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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진생환상 (19/21)

외전- 진생환상

진생환상(眞生喚想)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생기 가득한 얼굴의 두 청년이 서로의 손을 잡고, 두 발은 지는 낙엽을 융단삼아 산길을 올랐다. 두 청년은 조금 빠른 속도로 걸었지만 그 걸음걸이에선 경박함이라곤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

“힘들어? 조금 쉬었다 갈까?”

“괜찮아.”

두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초가을 쓸쓸한 바람이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유악산은 험하디 험하지만 오르고 난 뒤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을 두 청년은 이미 수십 차례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아, 혹 어디가 아픈 거야?”

“조금.”

체구가 작은 청년의 목소리에 그의 손을 붙들고 있던 다른 한 청년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럼, 내키지 않으면 내려갈까? 희사 네가 원한다면….”

키가 좀 큰 청년은 갑작스레 손에 실린 힘에 비해 제법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희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미 한참을 올라온 터라 다시 내려가는 것이 더 큰 수고로움이었다. 희사의 가슴엔 사실 한낱 수고로움보다 더 큰 불안함이 잔재해있었다. 희사는 자신보다 조금 앞서 걷고 있는 청년의 얼굴을 올려봤다. 아름다운 옆모습. 태자는 마치 환진의 모든 아름다움만을 모아 만들어낸 피조물과 같았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환진의 최고 미인이라 자자했던 황후의 아들다웠다. 현성 역시 서현과 지나치게 닮은 얼굴이나 그 둘은 풍기는 분위기부터 남달랐다. 현성보다는 서현이 좀 더 남자다웠고 믿음직했다. 아직 현성이 어리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희사는 숨이 가빠짐과 동시에 명치가 지끈거렸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이 불안함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도 다른 생각을 꺼냈지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서현은 희사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힘을 주어 희사의 손을 이끌고 성큼성큼 유악산을 오를 뿐이었다.

“희사, 이제 거의 다 왔어.”

서현은 숨이 차 볼이 발개진 희사를 돌아봤다. 작년도 제작년도 황제의 축일엔 늘 서현과 함께였다. 태자로써 황궁의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당연지사였으나, 서현은 어느 때인가부터 늘 희사와 함께 유악산에서 축일을 맞이했다. 다행히도 황제는 탄생일 따위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며 그런 서현을 나무라진 않았다. 

서현은 오래전,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희사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서현은 불꽃놀이보다 희사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헌데 오늘은 무언가가 이상했다. 산을 모르며 마냥 기뻐하기만 하던 전과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흔들리는 눈동자는 희사가 무언가를 불안해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서현은 산을 오를 때부터 이상한 희사의 태도에 그저 기우이려니 하고 마음을 추슬렀다. 서현의 머릿속에선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 다른 무엇일거라 울려댔지만 서현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유악산의 중간쯤 되는 절벽 앞에 섰을 때 이미 해는 전부 기울어져있었다. 반시진만 더 있으면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희사는 허리쯤에 오는 바위에 엉덩이를 붙인 채 숨을 골랐다. 깨끗한 소매를 들어 서현이 희사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희사는 이렇듯 서현의 다정한 손길이 좋았다. 서현은 언제나 다정했으며 한결같았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만큼이나 자신을 향한 마음도 부드러웠다. 그 오랜 시간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동생인 현성을 더 챙기긴 했지만 희사에게 있어서 서현도 그 이상으로 소중한 존재였다. 희사의 뺨에 서현의 입술이 닿았다. 발갛게 익은 얼굴을 식히듯 서현의 입술은 서늘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가벼운 입맞춤에 머뭇거리며 희사의 눈치를 보던 서현이 이번엔 과감히 입술을 부딪혀왔다. 희사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친우 이상의 것임을 자신도 인지하고 있었다. 허나 그래서 그만큼 더 두려웠다. 두려운 것은 자신의 마음이 아닌 지금의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서현을 없애고 싶어 했다. 현성을 태자로 책봉시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 

희사는 그 누구도 배신하기 싫었다. 허나 늘 가까이 있는 것은 서현보다는 어머니였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눈매와 뜻을 따르지 않는 자신에 대한 분노는 자다가도 깨어 몸서리칠 정도였다. 첩자를 부려 서현이 방심한 사이에 없애버리라는 그녀의 말을, 희사는 마지못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일단은 따르는 척을 했다. 그녀의 뜻대로 자객을 샀으나 그 자객에게 절대 서현을 베어서는 안 된다 일렀다. 어느 정도의 위협만 주고 자신들을 떠나달라고. 자객은 의아해했으나 토를 달진 않았다. 그런데도 이 불안함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희사는 괴로운 눈을 들어 어느새 입맞춤을 끝낸 서현을 바라봤다. 서현이 다정히 웃었다. 희사도 그를 마주하고 애써 미소를 만들어냈다.

“계속 내 곁에 있어줄 거지? 내가 황제가 되거나 그렇지 못해도 희사 너는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주었으면 해.”

서현은 마치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듯 목소리에 잔뜩 힘이 실려 있었다. 희사는 서현의 말대로 그의 곁에 항상 머무를 수 있었으면 했다. 서현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은 그다지 틀릴 것이 없었다. 

“나도 그러기를 항상 바라고 있어. 서현.”

희사의 답에 서현이 마음을 다해 끌어안았다. 희사는 조심히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꽤나 긴 시간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안은 채로 멈춰있었다. 희사는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 2년이었다.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척 서현을 끌어내리려 연기해온 것이 말이다. 

“혹시 내가, 내가 아니게 되도 그건 절대 내 본심이 아니야.”

희사의 의미심장한 말에 서현은 품에 안았던 희사를 떼어냈다. 좀 전부터 산의 소리와도 비슷하지만 그 속에 묻힌 사람의 인기척은 여실이 느껴졌다. 서현은 이미 자신들을 따라붙었던 인영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다가오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자객이었다. 서현은 몇 번이나 자객의 위협을 받았었다. 그때마다 살아남았던 것은 누구보다 뛰어난 그의 감각 덕분이었다. 희사의 앞에선 검을 쓸 일이 없었으나 서현은 웬만한 무장보다도 더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일국의 태자로서 조금이나마 편히 살 수 있는 방법이었다. 서현은 희사의 불안함이 자객과는 상관없기를 바랐다. 현성의 친족들이 황후를 없앤 것이라 확신했지만 물증은 없었다. 서현을 없애려한 여러 번의 암살시도도 현성의 친족들이 가장 유력했지만 그 역시 물증은 없다. 서현은 그 모든 일에 당연히 희사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거라 여겼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서현은 얼굴위에 진한 웃음을 덧붙였다.

“너를 믿어. 그러니 너 역시 나를 믿어야해.”

희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현은 다시 한 번 희사를 안은 채로 말을 이었다.

“혹 너도 그것을 알고 있어?”

희사는 어깨에 기댔던 시선을 올려 서현을 응시했다. 의문에 담겨있는 시선에 서현이 희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누군가가 그러던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다음 생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목숨을 끊는 것이잖아.”

“아니, 그렇다고 했어. 혹시 네가 지금의 내 모습이 싫다면, 난 주저 없이 네가 원하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어.”

마치 지금이라도 뛰어내리겠다는 심산에 희사는 서현을 꼭 붙들어 안았다.

“그렇지 않아. 난 지금의 네가 더없이 소중해.”

“하하, 행복해서 무섭다는 말을 이럴 때 실감하는구나.”

서현의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애써 기척을 숨기고 있던 자객이 빠르게 둘을 향해 덮쳐들었다. 서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희사의 앞을 막았다. 눈 아래까지 검은 복면을 쓴 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지만 눈가의 주름으로 꽤나 연륜이 있는 자임을 암시했다. 얼마나 많은 자들을 죽였는지 그의 눈동자에 생기와 살인에 대한 흔들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현은 그가 이곳에서 죽임을 당하면 저자에게 죽임을 당했던 망자들에게 저 자의 영혼은 갈가리 찢겨질 거란 생각을 했다. 이만큼의 잡생각을 심어줄 상대라면 승부는 이미 한참 전에 판가름이 나있었다. 

희사는 불안한 눈으로 서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시선을 그대로 올려 떨리는 눈꺼풀로 자객과 눈을 마주했다. 겁만 주고 사라지라는 자신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이미 서현을 향해 공격태세를 잔뜩 갖추고 있었다. 혹여나 자객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른 소리를 들은 것이라면…. 제발, 제발 아니기를. 자객은 희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희사는 자객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만일 저자가 이대로 서현을 공격한다면 그래서 서현이 죽게 된다면! 희사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자객이 날카롭게 세웠던 칼날을 서현을 향해 내리쳤다. 서현도 허리춤에 달린 칼을 스릉하고 순식간에 빼들었다. 허나 그것보다 빠르게 서현의 눈앞을 막아선 것은 뒤에 있을 거라 생각한 희사의 몸이었다. 자객이 휘두른 칼은 희사의 어깨를 스쳤고 뜨거운 피가 솟구치며 서현의 얼굴에 튀었다. 서현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어깨를 쥔 채 무너지는 희사를 봤다. 자객은 잠시 움찔하더니 다시 칼을 세워 서현을 향해 달려왔다. 서현은 달려드는 칼날을 막지도 않고 상체만 숙인 채 자객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었다. 편히 죽여줄 생각은 없다. 그렇게 말하듯 서현은 옆구리에 박힌 칼날을 틀어 자객의 몸을 일자로 찢었다. 딱딱해진 자객의 뱃가죽에 칼이 끼긱댔지만, 서현은 그보다 더 큰 힘을 주어 자객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분리된 두덩어리의 몸은 아직 살아있음을 반영하듯 연방 꿈틀거렸다. 서현은 몇 번이나 자객의 몸을 쑤셨다. 

생기 한 톨마저 전부 사라질 때까지 그의 몸을 도륙하다 시피 했다. 희사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사람이라는 형체도 알아 볼 수 없도록 망가뜨린 후에야 칼을 거두었을 것이다. 서현은 정신을 잃어가는 희사를 들쳐 업었다. 분명 어깨를 관통하진 않았다. 스쳐지나갔음에도 길게 찢어진 살에선 피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그 작은 몸에서 뽑아낼 수 있는 피를 전부 쏟아버릴 것만 같았다. 서현은 빠른 속도로 희사를 업고 유악산을 내려갔다. 뒤에서는 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서현은 불꽃놀이가 다 끝날 쯤에야 유악 제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나온 시종들이 깜짝 놀라 피칠갑이 된 서현에게 달려들었다. 서현은 그들을 전부 밀치고 의원이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정좌를 하고 앉아 서책을 읽던 의원이 크게 눈을 떴다. 언뜻 보아도 서현의 어깨부터 가슴팍을 흥건히 적신 피는 그의 것이 아니라 뒤에 업힌 희사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서현이 희사를 침상 위에 서둘러 눕혔다. 의원은 팔을 걷어붙이고 급히 희사의 옷자락을 벗어젖혔다. 

“태, 태자 전하 어쩌다.”

“말은 필요 없다. 당장 그를 치료하도록 하라.”

서현은 초조한 걸음으로 의원의 뒤를 연신 오갔다. 희사의 잔뜩 찌푸려진 얼굴에 서현은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바보같이 그걸 왜 막아서서. 내가 너의 보호를 받아야 할 만큼 약해보였단 말이야! 서현은 원망과 괴로움이 섞인 눈으로 희사를 쳐다봤다. 목숨에 지장은 없겠으나 희사가 받아야할 고통에 서현은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어느새 소식을 접했는지 의원의 방으로 제후의 아내가 뛰어 들어왔다. 서현은 더없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응대했다. 유악에서 자객을 부릴 사람은 현성의 친인척인 저 여자뿐이다. 설사 그럴 리가 없다하더라도 서현과 그녀는 서로에게 눈엣가시인 존재였다. 서현은 희사에게 달려드는 그녀를 제지했다.  

“의원이 치료하고 있으니 그만 다가가거라.”

서현의 말에 여자가 표독스러운 눈매를 들어 건방지게 노려봤다. 그 눈빛에는 네가 같이 있었으면서 왜 희사를 다치게 했느냐는 원망이 담겨있었다. 아니면 네가 아니라 왜 희사가 이리 다쳤냐는 눈빛일 수도 있다. 분명, 희사가 자신의 앞을 막아섰을 때 자객은 서둘러 칼을 들어올렸다. 그랬기에 칼이 희사의 어깨를 관통하지 않고 스쳐지나간 것이다. 서현은 제후의 아내를 쳐다보며 끓어올랐던 머리를 천천히 식혔다. 눈에 띄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자객은 분명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니 유악의 제후 쪽에서 보낸 자객일 가능성이 가장 농후했다. 이들과 관련된 자객이 아니었다면 희사가 막아섰을 때 그는 분명 망설임 없이 희사를 찢었을 것이다. 생각이 정리될수록 서현은 더욱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태, 태자 전하. 그래도 제 하나뿐인 소중한 아들입니다. 어떠한 상황인지라도 봐야겠습니다. 그러니…….”

“나의 의원이 그를 죽이기라도 한단 말인가? 지금은 그대의 걱정스러운 시선보다 의원의 치료가 더 먼저다. 물러가 있거라.”

서현의 강경한 태도에 여자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한동안 의원과 서현을 번갈아보던 여자는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서현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누구도 볼 수 없었던 다정한 얼굴로 희사를 내려 봤다.

“어떤가, 많이 다친 것인가?”

상처를 살핀 의원이 침상 옆 작은 함을 들어올렸다. 그 안에는 약초와 흰천 그리고 환약들이 가득했다. 

“크게 심려할 수준은 아닙니다만, 상처가 아물려면 보름이상은 갈 듯 싶습니다. 찢어진 곳은 깊지 않으나 상처가 꽤 넓습니다.”

의원의 말에 서현은 적어도 한숨을 돌렸다. 서현은 탁상에 주저앉듯이 몸을 기댔다. 그 자객을 고용한 것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려면 아무리 화가 나도 그 자객을 죽여서는 안됐다. 허나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의 몸을 더 도륙했으면 했지 살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온 정성을 다해 치료하겠으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태자 전하.”

동궁의 의원을 같이 대동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런 촌구석 의원에게 희사의 몸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현은 의원이 모든 치료를 마칠 때까지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희사의 이마를 쓰다듬고 밤잠을 설쳐가며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로부터 희사는 삼일이란 시간이 흐르고서야 눈을 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정신이 돌아오는데 생각보다 꽤 긴 시간이 걸린 것이다. 희사는 눈을 뜨자마자 침상의 옆 탁상 위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 보는 서현의 모습이 보였다. 서현은 희사가 정신을 차린 지도 모르는 채 잔뜩 인상만 쓰고 희사의 발치를 내려 보고 있었다. 희사는 그의 괴로운 이마를 펴주고자 손을 들었다.

“아악….”

저도 모르게 쉰 목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졌다. 서현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많이 아플 거야.”

희사는 마치 서현이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표정이 슬퍼보였다.

“괜찮아. 서현, 너는 다친데 없는 거지?”

“다시는 그러지마. 네가 감싸줄 정도로 난 절대 약하지 않으니까….”

당부하듯 말했지만 서현의 말엔 힘이 없었다. 희사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괜찮아, 그래도 네가 아닌 내가 다쳤으니. 만일 서현 네가 죽었다면…. 그랬다면 그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희사는 서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느새 인가 이렇듯 부풀어 올랐는지 그 마음의 크기만큼이나 가슴이 저렸다. 희사는 현성도 서현도 그 어느 쪽을 택할 수 없었다. 분명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희사는 바로 눈앞에 닥친 폭풍에 대비하지 못한 채 거친 돌풍을 그대로 막아서고 있었다. 서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는 희사를 가만히 응시하다 방을 나섰다. 서현이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가 들어섰을 때 희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자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냐.”

아들을 걱정하는 여자의 목소리엔 일말의 진심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선 이제 자신의 핏줄도 한낱 조종해야할 말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은 짧은 시간 안에 그녀를 미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일부러 그런 것이야, 아니면 상황이 그러하지 못했던 것이야.”

여자의 낮은 음성은 희사를 향한 질타를 가득 담고 있었다. 희사는 어머니의 말에 굳게 다문 입을 더 꽉 물었다. 몇 번의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눈을 떴다. 

“어머니, 그의 자리를 뺏으셔야 합니까? 그를 죽이셔야 어머니의 계획대로 되는 것입니까?”

“내가 나만을 위해 이 지경까지 왔다 생각하느냐?! 정녕 우리 상공님과 너를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말이야!”

“저와 아버지는 원치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두렵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사람이 죽고, 또 사람이 죽어나갑니다. 그것으로 얻는 권력이라면 저는 더더욱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여자는 희사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희사는 변해버린 어머니만큼이나 그녀의 욕심이 두려웠다. 

“어찌 너는 네 무능력한 아비를 쏙 빼닮았단 말이냐!”

희사는 분통을 토하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더는 이야기해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반역에 가담했고, 그것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반역이 실패한다면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유악의 식솔들마저 전부 참수 당한다. 그런 무시무시한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반역을 행했다는 것은, 이미 여자에게 어떠한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뜻했다. 여자는 분에 못이긴 숨을 씩씩대더니 거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제야 혼자 남은 희사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눈가가 타올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그녀의 말이 맞다. 무능하여 이도저도 안되며 어떠한 선택도 하지 못하는 한심한 작자다. 서현을 사랑하나 가족을 버릴 순 없다. 현성에게도 몇 번이나 반역에 가담한 자들의 마음을 돌리게 해 달라 사정했지만, 현성 역시 태자의 자리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희사는 혼자 속으로 고통을 삼켜야만 했다. 그 후로도 몇 년이나 서현에게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었지만 속은 이미 자객이 휘두른 칼보다도 예리한 칼날에 전부 헤져있었다. 희사는 반역이라는 무리에 얕게 발만 담군 채로 가슴 속으로 서현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을 당신께 고하고 용서를 해 달라 빌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나는 당신도 내 부모도 버리지 못하니까.

현성의 친족들은 서현을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서현은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미리 생각하고 행동했다. 몇 번이나 자객과 음식에 독약을 탄 것이 현성 친가의 일임을 밝혀낼 수 있었지만 서현은 희사를 위해 입을 다물었다. 허나 서현 역시 황제의 자리를 그저 현성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현성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한 순간 자신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할 것이 분명했다. 태자로 태어나 황제가 될 것이 분명했던 서현은 살기 위해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켰다. 황제가 되면, 그렇게 되면 희사를 위해 모든 것이든 할 수 있게 된다. 대를 잇는 것 따위는 중요치 않다. 제후의 아내는 권력에 미쳐있었고, 서현과 희사는 서로에게 미쳐있었다. 미쳐있는 것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모든 것이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은 서현이 황제가 되는 날까지도 지겹게 이어졌다.

서현과 희사가 18세가 되었을 때, 어느 순간부터 급작스럽게 몸이 나빠진 황제는 노환을 이기지못하고 세상을 떴다. 환진의 법도를 따르자면 황제의 국상은 꼬박 세 달을 채워야했다. 희사는 황제의 국상이 치러지는 동안 내내 황궁에 머물렀다. 유악에서 어머니의 서신이 수차례 당도했지만 희사는 그것을 전부 불에 태워버렸다. 서현이 황제가 되면 이 지긋지긋한 싸움은 끝나는 것이다. 세 달이 지나고 국상의복을 벗는 날 서현은 황제로서 즉위식을 올렸다. 희사는 서현의 즉위식이 있는 이른 오전, 유악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차마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자신은 어머니를 배신한 것이다. 단지 방관한 것뿐이나 그녀에게 있어선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됐다.

서현은 희사가 떠날 것임을 알지 못했다. 희사는 서현이 동궁에서 황궁의 내실로 이동한 뒤 조금 늦게 동궁에서 빠져나왔다. 동궁의 아름다운 정원을 한번 둘러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대기시킨 마차를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황제의 즉위식 덕에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터라 희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복면을 한 검은 의복의 남자가 주변인들보다는 조금 느린 걸음으로 황궁의 내실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는 희사와 반대방향을 가는 중이었기에 눈을 마주할 시간은 충분했다. 희사는 복면에 살짝 드러난 눈과 마주쳤다. 마치 자신이 부렸던 자객과도 비슷한 옷차림. 그러나 어두운 기운은 그 자객보다 눈앞의 남자가 더 강했다. 희사와 마주친 남자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했다. 남자는 마치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계속 서서 눈을 떼지 않았다. 희사는 강렬한 눈빛에 조금 쑥스럽게 웃고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한발자국을 옮기기 전, 휙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남자는 거칠게 희사를 잡아 세웠다. 희사는 조금 놀란 눈으로 남자를 올려봤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남자는 희사의 목소리를 듣더니 더욱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희사는 남자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혹 저를 아십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희사는 남자가 이상하다 여겼다. 정신이 나간 것인가? 아니면 자신과 꼭 닮은 사람을 아는 것인가? 허나 남자의 목소리는 그냥 지나쳐가기엔 너무 진지하고 애달팠다.    

“저는 유악 제후의 아들입니다.”

“그럼, 그대는 이곳의 사람입니까?”

“무슨?”

희사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서 남자를 향해 반문했다. 남자는 힘이 빠지듯 희사의 팔목을 잡은 손을 놓았다. 희사는 작게 고개를 꾸벅하곤 갈 길을 다시 재촉했다. 마음이 찝찝해 다시 뒤를 돌자 복면의 남자는 아직도 이쪽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서 있는 그 지점만 여전히 시간이 멈춘듯해 보였다. 희사는 대수롭지 않게 분명 정신이 이상한 자라 여겼다. 그와 동시에 마음의 병이 있다는 2황자를 떠올렸으나 마차의 올라타서는 이내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희사는 유악까지 도달하는 사나흘의 시간이 마치 순식간 같았다. 황궁은 축제 분위기였으나 유악 제후의 집은 가히 초상집 분위기였다. 세 달 만에 집을 찾은 자식을 향해 보란 듯이 여자는, 집안의 온갖 도자기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말리는 제후도 시종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희사는 넓은 마당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가 한계까지의 성을 내는 것을 끝까지 받아들였다. 

“네 놈이! 네 놈이 그러고도 어찌 내 자식이라 칭한단 말이냐! 네가 우리 집안을 말아먹은 것이다!”

희사는 도자기가 발치에서 부서져도 꼼짝도 않았다. 그저 그가 황제가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을 뿐. 하지만 그것은 희사의 단순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현성, 그리고 서현. 전 그 누구도 배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는 이미 나를 배신했다. 함부로 그 입 놀리지 말거라!”

여자의 분노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역모에 가담했다 알려지는 것도 상관치 않을 정도로 여자는 큰소리로 희사를 나무랐다.   

“이후로 어머니가 원하시는 모든 일을 들어드리겠습니다.”

희사는 이제 그가 황제가 되었으니, 당신도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라 여겼다. 여자는 희사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더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여전히 화가 식지 않은 채로 안채를 향했다. 희사의 곁으로 두 명의 시종이 다가와 그를 일으켰다. 희사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들의 손을 만류했다. 

서현은 황제가 된 후 황궁을 떠난 희사에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서신을 전달하는 서현의 매가 희사를 그리듯 허공에서 구슬프게 울어댔다. 희사는 그의 매만을 황궁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로 어머니가 원한 것은 서현을 만나지 않는 것과, 자신이 직접 어머니의 말과 귀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현성의 친족들과 여자가 여전히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서현이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어머니에게 못 이겨 그저 서찰을 관리하는 것에 그쳤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여자가 전하고자하는 바를 그들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받아 여자에게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여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역모에 얕게 발만 담그고 있던 아들을 가슴께까지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모든 것은 너와 네 아버지를 위한 것이라 여자는 누누이 당부했다. 희사는 유악에서 늘 가슴으로 바랄 뿐이었다. 어서 이 전쟁과도 같은 역모가 끝나고, 서현 역시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희사가 오래도록 바라는 희망이었다. 여전히 아무런 선택도 못한 채 힘이 없는 자신을 저주하면서.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다. 음모는 오래가지 못하고 진실은 거짓의 그림자에서 불현 듯 제자리를 찾는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수를 범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다. 서현은 태자 때와는 다르게 자유로이 운신을 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황궁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서현은 반년 째 연락을 두절하고 있는 희사를 찾아 유악을 향했다. 그 날은 바로 서현의 축일 전 날이었다. 희사를 품에 안고 유악의 절벽에 올라 불꽃놀이를 보고 싶었다. 서현은 따라나서는 인원을 최대한으로 줄여 조용히 희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심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장 나 그를 향해 미칠 듯이 뛰었다. 보고 싶다. 희사 네가 보고 싶어. 유악으로 향하는 익숙한 풍경이 다가올수록 그 외침은 더 거세졌다. 

서현이 미리 연락을 취하지 않은 터라 도착한 유악의 집은 고요했다. 서현은 희사를 만나기 위해 한달음에 구름다리를 건넜다. 마당에서 비질을 하던 어린 시종이 깜짝 놀라며 서현에게 다가왔다. 서현은 간단한 손짓으로 아이를 만류했다. 자신이 왔다는 사실을 직접 희사에게 알리고 싶었다. 자신을 보고 기뻐할 것을 상상한 서현은 방문을 활짝 열고나서야 실망감을 가득 맛봤다. 어딘가에 출타를 했는지 희사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서현의 손짓에 시종은 희사의 외출 소식도 고할 수가 없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이 급했나싶어 서현이 쓰게 웃었다. 

서현은 조금의 여유를 찾자고 생각하며 책장에 가지런지 정리된 서책들과 먼지 한 톨 없는 그의 방을 죽 둘렀다. 희사다웠다. 희사가 없음에도 방에선 그의 손길이 가득 느껴졌다. 서현은 그제야 마음의 두근거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침상으로 다가가 희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서현의 발치에 타닥하고 작은 함이 부딪혔다. 서현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수롭지 않게 그 함을 안아들었다. 그리곤 침상에 앉아 함의 뚜껑을 열었다. 자물쇠가 있는 함이건만 웬일인지 함은 잠겨있지 않았다. 희사가 급하게 어디를 나간 것이라 짐작했다. 

서현은 그 안에 빼곡히 들어있는 서찰들을 펼쳐 보았다. 가라앉았던 심장은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그 서찰은 바로 자신의 문체였다. 그를 그리며 황궁에서 보낸 서찰들. 서현이 보낸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함에 담겨있었다. 희사가 오면 물어볼 생각으로 그것을 전부 침상위에 꺼내놓았다. 너 역시 분명 나를 그리워했으면서 어찌 연락한번 없었는지, 핀잔을 담아 쓰게 웃었다. 함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으려는데 겉에서 보는 함의 높이에 비해 안의 함의 깊이는 얕았다. 겉에서 본 함의 크기가 두 뼘 정도 된다면 실질적으로 안의 깊이는 한 뼘도 채 안됐다. 서현이 손을 집어넣어 함의 모서리에서 엄지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크기의 홈이 파여 있는 것을 찾아냈다.

열지 마, 열어선 안 되는 것이다. 서현의 머리에서 위험 가득한 신호가 울렸다. 서현은 엄지손가락을 몇 번이나 주저하다 결국 홈에 끼워 넣어 함의 중간을 막은 나무판을 들어올렸다. 그 안에도 역시 서찰들이 빼곡했다. 함부로 서찰 속에서 굴러다니는 인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서현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익히 알고 있는 문양. 날아오르는 승천용을 물어뜯을 것은 오로지 하나, 백호 뿐. 서현이 그 인장을 내려놓고 천천히 서찰들을 펼쳤다. 현성, 제 2황비. 그리고 그들의 친족들과 내통한 사실들이 지금 서현의 눈앞에 펼쳐있었다. 황제가 된 이후론 태자일 적보다 죽음의 위협은 적었다. 그것은 이자들이 조용히 뒤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현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 이렇듯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다른 사실이었다. 미칠 것 같은 화가 전신을 새까맣게 태웠다. 희사는 자신을 사랑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희사의 눈빛엔 거짓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를 향한 마음이 너무 커서 그가 역모를 꾸민 부모의 자식이라는 것까지도 덮어두었다. 희사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오래전부터 희사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여왔던 것이다. 이것이 진실인데 말이다.

“그래, 그래서 내가 황제가 되던 날 황궁을 떠났고, 내가 기어이 황제가 된 이후에는 나를 보지 않았던 것인가? 현성을 죽일 수도 있었다. 허나 너를 위해 살려두었어. 결국 내가, 현성이 아닌 내가 황제가 되어 희사 네 계획이 틀어졌던 것인가? 그래서 나를 이토록 비참하게 내버려두었단 말이야!”

서현은 신음과도 같은 외침을 터뜨렸다. 왜 이토록 너를 사랑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인가. 너의 바람대로 현성을 황제로 만들었다면 넌 그전과 같이 웃어주었을까? 

서현은 분명 이 모든 것이 오해이기를 바랐다. 그 동안 병신같이 당하고도 또다시 속아주고자 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만큼 희사를 사랑했다.

서현은 그 때 그날 자객이 휘두른 칼에 자신의 앞을 막아섰던 희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마저도 너를 믿게 하려는 수작이었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줄도 모르고…….  

서현은 침상위에 마구 굴러져 다니는 서찰들을 차분한 손길로 정리했다. 마음이 끓어오를수록 늘 머리는 차가워졌다. 그것은 전 황제에게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이었다. 서현은 애써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단 한 장의 서찰을 제외하곤 함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그 함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이전까지 서현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한기가 서려있었다. 서현은 진이 빠진 사람처럼 침상에 엎드렸다. 희사의 베개에서 여전히 사랑스러운 향이 묻어나왔다. 증오하고 싶지 않다. 그저 아끼고 사랑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아니라고 희사 네 입에서 아니란 것을 듣고 싶다. 이렇게 나를 배신하지 마.

        

희사는 황제의 축일을 준비하려 장이 선 유성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서현을 만날 순 없지만 혼자라도 유악에 올라 불꽃을 볼 심산이었다. 희사는 방에 놓을 향초와 랑쿤에서 힘들게 들여온 서책들을 몇 권 구입해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보는 화려한 마차가 중문 옆에 서있었다. 희사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친구가 방문했나 싶어 의아함을 띄고 정원을 가로 질렀다. 헌데 집 안의 분위기는 서현이 황제가 되던 날 느꼈던 때와 비슷했다. 

내일이 축일이니 어쩔 수 없으려나, 서현과 관련된 것이라면 진저리치는 어머니이니. 

희사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마루 밑에 신이 가지런히 벗겨있는 것을 보았다. 희사는 눈을 크게 떴다. 신발의 양 옆선에는 황금으로 수놓아진 용이 꿈틀거렸다. 용과 관련된 문양을 쓰는 자는 환진에서 오직 하나. 황제인 서현뿐이었다. 희사는 자신의 신발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벗어젖히곤 방안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눈에 보이도록 방치해 놓은 함 따위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단지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서현이 그동안 서찰만 보냈다는 것은 그 역시 황궁에서 쉬이 나오지 못함을 뜻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희사가 급히 방문을 열자 침상에 몸을 뉘이고 있는 서현이 보였다. 벅찬 가슴에 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이렇게도 서현 당신을 그리는데 어찌 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희사는 최대한의 차분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베개 밖으로 힐끔 보이는 서현의 옆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자신을 올려보는 서현의 다정한 눈길을 기대하며 그를 불렀다.

“서현….”

희사의 부름에 서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에 부드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서현의 눈빛만은 어느 때보다 차가웠지만 희사는 그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어디를 다녀온 거야.”

서현은 마치 어제 본 연인을 대하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내일이 너의 생일이기에 장에 다녀왔어. 그런데 황궁을 비워도 되는 거야? 바로 내일이 축일인데.”

“너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어.”

서현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희사에게 다가왔다. 그대로 희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희사는 서현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오랜만에 느끼는 서현의 온기에 더는 그를 멀리해야할 자신이 없어졌다.

“이러고 있으니 마치 그 날로 돌아간 것 같다.”

서현이 말하는 그 날이 언제인지 희사 역시 알았다. 아직 전 황제가 살아있을 적 불꽃놀이를 보러 간 때를 말했다. 자객이 휘두른 칼에 자신이 다치긴 했지만 벌써 상처는 아문지 오래다.

“그동안 어찌 연락이 없었지?”

서현은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어조로 희사에게 물었을 뿐이다. 희사는 차마 어머니 때문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네가 많이 바쁠 것 같아서. 그래서….”

“괜찮아, 이렇게라도 봤으니.”

서현이 희사를 떼어냈다. 희사는 조금 더 그의 품에 있고 싶었으나 채근하지 않았다. 

“집에는 왜 아무도 없어?”

“아마 다들 장에 갔을 거야. 온다고 말이라도 해줬으면 준비라고 했을 텐데.”

희사는 문득 침상 발치에 놓아진 함에 시선이 다다랐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혹 서현이 저 함을 열어본 것이라면? 아니 열어보았다 하더라도 겉에는 서현의 서신뿐이다. 서현의 서신 밑에는 반역에 관련한 문서들이 있지만. 

희사는 그 문서들을 밑에 숨기고, 위에 놓인 서현의 서신을 읽으며 늘 그가 안전하길 바랐다. 어쩌면 서현의 서신으로써 희사 자신의 마음을 달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반역에 관련한 서신을 전부 읽는 희사로선 아직 서현에게 해를 가하려는 기미가 없기에 여태 잠자코 있었다. 만일 또 다시 서현을 암살하려 했다면 아마 자신은 다시 서현을 구하러 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희사는 서현을 지나쳐걸어 자연스레 함을 책장 옆에 밀어두었다. 서현의 시선이 함을 향했다.

“그 함은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혹시 내가 보낸 서신들을 모아놓은 건 아니고? 하하.”

기분 좋은 서현의 말에 희사는 심장이 다시금 철렁 내려앉았다. 희사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서현의 앞에 다시 섰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도 돼? 나는 오래도록 있었으면 좋겠지만.”

서현이 마치 비웃는 듯 입 꼬리를 올렸다. 희사는 그 웃음이 조금 이상하다 여겨졌다.

“왜 대답을 하지 않지?”

“무엇을.”

“저 함에 대해서 말이야.”

“네 말이 맞아. 네 서신을 담아 둔 것이라 쑥스러워 그래.”

“과연. 그것뿐인가?”

서현이 희사의 눈을 그대로 쏘아봤다. 희사는 올곧게 자신을 직시하는 서현의 눈빛에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혹시, 그가 안의 서신 본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함이 엄습했다. 그리고 어색함을 알아챈 것은 그와 동시였다. 지나치게 고요한 집안.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 어머니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집안의 식솔들도 전부 보이지 않았다. 장에 나섰다 하여도 두어 명은 집안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한차례 떨었다.

“참 이상하다.”

서현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희사는 아무 말도 그에게 건넬 수 없었다. 그가 모든 서신을 본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던 것이다.

“너를 전부 알았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든 것이 내 착각이었나?”

“…….”

“희사 내게 진실을 말해봐.”

희사는 그제야 직감했다. 그가 함안의 서신을 모두 봤다는 것을. 그 함을 아무데나 내버려둔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언젠가는 그에게 알려야하고 또는 들켜야했던 일이다. 그럼에도 부모와 서현 중 그 어느 쪽을 버릴 수 없는 희사기에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반역은 국법으로 다스린다. 그것은 황제의 아내일지라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서현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이상 반역에 가담한 자들은 전부 참수 당한다. 그것은 희사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정말 네가 나를 배신한 것인지, 네 입을 통해 듣고 싶어. 그게 아니라면 내가 납득할만한 변명을 해.”

서현의 목소리는 떠나가는 연인을 붙잡으려는 어느 남자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희사는 차라리 자신도 처형당해 서현이 편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서현을 배신한 것은 사실이다. 서현에게 모든 전말을 고해 그가 자신만을 살려둔다 하더라도 기쁘게 살아갈 순 없다.  

희사는 침상에 주저앉았다. 서현이 희사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일국의 황제가 한낱 반역자의 앞에서 몸을 낮추다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희사가 바닥으로 주저앉으려 하자 서현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희사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희사, 계속 내 곁에 있어줄 거지? 내가 황제가 되거나 그렇지 못해도 너는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주었으면 해.’ 실제론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으나 맞닿은 얇은 천 사이로 그날의 서현이 속삭이고 있었다. 희사는 눈 안이 시큰거렸다.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어. 아니 내가 한 행동은 이미 당신을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난 용서도 애원도 하지 않아. 그저 우리가 사라짐으로써 당신이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 난 결국 당신도 내 부모도 배신하는 꼴이 되어 버렸어.    

“희사, 무슨 말이라도 해봐.”

서현은 희사를 올려다보지 못한 채 애원했다.

“내가 황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았을까? 이 자리를 현성에게 양보해주었으면 진정 네가 나를 사랑해주었을까?”

희사는 서현의 말에서 그동안 자신이 그를 사랑한 척 연기해왔다고 오해하는 것을 깨달았다. 희사의 입은 여전히 굳게 다물어 있었다. 대답 없는 희사의 무릎에서 얼굴을 떼어낸 서현이 천천히 일어섰다. 서현이 희사를 눈에 박아 넣듯 쳐다봤다. 그 눈빛엔 그 전 같은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희사는 이기적이지만 그에게서 이율배반감을 느꼈다. 혹시라도 서현이 자신을 배신했다면 몇 번이든 용서했을 것이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야만 했기에 자신을 배신한 거라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허나 서현은 서신만으로 이미 자신의 마음까지 부정하고 있었다. 

서현, 너는 정말 내 마음이 그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어찌 당신을 배신하기 위해 내 마음까지 지어낸 것이라 생각할 수가 있어. 나는 당신과 내 부모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에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했는데. 희사는 자신이 가장 원망스러웠지만 이렇듯 쉽게 자신의 져버리는 서현도 원망스러웠다. 서현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은 진심이었기에 이기적인 마음을 품는 것이었다.

“너를 위해 현성의 친족을 전부 살려두었다. 허나, 이젠 그러지 않겠어. 그래봐야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서현은 최후통첩을 하듯 소리쳤다. 희사는 여전히 침묵했다.

“재미있더냐? 그래, 내 마음을 가지고 놀면서 현성들과 작당하니 아주 우스웠겠지.”

이를 갈며 말하는 서현의 눈에는 분노보다 더 큰 슬픔이 서려있었다. 희사는 그가 소리칠수록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살고 싶다면 애원해. 그러면 너만이라도 살려주겠으니.”

애원은 희사가 아닌 서현이 하고 있었다. 희사는 시큰거리는 눈을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보냈다.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잠깐의 시간만으로 얼굴을 온통 적시는데 충분했다. 서현은 그것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현은 그가 슬퍼서 우는 건지, 분해서 우는 건지 이젠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졌다. 그 작은 몸에서 한껏 피를 흘렸던 그 날처럼 몸 안의 수분을 전부 빼내고 나서야 희사가 일어섰다. 

“내 가족은?”

결국 전할 말이 고작 그것뿐인가. 서현은 순간 희사의 얼굴을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그래 네 그 잘난 가족이 환진의 황제를 죽이려 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치러야겠지. 물론 너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래.”

서현은 희사의 입에서 진실이든 거짓이든 듣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를 정말 사랑하기는 했느냐고. 허나 희사는 아무 대답도 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서현은 저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다정하게 쓸어주고 싶지만 그와 반대로 전부 망가뜨리고 몸뚱이만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순수하게 희사를 사랑했던 감정은 그의 배신으로 인해 자신역시 변질되고 있었다. 

내가 네게 있어선 죽어도 될 만큼의 존재였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해하려고 해도 용서할 수가 없어. 네가 만일 네 부모에 의해서, 타의로 말미암아 동조하게 된 일이라 해도 난 여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렇다면 네가 나보다 네 부모를 우선했다는 것 또한 내겐 배신으로 다가와. 그런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사실 이제와 네가 아무리 내게 애원한다 해도 더 이상 현성과 네 부모를 살려둘 생각은 없어. 그들을 살려두면 넌 내가 아닌 그들에게 돌아가겠지. 그리곤 또 나를 배신할 것이라 확신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너를 원해.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어. 그러니 네 눈앞에서 그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현성의 본질을 보여주겠다. 네가 그리도 아꼈던 현성이 죽음과 너 사이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자행할지 궁금하지 않아? 

서현은 희사를 사랑하면서 이제껏 내면의 흉포한 본성은 꼭꼭 감춰왔었다. 감췄다기보다는 비춰질 일이 없었다. 서현은 방안에 멀거니 서있는 희사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황제의 수행병사 두 명이 서현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이는 희사가 오기 전 이미 연행됐다. 환진의 각 지역 제후들은 북방을 제외하곤 사병을 거느릴 수 없었다. 유악의 치안을 지키는 경비 역시 제후의 소속이 아니라 황제의 수하였다. 희사의 부모는 자신들을 신변을 보호했던 자들에 의해 붙들려갔다. 참 우스운 일이다. 

서현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병사 둘이 방으로 사라졌다. 서현은 희사가 포박되어 나오는 꼴을 그대로 지켜볼까하다 그만두었다. 희사의 배신은 가슴이 무너지다 못해 증오스러웠다. 서현은 황궁에 당도하는 시간동안 단 한 번도 희사를 찾아보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그의 식솔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희사 역시 망가뜨릴 충동을 참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서현은 수년간 자신을 배신한 대가를 그렇게 간단하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미치면 한치 앞의 일은 물론이거니와 상대방이 자신을 위하는 마음의 깊이까지도 보지 못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서현 역시 보통 사람과 같이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나흘을 내리 달려서 도착한 황궁에는 이미 서현의 지시를 받은 측근 사황(事黃)이 현성과 그 무리들을 하옥시켰다. 옥에 갇힌 내내 역모의 증거를 대라는 2황비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미약한 쇳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서현은 가장 먼저 동궁으로 향했다. 자신의 어미를 죽인 현성들은 꼭 동궁 안에서 죽여줄 생각이었다. 희사의 배신만 아니었다면 그들은 어미의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루지 않아도 되었다. 서현은 자조적인 웃음만 흘러나왔다. 그동안 내 어미를 위한 복수마저 눈 덮을 정도로 그리도 네가 사랑스러웠단 말이냐. 허나 이제 그 안이함도 끝이다. 서현은 동궁의 중앙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서현은 황제임에도 황궁 내부에서 자는 일이 드물었다. 암살의 위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동궁이기 때문이다. 침상의 몇 곱절은 되는 옥으로 만든 욕조에 몸을 담갔다. 궁녀들을 전부 물리고, 흐트러지지 않도록 머리를 뒤로 늘여 묶은 얇은 본견 끈을 끌어내렸다. 나른한 얼굴로 욕조에 등을 기댔다. 흉포하게 변해가는 그의 내면과는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손 댈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어렸을 때는 그저 아름답기만 했던 서현은 남자의 나이가 가까워올수록 보는 이로 하여금 환상에 가까운 욕망을 품게 하는 미남자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허나 황궁의 모든 이는 알고 있다. 그것은 달콤한 꿀이 아니라 독에 가깝다는 것을. 황제로선 더없이 현명한 성왕이나, 한 인간으로선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되는 자였다. 

서현은 쉬이 사람을 믿지 않으며, 희사를 제외한 자들에게는 진정한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현성의 무리들이 더욱이 희사를 이용하려 한 것일지도 몰랐다.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욕조에 담구고 있던 서현이 불현 듯 몸을 일으켰다. 그 세찬 물소리에 밖에서 대기하던 궁녀들이 쪼르르 달려왔다. 서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들이 마무리를 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직 물기가 잔재한 머리를 말리는 손길을 거두게 했다. 

“어차피 곧 피를 씻어 내릴 것이니 그리 할 필요 없다.” 

한기가 서려있는 서현의 말에 궁녀들의 등 뒤로 식은땀이 솟았다. 서현은 축축한 손으로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현성들이 있는 동궁의 빈방으로 움직였다. 그곳은 황후가 비단 의복을 걸치고 죽은 채 발견된 곳이었다. 그 후로 방안은 전부 비워졌고, 붉은 칠로 문을 도색했다. 그러고는 암살당한 황후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라 하여 침적혈(侵赤血)이라 불렀다. 바늘에 묻은 붉은 피를 뜻했다. 그 문 앞에 이미 사황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축축이 젖어있는 서현의 머리를 보고 놀란 듯 하였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죄인들을 전부 옮겨두었습니다.”

“그는?”

사황은 서현이 말하는 그가 누군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분 역시 지시대로 하였습니다.”

서현은 답 없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오랜 시간 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문이 끼긱거리며 괴이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많기도 하군.”

서현의 등장에 앞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현성의 친족들이 더욱 몸을 움츠리며 긴장했다. 서현은 그 수많은 죄인들 틈에서 희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이들은 전부 포박되어 있었으나 희사만이 자유로운 상태였다. 희사는 서현을 올려보지 못했다. 사나흘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했을 뿐더러, 설사 기운이 있더라도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폐, 폐하. 오해십니다. 저는 폐하를 단 한 번도 해치려 한 적이 없습니다. 부디 오해를 거두어주십시오.”

2황비가 아직 서슬 퍼런 눈을 들어 서현을 마주했다. 서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사황이 뒤에서 서현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2황비는 그 누런색의 종이가 무엇인지 직감했다. 밀서(密書)였다. 그 밀서를 읽는 서현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침착했다. 

-커다란 암캐 한 마리를 죽였으니 이제 그 개의 자식만이 남았다. 작은 암캐는 제 새끼가 성하지 못하여 걱정할 것이 없다. 짐새의 독을 마신 자는 망각의 강을 건너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허나 큰 암캐의 자식이 교활하니 쉬이 없앨 수가 없다. 개잡이 조차 그 미친개를 당해내지 못하니 다른 방도를 찾아야한다-

“내용이 어떠한가. 내가 보기엔 바로 그대의 글 솜씨 같은데 말이지.”

2황비의 어깨가 파르르 경련했다. 희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현의 눈빛은 어느새 희사에게로 옮겨있었다. 희사는 서현의 외침을 들었다. 나를 봐, 대체 네가 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보란 말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참아 와야 했던 것들 또한 직접 네 눈으로 봐! 희사는 크나큰 괴로움에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폐하. 오해십니다. 그것은 저의 필체가 아닙니다. 제 필체와 비교해보십시오!”

“그럼 이 글은 대체 누가 지었단 말이지?”

2황비는 한차례 서현의 눈을 보고 유악 제후의 아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받은 여자가 눈을 부릅떴다. 2황비는 혼자라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희사의 어미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어 실핏줄이 불거진 눈만 분함을 대신 토해내고 있었다. 서현은 눈앞이 상황들이 참 우스웠다. 2황비의 옆에 꿇어앉은 현성에게로 다가갔다.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들자 2황비가 서현의 앞으로 기었다. 서현은 그녀를 내려 보지도 않고 현성의 허벅지에 칼을 찔러 넣었다. 현성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형님, 형님!” 애원하며 부르는 소리는 아랑곳 않고 다른 쪽 허벅지에도 칼을 찔러 넣었다. 희사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밭은 숨만 내뱉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너와 현성만은 살려주겠다. 현성의 목이 잘리는 것을 네 눈으로 정히 보고 싶다면 거짓을 고해도 좋다.”

서현의 말이 분명 거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2황비는 썩은 밧줄이라도 잡아야했다. 그것은 현성 역시 마찬가지다.

“형님, 저것들이!! 저것들이 저와 제 어머니를 꼬여냈습니다. 유악의 것들이 형님을 암살하려 했으며 저를 억지로 황제의 자리에 앉히려 했습니다. 저는 절대로 형님을 배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그렇군.”

“그. 그러니 형님 저와, 컥.”

현성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칼이 현성을 목을 꿰뚫었다. 뾰족한 사선의 칼날이 현성의 뒷덜미를 관통했다. 칼을 쑥 빼내자 피가 솟구치며 현성의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부들부들 경련하는 현성의 모습에 2황비가 소리를 내질렀다. 서현은 그것 역시 듣기 싫다는 듯 곧바로 여자의 숨까지 거두어버렸다. 한번 여자의 심장을 관통한 칼은 주저 없이 그녀의 몸을 벗어났다. 바닥에 흥건히 흩어지는 피는 고인빗물처럼 불어났고, 솟구쳤던 피는 서현의 몸을 제멋대로 수놓았다. 

“거짓을 고하면 죽이겠다 미리 말했지 않은가.”

서현이 쓰러진 시체를 보고 웃었다. 희사는 그제야 서현을 올려보았다. 희사의 눈앞에 피를 뒤집어쓴 서현은 마치 자신이 아는 그가 아닌 것만 같았다. 저리도 잔인한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늘 다정했던 서현이다. 그런 것을 자신이 바뀌어놨단 말인가. 

“유악의 자들만 남기고 전부 끌고 나가라.”

사황에게 지시하자 현성과 2황비의 시체까지 포함해 전부 방 밖으로 끌려 나갔다. 재갈이 물려있는 자들이 서현을 보며 울부짖었다. 서현의 손에 죽지 않더라도 자신들의 결말은 곧 죽음인 것을 잘 알았다. 서현은 그들에게는 눈길하나 주지 않고 희사의 몸을 일으켰다. 남은 것은 희사와 희사의 부모뿐이었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세상과 단절됨을 뜻하듯 거침없었다. 서현은 희사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희사의 목덜미를 아무렇게나 어지럽힌 머리칼마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품에 안긴 희사의 입이 달싹거렸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에 서현이 희사의 얼굴에 귀를 가져다댔다. 

“…만 해.”

서현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희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사랑스러우나 향기마저도 증오스럽다. 아니 증오하지도 못한다. 그저 그를 가지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만이 커질 뿐이다. 

“희사, 다시 말해봐.”

“이제, 끝내. 그만 해 서현.”

서현이 희사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만하라니? 내가 무엇을 했기에 그만하라는 말인가. 네가 그리 아끼는 현성을 개죽음으로 만들어서, 그래서 분해 우는 것인가? 그렇다면야 더더욱 그만둘 수는 없지. 서현은 눈앞이 새까맣게 변한지 오래였다. 

“이제 그만 죽고 싶어?”

희사의 턱 앞에 칼을 드밀었다. 희사는 체념한 사람 마냥 힘없이 주저앉아있었다.

“아니, 그렇게 쉽게 죽일 순 없지. 네가 나를 몇 년이나 속여오고 능멸했는데, 난 이 찰나의 시간으로 겨우 복수를 끝내라는 건가.”

“그렇지 않아.”

희사가 서현의 눈을 들여 보았다. 진심을 알아주길 원하진 않는다. 하물며 삶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혹여나 죽어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서현 당신과 아무 접점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싶을 뿐이다. 이제 이런 연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서현의 칼이 희사의 정수리 위로 들렸다. 마치 죽음을 결심한 듯한 희사의 눈에 서현은 소리치며 칼을 내리그었다. 희사는 그와 동시에 눈을 감았다. 푹, 하고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칼의 울음이 희사의 귓가를 괴롭혔다. 

“흐으으으으!”

여자의 막힌 신음 소리에 놀란 희사의 얼굴이 재빨리 어머니를 향했다. 여자의 부푼 가슴에 서현의 칼이 반쯤 처박혀있었다. 유악의 제후 역시 자신의 아내를 보고 끅끅거리며 흐느꼈다. 희사가 경악에 질려 서현을 올려봤다.

“왜? 네가 내 어미를 죽였는데, 나라고 그러지 못할 것이 있더냐.”

“서현, 제발….”

“나를 서현이라 부르지 마라, 넌 역모에 가담한 죄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서현이 차갑게 말하며 희사의 얼굴을 내리쳤다. 화끈한 통증에 희사는 눈앞이 핑 돌았다.

“나를 배신하는데 이정도의 보복도 생각하지 않았단 말인가. 혹, 내가 너를 특별히 여겨 너의 부모까지 그리 여길 거라 착각한 것은 아니겠지?”

서현이 칼을 빼내어 다시 여자의 반대쪽 가슴에 찔러 넣었다. 부릅뜬 여자의 눈과 마주친 희사는 눈물을 마구 쏟아냈다. 여자가 말하고 있었다.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제대로 해주었으면 내가 이런 죽음을 맞이할 필요도 없었을 터인데! 원해서 서현을 암살하려는 집안에 태어난 것도 아니며, 또한 원해서 역모에 가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여자의 대한 죄책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주 어렸을 적에는 서현만큼이나 다정했던 여자였다. 희사는 피를 뒤집어 쓴 서현의 모습에서 이 방안의 그 누구도 쉽게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희사가 서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제발… 서현.”

서현 역시 희사가 삶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죽이더라도 단 번에 죽여 달라는 뜻이었다. 허나 그럴 생각은 없었다. 다시 여자의 가슴을 난자했다. 고통스럽게 죽이려면 뱃가죽을 뚫는 것보다 두꺼운 살덩이를 찌르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뱃가죽 안의 장기가 찢겨지면 사람의 목숨을 쉽게 끝나나, 살이 많은 다른 부위는 다르다. 찢기는 고통의 정도는 같지만 그 시간은 길다. 서현이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허나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대가가 필요하지. 안 그런가?”

여자는 이미 검은자가 뒤집혔고, 재갈엔 역류한 피가 흥건했다. 희사는 서현의 발밑에 고개를 숙였다. 그가 기라면 길수도 있다. 아버지마저 저리 고통스럽게 떠난다면…… 희사는 상상만으로도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탓이었다. 서현이 저렇게 된 것도 부모가 이리 죽어가는 것도.

“제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할 테니. 그러니 제발 더는 고통스럽지 않게……서현 제발.”

서현이 허리를 굽혀 희사의 머리채를 잡았다. 힘없이 들린 얼굴은 이미 눈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서현이 희사의 뺨을 내리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아닌 둔탁한 소리가 퍼졌다. 희사의 얼굴이 함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를 서현이라 부르지 말라했다. 이곳에서 서현이라 부를 수 있는 자는 이제 아무도 없다.”

희사가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서현의 말이 아파서, 이렇게까지 온 자신들이 불쌍해서 슬픔이 흘렀다.

“폐, 폐하. 제…어머니를 부디….”

“내가 한번이라도 너의 폐하였던 적이 있었나? 진정 나를. 너의 황제로 생각한 적이 있었느냔 말이다!”

서현은 상대를 바꾸어 유악 제후의 팔을 썽둥 잘라냈다. 피를 잔뜩 머금은 날카로운 칼은 어디든지 한 번에 자를 수 있게 보였다. 유악 제후는 바닥을 미친 듯이 기었다. 잘려진 어깨에서부터 바닥에 한 폭의 적색 그림이 그려졌다.

“그만!!! 그만!!!! 폐하, 폐하. 제발 자비를!”

희사가 서현의 발밑에서 기며 울었다. 서현은 그럼에도 마음이 충족되지 못했다. 이런 것을 원한 것은 아니다. 아니 이런 것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서현은 희사의 울부짖음에 다정히 그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희사, 나와 자고 싶어?”

희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젖은 눈을 들었다. 서현의 뺨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들이 뚝뚝 흘렀다. 

“자고 싶다고 말해봐. 내 것을 네 안에 처박고 싶다고 말해보란 말이다.”

희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을 참는 모양새에 서현이 유악 제후의 남은 팔마저 잘라냈다. 이번에는 깨끗하게 잘라내지 못하여 팔과 어깨를 이은 근육이 늘어졌다. 잘리다만 팔이 제후의 어깨에서 대롱거렸다.

“아……아!”

희사는 흐느낌에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 허나 서현은 인내심 있게 희사의 말을 기다렸다. 유악 제후의 다리마저 자르려는 순간 희사가 입을 열었다.

“폐하와! 폐하와…자고 싶습니다. 당신의 것을 제 안에 넣기를 원합니다.”

“하.하. 하하하.”

서현이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희사는 머리가 이상해 질 것만 같았다. 서현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면 이리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똑같았을까. 희사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서현이 두려웠다. 자신이 사랑한 자가 분명한데도 그가 무섭게만 느껴졌다.

서현이 희사의 옷을 젖은 칼로 찢었다. 장포 자락이 칼이 지나가는 곳마다 쉽게 갈라졌다. 드러난 희사의 가슴을 서현이 혀를 내밀어 핥았다. 소름이 돋으며 유두가 단단히 섰다. 서현은 참을 수 없는 욕망에 그의 가슴을 이로 물었다. 희사가 고통에 신음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함부로 양 유두의 살을 깨물었다. 넝마가 된 천이 서현의 얼굴을 간질였다. 

“들어, 이러라고 네 손을 자유롭게 해준 것이니까.”

서현은 희사의 양 손에 찢긴 천을 그러쥐게 해 어깨까지 들게 만들었다. 희사가 직접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에 서현은 더 큰 욕망이 서렸다. 희사는 몸까지 떨어가며 흐느꼈다. 서현이 바지자락을 풀어 단단히 선 기둥을 내밀었다. 희사는 이 상황에서 발기한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서현은 희사의 입에 자신의 기둥을 갖다 댔다. 희사가 입을 벌리지 않자 다시 제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희사가 그것을 보고 그의 것을 재빨리 물었다. 발기한 커다란 것은 혀를 아래로 누르며 입안으로 들어왔다. 서현은 자신의 기둥이 희사의 부드러운 혀와 가볍게 마찰되는 입천장을 느끼며 허리를 흔들었다. 가슴을 스스로 드러낸 채 입에 한가득 기둥을 물고 있는 희사의 모습에 서현은 더 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처음은 다정하게 해주고 싶었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속지 않는다. 

점점 커지는 서현의 것에 희사는 부르튼 입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한번도, 단 한 번도 서현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할 것이라곤 꿈에서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서현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희사 역시 분명 육체적인 것도 있었다. 허나 피바다 속에서 그것도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죽음 앞에서 이럴 것이라곤 결코 예상치 못했었다. 점점 깊이 파고 들어오는 서현의 기둥에 두 구슬이 턱까지 닿았다. 

목구멍을 마구 헤집는 바람에 목젖이 계속 뒤로 밀려났다. 헛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서현의 것을 빼낼 수가 없었다. 삼키지 못한 침이 서현의 움직임을 더 용이하게 만들었다. 콜록거리며 목 안쪽의 점막이 귀두를 조일 때마다 사정의 기운이 가까워오는지 서현은 더욱 거세게 입안을 헤집었다. 희사가 퍽퍽 부딪히는 반동에 못 이겨 가슴을 드러냈던 손을 내렸다. 

흔들거리는 몸을 지탱하려 서현의 허벅다리를 부여잡았다. 서현이 희사의 머리채를 깊숙이 사타구니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뜨거운 액이 열린 목구멍으로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비릿하고 물컹한 정액이 속수무책으로 넘어갔다. 희사가 연신 막힌 기침을 해댔지만 서현은 사정이 다 끝날 때까지 희사를 놓아주지 않았다. 수차례에 걸친 사정이 끝나고 희사의 입에서 여운을 즐기던 서현이 그제야 기둥을 빼냈다. 묽은 타액과 서현의 흰 정액이 뒤섞여 긴 실을 만들어냈다. 희사가 서현의 다리를 잡은 손을 놓고 주저앉아 밭은 숨을 쉬었다. 마저 삼키지 못한 정액이 희사의 입가를 더럽혔다. 서현은 그것을 검지 손으로 훑어 희사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희사가 서현은 손목을 잡았다.

“왜. 왜…”

“그러는 너는 왜, 대체 왜 나를 사랑한다 했지?”

서현은 희사의 대답을 듣기 전, 인간 같지도 않은 신음을 내뱉던 유악 제후와 그의 아내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어차피 극심한 고통에 제정신이 나간 지 오래였다.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숨통을 끊어주었으니 만족스러운가.”

볼 일을 다 마친 자처럼 옷매무새를 정리한 서현이 몸을 틀었다. 미련 없이 방을 나서려는 서현의 다리를 희사가 부여잡았다. 서현이 그것을 무감각하게 내려다 봤다. 

“나를, 나도…”

희사의 입가를 촉촉이 적시는 액들에 의해 서현은 다시 한 번 아래가 발기하는 것을 느꼈다. 

“널 죽이진 않겠다. 혹, 저들과 같이 괴롭게 죽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분명 말했다. 나를 배신한 대가는 짧은 시간으로 보상할 수 없다고.”

번복 없는 서현의 말에 희사가 힘없이 잡은 그의 바짓단을 놓았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눈동자가 텅 비었다. 서현은 그를 방에 두고 나오면서 일렀다. 

“만 하루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또 나오지도 못하도록 하라.”

“분부 받들겠습니다. 폐하.”

동궁 경비가 허리를 굽혔다. 서현은 사람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복종시키는지, 또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지. 희사에게 있어서 죽음은 늘 먼 존재였을 것이다. 서현의 눈앞엔 늘 죽음의 위협이 잔재해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죽는 모습을 보는 것도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가장 처음 자신이 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남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저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라는 철칙 하에 움직일 뿐. 

희사의 눈앞에 가장 처음 닥친 죽음은 바로 공포다. 고통에 몸부림쳐가며 정신을 잃어도 사람의 목숨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죽음에 의연한 자라도 눈앞에서 고통에 절규하는 자를 보면 공포에 머리가 안돌아가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일 경우에는 더더욱. 희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다. 죽음보다 더 가까운 것은 극심한 고통이라는 것을 잘 깨달았을 테니까. 방으로 돌아온 서현은 피로 엉망이 된 겉옷을 벗었다. 금실로 놓아진 용은 이미 제 색을 잃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서현은 뜨겁게 달궈진 욕조에 다시 몸을 담갔다. 피 칠갑이 되어 돌아온 황제를 보고 방안의 궁녀들 중 그 누구도 쉽사리 서현의 시중을 들러 들어가는 이는 없었다.

         

* * *

서현의 예상을 대변하듯 희사는 갇힌 방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피비린내는 시간이 갈수록 더 진해졌다. 피 냄새는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벽의 한 면을 장식한 불투명한 창을 통해, 기우는 해가 방안의 어둠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희사는 마구 난자당한 부모의 시체를 보며 끅끅거렸다. 죽음을 각오했으나 이렇게 끔찍한 결말일 줄은 몰랐다. 아니 몰랐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늘 다정한 서현만 봐왔기에 죽음에도 분명 자비가 있을 것이라 자만한 것이다. 

그를 죽이려 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니 그것이야말로 모순이었다. 희사의 온몸이 떨렸다. 서현이 자신을 살려두겠다는 말에 가슴 한구석에서 분명 안도하고 있었다. 그럴 순 없다. 자신도 같이 죽었어야했다. 희사는 두려웠다. 죽음보다 고통이, 그리고 그 고통을 줄 서현이 두려웠다. 자신의 무기력함과 우유부단함이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희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부모의 시체 앞에서 그저 울기만 했다. 눈이 뒤집힌 여자가 희사를 노려봤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죽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아아아아. 희사가 절규했다.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희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피 웅덩이 속에서 흐느끼는 것뿐이었다.   

희사가 살육의 방에서 꺼내진 것은 그 다음날 동이 트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단 하루만인데도 희사의 모습은 방 안의 시체와 다름없었다. 궁녀들의 손에 의해 몸이 닦이고 고운 환진의 비단 의복이 입혀질 때까지도 희사는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멍했다. 소매가 길고 허리의 선이 돋보이게 들어가며 발등을 감싸는 길이의 겉옷은 희사를 더 아슬아슬하게 보이게 했다. 단장을 마친 희사는 서현의 방으로 옮겨졌다. 익숙한 방안 풍경이었다. 침상을 마주하는 벽에는 황태자의 상징인 승천용이 꿈틀거렸고, 서현이 황제가 되고 난 뒤 왼쪽 벽에는 위용한 자태를 자랑하는 용이 새겨졌다. 그 용은 희사를 그대로 쏘아보고 있었다. 

희사는 고개를 내려 손등을 전부 덮은 소매를 내려 봤다. 고운 다홍색의 비단 천에는 황제의 용만큼이나 수려한 꽃들이 봄의 향연처럼 수놓고 있었다. 희사의 머리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다. 자신이 입은 옷은 혼인을 하지 않은 여자가 입을 법한 환진 의복이었다. 희사가 깜짝 놀라 겉옷을 벗어 내렸다. 그 안엔 가슴에서부터 허벅다리 중간까지만 감싼 촘촘한 망사천이 드러났다. 기가 막힌 안의 모습에 희사는 다시 윗옷을 걸쳤다. 동시에 문이 열리며 서현이 들어왔다.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린 미남자는 희사를 보더니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썩 나쁘진 않군.”

친우이자 연인과도 같았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위에 군림하려하고 있었다. 다가온 서현이 희사의 겉옷을 뒤로 쓱 밀었다. 미끌거리는 비단천이 지는 목련처럼 빠르게 낙하했다. 서현은 드러난 희사의 몸을 감상 중이었다. 망사 안으로 보이는 흰 살결은 그대로 전부 먹어치워도 달콤할 것만 같았다. 광폭한 생각들이 서현의 머리를 지배했다. 지배라기 보단 꾹 눌러왔던 서현의 본성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태껏 그 서현의 본성을 막은 것은 희사였다. 그리고 그 본성을 다시 일깨운 것도 희사였다. 

서현이 몸을 기울이자 희사의 몸이 침상으로 쓰러졌다. 엉덩이부터 털썩 주저앉은 희사가 연신 떨리는 눈으로 서현을 올려봤다. 서현이 이다음엔 무슨 짓을 할 것인지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차라리 내가 싫다 말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네 마음을 가지기 위해 현성에게 황위를 주었을 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희사는 침상에 쓰러진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서현이 그 모습에 이를 갈았다. 나와는 이제 아무런 대화도 하기 싫다 이건가. 뭐 좋아. 그 입은 얼마든지 열게 할 수 있으니. 

서현이 희사의 몸에서 거칠게 망사천을 뜯어냈다. 부욱하는 소리와 함께 희사는 너무도 쉽게 전라가 됐다. 서현이 희사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분명 온몸을 깨끗이 씻어냈음에도 피냄새가 아직도 서려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작은 젖꼭지 위로 몇 해 전 자신을 감싸다 찢겨진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상처의 잔해에 이를 세워 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상처를 다시 파고들었다. 까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희사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서현은 깊이 박혔던 송곳니를 떼었다. 찐득한 피가 솟아나 희사의 어깨로 흩어졌다. 그것을 혀로 담아 서현이 쓸어 올렸다. 희사의 피가 서현의 아랫입술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상체를 조금 세운 서현이 희사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포갰다. 또다시 시작되는 피냄새에 위액이 역류할 것 같았다. 

서현은 입을 떼려는 희사의 양 뺨을 그러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혀를 안쪽까지 놀리며 희사의 작은 혀까지 빨아들였다. 희사는 혀가 뿌리까지 뽑혀나가는 고통에 서현의 품으로 바짝 붙을 수밖에 없었다. 희사가 서현의 소매를 꽉 쥐었다. 서현은 그 손목을 붙들어 옮겨와 자신의 것을 만지게 했다. 얇은 하의 밖으로 꼿꼿이 선 기둥이 느껴졌다. 맥박까지 여실히 느껴지는 바람에 희사는 손을 떼려했다. 서현의 힘이 더 셌기에 꼼짝할 수 없었다. 

서현이 희사의 양 발목을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희사의 하체가 적나라하게 서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축 쳐진 기둥을 동그란 두 주머니가 받치고 있었다. 다리를 더 위로 끌어올리자 힘없이 흔들리는 것이 달랑거리며 배 위로 넘어갔다. 해훈은 엄지손을 들어 굳게 닫힌 구멍을 만졌다. 메말라있는 구멍은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밖에 누구 있는가!”

희사의 하체를 빤히 바라보던 서현이 소리쳤다. 서현의 방 앞을 지키는 궁녀중 하나가 서현의 부름에 들어섰다. 희사는 깜짝 놀라 몸을 버둥거렸다. 이것이 말이나 될법한가. 전라인 자신을 수치스러운 자세로 만들어놓고 다른 이를 불러들이다니. 희사는 믿을 수 없는 서현의 태도에 입술을 꽉 물었다. 궁녀도 눈앞의 상황에 꽤나 놀란 눈치였지만, 동궁에서 가장 잔뼈가 굵은 자답게 침착함을 유지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밑을 부드럽게 할 만한 것을 가져오라.”

황제가 뜻하는 밑이라는 것은 깔려있는 남자의 구멍을 뜻했다. 궁녀는 허리를 굽힌 후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서현은 연신 발버둥치는 희사는 악력으로 붙잡았다. 희사는 여전히 다리를 한껏 벌린 채 아래를 다 드러내고 있었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어찌 내게.”

서현이 웃었다.      

“거기서 더 뻔뻔한 말을 지껄인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안아주겠다.”

서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야. 내가 아는 서현은 어디로 간 것이란 말이야. 그동안 서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맞았는지조차 헷갈렸다. 

“폐하, 안으로 들겠습니다.”

궁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희사는 서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서현이 그 모습을 보며 이죽였다.

“들라.”

궁녀는 최대한 시선을 피한 채로 서현에게 유액즙을 건넸다. 처녀와 관계를 하거나 남자의 뒤를 쓸 때 황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액이었다. 중지만한 크기의 도자기에 담긴 유액을 서현이 받아들었다. 궁녀는 그 언제보다 빠르게 방밖으로 사라졌다. 궁녀도 황제의 밑에 깔린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유악제후의 공자. 감히 자신은 유악 공자의 전라를 볼 수는 없는 위치였다. 그는 유곽의 남창도 아니었으며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귀족이었다. 그런 자가 궁녀가 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능욕 당하다니. 

다른 젊은 궁녀였다면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고도 남았을 테지만, 이 늙은 궁녀는 자신이 본 것을 다른 이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유악 공자는 자신이 그런 꼴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죽을 만큼의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궁녀는 서현의 문밖에 서서 황제가 다시 자신을 부를 일이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양귀비 유액인가.”

서현이 도자기의 덮개를 벗겨내고 향기를 맡았다. 그것을 거꾸로 들어 희사의 고환에 쏟아 부었다. 차가운 유액이 몸의 중심을 건드리자 온몸이 바들하고 떨렸다. 서현이 오른손을 펼쳐 고환과 가운데의 쳐진 기둥을 그러쥐어 부드럽게 마찰시켰다. 희사의 몸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희사 역시 귀족의 자식이다. 희사에게도 하인과 귀족의 위치는 너무도 당연히 나뉘어져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이런 꼴을 보였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서현은 아무리해도 희사가 발기할 생각을 안 하자 미끌거리는 손을 엉덩이 안쪽으로 내렸다. 액을 가득 묻힌 엄지손가락은 너무도 쉽게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느끼는 이물감에 희사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서현은 엄지로 살살 희사의 구멍 주름을 핀 다음 중지와 검지를 한 번에 쑤셔 넣었다. 

“흐앗.”

벌어지는 구멍에 희사는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서현이 엉덩이를 때리자 살과 축축한 유액이 만나 찰싹 거리며 큰 소리가 울렸다. 희사가 올려보는 서현의 눈 안엔 이미 다른 것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욕정뿐이었다. 희사의 안쪽 내벽을 긁어내리는 손이 거침없었다. 안의 면적을 넓히듯 후벼 파는 손가락에 아래가 당겼다. 조금 풀어진 구멍에 세 번째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 그만. 그만.”

희사가 서현의 손목을 잡았다. 이 기세라면 서현이 자신의 손가락을 전부 넣을 것만 같았다. 액은 쉽게 마르지 않아 서현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행하고도 남았다. 희사가 겁에 질리자 서현이 허벅다리에 입술을 가져댔다. 파들거리는 허벅지가 사랑스러웠다. 혀로 약한 살을 애무하자 손을 문 희사의 구멍이 움찔거렸다. 안쪽의 가랑이를 살짝 이로 깨물었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비음을 흘렸다. 서현은 조금 더 천천히 희사를 맛보고 싶었으나 앞으로도 얼마든지 마음껏 탐할 수 있었다. 지금은 우선 저 안을 꿰뚫고 싶은 욕심뿐이었다. 서현이 아랫단을 풀어헤쳤다. 단단히 선 기둥이 드러나자 희사의 구멍에서 손을 빼냈다. 아직 손에 남아 미끌거리는 액을 잔뜩 성난 기둥에 쓱쓱 묻혔다. 

희사는 서현의 것을 보며 숨을 삼켰다. 입에 담았을 때는 제대로 볼 수 없었기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저것은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는 어울리는 않는 것이었다. 희사가 몸을 뒤로 빼자 다시 앞으로 오게끔 다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곤 뭉툭한 귀두의 앞부분을 예고 없이 구멍에 비볐다. 움찔거리는 구멍이 기둥의 앞부분을 자극시켰다. 서현이 그 감각을 참지 못하고 희사의 허벅다리를 쥔 채 그대로 안을 꿰뚫었다.        

“아아아! 아아. 아!”

희사는 아래를 꽉 채우며 들어오는 서현의 것에 고통에 찬 신음을 질렀다. 유액의 도움을 받아 찢어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무리하게 살이 벌어지는 고통은 덜어주지 못했다.       

“마음껏 질러. 네 상스러운 목소리를 저 밖에 자들에게까지 들려주는 거다.”

서현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소리도 희사에겐 너무도 멀리 들렸다. 희사는 몸을 잔뜩 경직시키며 서현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서현은 희사의 위로 완전히 올라타 찍어 내리듯 구멍 안에 푹푹 기둥을 박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안을 쑤셔대는 서현의 기둥이 아직 길이 트지 않은 방향으로 갑자기 내리 눌렀다. 커다란 기둥에 내벽이 눌리며 뱃속에서 경련했다. 서현은 잘게 떨리며 기둥을 감싸는 그 내벽의 느낌이 좋았다. 계속 허리를 틀어가며 함부로 처박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좋은데, 이렇게 좋은데 말이다. 그동안 왜 내가 참아야했지?”

낮은 숨소리와 함께 서현이 속삭였다. 희사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추삽질을 하는 서현을 따라가지 못했다. 점점 거세지는 강도에 내벽의 살들이 딸려나가자, 희사는 아래가 전부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서현의 움직임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저 그가 흔드는 대로 몸을 내맡긴 채 시간이 가기만을 바랄뿐이다. 

한곳도 빠짐없이 아래를 전부 헤집어놓고 나서야 서현이 사정했다. 뒤는 어찌되든 상관없이 제멋대로 쏘아 올리는 정액에 희사는 힘없이 눈만 깜빡였다. 정액이 닿은 내벽마다 화끈거리는 둔통이 찾아왔다. 서현이 사정을 마친 상태서 수그러진 기둥을 뺐다. 주륵하고 남은 정액이 같이 딸려 나왔다. 

서현이 희사의 가슴을 끌어안아 세웠다. 그리고 조금씩 닫혀가는 구멍에 손가락 두 개를 푹 찔러 넣었다. 그 상태서 손가락을 벌리자 아래에서 무언가가 마구 쏟아졌다. 서현의 정액이었다. 희사는 뱃속에서 밖으로 쏟아지는 양이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실상 절반이상이 그가 기둥을 뺄 때 같이 딸려 나왔기에 안에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액이 내벽 전체를 타고 흘러내리는 바람에 배안은 전부 그의 것으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안에 남은 정액이 다 빠져나왔을 때쯤 서현이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손에 묻은 축축한 액들을 그의 기둥에 처덕처덕 발랐다. 옆으로 누운 희사의 얼굴로 다시 발기한 기둥을 들이댔다. 희사는 피보다도 더 비릿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왜 더러운가?”

서현이 희사를 머리채를 쥐어 잡아 기둥 앞으로 끌어왔다. 희사의 입매가 서럽게 떨렸다.

“더러운 건 네 뒷구멍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이겠지.”

희사가 눈을 크게 뜨고 서현을 봤다. 서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리가 없다. 분명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다.

“분해? 이 정도는 네가 내 마음을 가지고 논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서현…… 난, 네 마음을…가지고 논적 따위 없어.”

짝하며 방안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희사는 반사적으로 서현이 내려친 뺨을 감싸 안았다. 입안의 어딘가가 터졌는지 안쪽이 화끈거렸다. 

“나를 서현이라 부르지 말라했다.”

희사는 차마 더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울음을 토했다. 몸을 웅크려서 애처롭게 우는 모습에 서현은 그의 머리를 다시 잡아 올렸다. 

“별로 예쁘진 못하군.”

쓰게 웃으며 아직도 발기한 기둥을 희사의 입안으로 들이밀었다. 엉망이 된 채로 자신의 것을 물고 빠는 것을 보자니 안쓰러웠다. 그러기에 왜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었지? 나도 네게 평생 다정하고 싶었다. 원한다면 늘 자상한 서현으로 있어줄 수 있었다. 헌데 그것을 뿌리친 것은 너다. 서현은 처음부터 희사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일국의 황제다. 가질 수 없는 것 따윈 없다. 처음으로 내 온 마음을 준 네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다. 아니 처음부터 괴물이었는지도 모르지. 

목안으로 크륵거리는 신음을 삼키며 희사의 입안에 잔뜩 쏟아주었다. 콜록거리며 정액을 전부 뱉어내는 희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턱밑까지 흐른 것도 전부 다시 올려주어 삼키게 만들었다. 

“넌 이제 환진에서 없는 존재이며, 내가 너를 어찌하든 아무도 내게 무어라 지시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네게 감사해.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너를 마음껏 엉망으로 만들 수도 없었을 테니까.”

서현은 들어올 때와 같이 정갈한 모습을 하고 방을 나섰다. 그의 말대로 엉망이 된 것은 침상의 이부자리와 자신의 몸뚱이뿐이었다. 

서현은 어느 때고 원할 때 희사의 몸을 안았다. 그것의 그의 집무실이었을 때도 있었으며, 동궁의 정원일 때도 있었다. 궁녀들이 희사를 보는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아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에게 수치를 주어 더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희사는 점점 서현을 보는 시선이 무감각해져가며 타인을 보는 것같이 바뀌었다. 저자는 자신이 사랑한 서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미워할 수가 없었다. 희사는 반년 이상을 동궁에서 머물렀다. 변한 서현에게 자비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일되는 직장 사정에 의해 저도 모르게 그가 사정하기 전 몸을 뒤로 빼내었을 때 그는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웃었다. ‘그래, 내 것이 네 몸을 더럽히는 것이 끔찍한가.’ 그는 사정하는 대신 자신의 안에 소수(小水)를 했다. 희사는 그 기억을 떠올리자 온몸이 소스라쳤다. 뜨거운 액이 뱃속을 마구 울릴 때의 기분은 여전히 생각조차 끔찍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은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다. 서현이 두려웠다. 언제고 자신의 몸을 정상이 아니도록 망가뜨릴 것만 같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서현은 봄이 지나고 겨울이 올 무렵, 자신을 유곽에 팔아버렸다. 실컷 안은 이 몸뚱이에 질린 것 일지도 모른다. 희사는 서현에게 버림받으면서 안도했다. 유곽은 희사로선 처음 보는 환진의 새로움이었다. 자신과 같이 팔려온 유곽의 다른 이들은 매일같이 손님을 수명씩 받았다. 희사의 처소는 야화들의 침소에서도 멀리 떨어져있는 유곽의 뒤채에 마련됐다. 같은 유곽에 있으면서도 희사는 그 야화들도, 그리고 그들을 찾는 손님들도 보는 일이 드물었다. 희사가 만나는 자라면 유곽의 주인과,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지키는 무사인 해훈, 그리고 높은님이 전부였다. 자신이 이렇게 편할 수 있는 것은 높은님이 자신의 시간을 전부 사들였기 때문이라 했다. 희사는 그 높은님이 누구인지 몰랐다. 자주 올 때는 며칠에 한번 드물게 올 때는 보름에 한번 자신을 안으러 오는 자였다. 새까만 어둠속에서 높은님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희사는 어렴풋이 그 손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서현이었다. 

확신하지는 못했으나 얼굴도 한번 못 본 높은님이 자신을 큰돈을 들여 살 리가 없었다. 희사는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았다. 서현이 자신인 것을 알리기 싫어한다면 자신도 모르고 있어야 한다. 높은님이라 부르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에 희사는 서현이 다정했을 때를 떠올렸다. 불과 얼마 흐르지 않았으나 아주 오래전의 일 같았다. 그 때의 그는 독을 담고 웃지 않았다. 마냥 아름답기만 했다. 희사는 문득 자신의 감정이 멀게 느껴졌다. 서현을 사랑했는데도 그가 두려웠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그가 밉기도 했으며, 그렇지 않았으면 그가 죽었을 거란 사실에 가슴이 찢겨졌다. 희사의 두터웠던 마음은 어느 새인가 누군가 갉아먹고 없애버려 얇은 종이 한 장 두께도 안 되게 변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희사는 실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검은 장삼을 입은 자신의 호위무사가 다정스레 말을 건넸다. 희사는 마루에 앉아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그는 서현의 다정했던 때와 닮아있었다. 그의 모습이 아니라 말투나 행동이 비슷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직 날이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발끝까지 차가워지면 들어가겠다. 아직은 아니다.”

희사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쓰러지듯 옆으로 누웠다. 옆으로 누워서 본 세상은 희기만 했다. 유악의 산도 지금은 이렇게 새하얗겠지. 희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차가운 곳에서 자면 죽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뜬다 하던데. 희사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웃었다. 나무 마루 밑에 서있던 해훈이 위로 올라왔다. 희사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희사가 꼼짝하지 않자 들어 올리다시피 해 방의 따끈한 아랫목에 뉘였다. 해훈이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어주자, 희사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에선 어머니가 나왔다. 온몸에서 난자하게 피를 흘린 채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노려보기만 했다. 

내가 너 때문에 죽었는데, 너는 아직 살아있구나. 그렇게라도 삶을 유지하니 만족하느냐. 서현의 품에 안겨서 그 따위 취급을 당해도 만족하느냔 말이다. 

여자는 화를 내다가 곧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 어미는 괴롭다. 너무 괴롭게 죽었으니 어서 네가 와 나를 위로해주어야 하지 않느냐. 희사가 신음했다. 자신의 두터운 마음을 갉아먹은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해훈은 희사의 낮잠을 지켜보며 방에 머물렀다. 한가한 날이었다. 황궁에 갈 일도 없었고, 청영이 찾지도 않았다. 이제 희사는 해훈이 현세에서 기억하는 모습과 완전히 같아졌다. 해훈은 희사를 볼 때마다 아주 어렴풋한 옛일을 떠올렸다. 차가웠던 그의 모습. 지금과는 다르다. 현세에서의 희사는 누구보다 무뚝뚝하고 차가웠지만 이곳의 희사는 아니었다. 조금만 손에서 놓치면 어디론가 금세 흐트러져 버릴 만큼 위태했다. 

“어, 어머…어머니.”

곤히 자는 것 같던 희사가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 한겨울에 식은땀을 송글송글 맺혀가며 신음을 했다. 해훈은 희사의 몸을 한차례 흔들었다.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리기에 그의 작은 몸을 안아들었다. 희사는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잠에서 깨었다. 희사는 자신을 안고 있는 해훈을 보고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

시간이 지나갈수록 죄책감은 잊히지 않고 불어났다. 모두가 죽었는데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것이.

“장은 언제 서지?”

“달포가 지나면 입춘이 옵니다. 장사꾼들도 그때가 돼야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군.”

희사는 장이 들어설 때만 유곽에서 나갈 수 있다. 그것은 유곽의 모든 야화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신구와 옷감을 사기 위해 유곽을 나갈 때는 꼭 호위를 대동해야한다. 희사는 유곽의 누구보다 장이 서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을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희사는 해훈의 품에서 벗어나서 다시 아랫목으로 기어들어갔다. 달포라. 먼 시간이었다. 

        

황궁의 충신들이 희사의 존재여부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바람에 서현은 본의 아니게 희사를 유곽으로 보내게 됐다. 역모에 가담한 자를 살려두는 것은 본보기에 좋지 않다며, 시끄럽게 조잘대던 것들이 희사의 신분을 야화로 떨구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굳이 유곽으로 보내지 않고, 그들을 입을 막고자 했으면 충분히 행했을 텐데 그러하지 않았다. 서현 역시도 희사를 계속 곁에 두면 언젠가는 그를 완벽하게 망가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정하게 해주고 싶다. 허나 배신감에 또 다시 눈이 멀어버린다. 시간이 가도 이율배반적인 감정은 서현의 안에서 식지 않았다. 

희사를 유곽으로 보내고 가장 믿을 만 한 자를 뽑아 희사의 곁에 두어야 했는데 그럴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럴 때 서현을 찾아온 것이 해훈이었다. 서궁에 유폐되다시피 했던 2황자는 어느 날부터인가 서현을 포함한 몇몇 이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 후로도 서현과 해훈에게 형제간의 의리가 생겼을 리는 없었다. 단지 흑의대라는 무리를 이끄는 해훈이 서현의 밑에서 몇 번 일을 도와주었을 뿐이다. 그것도 값을 치러가면서 말이다. 해훈은 직접 희사의 호위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희사에게 관심을 보였다면 서현이 절대 허락지 않았을 텐데, 그는 희사가 황궁에서 거주하는 동안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내비쳤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서현은 해훈을 완벽히 믿지 않았다. 단지 해훈이 그러고자하는 꿍꿍이를 알기 위해 희사의 호위를 맡도록 허락한 것뿐이었다. 황궁을 나가 밖을 함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위치를 원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희사에게 딴 마음이 있는 것인지. 사실 그 어느 것이든 서현에겐 불만족스러웠다. 여태껏 서현이 해훈과 그의 어미인 제 1황비를 살려두고있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위치에 대해 위협을 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서현은 유곽의 희사를 품으면서 희사가 자신인 것을 모르기에 다정할 수 있었다. 서현은 이제 희사도 믿을 수 없었다. 또다시 마음을 이용당한다면 그의 혀를 뽑고, 팔 다리를 자른 뒤 황궁의 깊은 곳에 숨겨놓을 생각이었다. 그런 일을 사전에 막으려면 희사에게 전처럼 밑도 끝도 없는 총애를 주어선 안됐다. 그러니 그가 모를 동안에는 얼굴 없는 높은님으로서 얼마든지 다정할 수 있다.

서현은 그런 와중에 자신이 한 가지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사가 유곽에서 마음을 둘 곳은 아무데도 없다. 그는 얼마 전까지 귀족이었으며, 가족이 전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자였다. 아무것도 없는 자가 매달릴 것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일뿐이었다. 바로 해훈. 허나 서현은 급히 나서지 않았다. 아무리 매달릴 곳이 필요하다해도 희사가 해훈을 사랑할 리가 없다 여겼다. 그것이 자신의 착각일지라도 확신해야했다.

서현의 예상대로 희사는 해훈에게 마음을 점점 열어갔다. 하지만 쉬이 사랑하진 않았다. 희사는 이제 그 누구를 사랑하기가 두려웠다. 

다라락- 

바닥과 마찰하는 나비의 소리가 예뻤다. 봄이 오고 처음 들어선 장터에서, 해훈이 선물해준 나비 머리 장신구를 이리저리 굴렸다. 자신이 처음부터 해훈을 사랑했더라면, 아무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를 죽일 필요도 누구의 편에 설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자신이 유곽에 오지 않았다면 해훈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와 가정해 보아도 무의미할 뿐이다. 희사는 며칠 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해훈을 생각했다. 희사는 붉은 나비를 보며 위로 받고 있었다.

해훈은 그 시각, 청영의 부름으로 황궁에 가있었다. 청영은 아들과 함께 할 작은 다과를 준비시켰다. 서궁은 오랜만에 나타난 해훈의 출현에도 별다른 소란스러움이 없었다. 여전히 해훈이 2황자인 것을 아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어서오거라.”

청영은 팔을 벌려 아들을 환대했다. 해훈은 청영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해훈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들을 보며, 이제야 조금 사람 같아졌다 생각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던 해훈이 변한 것이다. 청영은 그것이 희사로 인한 변화임을 알았다. 

청영은 오랫동안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던 아들의 비밀을 캐내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 때문에 해훈이 후생에서 넘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혔어야했다. 이기적이라 해도 청영은 자신의 전부인 아들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좀 어떠하더냐.”

“여전히 지켜줘야 할 것 같습니다.”

청영은 누구에게서? 라는 말을 삼켰다. 서궁이라 하더라도 황제의 귀와 눈이 있기 마련이다. 그전엔 청영의 걱정이 아들의 은둔생활이었다면 이번엔 서현과의 마찰이었다. 분명 서현은 희사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황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겐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희사를 살려두는 것도 모자라 황궁의 여러 곳에서 그를 품었다. 모르는 자가 바보일 것이다. 청영은 다기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에게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왜 입니까.”

해훈의 무덤덤한 대꾸에 청영이 들었던 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해훈이 자신의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황제폐하께서 그를 놓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폐하에게서 벗어나고자한다면 저는 그의 뜻을 따를 겁니다.”

해훈의 당돌한 말에 청영의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된다! 내가, 내가 너를 어찌……”

청영은 어찌 다시 살렸는데. 라는 말을 애써 속으로 삼켰다. 서현과 마찰하게 되면 해훈이 죽을 수도 있다. 아들의 정인이 될 자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겐 해훈이 사는 것이 더 중했다. 

“혹,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닐 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를 웃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인 걸 모르는 것이야. 청영은 안타까운 눈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해훈은 청영과 더는 할 말이 없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영이 닫혔던 입을 열어 그를 잡으려 했지만 해훈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더 먼저였다. 

해훈은 별일 없이 황궁에 오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다. 좋던 싫든 황궁을 찾은 이상 서현을 만나는 것이 관례였다. 청영이 부르지 않았으면 해훈은 황궁을 한참동안 찾지 않았을 것이다. 청영 역시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이라면 시간만 낭비했다. 

서현은 하루에 잠자는 시간과 만찬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서현을 만나려면 그를 수소문 하는 것보다 집무실로 직접 가는 것이 현명했다. 해훈이 집무실의 앞에 서자 사황은 해훈이 도착했음을 고했다. 집무실 안은 웬일인지 한가해보였다. 탁상위의 서류들이 평소의 절반도 채 안되었다. 

“근 보름만의 방문이지?”

서현이 웃었으나 뼈가 있는 말이었다. 

“폐하를 이틀 전에 뵈었으니 보름이 아닙니다만.”

서현은 해훈의 말대로 유곽을 찾은 이틀 전 그를 마주했었다. 그 날도 희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서현이 희사를 부드럽게 안는데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여전히 숨죽이며 서현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안 그래도 부르려 하던 찰나였다.”   

용건이 있다는 서현의 말에 해훈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북방의 제후 규성견이 죽었다. 네가 내 대신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나.”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쭙잖은 충고겠지만 그의 아들 규태휘를 우습게보지 마라. 네가 황손인 것을 알려서 좋을 것도 없으니 그저 내 뜻을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황족중 하나가 북방에 위로 차 방문할 것이 아니라면, 굳이 해훈을 보내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서현은 희사의 곁에 해훈이 오래 머물수록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더해갔다. 이 초조함이 극에 달하기 전에 희사를 지키는 호위무사를 갈아치워야겠다 생각했다. 서현은 더는 시간을 둘 필요도 없다 여겼다.

“해훈… 너는 왜 희사를 곁을 지키고 싶어 했지? 아무것도 원치 않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네가, 그것도 내게 직접 요구했다는 사실이 궁금하군.”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했을 뿐입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라. 내게 안기는 희사를 보면서도 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네 눈빛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아니면 감정을 내게 감쪽같이 숨겨온 것인가?”

서현도 청영과 같이 자신이 희사를 사랑하느냐 돌려 묻고 있었다. 해훈은 답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명확히 정의를 내리지 못한 감정에 대해서.

“폐하께서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해훈은 마음에도 있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서현은 소름끼칠 정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었다. 마치 해훈의 드러나지 않은 마음을 비웃는 것 같았다. 

“뭐 좋다, 초조하면 할수록 시야가 좁아지는 법이지. 바로 북방으로 출발토록 하라.”

탁상의 서랍에서 서신을 꺼내 해훈의 앞으로 밀었다. 해훈은 한걸음 다가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북방에 다녀오려면 일주일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동안 서현은 호위 문제를 천천히 생각해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서현은 검지를 틀어 턱을 톡톡 두들겼다. 집무실에서 흑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 * * 

해훈이 자리를 비운적은 꽤 있어도 이렇듯 긴 시간 돌아오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희사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야화의 호위무사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했다. 가끔씩 다른 일도 한다했는데 아무래도 칼을 쓰는 직업이다 보니, 혹시 어디 다친 것은 아닐지 걱정이 앞섰다. 해훈이 돌아오지 않은 날 동안 높은님은 전과 다름없이 자신을 찾았다. 하루는 자신을 안았으며, 그리고 또 하루는 그저 껴안고 잠을 청하기만 했다. 자고 일어나면 늘 식은 이부자리만 남고 그는 사라졌다. 

희사는 이른 아침에 잠시 깨었다 다시 잠이 들었다. 분명 나비 머리 장신구를 침상 옆에 놔두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어딘가에 있겠지 하며 꿈뻑꿈뻑 존 것이 벌써 한낮이었다. 일주일이 넘어서 돌아온 해훈이 희사를 깨웠다. 나비 장신구를 방안 어디선가 찾았는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희사는 무사히 돌아온 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해훈의 말에 따르면 오늘부터 축일이 시작된다 했다. 유곽에 있다 보면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다. 손님을 받고, 자고 싶을 때자며 장에 나가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축일의 시작이라 함은 그 일로부터 벌써 두 해가 지났다는 소리다. 모두가 죽은 후 맞는 두 번째 축일이다. 희사는 문득 유악산에 오르고 싶었다. 축일엔 늘 유악산에서 불꽃을 봤다. 서현과 함께. 

희사는 점점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를 아직도 그리워했다. 그 때의 서현을 아직도 그리워하며 떠올렸다. 부모님의 제삿날이나 다름없는 날에 그를 먼저 떠올렸다. 죄책감에 자신을 책망했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머릿속을 맴돌던 이야기를 건넸다. 

“유악산을, 산을 오르고 싶다.”

해훈은 뜻밖에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다. 망설임 없이 한달음에 유악으로 데려가 주었다. 희사는 장이 서지 않았는데도 거짓을 고하고 유곽을 나서는 것이 두려웠다. 만일 들킨다면 자신보다 곤욕을 치를 것은 해훈쪽이었다. 그럼에도 유악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희사는 해훈에게 감사했다. 해훈이 아니었으면 유곽에서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불편한 신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업고 산을 올랐다. 

해훈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자객의 칼날을 대신 맞았을 때 서현은 이렇듯 자신을 업고 유악산을 내려갔다. 눈물이 흘렀다. 해훈의 어깨가 축축이 젖었지만 그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희사는 서현과 함께 불꽃의 구경했던 절벽에 섰다. ‘누군가가 그러던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다음 생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그 날의 서현이 말했다. 희사는 딱딱 한 나무 신을 벗었다. 절벽 밑을 보며 희사가 쓸쓸이 중얼거렸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으로 말입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태어난다 했다.”

“그럼 다음 생엔 쥐로 태어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뛰어내리면 되는 겁니까?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해훈의 말에 쓰게 웃었다. 

“그 이야기는 누가 해주었습니까?”

“글쎄…. 모르겠다.”

서현, 난 왜 당신을 완벽하게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인지. 차라리 내가 당신을 정말 배신하려 했고, 증오했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거야. 차라리, 그래 차라리. 희사는 뒤에 선 해훈을 바라봤다. 

해훈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희사는 맨발로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갔다. 해훈은 희사가 다칠 새라 다시 번쩍 그를 업었다. 해훈은 북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유곽부터 찾았다. 서현이 알게 된다면 길길이 날뛸지도 모르는 일이다. 해훈은 올라온 것보다 더 더디게 산길을 밟았다. 해훈은 그의 쓸쓸함 속에서 진정한 희사의 웃음을 보고 싶었다. 자신을 보며 슬프게 웃는 얼굴 따위 말고, 정말 행복해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해훈은 등 뒤로 느껴지는 희사의 온기에 가슴언저리가 뜨거워졌다. 현세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희사만이 자신의 가슴속을 파고들어왔다. 해훈은 황궁에서 처음 희사를 본 순간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어졌다.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닐까, 원래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까 늘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를 위해, 그의 웃음을 위해 살아가고 싶었다. 그랬기에 늘 희사의 앞에선 밝게 있을 수 있었다. 

해훈은 유곽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북방에 가 있는 동안 계속 생각해왔던 것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희사도 서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늘 제자리다.

“희사님, 난 희사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함께지 않느냐.”

희사가 뜬금없는 해훈의 말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희사도 해훈이 자신을 연모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긴 했다. 확신하진 못했다. 그리고 자신은 해훈에게 마음을 주긴 했으나 그것은 사랑이라고 하기엔 먼 감정이었다. 

“희사님은 나를 믿고 따라올 수 있으십니까?”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둘이 도망가자는 말입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둘이서 말입니다.”

해훈의 말에 희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혹적이고 달콤한 말이다. 도망친다면, 그의 말대로 아주 멀리 떠나버린다면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서현 당신을 향한 마음도 사라지는 것일까…. 

희사는 무사히 도망치지 못할 시 해훈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임을 알았다. 서현이 자신들을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희사님은 나와 함께 하고 싶지 않습니까?” 

“함께…. 나도 너와 함께하고 싶다. 행여나 붙잡히게 되면 넌 죽을 것이다. 난 그래서 싫다. 안 된다.”

해훈 마저 잃을 순 없었다. 하지만 해훈은 완강한 태도로 희사를 설득시켰다. 희사는 이미 한참이나 마음이 기울어있었다. 힘들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다. 해훈과 함께 도망친다면 어쩌면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이토록 이기적인 인간이 자신이란 말인가.

“지금 당장 답을 달란 것이 아닙니다. 나흘 후 자시에 유곽의 뒷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행여 오지 않는다면 난 희사님을 전처럼 호위할 것이고, 오신다면 아무도 찾는 않는 곳으로 희사님과 도망가겠습니다. 혹 오지 않으신다하여, 전처럼 희사님을 호위한다 해도 제 마음은 괴로울 것입니다.”

희사는 해훈이 왜 자신을 데리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두려웠다. 해훈은 희사의 얼굴 표정을 보며 그도 도망치고 싶어함을 깨달았다. 희사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따위는 상관없었다. 부족한 만큼 자신이 채워주면 그만인 것이다. 해훈은 희사의 상기된 뺨을 다정히 쓸었다. 희사는 그 손길 속에서 과거의 서현을 엿봤다. 

해훈은 희사를 유곽으로 보낸 뒤 재빨리 황궁으로 향했다. 북방의 규태휘가 보낸 감사 서신을 서현에게 전달해야했다. 평소와 같이 달렸다면 유곽에서 황궁까지 사흘이 걸렸을 테지만, 잠도 쪼개가며 달린 터라 이틀 만에 황궁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해가 기울고 나서야 서현은 황궁의 내실에 도착했다. 복면을 쓴 채로 서현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 문 앞을 경비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폐하는?”

“동궁에 계십니다.”

해훈은 다시 내궁을 나서서 동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현이 아직 동궁으로 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해훈은 동궁의 앞에서 경비에 의해 입실을 저지당했다. 

“폐하를 뵈러왔으니 비켜라.”

“들라 이르라.”

경비 뒤에 얼굴만 빼곰히 보이는 서현의 측근 사황이 쉰 목소리를 냈다. 무엇인데 서현의 수하들이 다 동궁에 배치된 것이지. 해훈은 앞장 선 사황을 뒤따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사황이 문득 선 곳은 희사가 동궁에서 거주했던 황후의 방이었다. 문은 이미 해훈이 올 것을 알았는지 활짝 열려있었다. 다홍빛 침상에 서현이 앉아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화려한 다홍은 가히 장관이라 할 정도로 멋들어지게 어우러졌다. 

“고단할 텐데 나를 일찍도 찾으셨군.”

“북방 공자의 서신입니다. 방문한 랑쿤의 태자도 폐하께 안부를 전했습니다.”

해훈에게서 서신을 건네받은 서현은 그것을 읽어보지도 않고 침상위에 내던졌다. 서현은 일주일간 생각했던 것도 보람 없이 결국엔 같은 결정을 선택한지 오래였다. 

“해훈, 이제 희사의 호위에서 물러나도 좋다. 다시 그를 황궁으로 불러들이기로 결정했으니.”

해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기가 막힌 우연이다. 도망가기로 결심한 날 희사를 다시 황궁으로 데려오겠다니. 

“알겠습니다. 유곽의 제 신변을 정리토록 하겠습니다.” 

해훈은 서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했다. 서현은 다시 이방에 돌아올 희사를 그리듯 침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서현의 앞에선 인내심을 발휘해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서궁으로 향하는 해훈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도 급했다. 행동력은 자신만큼이나 서현도 재빨랐다. 그러니 서둘러야했다.

해훈은 서궁의 궁녀들이 뭐라 고할 새도 없이 청영의 방으로 들이 닥쳤다. 청영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던 궁녀들이 깜짝 놀라 빗을 떨어뜨렸다. 청영이 가벼운 손짓으로 그녀들을 물렀다. 해훈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복면의 흔들림이 전에 없이 잦았다. 

“어머니.”

청영은 장신대에 앉은 상태로 입을 벌렸다. 후생에서 온 해훈은 한 번도 청영을 어머니라 부른 적이 없었다. 청영이 너무 놀라 손을 떨며 해훈에게 다가갔다. 혹시 아이 때의 기억이 돌아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허나 그것은 지나친 억측이었다.

“떠나겠습니다. 제가 떠날 때까지만 흑의대가 저를 따르게 해주십시오.”

“이미 그들은 너를 따르고 있지 않느냐.”

“그들을 이끌 뿐이지 명령은 내릴 수 없습니다.”

청영은 차가운 손으로 아들의 눈가를 훑었다. 떠나겠다니. 청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희사와 함께 떠나겠습니다.”

“안 된다. 안 돼.”

“실은 저는 이곳의 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내세라 부르는 후생에서 왔습니다. 제가 미쳤다 여기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저는 이제 그가 슬퍼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를… 그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제 감정에 충실치 못해서 이 모든 상황이 증오스러웠기에 한치 앞도 보지 못했습니다. 인정한 이상 그의 웃음이 보고 싶습니다.”

해훈은 태어나 처음으로 그의 감정을 천하에 외치고 있었다. 청영은 그런 해훈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었다. 청영은 뭐든 해훈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의 품에서 떠나가는 것일지라도.

“절대 죽어선 안 된다. 네가 선택한 이상 꼭 행복해야 한다.”

해훈은 청영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를 한번 껴안았다. 청영은 해훈의 가슴을 미약한 손으로 밀었다. 이리 바삐 온 것을 보니 시간을 지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해훈은 청영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크게 호령했다.

“흑의대를 소집하라!”

제각기 수련과 서책을 읽던 흑의대들이 순식간에 서궁의 뒷손원에 몰려들었다. 청영은 흑의대의 최고 노장 감인령에게 마지막 부탁을 전했다. 흑의대중에서도 감인령만이 해훈이 흑영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청영이 직접 해훈을 흑의대에 소속시키면서 감인령에게는 사실을 전했던 것이다. 감인령은 청영과 흑영의 아이인 해훈을 누구보다 아꼈다. 그녀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해훈의 부탁이라면 뭐든 혼자서도 따랐을 것이다.

“나는 오늘 이후로 흑의대의 수장이 아니다.”

해훈의 충격적인 발언에 흑의대 전원이 술렁거렸다. 그렇다면 원래 수장이었던 감인령이 다시 복귀하는 것이 된다.

“그대들은 마지막으로 내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한다. 나는 오늘, 황성(皇城)떠나 북방으로 향한다. 그리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북방으로 향할 동안 그대들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내 마지막 부탁이다.”

해훈은 자신의 욕심을 차리고자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미안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희사의 존재가 더욱 커져버렸다. 흑의대는 술렁술렁 거리더니 청영의 모습을 보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청영은 침묵했으나 감인령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뜻을 받들겠습니다.”

청영도 허락한 이상 흑의대는 더 이상 토를 달 것이 없었다. 그저 따를 뿐이다. 해훈이 무엇 때문에 도망가는 것인지 다른 흑의대원들은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이유를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해훈은 감인령만을 따로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 감인령의 표정도 역시 좋지는 못했다. 아예 떠나겠다는 해훈의 말이 못내 섭섭했다.

“북방으로 가셔서 또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북방으로 도망쳐봐야 환진의 손바닥인 것을 알았다. 해훈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랑쿤으로 갈 것이다.”

감인령이 눈을 찢어질 듯 키웠다.

“랑쿤이라니요! 그곳이 더 위험합니다. 환진의 치안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치안과 관련되어 위험에 처할 자던가.”

해훈의 말이 맞았다. 해훈은 웬만한 장수보다 더 뛰어난 무예를 자랑했다. 해훈은 가만히 서궁에 틀어박혀서 밥만 축냈던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감인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해훈은 어릴 때부터 서궁에 칩거했지만, 게으르게 지내는 법은 없었다. 

“대체 왜 도망을 가시는 것입니까!”

감인령은 일국의 황자인 해훈이 도망가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지 못했다.

“희사와 함께 환진을 뜰 것이다.”

“희사? 희사라면 그 유악 제후의 공자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은 이미 황제폐하께서……”

감인령이 말을 멈췄다. 해훈의 씁쓸한 웃음에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서현에게서 희사를 데리고 도망치겠다는 것이었다. 감인령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서현이 황제인 것은 허울뿐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 무서운 자였다. 자비는 필요한 자들에게만 적당히 베풀었으며, 간신들에겐 오로지 죽음만을 선사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있어선 성군이었지만 귀족들에겐 폭군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도와 달라 청한 것이다. 나 혼자선 어디든 갈 수 있으나 희사를 데리고 가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갑자기! 갑자기 왜 그분께 마음을 홀리신 것입니까!”

“갑자기가 아니다.”

해훈은 더는 희사에 대해 이야기를 섞고 싶다 않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

“나는 바로 유곽으로 가겠다. 황제가 먼저 사람을 보냈을 수도 있으니…… 만일 그렇다면 전면전은 피할 수 없다.”

“청영님 생각은 안하십니까. 흑의대가 황제폐하와 맞서게 된다면 서궁은 초토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들은 흑의를 입어선 안 된다. 서궁에서 한두 명씩 평상복을 입혀 내보낸 다음 이틀 후 자시까지 유성주의 마을로 모이게 하라. 그 후엔 내가 직접 그대들을 찾도록 하겠다.”

해훈은 그 말을 끝으로 감인령을 내보냈다. 감인령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해훈은 탁상 안 서랍에 담겨있던 검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금주화가 수십 개나 담겨있었다. 금주화 한 개면 일반 백성들도 일하지 않고도 반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양이다. 해훈은 안에서 짤랑거리는 그것을 가슴 안속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일이 틀어지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서현은 희사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해훈은 차라리 이 마음을 포기할까 싶었으면서도 서현에게 억매인 희사를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해훈은 허리춤에 매달린 칼집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서궁의 마구간으로 달려가 천둥이를 불렀다. 똑똑한 놈이라 주인의 소리에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해훈은 말의 안장에 올라타 최대한 속도로 유곽을 향해 달렸다. 서궁은 청영이 주인으로 들어선 이후 최고로 분주한 한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해훈이 유곽에 도착한 것은 약속한 날의 자시가 되기 바로 전이었다. 희사의 방에 촛농이 밝혀있었다. 아직 유곽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서현보다는 해훈의 행동이 더 빨랐다. 해훈은 한숨을 돌리며, 유곽의 뒷문에서 미리 희사를 기다렸다. 헌데 그 순간 머릿속이 싸해졌다. 희사는 자신에게 도망가겠다 확답을 주지 않았다. 만일 그가 정말로 나오지 않는다면? 두려워서, 또는 서현에게 그대로 얽매어 있기를 원한다면? 생각해보니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기가 막혔다. 

서현이 희사를 황궁으로 다시 부르겠다는 말에 앞뒤 안보고 행동을 개시했다. 해훈은 그래도 희사를 기다리기로 했다. 만일 그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초조함이 극에 달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바스락거리는 인영의 소리에 해훈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둠속에서도 알아 볼 수 있었다. 분명 희사였다.

“오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이제 이곳에 있기 싫다. 너와 함께 가고 싶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다.” 

희사는 이기적인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해훈은 희사를 천둥이의 안장에 들어 앉혔다. 희사는 낙마한 경험이 있어 말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희사가 해훈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말은 짙은 어둠속을 한낮의 거리처럼 거침없이 달렸다. 끝이 없는 어두운 밤길은 간간히 마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홍등만이 반짝거렸다. 푸륵거리는 말의 숨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말이 속도를 줄였을 때 희사는 말이 힘에 부쳐 조금 쉬려는지 알았다. 그만큼 쉴 새 없이 달린 것이다. 거센 바람에 감을 수밖에 없었던 눈을 뜨자 유악산의 비석이 보였다. 놀라운 따름이다. 마차를 타고 올 때보다 곱절은 빨랐다. 해훈은 유악산을 넘어 도망간다 했다. 따라 나온 희사는 그냥 해훈에게 맡길 뿐이었다. 요깃거리를 사러 해훈이 마을로 내려갔음에도 희사는 그저 천둥이라는 말과 함께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해훈의 지시대로 유성주 마을엔 각기의 의복을 입은 흑의대가 무리지어 있었다. 어두운 밤이기에 그 무리들이 눈에 띄진 않았다. 해훈은 제각각 모인 흑의대를 전부 유악산으로 이동시켰다. 희사와 자신이 산을 넘는 동안 혹시라도 따라올 황궁의 경비를 막아야했다. 자신들이 유악산을 타고 북방으로 갈 것임을 서현이 예견할 가능성은 적었다. 그래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했다. 해훈은 불안한 마음에 요깃거리는 하나도 구하지 못하고, 희사가 있는 산의 입구로 다시 향했다. 

        

서현의 사람이 유곽에 도착한 것은 해훈과 희사가 도망간 후 한끝차이였다. 서현은 이미 해훈에게 붙인 간자와 매를 통해 그들이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도 해훈과 희사가 유악산의 입구에 도착했다는 것까지. 유곽으로 향하던 방향을 틀어 그들을 잡으러 나서는 서현이 낄낄댔다. 희사, 이렇게 도망치면 안 되지. 나는 아직 분을 풀지 못했는데, 희사 네가 다시 배신을 하면 나는 또 어떤 괴물이 되야 하는 것이지? 서현의 웃음소리는 울음과도 닮아있었다. 서현의 뒤를 따르는 수하들은 황제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저 말발굽 소리만 지축을 뒤흔들었다. 

서현과 유악산으로 향하는 직속 근위대 다섯은 황제의 그림자였다. 황제는 어디든 혼자서 이동할 수 없었으며, 늘 그들을 대동해야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들은 어딘가에 존재했다. 물론 이번엔 서현이 그들만을 대동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급작스런 출타에 바로 따라나선 자들은 직속 근위대뿐이었지만, 나머지 황궁에 남아있던 근위병들은 채비를 마친 뒤 사황의 지시에 따라 바로 유악산으로 출발했다. 

서현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싸늘했지만 그 안은 용암이 끓어오르는 것보다 뜨거웠다. 희사 혼자 유곽에서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희사를 꼬여낸 가장 유력한 자는 해훈 단 하나다. 어쩌면 서현은 해훈이 이 지경까지 일을 만들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나라에 직계 황손은 자신 하나로 충분했다. 해훈을 명분 없이는 죽일 수 없으니 친왕(親王)의 자리만 하사한 뒤 가만 둔 것뿐이다. 해훈이 이끄는 흑의대도 부릴 때는 편하나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다면 골치 아파질 무리였다.

저 멀리 새까만 어둠속에 먹힐 듯한 작은 인영이 보였다. 뒷모습만으로도, 그 향기만으로도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자다. 자신들이 오는 말발굽 소리에 급해진 희사가 말에 올라타려 했다. 서현은 달리는 말 위에서 석궁을 조준했다. 희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가 올라 타려하는 흑마(黑馬)를 향해 거침없이 화살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표물에 꽂혔다. 엉덩이에 화살을 맞은 흑마는 괴이한 짐승의 소리를 질렀다. 희사를 땅에 내팽개쳐두고 화살을 맞은 고통을 덜고자 완벽한 어둠속으로 달려 사라졌다. 멀어지는 흑마와는 반대로 서현은 희사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꽤나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군.”

서현이 이죽였다. 바닥에 엎어진 희사는 떨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했다. 서현은 주변을 둘러 다른 한사람의 인영을 찾았다. 어둠속에 희사만 달랑 남겨져 있을 뿐 해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 희사 너 혼자 도망갈 리가 없다!

“왜 그런 표정이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나?”

서현은 희사가 해훈과 함께 도망치려 한 것이기를 바랐다. 정녕 자신이 끔찍해서 홀로 도망가려 한 것이라면…… 서현의 눈시울이 뜨겁게 타올랐다. 제발, 나를 또 배신하려 하지 마. 이젠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제게, 제게 이러는 이유가 무어십니까.”

“내 소유의 물건이 도망갔는데 당연히 쫒아야하지 않겠어?”

“나를 유곽에 팔았으니 나는 폐하의 소유가 아닙니다.”  

“네가 유곽의 것이라고? 대체 누가 그러더냐. 유곽에 판 것도 나이며, 다시 널 산 것도 나 하나뿐인걸 여태껏 몰랐단 말이냐.” 

희사는 예감하고 있었다. 서현이 알리지 않는 이상 자신도 모른다 여길 뿐. 차라리 이대로 자신을 보내주면 서현 당신도 편해질 텐데. 서로 사랑했음에도 이제는 그 감정이 변질돼 각자의 심장만을 갉아먹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아니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이겠지. 자신처럼. 

자신을 놓지 않을 것이라면 어서 빨리 어디로든 데려가 주는 것이 좋았다. 해훈이라도 오게 된다면, 자신 때문에 또 죽음을 맞이할 자가 늘어나게 될 것이다. 희사의 마음을 배반하듯 뒤에서 여유로운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서현은 그 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서현은 속으로 웃었다. 다행이다 희사, 저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내가 너를 어찌했을지 모르니.

“말의 근육이 찢기진 않았나보군.”

“아무리 폐하라도 천둥이에게 활을 쏘신 건 너무하셨습니다.”

서현이 해훈의 등 뒤를 봤다. 따라오는 자는 없다. 허나 저자가 아무 준비도 없이 희사를 도망시켰을 리는 만무하다.

“해훈, 그 동안 야화의 호위 따위로 있느라 참으로 수고해주었다.”

서현이 비웃으며 말을 건넸다. 해훈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아닙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유곽의 제 신변을 정리하는 사이, 조금 장난 끼가 발동되어서 말입니다.”

“장난 끼라니?”

“저 야화가 저를 너무 믿기에 조금 골려준 것뿐입니다. 이년을 같이 지냈는데 저 역시 잠깐의 재미라도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저 자가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말입니다.”

처세술 한번 좋다. 과연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둘이 도망가려 한 사실을 자신에게 들킨다면 자신이 앞뒤보지 않고 달려들 것이라 생각한 것인가? 서현은 가늘게 눈을 떴다. 

“저 자는 내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재미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해훈 역시 믿는 구석이 있는 듯 생각보다 덤덤히 행동했다. 흑의대가 이곳어딘가에 있거나 오고 있는 중일 가능성이 컸다. 해훈의 저 여유작작한 표정을 보아하니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서현 역시 황궁의 근위병들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해훈은 서현과의 전면전을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흑의대 중 그 누구도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 대체….”

희사는 저 둘이 대체 어찌 아는 사이인지 짐작키도 힘들었다. 해훈은 그저 야화의 호위무사였다. 서현과는 아는 사이일 리가 없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희사님. 아니 이젠 존대할 필요가 없나.”

해훈은 차갑게 말하며, 희사가 자신의 본심을 알아주길 바랐다. 단지 서현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임기응변임을. 틈이 보인다면 희사를 데리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해훈의 뜻과는 다르게 희사의 머릿속은 폭풍이 한차례 쓸고 지나간 마냥 뒤죽박죽이었다. 해훈이 왜 서현을 알고, 서현 역시 해훈을 알고 있는지. 혹시 처음부터 해훈이 서현의 사람이었는지. 그렇다면 왜 자신과 함께 도망가자고 한 것인지. 희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혹 서현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감정의 배신을 맛보게 해주려 한 것인가. 그래서, 그래서 과거의 다정한 서현을 닮은 해훈을 보낸 것일 지도 모른다. 희사는 해훈을 믿었다. 그런 자신을 보면서 저 둘은 얼마나 비웃고 또 즐거워했을런가. 손바닥 안에서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며 가지고 놀았다.  

이것은 전부 죄책감의 무게에서 도망치려한 자신에 대한 벌이었다. 자신의 부모가 전부 비참한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도 마찬가지로 죽었어야 했다. 서현이 저렇게 변해버리기 전에, 해훈에게 믿음을 주기 전에……

희사는 그 둘을 두고 미친 듯이 유악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뒤쫓아 오는 자들의 소리가 들렸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기란 쉽지 않았다. 희사는 몇 번을 미끄러지고 무릎이 깨져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왜 달리고 있는 것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어디 한군데 성할 곳 없이 생채기가 났다. 희사는 절벽 앞에 멈춰서고 나서야 뜀박질을 멈췄다. 저도 모르는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그저 한 사람을 사랑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다. 

“희사님.”

숨이 턱까지 찬 희사와는 다르게 바짝 뒤에 선 해훈의 숨결은 평이했다.

“희사님 저는.”

“내게 왜 그랬지? 내가 네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믿음을 주고 이렇게 나락으로 빠뜨리는 건지….”

“떨어지겠습니다. 제발 이리로. 같이 이곳을 떠나자 했던 말은 진심입니다. 그러니 제발.”

희사는 해훈의 내민 손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것이 진심이었다 한들 네가 서현의 사람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리와, 희사.”

어둠속에서 서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희사는 눈물이 울컥울컥 넘어왔다. 더는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서현……”

희사가 서현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았다. 서현은 절벽 앞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대는 희사에게 다가가려했다.

“그만, 다가오지 마.”

“내게 와, 희사. 넌 내 소유야.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만, 이제 그만! 내게 복수를 하려했다면 이미 충분해. 당신이 내 감정을 배신이라 치부했을 때부터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겼어. 그래, 내 부모와 당신사이에서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한 나야! 결국 그들은 나 때문에 죽었는데……”

“아니, 희사 너 때문이 아니다.”

“그럼에도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이상해서, 차라리 당신을 증오하고 싶었어. 사랑했던 감정조차 지워버리고 싶었던 거야. 너무 괴로웠으니까, 내 부모와 친족들을 죽인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어. 그만큼 당신이 두려웠기도 해.”

희사의 울부짖음에 서현은 목이 멨다.

“그렇다면 내게서 왜 도망가려 하는 것인지 말해! 나를 사랑한다면 배신하지 말았어야한다. 어쩌면 넌 해훈을 살리고 싶어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잠을…… 잠을 잘 수가 없어. 모두가 나를 원망해.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내게 손짓해. 이번엔 너도 죽어야한다고.”

희사가 마치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꾹꾹 참아온 감정들이 지금 이 순간 폭발하고 있었다. 해훈은 희사가 여전히 서현을 사랑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희사의 말대로 그의 부모와 친족들을 죽인 자다. 그럼에도 희사는 서현을 완벽히 미워하지 못했다. 하물며 감정의 잔재들은 여전히 희사의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해훈이 쓸쓸하게 자소했다. 바스락 거리며 절벽 밑으로 자갈들이 떨어졌다. 해훈이 한 발짝 다가갔다. 희사는 휘청하는 상태로 가슴을 웅크렸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 반발 짝만 내딛어도 절벽으로 낙하해버린다.

“서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그 다음 생에는 원하는 것으로 태어난다했지?”

희사의 말에 서현과 해훈은 동시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말 뛰어내릴 생각이었다. 

“아, 안 돼. 희사 제발 내게 이러지 마.”

희사를 한계까지 몰고 간 것은 서현이다. 하지만 서현 조차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폭주였다. 해훈은 원망스러웠다. 뒤늦게야 희사를 발견한 자신이, 그리고 그를 향한 감정을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것이. 서현이 아슬아슬한 희사를 잡으려 몸을 앞으로 뻗었다. 그와 동시에 희사가 천천히 뒤로 발을 뻗었다. 작은 몸이 크게 휘청했다. 희사의 소맷자락을 간신히 잡았건만 야속한 천은 쉽게 뜯겨나갔다. 

서현은 꿈만 같았다. 삽시간에 희사가 절벽 아래로 낙하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서현이 어둠속에 사라지는 희사를 보며 절규했다. 해훈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비어버린 손은 칼자루를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칼날은 어느새 절벽 앞에서 오열하는 서현을 향해 있었다.

낙하하는 희사에게 서현의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알겠다. 가슴이 찢기는 것보다 쓸모없는 몸뚱이가 찢기는 것이 낫다. 이렇게 쉽게 끝날 것을 왜 그렇게 질질 끌어왔는지. 희사의 눈 위로 불꽃들이 피어올랐다. 눈을 감지 않도록 힘을 주어야했다. 아름답게 피어올라 순식간에 사라지는 불꽃을 하나하나 눈에 박아 넣으려면. 

아무걱정도 없이 서현과 유악산을 올라 폭죽을 보던 날이 떠올랐다. 행복했던 그 날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희사는 이제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지 몸에서 피를 쏟는지 감각조차 없어졌다.   

생이 이렇게 괴로울 것이라면 영영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운명을 거스를 수 없어 다시 태어나, 또다시 서현 당신을 사랑해선 안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래 차라리 나는 당신을 증오하겠다. 그것만이 당신과 내가 이토록 고통스러운 끝맺음을 맞이하지 않아도 될 방법일 테니. 

그래도, 그래도…… 당신을 향했던 이 모든 감정을 지울 수가 없다. 먼지 한 톨도 없이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는 언제고 당신을 사랑하게 될지 모른다. 서현 혹시라도 다음 생에서 내가 당신을 증오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 진심이 아니란 것을 당신은 알 수 있을까? 아니, 차라리 몰라준다면 그것으로 더 좋지 않으려나. 

나는 그저 서현 당신과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왜 어째서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게 됐냐고 묻는다면 답할 것은 단 하나다. 당신이기에. 마음이 당신을 사랑하라 시키기에. 

희사는 생각을 멈췄다. 아니 더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작게 새어나오던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왜 그랬지! 대체 왜 그를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인지 말해!”

서현의 원망은 해훈을 향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임에도 눈앞의 남자에게 책임을 전가해야했다. 자신 때문에 희사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 역시 희사를 가지고 싶었다. 그것보다 더 큰 감정은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었지. 넌 정말 희사를 사랑하긴 했는가, 그를 함부로 품고 네 마음대로 휘두른 것에 만족감을 느낀 것이라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서현은 희사를 사랑함으로써 독점에 가까운 소유욕을 숨겼고 그것이 드러나자마자 서서히 파국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해훈은 희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었다. 아니 행복까진 아니어도 편하게 해줄 수는 있었다. 해훈 역시 서현이 원망스러웠다. 

절규하던 서현이 갑작스레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광인과도 같았다.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음에도 기괴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그의 눈물조차 처연하다 했을 것이다. 그 안의 가득한 독들은 모른 채.  

“그래, 네가 죽어서라도 벗어나겠다면 같이 가면 그만이지. 무엇을 망설이는가.”

서현이 이미 사라져버린 희사에게 말하듯 쓸쓸이 중얼거렸다. 잔잔한 바람이 서현의 몸을 한차례 쓸어갔다. 서현은 그 바람에 모든 것을 맡긴 채 희사에게로 몸을 던졌다. 해훈의 칼날이 서현을 찢기도 전이었다. 서현은 희사가 떨어지면서 어떤 것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서현 자신은 죽음의 앞에서 그 어떤 것을 바라지도 소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확신했을 뿐이다. 

다음 생에서도 그 다음 생에서도 너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 또다시 이런 일들이 반복돼도… 그래서 네가 상처받더라도… 난 그래도 놓칠 수 없다. 그래, 희사 네가 나를 떠나 죽겠다면, 같이 죽으면 그만이다. 지옥의 끝까지라도 따라가 주겠다. 

삶의 끝에서 서현이 웃었다. 

해훈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절벽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표를 잃은 칼날은 바닥에 떨어진지 오래다. 지독하다. 저리 지독하게 사랑해서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도 그를 따라갔다. 해훈의 삶의 이유가 됐던 희사를 그는 망설임 없이 따라갔다. 

“하하하.하하.하……”

해훈은 모든 것이 꿈같았다. 눈을 뜨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있지는 않을까. 밤하늘을 수놓던 폭죽은 그 둘의 죽음에도 신이나 타올랐다. 해훈이 비척비척 걸어 절벽의 끝에 섰다. 이제 이 세계에서의 미련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뿐인 희사라는 미련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해훈!!!”

해훈은 폭죽소리에 가려진 여자의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청영이다. 해훈과 서현이 비슷한 시각에 황궁에서 유곽을 향해 출발했다는 소리에 청영은 부리나케 서궁을 나왔다. 만일 그대로 해훈을 보낸다면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청영의 불안은 맞아떨어졌다. 뒤도 안보고 올라선 유악산에는 해훈의 모습만 달랑 혼자 남아있었다. 너무 늦은 것인가……. 텅 비어버린 아들의 표정에 청영이 일이 크게 틀어졌음을 알았다.

“그들은, 희사는 어찌 된 것이냐!”

“죽었습니다.”

해훈이 발밑의 절벽아래를 내려 보며 말했다. 청영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해훈아, 이 어미에게로 오거라. 절대! 절대, 다른 생각을 품어선 안 된다.”

해훈은 이대로 뛰어내리고 나면, 한숨자고 원래의 곳에서 깨어날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래 그러면 그곳엔 희사가 있다. 해훈이 청영을 뒤돌아봤다. 뜻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작게 웃더니 망설임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안 돼!!!! 

청영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유악산을 울렸다. 밤잠을 자던 짐승들도 그 절규에 하나같이 잠을 깨었다. 청영이 비틀거리며 아들이 뛰어내린 쪽으로 다가갔다. 그대로 주저앉아 흙바닥을 긁었다. 예쁘게 기른 손톱이 부러지고 뒤틀렸다. 청영은 믿기지가 않았다. 흑영의 생을 버려 구한 아들이다. 그녀는 눈을 뜬 채 악몽을 꾸고 있었다. 청영 역시 절벽의 낭떠러지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일으켜 안았다.   

“청영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십시오!”  

“해훈! 해훈이!! 아아악!!”

감인령이 그녀의 흐느끼는 몸을 위로했다. 해훈의 칼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있는 것을 봤다. 청영이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음에도 그가 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알았다. 감인령은 해훈이 죽어야 했던 영문도 모르는 채 눈물을 흘렸다.

“해훈을……그들을, 다시 불러…들이겠다.”

청영은 너무나 극심한 상실감에 내장이 타들어갔다. 이대로 보낼 순 없다. 자신과 흑영으로 인해 악연이 된 저들을 운명의 파도 속에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안됩니다! 흑영님께서도…”

감인령의 수많은 주름을 타고 한이 흘러내렸다. 청영은 감인령의 몸을 밀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아들의 칼을 쥐었다. 무겁다. 해훈은 늘 이 무게를 달고 살아왔다. 이제는 그것을 덜어줘야 한다. 청영은 칼자루를 자신의 안쪽으로 향했다. 두 손으로 칼자루를 꼭 쥔 채 자신의 배를 향해서 찔러 넣었다. 감인령은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무엇이든 그녀의 뜻을 따라야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었다. 청영이 무릎을 꿇었다. 사선으로 세워진 칼자루가 바닥에 닿아, 그녀를 앞으로 고꾸라지지 않게 지탱했다. 그 반동으로 인해 칼날은 더욱 깊숙이 여자의 뱃속을 뚫었다. 정해진 운명을 되돌리는 방법. 

그것은 희사(僖詞)의 희생이다. 

물론 운명을 일그러뜨리는 것도 가능했다. 흑영이 해훈의 운명을 망가뜨렸듯이. 청영은 영영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자신으로 인해 운명이 뒤틀린 그들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자신에게 남은 모든 생들이 해훈에게로 이어짐을 느낌과 동시에 청영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자는 흑영이었다. 영생을 살아도 오로지 한명 뿐인 자신의 정인. 청영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어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깨어난 유악산의 짐승들과 감인령이 소리를 내어 울었다. 마치 저마다 다른 곡소리를 읊는 듯 그 소리들은 한없이 구슬펐다. 

청영의 온몸에서 피가 전부 빠졌을 때쯤 그 소리들은 점점 잦아지고 세계는 닫혀갔다. 그리고 또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는 그녀의 희생으로 얻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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