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겁환상(前劫喚想) 下 7화 (14/21)

7

현극은 울고 있는 희사를 거친 손길로 자신의 방까지 데려왔다. 희사의 손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걷는 바닥마다 흔적을 남겼다. 희사의 다친 손을 들어 현극이 커다란 자신의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무모한 짓을 했군.”

서현과 해훈을 해하며 광기 어렸던 눈빛을 했던 현극에게 희사는 몸서리를 쳤다. 현극의 차가운 두 손위로 뜨거운 것이 툭툭 떨어졌다. 

“얼마든지 울어라.”

현극은 다시 희사의 손목을 붙들었다. 황제의 방 왼쪽에, 욕조가 준비되어 있는 문을 열었다. 욕조에서부터 나온 수증기에 뒤섞인 붓꽃 향기가 공중에 가득했다. 현극은 꽃잎이 띄워진 커다란 욕조 안에 희사를 집어던졌다. 희사는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그 안으로 가라앉았다. 발이 닿는 깊이였으나 희사는 일어서지 않았다. 뜨거운 물속에서 그저 죽은 것처럼 몸을 맡겼다. 현극이 혀를 차며 희사의 머리를 끌어올렸다. 긴 머리채가 현극의 손에서 들어 올려졌다.  

“서현은 죽었어도 네 바람대로 해훈을 살렸잖아. 그것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 이제야, 이제야 알 것 같아!”

희사는 흐느낌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희사의 주변으로 옅은 핏물이 흩어졌다. 현극은 이상하게도 그 감각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하며 울부짖는 목소리에 가슴이 시렸다. 뜨거운 수증기가 전신을 맴돌건만 그저 안쪽은 차갑기만 했다. 

“당신이, 당신이 이렇게 한 이유. 그리고 해훈……. 그 만을 살린 이유를.”

“말해, 희사. 무엇을 알았는지 듣고 싶다.”

현극이 희사의 몸을 끌어안았다. 현극은 아이처럼 엉엉 우는 희사를 달래주고 싶었다. 희사는 또 하나의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 이와 닮아있었다. 

“당신은 진정 랑쿤을 없애고 싶은 거지. 그래서 해훈만 살린 거야! 그가 환진에 돌아가면 당신들을, 그리고 랑쿤을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울음을 멈추고 희사가 현극을 노려봤다. 다시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에 희사는 눈을 비볐다. 투명한 물과 섞인 피가 희사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 희사. 하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잖아.”

“왜! 왜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 거야!”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니까. 내가 너에게 원했던 것이지. 이 일을 성공시킬 사람은 너 밖에 없었다.”

현극이 희사가 담겨있는 탕 안으로 들어왔다. 현극이 물속에 마련된 딱딱하고 네모난 대리석 장식에 앉아 희사의 몸을 끌어안았다. 희사는 현극의 품을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뜨거운 물줄기만 이리저리 흩어질 뿐 희사는 현극의 다리 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쉬, 가만히. 가만히 내가 지금의 이 기쁨을 즐기게 해.”

현극이 희사를 다리 위에 올린 채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 상태로 현극의 몸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희사는 그가 광기에 사로잡혀 기쁨에 겨워 웃음을 참는 것이라 생각됐다. 희사의 목 뒤로 현극의 뜨거운 숨들이 뱉어졌다. 그리고 탕 안의 물보다도 더 뜨거운 축축함이 느껴졌다. 희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현극을 돌아봤다. 고개 숙인 현극의 이마가 희사의 입술 가까이 닿았다.

“당신. 당신 대체…….”

“희사, 그냥 가만히 나를 위로해.”

현극이 희사를 안고 흐느꼈다.

“너무 괴롭다. 늘 괴로웠지.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가 않는다.”

현극의 목소리는 한껏 젖어있었다. 희사는 이 남자의 고통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서현의 죽음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길 뿐. 

“내가 너의 감정을 모를 것이라 얘기했지?”

“그래.”

“서현을 사랑했나?”

“아니.”

“그렇다면 너야말로 내 감정을 모르겠군. 살아 숨 쉬는 것조차 죄가 되는 그 기분. 알고 있나? 밥을 먹고 몸을 씻고 다른 이와 잠자리는 갖는 순간까지 단 한사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 끔찍함. 과연 그게 살아도 사는 것일까?”

“당신 감정 따윈 내 알바 아니야.”

“아니 그렇지 않아. 희사 나를 봐.”

현극이 희사의 몸을 자신과 마주보게끔 억지로 돌렸다. 희사는 현극의 다리 위에 앉혀있었기에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시야에서 그를 내려다보게 됐다. 현극의 차가운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들이 흘러내렸다. 무방비한 상태로 희사를 보며 현극이 울고 있었다. 

“나를 위로해.”

“치워.”

현극이 희사의 몸을 껴안았다. 희사의 몸에서 그에게서 느꼈던 향기가 났다. 현극은 눈을 감고 옛 연인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젠 얼굴조차 희미한 지독한 연인. 이 고통을 알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 이제 희사 역시 현극과 같은 고통을 지니게 될 것이다.

현극이 희사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억지로 그를 마주보게 된 희사는, 한껏 젖어있는 현극의 동공이 뱀처럼 길게 찢어지는 것을 지켜봤다. 희사의 내면에서 그 눈을 피하라는 적신호가 울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현극이 희사의 이마에서부터 손을 쓸어내렸다. 현극의 까만 눈동자가 파충류의 노란 눈처럼 변이했다. 

어느새 현극의 몸을 타고 올라온 뱀이 희사의 허리와 가슴을 휘감았다. 혐오스런 표정으로 뱀을 내려다보자 현극이 희사의 두 눈을 감겨주었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던 뱀은 결국 희사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 희사는 고통에 신음했다. 억지로 감겨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뱀의 독이 퍼지는 것처럼 전신에 차가움이 증식했다. 희사는 늘어지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현극의 품에 그대로 쓰러졌다.    

“희사, 네게도 내 고통을 알려줄게.”

정신을 잃어가는 희사의 머릿속으로 현극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 * *

검고 윤기가 흐르는 비단 천위에 기개 높은 호랑이의 모습이 한땀 한땀 정성스럽게 수놓인 옷을 입고 있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아이는 정원에 앉아 손등을 흙으로 덮곤 탁탁탁 두드렸다. 몇 번을 반복해 흙을 단단하게 쌓아올린 아이가 쑤욱하고 손을 뺐다. 그러자 구멍이 뻥 뚫린 흙동굴이 드러났다. 아이는 그 동굴의 천장을 검지로 살살 긁어내렸다. 어찌 보면 무료해 보이기도 하는 아이의 놀이였다. 그런 아이의 머리 위로 꽃잎들이 내려앉았다. 하나하나 떼어진 꽃잎은 꽤나 시간을 들여야 했을법한 양이었다. 무료해 보이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꽃잎을 뿌린 아이를 보고 활짝 웃었다.

“라유!”

“이런 곳에서 뭐해?”

“공부시간이 끝났어. 그래서 너를 기다렸지.”

“내가 늦은 거야?”

“아니.”

그곳은 흙동굴을 만들던 아이 소유의 정원이었다. 태자의 소유지. 열흘에 걸쳐 한 번씩 어린 태자를 찾는 자는, 태자와 같은 나이의 라유였다. 라유도 황성에서 거주하나 태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한 달에 채 사흘도 되지 못했다. 태자와 라유는 계급 상으로도, 주변의 시선 상으로도 자주 만나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라유의 부모는 술사였다. 범이 황무지로 떠날 때 함께 떠난 술사들과 흑의대들도 있었지만, 황궁에 남은 이들도 있었다. 귀족의 칭호를 하사받은 이들. 라유의 부모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귀족의 지위를 버리면서 범을 따라나선 자들도 있었지만, 라유의 부모는 황궁에 남아 귀족으로의 삶을 선택했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술사보다는 남을 부리는 귀족의 성향이 더 짙었다. 이들은 그 수가 얼마 되진 않았으나 황후에게는 눈엣가시였다. 황후는 모든 술사와 무사들이 범과 함께 떠나길 바랐다. 하지만 황후의 바람과는 다르게 남아서 귀족으로 특권을 누리고 지냈다. 황후는 그것이 불쾌했다. 하지만 다른 중신들과 귀족들의 눈을 의식해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황성에는 태자 또래의 아이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태자에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태자는 황제가 될 자였고, 그들은 일개 귀족들일 뿐이다. 홀로 어린 시절을 지낼 것이 분명한 태자를 발견한 것은 라유가 먼저였다. 허락 없이 태자의 정원에 들어와선 안 됐지만, 그곳이 꽤나 아름다웠기에 라유는 가끔씩 몰래 정원을 찾았다. 처음 라유가 쭈그리고 앉아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라유는 그가 태자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태자의 등짝에는 커다란 범의 무늬가 수놓아 있었지만 반대로 아이의 체구는 너무도 작아 우스꽝스러운 형상이었다. 

“너, 범이 너를 잡아먹겠다.”

“응, 나?”

흙놀이를 하던 태자가 깜짝 놀라 주변을 훑어봤다. 아무리 아이라 하더라도 너라고 지칭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게 예법이었다. 하지만 라유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었다.

“심심해?”

“응.”

“놀아 줄까?”

“정말?”

“응. 난 라유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해.”

과도하게 놀라는 태자의 모습에 라유가 크게 웃었다. 태자는 세상을 밝히는 햇빛보다 라유의 웃는 모습이 더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태자와 라유의 첫 만남이었고, 태자가 기억하는 라유의 첫 인상이었다. 

얼마간은 비밀리에 찾아온 라유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어느 날, 불시에 태자궁을 찾은 황후에게 들킨 라유는 크게 꾸지람을 들어야했다. 

그 후로 둘은 한참이나 만날 수가 없었다. 태자는 황후에게 부탁했다. 라유를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황후는 크게 노여워하며 태자의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하지만 태자는 굴하지 않고 라유를 찾아 나섰다. 라유는 황성 내에서도 그리 크지 않은 저택에 기거하는 귀족이었다. 태자의 방문에 놀란 부모는 호들갑을 떨며 라유를 찾았다. 그런데 라유는 뚱한 입술을 내밀며 자신을 기다리는 태자를 반기지 않았다. 태자는 속이 상했다. 자신은 라유를 봐서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은데 라유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못내 속상했다.

“나 너 만나면 안 돼.”

“왜?”

보리로 만든 과자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태자가 반문했다.

“황후마마한테 엄청 혼났어. 태자는 놀면 안 된대. 그래서 이제 황궁에도 가지 못해.”

“그럼 내가 오면 되지.”

“그래도 안 혼날까?”

“괜찮아. 넌 내가 혼나지 않도록 잘 지켜줄게.”

“내가 아니라 너 말이야. 네가 혼날까봐 그래.”

“어허, 무엄하다. 감히 일국의 태자를 누가 혼낸단 말이냐!”

제법 근엄한 표정으로 엄포를 놓는 태자의 얼굴에 라유가 푸훕하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태자는 여전히 라유의 웃음이 햇빛보다 더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너라고 하지 마.”

“그럼 뭐가 불러?”

“현극이라 불러. 나를 현극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돼. 이제 너도 그중에 하나야. 어때?”

“좋아, 현극. 현극.”

“왜 라유?”

“아니, 이름이 멋지다고. 현극.”

장난치듯이 이름을 반복하는 라유의 뺨에 현극이 뽀뽀를 했다. 현극에 입술에서부터 넘어온 과자 부스러기가 라유의 뺨에 잔뜩 묻었다. 라유는 에잇, 더러워 하면서 그 부스러기들을 떼어냈다. 현극은 또 마음이 상할 뻔했지만 이번엔 부드러운 라유의 입술이 자신의 뺨을 향하는 바람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현극은 그 후로는 늘 자신이 직접 라유를 찾았다. 라유의 집은 현극이 성장해감에 따라 규모가 더 대단해졌다. 라유는 현극이 방문할 때마다 그가 들고 오는 것들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그 날도 현극은 아랫것들을 시켜 쌀 스무 가마니와 금화 한 주머니를 가져왔다. 덕분에 라유의 부모는 현극이 올 때마다 맨발로 뛰어나가 온 몸으로 바닥이라도 쓸 기세였다.

“왔어. 헌데 표정이 왜 그래?”

“네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이 마치 홍등가를 찾는 것만 같아서.”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를 만나려고 금액을 지불하는 것만 같잖아.”

“하하하, 난 또 무슨 말이라고.”

현극은 허리끈을 풀었다. 오자마자 다짜고짜 자려고 들다니, 한참 성에 관심이 많은 나이다웠다. 현극은 처음에 라유가 여자인 줄만 알았다. 목소리는 걸걸했지만 나중에 크면 예쁜 신붓감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예상은 라유가 열 살 되던 해 와장창 깨졌다. 현극의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 모습에 현극은 그 날 뭐에 홀린 사람처럼 황궁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한참동안 라유를 찾지 않았다. 라유도 그에 속이 상해있을 무렵 현극이 찾아왔다. 크게 결심한 것이 있는 사람처럼 결의에 차 있었다. 

“네가 남자라도 좋아. 괜찮아. 나인(內人)에게 물어보니 남자끼리 좋아하는 것도 크게 이상한 것이 아니래. 근데 이상한 것이면 좀 어때. 난 그래도 널 계속 좋아할 거야.”

“뭐? 그럼 넌 내가 여태껏 여자인 줄 알았단 말이야?”

기겁을 하는 라유의 모습에 현극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혼자서 착각한 것이니 그럴 수밖에. 

그들은 같이 자랐고 같은 것을 배웠다. 처음 경험을 치룰 때도 둘은 함께였다. 황후는 현극에게 어린 시종들을 붙여 잠자리를 유도하기도 했다. 현극은 처음 몇 번은 그들과도 잠자리를 했었다. 그런 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라유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잠자리 상대가 들어오게 하는 것도 곧 그만두게 했다. 혈기는 왕성하고 풀 데는 라유뿐이니 만날 때마다 자도 자도 부족한 게 현실이었다. 라유는 기가 질린 얼굴로 현극의 아랫도리를 봤다.

“네가 다녀간 지 불과 사흘도 안됐어.”

“그래? 난 사십일은 된 것 같다.”

“으이구, 이 화상. 어쩔 수 없지.”

“하하, 이 태자님을 화상이라고 부르다니. 너 같은 녀석을 이렇게 해주마.”

현극이 라유를 들쳐 안았다. 어렸을 때는 라유의 키가 더 컸지만, 어느 날부터 쑥쑥 크기 시작한 현극은 이제 라유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라유는 침상 위에 던져지자 발버둥을 쳤다. 현극이 라유의 허리를 고정시킨 끈을 풀었다. 벌어진 의복 사이로 새하얀 몸이 눈에 들어왔다. 현극은 라유의 손목을 위로 그러쥐었다.

“야, 아파.”

“벌이라니까.”

“아야, 아야! 진짜 아파.”

현극이 라유의 젖꼭지를 꽉 물었다. 처음보다 딱딱해진 유두는 현극이 만질수록 점점 부풀어 올랐다. 

“이거 봐, 이렇게 야하게 변했어.”

“네가 만날 물고 빨고 하는데 그렇게 안 변하겠어!”

라유가 빨개진 얼굴로 씩씩 성을 냈다. 현극이 킥킥 웃으면서 라유의 허벅다리 양쪽을 들어올렸다. 꽉 다물려진 구멍에 혀를 대고 쭙쭙 빨아올렸다. 라유의 발끝이 꼿꼿하게 섰다. 현극은 편하게 유약을 쓸까 하다가 공을 들여 안을 뚫어주고 싶은 마음에, 혀를 집어넣어 더욱 질척한 침을 가지고 나왔다. 라유의 구멍이 움찔움찔 귀엽게 떨었다. 현극은 공을 들여서 예뻐해 주고 싶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서투른 손짓으로 아랫도리를 벗어던지고 급하게 구멍을 파고들었다. 손등을 물은 라유의 신음소리가 현극의 아래에서 흩어졌다. 

“미안. 미안. 진짜.”

“알면, 천천히 움직여! 앗.”

“그것도 미안.”

현극이 라유의 양 엉덩이를 한껏 벌려 잡곤 안으로 빠르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현극의 기둥에 달라붙는 라유의 속살이 찐득찐득했다. 현극은 라유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입을 막은 손등을 떼었다. 손등에는 라유의 가지런한 이빨 자국이 여실이 나있었다. 현극이 그 손등을 들어 혀로 핥았다. 라유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현극은 기둥을 꽉 죄여오는 자극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안에다 방출하고 말았다. 라유의 사정도 동시였다. 현극은 몇 차례인지도 모르는 정액의 방출을 끝낸 뒤 기둥을 쑥 뺐다. 라유의 뻥 뚫린 구멍에서 흰 정액이 흘렀다. 유약 없이 한 행위가 조금 부담이 됐는지 옅게 핏물도 섞여있었다. 현극은 라유의 엉덩이 밑에 깨끗한 천을 대고 손가락으로 정액을 긁어내렸다. 

“내, 내가 할게.”

“가만있어. 내가 하는 게 더 나아. 너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현극의 말 대로였다. 언젠가는 부끄러움에 직접 자신이 정액을 긁어냈지만, 미처 빼내지 못한 정액이 남아있어서 하루 종일 배앓이를 해야 했던 기억이 있다. 라유는 발개진 얼굴을 베개에 묻으며 끙끙댔다. 현극은 그 작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시다 다시 한 번 아래가 발기했다. 현극은 손가락이 아닌 그 보다 훨씬 큰 것이 안으로 들어차자 악 소리를 질렀다.

“너, 너! 그만 한다고. 아앗.”

“미안.”

“사과만 할 거면 처음부터 하지 말던지.”

“사실 너도 좋잖아. 지아비가 이렇게 기운찬데. 안 그래? 하하하.”

라유는 아래가 또 무리하게 벌어지는 바람에 현극이 황궁으로 돌아 갈 때까지 침상에 앉아있어야 했다. 현극은 침상 옆에 앉아서 미안하다며 계속 사과를 반복했다. 하지만 시원한 얼굴에서는 미안함이 한 글자도 비쳐지지 않았다. 라유는 그런 그를 끌어안았다. 

“내 태자님. 우리 어리광쟁이님.”

“젖이라도 줄 거야?”

“능글맞은 어른으로 자라고 있으니 어쩌나? 나중에 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호색한 녀석이었다고 꼭 얘기해줘야겠어.”

현극이 갑자기 라유의 품에서 일어섰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현극의 태도에 라유는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었다.

“라유. 너, 아이 낳을 수 있어?”

“무, 무슨 소리야?”

“근데 애를 어떻게 낳아?”

“나중에 네가 황제가 되고 나서의 이야기지.”

“난 정실을 들이지 않을 거야.”

“미쳤어?”

“너 하나면 충분해. 아이를 가지고 싶다면 어디서 양자라도 구해와. 그럼 길러줄게.”

“너 정말 미쳤구나.”

“응, 나 너한테 미쳤어.”

라유가 번쩍 일어섰다. 기가 막히다는 듯이 현극에게 성을 내고 있었다.

“왜 그래? 한 번 더 하려고?”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

“갑자기 왜 화를 내는 거야?”

“넌 황제가 될 텐데 후사를 남기지 않아서 어쩌겠다는 건데!”

“후사를 꼭 남겨야 황제가 된다면 그 자리를 포기하면 돼.”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라유가 기가찬 음성을 토해냈다.

“넌 내가 황제가 되었으면 해?”

“당연하지.”

“만일 내가 황제가 되지 않으면 나를 버릴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현극의 말에 라유가 그를 껴안았다. 라유는 현극을 사랑했다. 현극도 라유를 사랑했다. 마음의 크기로 따지면 그 누구의 것이 더 크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라유는 현극을 전부 가질 수 없는 자였다. 그는 하나 뿐인 황제의 후사였다. 이렇게 라유와 잠자리는 하는 것도 하나의 흥미 거리여야 했다. 하지만 만일 정말 흥미위주로 현극이 라유와 잠자리를 했더라면 라유 역시 이렇게 행복하진 못했을 것이다. 

“사랑해.”

라유의 품에 안긴 현극이 진지한 눈으로 그를 올려봤다. 라유가 조용히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현극이 눈을 감고 라유의 모든 감각을 느꼈다. 쇄골, 어깨. 마른 몸 안에 숨겨진 갈비뼈. 그리고 통통한 엉덩이까지. 현극은 어둠속에서도 그를 그릴 수 있도록 천천히 매만졌다.

“뭐하는 거야.”

간지러움에 라유가 웃었다.

“너를 새기는 거야. 잠을 자면서도 네가 그리우면 이렇게 천천히 너를 떠올릴 거야.”

현극은 계속 눈을 감고 라유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마저도 손으로 덧그렸다. 현극의 뺨 위로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 현극은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라유가 침을 흘린다고 놀려댔다. 장난을 치려 뜬 눈에 자신의 사람이, 단 하나뿐인 현극의 사랑이 울고 있었다. 현극의 가슴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왜 울지? 우리 이렇게도 행복한데, 뭐가 너를 울게 만든 거야?”

“행복해서. 그래서 우는 거야. 멍청아.”

“그럼 웃어야지.”

현극이 라유의 뺨을 잡고 양 옆으로 찢었다. 

“매일 신께 기도해. 우리의 행복이 이대로 지속될 수 있기를.”

“네 신은 나야. 나한테 기도해.”

“그래, 너도 내 신이야.”

현극은 라유의 몸을 안고 침상 위를 뒹굴었다. 등 돌린 라유의 얼굴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지만 현극은 그저 가만히 안아주는 것으로 그를 달랬다.

* * *

-백성들이 따를 자는 오직 하나 절대자인 황제뿐이다. 이후로 다른 모든 것을 숭배하는 자들은 국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현극은 새로운 국법의 편찬(編纂)을 손으로 찢어버렸다. 

현극은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랑쿤은 황제 국가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앞서 유일신 국가이기도 했다. 유일신은 바로 범이었다. 그가 죽었을 지언즉 그의 영혼은 살아남아 쿤이라 불렸다. 인랑산을 불태웠을 것이라 유력하게 의심되는 황후는 이제 그 쿤마저도 없애려 했다. 

현극은 초조한 마음으로 마구간으로 향했다. 휘익하는 휘파람 소리로 토리를 불러내어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토리는 현극과 라유가 녀석의 어미에게서 받은 첫 번째 새끼였다. 토리라는 귀여운 이름도 라유가 지어주었다. 그 때부터 현극의 말은 토리 하나뿐이었다. 토리 역시 자신의 주인을 현극으로 알고 있지만, 또 다른 주인으로 라유를 인정했다. 현극이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토리는 알아서 라유의 집을 향했다. 처음 봤을 때보다 거대해진 저택. 라유는 낮은 위치의 귀족이었으나, 자산은 황성 내에서도 알아주는 편이었다. 태자의 정원을 본떠서 만든 그 집의 정원은 이미 엉망이 되어있었다. 현극은 입을 꽉 다문채로 라유의 저택 전체를 뒤지고 있는 감찰사들을 불러 세웠다.

“지금 이것이 뭐하는 짓거리냐?”

“저, 전하!”

“감히 누가 이곳을 건드리라 지시했더냐?”

“새로운 국법에 따라 술사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있사옵니다.”

“뭐?”

현극이 비웃었다. 새로운 국법은 황제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 황후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국법을 개편하고 수정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 황제뿐이었다. 현극은 무능한 황제에게 분노가 치솟았다.

“술사들을 어디로 잡아들이고 있나? 당장 말해!”

“화, 황후마마께서 직접 고초를 하신다고.”

“내 칼이 네 목구멍을 뚫는 시간이 빠를까? 네가 말하는 것이 빠를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하. 정말로 그들은 황후마마의 옥사로 향했습니다.”

현극이 다시 토리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황후의 거처는 동궁으로 그 안에는 황후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이들을 잡아 문초를 하는 옥사가 따로 있었다. 토리도 현극의 급한 마음을 아는 지, 바람 같은 속도로 황궁을 향했다. 토리를 마구간에도 집어넣기 전에 현극은 황후의 옥사를 찾았다. 옥사를 지키는 수십의 경비가 현극을 제지했다.

“비켜라.”

“아니 되십니다. 거처로 돌아가십시오.”

“감히 나를 막아서? 당장 비키지 않으면 전부 베어버리겠다.”

“그럼 베십시오. 황후마마의 명을 받들어야 합니다.”

옥사의 경비를 책임지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다고 내가 너희를 베지 못할 성 싶어?”

스릉하고 현극이 허리춤에 걸린 검을 잡아 뽑았다. 현극은 이제 막 무예를 배우기 시작해 실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 누구도 현극에 검에 자신의 검을 맞댈 수가 없었다. 대신 검을 뺏을 수는 있었다. 옥사의 경비 대장이 현극의 손목을 꺾어 검을 빼앗아들었다. 현극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들자, 그가 현극의 모든 주먹질을 여유롭게 피했다. 그리곤 현극의 두 팔을 뒤로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무례함을 용서하십시오.”

“라유! 라유!”

현극이 굳게 닫힌 옥사를 향해 소리를 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리해도 옥사가 뚫릴 기색이 없자 현극은 그 길로 황비의 거처로 향했다. 

콰당- 하며 현극이 황비의 유희실 문을 열어젖혔다. 길고 앙상한 손톱을 손질 받던 황후가 현극을 나무랐다.

“태자, 어찌 태자께서 이리도 경거망동하십니까?”

“어마마마께서 그를 옥사에 가두셨습니까? 말씀을 하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태자. 나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라유를 죽이려 이 따위 법을 만들어낸 것 알고 있습니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제가 어찌 행동할지 모릅니다.”

황비가 바스락거리는 긴 비단 천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곤 사뿐히 걸어와 현극의 뺨을 후려갈겼다. 긴 손톱에 생채기가 난 뺨에서 피가 새어 올랐다. 

“그런 상스러운 언행은 삼가시지요.”

“라유를 옥사에서 빼내.”

황후가 자신의 긴 손톱을 향해 입 바람을 불었다. 

“이미 죽었습니다.”

“뭐?”

“이미 처형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거짓말이야.”

“어미를 거짓말쟁이로 치부하다니요. 너무 하시는군요. 태자. 술사들은 죽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래야 태자님께서도 황제가 되셨을 때 만백성의 우러름을 한 눈에 받으시지요. 쿤은 이미 죽은 범의 환영을 쫒는 자일뿐입니다. 이 랑쿤에 이제 신은 없습니다. 황제가 바로 신입니다.”

현극이 여자의 멱살을 쥐었다. 여자는 차가운 웃음으로 현극의 뺨을 다시 한 번 갈겼다.

“그리도 포기를 못하다니! 내가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그 술사를 만나지 말라고요!”

“그는 술사가 아닙니다!”

“술사의 자식이 어찌 술사가 아니란 말입니까! 이것은 그대가 판 무덤입니다. 그대가 그 술사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술사가 죽어도, 고초를 당해도 모두 태자님 탓입니다!”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현극의 뇌리를 흔들었다.

“어마마마, 아니 어머니. 그를 놓아주십시오. 그를 놓아주시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현극이 황후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성년식을 거치지 않은 태자는 사병을 거느릴 수 없다. 태자의 안전을 지키는 자도 오로지 황제와 황후의 사람들이다. 만일 현극이 성년식을 거친 상태였다면 병사들을 이끌고 옥사라도 부셔서 라유를 데리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오로지 황후의 자비를 바라는 수밖에 선택권이 없었다.  

“그를 죽이시면 저를 죽이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죽으시지요. 마음을 죽인 황제만큼 훌륭한 성군은 없답니다.”

황후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럼 황제가 되지 않겠습니다.”

황후가 날카롭게 비웃었다. 그러더니 곧 여우처럼 표독스러운 인상으로 밖의 궁녀를 불렀다.

“그 라유라는 술사를 데려와. 내 앞으로!”

“예, 황후마마.”

현극은 아직 라유가 살아있다는 말에 가슴 속에 희망이 들어찼다. 현극이 황후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 여자가 쉽게 라유를 풀어줄 리가 없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했다. 라유가 두 명의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 황후의 유희실에 도착했다. 현극은 라유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병사들과 궁녀 그리고 저 황후까지 싸잡아 죽이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 현극은 그저 무능했다. 

현극은 인두로 눈이 지져져 피고름을 흘리는 라유를 바라봤다. 라유는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숨을 헐떡였다. 아랫도리에는 피가 흥건했다. 누군가에 의해 고간이 도려내진 채였다.

“아아, 아아아!!!!”

현극이 신음했다. 상상도 못할 고통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 훨씬 나았다. 현극은 가슴을 움켜쥐고 라유를 향해 걸었다. 걷는 것인지 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아아. 흐아아!!!!!”

짐승과도 같은 남자의 절규에 라유가 고개를 들었다. 라유는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현극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라유는 고통을 삼킨 채 입을 열었다. 

“내 사랑. 내 하나 뿐인 사람. 나는 괜찮으니 그렇게 울지 마.”

“아아아, 라유, 아아 라유!”

현극이 라유의 몸을 붙들었다. 신께 매달리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처럼 처절했다. 

“나의 신, 내 전부. 너를 지키지 못한 나를 용서해.”

라유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대신 고름에 섞인 피만이 흘러내렸다. 라유의 섬섬옥수 같던 손가락은 기이하게 뒤틀려있었다. 현극은 감히 그 상처를 건드리지도 못했다. 무너진 그의 쇄골, 부러진 갈비뼈.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었다. 현극이 그리도 아끼며 손에 새겨두었던 그 모든 몸이 황후에 의해 망가졌다. 

황후는 둘의 재회를 지켜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술사가 저렇게 된 것은 그대 때문이라고요.”

“어머니! 어머니! 제발 그를 살려주십시오!”

“살려요? 저렇게 살아서 과연 잘 살수 있단 말입니까? 그 아름다운 얼굴이 전부 망가지고 사내의 구실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요?”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현극의 품에 안긴 라유의 입이 달싹거렸다.

“애원하지 마, 나를 붙잡으려 하지 마. 나는 충분히 괴로웠어.”

“거짓말. 거짓말 하지마. 네가 일부러 죽으려 한다는 것을 내 모를 줄 알아!”

현극은 늘 그랬다. 라유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차렸다. 그것은 사랑하는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알았습니다. 뜻을 들어드리지요.”

황후가 지시하자 병사들이 현극을 라유의 품에서 떼어냈다. 현극은 떨어지지 않으려 라유의 온몸을 붙들었다. 병사들의 힘으로도 어찌되지 않자, 그들은 황후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봤다. 황후가 사뿐사뿐 걸어 현극과 라유의 앞에 섰다. 옆에선 병사의 검을 뽑아 그대로 라유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순식간의 일어난 일이었다. 현극은 바로 눈앞에 라유의 심장을 관통한 날카로운 검이 보였다. 현극은 그 검을 쥐었다. 

손바닥이 전부 갈아지는데도 상관 않고 그 검을 라유의 몸에서 빼냈다. 검에 의해 출구가 막혔던 피가 솟구치듯 올라왔다. 현극은 라유의 심장에서 나오는 피를 주워 담아 다시 그의 안으로 집어넣으려 했다. 떨어진 현극의 눈물이 그의 핏물과 섞여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이 사라졌다.

“어째서! 어째서!”

“그대의 탓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절대, 절대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당신을 절대로!”

“이 어미를 용서치 않으면 어쩔 것입니까?”

황후가 볼일은 끝났다며 주변을 물렸다. 황후는 라유의 피로 더러워진 융단을 피해 걸으며 유희실을 나섰다. 현극은 라유를 끌어안았다. 라유의 거친 숨이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라유!”

“울지……. 말라고 했잖아. 내 태자님.”

라유가 기침을 하자 입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말하지 마. 괜찮아 다 나아질 거야. 내가 의원을 부르겠으니.”

“아니, 그……그냥 이대로 안아……줘.”

“아아아아아! 라유. 미안해, 미안해.”

“내……태자님, 늘 ……지?”

라유의 입 안에 피가 가득 차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현극이 라유의 입에 혀를 밀어 넣어 그 피를 전부 닦아냈다. 그래도 끊임없이 새로 흘러나오는 피에 현극은 흐느끼기만 했다. 전부 뒤로 꺾이고 비틀린 라유의 손가락이 현극의 얼굴을 더듬었다. 마지막 힘을 내 정인의 얼굴을 기억하듯이. 현극이 떨리는 손으로 그 손목을 잡았다. 그 때 라유의 손목에서 힘이 전부 빠져나갔다. 털렁하고 떨어진 라유의 손목은 현극의 손위에서 흔들렸다. 

“아아아아아아아!”

현극의 절규가 황후의 궁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름끼치는 외침을 황후도 그리고 라유를 데려왔던 자들도 전부 들었다. 황후는 그럼에도 자신의 침실에서 비웃음만 띄우고 의자에 앉아 서책을 읽을 뿐이었다. 

현극은 라유를 들어 안았다. 힘없이 뒤로 꺾이는 목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황궁을 걷는 현극을 황후의 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목격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단 한 방울의 피조차도 아깝다는 듯 라유의 몸을 최대한 끌어안았다. 

현극은 비척비척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라유와 함께 했던 태자의 정원은 주인을 잃은 폐가처럼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어찌 침실에 도착했는지도 모르는 채 현극은 엉망이 된 라유의 시체를 침상에 눕혔다. 

“내 이름을 불러.”

현극이 라유의 얼굴에 묻은 피를 깨끗한 천으로 닦아주었다. 그의 안의 괴롭히며 즐거워하던 때가 떠올랐다. 현극은 다시 라유에게 말했다.

“제발, 내 이름을 불러줘.”

현극이 침상 옆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발, 라유. 나를 한번만 불러. 내가 이렇게 우는데 나를 위로해야지.”

내 태자님, 넌 늘 사과만 하지?

그것이 라유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래 난 늘 네게 사과만 해. 싫다는 너를 억지로 안을 때도 그랬고,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써가며 어리광을 부릴 때도 그랬어. 그래서 늘 사과만 해야 했어. 헌데 이젠 네가 나 때문에 이렇게 죽었으니, 그럼 나는 어찌해야하지? 사과할 사람도 그 용서를 받아줄 사람도 없는데. 내가 어찌 해야 해. 

“제발, 제발. 라유.”

현극이라고 다정히 불러주는 환청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도 빨리 떠난 거야? 네가 그랬잖아, 영혼은 존재한다고. 범의 영혼도 존재하기에 쿤이 있는 것이고 사람도 영혼이 있기에 전생이 있다했잖아. 헌데 네 영혼이 느껴지지 않아. 나는 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현극이 침상으로 기어 올라가 라유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라유의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게 했다. 그전처럼 꽉 안아주기를 바랐건만 힘없는 손은 툭하고 다시 침상 위로 떨어졌다. 현극은 그제야 실감했다. 내 정인이, 내 사랑이, 내 신이. 떠나 간 것을. 그렇게 현극은 심장을 떼어냈다. 그리고 현극이라는 사람도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현극의 껍질을 쓴 복수라는 이름의 짐승뿐 이었다.  

현극은 라유를 자신의 정원에 묻었다. 무덤도 없이, 그냥 그가 좋아했던 붓꽃 밑에 잠들게 했다. 현극은 울면서 웃었다. 가면을 쓰며, 연기를 해가며. 황후를 향해서도 웃었다. 이사람 저 사람을 안으며 밤마다 라유를 떠올리며 괴로워했지만 그 다음 날은 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사람들은 짧은 시간에 절절하게 라유를 사랑했던 현극을 잊었다. 라유를 향했던 그 열정적인 사랑을 젊었을 때의 치기어린 감정으로만 치부했다. 

그 후로 현극이 방탕한 생활을 하고, 정무에는 관심이 없는 한량으로만 지내는 것을 보곤 처음부터 그런 녀석이었다며 태자에 대한 평가를 폄하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라. 숨기고 숨겨서 마지막엔 뼛속까지 먹어 치울 테니. 내 독에 의해 온몸이 너덜너덜해졌을 땐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 안 그렇습니까? 어마마마.

현극의 과거가 사라지고, 처절한 외침이 비어버린 공간에 울려 퍼졌다. 현극은 희사에게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었다. 현극은 희사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아니, 그저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희사는 현극의 과거를 보며 동정은 했으되 그에게 동화되지는 않았다. 도리어 저 깊은 곳 안쪽에 꼭꼭 숨겨두었던 자신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철옹성처럼 단단한 가슴 안에 숨겨두었던 진실들. 사실은 철옹성이 아니라 쉽게 부서져버리는 모래성이었다. 

서현을 증오하며 쌓아올린 모래성은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조금씩, 조금씩 그 모습을 허물고 진실 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희사는 현극이 만들어놓은 과거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이제는 희사의 과거가 보여 질 차례였다.  

“희사 혹 너도 그것을 알고 있어? 누군가가 그러던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다음 생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목숨을 끊는 것이잖아.”

“아니, 그렇다고 했어. 혹시 네가 지금의 내 모습이 싫다면, 난 주저 없이 네가 원하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어.”

서현이 유악산의 절벽에서 팔을 벌렸다. 마치 지금이라도 뛰어내릴 듯한 행색에 희사가 서현을 붙들었다. 이것은 현극의 기억도 아니며 그가 조작한 과거도 아니다. 희사의 진실된 기억이었다. 희사는 눈을 크게 뜨고 진실 된 전생을 지켜봤다. 거부하고 도망가서는 안 된다. 그에 대한 마음을 깨닫고 난 뒤 서현의 죽음에 대해 얼마만큼의 고통이 따를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나 받아들여야했다. 

서현 불안해, 당신과의 이런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너무 불안해. 하지만 반역을 꿈꾸는 내 집안을 버릴 수는 없어. 내 어머니고, 내 식솔들이니까. 당신의 자리가 점점 커져갈수록 무력한 내 자신이 끔찍해져. 나는 당신도 내 부모도 그 어느 한쪽을 택하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야. 그럼에도 이토록 당신을 사랑해. 

서현을 바라보는 희사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희사, 말해봐. 정말 나를 죽이려했어? 정말 나를 배신했어? 나를, 나를 사랑했다고 속삭인 모든 것이 거짓이었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난 그럴 자격이 없어.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도 택하지 못한 난, 당신을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니까.

“용서하지 않아. 내 마음을 부서뜨리고 농락한 널 그냥 편하게 보내진 않겠어.”

그래, 당신이 내 몸을 함부로 대하고, 내 안에 당신을 쏟아 부어도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 그게 내 벌이야. 당신이 나를 유곽에 팔아도, 당신이 나를 안으러 오는 단 한사람의 높은님이라도,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모른 척 하겠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어. 하지만 만일, 만일 다음 세상에서 내가 당신과 사랑할 수 있다면 아무런 방해 없이 둘의 마음만으로 행복한 세계가 있다면, 그 땐 내 온 마음을 다해서 당신을 사랑하겠어.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 또 이런 상황이 반복돼 우리가 행복할 수 없다면 난 차라리 당신을 증오하겠어. 

당신을 끔찍해하고 미워해서 사랑하지 못하게. 그럼 당신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 이기적이라 해도 좋아. 난 당신이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아. 당신과 함께하지 못한 생은 이걸로 충분해. 

전생의 서현에게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끝을 보게 된 그 때. 마지막으로 유악산에서의 불꽃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죽음을 선택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서현 사랑해. 

나는 죽어가기에 당신에게 들리지 않겠지만 이제야 고백해. 내 부모와 식솔들을 전부 죽인 당신을 난 처음부터 미워하지 못했어. 그렇기에 난 그들에게 죄인으로 살아왔어. 너무 괴로워, 하지만 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 왜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에 당신은 그냥 웃을 거야. 당신이기에.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기에. 그저 그 이유 하나뿐이야.     

“아아아아아!!!”

희사가 비명을 지르며 과거의 공간을 와장창 깨버렸다. 희사는 귀를 틀어막은 채로 눈물을 흘렸다. 마치 꿈과 같은 공간에서 깨어난 희사의 앞엔 현극의 얼굴이 있었다. 

희사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탕 속이었다. 현극이 온 몸을 떨고 있는 희사의 몸을 껴안았다.

“어땠지? 내 고통은? 너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던가?”

희사는 현극의 차가운 눈을 봤다. 그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희사는 알았다. 남자가 눈빛이 지나치게 차가웠던 이유를. 텅 비어버린 눈을 감추기 위한 또 하나의 가면이었다. 

“내 고통이 너에게 전이되는 것이 느껴지는가? 희사?”

“아아아. 아아아…….”

희사는 아이처럼 흐느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밖에 없었다. 서현의 죽음에 몸이 무너져 내렸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너는 서현을 사랑했나?”

“아아아. 아아. 그를, 서현을 사랑했어.” 

희사는 자신의 멍청함을 자책하듯 서현을 불렀다.

“그를, 너무… 너무 사랑하기에 증오했어.”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 증오하게 된 마음. 그 마음에 눈이 멀어 죽어가는 당신을 그대로 버렸다. 당신을 보며 지끈거리던 이 심장은 내 거짓을 깨기 위한 박동이었다. 하지만 이제와 깨달아도 너무 늦었다.

“우리는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현극이 희사의 고통을 껴안았다. 희사와 모든 고통을 같이 동반하고 싶었던 현극은 씁쓸한 후회를 머금었다. 지금 라유가 현극을 본다면 아마 한심한 녀석이라며 성을 냈을 것이다. 현극은 엉망이 된 희사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 주었다. 

“나는 내 어미만큼이나 범을 증오해.”

희사는 젖은 눈으로 현극을 봤다.

“범이 술사들을 버렸지. 범이 데려간 것은 무사들뿐이었다. 술사들이 그렇게 죽어갈 때 쿤은 어디 있었나? 환진의 편한 황궁 내에서 배를 불렸지. 그래서 희사, 나는 너를 증오해. 하지만 완벽하게 미워하진 못한다.”

현극과도 또 라유와도 닮은 희사를 현극은 소리 없이 껴안았다. 

“랑쿤을 망가뜨리겠다고. 쿤이 세운 이 세계를, 그리고 내 어미의 욕심을 전부 없애겠다고 마음먹었지. 이제는 천천히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해훈이 너를 구하려, 그리고 내가 황제로 있는 이상 이 나라를 망가뜨리러 올 거다. 나는 천천히 기다리겠다. 지금까지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으니까.”

희사는 서현을 죽인 현극을 증오했다. 하지만 그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과 닮아있었다. 현극이 서현을 죽임으로서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희사는 현극을 밀어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안아주지 않을 텐가?”

“내가 왜?”

“내가 되어주고 내 라유가 되어라.”

“거절하겠어. 나는 당신을 아주 조금 연민해. 하지만 그것뿐이야. 난, 당신과 나의 고통이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더 어리석었지. 하고 희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현극은 애처롭게 걸음을 옮기는 희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너머로 라유를 그렸다. 현극은 눈을 감았다. 천천히 위에서부터 그의 얼굴 윤곽, 그의 쇄골, 그의 갈비뼈를 그렸다. 어둠속에서 자신이 새겨 넣었던 모든 그의 몸이 완성되었을 때 현극은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그 안에는 침상에 차가운 시체로 누워있는 라유가 있었다. 그 끔찍함에 현극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제 네 아름다운 모습조차도 기억하지 못해.”

현극의 쓸쓸한 읊조림만 흩어졌다.

두 시체를 마차에 태우고 가는 간자는 등골이 서늘했다. 사람을 죽인 적은 있어도 시체를 운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유적의 말대로 최대한의 속도로 설장산을 올랐다. 마차가 오를 수 있는 길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길이 전부였다. 굽이굽이 돌아 올라가기 때문에 시간이 배로 걸렸다. 간자는 랑쿤의 황성을 떠난 지 닷새 만에 환진의 영역인 북방에 들어섰다. 하지만 아직 설장산의 중턱쯤이었다. 간자는 마차를 세우고 눈을 붙이려 했다. 마차 안에 들어가서 편히 발 뻗고 자려다 시체와의 동침을 생각하니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간자는 말의 고삐를 잡은 채로 앉아서 졸기 시작했다. 그대로 꾸벅꾸벅 졸다가 눈을 떠보니 벌써 아침 해가 솟아있었다. 간자는 피곤함에 곤죽이 되어 자신이 옆으로 쓰러져 자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어이쿠, 어이쿠. 어서 가야지.”

간자가 말을 채근했다. 조금 달리다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말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이다. 간자는 그저 느낌이겠지 하며 빠른 속도로 달렸다. 규성주에 도착하기 전 간자는 그 이상한 느낌을 내내 지우지 못하고, 결국 마차 안을 열어보기에 이르렀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피냄새만이 흉흉했다. 간자는 마차 문을 열은 채로 뒤로 나자빠졌다. 시체 한 구가 사라진 것이다. 간자는 어디 흘리고 온 것이 아닌가 빠르게 걸어서 돌아온 길을 갔다. 그럴 리가 없었다. 마차 안은 방금 자신이 잠금쇠를 풀어서 직접 열었다. 그러니 시체가 굴러 떨어 질 리도 없었다. 간자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피가 맺힐 때까지 손톱을 뜯은 간자는 다시 마차의 문을 잠갔다. 이렇게 된 이상 시체 한구라도 번개처럼 황성 내에 두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시체인데 알게 뭐람.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간자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채찍으로 말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간자는 이번에 랑쿤에 돌아가면 점찍어 두었던 여염집 여자와 혼인을 할까 생각 중이었다. 물론 그 여자가 간자를 좋아할지는 또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는 간자라는 직업을 싫어한다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때때로 즐거운 일이었다. 사는 데 있어서 답답한 속을 달래주는 하나의 취미생활이랄까? 

여염집 여자와의 신혼 생활을 상상하던 간자는 목덜미에 느껴지는 이상한 충격에 시선을 내렸다. 턱밑으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이 보였다. 간자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만졌다. 날카로운 검이 간자의 목구멍을 시원하게 뚫고 있었다. 검이 뽑혀져 나가자 간자의 몸이 달리는 마차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마차의 바퀴가 간자의 몸을 밟고 지나갔다. 

마부를 잃은 달리던 말은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말이 완전히 멈추자 마차의 나무문이 박살이 나며 열렸다. 삐죽삐죽한 나무의 문살이 덜렁거렸다. 그 안에서 장신의 남자가 뛰어내렸다. 넝마가 된 몸을 이끌고 말과 마차를 연결한 그 질긴 소가죽을 단 한 번의 내리침으로 끊어냈다. 남자의 옷 상태는 온통 피로 변색돼 엉망이었지만 남자에겐 커다란 상처가 없는 듯 했다. 남자는 기력을 회복한 듯 말 등에 올라타 힘차게 황궁을 향해 달렸다.

그 시각 규성주 궁내부는 요란 법석했다. 보름에 걸쳐 이어지는 축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규태휘가 데려온 남자 때문이기도 했다. 규태휘가 이른 새벽 시체를 하나 업고 왔다. 얼마나 엉망인지 그냥 시체라고 설명하는 것이 편했을 정도였다. 규태휘는 규성주 내부에 있는 모든 용하다는 의원들을 불렀다. 하나같이 도착한 의원들은 환자의 상태를 보고 시체가 아니냐며 놀랐다. 

“내가 해태눈도 아니고 시체를 데려왔겠는가! 어쨌든 치료해놔.”

규태휘는 등짝에 묻은 핏가루를 털어내며 욕탕으로 향했다. 의원들은 칼로 난자당한 이 자를 어찌 살려내나 서로 골똘히 머리를 맞댔다. 게다가 환자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혼수상태였다. 하지만 젊은이답게 깊게 베였던 상처는 자연적으로 아물어가는 중이었다. 불행 중 다행을 꼽자면 심장을 관통한 검의 자상이 사실은 심장 바로 옆 부근을 스쳐갔다는 것이다. 운이 좋은 사내였다. 의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체, 아니 시체와도 같은 환자를 일으켜 탕약을 억지로 입에 넣어주고 뜸을 떠주며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규태휘가 살리라고 했으면 그래야 하는 게 법이다. 

규태휘는 연마장에서 목검으로 나무인형을 미친 듯이 내리쳤다. 짚으로 만든 인형도 아닌데 금세 너덜너덜 해졌다.

서현이 규태휘를 찾아온 것은 희사가 현극을 따라 랑쿤으로 이동한 그 날이었다. 서현은 규태휘에게 협박에 가까운 부탁을 했다. 그 날의 서현을 떠올리자 규태휘는 이를 갈면서 다시 목검으로 나무 인형을 내리찍었다. 

“네가 희사를 데려갔다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자 전하. 방금 전하께서 랑쿤의 태자인 현극과 희사가 도망치는 것을 보셨다하지 않으셨습니까?”

규태휘는 해훈과 서현의 앞에서 억울하다는 듯이 웃었지만, 속은 새까맣게 탔다. 규태휘는 현극을 완벽히 신뢰하진 않았어도 그가 희사를 데리고 도망 갈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적은 내부에 있다더니 그 말이 진리였다. 서현은 해훈이 자리를 뜬 뒤 규태휘에게 손짓했다. 제길. 이럴 줄 알았다면서 규태휘가 씁쓸하게 웃었다.

“태휘, 내가 너에게 부탁한 것이 무엇이었지?”

“희사님을 데리고 북방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희사를 편히 데리고 도망칠 수 있도록 동궁의 경비들을 다 물렸고, 문도 전부 막아버렸다. 그런 보답을 이렇게 갚아? 그들을 도망치게 놔두다니.”

“그건.”

“희사를 유곽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마련한 고육책 이었는데 도리어 내가 당했군.”

규태휘는 처음부터 희사를 두고 서현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서현의 부름을 받아 황궁에 도착한 것이고 희사를 데리고 도망친 것도 서현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중에 황비를 통해서 온갖 사연들을 알고, 정말 희사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의 몸까지 빼앗아버린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서현은 알지 못했다. 

만일 서현이 알았다면 규태휘는 황실 대 북방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사실 규태휘가 현극에게 희사를 소개시켜 준 것도 잘난 환진의 태자님 골탕 좀 먹여보려 한 짓이었다. 그것이 바로 무덤을 파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주변의 자들이 전부 뛰어난 자들이라 그렇지 규태휘도 멍청한 부류는 아니었다. 오히려 현명한 자였다. 만일 현극이 희사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규태휘가 희사를 이용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 서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었다. 희사가 황궁에서 납치당한 것으로 꾸며서 시끄러운 황실 내부의 분위기를 종결시키려고 벌였던 일인데 좀 무모했나 싶었다. 게다가 해훈의 빠른 행동력이 예상외였다. 서현은 규태휘가 북방으로 데려간 희사를 구하는 척해서, 어딘가에 몰래 숨겨두고 자신만 희사를 볼 계획이었다. 연기를 잘해준 규태휘 덕분에 희사는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이 서현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치하긴 했다. 그리고 언제든지 변수는 생긴다. 현극이 희사를 데리고 간 것만 봐도 그랬다. 

“현극이 왜 희사를 데려갔지?”

“글쎄요. 아마도 그가 쿤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쿤? 그게 뭐지?”

“아, 희사(僖詞)라고도 합니다. 쉽게 말해 랑쿤의 신이 내린 자죠.”    

“그건 알고 있다. 근데 왜 그게 희사라는거냐?”

“희사님이 희사(僖詞)니까요.”

“어처구니가 없군.”

“뭐 믿지 않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직접 확인 한 것은 아니니.”

“쿤이란 사기꾼 집단이 아니었나?”

“하하하, 그럴 리가요.”

규태휘가 손을 내저으며 서현의 말을 부정했다.

“어쨌든 그딴 사실은 됐다. 네 놈이 어떻게든 현극과 연락을 취해라.”

“과연 그가 제 연락을 받아들일까요?”

“그건 네놈의 능력이지.”

규태휘는 서현에게 주기적으로 서찰을 보내야 했다. 물론 현극과도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희사를 데리고 랑쿤으로 나른 시점부터 현극은 북방에서 볼일은 다 봤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서현은 그런 규태휘에게 북방에서 삼 년간 근신하라는 명을 내렸다. 북방을 벗어날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유롭게 북방에서 거주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북방에 있는 것이랑은 천지차이였다. 벌을 내린 뒤 서찰 한번 보내지 않던 서현에게서 반년 만에 급한 서신이 도착했다.

-랑쿤을 가기 위해 북방으로 향하고 있음. 설장산의 중턱에서 날을 지새울 것이니 오는 축시(丑時)경 그곳으로 오라-

규태휘는 온갖 신경질을 내가면서 그것을 구겨서 바닥에 버렸다. 그렇다고 서현의 말은 무시하지는 못하고 자시가 되자마자 말을 타고 설장산을 올랐다. 어두운 산등성이에서 모닥불이 불타고 있는 부근이 눈에 확 들어왔다. 숫자가 꽤 되는 것을 보니 서현뿐만이 아니라 해훈도 같이 온 것 같았다. 규태휘는 모두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져온 횃불을 휙휙 흔들었다. 자박자박 소리를 내며 귀신과도 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한 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인사는 됐다. 태휘, 네가 한 말이 맞았다.”

“무엇을요?”

“희사가 쿤이라는 것.”

“아하, 그 때는 제 말을 믿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이 인간이. 규태휘는 뒤통수가 뻥하고 열리는 것을 느꼈다. 

“랑쿤을 방문한 뒤 당연히 무사히 돌아올 가능성이 높으나, 그렇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도 향하시는 겁니까?”

“희사가 있으니.”

규태휘는 마음속에서 이미 서현에게 어느 정도 졌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규태휘가 희사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짜였다. 서현이나 해훈 그리고 현극까지 얽혀있지 않았으면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서라도 쟁취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 저 셋만 아니라면 말이다.

“내게 만일 일이 생긴다면 내 간자를 통해 매가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러니까 태자님이 죽거나 하면 저보고 어찌어찌하라는 거십니까?”

“죽어? 하하. 그렇게 쉽게 죽어주지는 않지. 만일의 예를 든 것이다. 네 녀석에게 듣기론 현극이 꽤나 욕심이 많은 자라 했지 않는가, 그런 자가 나와 해훈을 죽이려 하진 않겠지.”

“그렇군요. 그럼 혹.시.라.도 태자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저는 어찌 할까요?”

규태휘는 속으로 그냥 죽어를 외쳤다. 

“그 서찰을 받은 뒤 그냥 설장산에서 기다려라.”

“네?”

“뭘 놀라나, 내가 만일 죽을 위기에 처해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네가 나를 구해야지 않겠나?”

규태휘는 기가 막힌 소리에 웃음도 안 나왔다.

“오시다가 죽거나 아예 랑쿤에서 죽으신다면요?”

“그럼 그건 내 운이 거기까지인 것이지.”

규태휘는 서현의 말을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현은 규태휘에게 진한 웃음을 보여주며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규태휘는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이 이토록 끔찍하게 보인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침상에 누워서 사경을 헤매는 서현의 얼굴이 차라리 눈을 떴을 때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사경을 헤매는 단계는 지났다.

규태휘는 서현의 말대로 그의 간자가 보낸 매의 전언을 받자마자 설장산의 꼭대기에 올랐다. 물론 혼자 간 것은 아니었다. 여러 명의 병사들을 대동해 여기저기 심어놓았다. 수상쩍은 마차가 규태휘의 눈에 잡힌 것은 요행이었다. 장사꾼의 마차라면 마차의 천장 위까지 장삿거리를 싣고 가는 것이 당연한데, 그 마차는 전혀 장사꾼의 그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를 이끄는 녀석도 평범한 장사꾼이라 하기에는 피냄새가 너무 났다.

태휘는 그 마차를 몰래 미행한 뒤 마차꾼이 잠이 들었을 때 마차의 문을 열었다. 조심스럽

게 행동하는 규태휘는 드르렁 거리며 코를 고는 소리에 자신의 조심함이 참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규태휘는 꼬챙이로 잠금쇠를 푼 뒤 마차의 안을 열어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투성이의 시체 2구가 있었다. 완전히 엉망인 상태였지만 규태휘는 만일을 위해 그 시체들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는 한참을 들여다보다 깨달았다. 그 시체 2구는 서현과 해훈이었다. 규태휘는 서현과 해훈의 맥을 짚었다. 서현은 거의 끊어질 듯 말듯이 미약하게 뛰었고, 해훈은 기력이 다했거나 충격을 받아 그저 기절한 것만 같았다. 

규태휘는 둘 다 데려올 수 있었으나 협박이 아닌 부탁을 받은 것은 서현 하나였으므로 해훈은 그대로 버려뒀다. 규태휘는 서현을 업고 빠르게 규성주까지 도착했다. 가슴팍에 느껴지는 서현의 심장박동이 점점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싶었으나 대단한 착각이었다. 규태휘는 지금 편안한 얼굴로 누워있는 서현의 뺨을 한 대 때려줄까 하다 참았다. 운도 지독하게 좋은 태자님이다. 

만일 규태휘가 서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서현이 애초에 규태휘에게 만일이라는 걱정 하에 부탁을 하지 않았다면, 서현은 그저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었다. 규태휘는 사실 그 운조차도 본인이 만든 것이란 것을 알았다. 서현에게 여러 번 진 규태휘였지만 단 한가지 이긴 것에 만족감을 품었다. 희사의 첫 남자라는 것. 정작 희사는 개에 물린 셈 치는 듯 했지만 규태휘는 그것을 크게 생각했다.

“언제 일어나실 겁니까. 잠자는 아름다운 태자님.”

규태휘가 잔뜩 비꼰 음성을 내뱉으며 서현을 지켜봤다. 서현이 사나운 인상을 쓰고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으나, 태휘의 건방진 말에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 * * 

한숨도 못자고 황궁으로 돌아온 해훈은 숨을 고르며 서궁으로 들어섰다. 궁녀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해훈은 저들의 입을 열게 한 것을 약간 후회했다.

“전하, 전하 어디서 이리 다친 것이십니까?!”

해훈은 피가 잔뜩 말라붙은 옷을 벗어던졌다. 궁녀들은 재빠르게 해훈의 옷을 받아들고 그를 탕으로 이끌었다. 해훈은 주인이 돌아오지 않아 식어버린 탕 안으로 몸을 던졌다. 궁녀 세 명이 달라붙어 해훈의 몸에 덕지덕지 묻은 피들을 벗겨냈다. 해훈은 자신이 직접 하고 싶었으나 손가락 까닥하기 조차 힘겨웠다.

“전하, 조금만 기다리세요. 따뜻한 물을 데우고 있습니다.”

“됐다. 이대로 전부 씻겠다.”

궁녀들은 해훈의 몸에 묻은 피들이 전부 다른 이들의 것이라 생각했는데 해훈의 탄탄한 상체와 하체에 난 수십 개의 자상을 보고 숨을 삼켰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 상처들을 함부로 쓸어내렸다. 해훈은 고통이 대단했을 텐데도 거친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머리까지 깨끗이 헹구고 나서야 해훈이 원래의 말쑥한 얼굴로 돌아왔다. 궁녀들이 해훈의 몸에 딱 맞는, 그가 즐겨 입는 검은색의 의복을 입혔다.

“전하, 피곤해 보이시는 데 조금 눈을 붙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 내실로 간다.”

해훈은 따라나서는 궁녀들을 물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내실을 향했다. 연마장에 있을 흑의대를 떠올렸건만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감인령의 시체조차도 자신의 손으로 거두지 못했다. 해훈은 현극에 대한 강한 분노가 치솟았다. 감히. 네 까짓 놈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해훈은 차갑게 웃으며 본성을 드러냈다. 

해훈은 황제의 방 앞에 섰다. 궁녀들은 새벽녘이라 문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기척을 숨긴 해훈이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아무도 눈치 챈 자가 없었다. 해훈은 침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켜놓은 초에서부터 황제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황제는 언질도 없이 들어선 해훈을 놀라지 않고 쳐다봤다.

“해훈이구나.”

황제는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해훈의 이름을 불렀다. 해훈에게 정신의 병이 있다고 병명을 붙인 것은 황제였다. 아직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어른이 해댈 법한 이야기를 하는 자신의 아들을 보며 꺼림칙했던 감정을 가졌던 그였다. 황제는 어쩌면 해훈이 자신의 자식이 아니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왜 그리 화가 났느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황제는 지금은 지극히 정정하던 이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서현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황제의 눈이 찢어질듯 부릅떠졌다.

“누가 죽였느냐?”

“랑쿤의 황제가 죽였습니다.”

“랑쿤의 황제라면 현살을 말하는 것이냐? 그가 왜!”

“아닙니다. 지금 랑쿤의 황제는 그의 아들인 현극입니다.”

“그럼 그의 아비가 죽었다는 말이겠구나. 내가 참으로 정신을 많이도 놓고 있었어. 허허.”

황제가 내장을 다 토해낼 정도로 기침을 해댔다. 해훈은 황제의 기침이 가라앉을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현성도 죽고, 서현도 죽었으니. 이제 황좌는 네 것이겠구나. 그래, 네가 이어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자리가 저는 지금 당장 필요합니다.”

황제가 껄껄하며 웃었다. 어차피 황제는 이제 여생에 남은 미련이 없었다. 부국강병한 한 나라의 황제였고, 훌륭한 아들들을 두었다. 이만큼 성공적인 인생을 산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편히 보내다오. 이렇게 정신을 놓고 살 것이라면 이리 제정신일 때 가는 것이 바로 행복이겠지.”

“죄송합니다.”

해훈이 진심을 담아 사죄했다. 해훈은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금침을 끌어올려 황제의 숨을 막았다. 황제는 한 번도 저항하지 않았다. 숨이 완전히 넘어가는 그 때 몸을 한 번 떤 것이 다였다. 해훈의 눈에서 무언가 뚝뚝 떨어졌다. 해훈은 그것을 손으로 쓱 훔쳤다. 

감정은 필요 없다. 해훈은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기척을 숨기며 다시 서궁으로 향했다. 자신의 방에 도착한 해훈은 쓰러지듯 침상에 몸을 뉘였다. 서궁의 궁녀들이 식은땀을 흘리는 해훈의 몸을 새벽 내내 닦아주고 손바람을 쐬어줬다. 해훈은 그녀들이 귀찮았으나 물리고 싶은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침 해가 밝자마자 황궁은 곡소리로 가득했다. 환진의 전역에 21대 황제의 붕어소식을 알렸다. 노환에 의한 죽음. 그럴싸했다. 귀족들은 죽어있는 황제의 용안이 그야말로 평온하여 그가 편안한 죽음을 맞았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해훈은 황자를 위해 만들어진 세 마리 용이 수놓아진 의복을 처음으로 입고 내궁으로 들어섰다. 

해훈의 등에 세 마리의 용이 꿈틀댔다. 궁녀들은 해훈이 늘 수수한 검은 옷만 입다 화려한 황자복을 입으니 그의 얼굴이 더욱 빛나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실에 모여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던 이들이 해훈의 등장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옷에 새겨진 용을 보아하니 황자인데, 얼굴은 처음 보는 자였다. 해훈은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해훈이며, 제 2황자다.”

곡소리가 끊어지고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나는 복면을 쓰고 황궁 내에서 거주했지.”

황궁에서 복면을 쓰고 활보한 자는 단 하나 뿐이었다. 청영이 데려온 흑의대의 무리의 수장인 자.

“내 어머니께서는 황권의 다툼을 걱정한 끝에 나를 흑의대의 일원으로 둔갑시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들도 알다시피 현성 역시 황권 다툼에 휘말려 죽지 않았나? 내 어머니이셨던 청영마마는 그런 사태를 두려워 해 나를 숨겨두신 것이다.”

“그 말씀은 당신이 정말 제 2황자 전하라는 것 입니까? 대체 그것을 어찌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소. 하면서 저마다 불쾌함을 드러냈다. 

“서궁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물어보라.”

“서궁의 자들이라 함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들은 이제 얼마든지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그러도록 지시했다.”

해훈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기필코 확인을 하겠다며 서궁의 최고 궁녀를 데려왔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여자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해서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저기 계시는 저 분이 그대들의 주인이 맞는가?”

귀족 중 하나가 해훈을 손가락질 했다. 궁녀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예, 맞습니다. 현재 서궁의 주인이십니다.”

궁녀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에 웅성거림이 단번에 사라졌다.

“제 2황자 전하인 해훈님이 맞는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헌데 무슨 일로.”

“되었다. 그대는 그만 서궁으로 돌아가라.”

해훈이 그녀를 물렸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기웃댔다. 내실에 모여 있던 자들이 해훈을 향해 부복했다.

“황자 전하를 뵈옵습니다.”

해훈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그들에게 일어서라는 지시를 했다.

“사황, 사황 있는가?”

해훈의 부름에 뒤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서현의 최측근 사황이 허리를 조아리며 나왔다. 흑의대의 수장인 해훈이 제 2황자였다니, 황실의 밥을 수십 년이나 먹은 사황도 깜빡 속아 넘어갔었다. 

“내 형님께서 랑쿤으로 향한 것은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

“예, 수장님, 아니 황자전하께서도 같이 향하셨지요.”

“내 형님. 태자 전하가 랑쿤에서 죽임을 당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리에 모두가 입을 뻐금거렸다. 사황도 말을 잇지 못하고 꼼짝없이 굳었다.

“전하, 전하.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나와 태자 전하는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을 축하하며 랑쿤을 향했지. 헌데 랑쿤의 새 황제는 흑의대와 태자 전하의 모든 수족들을 몰살시켰다. 그리고 나와 태자 전하를 죽이려 했다. 나는 운이 좋게 살아남았지만, 태자 전하는 죽임을 당하셨다.”

“어어억!”

사황이 숨이 넘어가듯 뒷목을 붙잡았다. 

“나도 목숨이 경각이었던 것을 그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방심했지. 나는 그 틈을 타 다시 환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들이 해훈의 옷에 가려진 부분은 보지 못했지만 해훈의 드러난 목의 긴 자상과, 얼굴에 난 여러 개의 상처들로 지금 그가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짐작했다. 그만큼 해훈의 상처는 심각해 보이는 것이 많았다. 

“랑쿤의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습니다! 어찌 감히 랑쿤 따위가 태자님과 황자님을 시해하려 했단 말입니까!”

“랑쿤이 언젠가 일을 치를 줄 알았습니다. 우리 환진을 늘 시기하고 질투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맞아요.”

입을 바삐 놀리는 귀족들 틈 사이로 익숙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행성대신의 여식인 명휘였다. 명휘는 천천히 걸어서 해훈 앞에 섰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더니 생긋 웃었다.

“황자 전하, 그간 결례를 범했었습니다.”

전과는 다른 다소곳한 태도에 해훈은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아니, 괜찮다.”

“전하의 말씀이 맞았군요. 저 따위가 감히 부릴 수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명휘는 발뒤꿈치를 올려 해훈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눈빛을 만든 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저는 그 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태자 전하가 마음을 빼앗겼던 분, 희사님 아니십니까? 그래, 이번엔 그를 랑쿤의 황제가 데려갔나요?”

명휘가 다시 사푼히 발뒤꿈치를 내렸다. 해훈은 명휘를 천천히 내려 봤다. 여자로 두기엔 아까운 인재였다. 똑똑하고 강했으며, 또한 뚝심까지 있었다. 해훈은 그녀를 뒤로 하고 다시 큰소리를 냈다.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셨으나 지금의 상황은 랑쿤을 이대로 놔둘 수 없는 노릇이다. 랑쿤과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황제 폐하의 국상은 보류한다.”

“그건 아니 되옵니다!”

“그럼 세 달간에 걸친 황제의 국상이 끝나고 태자 전하의 시체를 천천히 찾아오자는 말인가? 그대들은 랑쿤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세 달이나 참을 텐가?”

해훈의 일갈에 모든 귀족이 입을 다물었다. 

“무반(武班)을 소집하라. 지금부터 나는 환진의 통치권을 쥐고 있는 자다.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 아닌 랑쿤과의 싸움에서 그대들을 이끌 자일뿐이다.”

“그, 그러나 사실 전하께서도 엄밀히 말하자면 랑쿤의 자가 아니십니까? 청영 마마께서도…….”

앞니가 톡 튀어나온 문반(文班)의 귀족이 제멋대로 지껄였다. 해훈은 허리 왼쪽에 찬 휘어진 검을 그대로 날렸다. 남자는 말을 끝내지 못하며 목이 단번에 잘렸다. 빙글빙글 도는 검이 다시 해훈의 손으로 돌아왔다.

“내가 랑쿤의 자라? 이 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있나? 그렇다면 지금 말하라.”

남자의 목이 잘린 시체 주변으로 모두가 한걸음씩 떨어졌다. 다들 남자를 동정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입을 놀린 죄의 대가다. 해훈은 환진의 황자다. 어미가 랑쿤의 자라 한들, 출가해 환진의 소속이 된 황비였고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해훈이 어찌 랑쿤의 자란 말인가?

“전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랑쿤을 이대로 두어선 안 됩니다. 랑쿤의 황제는 환진의 전 귀족들과 백성들을 능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랑쿤이 태자 전하를 시해한 것은 환진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다들 황제의 죽음보다 서현의 죽음에 대해 분개하고 슬퍼했다. 그만큼 서현은 황실 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자였다. 이미 서현의 죽음에 눈물을 훔치는 여자들도 꽤 보였다. 황실의 꽃이며, 현명한 서현을 모두가 경외하며 존경했다. 그런 자신들의 우상을 짓밟은 랑쿤에 대한 분노는 해훈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대단했다. 해훈은 무반을 소집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서현, 네가 대단하긴 했나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서현은 어디에서나 늘 눈에 띄는 능력 있는 자였다. 그것은 현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현과 해훈은 현세에서 역시 같은 곳의 소속이었으나 하는 일은 달랐다. 서현은 그 분야에서 이미 유명한 자였다. 그것은 해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해훈은 남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공적에 비해 빛을 못 봤고 서현은 남들의 관심을 꺼려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게 달랐다. 그런 부분이 주변인들을 더 자극했다. 서현은 어디에서든 빛나는 존재였다. 그것은 이곳 환진의 황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훈은 소집된 무반을 보며 환진에는 꽤나 쓸모 있는 장수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랑쿤의 병사처럼 숫자만 많다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숫자로 따져도 랑쿤보다는 환진 쪽이 훨씬 우세했다. 해훈은 분노에 눈앞이 가려 현극이 왜 그런 무리한 짓을 벌였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당장 그의 손에서 희사를 찾아오겠다는 목적이 전부였다. 해훈은 마차에서 내려 황궁으로 향하는 그 순간부터 랑쿤을 철저히 부서뜨릴 계획을 세웠다. 이제는 그것을 무반들에게 이해시킬 차례였다. 무반들은 오랜만의 전쟁에 다들 피가 들끓고 있었다.

“설장산 밑, 랑쿤의 가장 첫 마을을 친다. 그 마을을 전부 불태워라. 살아남은 자는 열 명으로 족하다. 그들을 도망치게 놔두어 얼마만큼의 잔학도가 그려졌는지 다른 백성들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필히 살려두어라. 그다음은 맨 밑의 지역인 테룬부터 부순다. 그 위로 올라오며 지방 세력들을 전부 갈아치우겠다.”

해훈은 랑쿤의 구체적인 지도를 곁들이며, 장수들에게 설명을 했다. 무반들은 그것을 귀담아두며 각자 자신들과 그들이 병사들이 향할 장소를 확인했다. 해훈은 원래도 적던 밤잠을 줄여가며 삼일에 걸쳐 지방 제후들까지 소집했다. 어차피 제후들의 병사는 황궁의 소속이었다. 지방 제후들은 좋던 싫던 전쟁에 참여해야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북방. 환진의 최고 병력이라 일컬어지는 규태휘에게 전갈을 띄웠다. 북방의 자들과 합류하려면 황궁에서 그곳까지 도착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해훈은 전갈을 보낸 지 단 나흘 만에 북방에게서 답을 받았다. 환진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전쟁에 참여하겠으며, 언제라도 준비되어있으니 북방에서 합류하자는 규성주의 제후 규성견의 뜻이 담겨있는 서찰이었다. 

전략을 확인하며 수뇌부들과 머리를 맞댄 해훈은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환진은 평화로웠으나 늘 전쟁과 예기치 못한 역병에 대비해왔다.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국가의 힘은 곧 군사의 힘이라도 해도 좋았다. 백 년이 넘도록 이어온 평화에 필요가 없어진 무반들을 문반들에게 무시당하기 충분했지만, 환진의 황제들은 무반이든 문반이든 할 것 없이 평등하게 대했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즉각적으로 오는 반응은 칼이 더 강하지만 후에 오랜 기간 파장을 일으키는 것은 붓이다. 그 둘을 적절히 조절한다면 붓도 칼도 전부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즉 무반과 문반 중 어느 한쪽만 있다고 해서 나라가 잘 굴러가는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환진의 선대 황제들은 단조로운 평화에 나타해지지 않게 부단히도 노력해야했다. 해훈은 이 날만큼 환진의 선대 황제들이 현명하게 느껴진 적도 드물었다. 그들이 다져놓은 무반들의 기반은 랑쿤을 전멸시키는 데 큰 전력이 될 것이다. 

해훈은 보름 만에 출전 준비를 마치고 재빨리 북방으로 향했다. 황궁에서 북방으로 향하는 자들만 8만이 넘었고, 각지의 지방에서 올라오는 황실의 군대들은 4만이 조금 안됐다. 북방의 병력까지 합친다면 족히 10만의 군사가 랑쿤을 향하는 것이었다. 랑쿤의 군사는 실질적으로 알려진 6만보다 수가 부족했다. 게다가 랑쿤의 각 지방 제후들은 군병이 아닌 사병을 거느리기에 금세 항복을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해훈도 그것을 이용해 환진의 병력을 최대한 낭비하지 않으려 했다. 처음 몇몇 마을과 도시는 처참하다 싶을 정도로 쓸겠지만, 그 이후의 곳들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적당한 공포감만 심어주면 랑쿤의 지방 제후들은 알아서 꼬리를 말고 해훈에게로 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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