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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겁환상(前劫喚想) 下 11화 (18/21)

11.

희사는 긴 꿈을 꾼 것처럼 피곤했다. 기지개를 펴고 으차차하며 허리를 양 옆으로 움직였다. 위에서 꼬르르륵 하는 소리가 배고픔을 알렸다. 희사는 먹을 것이 없나 주변을 둘러봤다. 그 흔한 라면조차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넣어뒀던 바나나는 까맣게 변색된 채였다. 그럼에도 아직 썩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날로부터 불과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음을 알았다. 희사는 멍하니 앉아 당도가 완전히 없어진 바나나를 입에 물었다. 지독히도 현실적이게 배가 고팠다. 물렁해진 내용물이 입안에서 질척하게 녹으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희사가 울기 시작했다. 

“으…….”

가슴을 움켜쥐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흐느끼기만을 했다. 희사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하지만 희사에게 있어선 최악의 선택이었다. 단 한사람이 과거로 돌아가 아주 사소한 일을 바꿔놓는다 할지라도, 미래에선 그 작은 일로 인해 결국 많은 사람들이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희사가 전생으로 돌아가 살았음에도 현생의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았다. 희사는 죽고 나서 흑영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그 곳은 전생이기도 하면서 전생이 아닌 또 하나의 세계였다. 청영의 희생으로 얻은 희사와 서현 그리고 해훈을 위한 세계. 희사는 식탁 위에 엎어놓은 현성의 액자를 바로 세웠다. 서현의 얼굴을 지독히도 빼닮은 그다. 희사는 전생을 기억함으로서 현성을 아낄 수 없었다. 만일 다음 생이 있다면 그래서 그곳에서 현성을 다시 만난다면 그 때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 새롭게 그를 대하고 싶었다. 희사는 찬찬히 현성의 얼굴을 보다 그 안에서 서현의 모습을 엿봤다. 그것은 자의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현… 당신만 남겨두고 가서 미안해. 너무 미안해.

내게 용서를 구하지 마. 나를 두고 떠나면 절대 용서 하지 않아!

서현의 절규가 바로 조금 전의 일 같았다. 희사는 눈물을 닦아냈다. 휴대폰을 들어보니 어느 새 출근할 시간에 가까워있었다. 희사는 욕실에서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이 번갈아 나오는 샤워를 해야 했다. 물줄기가 희사의 눈물을 깨끗이 닦아 내렸다. 희사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참았다. 다 헤져버린 야상 점퍼를 입고 모자까지 뒤집어 쓴 뒤 집을 나섰다. 날씨가 꽤나 매서웠다. 희사는 다음 월급이 나오면 작은 오토바이 한 대를 구입하려고 생각했다. 한 달 버스비보다 유지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정류소까지 향하는 길이 너무 멀었다. 희사는 번화가로 나와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을 훑었다. 그 안에 희사가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없었다. 

버스의 창밖으로 눈이 날리는 것이 보였다. 꽃잎이 흩날리듯 순식간에 무수한 하얀 눈들이 쏟아졌다. 희사는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가게까지 걸었다. 어깨와 모자에 쌓이는 눈들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희사는 2층의 가게로 오르며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여사장은 일찍 출근해서 가게의 모든 난방기를 예열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희사씨 왔어?”

“네.”

희사는 야상을 벗어서 카운터 옷걸이에 걸었다. 여지없이 규태는 출근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가게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와.”

“얼굴이 아직 반쪽인데? 약은 먹고 있어?”

“응.”

희사는 거짓말을 해가며 웃었다. 희사는 여사장을 향해 말을 건넸다.

“사장님.”

“말해, 희사씨.”

여사장은 가게 안에 노래를 채우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여사장은 컴퓨터가 고물이라며 발로 쾅쾅 찼다.

“말씀 주셨던 요리학원 말인데요.”

“아, 그래. 어때 다녀볼 생각이 있어?”

“네. 염치 불구하지만 부탁드릴게요.”

“염치라니. 우리 사이에 그런 말 쓰기야?”

여사장이 너스레를 떨어가며 희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규태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테이블을 닦던 것을 멈추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뭐냐? 사장님하고 모종의 음모를 계획하는 거야?”

“모종의 음모라니. 이 자식아.”

여사장이 규태의 목을 짤짤 흔들었다. 희사는 그 모습을 보며 또 웃었다. 어김없이 하루는 흘러가고 전과 다를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가게를 찾았던 해훈은 보이지 않았다. 희사는 확신하기가 두려웠다. 서현과 해훈. 그들이 과연 지금 이곳에 있을지. 만일 그들이 없다면 희사는 또 얼마나 긴 시간을 외로움에서 싸워야 할지 모른다. 만일 그들이 있다면 이제 그들은 전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희사와 같이 이곳에서 넘어갔으므로 그들도 꿈을 꾸는 것과 같이 깨어날지 모른다. 혹시 그들은 그것을 단순한 꿈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희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만 이 세계에 있으면 됐다. 

저녁 8시자 되자 여사장은 퇴근이라며 박수를 쳤다. 희사는 규태가 오토바이로 데려다 주겠다는 것을 거절했다. 

“희사씨. 내일 요리학원 등록하러 갈 거니까 아침 9시에 가게 앞에서 봐.”

“네. 내일 뵐게요.”

“응, 조심히 들어가!”

희사는 미끄러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보도블록에 쌓인 눈을 밟자 다 헤진 스프리스 신발에 축축함이 들어갔다. 조금 더 걷자 발이 꽁꽁 어는 것만 같았다. 

빠앙- 거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희사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희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재규어가 희사를 쳐다봤다. 희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동차가 천천히 앞에 서는 것을 기다렸다. 까맣게 선탠이 된 창문이 열리며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희사는 눈 안이 시큰해졌다.

“희사씨, 어디가십니까? 데려다 줄까요?”

“안녕하세요. 해훈씨.”

“타요, 데려다 주겠습니다.”

희사는 감사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 안에 올라탔다. 예열된 조수석이 따끈따끈했다. 희사를 데리러 일부러 온 해훈이었다. 도착하기 전, 조수석 시트의 온도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훈은 자신의 옆에 앉은 희사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봤다. 굳게 닫힌 희사의 작은 입술이 살짝 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정면을 응시했다. 해훈이 도로를 꽉 막은 차들이 짜증나지 않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요? 우리 어제 보지 않았습니까?”

“네.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하루 사이에 많이 싱거워지셨군요.”

“그러게요.”

희사는 해훈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서현과 해훈을 전생에서 만났을 때, 저들은 어제를 기점으로 전생으로 갔었다고 했었다. 그런데도 해훈은 본래 현세에서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억은 하는 데 단순한 꿈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저기 은행 사거리 맞죠?”

“네.”

해훈이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희사는 상처하나 없는 그의 손을 보며, 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검을 쥐고 온몸이 찢기는 그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희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시네요.”

“네?”

“다칠 일은 없으시죠?”

“흠, 뭐 그렇습니다. 제가 폭력배도 아니고 다칠 일이 있겠습니까?”

“네, 다행이네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희사는 은행의 사거리 앞에서 내렸다. 해훈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해훈은 역시 기억하지 못한 듯 했다. 희사는 차라리 그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희사와 해훈은 서로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지켜봤다. 

해훈은 자동차 뒷거울에 희사가 한 점이 됐을 때 차를 세웠다. 그리곤 핸들 위에 팔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그 안으로 잔뜩 일그러져 마치 눈물을 참는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이 숨겨졌다.

“나도 서현과 같이 네 마음에 욕심을 부렸다면, 지금은 우리가 달라졌을까?”

돌아오는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해훈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덤덤한 얼굴이었다. 해훈은 희사에게 짐을 주고 싶지 않았다. 희사가 바라보는 것은 해훈이 아닌 서현이었다. 

해훈의 고백은 저 뒤편 전생의 것으로 묻어두는 것이 좋았다. 해훈은 희사가 행복하길 바랐다. 희사가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고 또한 그것을 자신이 눈앞에서 지켜보는 상황이 와도 참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견뎌내기로 한 선택이었다. 해훈은 오랜만에, 아니 하루 만에 다시 청영을 보기 위해 본가로 향했다. 

희사는 미끄러움에 휘청휘청해가며 원룸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걸었다. 해훈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그가 전과 다름없어 보여 또 다행이었다. 희사는 해훈의 마지막 모습을 지우려 애를 썼다. 하지만 한동안, 어쩌면 평생 잊히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희사는 야상 주머니 안에서 짤랑거리는 열쇠를 들었다. 원룸 계단의 전등이 희사가 오를 때마다 한층 한층 켜졌다. 희사는 자신의 집 앞에 선 장신의 남자 그림자를 보며 놀랐다. 전에도 가끔씩 술 취한 사람들이 주정을 부리긴 했는데, 서 있는 자세가 반듯한 것을 보니 주정뱅이는 아닌 것 같았다. 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 열쇠를 고쳐 잡았다. 점점 다가갈수록 희사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조차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희사는 손에 쥔 열쇠를 떨어뜨리고 양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손바닥 사이로 마구 떨리는 입가의 경련이 느껴졌다. 

서현이 그런 희사를 보고 웃었다. 희사의 손등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눈물은 자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현은 다가와 희사의 몸을 끌어안았다. 희사는 아무 말 없이 서현을 부둥켜안았다. 없어질세라 사라질세라 소중한 보물을 껴안듯 둘은 하나의 몸이 되도록 서로를 갈구했다. 

서현이 희사의 이마 위로 새털 같은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콧등에 또 뺨에. 마지막으로 입술에. 서현이 희사의 눈물을 입술로 닦아주며 희사를 위로했다. 기나긴 입맞춤의 끝에서 희사가 목을 놓아 울었다. 서현이 곤란한 표정으로 희사를 안아들었다. 떨어진 키를 주워 희사를 방안으로 이끌었다. 희사는 방에 들어와서도 속수무책으로 엉엉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서현이 희사를 침대 위에 앉혔다. 희사는 끅끅거리며 울음의 잔해를 달랬다. 

서현이 희사의 발밑에 앉아 무릎을 기댔다. 희사는 손을 들어 그런 서현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둘은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만 있어도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제 불안해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희사는 마음 한 구석에서 두려움이 올라왔다.

“희사, 보고 싶었어.”

“어제 봤었잖아.”

희사가 웃음 섞인 말로 서현에게 답했다.

“어제는 우리가 본 것은 우리의 겉모습일 뿐이지. 오늘은 우리의 영혼을 봤잖아.”

서현이 일어서서 희사의 몸을 껴안았다. 침대에 누운 희사에게 또 작고 부드러운 키스를 퍼부었다. 

“기억하는거야?”

“기억? 그런 끔찍한 것은 기억이라 부르지도 마.”

희사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서현의 얼굴을 올려봤다. 서현은 정말 끔찍한 것이라도 본 마냥 이를 갈았다. 

“네가, 떠나고 해훈이 벌어놓은 일을 정리하느라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알아?”

“미안.”

“사과 하지 마. 내 희사. 내 사랑.”

이제 서현이 희사를 묶어놓긴 위한 주문을 걸기 시작했다. 서현은 처음부터 이기적인 남자였다.

“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그럼?”

“네가 떠나고 난 황제가 됐어. 랑쿤은 다시 각 세력들로 나눠진 부족국가가 됐지. 그런데 네 몸은 일 년이 지나도록 썩지를 않더군.”

희사가 깜짝 놀라 서현의 입맞춤을 막았다.

“뭐?”

“일 년이 지나자 그제야 네가 시체다워졌지. 내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아? 썩지도 않은 채 잠든 것만 같은 네 모습을 보면서, 죽지 말고 살아남으라는 말이 떠올라 난 죽을 수도 없었어.”

“미안. 미안해. 서현.”

“내 축일되기 전 드디어 네 몸이 허물어졌지. 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너를 유악산에 묻고 나는 그 밑으로 뛰어내렸다.”

덤덤히 자살을 말하는 서현의 모습에 희사는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살을, 자살을 했어?”

“그래.”

“내게 누군가가 말하더군. 다시 한 번 준 기회를 지켜내지 못하고 자살을 했으니 그에 합당한 벌이 생길 것이라고.”

서현이 희사의 향기를 한껏 맡았다. 아, 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단 말인가! 길고도 길었다. 서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는 그 후로 여섯 번을 더 태어났어. 너는 그 동안 단 한 번도 환생하지 않았지.”

희사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서현의 말을 들었다. 

“처음엔 나도 너에 대해 알지 못했어. 하지만 어김없이 어느 순간이 되면 네 모든 기억이 떠올랐지. 자살을 할 수도 없었어. 그저 그냥 살아야했어. 내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너를 영영 만날 수 없게 되리란 것을 알았으니까. 그렇게 여섯 번을 반복하고……. 일곱 번째가 바로 지금이야. 이제야 만났어. 희사. 놓치지 않아. 너도 나를 그 때처럼 버려선 안 돼. 너무 외로웠어. 네가 없는 생들은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희사는 서현의 몸을 끌어안았다. 서현은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는 희사를 보며 속삭였다.

“두 번 다시 나를 버리지 마. 나는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남자야. 너를 가질 수 있다면, 너와 행복할 수 있다면 난 영혼이라도 팔 수 있어.”

“서현. 서현.”

괴로웠던 것은 모두였다. 고통스러워했던 것도 전부였다. 전생의 기억은 희사 혼자만의 고통들이 아니었다. 서현도 해훈도 어쩌면 희사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사랑해. 내게도 말해줘.”

“사랑해.”

수백 년을 혹은 수천 년을 돌아온 고백이 이곳에서 결실을 맺었다. 서현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며 심장을 움켜쥐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긴 시간들을 견뎌왔다. 신의 뜻? 범의 뜻? 그 딴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들도 영혼의 한 존재일 뿐이다. 결국 윤회의 굴레라는 규칙만 존재할 뿐. 자살을 선택한 자에게는 그에 따른 벌이 주어지지. 그건 정인과의 이별이다. 희사 우리는 원래의 전생에서 자살을 했기에 너는 나랑 그 어떤 생을 살든 이뤄질 수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한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 내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청영이 불러들인 전생에서도 자살을 택했다. 다행히도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시작점의 이유가 됐지. 첫 번째 전생에서는 우리의 인연이 끊어졌고, 두 번째 전생에서는 내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됐다. 내가 여섯 번의 생을 살면서 자살을 택하지 않았기에 희사 너와 이곳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말 오래도 걸렸다.

서현은 희사의 몸을 부서뜨릴 듯이 껴안았다. 두 번 다시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 날 희사를 묻고 유악산의 절벽에서 자살을 선택한 서현에게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청영이 너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유를 알고 있나?”

“알게 뭐야. 난 이딴 전생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어.”

“청영의 바람은 끊어져버린 너희의 연을 이어주는 것이었지. 네가 만일 이 전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넌 영영 미래에서 희사와 이어지지 못한다.”

“무슨 개소리야? 내가 살던 곳에서 난 이미 희사를 만났어.”

“그래 만날 수는 있어도 벌로 인해 그의 정인이 될 순 없다. 청영의 너희를 다시 부른 것은 선택권을 주기 위해서였다. 네가 만일 청영이 열어준 두 번째 전생에서 자살을 택하지 않았다면, 후생에서 네 정인과 이루어 질 수 있었겠지. 하지만 넌 자살을 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네게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결정하라. 네 정인이 없는 사는 삶. 그리고 네 정인과의 연을 끊고 그를 잊고 사는 삶. 너는 이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나?”

“둘 다 끔찍하군. 나는 이미 그 전자를 경험했다.” 

“단 일 년이었을 뿐이지.”

“그럼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 뿐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어? 나는 정인이 있고 나와 함께하는 삶을 원하지 당신이 말한 것 따위는 필요 없다.”

“그것을 이루려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걸쳐야겠지. 견딜 수 있나? 다시 환생한 네가 자살을 선택한다면 네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네가 그 고통을 참아 낼 수 있다면 희사를 만날 수 있다.”

“참아내야지. 별 수 있나.”

서현이 가슴속의 참혹함을 숨기며 웃었다. 

“앞으로 너는 얼마의 생을 희사가 없는 곳에서 살게 될지 모른다. 나는 확답을 해주지 못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일 수도 있다.”

“그렇군. 그렇다면 그만 지껄이고 신이라면 어서 나를 환생시켜. 시간이 아까우니까.”

“신? 나는 신이 아니다.”

“당신 정체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나는 그저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행동할 뿐. 전에 너와 같은 선택을 한 자가 있다. 그는 성공하지 못했지. 하지만 정인을 잊고 지내는 삶도 나쁘지 않은 것 같더군.”

“지나치게 시간만 낭비하는군.”

서현이 새까만 어둠속에서의 대화를 마쳤다. 서현이 홀로 싸움을 선택함으로서 그들은 까마득한 미래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만일 서현이 희사를 잊고 지내는 삶을 선택했다면 이들은 현세에서도 아무런 접점이 없는 자들로 스치며 지나갔을 지도 모른다. 

서현은 지금의 이 시간을 위해 영원 같은 생을 견뎌왔다. 서현은 품에 안긴 희사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고른 치열에 작은 혀까지, 이제 자신의 것이 됐음에도 희사와 똑같이 불안했다. 

“사랑해.”

“응, 사랑해.”

“네가 내 크기를 알기는 알아?”

“알아. 네가 견뎌온 고통도.”

“누가 그런 크기를 말했어?”

“그럼?”

서현이 희사를 손을 내려 딱딱하게 선 자신의 아래를 만지게 했다. 희사가 벌떡 일어섰다. 새빨갛게 홍당무가 되선 버벅거렸다.

“지. 지. 지금. 이런 상황에 그런 장난을 칠 때야.”

“지금 상황이 어떤데?”

“우리가. 우리가!”

희사가 또 눈물을 흘렸다. 서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희사를 보듬었다. 

“알았어. 그러니 그만 울어.”

희사는 그럼에도 한참 동안이나 서현의 품에서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서현의 속으로 되새겼다. 우리는 행복하다. 이제는 행복할 일만 남았다. 우리가 고통에 신음한 것에 비하면 한참이나 짧은 생이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이 정도의 보답만 받아도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서현은 자신을 보며 우는 희사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서현이 원한 완결된 세계.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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