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왜 자꾸 도망치려 해? 그럴수록 난 너에 대한 감시를 더 풀지 않을 것인데.”
현극이 희사의 긴 머리채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스무 번도 넘는 탈출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는 잘 때마저도 양 손을 침상 위에 묶인 채 감시당해야했다. 희사는 자신을 안고 있는 현극의 품안에서 발버둥 쳤다. 희사의 손이 현극의 턱을 세게 후려쳤다. 현극이 희사의 뒷머리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희사는 고개가 뒤로 꺾여 현극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소식을 들었나? 해훈의 군대가 랑쿤을 쳐부수고 있다더군.”
희사는 부은 눈으로 현극을 노려봤다. 서현이 죽은 날부터 희사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희사는 서현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어찌 그를 그토록 증오할 수 있었는지……. 자신이 저주스러울 따름이다.
“그래선 안 돼.”
“왜?”
“해훈에게 짐을 지어줘서는 안 되니까. 내가 그를 말릴 수 있도록 놓아줘.”
“그렇군. 그가 랑쿤의 사람이기에 랑쿤을 부수면 안 된다는 소리야?”
“…….”
희사는 현극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단지 청영 때문에 해훈을 랑쿤의 자라 하는지, 아니면 해훈의 아버지가 사실은 흑영인 것을 알고 지껄인 것인지 짐작되진 않았다. 현극이 희사의 머리채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희사, 이 헛똑똑한 사람아. 해훈이 청영과 흑영의 아들이란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희사는 도대체 이 남자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니 흑영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해훈의 목숨을 살렸겠지.”
“당신!”
“왜?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가? 희사 네게 범이 있다면 내게는 뱀이 있지.”
“뱀?……. 뱀은 또 다른 신이야?”
“이런 희사, 뱀이 신일 리가 없잖아. 그는 그냥 이무기도 되지 못한 한낱 미물일 뿐이다.”
랑쿤은 토템신앙을 따랐었다. 범이 신이었다면 그 외에 다른 영험한 동물들도 랑쿤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극은 뱀을 한낱 미물이라고 칭했을 뿐 높이 사주진 않았다. 희사는 현극이 말한 뱀의 정체가 궁금했다. 다시 현극에게 물어 보려는 찰나, 유적이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는 현극에게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랑쿤의 곳곳이 불타고 있는 와중에, 자신의 황제는 저 쿤이란 자와 옥좌 위에서 희희낙락거리기만 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저 황제 때문에 시작된 일이건만 유적은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폐하, 환진의 군대가 지금 쿤테르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이곳도 곧 위험하겠군.”
“예! 어서 빨리 대피하셔야 합니다.”
“그대는 떠나도 좋다. 나는 이곳에 있겠다.”
“폐, 폐하?!”
현극이 경악에 찬 유적을 보며 희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유적은 황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이제 랑쿤에 남은 군사는 고작 2만도 되지 않았다. 2만이라고 해도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군사의 양은 절반도 채 되지 못했다. 이미 사병을 지닌 지방 제후들은 환진에게 백기를 들었다. 유적은 그 모든 전말을 알고 있는 현극이 태연자약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자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생각만 들었다.
“폐, 폐하! 이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어서 대피를!”
“시끄럽군. 그대가 황궁을 버리고 도망쳐도 나는 질타하지 않겠다. 그러니 떠나라.”
한 마디만 더 한다면 검을 날려 몸을 두 동강 낼 듯한 현극의 기세에 유적은 고하는 것을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 유적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 해를 올려다봤다. 랑쿤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만 같았다. 유적은 자신의 전부를 바쳤던 랑쿤이 미친 황자에 의해 망가지는 것이 억울했다. 주먹을 꽉 쥔 유적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희사는 유적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현극에게 말했다.
“나는 아무리 괴로워도 당신 같이는 못해.”
“그래.”
“당신은 당신 자신의 슬픔을 다른 곳에 화풀이하고 있어.”
“그래. 그럼 네가 나를 위로해주겠어?”
“싫어.”
“그렇다면 나를 이대로 놔두는 것이 좋다.”
희사는 현극의 강한 팔뚝에 안겨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현극은 라유를 잃음으로써 망가졌다. 희사는 이미 전생에서 죽음을 결심했을 때부터 망가져있었고. 이기적인 자신의 바람에 현세에서도 서현과 자신, 그리고 해훈까지 모두 괴로움을 겪었다. 그 괴로움은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결국 희사의 감은 눈 사이로 후회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타박타박. 날카로운 나무 굽의 소리가 내실을 울렸다. 내실은 중신들도 없이 한가로웠다. 그들은 환진의 군대가 황궁을 향한다는 소식에 이미 도망쳐버린 후였다. 입술을 앙다문, 분노가 가득 찬 여자가 현극 앞에 섰다. 여자는 검지를 들어 현극을 가리켰다. 몸을 파들파들 떨면서 말을 내뱉자 그녀의 긴 손톱이 흔들거렸다.
“네가!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마마마.”
현극은 더욱 희사을 품에 가두며 웃었다. 그 나른한 웃음에 전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았다.
“이럴 수는 없어. 이렇게 될 수는 없어!”
“그러는 어머니는 왜 그러셨어요? 대체 왜.”
현극이 옥좌에 앉아 지친 음성으로 내뱉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따위 황제의 자리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당신이 이 자리에 앉으시지 그랬습니까?”
“못난 녀석.”
“이제 아셨습니까? 폐비마마.”
현극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희사는 이 미친 광경을 그만보고 싶었다.
“환진의 군대가 이쪽을 향하고 있다더군요.”
자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온몸에 이는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현극이 그런 여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차라리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는 것보단 무표정한 쪽이 훨씬 나았다. 희사는 가끔씩 나오는 현극의 무방비한 표정을 볼 때마다 그의 고통에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현극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는 단지 사랑을 잃고, 미쳐 날뛰는 괴물일 뿐이었다.
“라유를 그리 만든 것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인내심을 발휘해서 당신을 살려주고 있는 중이니, 입을 닥치지 않으면 혀를 뽑겠습니다.”
자비는 이제 말도 잇지 못했다. 현극의 돌변한 모습에 눈썹만 파르르 떨었다.
“이제 랑쿤은 환진에게 무너질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아직 당신은 랑쿤의 국모입니다. 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그 자리에서 충분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어머니.”
“안 돼! 내가 이 나라를 어떻게 지켰는데!”
“지키다니요? 이 나라를 망가뜨리신 것은 어머니가 먼저셨습니다. 모두. 어머니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랍니다.”
현극은 자비가 라유를 죽일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모든 것은 자신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라고. 그렇다면 자비에게도 똑같이 해주면 그만이었다. 랑쿤이 망가지는 것은 라유를 죽인 자비 때문이라고.
현극은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러대는 자비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현극이 희사의 몸을 끌고 옥좌를 벗어났다. 희사는 힘껏 그의 손을 뿌리쳤다. 현극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희사를 붙잡지 않은 채 홀로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발밑에 휘감기는 푹신한 여우의 털가죽이 끝없이 복도를 잇고 있었다.
이만큼의 털가죽을 깔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여우를 죽였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 가죽을 밟고 있는 희사도 가히 기분이 좋지 못했다. 꼿꼿하게 세웠던 현극의 등에서 갑작스레 기운이 빠졌다. 여전히 곧은 자세였으나 희사의 눈에는 혼이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현극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현극이 어떤 표정일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도망갈까? 멀리 도망치고 벗어날까? 그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없어.”
“그래, 알고 있다. 눈을 감으면 그의 모든 것이 만져지는데, 다시 눈을 뜨면 그의 차가운 몸만이 손끝에 머물러있지.”
현극은 희사를 한번 돌아봤다. 현극도 알고 희사도 알았다. 그들의 고통은 같은 이유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한 사람을 너무 사랑했다는 것. 그래서 망가지고 고통 받게 되었다는 것 역시.
“희사, 난 네게 거짓말을 했다.”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
“아니 단 한 가지다.”
“너희가 죽으면 후생에서 태어날 거라고 했던 말, 그건 확신하지 못해. 뱀은 거짓말을 잘하거든.”
희사의 찢겨진 가슴 위로 새로운 상처가 생겨났다. 서현은 죽었다. 이후의 생도 어떻게 될지 확실하지 않다. 현극의 말대로 되돌아간 현세에선 그가 흔적조차 없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희사도 서현을 따라 같이 편해지고 싶었으나,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해훈. 그를 두고 이대로 떠날 순 없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두 번 다시 라유를 만나지 못한다 하더군. 하지만 뱀은 거짓말을 잘 하니까 믿지 않아보려 해.”
현극이 울고 있었다. 희사는 그의 웃음 뒤로 이제는 그의 울음이 보였다.
“하나둘씩 모두가 떠난다. 그래 이 곳은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
현극이 박수를 쳤다. 그가 향하는 곳은 붓꽃이 무성하게 핀 태자일 적의 자신의 정원이었다. 희사는 가만히 서서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희사는 좀 전부터 들리는 자비의 신경질적인 비명이 거슬렸다. 희사는 현극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황후는 망가져가는 랑쿤이 믿기지가 않는지 바닥을 기며 원통해했다. 희사는 뭐에 홀린 것처럼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흉측하리만치 긴 손톱을 밟았다.
“감히 네 놈이!”
“자비.”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희사를 보며 경악했다.
“네가 뱀을 풀어주었지?”
“버……범!”
“내 이름이 그것이 아닌 것을 잘 알잖아. 너는 내 이름을 알아내 인랑산을 불태웠고 뱀을 깨웠지.”
“아니야, 아니야! 뱀이 깨어날 줄은 몰랐어.”
“자비. 랑쿤이 망가지는 이유는 너 때문이다.”
오래전 자비가 다른 이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라유를 죽이며 현극에게 했던 말. 그대의 탓이다. 자비의 얼굴에 얼룩진 화장은 마치 흙탕물에서 뒹굴다 나온 사람 같았다.
“나는 네가 산을 불태우지 않았어도 어차피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 때는 내 몸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제, 제발. 랑쿤을 구해줘. 이대로 무너질 순 없어!”
“네 아들이 그러더군. 랑쿤을 세운 자가 랑쿤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나도 그 말에 적극 동의한다. 그리고 뱀은 이미 너를 떠난 것을 알고 있나?”
자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네 아들에게 머물러있지. 더욱 우스운 것은 너는 뱀에게 조종당했지만, 네 아들은 그렇지 않다는 거야. 그가 뱀을 잡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겠군. 자비, 이제 그만 발버둥 쳐라. 나와 인랑산의 제후들이 이룩해 놓은 것을 네가 뺏을 순 없었다. 하물며 그것을 뺏으려 한 자는 네가 아니라 뱀이었다. 이제 너도 깨우치지 않았는가?”
“아아악!”
자비의 절규가 또다시 내실을 울렸다. 희사는 그 골이 지끈거릴 정도의 소리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희사는 자신이 왜 황후의 앞에 서 있는지 몰랐다. 분명 좀 전까지도 현극을 따라 여우 털을 밟고 있었다. 희사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자비를 내려다봤다.
자비는 희사 안에 머물러있는 범의 존재를 그제야 믿었다. 현극이 쿤이라 칭하며 데려온 아이가 진정 쿤일 줄은 몰랐던 그녀였다. 희사는 다시 내실을 나섰다. 왠지 모르게 황후의 절규가 좀 전보다는 듣기 편해졌다. 아니 통쾌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희사는 랑쿤 황궁에서 가장 높은 누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오르면 랑쿤의 황성 내부인 쿤테르가 전부 보였다. 여기저기기서 붉고 푸른 불이 올라왔고, 병사들의 검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희사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여기까지 오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소박한 행복을 바랐을 뿐인데, 그것은 희사에게 있어 너무 큰 바람이었다.
삽시간에 환진의 병사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그들이 성문을 부술 때까지 불과 두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해는 기울어 여전히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랑쿤의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노을과 어우러지는 불길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희사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누각을 내려왔다. 밑에선 현극이 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가볼까?”
현극이 웃었다. 병사들의 고함소리, 성문이 부서지는 소리, 단발마의 비명소리. 황궁은 환진의 군대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현극은 옥좌에 앉은 자비를 봤다. 현극의 몸에서부터 빠져나간 머리 두 개 달린 뱀이 스멀스멀 바닥을 기어 옥좌를 감싸 올랐다.
“보여?”
“그래.”
“제게 뱀의 정체다. 한낱 미물 주제에 권력을 탐하다니 우습지 않나?”
자비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옥좌의 양 손잡이인 뱀 무늬를 더듬었다. 현극이 성큼성큼 걸었다. 마지막 할 일을 끝낼 사람처럼 단호한 발걸음이었다. 현극은 라유의 무덤 앞에서 맹세했다. 모든 것을 갚아주기로.
현극은 자비의 눈에 검을 찔러 넣었다. 자비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어머니, 얼마든지 비명을 지르세요. 당신을 편히 보내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가 지르지 못했던 비명만큼 질러주시길 바랍니다.”
이번엔 현극이 자비의 손을 하나씩 잘라내었다. 옥좌의 밑으로 핏물이 웅덩이처럼 고였다. 희사는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현극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고통에 반미치광이 되어버린 자였다.
“미안, 라유. 구해주지 못해 미안해.”
현극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자의 숨통을 끊었다. 심장을 뚫은 그의 검이 여자의 몸에서 뽑혀 나오자 뱀이 옥좌에서 벗어나 현극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현극의 입에서 밭은 숨이 내뱉어졌다.
내 태자님, 넌 늘 사과만 하지?
현극에게 라유의 환청이 들렸다. 현극은 옥좌 위에 널브러진 자비의 시체를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옥좌에 앉지 않고 그 밑에 주저앉았다.
“희사, 이리로 와라.”
희사는 현극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현극이 아무 표정 없이 희사를 쳐다봤다.
그 때였다. 내실의 문이 박살나듯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이닥쳤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그때와 다름이 없었다.
“희사!”
해훈이 희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해훈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손을 내려 보곤 희사를 향해 쓰게 웃었다.
“많이 늦었다.”
“그렇지 않아. 돌아가자. 해훈.”
“어디로?”
“환진으로. 이런 의미 없는 전쟁을 시작해서는 안 됐어.”
“아니. 의미가 없지 않아.”
해훈은 나른하게 앉아있는 현극에게 검날을 향했다. 현극도 천천히 일어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희사가 말릴 새도 없이 둘의 싸움이 시작됐다. 해훈의 매서운 검이 현극의 명치를 향해서 날아갔다. 현극은 손바닥으로 그것을 막고 해훈의 팔뚝을 벴다. 해훈의 검에 의해 손이 뚫린 현극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해훈은 현극의 손에 박힌 검을 쑥 뽑았다. 그리고 장포 자락 안에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검을 꺼냈다. 날아오는 현극의 검을 오른손으로 막아내고 왼손에 들린 검으로 현극의 허벅다리를 찢었다. 현극이 베인 다리 때문에 잠시 휘청거리다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만. 그만 해!”
희사의 목소리는 검이 부딪히는 소리에 가려졌다. 희사는 해훈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현극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죽어 버린 자는 자신의 심장이었던 서현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해훈과 현극은 서로를 죽일 듯이 베고 찌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희사가 그들의 검 싸움에 끼어들자 해훈이 희사의 몸을 문 쪽으로 밀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현극이 해훈의 등 뒤에 칼을 꽂았다. 해훈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막아냈다. 이러다가 희사는 해훈이 자신 때문에 다치겠다는 생각 들었다. 희사는 끼어들지도 못한 채 초조하게 둘의 싸움을 지켜봤다. 팔뚝의 살점이 덜렁거리도록 베인 해훈의 모습에 눈을 감아버렸다. 눈시울이 타올랐다. 희사는 이처럼 현극과 해훈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희사, 울지 마.”
서현이라고 생각들만큼 다정했다. 하지만 그 말은 현극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해훈이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 있는 힘을 다해 현극을 내리쳤다. 현극은 두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고 해훈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냈다.
“너 따위가 위로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해훈의 공격이 매서워졌다. 현극은 이제 해훈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보통은 상대방의 검을 막아내는 순간 공격이 가능한 시점이 열리는데, 쌍수를 사용하는 해훈에게는 그 틈이 없었다. 질 것이 뻔 할 텐데도 현극은 최선을 다해 해훈에게 맞섰다. 현극에게는 그래야하는 이유가 있었다. 현극은 자신이 죽기 전에 해훈을 죽여야 했다. 현극은 해훈의 공격을 막아내며 굴러져 다니는 검 한 자루를 쥐어들었다. 현극은 쌍수를 배운 적은 없었으나 양 손을 자유롭게 쓸 수는 있도록 배웠었다. 그것만 잘 운용한다면 얼마든지 긴 싸움을 이길 수 있었다. 해훈은 자신처럼 쌍수를 손에 든 현극을 보곤 차가운 웃음을 품었다. 현극은 한손 검보다 쌍수가 더 허점이 많다는 사실을 간과한 듯 보였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이 많아질수록 상대방이 공격할 기회도 많아진다. 연이어 검을 찔러올 때마다 틈이 생긴다. 한손 검은 단 한번, 쌍수는 두 번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해훈의 경우 오른손을 사용한 뒤 왼손을 사용할 땐 이미 오른손은 방어를 하는 자세로 들어가 있다. 지금의 현극은 오른손을 사용한 뒤 오른쪽은 무방비하게 열어놓고 왼손을 사용한다. 덕분에 해훈은 현극이 한 자루의 검을 썼을 때보다 싸움이 편해졌다. 해훈의 휘어진 칼이 현극의 오른쪽 손목을 깊이 베고 지나갔다. 힘줄이 끊어져버려 더 이상 현극은 검을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현극은 왼손만으로 해훈의 공격을 막아내며 찢겨진 소매 천을 이로 물었다. 그 천으로 힘줄이 끊어진 오른손과 검의 손잡이를 한데 묶었다. 그러자 해훈의 검의 의해 이번엔 왼손의 힘줄이 끊어졌다. 현극은 미련 없이 왼쪽의 검을 버렸다. 그리곤 이를 이용해 오른손에 묶인 천을 단단하게 동여맸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해훈이 물었다. 저렇게 목숨을 다해 버틸 것이라면 처음부터 랑쿤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너를 죽여야 한다.”
“왜?”
“그래야 완성이 된다.”
현극이 검을 쥔 오른손을 해훈을 향해 뻗었다. 다시 덤비라는 뜻이었다. 해훈은 살기의 정점에 다른 현극의 기운을 느꼈다. 저렇듯 자신을 향해 대우를 갖추는데 해훈 역시도 설렁설렁 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먼저 죽을 확률이 더 큰다는 것은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내게 덤벼라. 조금의 승산이라도 엿볼 수 있게.”
“자만이 지나치시군.”
현극이 단 한 번의 짧은 고함을 외치며 해훈에게 달려들었다. 챙챙하는 검의 소리가 이전까지의 싸움은 서두에 불과했다는 듯 더 살벌하게 내실을 가득 채웠다. 검의 손잡이와 오른손을 천으로 칭칭 감은 현극의 몸은, 전처럼 힘이 전부 검에 실리지 않기에 더 고전해야했다. 현극은 천이 헐렁해지며 손이 미끄러질 때마다 다시 천을 고쳐 맸다. 현극의 손과 검을 감싼 천이 붉게 물들었다. 물기에 잔뜩 젖은 것처럼 보이는 천의 무게가 더없이 무거워보였다. 해훈은 현극의 동작이 처음보다 많이 간결해진 것을 깨달았다. 간결해지는 대신 필요 없는 군더더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해훈은 목덜미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현극의 검을 재빠르게 쳐냈다. 현극의 검이 힘없이 아래로 고개를 떨구었으나 이내 다시 원래의 위치로 향했다. 해훈이 중얼거렸다. 움직임이 부드럽군. 손목의 힘줄을 끊은 것이 현극에게는 그이상의 힘을 발휘하도록 만들었다. 해훈이 현극의 명치를 얄팍하게 베어냈다. 몸을 뒤로 빼 간신히 두 동강 날 뻔한 사태를 모면한 현극이 해훈의 왼쪽 팔뚝에 검을 꽂아 넣었다. 제대로 먹혔다. 라는 느낌이 현극의 손끝에서부터 전달됐다. 해훈의 검이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해훈의 왼손에서 초승달 같은 검이 떠났다. 해훈은 자신의 발치에 떨어져 아직도 웅웅대는 검을 주웠다. 힘이 들어가자 찢겨진 팔뚝에서 분수 같은 피가 솟아 올렸다. 희사는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희사의 손바닥을 감싼 하얀 천이 울고 있는 뺨을 위로했다.
허리를 굽힌 해훈에게 현극이 한껏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등을 향해 내리찍었다. 해훈이 현극의 가슴팍을 다시 한 번 베기에 이르렀다. 현극의 옷자락이 교차되어 찢겨 그의 자상이 한 눈에 보였다. 갈라진 가슴의 자상에서 쉼 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희사는 저 둘이 저러다가 서로의 칼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출혈에 의해 둘 다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말려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희사는 검을 쓰는 재주도 없었고, 거기다 저들은 희사의 외침을 가볍게 무시하고 있었다.
희사는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서현을 증오하는 그 거짓의 막. 너무 단단한 거짓의 막은 진실이라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진실 된 과거는 서현을 미워할 수밖에 없게 조작됐다. 그 조작을 시작한 것이 희사였다. 너무 사랑해서 너무 가슴이 아파서. 차라리 그런 것이 서현과의 사랑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틀린 것이었다. 그토록 괴로울 사랑도 없는 것보다는 더 나았다. 피하는 것이 더 괴로웠으며 그로인해 서현과 해훈을 수렁에 빠뜨렸다. 현극과 희사는 같은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피하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감내했다. 그의 선택에 의해 랑쿤이 괴멸상태로 망가졌으나, 그것은 현극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이었다. 희사는 현극이 불쌍했다. 그만큼 밉기도 했다. 현극의 말대로 라유를 잃어버린 그는 또 다른 희사이며, 서현이었다.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서 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또 있을까? 현극 역시 희사의 고통을 보며 자신의 고통을 되새겼다. 현극이 서현을 죽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현극은 희사를 자신과 같이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가 희사여서가 아닌 쿤이었기 때문이다. 범은 라유를 구제해주지 못했다. 그러니 범의 영혼을 받은 쿤도 구제받지 못한다. 현극의 눈앞에 엉망이 된 라유의 잔상이 비췄다. 현극은 그 잔상을 지우며, 해훈의 옆구리에 정확히 검을 찔러 넣었다.
“안 돼!!!!”
분노는 사람들의 눈만을 가리지만, 슬픔은 고통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더없이 냉정해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고통이었다. 해훈은 뚫려버린 옆구리를 손으로 압박했다. 손가락 사이로 꿀럭하고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그 안엔 피 뿐만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도 있었다. 희사는 해훈마저 떠나게 될까봐 두려웠다. 해훈이 자신의 옆구리를 내려 보며 당황스런 표정을 취했다.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해훈은 위에서 강한 압력이 자신을 내리찍는 것 마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쿵-하는 소리가 내실에 울렸다. 희사가 해훈을 향해 달려갔다. 희사는 그의 옆구리에서 쉼 없이 흐르는 피들을 어찌하지도 못한 채 엉엉 울었다.
“괜찮아, 괜찮으니…….”
해훈이 희사를 위로했다. 해훈의 뚫린 옆구리 안으로 장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해훈의 몸이 답답하다는 듯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해훈이 손의 악력으로 간신히 밀어 막았다.
“그 부분이 찢기면 아무리 대단한 장수라도 순식간에 쓰러지지.”
해훈은 처음부터 현극의 움직임이 실력에 비해 소극적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훈을 방심하게 만들어놓고 단 한 번의 기회를 포착했을 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해훈은 현극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자만했다. 그리고 정말 그의 말대로 자만에 진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을… 사람을 불러올게.”
“희사. 소용없다. 그의 몸에서 떨어져라.”
현극이 희사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희사를 끌어낼 수가 없던 것이다. 희사가 걷어차인 배를 움켜쥐었다. 컥컥거리는 기침과 함께 침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해훈은 무릎을 꿇은 자신의 위로 검을 내려찍으려는 현극을 막았다. 몸에 힘을 줄 때마다 찢겨진 상처를 넘어서 내장을 나오려했다.
해훈은 더는 힘을 주지 못하고 현극의 검을 막은 팔이 점점 주저앉아 내렸다. 현극의 검이 해훈의 어깨를 꾹꾹 누르며 박혀 들어갔다. 그것을 반대로 막고 있던 해훈의 검 역시 해훈의 몸을 파고드는 중이었다.
교차된 두 개의 검이 떨어지면서 해훈의 턱 끝에 현극의 검날이 닿았다. 옆구리를 막고 있는 해훈의 왼손 사이사이로 핏덩이들이 꿀럭꿀럭 흘렀다. 해훈은 저대로 두어도 죽는다. 현극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내가 왜 너를 죽이려 하는지, 왜 너희들이어야 했는지 한 번도 언급을 한 적이 없지?”
해훈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현극의 말을 들어야했다.
“해훈, 너는 청영과 흑영의 아이다.”
순간 해훈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전생의 자신이 황제의 핏줄인 줄 알았건만, 쿤들의 자식이라니.
“랑쿤의 시작에는 흑영이 있었지. 아니 정확히는 범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죽어가는 것은 해훈인데 오히려 현극의 목소리가 더 지쳐보였다. 현극은 모든 기력이 다 쇠해 탈진한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범이 죽고 그는 흑영이라는 자로 환생을 했지.”
“흑영이, 쿤…… 이었다고?”
희사가 멍하니 서서 눈물을 흘렸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해훈의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다. 초대 쿤은 모두가 알고 있듯 흑영이었지. 그는 범의 영혼을 지니고 환생한 자였다. 단지 육신을 빌린 것에 가까웠지만……. 그는 곧 인간들의 틈에서 그들과 생활하며 인간다움을 배웠다. 그리고 청영을 사랑하게 됐지. 결국 해훈을 태어나기에 이르렀다. 해훈이 바로 쿤의 자식이며, 범의 자손이다.”
희사는 모든 것이 맞물려가는 걸 느꼈다. 그랬기에 해훈과 자신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희사가 쿤이었고, 해훈은 그 쿤의 자식이었다.
“내 어미가, 범을 죽였지. 인랑산은 원래 범의 것이 아니었다. 간악하고 탐욕스러운 뱀의 것이었지. 뱀은 인간들을 통치하며 신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지. 신에 가까운 영험함을 가진 범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 범은 인랑산에 살던 뱀을 묻었다. 죽이지는 못했으니 봉인을 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지. 범이 인랑산에 거처를 두기 시작한 것도 뱀의 봉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뱀의 기운은 랑쿤 전역을 휩쓸고 있었지. 각 지방 제후들의 싸움이 시작된 것도 다 뱀의 욕심 때문이었다. 뱀은 인간들의 마음을 이용해 랑쿤을 전부 먹어치우려 했었다. 원래 범은 인간들의 권력과 세력 다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 그럼에도 뱀이 시작해 놓은 것을 막기 위해 인랑산에서 벗어났다. 범의 떠났음에도 뱀의 봉인을 지키기 위해 인랑산은 범의 가호를 받았고… 그런 인랑산을 불태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범의 이름. 그 이름을 알아내면 뱀의 봉인이 풀렸지. 범은 자신의 이름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범의 도움으로 랑쿤을 통일한 인랑산의 제후가 황제로 등극했다. 그렇게 몇 대에 걸쳐 이르기까지 한동안 태평 성대한 날이 계속됐다. 범이 인랑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 것도, 이제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랑쿤을 유지시킬 수 있다고 판단 내렸기 때문이었다. 허나, 자비의 출현은 또 다른 뱀의 탄생을 알리는 것과 같았다. 범은 이미 범으로서의 수명이 다해있었다. 그는 신과 가까운 영혼일 뿐 신이 아니었다. 정해진 수명이 있었고 윤회의 굴레에 따라 다시 태어나야 했다. 자비는 황후로써 뱀이 인랑산에 봉인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대대로 황실의 황족들만 에게 내려온 비밀이었다. 자비는 범을 좋아했다. 하지만 범은 자비의 본성을 알았기에 그녀를 멀리했다. 자비는 황실을 버리고 떠나는 범에게 소리를 질렀다.
‘왜 하필이면 내가 있을 때입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도 되지 않습니까? 범이시여, 이대로 떠나시면 황실은 어쩌란 말입니까?’
범은 자비의 말에 아무런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이제 랑쿤을 유지시킬 책임을 가진 자는 범이 아닌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자비는 범이 떠남으로서 랑쿤의 황실을 지탱했던 기둥이 뽑혔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은 황제를 따랐으나 그들이 믿는 것은 범이었다. 자비는 범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앙심을 품었다. 오만한 네놈들이 그렇게 황실을 떠나서 우리를 배척하는 것이라면 나도 똑같이 갚아주겠다! 이 내가, 내 힘으로 황실의 기강을 바로 세우면 되는 것이 아니냐! 물론 범이 원한 것은 인간 스스로 랑쿤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자비의 비뚤어진 사상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만일, 범이 자신의 생이 다하는 중이었고 그래서 황실을 떠난 것이라 자비에게 이야기 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자비의 죄는 범을 지나치게 사랑한 것이었다. 자비에게 있어서 범은 신이었다.
자비는 복수심에 불타 뱀의 봉인을 풀기위해 인랑산을 찾았다. 범의 가호가 점점 옅어져가는 인랑산은 뱀의 봉인 역시 약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뱀은 그것을 깨고 나올 능력이 없었다. 단순히 자비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 전부였다. 나약해진 인간일수록 마물이 파고들어가는 것은 쉽다. 뱀은 자비에게 속삭였다.
“억울하지, 억울해. 네 마음이 내게도 들린다. 범은 네 생각대로 너희와 랑쿤을 버린 것이다. 범은 그들의 무사들과 술사들만 사랑하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그대들을 전부 아끼고 보듬어 줄 수 있다.”
“뱀, 뱀이십니까?”
“아니, 내 이름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십니까?”
“내 이름은 ‘현극’이다. 그리고 네게서 태어날 아이가 바로 내 그릇이다. 나는 언제고 네 편이다 자비. 나는 아주 오랜 전부터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제가 어찌 해야 현극님을 풀어드릴 수 있습니까?”
“범의 이름을 불러라. 네 입으로.”
“저는 범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범의 이름은. 그 자의 이름은…… 흑영이다. 범을 따르지 않는 자가 범의 이름을 부르면 산의 가호는 풀린다. 그는 자신을 믿는 자에게만 이름을 알려주지. 너는 특별하기에 네게 내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 흑영.”
자비는 인랑산을 불태우기 위해 병사 수십을 소집했다. 자비는 활활 타오르는 인랑산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풀 한포기까지 전부 다 태워버렸을 때 뱀을 가두던 봉인이 풀렸다. 악귀처럼 웃고 있는 자비의 어깨에 뱀이 올라탔다.
황무지를 향해 걷던 범은 뱀의 봉인이 풀림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범은 쇠약해져 갔고, 걸음을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황무지의 모래가 쉭쉭거리며 범을 찾았다. 그 모래의 밑에서 뱀이 튀어 올라왔다.
범은 뱀의 날카로운 독니에 쿵-하고 황무지 바닥에 쓰러졌다. 범은 순리대로 죽지 못했고, 편안한 죽음을 앞두고 자비와 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범은 그로부터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야 다시 환생할 수 있었다. 그것의 그의 윤회였건만, 범은 그 고리를 끊고 흑영이라는 인간으로 환생했다. 물론 흑영이 인간으로 살아갈 때 자신이 범이었던 전생의 기억은 없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자랐고, 랑쿤을 지키려 했다.
그 이후로 현극에게서 쏟아지는 말들은 희사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들이었다. 흑영은 해훈의 생을 데려왔기 때문에 죽었다. 그는 이미 윤회의 고리를 한 번 끊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동안 환생할 수 없다. 어쩌면 영원일 수도 있다.
봉인에서 풀려난 뱀은 자비의 머리에 올라타 그녀를 조정하기에 이르렀다. 원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던 자비는 황제와의 사이에서 늦은 나이에 어렵게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의 이름을 현극이라 지었다. 뱀은 현극의 영혼을 먹어치울 생각이었다. 뱀은 이제 마물의 모습이 싫었다. 흑영처럼 인간이 되고 싶었다. 뱀은 호시탐탐 현극를 노렸지만 그의 영혼은 뱀이 먹어 치울 수 있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물며 라유라는 그의 정인이 나타나고 나서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그의 마음을 없애, 심장까지 죽여 버리면 뱀은 현극을 먹어치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비참하게 라유가 죽고 현극은 텅 비어버렸다. 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현극의 품을 파고들었다. 텅 비어버린 공간에서 현극이 웃고 있었다. 뱀의 모든 사념이 현극에게 와 닿았다.
“너였군. 네가 그랬다.”
“아니, 현극. 나는 너다. 내가 그랬으니, 네가 한 것과 마찬가지다. 라유가 죽었다면 그것은 네가 자초한 일이다.”
“그야말로 개소리군.”
“나를 받아들여라. 나는 누구보다 현명한 황제가 될 수 있다.”
“하, 나를 네게 바치라는 소린가? 반대로 내가 너를 먹어치우면 어떻게 되지?”
“그럴 수는 없다.”
“한낱 마물이 신의 행세를 하는가?”
“너는 나의 그릇이지만, 나는 너의 그릇이 될 수 없다.”
“왜? 방금 네 입으로 말했지 않나? 내가 너이고, 네가 나라고.”
현극이 어둠속에 묻힌 뱀을 찾아내 숨통을 쥐었다. 뱀이 쉭쉭거리며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어댔다.
“네 놈의 신이 되고 싶은 욕구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나는 범도 싫고, 네 놈도 싫다. 그러니 네놈들이 지키려했고 가지려했던 랑쿤을 망가뜨리겠다. 내게 필요한 건 네놈의 능력뿐이다.”
현극은 뱀을 먹어치웠다. 꼬리부터 천천히 씹어 삼켰다. 독이 가득 찬 뱀의 얼굴을 이빨로 으깼다. 알싸한 뱀의 독이 현극의 온몸에 퍼졌다. 발끝부터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현극은 부른 배를 두드리고 붓꽃 옆에 누웠다.
라유 그 바닥은 찬가? 지금 내 몸 속보다 더 차가울까? 라유. 나를 위로해. 나를 위해 내 이름을 불러. 되돌아오는 것은 라유의 마지막 말.
내 태자님, 너는 늘 사과만하지?
현극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꿈에서 깬 현극은 아직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궁녀가 들어오기 전 현극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전부 가렸다. 이윽고 손을 떼었을 때 그의 가면이 완성됐다. 현극의 비어버린 눈빛 대신 자리 잡은 것은 차가운 뱀의 눈. 그것조차 현극이 만들어낸 또 다른 가면이었다.
이야기를 끝낸 현극의 몸이 축 늘어졌다. 현극의 몸을 감싸고 있던 뱀은 사념만 남아 그의 주변을 맴돌 뿐이다. 해훈은 어느 순간부터 현극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 주변에 가득했다.
“희사 난 네게 또 거짓말을 했다. 청영의 뜻대로 였다면, 너희는 원래 전생에서 죽었던 시점에서 현세로 돌아가지. 악연을 풀든 풀지 못하던 돌아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너희는 본래 이 세계의 자들이 아니지. 청영의 희생으로 너희를 끌어왔다 하더라도, 이미 죽어서 환생한 너희들의 전생을 뒤집을 순 없다.”
희사는 주먹을 쥐었다. 전혀 몰랐다. 방법이 있어야 다시 현세로 돌아갈 수 있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현극을 따라 온 것이다.
“희사, 모두 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 같지? 네 선택에 의해 일이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지?”
희사는 현극의 말에 아무런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벌여놓은 일이었다. 희사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었다. 서현, 그리고 해훈이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됐다.
“그렇지 않아. 희사. 네 잘못이 아니다. 네 스스로를 탓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그 누구에게 미안해 할 필요도 없지.”
현극은 자신에게 말하듯 희사를 위로했다.
“그러니 그리 울지 마라.”
현극은 휘청거리는 해훈을 향해 섰다. 그리곤 발치에 떨어진 해훈의 검을 들었다. 해훈이 이곳에서 자신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물건이었다. 희사는 자꾸만 뿌옇게 변하는 시선을 닦아내고자 눈을 비볐다. 현극은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검을 고쳐들었다. 현극이 동공의 초점이 사라진 해훈을 향해 검을 쳐들었다. 현극은 순간 자신의 등 뒤로 싸늘하고 짙은 살기를 느꼈다. 환진의 장수인가? 언제 들어온 것이지? 현극이 반사적으로 검을 뒤로 휘둘렀다. 현극은 자신의 뒤에서 살기를 내품는 자의 몸을 꿰뚫었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현극은 검을 쥐고 있던 손을 툭 떨구고 말았다. 현극의 검이 희사를 그대로 꿰뚫은 것이다. 컥. 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희사의 가슴에 박힌 현극의 검이 보였다. 현극이 무너지는 희사의 몸을 안아들었다. 현극은 눈도 깜빡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희사를 바라봤다. 현극은 그 살기가 희사의 것일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해훈을 구하기 위해 희사가 이렇게까지 할 줄도 몰랐다. 현극은 떨리는 손으로 가쁜 숨을 내쉬는 희사를 내려 봤다. 희사의 몸에 버겁게 박힌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검을 뽑는 순간 희사의 생명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었다.
“희사!!!!!!”
그 때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절규가 내실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