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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겁환상(前劫喚想) 下 8화 (15/21)

8.

해훈은 모두가 불에 타버려 잔재만 남은 테룬에 서 있었다. 노인이고 아이고, 임산부고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이라 지시했다. 백성들의 비명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아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해훈은 세 개의 도시를 6만의 병사를 나누어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해훈의 머리 위로 재가 휘날렸다. 하늘을 뒤덮은 재 때문에 새들조차 날지 못했다. 해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보다 발걸음을 옮겨 임시 막사로 들어갔다. 랑쿤을 뜻대로 쓸어버렸으나 시원함보다는 어딘지 찜찜했다. 보름 전까지는 랑쿤의 전역을 불태워도 화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는데, 힘없는 이들을 죽일 때마다 쓰디쓴 후회만이 남았다. 해훈은 막사에 배치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런 표정을 하실 것이면서 왜 전쟁을 시작하셨나요?”

명휘가 웃으며 말했다. 해훈은 명휘를 조언자로써 데려왔지 잔소리꾼으로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행성대신은 여식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저 껄껄 웃을 뿐이었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 해훈이 명휘를 바라봤다.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이 거슬렸다. 

“전하, 제 말을 그렇게 드실 것이면 저를 데려온 의미가 없지 않나요?”

“내 표정이 어떻기에.”

“마치 어린 아이를 괴롭히고 온 고을 한량 같네요.”

“제대로 봤군.”

“왜 랑쿤의 황궁으로 바로 쳐들어가시진 않고요?”

“병력의 손실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아하, 그래서 힘없는 자들을 죽이고 공포감을 심어주려 하셨나요?”

“그래.”

명휘가 한심하다는 듯이 해훈을 쳐다봤다.

“사랑 때문에 전쟁을 시작한 영웅은 원래 대접받기 마련인데 전하는 그런 것을 원치 않으시죠? 그랬다면 바로 황궁으로 쳐들어가셨어야죠. 그런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른 병사들의 사기까지 망치지 말고요.”

해훈이 피식 웃었다. 사실 해훈의 계획한 것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랑쿤의 일정 지역을 쓸면 황제인 현극이 희사를 내걸고 휴전을 요청할 것이라 짐작했었다. 하지만 현극은 바닥을 드러내는 병사만을 보냈을 뿐, 이제껏 다른 조치가 없다. 해훈은 그 때부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서현이 죽던 날 현극은 해훈의 머리를 칼등으로 내려치기만 했을 뿐 죽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해훈은 명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현극은 서현을 죽였으면서도 나를 살려두는 어설픈 자비를 베풀었다.”

“어머, 그래요?”

“그는 그동안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희사를 곁에 뒀고, 환진의 황족인 나와 서현을 죽이려했지.”

“멍청한 사람이네요.”

“나는 그가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는 오히려 현명한 자다. 현극이 희사에게 말했었다. 희사를 통해 받고 싶은 것이 있다고.”

“흠, 한 번 정리해볼까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 쿤을 잡아두고 그 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말했다. 그리고 그 쿤을 찾으러 온 태자님과 해훈님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사실 해훈님까진 죽일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요약해 정리하자면 이렇게 되네요.”

명휘가 시선을 옆으로 돌려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을 취했다. 명휘로서는 어울리지 않게 한참을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가 전하의 말대로 정말 현명한 자라면 쿤을 찾으러 왔다는 이유만으로 서현님과 해훈님을 죽이려 하진 않았을 거예요. 전하와 달리 제가 생각하기론 그 사람은 정말 멍청한 사람이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라를 망가뜨리려 하는 자니까요.”

해훈은 명휘의 명쾌한 대답에 전신이 얼어붙었다. 

“뭐?”

“만일 쿤을 가지려고 했으면 절대 전하를 살려두지 않았을 걸요. 태자님과 함께 죽였겠죠. 하지만 전하를 살려 보냈고, 또한 쿤이 들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했으니……. 과연 그 자가 원하는 것은 랑쿤의 멸망이겠네요. 살아남은 전하께서는 단순히 쿤을 데려오기 위해 이 전쟁을 일으키셨고요…….”

“그럴 것이었으면 나를 죽이고 서현을 살려두었겠지.”

“그렇진 않죠.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전하보다는 서현님을 죽이는 것이 더 큰 파장을 가져올 테니까요. 제가 보기엔 그 자는 단순히 환진 사람들이 분노를 사기위해서 태자님만을 죽인 것 같네요. 그리고 환진의 분노란 즉 랑쿤의 전멸이죠.”

“너무 극단적이라 생각하지 않아?”

“무슨 말씀을. 호호. 랑쿤의 황제가 서현님과 해훈님을 시해하려 한 것으로도 이미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걸요? 환진의 전 황제는 평화주의적인 분이시라 랑쿤과의 마찰을 피했었죠. 물론 랑쿤에서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기 때문일 가능성이 커요. 하지만 랑쿤에 새 황제가 즉위하고는 어떤가요? 그가 이번 사태를 통해서 환진을 도발하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현명한 자니까 그 도발이 곧 전쟁이라는 것을 알았을 테고요.”

“그렇군.”

해훈은 기가 찬 한숨을 토해냈다. 현극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우글거리는 뱀들. 그것은 욕심이 아니라 멸망을 갈망하는 마음이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현극이 희사에게서 받을 것은 명휘의 말대로 전쟁이었다. 현극은 현명한 자다. 이 정도로 계획한 것이었다면 단순히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그 전에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계획을 세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허나 왜? 황제인 그가 자신의 나라를 망가뜨리려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기에 해훈은 명휘처럼 짐작은 했어도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해훈은 각 지역에 서찰을 띄웠다. 즉시 전쟁을 멈추고 그들을 랑쿤의 황성인 ‘쿤칸르’에 집결하라 지시했다. 백성들의 학살을 그만두기로 한 해훈의 결단력에 명휘는 박수를 보냈다.

“난 전하가 좋습니다.”

“난 희사가 좋다.”

“아하하하, 누가 그런 애정적인 감정을 말씀드렸습니까? 그냥 인간으로서 좋다는 겁니다. 한낱 여자의 말을 귀담아 듣고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 것인데, 전하는 다른 이들과 다르십니다.”

“네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하는데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무슨 상관이지?”

명휘는 해훈을 볼 때면 마치 이곳의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해훈은 황자였음에도 그 모습을 숨기며 지냈고, 비록 황자란 것을 몰랐다고는 하나 건방진 명휘에게도 존칭을 썼었다. 명휘가 보기엔 해훈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이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였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희사에게서 빼앗았을 텐데, 명휘의 취향 이전의 문제라 그저 입맛만 다셨다. 

“저는 그럼, 이제 환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왜? 끝을 보고 싶지 않나?”

“이미 끝은 났는걸요? 전하의 싱거운 승리로요.”

어쩌면 커다란 반전이 기다릴지도 모르지만요. 하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해훈은 환진으로 귀환할 채비를 하는 명휘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의 충고는 이제 충분했다. 해훈도 막사를 정리시키고 쿤칸르로 향했다. 

각 지역에서 올라오는 병사들과 합류하자 해훈의 군대는 다시 10만에 가까운 거대한 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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