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겁환상(前劫喚想) 下 10화 (17/21)

10.

규태휘는 근 보름을 잠만 처자는 태자를 내려다봤다. 태자가 랑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은 이미 일파만파로 퍼졌다. 규태휘는 태자가 아직 살아있다고 황궁에 기별을 넣을까하다 그만두었다. 규태휘는 같이 마차에 실려 있던 해훈을 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해훈이 알면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이 분명했다. 일단 서현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계속 사태를 지켜보려했다. 헌데 그 사이에 황제가 승하했고, 해훈은 랑쿤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규태휘는 빠르고 복잡하게 변해가는 현재의 상황에 한숨을 푸욱 하고 내쉬었다. 서현의 상처가 차도를 보이자 의원을 제외하곤 아무도 이곳에 들지 못하게 지시했다. 의원들도 이 시체와도 다름없던 자가 태자일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규태휘가 실컷 쥐어 팬 뒤 죽이지 않기 위해 데려온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규태휘는 그런 의원의 눈빛을 읽을 때마다 짜증스러움이 가득했다. 마치 자신이 저 아름다운 남자를 가지기 위해 억지로 폭력을 휘둘렀다라는 눈빛이었다. 규태휘는 속으로나마 마차 하나 가득 저 태자를 준다고 해도 도리어 마부에게 금까지 주어 돌려보낼 것이라 반박했다. 

“이봐, 태자님. 난 내일이면 쿤테르로 떠나. 당신의 동생이 랑쿤과의 전쟁을 시작했어.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잠이나 처잘 거지? 호의를 베푼 내게 상을 내릴 것도 아니면서.”

규태휘는 눈감고 있는 서현을 향해 신랄하게 내뱉었다. 사실 이런 재미도 쏠쏠했다. 처음 몇 번은 그가 깨어날까 눈치를 봤으나, 수십 번이 넘어가자 이제는 욕설까지 첨가해가며 혼잣말을 했다. 

“동생이 황위를 빼앗아서 황제의 자리에 앉을 때까지 이대로 처자면 아주 재미있겠는데?”

“……어.”

규태휘는 등을 돌리다 뒤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그럴 리가 하는 마음에 선뜩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병상에서 방금 일어났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로 인상을 쓰며 서현이 규태휘를 노려봤다.

“너, 이 자식. 방금. 흠.”

서현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듯 헛기침을 했다. 짜증스런 손길로 옆에 놓인 잔의 물을 벌컥 벌컥 마셨다. 서현의 목은 두 시진마다 탕약이 들어가 메마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물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서현이 하. 하고 물을 마시느라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일어나셨습니까? 안 깨어나실 줄 알고 무척 걱정했습니다. 태자 전하.”

규태휘가 애써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그 따위 건 됐고. 방금 네가 한 말 다시 해봐.”

“아~ 태자 전하께서 일어나시지 않는다면 해훈님께서 곧 황제가 되실 거라고요?”

“아니, 그 전에.”

규태휘는 혹시 이 인간이 자는 척을 하고 그동안의 이야기를 다 들은 것이 아닐까하고 뜨끔했다. 규태휘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목을 가다듬었다.

“랑쿤과의 전쟁 말입니까? 황자 전하께서 시작하셨죠. 태자 전하가 누워계시는 사이에 황제 폐하께서도 붕어하셨습니다. 그리고 랑쿤은 이미 초토화가 됐고요, 황자 전하의 군대가 곧 황궁으로 진격한다고 하더군요.”

규태휘도 랑쿤과의 전쟁이 시작될 때 바로 규성주를 떠나야 했으나 서현 때문에 함부로 운신 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서현의 얼굴색이 좋아지고 의원도 한시름을 놨다는 말에 쿤테르로 떠나기를 결심한 것이다.

“전쟁?”

서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예. 황자 전하께서는 태자 전하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랑쿤이, 환진에 대한 그들의 선전포고라 전하셨습니다.”

“멍청한 자식!”

규태휘는 깜짝 놀랐다. 자신한테 한 말이면 아무리 태자라도 성을 낼 생각이었다. 성심성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좋은 의원들을 붙여 살려놓았는데 그 보답이 욕지거리란 말인가?

“그게 그 놈의 계략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도 못했군.”

뒷말을 들어보니 규태휘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서현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가슴과 양 어깨의 자상 때문에 온몸이 삐걱댔다.

“그 몸을 하고 가시게요?”

“어떤 몸을 해도 갈 거다.”

“왜 그래야 합니까?”

“희사가 있으니까.”

규태휘는 저렇게 희사에게 미쳐 모든 것을 내던지는 서현이 처음으로 존경스러워졌다. 규태휘에게 있어서도 사랑은 중요한 했지만, 저렇듯 온몸을 부서뜨려가며 자신을 내던질 용기는 없었다.

“해훈 그 자식, 놈에게 휘말리다니.”

서현은 해훈이 아마도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해 환진 내의 자들을 동요시켜서 전쟁을 일으킨 게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규태휘에게 들은 갑작스런 황제의 죽음이 해훈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차분하고 고요했던 호수에 작은 돌을 던지면 미동만 일어나지만, 그 호수를 통째로 흔들어 놓으면 그 안에 자고 있던 짐승이 깨어나기 마련이다. 현극은 그것을 잘 자극했다. 그래서 해훈이 아닌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일 테고. 또 다른 내막이 있다한들. 서현은 서둘러 랑쿤으로 향해야했다.

“부디 제 짐이 안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건방지군.”

“부축해드릴까요?”

“아니.”

서현이 일어서서 의자에 걸린 옷을 집어 들었다. 꽤 오랫동안 씻지 못했을 텐데도 몸의 상태는 개운했다. 북방의 여름이 시원해서 그런가? 하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궁녀들이 참으로 좋아하더군요.”

“무엇을?”

“태자님의 몸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완벽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합니다. 하하하.”

규태휘가 짓궂게 웃었다. 태자의 허락 없이 옥체에 손을 대는 것은 작은 죄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서현은 피식 웃었다.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몸을 씻어내는 시간을 줄여주었으니. 서현은 규태휘를 재촉했다.

“언제 출발하나?”

“흠, 해가 지면 출발하려 했는데. 태자님을 보니 한식경 안으로 출발해야할 것 같군요.”

서현은 규태휘의 말대로 몸이 달아있었다. 희사가 자신을 죽었다고 생각해 울고 있다면 어서 가서 안아주어야 한다. 어쩌면 자신의 죽었다고 좋아서 헤벌쭉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서현은 현극의 검을 맨 손으로 잡았던 희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웃고 있을 리가 없다. 그 애처로운 눈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상처를 가리고 있겠지. 서현은 자신을 증오하며 미워하는 희사를, 그럼에도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알았다. 희사의 증오에 가려진 진실을 이따금씩 엿봤기 때문이었다. 서현의 뇌리로 울고 있는 희사가 그려졌다. 

안전하게, 그리고 조금만 슬퍼하며 기다려라. 나도 네게 해훈이 말했던 행복을 주겠다. 하지만 여전히 같이 하는 행복이 아니면 필요 없다. 이기적인 남자라 생각해라. 희사 너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이기적이 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 그러니 얼마든지 나를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규태휘는 전장을 앞두고 들뜨고 두려움에 가득 찬 이들을 재빨리 집합시켰다. 이미 그들은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서현은 규태휘와 그들보다 빨리 설장산을 넘었다. 규태휘의 애마까지 타고 가는 뻔뻔함을 보였다. 덕분에 규태휘는 어릴 때는 즐겨 탔지만 어느 순간부터 관심에서 멀어진 녀석을 데려왔다. 규태휘의 부름에 말이 침까지 질질 흘리며 신나서 날뛰었다. 규태휘는 새삼 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랑쿤에서 돌아오면 이 녀석에게 관심을 쏟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에 처음 참여하면서도 규태휘는 긴장감이 없었다. 이미 랑쿤의 전 지역이 환진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도 있었다. 

“지금부터 출전하도록 하겠다. 그대들은 내 말을 잘 새겨듣길 바란다. 선두에 서서 화살받이를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대들은 훌륭한 병사들이다. 그리 쉽게 목숨을 내주는 것은 불명예다. 나는 그대들 중 누구도 잃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그대들은 지금 옆의 벗들을 잘 기억하라. 돌아왔을 때의 벗들과 한결같아야만 한다.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 우리가 할 일은 쿤테제를 향해 오는 지방 제후의 사병들을 막는 것이다. 아직 우리 환진에게 항복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만을 안겨주어라.”

규태휘의 외침에 병사들이 저마다 검을 들어 이미 승리에 찬 아우성을 터뜨렸다. 규태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멋진 말을 했다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서현은 설장산의 지독한 추위에 상처가 욱신거렸다. 몸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평소엔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추위는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을 자아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규태휘의 말은 황궁의 것보다 튼튼했다. 산을 넘는 데 있어서 북방의 말만큼 훌륭한 것도 드물다. 서현은 해훈과 함께 랑쿤을 향하며 기억해 두었던 지름길을 쏜살같이 내달렸다. 

단 이틀에 걸쳐 설장산을 넘었을 때, 서현은 지옥도의 한 장면을 목격했다. 재가 되어 형태조차 남지 않은 마을. 불과 달포전만해도 사람 사는 소리가 시끄러웠던 곳이었다. 서현은 개미 한 마리도 남지 않은 도시들을 지나쳤다. 아직도 불에 그슬려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택들이 많았다. 불에 타 몸부림치며 거리에 나와 죽은 시체들과, 산에서 내려온 짐승 떼들이 내장을 다 발라먹은 시체, 구더기와 파리가 들끓는 시체까지 그저 참혹하기만 했다. 

“해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서현이 중얼거리며 말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황성인 쿤테르에 가까워 올수록 도시의 상태는 의외로 멀쩡한 지역이 많아졌다. 환진에게 항복을 선언한 제후들의 지역이었다. 그곳은 전쟁 통이라는 분위기조차 풍기지 않았다. 다 불타버린 옆 도시를 도울 생각도, 황궁에 들이닥친 환진의 군대를 상대하러 갈 생각도 없어보였다. 평온한 일상. 서현은 그들을 보며 랑쿤의 황실은 언제 망가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물론 황궁을 지키러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력들도 분명 있을 테지만,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

쿤테르에 도착한 서현이 또다시 시작되는 지옥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수백, 아니 수천의 병사들의 시체가 이리저리 뒤엉켜있었다. 서현의 말은 그 즐비한 시체의 산을 뛰어넘을 수가 없어 그냥 밟고 가기에 이르렀다. 시체의 상당수는 랑쿤의 병사들이었다. 가끔씩 환진의 병사들도 섞여있었지만,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다. 서현은 부서진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삽시간에 점령당한 황궁의 여기저기가 불타올랐다. 서현은 그제야 말에서 내렸다. 바닥에 내려선 순간 온몸의 통증에 무릎을 꿇을 뻔했지만 이를 악 물고 버텼다. 환진의 병사들은 남은 랑쿤의 잔재세력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중이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 희사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서현의 얼굴을 알아본 병사들이 죽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곧 귀신일 것이라 판단 내렸다. 서현은 랑쿤의 황궁에서 살해당한 것이 아닌가? 병사들은 서현의 혼이 자신들을 응원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지나친 피를 봐 흥분한 그들은 더욱 신이나 검을 놀리기 시작했다. 

서현은 불안한 모습으로 황궁 내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헌데 황제의 궁에도 침소에서도 희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현은 급한 뜀박질로 내실을 향했다. 달리는 충격에 의해 벌어진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샜다. 어깨를 감싼 하얀 천이 붉게 물드는 것은 거센 불길에 집 한 채가 무너지는 것보다 빨랐다. 서현이 내실의 열린 문안으로 들어섰다. 뽑아 올린 자신의 검이 무색하게 상황은 고요했다. 

무릎을 꿇은 해훈과 그 앞에선 현극. 그리고 현극의 뒤에 주저앉은 희사. 현극은 검을 든 채로 해훈에게 뭐라 지껄였다. 서현은 눈앞의 상황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해훈이 현극 따위에게 질 리가 없었다. 서현은 검을 고쳐 잡고 옥좌가 보이는 곳까지 걸었다. 그 순간 현극이 검을 지켜 올려 해훈의 몸을 가르려했다. 서현이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희사가 일어나 해훈의 검을 들어 현극의 뒤에 섰다. 서현이 희사의 이름을 부르려했다. 하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희사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현극의 등을 향해 검을 꽂으려는 찰나였다. 현극도, 해훈도, 그리고 그것을 지켜본 서현도 모두 그 자리에 멈추었다. 현극의 손에서 뻗어나간 검이 희사의 가슴을 뚫었다. 현극은 자신이 찔렀음에도 커다란 동요를 감추지 못하며 희사의 몸을 끌어안았다. 

“희사!!!!!!!!!”

외친 것은 서현이었다. 서현이 뛰어가는 바닥이 무너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뒤에서 다리를 잡아끄는 것처럼 희사에게 향하는 곳이 너무 멀었다. 서현은 희사를 안고 있는 현극을 발로 걷어찼다. 희사의 몸이 바닥으로 낙하하기 전 그를 안아들었다. 심장은 아니다. 심장은 비껴갔다. 살기(殺氣)에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른 현극이 희사인 것을 확인하곤 힘을 뺐기 때문에 그 얇은 몸을 관통하지도 못했다. 서현은 희사를 안아들고 박힌 검을 빼지도 못한 채 몸을 그러안았다. 

“서현……. 서현?”

희사는 자신을 껴안은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 세계에서 볼 수 없을 이가 자신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죽은 것인가? 그래서 서현이 보이는 것인가? 아니, 그런 것 치고는 고통이 너무 심했다. 검이 지나간 모든 곳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선사했다. 그래도 마음이 찢기는 것 보다는 나았다.

“희사… 그래. 서현. 네 서현이다.”

망연자실하게 나자빠진 현극도 서현의 등장에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죽지……. 않은 거야?”

“그래, 너를 두고 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선 안 됐어.”

희사는 허무했다. 서현이 죽어 이 생을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현극이 해훈을 죽이려는 것을 보고, 대신 자신이 죽으려고 했다. 희사의 얼굴 위로 서현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를 봐, 나를! 희사! 괜찮아,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을 수 있어.”

희사는 남자의 고함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가 왜 이제 온 것인지 원망도 들지 않았다. 

“미안해……. 당신을… 당신을 증오해서… 미안해.”

희사의 숨이 점점 가파졌다. 이상하게도 희사는 자신의 코와 목이 점점 막히는 기분이었다. 숨통을 조여 온다 라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희사가 작게 웃었다. 희사는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서현에게 해 줄 말이 있었다.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무서웠어……. 당신과 나의 지독한 악연이 또다시 반복될까봐 두려웠어.”

“말하지 마. 그만! 왜 꼭 떠날 사람처럼 말해!”

남자의 울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처음이었다. 희사는 손을 들어 서현의 얼굴을 만졌다. 해훈은 희사가 현극의 검에 찔리는 것과 동시에, 간신히 이어오던 숨을 거뒀다. 희사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며 떠나버린 해훈을 봤다. 내 무사, 내 불쌍한 사람. 이렇게도 못난 나라서 미안해. 봇물 터지듯 희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희사의 눈 위로 현극의 그림자가 졌다. 희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현극, 이제 충분하잖아.”

“희사, 정말 나를 죽이려 했나?”

“…….”

“나는 너를 절대 죽이고 싶지 않았다.”

“알고… 있어. 그러니 괜찮아.”

희사가 현극을 위로했다. 현극은 해훈을 죽이고 자신도 죽을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희사는 살려 보내려고 했었다. 조금의 시간을 이곳에서 혼자 보내면, 희사는 그가 원하던 현세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현극은 희사가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보여준 희사의 행동은 서현이 없는 그 잠시의 시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 대신 말했다. 

현극은 범에게, 쿤에게, 그리고 라유를 그 지경까지 끌고 간 이들과 자신에게. 모두 고통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처음에 희사가 자신과 가장 닮은 자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현극은 환희했다. 현극은 그 환희가 복수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현극은 그저 자신과 같은 고통을 지닌 자에게 위로 받고 싶었다. 

괜찮다. 너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 아니다. 그러니 미안해 할 필요 없다. 라고 그렇게 용서 받고 싶었다. 

현극은 그렇게 희사를 통해 라유에게 용서를 구걸하고 있었다. 정작 라유는 현극을 원망하고 있지도 않을 텐데, 희사는 그것을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처럼 현극이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희사는 현극을 용서했지만 서현은 그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서현이 희사를 안은 채로 들어올렸다. 힘을 잃은 희사의 다리가 축 늘어졌다. 서현은 제 손에 들린 검으로 현극의 가슴을 꿰뚫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받아들이는 현극을 그래도 용서하지 않았다. 

서현은 검의 손잡이에서 땀에 젖은 손이 미끄러질 때까지 현극을 심장을 쑤셔 박았다. 심장을 관통한 서현의 검이 현극의 등을 뚫고 나왔다. 서현은 현극의 심장을 갈아 없애듯 검을 한 바퀴 빙 돌렸다. 희사가 서현을 말릴 새도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죽음까지 계획한 현극이었다. 서현이 검을 빼내자 그의 심장에서 피가 솟구쳤다. 현극은 흐르는 자신의 피를 내려 보며 아아, 심장은 아직 죽지 않았구나. 하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현극의 몸이 옥좌의 밑 계단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현극에게 있어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현극은 여전히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복수를 해도 그것을 지켜봐줄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극이 눈을 감았다. 서현에게 의해 이미 갈려버린 심장이 서서히 멈추며 동시에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현극의 마음이었다. 이제 된 것이다. 모든 일을 다 마쳤으니 현극은 라유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미쳤구나! 이 따위 일을 벌여? 그 많은 사람들이 너 때문에 죽었어! 어쩔 거야? 이 멍청아!’

라유가 부루퉁한 얼굴로 성을 내고 있었다.

‘라유, 그렇게 화내지 마. 그냥 나를 안아줘. 너무 오래도록 힘들었으니 나를 위로해줘.’

‘우리 어리광쟁이 태자님, 대체 언제 철이 들래?’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라유.’

하지만, 현극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라유의 모습은 엉망이 된 채 침상에서 싸늘히 식어있던 모습이었다. 희사는 텅 빈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는 현극을 지켜봤다. 현극은 마지막 모습은 자신의 복수를 완성한 사람 같지 않았다. 복수에 실패한 사람도 저렇게 비어버린 표정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젠 자신의 차례였다. 희사는 결국 가장 최악의 상황이 온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두렵지는 않았다. 서현이 희사의 입술에 입술을 맞댔다. 서현의 축축하게 젖은 얼굴과 짠 눈물이 느껴졌다. 

“서현, 내 서현. 당신에 대해서 떠올렸어.”

“나는 항상 너를 생각해.”

“당신과 함께할 수 없는 행복이 너무 괴로워서, 나는 그 날 유악산의 절벽에서 뛰어내렸어. 나는 겁쟁이여서, 그래서.”

희사가 마구 흐느꼈다. 서현은 눈가가 전부 타버릴 지경이었다. 

“당신이 나를 함부로 대할 때도. 내게 배신감을 느껴 나에게 소리를 지를 때도. 난 단 한 번도 당신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했어.”

“괜찮아, 희사.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어. 가자, 환진으로 돌아가자. 희사 더는 말하지 마.”

서현은 희사가 전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았다. 서현은 진심으로 상관없었다. 이미 지나간 전생이 어떻던, 지금의 현실이 가장 소중했다. 그리고 그 소중함을 유지시켜주는 사람의 생명이 꺼져갔다. 

“아니, 들어. 그냥 들어줘. 이제 이야기 할게. 당신을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증오하기로 마음먹었어. 다시는 그런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후회해. 이 지경까지 와서 내 감정을 덮은 막을 깨닫다니.”

서현은 희사에게서 그토록 듣고 싶던 고백을 들었는데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희사의 몸을 뚫은 현극의 검을 타고 흐르는 피의 양이 많아질수록 미칠 것 같은 초조함만이 가득했다. 서현이 떨리는 손으로 검을 잡았다.

“알잖아, 늦었어.”

희사의 입술이 점점 파리해져갔다. 서현은 그 입술을 물고 깨물어서라도 예전의 그 붉은 빛으로 바꾸고 싶었다. 희사는 서현에게 모든 말을 전할 수 있도록 고통을 오래 선사해준 현극에게 감사했다. 

단번에 죽었으면 당신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 지옥 같은 고통을 견디며 이야기 할 거야. 이런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야.

“희사, 제발. 나를 떠나지 마.”

“미안해.”

“전처럼 나를 미워해도 좋아. 나를 증오해도 좋아. 하지만 나를 버리지는 마. 여기에…… 이곳에 나를 혼자두지 마.”

서현이 섧게 울었다. 희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이제 손조차 말을 듣지 않았다. 희사는 입술과 눈썹이 일그러지는 것을 안간힘을 다해 견뎌냈다. 

“네가 떠난다면 나도 같이 떠나겠어.”

“안 돼. 서현, 절대로 죽어선 안 돼. 나를 위해 잠시라도 살아.”

희사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바랐다. 자신은 서현이 없는 삶을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면서, 그에겐 버티라 말했다. 차라리 서현이 자신을 끔찍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 여겼으면 했다. 희사의 바람대로 서현은 끔찍했다. 전생이라는 이 세계에 갇혀 희사가 없는 삶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약속하지 못해.”

“약속해.”

“하고 싶지 않아. 이러지 마. 희사. 내게 이런 고통을 강요하지 마.”

“서현… 당신만 남겨두고 가서 미안해. 너무 미안해.”

“내게 용서를 구하지 마! 나를 두고 떠나면 절대 용서 하지 않아!”

서현은 희사를 양 손에 조심히 안았다. 절대로 보낼 수 없다. 

서현은 희사의 몸을 안고 내실을 나섰다. 안긴 희사의 몸이 바닥으로 끌려가듯이 점점 무거워졌다. 서현은 급히 아무데나 굴러져 다니는 말 한필을 붙잡았다. 희사의 쌔근쌔근한 숨소리는 마치 희사가 잠에 든 것만 같았다. 서현은 황성 내 환진의 막사 지역을 향해 달렸다. 거기엔 뒤늦게 도착한 규태휘의 병사들이 자신들이 지낼 임시 막사를 짓고 있었다. 서현은 검에 가슴이 뚫린 사람을 안고 규태휘를 찾았다. 

“규태휘! 규태휘!!”

몇몇이 병사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봤다. 게다가 남자가 안고 있는 이는 병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는 이들은 알았다. 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남자는 죽은 것으로 알려진 환진의 태자라고.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댄 규태휘에게 병사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병사는 규태휘를 찾아온 자가 있다며 다급이 막사 밖을 손짓했다. 규태휘가 막을 거두기 전에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규태휘는 남자의 엉망이 된 얼굴을 보고 숨을 삼켰다.

“태, 태자 전하.”

“의원은! 의원은 어디 있나?!”

“그들은 뒤에 오는 중입니다. 도착하려면 하루 이틀은 걸립니다.”

규태휘는 서현의 품에 안긴 남자를 봤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렸다. 희사였다. 희사의 작은 몸을 두꺼운 검이 꿰뚫고 있었다. 규태휘가 보기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서현은 어느 순간부터 쌕쌕거리는 희사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두려움에 고개를 내릴 수가 없었다. 서현은 임시로 마련한 딱딱한 침상에 희사를 내려놨다. 서현의 눈이 계속 천장을 향해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힘겨운 싸움을 했다. 규태휘는 하얗게 질려서 눈을 감은 희사를 봤다. 가슴 한쪽이 못으로 박히는 것만 박았다. 희사의 몸을 뚫은 검에 의해, 이미 눈을 감은 희사가 힘겨워 보였다. 규태휘가 희사의 몸 밖으로 드러난 검의 손잡이로 손을 향하자 서현의 날카로운 검끝이 목덜미에 닿았다.

“의원이 올 때까지 건드리지 마라.”

“……. 의원이 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지?”

“이미……. 이미 숨이 끊어졌습니다.”

답하는 규태휘가 괴로움에 뒤범벅된 목소리를 냈다. 서현이 규태휘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규태휘의 몸이 막사 구석을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서현이 자신이 든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럴 리가 없다.”

서현이 그제야 희사를 내려 봤다. 

“희사! 나를 사랑한다 말했잖아! 이제와 네 감정을 들었는데 이렇게 떠나면! 나는! 나는!”

서현의 눈물이 희사의 얼굴을 적셨다. 서현은 희사의 뺨과 이마, 그리고 입술에 하염없이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눈을 떠. 나를 증오해도 좋아. 나를 미워해도 좋으니 눈을 떠! 서현이 희사의 가슴에 박힌 검을 쥐었다. 희사가 조금이라도 아파할까 천천히 공을 들여 뽑아냈다. 그동안 그 작은 몸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검을 뽑아냈음에도 솟구치는 피 없이 그저 미약하게 흐른 피만이 침상을 적셨다. 서현은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희사의 몸을 만졌다. 이렇게, 이렇게 따뜻한데 죽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라는 눈으로 규태휘를 응시했다. 그리곤 곧 서현은 주먹을 쥐고 눈을 가린 채 아이처럼 울었다.

“아아아! 아아아아아!!!!”

서현의 울부짖음에 시체를 노리며 막사위로 날아들었던 까마귀들이 날갯짓을 하며 허공으로 박차 올랐다. 규태휘는 서현의 비통한 절규에 그를 감히 위로하지 못했다. 희사의 시체를 본 순간 규태휘조차 다른 이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졌다. 저들의 사랑은 저리도 지독하다. 너무 지독해서 규태휘는 그 독에 잠깐 닿았을 뿐인데도 몸의 반쪽이 썩어 들어갔다. 

서현은 희사와의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희사 없이 혼자 살 수가 없었다.

“이 고독한 세계에서 내가, 내가. 너 없이 어찌 지낼 수가 있겠어! 내게 왜 이리 잔인하게 구는 거야!”

희사의 시체를 보며 서현이 따지듯이 물었다. 규태휘는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규태휘는 이미 해훈이 죽었을 것이라 판단 내렸다. 저 상태의 서현이 군을 이끌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규태휘는 생각했다. 자신이 전쟁의 막바지에 온 것은 이 전쟁을 정리하기 위해서임이 아닌가하고. 만일 신의 뜻이 정말 그러하다면 짓궂다. 

“전쟁을 정리하겠습니다.”

서현이 규태휘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희사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대로는 못 보낸다. 시체가 전부 썩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희사를 보낼 수가 없었다.

* * *

서현은 정신이 나간사람처럼 아침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희사의 곁에만 머물렀다. 의원이 적진에 도착했을 때도 서현은 어서 치료를 하라는 둥 살려내라는 둥.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의원은 이 더운 날씨에 썩지 않는 시체를 보며 의아해했다. 혹시 설마 치료를 하면 살아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체의 상태가 양호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쿤의 기운이 희사의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이상 시체가 썩지 않을 뿐이었다. 

범이 황무지에서 흑의대들과 술사들에게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먹으라 한 것은 그들에게 음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범이 영혼의 그릇이었던 육신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범은 생각보다 빨리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범이 살아있어야 할 기간은 아직 몇 해나 더 남았는데 육신은 죽임을 당하고 영혼은 그 안에 머물렀다. 썩지 않는 시체로 황무지의 모래바람에 묻혀가는 것보다 육신을 아예 없애버리는 게 범의 성미에 더 맞았다. 그 말은 달리 말해 아직 희사의 몸에 쿤의 영혼이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희사 역시 육신의 안에 아직 영혼이 머물러있었다. 

범이 만들어낸 공간에서, 범과 희사는 유악산 절벽의 바위에 나란히 앉았다. 범은 호랑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희사에게 익숙한 해훈의 얼굴과 매우 흡사했다. 희사는 범이 이름을 불렀다.

“흑영.”

“그 이름도 오랜만에 듣는군.”

“당신은 왜 청영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까?”

“그녀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너희를 다시 되돌렸을 것이다. 나는 처음 해훈을 되돌린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하물며 너희를 다시 불러들인 것도.”

“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봐라.”

“모두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 전생도……. 기억하지 못한 채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희사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 채 서현을 만나도 그를 다시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흑영은 생각에 잠겼다. 어떤 이야기를 건넬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 중이었다. 

“하늘이 우리에게 생을 준 것은 이유가 있어서임에 틀림없다. 그런 것을 너와 그들은 져버렸지.”

흑영은 전생에서 있었던 희사의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럼, 제가 전생에서 자살을 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 것 입니까?”

“너만이 아니다. 서현도, 해훈도 네가 죽은 뒤 망설임 없이 너를 따라갔다.”

희사는 눈을 크게 떴다. 바위 밑으로 까마득하게 펼쳐진 절벽이 보였다. 흑영은 희사가 이곳에서 뛰어내린 뒤, 서현과 해훈도 같이 뛰어내렸다고 했다. 흑영의 놀라운 말에 희사는 지금의 이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어졌다.

“너희가 후생에서 다시 태어나 만난 것이 단지 우연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전생에서 그렇게 자살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인연이 되었다. 자살을 택한 자에게는 그런 식으로 윤회의 벌이 주어지지. 그런데도 수천 년이 지나고 나서 만날 수 있게 됐지. 누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우리가……. 서현과 해훈, 그리고 내가 만날 수 없는 인연이었다?”

“그래. 그것이 바로 악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만날 수 없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희사는 두 손을 모아 입을 막았다. 흑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후생에서 너희를 만날 수 있게 한 자는 나도 청영도 아니지. 하지만 다시 만난 너희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은 청영의 바람 때문이었다. 모든 오해와 고통을 풀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만날 수 없던 너희들이 만난 것이 무엇 때문인지, 또 누구의 계획인지 모른다. 신의 계획인지, 아니면 너희가 이룩해낸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단 한사람이 이룩해낸 것일지도 모르지.”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겠지. 네가 보는 이것은 현재가 아닌 과거니까.”

희사는 흑영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과거라니요?”

“전생은 과거. 즉 너희가 다시 되돌아왔다고 해도 영혼만이 돌아왔을 뿐 육체는 아직 현세에 있다. 이 전생은 단지 꿈을 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이곳에서 느낀 일 년, 아니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은 이미 과거의 시간일 뿐이다. 앞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곳이 저에게는 현재였습니다.”

“그렇지. 내게도 이곳은 현재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으로 보자면 명백한 과거다. 게다가 너는 이미 이 전생에서 한 번 죽었지 않는가. 새롭게 열린 이 전생은 청영의 희생으로 하여금 생긴 균열된 공간이다. 만날 수 없었던 너희가 만났으니 그것 엿본 청영은 너희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꼬인 너희들의 인연을 바로 잡아주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네가 아무리 여기서 발버둥을 쳤어도, 너는 네가 죽었던 18살이 되면 현세로 돌아가고 말지. 그것은 서현과 해훈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전생을 새롭게 다시 살 수 있던 곳이 아니라, 유악산에서 뛰어내리기 전까지의 시간만 쓸 수 있는 한정된 세계였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기에 희사가 가장 뒤늦게 왔다는 청영이 말도 맞았다. 현성과 희사의 부모는 이미 현세에서 죽었으니까.  

“현극은?”

“너희를 되돌리기만 했지, 이곳에서 너희가 누굴 만나고 무엇을 행하는 것까지는 모른다. 막을 수도 없지. 하지만 현세에 없어야 할 영혼이 생긴다거나 또는 없어진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 해훈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해훈의 영혼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갔다. 내가 해훈의 영혼을 전생으로 끌고 온 순간 나는 죽었다. 그것은 일종의 벌이었지. 해훈의 영혼을 전생으로 가져오면, 현생을 살고 있던 해훈의 영혼이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 해훈은 양쪽에 동시에 존재했다. 하나로 있어야 할 것을 어겼더니 내 윤회의 굴레가 사라지더군. 신은 내가 해훈의 영혼을 가져와 그가 만든 세계에 혼란을 가중한 대신, 내 육신의 그릇을 가져간 것일 테지. 나는 다시 환생하지 못한다.”

“당신을 사랑한 청영은요?”

“새롭게 태어나는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흑영은 쓸쓸한 얼굴을 했다. 남자는 육신이 없이 영혼만이 존재한 자였다. 희사는 그것이 얼마나 고독할지는 감히 상상도 못했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단순히 청영이 너희를 위해 열어준 작은 공간이었다고 생각해라. 너는 곧 원래의 현실로 돌아간다. 단지 꿈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래도 청영이 다시 열어준 삶에선 네가 자살을 선택하진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아니, 저는 스스로를 죽이려 했습니다.”

“결국 네 목숨을 끊은 것은 현극이지 않나. 그렇다면 다행인 것이지.”

“이제 돌아가라. 너무 오래 이곳에 있다 보면 원래의 현실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

흑영이 희사의 몸을 끌어안았다. 남자는 범의 모습으로 변했고, 순식간에 유악산의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희사는 고독감에 숨이 막혔다. 이 기분을 서현이 느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희사는 다시 바위에 앉아 피어오르는 불꽃을 감상했다.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할 이곳을 천천히 눈에 담아 두었다. 미련은 없었다. 두고 온 서현이 그리울 뿐. 희사는 깊은 잠에 들 듯 바위 위에 몸을 뉘였다. 눈 위로 피어오르는 불꽃들이 아름다웠다. 

이제는 희사가 갈 길을 인도하듯 나비가 나풀나풀 희사의 얼굴을 간질였다. 희사는 다시 전생으로 돌아오기 전 그 나비를 보았었다. 형광등 불빛에 의해 생긴 착시현상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비는 현생으로부터의 여행자를 이끄는 전생의 나침반이었다. 희사는 천천히 그 나비를 눈으로 쫓으며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안에서 나비는 휘청대는 날갯짓으로 원래의 자리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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