앞으로 오게끔 다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곤 뭉툭한 귀두의 앞부분을 예고 없이 구멍에 비볐다. 움찔거리는 구멍이 기둥의 앞부분을 자극시켰다. 서현이 그 감각을 참지 못하고 희사의 허벅다리를 쥔 채 그대로 안을 꿰뚫었다.        

“아아아! 아아. 아!”

희사는 아래를 꽉 채우며 들어오는 서현의 것에 고통에 찬 신음을 질렀다. 유액의 도움을 받아 찢어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무리하게 살이 벌어지는 고통은 덜어주지 못했다.       

“마음껏 질러. 네 상스러운 목소리를 저 밖에 자들에게까지 들려주는 거다.”

서현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소리도 희사에겐 너무도 멀리 들렸다. 희사는 몸을 잔뜩 경직시키며 서현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서현은 희사의 위로 완전히 올라타 찍어 내리듯 구멍 안에 푹푹 기둥을 박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안을 쑤셔대는 서현의 기둥이 아직 길이 트지 않은 방향으로 갑자기 내리 눌렀다. 커다란 기둥에 내벽이 눌리며 뱃속에서 경련했다. 서현은 잘게 떨리며 기둥을 감싸는 그 내벽의 느낌이 좋았다. 계속 허리를 틀어가며 함부로 처박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좋은데, 이렇게 좋은데 말이다. 그동안 왜 내가 참아야했지?”

낮은 숨소리와 함께 서현이 속삭였다. 희사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추삽질을 하는 서현을 따라가지 못했다. 점점 거세지는 강도에 내벽의 살들이 딸려나가자, 희사는 아래가 전부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서현의 움직임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저 그가 흔드는 대로 몸을 내맡긴 채 시간이 가기만을 바랄뿐이다. 

한곳도 빠짐없이 아래를 전부 헤집어놓고 나서야 서현이 사정했다. 뒤는 어찌되든 상관없이 제멋대로 쏘아 올리는 정액에 희사는 힘없이 눈만 깜빡였다. 정액이 닿은 내벽마다 화끈거리는 둔통이 찾아왔다. 서현이 사정을 마친 상태서 수그러진 기둥을 뺐다. 주륵하고 남은 정액이 같이 딸려 나왔다. 

서현이 희사의 가슴을 끌어안아 세웠다. 그리고 조금씩 닫혀가는 구멍에 손가락 두 개를 푹 찔러 넣었다. 그 상태서 손가락을 벌리자 아래에서 무언가가 마구 쏟아졌다. 서현의 정액이었다. 희사는 뱃속에서 밖으로 쏟아지는 양이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실상 절반이상이 그가 기둥을 뺄 때 같이 딸려 나왔기에 안에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액이 내벽 전체를 타고 흘러내리는 바람에 배안은 전부 그의 것으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안에 남은 정액이 다 빠져나왔을 때쯤 서현이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손에 묻은 축축한 액들을 그의 기둥에 처덕처덕 발랐다. 옆으로 누운 희사의 얼굴로 다시 발기한 기둥을 들이댔다. 희사는 피보다도 더 비릿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왜 더러운가?”

서현이 희사를 머리채를 쥐어 잡아 기둥 앞으로 끌어왔다. 희사의 입매가 서럽게 떨렸다.

“더러운 건 네 뒷구멍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이겠지.”

희사가 눈을 크게 뜨고 서현을 봤다. 서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리가 없다. 분명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다.

“분해? 이 정도는 네가 내 마음을 가지고 논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서현…… 난, 네 마음을…가지고 논적 따위 없어.”

짝하며 방안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희사는 반사적으로 서현이 내려친 뺨을 감싸 안았다. 입안의 어딘가가 터졌는지 안쪽이 화끈거렸다. 

“나를 서현이라 부르지 말라했다.”

희사는 차마 더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울음을 토했다. 몸을 웅크려서 애처롭게 우는 모습에 서현은 그의 머리를 다시 잡아 올렸다. 

“별로 예쁘진 못하군.”

쓰게 웃으며 아직도 발기한 기둥을 희사의 입안으로 들이밀었다. 엉망이 된 채로 자신의 것을 물고 빠는 것을 보자니 안쓰러웠다. 그러기에 왜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었지? 나도 네게 평생 다정하고 싶었다. 원한다면 늘 자상한 서현으로 있어줄 수 있었다. 헌데 그것을 뿌리친 것은 너다. 서현은 처음부터 희사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일국의 황제다. 가질 수 없는 것 따윈 없다. 처음으로 내 온 마음을 준 네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다. 아니 처음부터 괴물이었는지도 모르지. 

목안으로 크륵거리는 신음을 삼키며 희사의 입안에 잔뜩 쏟아주었다. 콜록거리며 정액을 전부 뱉어내는 희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턱밑까지 흐른 것도 전부 다시 올려주어 삼키게 만들었다. 

“넌 이제 환진에서 없는 존재이며, 내가 너를 어찌하든 아무도 내게 무어라 지시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네게 감사해.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너를 마음껏 엉망으로 만들 수도 없었을 테니까.”

서현은 들어올 때와 같이 정갈한 모습을 하고 방을 나섰다. 그의 말대로 엉망이 된 것은 침상의 이부자리와 자신의 몸뚱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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