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겁환상(前劫喚想) 下 6화 (13/21)

6.

서현은 희사의 거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폭발 직전까지 화가 들끓었다. 황제의 침실 안쪽의 또 다른 방이라? 아무리 현극이 희사를 탐하지 않았더라도 쳐 죽일 만큼의 살의를 만들게 했다. 서현은 현극의 목을 자신의 검으로 꿰뚫는 상상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현극을 잔인하게 죽이는 상상을 하던 서현이,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방에서 나오는 희사를 낚아챘다. 희사는 제 궁 다니듯이 랑쿤의 황궁을 거니는 서현의 무딘 신경이 놀라웠다. 

“나와 산책해.”

서현은 유악에서 처음 봤던 그 때의 얼굴로 속삭였다.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표정. 희사는 가슴이 지끈거렸다. 고백하는 해훈에게 답을 해주지 못했던 그 때의 아픔이 아니었다. 지금 이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내포되어있었다.

“환진은 한가한가봐.”

희사는 비꼼이 아닌 순수한 의문을 담아 물었다.

“아니, 정신을 놓을 정도로 바쁘지. 하지만 너를 위해 왔어. 아니 와야 했지.”

“이럴 땐 고맙다고 해야 하나? 이 세계에서 내가 없어져도 나를 찾을 자는 너와 해훈뿐이니까.”

희사는 서현과 함께 황제의 정원을 거닐었다. 현극은 정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태다. 황제의 정원은 황제 외에 단 한 명인 쿤만 거닐 수 있었다. 오늘로써 서현도 그 예외에 포함됐다. 서현은 현극의 정원을 지켜보며 생각보다 취향이 나쁘지 않은 자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화려해도 환진의 궁에 비하면 보잘 것 없지만 말이다. 희사는 안팎의 구별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 존재하는 정자(亭子)에 앉았다. 그 앞으로 붓꽃과 금불초등 여름에 피는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팔랑거리는 나비가 다리에 꽃가루를 묻히곤 암술로 향했다. 희사는 꽃의 교배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나비를 보며 저들도 자유롭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비는 단순히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내가 재차 물어봐도 소용없겠지?”

“그래, 언제가 되던 난 환진으로 돌아갈 거야. 너를 두고 혼자 현세로 가진 않아.”

“만일 나를 여기에 버려두고 너와 해훈만 가버린다면 죽어서라도 쫒아가겠어.”

서현이 하는 말은 전혀 농담 같지가 않았다. 희사는 쓰게 웃었다. 이 지독한 남자가 사랑을 했으니 그 사랑 또한 얼마나 독했을까. 희사는 서현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전생을 기억하진 못해도 꿈에서 나왔던 서현의 모습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될 리가 없다. 서현이 한 짓은 끔찍한 자기만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희사는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서현의 눈빛을 들여다봤다. 저리도 선하게 생겨서 누굴 죽이고, 어찌 벌을 내린단 말이야. 서현은 희사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입을 열었다.

“희사, 너를 사랑해. 하지만 난 해훈과 달라. 네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네가 행복한 것을 바라. 하지만 네가 나 없이 행복 한다면 그건 또 참을 수 없는 일이야.”

“서현,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지끈. 지끈. 좀 전부터 심장을 찔러대던 송곳이 더 날카로워졌다. 수없이 생각했다. 서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직접 서현에게 말하는 것과 생각만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 알고는 있었지만 네가 그리 말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서현은 충혈 된 눈으로 희사를 바라봤다. 함부로 자신의 사랑을 짓밟는 희사를 엉망으로 범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서현은 그럴 수 없었다. 이젠 희사의 미움을 받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이상 희사에게는 한없이 나약해져갔다. 그럼에도 미워해도 좋으니 증오해도 좋으니, 멋대로 너를 가져볼까? 라는 유혹은 아직 가슴속에서 건재했다. 그것을 막는 것은 서현의 또 다른 자아다. 희사는 이 얄미운 남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현을 위로할 생각은 없었는데 희사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희사 쪽에서 먼저 서현을 안은 것은 처음이기에, 서현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힘을 주어 희사를 끌어안았다. 달콤한 희사의 내음에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서현은 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운 바람이 둘을 떼어놓으려 극성을 부려도, 두 사람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도 서현은 희사를 안은 채였다. 희사는 사랑을 속삭이는 이 남자를 완벽하게 미워할 수 없었다. 반년 전부터 지끈거리던 심장이 서현과 마주하자마자 서서히 멎어들었기 때문이다.

서현, 왜 나를 사랑해? 왜 나를 이토록 사랑해서, 이 지경이 됐을까? 

끝이 보이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우리가 미치도록 사랑을 했었을까?

……. 왜 그렇게 우리는 미치도록 사랑을 했을까?

희사는 문득 속으로 그 말들을 되뇌다 생각을 멈췄다. 왜 우리가 미치도록 사랑을 했었을까? 라니. 우리라는 말은 맞지 않다. 희사는 한 번도 서현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희사는 자신도 모르는 마음속의 외침에 깜짝 놀라 서현을 떼어냈다. 서현은 마치 달콤한 꿈속을 헤매다 보물을 두고 쫓겨 나온 아이처럼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서현에게 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나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서현이 차가운 손바닥으로 희사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땀이 쓸고 간 자리에는 시원함이 머물렀다.  

“더운 날이다. 이렇게 더울 때마다 그곳에서의 시원했던 것이 생각나. 이름이 뭐였더라…….”

“선풍기를 말하는 거야?”

“아니 그런 이름이 아니었어.”

“그럼 에어컨인가?”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하하하.”

서현이 새로운 것을 깨우쳤다는 듯이 시원하게 웃었다. 희사는 그런 서현의 웃음을 들으면서도 마냥 즐겁지가 않았다. 자신이 현세에서의 많은 것을 기억하는 건 이곳으로 온지 불과 일 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현은 너무 오랜 기간 이곳에 머물렀다. 에어컨이니, 선풍기니 하는 현대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 말고도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꽤 있어. 사용할일이 없으니 노인네처럼 금방 잊더군. 현세로 돌아가도 걱정이야. 그곳에서 밖에 누구 없느냐?, 내 시중을 들 거라. 라고 지껄인다면 분명 미친 사람 취급 받겠지? 하하.”

희사의 어두운 표정을 읽은 듯이 서현은 우스운 이야기를 늘어놨다. 희사는 그럴 때마다 작게 웃었을 뿐이다. 평소와 다르게 한참을 떠들던 서현이 희사의 손을 잡았다. 그들의 모습만을 보자면 마치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처럼 소소하면서도 다정한 느낌이 가득했다. 

“난 내가 어디에 있게 되든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곳은 단 하나야, 희사 네가 있는 곳. 설사 네가 지옥에 있다고 해도 난 쫓아갈 거다. 희사 너와 함께 하는 그곳은 내게 있어 절대 지옥은 아닐 거야. 그런 행복한 지옥이 있을 리가 없지.”

희사는 서현의 고백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서현,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 내게 그런 달콤한 사랑의 언어들은 내뱉지 마. 라고 말해야했다. 하지만 희사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서현과 다시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서현은 침묵하며 자신의 옆을 지키는 희사를 보며, 무언가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희사는 현세에서 돌아오기 전, 이곳에 살던 전생의 희사와 분위기가 흡사해졌다. 하지만 같은 성질을 지니진 않았다. 겉모습과 풍기는 분위기는 동일한 것이었으나 전생의 희사에겐 기개라든지, 결단력이라든지 뭣하나 딱 부러지는 구석이 없었다. 서현을 대할 때도 흔들리는 연약한 풀처럼 늘 위태위태하기만 했다. 늘 차갑기만 했던 지금의 희사는, 원래 이곳에 있던 희사처럼 서현에게 매몰차게 굴지 않았다. 서현은 희사의 변화가 매우 흡족했다. 

서현은 희사를 사랑한다. 희사는 서현을 전생의 자와 현생의 자로 구분했지만, 서현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 희사는 그저 단 하나의 사랑일 뿐이다.

서현은 잠시 걸음을 멈춰 서서 앞을 걷고 있는 희사를 응시했다. 정갈한 발걸음에 희사의 긴 머리카락이 출렁였다. 햇빛을 머금은 흑발은 마치 짙은 밤하늘을 수놓는 강 같았다.

“벌써 삼일이 됐다. 네가 없던 반년의 시간이 영원 같았는데, 이 삼일의 시간은 이리도 빠르게 흘렀다. 나는 또 어찌 너를 기다리지…….”

희사는 자신의 뒤에 서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서현을 봤다.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희사는 서현의 중얼거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희사는 다 돌려면 아직 절반이나 남은 정원을 죽 훑었다. 어느새 나타난 해훈이 희사의 눈앞에 떡하니 섰다. 희사는 해훈의 눈을 대하기가 부담스러웠고 불편했다. 아마도 그 감정의 정체는 미안함이었다. 희사는 해훈에게 왜 이토록 미안한 마음이 생기는지 이상했다. 이제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자신의 것 같지가 않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어차피 너는 희사와 계속 이곳에 머무를 것이 아닌가?”

조금 성이 난 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현은 환진에 돌아가면 일단 해훈과 희사를 동시에 불러들일 계책부터 강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의미도 담지 않고 봤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나보군.”

“마음에 걸리는 것이야 수도 없지 많지.”

서현이 해훈의 앞에 섰다. 반년 전만해도 해훈의 키가 서현보다는 두 마디가 더 컸었는데, 서현도 뒤쳐질세라 키가 많이 자라있었다. 희사는 서로 비슷한 위치에서 시선을 맞추는 서현과 해훈을 보며 그들의 성장에 신기해했다. 지금 서현과 해훈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희사 역시 키가 자라긴 했어도 여전히 작긴 작다 라고. 희사는 무언의 눈빛에서 그 말을 읽었다. 저 둘이 나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큰 것이지 오히려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암묵적인 언어로 눈빛을 주고받던 무리에, 불현 듯 나타난 현극까지 가세하자 서로 키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그들보다 머리통 하나 작은 희사만 빼고.

“즐거운 시간들 보내셨습니까?”

오늘따라 현극의 양 어깨에 놓인 뱀들이 더욱 교활해 보였다. 서현은 현극의 얼굴에서 전과는 다른 살의를 느꼈다. 그것은 해훈도 마찬가지였다. 서현과 해훈은 둘 다 검집에 손을 댄 채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희사, 그대는 계속 이 곳에 남아 있을 텐가?”

“현극님께서 빠르게 이야기를 해줄수록 그 기간은 짧아지겠죠.”

“그렇다면 남아있겠다고 말하는 것이지?”

희사는 재차 묻는 현극에게 의아해했다. 희사는 입 열기도 귀찮아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수십, 아니 수백의 규칙적인 뜀박질 소리가 들렸다. 희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뜀박질 소리만 우렁찰 뿐 주변은 인적 없이 한가로웠다. 희사는 이 근방에서 황실 수비병들을 교육하나 싶었다. 허나 그 착각도 잠시였다. 정원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무장된 황실 수비병을 보고 희사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똑같은 발걸음으로 정원을 가득 수놓은 꽃들을 무참히 밟고 진입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나비가 그들의 발에 무참히 짓이겨졌다.

“이. 이게 무슨?”

희사는 자신이 현극에게 해주었던 답과 지금 이 상황에 무슨 연관관계가 있나 싶었다. 수백의 병사들은 어느새 서현과 해훈, 그리고 희사를 둘러쌌다. 서현과 해훈은 좀 전부터 검을 뽑아 든 채였다. 수백 병사들의 쩌렁쩌렁한 기합 소리에 귀가 찡했다.

“서현님, 저는 삼일의 시간을 드렸습니다. 희사를 설득시킬 시간 말입니다. 헌데도 희사는 이곳에 있는 것을 택했군요.”

“하, 희사가 나를 따라 선다 했을지라도 과연 우리를 놓아줬을까?”

“예, 아마도 놓아주고 다른 방도를 찾았을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희사는 서현과 현극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랐다.

“설득이라니?”

“희사, 내가 서현님께 한 가지 제안을 했지. 아마도 그 제안을 서현님께서는 쉬이 여기셨던 모양이다. 목숨이 결정될 귀중한 사안이라는 것을 모른 채.”

“대, 대체 무슨 말을?”

희사는 점점 좁혀오는 포위망에서 눈을 부릅떴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친히 서현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셨으니 기회를 드리고 싶었지. 삼일내로 너를 설득해 환진으로 데리고 간다면 나는 너를 놓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넌 이곳에 남기를 원했지. 서현은 설득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설득이 성공하지 못할 시에 나는 이들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현극의 장난스러움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희사는 현극의 뒤로 꿈틀거리는 뱀의 형상을 목격했다. 그것은 꿈에서 본 가택의 그것과 한 치의 다름이 없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뱀의 형상은 곧 자취를 감췄다. 헛것을 봤다고 치기에는 너무 사실적이었다. 

“희사, 나는 네가 서현을 선택할 줄 알았다.”

“왜?”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도리어 반문하는 현극이 희사를 바라보며 오른손을 들었다. 현극이 내민 손을 앞으로 가르자 병사들이 둥그렇게 길을 비켜섰다. 그 안으로 서현의 근위대들과 흑의대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이미 병사들과 한참을 다퉜는지 죽은 자들도 있었고,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하는 자들도 다수 있었다. 그 안에서 감인령은 바닥에 박은 검은 쥔 채 꿇은 무릎으로 상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현극 네 거짓말이 훤히 보이는군.”

“거짓?”

서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이를 갈았다.

“이미 저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희사가 나를 선택했다면 우리를 쉬이 보내주었겠다고?”

“아, 그건 내게 예지력이 있어서 말이지. 희사의 선택을 이미 예상했었다고 하면 변명이 되려나?”

희사는 낮게 가라앉은 현극이 음성에 소름이 돋았다. 서현의 말이 맞았다. 아마도 현극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던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현극이 무엇 때문에 서현과 해훈을 해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환진의 자들이 싫어서 벌인 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무모했다. 병사들의 검이 순식간에 위로 들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자들에게 병사들의 검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수십, 수백 개의 검들이 흑의대와 서현의 근위대를 난자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일어서서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검들을 막아냈다. 희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서현과 해훈도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빠른 속도로 둘러싼 원을 좁히던 병사들을 베어내자 더 두터운 포위망이 생겼다. 랑쿤의 병사들은 두 개의 원 모양으로 포위망을 나눴다. 병사들이 만든 각각의 원 안에 희사들의 무리와 흑의대들의 무리를 따로 분리시켰다. 금세 진열을 정비하는 병사들의 모습에, 현극이 몇 번이고 그들에게 이런 상황을 연습을 시켰던 것으로 생각됐다. 다른 포위망에 가려진 흑의대들과 근위대들의 무참한 비명소리만 들릴 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현과 해훈은 둥근 벽처럼 자신들을 둘러싼 병사들과 검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정렬된 벽은 너무도 견고해 쉽게 부서지는 일이 없었다. 그 때 규칙적인 수십의 걸음소리가 들리며 희사가 서 있던 쪽의 공간이 쫙 벌어졌다. 인간 벽이나 마찬가지였던 원에서 잠시의 구멍이 생긴 것이다. 현극이 그 틈을 타 희사를 끌어냈다. 목덜미를 잡힌 희사가 소리를 질렀지만 서현과 해훈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희사를 빼낸 길이 다시 견고하게 닫혔다. 서현과 해훈은 한참동안이나 검을 주고받다, 문득 뒤에 있을 희사의 안전이 걱정돼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견고한 인간 벽만 있고 희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서현이 주위를 두르며, 현극이 있는 정자로 고개를 올린 순간이었다. 서현의 어깨에 정자에서부터 날아온 화살이 박혔다. 정자 위에서 활을 들고 있는 현극이 웃었다. 그의 품에는 발버둥을 치는 희사까지 안겨있었다.

“나는 활을 잘 쏘지 못하지. 그러니 가까운 거리에서 쏜 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

서현은 오른쪽 어깨에 꽂힌 화살 때문에 쥐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바꿔 잡았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왜!”

“지금 내게 이유를 물어? 분명 네가 선택한 일이다. 네 선택에 의해서 저들이 저렇게 되는 거다.”

희사는 병사들을 상대하는 서현과 해훈을 보며 몸을 달달달 떨었다. 서현과 해훈이 저대로 죽으면 현세로 돌아가는 방도 따윈 아무런 소용도 없어지는 것이다. 희사는 현극을 따라 나온 자신에 대해 처음으로 크나큰 후회를 했다. 정자에 붙잡힌 희사는 시선이 높아져 병사들이 만든 두 개의 원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확연하게 불 수 있었다. 희사는 아직 살아남은 서현의 근위대 한 명과 흑의대의 감인령. 그리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흑의대 두 명을 지켜봤다. 붉게 충혈되어 버린 희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봐라. 저들은 혼자서도 백 명의 힘을 발휘하는데, 랑쿤의 황궁에는 저리 훌륭한 무사들이 없지. 죽이기엔 아깝지만 별수 있겠는가?” 

현극은 남은 흑의대와 근위대에게 박수를 쳤다. 수적 열세에 몰린 그들은 목숨의 위협보다 체력이 고갈되어가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서현과 해훈은 찢겨진 몸을 이끌며 차라리 희사를 현극이 데려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선 지켜줄래야 지켜줄 수도 없으니 말이다. 

현극은 희사의 선택에 의해 이들이 죽는 것이라 말했다. 희사는 자신이 무슨 잘못된 선택을 했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죄책감이 몰려왔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흐느끼는 희사에게 현극이 말했다.

“희사, 네 선택은 옳았다. 바로 내가 원한 선택지였지. 하지만 내 뱀이 말하더군. 너는 서현을 선택할 것이라고. 역시 뱀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나? 틀리는 것이 이렇게 많아서야 원.”

“뱀?”

“그렇다, 뱀.”

현극은 더는 말해줄 여유 따위는 없다는 듯 정자를 내려가 직접 아수라장의 싸움 속으로 뛰어들었다. 현극 대신 희사를 붙든 것은 익숙한 경비 두 명이었다. 현극은 아직도 버티고 있는 감인령에게 달려들었다. 랑쿤에서 온 감인령지만 현극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별로 없다. 현극이 어릴 적에나 흑영을 따라 황궁에 찾았을 때 본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감인령이 황실 수비대 교관으로 있었을 때는 현극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감인령은 아래부터 사지를 찢을 기세로 올라오는 현극의 검을 막았다. 첫 수가 막히자 현극은 손목을 위로 향하게 해 검날을 뒤집었다. 감인령은 그대로 쏜살같이 밀려들어오는 현극의 검을 뒤늦게 쳐냈다. 감인령의 갈비뼈 사이를 뚫고 지나간 현극의 검이 옆구리를 찢으며 빠져나왔다. 덜렁거리는 살점 안으로 감인령의 하얀 갈비뼈가 드러났다. 현극은 소문에 비해 감인령의 실력이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나이가 가장 무서운 법이지.”

현극은 이 정도 수준이라면 시간을 길게 끌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감인령의 목줄기를 향해 검을 내리꽂으려는 찰나, 보통의 검의 3분지 2쯤 되는 크기의 검이 날아왔다. 회전을 그리며 날아오는 그 검은 현극의 손등을 내려쳤다. 일자로 뻗지 않고 초승달처럼 휘어진 검이, 여전히 회전하며 주인을 찾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현극은 그 검의 주인을 노려봤다. 해훈이었다. 해훈의 나머지 한 손에는 현극과 같은 보통 길이의 검이 들려있었다. 해훈은 꽤나 허물어진 인간 벽의 아수라장을 헤치고 현극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체력이 많이 떨어져있던 터라 현극을 내려찍는 검에는 큰 힘이 실려 있지 못했다. 현극이 여유롭게 정수리 위의 검을 막았다. 

왼 주먹을 쥐어 해훈의 명치를 가격하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해훈의 몸이 밀려났다. 현극이 왼 주먹을 날릴 때 그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해훈이 현극의 오른쪽 팔을 공격했다. 현극은 자신의 오른 팔뚝에 박힌 초승달 모양의 검을 살폈다. 자칫했으면 뼈 깊숙이 꽂힐 뻔했다. 

쌍수(雙手)라. 흑의대의 젊은 수장이 쌍수를 사용한다는 것은 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훈이 양손에 검을 쥐는 일은 거의 드물다시피 했다. 해훈이 동시에 두 개의 검을 빼든 것은, 환진의 시골 지방 현주린의 도적떼를 처리한 일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때는 지금과 같이 열세한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숫자적으론 열세하긴 했지만, 지금과는 다르게 흑의대의 모든 무사들이 살아남았었다. 그랬던 흑의대는 이제 감인령 하나만이 간신히 숨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대단하군. 그리 찢기고도 이런 힘이 남아있다니.”

“떠들 시간이 있으면 한 번이라도 더 덤벼라.”

해훈의 뒤로 병사가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해훈은 검 손잡이만을 돌려 잡아, 뒤에서 공격하는 자의 뱃가죽을 뚫었다. 장기가 찢겨져 나가자 병사의 입 밖으로 피가 역류했다. 해훈은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검을 빼내어 손잡이를 다시 원래의 앞으로 돌려 잡았다. 축축하게 젖은 검날에서 울음이 일었다. 해훈이 성큼성큼 걸어 현극의 오른쪽 팔에 꽂힌 자신의 검을 뽑아냈다. 휘어진 검은 일자로 뻗은 검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낸다. 검이 뽑히자마자 현극의 오른쪽 팔뚝에서 피가 흘러넘쳤다. 잠시의 여유를 틈타 해훈이 정자에 붙잡힌 희사를 올려봤다.

울지 마라,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 그렇게 울지 마라. 

해훈이 희사에게 말했다. 어차피 들리지 않을 음성이다. 해훈은 그저 쓰게 웃었다. 현극은 한눈 판 해훈을 향해 검을 날렸다. 해훈은 공격해오는 현극의 검을 막아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훈의 검은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해훈을 향해 오던 현극의 검은,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기어이 감인령의 목덜미를 뚫고 말았다. 감인령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해훈의 눈에서 괴로움이 스쳐갔다.

“제기랄! 이 더러운 자식!”

“더러워? 누가? 더럽다는 건 내 뒤에서 칼을 박아놓을 준비를 하고 있던 이런 노인네를 가리키는 거다!”

해훈은 감인령의 몸에서 눈을 거두지 못했다. 시체라도 거둬가겠다. 해훈은 한 손으로 현극의 검을 막아내며 감인령에게 다가갔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무수한 검날을 막으며 감인령을 안아들었다. 혼자 서 있기도 힘든 판국에 감인령을 지키기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일부러 목구멍을 빗겨서 뚫어 버렸기에 감인령의 고통스런 생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감인령은 털렁거리며 해훈에게 안겨 피 끓는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해훈은 정신없이 자신의 앞을 막는 자들을 베어냈다.

“다, 다행…다행입니다.”

“조용히 해라!”

“쿠…… 이 랑쿤에서 죽는 것이. 허허.” 

“조용히 하래도! 넌 죽지 않는다.”

“이제야, 이제야… 쉬겠… 군요.”

해훈은 감인령의 몸을 세게 껴안았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전신을 장악했다. 으아아아아! 해훈은 이미 죽은 감인령을 내려놓고 닥치는 대로 덤비는 이들을 베기 시작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이 뒤섞인 피가 해훈의 온몸을 장식했다. 핏덩이가 검붉은 옷에 달라붙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그중엔 해훈의 몸에서 나온 것들도 섞여있었다. 

이제 남아서 병사들을 상대하는 자는 서현과 해훈 둘뿐이었다. 좀 전까지 살아있던 흑의대 몇 명도, 감인령도. 그리고 서현의 근위대 한 명도 전부 시체로 변했다. 단 몇 명을 죽이는데 랑쿤의 병사들은 수백이 죽어나갔다. 개중엔 피칠갑이 된 서현과 해훈에게 겁을 먹어 뒷걸음질 치는 자도 있었다. 현극은 어차피 저들의 목숨을 일개 병사들에게 내어 줄 생각은 없었다. 해훈과 검을 몇 번 주고받았던 현극이 다시 희사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궁녀들이 다급하게 나와 다친 현극의 팔뚝을 만졌다. 현극은 신경질적으로 그들을 쳐냈다.

“내가 지시하기 전까진 함부로 손대지 마라.”

피가 아직도 철철 흐르고 있는데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희사는 경비 둘에게 붙들려서 현극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그런 눈빛도 할 줄 아는군. 얇은 발톱만 세운 고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저들을 죽여서 당신이게 이득이 되는 것이 뭐야!”

“내가 말했지. 네게서 얻을 것이 있다고. 그걸 얻기 위해서다.”

희사는 너무 울어서 시야가 가려진 눈으로 서현과 해훈을 찾았다. 그들은 그제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검을 바닥에 박고 최대한 버티려 했으나 탈진 상태로 쓰러져 거센 숨만 쉬었다. 그런 서현의 등위로 어린 병사하나가 검을 휘둘렀다. 희사는 서현의 이름을 불렀고, 현극은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당겨 그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활 실력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소리는 겸손함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이런. 저래선 안 되지.”

현극이 오른손을 높이 들자 뿔피리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남은 병사들이 다시 발걸음을 맞추며 주저앉은 서현과 해훈의 뒤로 정렬했다. 마치 현극에게 공물을 바치는 듯한 모양새였다. 틀어 올렸던 해훈의 머리는 이미 전부 풀어헤쳐졌고, 입고 있던 옷들도 하나할 것 없이 붉게 염색되어 어느 쪽이 서현과 해훈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현극이 희사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기분이 어떤가?”

“기분? 지금 내게 기분을 물어?”

현극의 손이 올라가고 짝소리가 나도록 희사의 뺨이 돌아갔다. 충격으로 희사의 터진 입안에서 피가 흘렀다. 

“소리치지 마. 내가 물은 것에 대답만 해.”

“네까짓 게 이 기분을 말한다고 알아듣겠어?”

“과연 그럴까?”

현극이 희사를 데리고 정자를 내려갔다. 희사는 피칠갑이 된 서현과 해훈을 보자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현극이 검을 들어 서현의 어깻죽지에 박아 넣었다. 화살까지 꽂혀있는 상태에 상처를 더했다. 그럼에도 서현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받은 건 두 배로 돌려줘야하는 성미라서 미안하군.”

말과는 다르게 다른 쪽 어깨에도 한 차례 더 검을 박아 넣었다. 희사가 비명을 질렀다. 서현은 그 소리에 피칠갑이 되어서도 낄낄 웃었다. 별 수 없는 놈이다. 이 상태에서도 희사가 자신을 위해주는 것이 행복하다니. 서현이 웃자 현극이 의아해했다. 

“웃어? 재미있나? 내가 지금 너를 죽이려 하는데?”

“하지 마, 현극! 그러지 마. 제발!”

“지금 네 기분이 어떤가? 희사, 답하지 않으면 저 자의 사지를 하나씩 잘라 놓겠다.”

“끔찍해! 너무 끔찍해서 어디부터 어떻게 고쳐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그게 다야?”

“가슴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제발 그러니 이들을 죽이려 하지 마.”

“네 기분이 어떨 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이해하지 못할 거란 그런 잔인한 소리는 하지 마.”

현극이 희사의 몸을 끌어안으며 향내를 맡았다. 현극은 같은 향으로 씻기기를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희사의 흐느낌이 현극의 손에 잡히자 더없이 안쓰러워졌다. 현극은 마치 희사가 또 하나의 자신이라 생각됐다.

“대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거듭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 때문이라고.”

“당신이 원하는 것이 대체 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면 들어줄 테니! 어서 말해!”

“아직은 아니다. 너무 이르지. 어이, 태자님, 아니 서현. 네 말이 맞다. 나는 방도를 알고 있으나 이야기를 해 줄 생각 따윈 없었지.”

희사는 현극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서현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방도는 아주 극단적인 것이라서 말이야.”

놀란 것도 잠시 희사는 그런 것 따위는 이제 와서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같이 돌아가야 할 저들이 죽게 생긴 것이다.

“난, 그 방도란 것을 알 것 같군.”

해훈이 잔뜩 쉬어버린 소리를 냈다.

“단순히 우리를 죽여서 보내줄 생각이었군.”

“대단해. 그대들은 참으로 현명하다. 후생에서 왔으니 그대들이 다시 후생으로 돌아갈 방법은 하나지. 바로 죽는 것. 이곳에서 죽으면 그대들은 다시 후생이라 부르는 현세에서 태어나겠지 않나?”

희사는 멍하니 숨이 빠져나가는 웃음을 내뱉었다. 

그게 방도였다고? 우리가 죽는 것이? 그것을 위해 내가 현극을 따라왔고 이들이 이렇게 됐단 말이야!

“나도 이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대들은 나를 너무 우습게 봤군. 단 저 인원으로 내 황실을 방문하다니 말이야. 아니, 내가 이런 일을 벌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겠지. 감히 랑쿤 따위가 환진의 황족들을 이렇게 죽이려는 것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나?”

말을 마친 현극이 검을 들어 서현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희사는 그 검을 맨손으로 부여잡았다. 손바닥이 전부 검의 자상으로 쓸려나갔다.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으나 현극이 더는 찔러 넣지 못하게 그의 검을 움켜잡았다. 현극이 희사의 머리채를 들어 올려 그대로 바닥에 내리 찍었다. 희사는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 서현이 가슴에 박힌 검날을 잡았다.

“제발, 제발.”

희사가 하염없이 울었다. 서현이 죽는 것을, 그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는 것을 꿈꾼 날도 많았다. 그러면 얼마나 통쾌할까 상상을 한 날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희사는 서현의 가슴에 박힌 검에, 자신이 찔리는 것과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그 통증은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며 현극에게 애원을 하도록 만들었다. 

“제발…….”

희사가 현극에게 빌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도 모른 채, 검날에 의해 손바닥이 전부 헤질 지경이었다. 현극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현의 가슴에 박힌 검을 그대로 밀어 넣었다. 

“아아아아아!”

희사의 비명이 정원을 뒤흔들었다. 서현의 입에서 거품 같은 핏물이 흘렀다. 서현의 심장을 관통한 검은 다시 희사의 손에 새로운 상처를 내며 현극의 품으로 돌아갔다. 희사가 주저앉아 뒤로 쓰러진 서현의 몸을 움켜쥐었다. 바닥에 종잇조각같이 쓰러진 서현의 입에서 크륵거리는 신음만 되돌아왔다. 

“죽지 마, 이대로 서현 네가 죽어선 안 돼! 제발, 이렇게 죽어선 안 돼!”

희사의 외침은 서현에게 들리지 않았다. 서현은 그저 웃었다. 떨리는 희사의 몸의 감촉에서 그가 울고 있다는 것만 알아차렸다. 서현은 그 울음마저도 이제 자신의 것이 된 것 같았다. 

아,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온통 나를 향한 너의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서현은 죽음의 문턱에서 행복함을 맛봤다. 하지만 불행히도 조금씩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손을 들어 희사의 얼굴을 만져주고 싶은데 눈앞이 새까맸다. 그렇게 서현에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찾아들었다. 현극은 해훈의 차례라고 알리듯 검을 그의 목을 향해 겨눴다. 

“그댄 황자였고 흑의대의 수장이었지. 이젠 흑의대도 사라졌으니 황자의 자리만이 남았군.”

희사는 서현을 끌어안은 채로 해훈을 봤다. 희사의 엉망이 된 얼굴을 보며 해훈이 작게 웃었다. 나를 위해서는 절대 울지 마라. 나는 네 웃는 모습만이 보고 싶다.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희사는 모든 장기가 녹아 없어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도 해훈의 눈엔 그저 예쁘기만 했다.  

“현극. 제발. 제발.”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듣는 것만큼 지겨운 것은 없지!”

현극은 검을 들어 해훈이 머리를 후려갈겼다. 희사는 굳은 채로 털썩 쓰러진 해훈을 내려 봤다. 헌데 현극이 내려친 해훈의 머리엔 검의 자상이 전무했다. 희사는 천천히 현극을 올려다봤다. 현극은 희사를 향해 검날이 아닌 검등을 흔들어주었다. 마치 자비라도 베풀 듯.

“한 사람은 살려야 환진에서 알게 되겠지. 안 그런가?”

현극이 서현의 품에 매달린 희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현극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들의 시체를 환진의 황궁으로 보내도록 하라. 물론 랑쿤에서 보낸 것은 아니다. 북방을 넘어가던 중 도적을 만났다거나 아니면 황자들을 죽이려한 음모에 휘말린 것으로 알게 하라.”

현극은 눈앞에서 벌어진 참상에 정자의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유적에게 지시했다. 유적은 두려웠다. 환진의 태자와 황자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랑쿤 황궁내부의 입만 잘 막아놓으면 소문이 빠져나갈 일은 없었다. 유적은 서둘러 제정신을 챙기며 황제의 정원을 정리시켰다. 시체는 병사들을 시켜 밖으로 다 빼놓고, 서현과 해훈의 시체는 유적이 손수 이동시켰다. 수십 명의 자들이 재빠르게 황제의 정원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피칠갑이 된 바닥부터 시작해 출처를 알 수 없는 피린내가 이상했지만, 궁금증에 토를 다는 일은 없었다. 황실은 부모가 죽어나가도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야하는 곳이다. 흙발로 짓밟힌 꽃밭부터 시작해, 핏물로 더럽혀진 연못들은 순식간에 처음과 다름없이 평온한 장소로 돌변했다. 

유적은 정원의 정리가 끝나자마자 믿을 만한 간자 하나를 불렀다. 마차에 태운 서현과 해훈의 시체를 환진의 황성 내에 버리고 오라 지시했다. 간자는 두 남자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몰랐다. 아마도 간자가 일을 마치고 무사히 랑쿤으로 귀환하는 순간 이 일이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 의뢰가 될 테지만 유적은 내색하지 않았다. 유적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간자에게 복귀하라 일렀다. 간자는 마차에 태운 두 구의 시체를 슬쩍 확인하곤 마차의 문을 굳게 잠갔다. 간자는 의심받을 일 없는 가난한 상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변장했다. 간자는 은화 한 닙을 쥐어준 유적에게 크게 절을 하고 서둘러 마차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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