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랑쿤을 향하는 태자와 황자의 행렬은 간소 그 자체였다. 현극에게 바칠 공물도 없었으며, 외려 튼튼한 장신들로 이루어진 무사들만 바글거렸다. 축하가 아닌 협박을 가하기 위해 향하는 모양새였다. 말 위의 올라탄 서현의 머리위로 강한 햇살이 내리쳤다. 흑의대와 해훈은 서현보다 조금 앞서 가는 중이었다. 뜨거운 바람이 서현의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갔다. 그 바람은 북방에 가까워 올수록 시원하게 변했다. 땀조차도 나지 않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서현은 그제야 앞만 보며 달리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규성주의 시내로 향하는 길에 백성들이 잔뜩 몰려들어있었다. 북방의 연례행사인 하계축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높은 지형 덕에 4계절 내내 얼어붙은 추위가 계속되지만 여름의 정점에 이르면 북방역시도 포근한 봄날과 같이 변한다. 북방의 백성들은 그 좋은 계절을 그냥 보낼 수만은 없어, 한 해에 한 번 이맘때 큰 규모의 축제를 열었다. 서현은 북방의 축제가 꽤나 볼 것이 많고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전해 들었었지만, 들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서현이 북방에 갇혀 있을 규태휘를 생각하며 비웃음으로 머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네 성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되는 날이 곧 올 것이다.
서현은 희사를 놓쳤던 설장산의 깊은 산길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사황은 서현이 말을 타고 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었지만, 서현은 마차를 타고 느긋하고 편하게 랑쿤을 방문할 생각이 없었기에 일말의 재고도 없이 그의 의견을 기각했다. 황실의 권위가 떨어진다니 어쨌다니 떠들어대던 노인네가 영 마뜩찮았다. 화려한 금박이 장식 된 마차를 타고가면 위신이 서고, 말을 타고 가면 위신이 떨어진다니. 말이 될 법한 말인가?
서현은 흑의대가 먼저 터놓은 지름길을 따라 달렸다. 그 날도 이 길을 알았다면 그토록 쉽게 희사를 놓치지 않았을 텐데. 어차피 후회해봐야 시간만 낭비였다.
흑의대는 오랜만인 랑쿤으로의 귀환에 전에 없이 흥분해 있었다. 그들이 환진으로 넘어온 것도 십 년이 더 넘었다. 아무리 황후에 의해 망가지는 랑쿤이라도 모국의 대한 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새로 즉위한 현극이란 황제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니, 막연한 기대를 품을 수밖에. 모든 일에 무덤덤했던 감인령 역시 표정에 떠오른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산꼭대기에 이를수록 여름이 순식간에 지나고 빠르게 겨울로 돌변했다. 저마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솟아오를 정도였다.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설장산의 풍경은 그들에게 기이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일 년 내내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세찬 바람에 흔들리며 울어댔다. 앞서 달리는 감인령이 검을 들어 잔가지를 쳐냈다. 덕분에 뒤에 오는 이들은 진로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따라갈 올 수 있었다. 정상을 지나 내려가는 일만 남았을 때 모든 이들이 말의 속도를 줄여 말이 천천히 걷도록 했다. 내려가기 전 잠시의 휴식이라도 취하는 모양새였다. 말들도 끝이 없는 오르막길이 끝나자 한숨을 돌렸다.
“신기하군요.”
감인령이 해훈에게 말을 건넸다. 타닥타닥, 바닥에 떨어진 마른 나뭇가지들이 발말 굽에 으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정말 오랜만의 방문인데도 랑쿤으로 향하는 길을 몸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훈은 다시금 감인령이 환진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뼛속까지 랑쿤의 백성이었다. 다만 청영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건너온 것뿐이었다.
“우리는 이제 랑쿤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쿤의 존재가 머무르는 곳에 흑의대가 있다. 반년동안 그 금기와도 같은 것을 어겼지만 감인령은 이제 희사를 찾으러 가기에 앞으로는 반드시 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디에 머무르든 무슨 상관이 있나?”
“하하, 그건 그렇습니다. 희사님이 계시는 곳이 저희가 있을 곳이니 말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해훈은 감인령을 지나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길을 막은 뱀들이 아직도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현극의 더러운 술수 때문에 자신과 희사가 만나지 못한 것이라면 현극을 가만두지 않겠다 여겼다.
랑쿤의 첫 마을에 도착한 이후 그들은 허름한 여관이든 귀족들의 전용 여관이든 상관없이 이틀에 한 번으로 단 두 시진만을 머물렀고, 그 후로는 쉬는 법이 없이 랑쿤 황성을 향해 달렸다. 힘들법한데도 지친 기색은 누구에게도 비쳐지지 않았다.
현극이 랑쿤의 황제로 즉위한지 한 달이 조금 되지 않았다. 전 황제의 장례는 전례 없이 단 삼일 만에 끝났었고, 현극은 나흘째 되던 날 즉위식을 올렸다. 즉위식은 황성내의 모든 사람과 각지에서 올라온 자들을 끌어 모아 열흘을 꼭 채워 즐기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리는 것이 관례 것만, 현극은 이 역시도 단 이틀 만에 끝냈다. 백성들은 새로 등극한 황제가 검소하고 고요한 자라 여겼다. 귀족들은 이 모든 것이 현극의 변덕에 의해 치러진 것이라 생각했고.
황제의 유례없는 짧은 장례, 그리고 그것보다 더 간소한 즉위식, 귀족들과 중신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올 법도 했다. 하지만 현극의 뒤에는 쿤이 있었다. 쿤의 말이 곧 신의 말. 현극은 쿤의 핑계를 대며 모든 일을 일사천리에 처리했다. 정작 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랑쿤의 곳곳에는 쿤의 대한 일화가 가득했다. 신의 귀환에 랑쿤의 전역은 이미 흥분 상태였다. 쿤을 보기 위해 지방의 제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올라왔으며, 그 때마다 실망감과 경외감을 맛봤다. 저런 작고 여린 청년이 쿤이라니, 물론 쿤이 새파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더욱 신비감은 조성됐다. 개중엔 희사에게 앞으로의 삶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자들도 있었다. 희사는 그 때마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현극은 그런 그들을 향해 “그대들은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이 옳겠군.”하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흑의대와 서현들은 랑쿤의 황실에 가까워 올수록 쿤에 대한 소문이 생각보다 더 무성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백성들이 떠드는 말의 절반이상이 온통 쿤에 대한 것이었다. 쿤이란 자가 지나치게 아름다워 황제가 궁에서 출타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서현은 자신의 성질을 건드린 그 자의 입을 찢고 싶었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냈다.
엿새도 안 되는 날에 랑쿤의 황궁에 도착한 서현과 해훈은 성문 앞에서 출입을 통제 당했다. 물론 서현과 해훈 역시 수비병들이 성문을 쉽게 열어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환진의 태자와 황자라고 밝힌 둘을 보며 퉷하고 수비병이 침을 뱉었다.
“그대들이 환진의 황족이라는 것을 어찌 믿겠는가?”
성문을 지키는 수비병이 비웃으며 말했다. 수비병의 앞에선 두 자는 닮았으되 서로 다른 매력을 풍기는 미남자였다. 얼굴만 보면 황족이라는 것을 믿겠으나, 그들이 하고 온 행색에선 황족의 황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국의 황족이 마차가 아닌 말을 직접 끌고 온 것은 이자들이 처음이었다. 하물며 지방 귀족들도 허접한 마차라도 타고 온다.
“그대들의 황제에게 알려라. 이것을 전해주면 알 것이다.”
서현은 뒤에 선 자신의 근위대가 건넨 서찰을 받아서 수비병에게 내밀었다. 그 서찰을 받아들기 전 랑쿤의 수비병이 비웃으며 그것을 잡는 척하면서 떨어뜨렸다. 서현이 그 모습을 마주보며 웃어주었다. 수비병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서현의 미모가 너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서현의 날카로운 검이 수비병의 뱃가죽을 그대로 통과했기 때문이다. 서현이 검을 빼내자 피가 솟구쳐 서현의 얼굴에 붉게 수를 놨다. 서현이 눈을 깜빡이며 속눈썹에 내려앉은 핏물을 닦아치웠다.
“제길, 이 놈은 피마저도 추잡하군.”
해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현이 수비병을 죽인 이유를 짐작했다. 차라리 소란스러움을 만들어내 손쉽게 황궁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수비병 한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황실 수비대 전원이 서현들을 에워쌌다. 서현은 검을 내민 그들에게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검집에 검을 다시 넣었다.
“뭐하는 놈들이냐!”
“환진의 태자라고 이마에 붙이고 다녀야 하는가? 슬슬 말하기도 짜증나는군.”
서현에게 소리를 질렀던 놈을 추축으로 수비대들이 뒤로 서서히 물러섰다. 검을 꺼내들어 싸운다면 숫자적으론 수비대가 우수하지만, 결과적으론 자신들이 질 것이라는 본능적인 감각이 정신을 일깨웠다. 그 상태로 이도저도 못한 채 대치하자, 성 밖의 소란스러움을 접해 들은 황성 수비대장이 뛰쳐나왔다. 출렁대는 뱃살에 끈이 풀려버린 하의. 어디서 여자와 밀회의 시간을 즐기다 온 듯 시큼한 정액 냄새가 풀풀 풍겼다.
“나는 수비대장 하옹이요.”
바지를 추스르지도 않은 채 자신을 수비대장이라고 소개한 하옹이 성 밖에 널브러진 한 구의 시체를 보고 콧잔등을 찌푸렸다.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과연 뱃살이 그렇게 늘어진 네가 수비대장이라 하였다. 헌데 내 정체에 대해서는 이들이 쉬이 믿지 않는군. 그 뚱뚱한 몸으로 수비대장이라 지칭하는 너와, 환진의 태자라 지칭하는 나. 누구의 말이 진실일 것 같나?”
하옹은 자신의 육덕한 몸을 비꼬는 서현을 보며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기세당당한 서현의 모습에, 그리고 그자 뒤에선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무사들 덕에 자신을 환진의 태자라 지칭한 서현이 가짜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쉽게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하오, 일단은 그대의 신분을 밝히기 전까진 연행을 해야겠소.”
“연행? 이 나를?”
서현이 웃자 서현의 직속근위대가 순식간에 검을 뽑아들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오면 전멸을 시켜버리겠다는 의지가 강력했다.
“전하, 공교롭지만 감히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해훈의 뒤에 섰던 감인령이 허리를 조아리며 튀어나왔다. 서현은 감인령을 한차례 훑었다. 해훈을 아끼는 노장이 아니던가? 감인령은 원래 랑쿤에서 온 자였다. 서현은 감인령을 제지하지 않았다.
“가, 감인령님?!”
“그래, 오랜만이다. 하옹.”
서현과 해훈의 한참 뒤에 섰던 감인령이 모습을 드러내자 하옹이 반색을 했다. 아는 사이였던가? 서현과 해훈이 그럼에도 무심한 눈으로 둘을 훑었다.
“그 사이 많이 후덕해졌군.”
“허허, 그 사이라니요, 십 년이 훌쩍 넘은 세월입니다. 감인령님의 주름은 지렁이가 저리가라 할 정도입니다.”
하옹은 너스레를 떨며 말하다, 아차 싶은 표정을 했다.
“그렇다면 저기 저분들이 정말 환진 황가의 분들이시란 말입니까? 이런 이런!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하웅이 환진의 태자전하와 황자님을 뵈옵니다!”
하옹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서현과 해훈을 향해 사죄의 뜻을 올렸다. 감인령이 아니었으면 하옹의 목이 달아났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하옹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던 랑쿤 수비대들을 물렸다. 의외로 싱겁게 끝난 대치 상황에 서현이 다소 아쉬운 표정을 자아냈다. 조금 더 난리를 피웠어도 즐거웠을 텐데, 그 재미를 뺏은 감인령을 차갑게 쳐다봤다.
“감히, 제가 나서서 중재를 해보았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얼마든지 달게 벌을 받겠습니다.”
“아니. 그대가 벌을 받을 필요는 없지. 덕분에 편히 정체가 밝혀졌으니 오히려 칭찬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하셨다면 감복할 따름이옵니다.”
“뭐 이런 걸로.”
서현은 웃고 있으되 눈빛만은 매서운채로 감인령에게 답했다.
하옹은 그사이 급히 황실 내부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가장 빠른 말을 탔음에도 물속을 달리는 것처럼 느리게만 느껴졌다. 하옹은 황궁 내실의 입구를 지키는 수비대에게 고함을 쳤다.
“황제폐하께 급히 알려라, 지금 환진에서 태자전하 일행이 도착하셨다!”
수비대는 선 채로 깜빡 졸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화들짝 차렸다. 그들은 잠결에 들은 것이기에 하옹에게 다시 확답을 받으려했다.
“예? 하옹님?”
“쯧쯧, 미련한 것들. 됐다 내가 직접 가겠다.”
수배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옹의 뒤뚱뒤뚱한 뜀박질을 지켜봤다. 그 시각 현극은 황제의 시무관에서 상소를 듣던 중이었다. 물론 그의 옆에는 희사가 앉아있었다. 붉은색 비단의 두루마기를 걸친 현극은 참을 수 없이 지루한 표정이었다. 현극은 고개를 내려 희사를 보다 문득 자신의 어깨를 봤다. 그의 양 어깨에 앉은 두 마리의 뱀이 붉은 실로 놓아진 눈을 번뜩였다. 뱀과 범의 조합이라. 현극은 참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폐하, 폐하!”
급하게 들이닥친 하옹의 무식한 외침에 중신들이 혀를 찼다.
“무엄하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예의도 갖추지도 않고 들어오느냐!”
하옹은 중신의 질책에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 봤다. 어색하게 웃으며 엉덩이까지 흘러내린 바지를 지켜 올렸다. 현극은 하옹의 옷매무새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대는?”
현극이 나른한 목소리로 하옹을 손짓했다.
“예! 폐하, 하옹입니다.”
“아아, 수비대장 중에 그런 이름이 있었지. 무슨 일인가?”
“화, 환진에서 태자님 일행이 도착하셨습니다.”
하옹의 말에 시무실의 그 누구보다 가장 놀란 사람은 희사였다. 중신들이 내는 저마다 각기 다른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다른 생각을 품던 희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극이 그런 희사를 보고 얄팍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만 앉지. 쿤, 그대가 그리 일어서지 않아도 내 친히 맞이 하러 갈 생각이니. 환진은 생각한 것보다 정보력이 부족한가보군. 이제야 찾아오다니 말이다.”
현극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슥하고 비단이 마찰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뱀이 지나가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현극은 자신을 따라서는 희사를 제지했다.
“하옹, 쿤을 거처에 모셔라.”
“네?!”
“쿤을 거처로 모시라 했다. 물론 내 지시 없이는 그를 나오지 못하도록 하라.”
한마디로 쿤을 가두란 소리였다. 하옹은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기에 희사를 붙들었다. 하옹은 자신의 키보다 조금 더 큰 희사를 올려봤다. 꼿꼿이 선 희사의 턱선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음탕질을 했던 추화 계집보다도 고왔다. 희사는 반항이 섞인 눈으로 현극을 노려봤다. 하옹은 그 자리에 서서 미동을 하지 않는 희사를 잡아당겼다. 키는 작았으나 힘은 웬만한 장사보다도 좋은 하옹이다. 희사가 휘청하자 하옹은 크나큰 잘못이라도 한양 고개를 조아렸다.
“쿤님, 가셔야 합니다. 이리 버티시면.”
“알겠습니다.”
희사는 자신이 거부하면 현극이 직접 실력행사를 할 것을 알았다. 어쩌면 애꿎은 하옹에게 화가 튈 수도 있다. 일단은 거처로 이동해서 틈을 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옹은 쉽게 자신의 말을 들어준 희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하옹 역시 범을 믿는 자였다. 과거에 감인령과 하옹이 친분을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흑의대에 소속된 감인령의 뛰어난 무예 덕이었다. 하옹은 감인령보다 아홉 살이 적었다. 범이 황실을 나가기 전까지 감인령은 명장으로 알려진 황실 수비대 교관이었다. 그는 명예와 권력을 가진 장수가 될 수 있었음에도 흑의대 수장의 위치로만 만족했다.
하옹은 일개 수비병에서 시작해 지금은 수비대장직에까지 이르렀다. 보잘 것 없는 수비병이었던 하옹을 가르친 것은 감인령이었다. 하옹은 뛰어난 무예를 자랑하는 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무(武)보단 문(文)에 성격에 가까운 입놀림 꾼이었다. 하옹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도 윗선에게 아첨을 잘 했기 때문이 컸다. 하옹은 쿤의 귀환에 따라 자신의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를 가졌다.
하옹은 본래 인랑산의 출신이다. 그의 부모 역시 범을 따랐고, 인랑산이 불탔을 때 사고에 휘말려 같이 죽어버렸다. 다행히 하옹은 황궁에 있었기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물론 하웅은 인랑산을 불태운 것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범이 사라지고 부모가 죽자 하웅은 그냥 되는대로 막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흑의대에 들어가고픈 욕심도 있었지만, 목표가 사라지니 흘러가는 대로 입만 놀리며 산 것이다. 하물며 오늘 감인령을 보곤 하웅은 찰나의 순간 지금까지의 삶을 깊게 반성을 하였다. 그는 여전히 하웅이 존경했던 모습 그대로의 장수였다. 변한 것은 조금 늙어버린 인상뿐. 하웅은 감인령의 앞에선 밝게 행동했지만, 자신의 모습이 더없이 창피했다. 하웅은 두터운 배를 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하웅과 희사는 황제의 거처 내부에 마련된 희사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웅은 희사의 방을 보고 경악을 품었다. 아무리 선이 곱고 아름다운자라 해도 남자가 아니던가? 쿤은 평범한듯하면서도 아름다웠지만 딱히 얼굴에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아름다움은 쿤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다홍의 일색인 방을 보며 하웅은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놀라했다.
“다, 다홍색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하웅은 조금이라도 쿤과 말을 섞기 위해 쓸데없는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옹은 쿤의 말을 수긍했다. 다홍을 좋아하는 자였다면 의복조차도 화려할 텐데, 쿤이 입고 있는 것은 가슴팍을 여미며 길게 늘어지는 어두운 색의 일상복이었다. 쿤이 화려하게 치장을 한 것을 보았던 때는, 현극이 황제로 즉위하는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금 쿤이 지니고 있는 물건 중에 그나마 화려한 것을 뽑으라면 머리를 고정시킨 나비 머리 장신구가 다였다. 묘령의 여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건만, 쿤에게도 썩 잘 어울렸다.
“환진에서 태자와 황자의 사람들이 왔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하웅은 먼저 말을 걸어준 희사에게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희사는 그 물음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웅은 몇 번 주저하더니 희사의 방문을 닫아주고 그 앞에 섰다. 현극이 보낸 수비병 두 사람이 긴 창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와 하웅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가보셔도 좋습니다. 하웅님.”
“그래, 알겠다.”
하웅은 표정 없이 선 두 남자를 힐끔 보곤 출렁한 뱃살을 올리며 오랜만에 검술을 연마하리라 마음먹었다.
희사는 초조하게 문 앞에 섰다. 문을 잡아당기자 밖에서 잠금 장치를 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희사가 방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틈이라곤 저 문과 뒤에 달린 작은 창 하나가 전부였다. 창의 크기는 어린 아이 한 명 조차도 빠져나가기 힘들 듯해보였다. 희사는 아직 현극에게서 되돌아가기 위한 그 어떤 방도도 듣지 못했다. 방법을 알고 있다는 현극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지만 일단 잡을 지푸라기는 그것뿐이다. 희사는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밖에서 하웅이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십니까, 쿤님.”
“저를 나가게 해주십시오. 황제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어떠한 사정이 생겨도 방에서 내보내지 말라는 폐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강경한 수비병들의 대답에 희사는 문을 등에 대고 주저앉았다. 쿤이란 것이 뭐가 대수인가, 이런 문하나 뚫지 못하는데. 희사는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무기력한 자신을 탓했다.
해훈이 왔다는 것은 달리 말해 자신과의 소통이 막힌 것을 그도 알아차렸다는 소리다. 사실 희사는 해훈보다도 서현의 방문이 더 놀라웠다. 국가의 황족이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는 서찰을 보내 미리 알려야 하는 것이 법도다. 이렇듯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은 예법에 한참이나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랑쿤 황족들의 입장에선 매우 기분이 나쁠 법도 했다. 환진에게 랑쿤의 황실이 얼마나 얕보였으면 이리 언질도 없이 찾아온다는 말인가.
희사는 북방을 떠나던 자신을 애타게 부르던 서현의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이곳에서 반년이 지나는 동안 희사가 생각할 시간은 지나치도록 많았다. 생각이란 것은 하면 할수록 그 양을 늘려가는 특성을 가졌다. 그리고 그 생각의 마지막에는 늘 서현이 있었다. 희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안에 숨겨진 얼굴은 고통스러운 듯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서현은 랑쿤 황실 내부의 국빈 응접실인 성빈관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해훈도 마찬가지였다. 서현의 직속근위대와 흑의대는 다른 곳으로 물린 뒤였다. 현극은 예상보다 빠르게 성빈관에 도착했다. 서현의 기억에 있어 현극은 가벼운 웃음을 머금고 사람들을 홀리는 뱀새끼였다. 드러나지 않도록 꼭꼭 숨겨놓은 현극의 차가운 속내가 서현의 눈에는 그대로 보였다.
“이리 방문해주시다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말투는 공손했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은 불경했다. 환진도 랑쿤도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는 각각의 나라이다. 비록 환진이 랑쿤보다 군사력이나 생활면에서 훨씬 월등했지만, 랑쿤의 황제가 이렇듯 말투에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현극의 경우는 비꼼 쪽에 가까웠다.
현극이 동그란 탁자의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가 마주보는 구도로 앉은 서현과 해훈, 그리고 현극에게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것을 보고 있는 두 시종들은 한겨울의 냉기보다도 더 시린 분위기에 차마 서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태자께서, 아니 이제 황제로 등극하셨으니 그에 맞게 불러드리겠습니다.”
“말씀을 편히 낮추십시오. 태자님.”
“황제께서는 제 것을 강탈해가셨습니다. 친히 되찾으러 왔으니 그를 불러주시겠습니까?”
“강탈? 제가 태자님의 것을 빼앗아 도망치기라도 했단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현극이 능청을 떨며 양 손을 올렸다. 서현은 만면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억지로 지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저 자의 태도가 우습기에 저절로 나타난 것이었다.
“황자님 어디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제가 태자님의 것을 훔쳤습니까?”
현극이 침묵하는 해훈에게 화살을 돌렸다. 해훈은 말없이 현극을 쳐다보기만 했다. 무례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현극은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황자님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억지로 희사를 데려올 수 없었다는 것을요.”
서현은 무슨 소린가 싶어 해훈을 봤다. 해훈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런 이런, 태자님께서는 모르셨나봅니다. 희사와 황자님이 그 어디에서든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희사는 쿤이며 해훈 황자님은 흑의대의 수장이니까요.”
서현이 달싹거리며 입을 작게 벌렸다 닫았다. 그제야 해훈의 행동들이 완벽히 이해가 갔다.
둘이서 어떤 식으로든 소통할 수 있기에 조용히 유악에 처박혀서 시간을 때운 것인가? 서현은 희사와 해훈의 관계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다. 사실 현실적인 서현은 쿤이건 수장이건 아무것도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어야했다.
서현은 생각을 정리하며 미심쩍은 부분을 떠올렸다. 현극의 말대로 희사와 해훈이 소통을 한다면 해훈의 입장에선 서현을 따라올 필요가 없었다. 서현의 눈을 속이기 위해 따라왔다고 해도 이 같은 현극의 발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해훈은 변명도 화도 내지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통은 불가능하다. 아니 불가능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군.”
“무엄하다! 폐하께 존칭을 올리지 못하겠는가!”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던 현극의 최측근이 언성을 높였다. 해훈은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괜찮다. 유적. 황자님과는 이미 친분이 있는 사이이니.”
현극이 그럴 수는 없다는 유적을 밖으로 물렸다. 뿐만 아니라 성빈관 내부에 있던 모든 시종들까지도 밖으로 내몰았다.
“자, 이제 편하게 이야기를 해보실까요? 태자, 황자전하?”
현극이 박수를 치며 이 상황을 반겼다. 서현은 북방을 자주 찾았던 현극을 어떤 식으로든 엮어서 볼모로 받고 싶어 했으나, 그가 황제가 된 이상에는 불가능했다.
“서현님께서는 보아하니 소통에 대해 모르셨다는 제 말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 해훈님께서는 서현님께 거짓을 고했단 말입니까?”
어느새 현극은 직위에 대한 존칭은 사라진 채 적당한 경어만을 붙이고 있었다.
“아니,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내가 그것에 대해 묻지 않았으니 해훈은 거짓을 고할 필요도 없었지.”
“서현님께서는 참으로 마음이 넓으십니다.”
“너와 입씨름 할 시간이 없다. 네가 데려간 희사를 데려와라.”
“희사는 제가 억지로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저를 따라왔습니다. 서현님께서도 보셨을 텐데요, 그가 제 뒤에 매달려 왔다는 사실을.”
현극이 그 때 맞은 화살에 아직도 어깨가 뻐근하다는 듯이 으쓱였다. 서현이 검집을 움켜잡았다. 마음 같아선 현극의 목을 그대로 따버리고 싶었다. 환진이었으면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행했겠지만 이곳은 랑쿤이다. 해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희사가 너를 따라간 것은 맞지만, 그 후에 희사를 숨긴 것은 분명 너다.”
“이런, 이런.”
“내가 희사와 소통하려 했을 때 본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글쎄요.”
“네 어깨에 있는 뱀과 그리고 이 황궁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다른 뱀들이지.”
“역시 흑의대의 수장답게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현극이 다시 한 번 해훈을 향해 박수를 쳤다. 저런 유쾌한 모습조차 꾸밈 중에 하나란 것을 서현과 해훈은 둘 다 알았다. 얼굴은 웃고 있으되 속안의 뱀들을 꿈틀거리는 것이 확연히 보여 역한 기분이 들었다.
“네 놈이 정 내 것을 내놓지 않겠다면 목을 따버리는 수밖에.”
서현의 엄포에 현극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서현님 몸서리 처지게 무섭습니다. 허나 이곳은 환진이 아니라 랑쿤이라는 사실을 되새기시죠. 하물며 희사가 서현님의 것이라니요, 말에 어폐가 있으십니다. 희사는 쿤입니다. 쿤은 랑쿤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희사 역시 랑쿤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말장난이 과하군.”
“아니오.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희사는 본인의 의지로 이곳에 있습니다. 해훈님과의 소통을 방해한 것은 희사의 뜻이 아니었지만, 저도 대비책은 만들어 놔야하지 않겠습니까?”
서현은 정말로 희사가 쿤이고 해훈이 소통한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되지도 않은 사실들이었다. 좀 전부터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은 해훈과 희사만의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생겨나는 끔찍한 감정이었다.
“저는 희사와 어떤 계약을 맺었습니다. 희사가 원하는 것을 제가 가지고 있고, 제가 원하는 것을 희사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대가 원하는 것이 혹시 환진인가? 내게 희사를 내어주는 대신 환진을 달라고 할 텐가?”
현극이 서현의 말에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마치 바닥을 구를 정도의 폭소였다. 서현은 저 웃음을 빠른 시일 내에 찢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하하하,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그렇다면 서현님께서는 환진을 내어주실 겁니까?”
“필요에 의한다면.”
“과연, 지극한 사랑이십니다.”
“사랑? 지독한 독점욕이라 칭하는 것이 맞지 않나?”
서현은 자신의 사랑이 독점욕에 가까운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것은 알면서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이었다. 하지만 서현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서현은 환진도 희사도 잃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보는 그대는 환진을 원하지 않는다. 꿍꿍이가 대체 무엇이지?”
해훈은 불쾌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원하는 것은 쿤 하나뿐입니다. 쿤이 있음으로서 랑쿤 황실의 기반은 더욱 다잡아지겠지요. 흑의대가 원한다면 이곳 랑쿤에서 거주해도 좋습니다. 물론 이제 쿤을 지키는 것에는 저도 포함이 되어 있겠지만 말입니다. 희사를 불러드리겠습니다. 그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빠르겠군요.”
현극은 밖에 대기하는 유적을 시켜 희사를 데려오도록 일렀다. 서현은 일단 희사를 볼 때까지는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있을 생각이었다. 해훈 역시 검집에 손이 몇 번이나 가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만일 현극이 희사를 끝까지 데려오지 않았다면 이곳에서는 분명 피바람이 일었을 것이었다.
* * *
희사는 갑작스레 열린 문에 무릎에 파묻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유적의 지시를 받은 두 수비병이 희사를 이끌었다. 희사는 랑쿤 황실 내부를 완벽하게 알지 못했다. 혼자서는 멋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고, 희사 역시 정원과 자신의 거처 외에는 나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수비병들이 향하는 장소도 희사가 처음 접하는 곳이었다. 희사는 성빈관이라 쓰여 있는 궐의 입구 앞에서 멈춰 섰다.
현극의 측근인 유적이 희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희사는 마주 인사를 하며 화려한 금장장식으로 일색 된 문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서현과, 해훈 그리고 현극이 앉아있었다. 희사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춰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뒤로 문이 닫히는 동안에도 그들을 보며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도 떨쳐내고 싶어 했던 이들이었다. 반년이라고 한들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건만 가슴이 지끈거렸다. 반년 사이에 서현과 해훈은 희사가 기억하는 그들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그들은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희사도 마찬가지였다.
서현은 희사의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을 보며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보지 못한 사이 희사는 키가 컸는지 전보다 시선이 높아졌다. 서현은 저기 멍하니 서서 굳어있는 희사를 안아주고 싶었다. 희사는 서현의 바람이 무색하게 천천히 걸어서 빈 의자에 앉았다. 희사의 옆모습을 보던 해훈은 희사의 머리를 고정시킨 나비 머리 장신구에 시선을 옮겼다. 해훈은 희사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 그것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저 쓸 만한 것이 하나뿐이기에 착용한 것이라 생각했다. 해훈은 그것만이라도 좋았다.
“오랜만의 재회에 다들 할 말을 잃은 얼굴이군요. 희사. 이리와.”
현극이 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희사는 콧등으로 그를 무시하며 서현과 해운을 봤다.
“이런 이런. 희사가 제 첩이 됐다는 흉내라도 내보려했는데, 생각보다 쉽진 않습니다.”
희사는 현극이 왜 저런 연극을 하나 싶었다. 저런 쾌활하고 장난기가 가득 찬 현극의 모습은 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서현님과 해훈님께서 너를 데리러 왔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돌아가겠습니다.”
웃음기가 가득했던 현극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로 했던 것이 아닌가? 이들을 보니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겠다 싶었나? 아니, 그럴 리 없다고 현극은 생각했다.
“당신께 그 방도를 알아낸 다음에 말입니다.”
그럼 그렇지. 현극이 입 꼬리를 올렸다.
“나는 네게 아직 받은 것이 없는데, 내가 왜 답을 줘야 하지?”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제가 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충분히 들어줄 수 있다.”
서현과 해훈은 팽팽한 둘의 싸움에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다. 해훈은 희사가 그저 조용히 억지로 갇혀 울상을 짓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현극에게 말을 건네는 희사에게선 전에 없는 당돌함이 가득했다. 서현은 왜인지 짓궂은 기분에 가슴 안쪽이 간질 했다. 서현은 희사에게 물었다.
“희사, 저자의 말이 정말인가?”
“어떤 말이.”
“네 스스로 저자를 따라갔다는 말.”
“그래, 진실이야. 난 그에게서 들어야 할 것이 있어.”
“대체 그것이 뭐지?”
“우리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방법.”
서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물론 해훈에게 희사가 떠난 목적에 대해선 들었었다. 하지만 희사가 따라나선 현극에게까지 자세한 내막을 알렸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이용해 정보를 얻어내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 방법을 현극이 알고 있다니.
“그렇다면 저 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군.”
“서현님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방도를 안다 뿐이지 정확성은 뒤떨어질지 모르겠습니다만.”
“네 목숨 줄을 놓고 협박한다면 쉽게 뱉을 것에 희사는 불편한 일을 감수해내고 있군.”
“제 목이 떨어 진다해도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한다면 절대 입 밖에 낼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서현님이 굉장히 현명하다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한 발 앞서간달까요? 그것이 이 후의 생에서 온 당신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압니다. 이곳보다는 더 발전된 세계였을 테니 지식 또한 방대하겠죠.”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다. 다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군. 내가 현명하다 생각했다면 내 자체가 그런 것이지 후생에서 온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희사는 서현의 자기자랑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서현은 제 스스로 자기 얼굴에 금칠한 것도 모른 채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어쨌거나, 희사는 아마도 지금은 돌아갈 생각이 없을 겁니다. 안 그런가?”
“지금은요.”
“미쳤군.”
해훈을 제외하고 저마다 한소리씩을 했다.
“그렇다면 난 여기 남겠다.”
“해훈님께서 남으시겠다면 얼마든지 그러시죠.”
조금 늦게 해훈이 말을 꺼냈다. 서현이 표정이 눈에 띠게 일그러졌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도 독이 되지. 저런 표정조차 아름다우니 그 주변의 이들은 어떤 마음이겠는가. 현극이 찬찬히 서현을 평가했다. 아마도 서현은 약관(弱冠)이 지나면 아직 남아있는 유약한 느낌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세상에 다시없는 미남자로 거듭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을 보는 재미도 톡톡할 텐데 그 전에 죽어야하는 것이 안타까울 노릇이다. 현극의 시선이 서현을 뚫을 듯이 쳐다보자 서현이 관자놀이에 손을 올렸다. 저 건방진 새끼를 어떻게 없어버릴까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현극, 네가 희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데 그리 뜸을 들이지?”
“알려드리면 흥미가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럼 저는 남은 정무를 봐야하기에 돌아가겠습니다. 희사가 제 발로 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제 눈과 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 명심하시죠.”
“건방지군.”
“제 황궁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현극이 일어나며 서현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곤 해훈과 희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속삭임으로 입을 열었다.
“삼일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희사를 설득해 데려가신다면 보내주겠습니다, 하지만 희사가 여기 남겠다하면 그 땐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희사와 해훈이 속닥이는 둘을 미심쩍게 바라봤다. 하지만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서현은 현극이 밖으로 나가고 나서도 그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삼일을 주겠다. 그리고 희사를 설득하면 얼마든지 보내주겠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희사의 목소리가 서현의 골똘한 생각을 깨버렸다. 오랜만에 듣는 맑은 음성에 서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서현은 눈을 크게 떴다. 표독스러운 얼굴로 독설을 내뱉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였
다. 쿤인지 신인지 뭔가가 되더니 해탈이라도 한 건가?
“희사, 왜 돌아가려고 하지?”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여기는 아니니까.”
“그런 우리가 이곳에 왔으니 진정 있어야 할 곳이 여기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아. 서현. 방법이 있다면 현세로 가야해.”
희사의 기분 좋은 울림에 서현은 아무래도 좋아졌다. 이번엔 해훈이 희사에게 물었다.
“저 현극이란 자가 과연 방법을 알고 있다 생각해? 넌 저 자의 속에 들끓고 있는 뱀이 보이지 않나?”
“보이지 않으면 거짓말이지. 그래도 현극이 아주 거짓말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설사 그의 말이 거짓이라 해도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봐야 해.”
서현이 좀 전부터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왜 갑자기 그렇게 저돌적인 자세가 된 거지? 우리를 피하고 내쳐내기 바빴던 네가.”
“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우린 어차피 같은 배를 탔으니 누가 누구를 탓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물론 현세로 돌아가면 희사는 저 둘과 멀리 떨어져 지낼 셈이다. 이기적이라 할지도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혼자 사는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했다. 현세에서는 자신이 하던 일도 있었고, 앞으로 하고픈 일도 있으니 혼자 살아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사실 내가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었지만. 뭐 어때,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지.”
희사는 서현에 의해 부모가 죽었음에도 그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유악의 식솔들을 죽인 그가 미웠으나, 희사 역시도 어느 샌가 무의식중으로 이곳은 이미 과거의 세계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현세에서도 희사의 부모는 죽었다. 현성도. 그렇지만 현세에서는 서현의 탓도 자신의 탓도 아니었다. 그리고 오히려 지금보다 현세에서 전생의 꿈을 꾸었을 때가, 더욱 솟구치는 맹렬한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혔었다.
사실 서현을 향한 증오심은 지금보다 그 때가 더 강했다. 게다가 그 증오는 전생의 서현을 향한 감정이었다. 지금의 서현은 전생의 서현이 환생했다 뿐이지, 그와 완벽히 동일한 사람은 아니다. 희사 역시도 전생의 희사와 지금의 희사는 매우 다르다. 현세에서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마다 전생의 희사로 동화될 뻔한 적도 많았지만, 정신을 차린 지금은 아니다. 그런 무기력함은 필요 없다. 가만히 당하기만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전생의 희사는 그랬기에 그 꼴로 자살을 선택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절대 자살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해훈. 너도 환진으로 돌아가. 이곳에 나 혼자 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
“현극은 너를 어찌 생각하지?”
“그냥 필요한 물건쯤으로 생각하겠지. 설마 그가 나를 연애대상으로 보고 있을 것 같다는 끔찍한 소리를 하려면 그만두길 바라, 서현.”
희사의 말에 서현과 해훈은 동시에 안도를 했다. 당연했다. 현극이 희사를 억지로 품지 않았기에 희사도 이곳에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희사 너와 이곳에 남겠다.”
서현은 해훈의 위치가 부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랑쿤으로 향하기 전, 환진 황실에서 해훈의 정체를 밝히는 것인데. 후회막급이었다.
“꼭 그래야겠다면 말리진 않겠어.”
“아니, 단 한 사람도 여기에 남아선 안 돼. 모두 돌아간다.”
“서현, 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거야?”
“아니. 잘 이해했지. 누구보다도 더. 하지만 너와 해훈을 둘만 이곳에 남겨놓을 것이라면 차라리 현세로 돌아가지 않겠다.”
희사는 서현의 땡깡과도 같은 어린 투정에 기가 찼다. 서현은 이미 희사와 해훈이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해훈을 의심했다. 그리고 이곳에 남겠다는 말에서 확신을 얻었다. 해훈이 희사에 대한 감정을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희사와 해훈을 붙어먹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극이 원하는 것을 네가 들어줄 수 있다 했지? 희사 넌 그게 뭔지 알아?”
“아니, 나도 잘은 모르겠어.”
“그런데 그 막연함을 언제까지 기다릴 것이지?”
“길어야 이번 해 안이라 생각해.”
“받아들일 수 없어. 나는 너를 억지로 끌고서라도 환진으로 돌아가겠다.”
“서현, 또 반복할 셈이야?”
“무엇을?”
“너의 그 독선적인 행동 때문에 많은 것이 망가졌었어. 제발 반복하지 말아줘.”
서현이 입을 다물었다. 희사가 처음으로 자신의 전생의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희사는 그 이상 다른 말을 더 내뱉진 않았다. 서현은 성질 같아선 희사를 어깨에 들쳐 메고 환진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희사의 마지막 말에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서현, 걱정하지 마라.”
“네가 희사를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서현의 날카로운 지적에 해훈은 행성대신의 여식인 명휘의 말을 떠올렸다. ‘네놈 눈빛만 봐도 알겠다.’ 그 여자의 말대로 자신만 몰랐다 뿐이지 서현마저 알고 있었다.
“나는 너와 다르다. 내가 희사를 사랑한다 해서 그를 억지로 품거나 하지 않아. 난 희사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서현은 해훈의 마음에 기가 막혔다.
사랑한다면 그의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하거늘, 그저 그 사람의 행복만을 바란다니. 그게 과연 사랑이란 말인가! 기가 찼다. 저 따위 사랑법이라니 서현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희사는 해훈을 사랑하지 않는다. 서현은 희사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희사가 해훈을 바라보는 눈빛의 의미는 단 하나, 그리움이었다.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인지는 모른다. 다만 서현에게 있어서 희사의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일 뿐이었다. 아니 다행이라 말하는 것이 우스울지도. 서현은 희사가 해훈만큼이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제길,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기다려, 만일 방도가 없다고 하면 나도 환진으로 돌아갈 거야.”
서현은 아예 방도가 없었으면 했다. 아니면 현극이 콱 뒈져버려서 찾을 방도 자체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서현도 현세로 돌아가는 것을 원한다. 하지만 이토록 희사와 떨어져 있을 바에야 그냥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나았다. 서현은 현극이 지나쳐가면서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삼일의 기간을 주겠다라. 희사를 쉽게 설득 시킬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않겠는가. 서현이 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