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겁환상(前劫喚想) 下 4화 (11/21)

4.

남자가 날려버린 서류들이 공중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 신경질적인 표정의 남자는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니 이제 남자는 단순히 아름답다기보다 뭇여성과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 만큼의 매력적인 미남자로 성장해가는 중이었다. 가는 선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윤곽이 더욱 뚜렷이 잡혀갔다. 아직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손은 남자가 아직도 한참은 더 자랄 것임을 예측케 했다. 그의 측근 사황이 손발을 덜덜 떨어가며 떨어진 서류들을 집어 들었다. 이런 상태의 태자를 상대하는 것은 사황에게 있어 꽤나 두렵고 까다로운 일이었다. 

“이딴 사사로운 것들까지 내가 직접 봐야하는가! 이곳에는 다들 까막눈밖에 없단 말이야!”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평소와 같은 집무일 뿐입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신 뒤 다시 집무에 임하시는 것이 어떨지…….”

“차라리 랑쿤의 황제처럼 빨리 죽어주는 것이 마음 편하겠어. 안 그런가?”

“예. 예?”

“황제 말이다.”

“전하,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아니 되십니다!”

서현은 이제 황제를 높여 부르기도 짜증스러웠다. 죽으려면 빨리 죽어줄 것이지 끙끙 앓아대며 황제는 근 몇 년을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집무는 산더미 같이 늘어나고, 발목은 발목대로 잡혀버렸다. 차라리 자신이 황제라도 되면 모든 제약들을 제치고서라도 희사를 찾아오겠건만, 아직 황제가 버티고 있는 이상에서야 힘든 노릇이었다. 희사를 그렇게 보낸 해훈을 원망해봐야 소용없었다. 해훈은 그저 희사의 뜻을 따랐다고 할뿐이었다. 언제부터 희사의 개가 됐는지. 서현은 이죽거리며 웃었다. 태자라고 한들 뜻대로 되는 일 따위가 하나도 없었다. 사랑하는 정인도 쉽사리 찾지 못하고, 황실도 제멋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 현세였다면 이런 제약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서현은 요즘만큼 그쪽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도 드물었다. 

북방에서 그렇게 희사를 놓친 뒤 서현은 미칠 것 같은 분노를 맛봤다. 분명 눈이 마주쳤다. 희사도 자신을 확실히 봤다. 그런데도 희사는 현극의 허리를 안은 채 환진을 벗어났다. 바람에 마구 휘날려 작은 얼굴이 다 가려진 그 순간이 떠올랐다. 심장이 쿵쾅쿵쾅 울렸다. 그 때 현극을 향해서 날아갔던 화살이 조금만 위를 맞혔어도 뒤통수를 뚫어버릴 수 있었는데. 서현은 아쉬움에 이를 갈았다. 해훈에게 듣기론 희사가 현극을 따라간 이유는 셋 모두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해훈의 태도가 가관이었다. 희사를 내버려두라니. 그가 원하는 대로 마냥 기다리라니. 서현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서현에게 있어서 희사가 있는 세계야 말로 더할 나위 없는 현실이었다.

“희사, 희사…….”

서현은 대답 없는 자의 이름을 대뇌였다. 랑쿤으로 보낸 간자는 희사의 위치에 대해서 아직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황궁 내부에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면 최악의 상황은 희사가 황궁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이었다. 현세로 돌아간다는 그 빌어먹을 방도를 찾으러 랑쿤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서현은 오늘까지만 기다려보고 더 연락이 없으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랑쿤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서현의 매가 열린 창을 통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날아들었다. 사황은 공중에 떠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새의 거대함에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심지어 매의 입에는 눈알까지 툭 튀어나온 늘어진 쥐의 시체가 물려있었다. 서현은 매의 발목에 묶인 끈을 다급하게 풀었다. 손바닥만 한 서찰은 단 한 줄의 내용만 담겨있었다.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감. 곧 복귀하겠음-

서현이 그 서찰을 구겼다. 이런 애매한 답을 기다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서현의 간자는 한 번도 서현이 시킨 일을 실패하거나 완수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서현은 간자가 돌아올 시간 동안 조금 더 인내하기로 했다. 서현은 간자가 돌아올 열흘의 시간이 지나간 반년의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질 것임을 알았다.

해훈은 희사가 랑쿤으로 떠난 동안 황궁에도 그 어디에서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소속된 흑의대도 마찬가지였다. 서현이 듣기론 아직 비어있는 유악 제후의 집에 기거한다 했다. 그곳에 처박혀서 무예를 쌓는지 책을 읽는지 따위는 서현이 알바가 아니었다. 희사와 해훈사이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달포가 넘는 시간을 첩자를 붙여두었으나 의심쩍을만한 사건은 없었다. 오히려 해훈이 서현보다 희사의 소식에서 더 멀리 떨어져있었다.

희사가 현세로 돌아가는 방도를 찾겠다 했을 때 해훈이 말리지 않은 것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만큼 해훈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도 서현은 희사를 혼자 보낸 것이 영 못마땅했다. 

서현은 산더미처럼 불은 집무에 머리를 파묻어가며 또다시 미칠 듯한 열흘의 시간을 보냈다. 서현은 그러면서도 빨리 황제가 죽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간자가 도착한 것은 예상보다 빠른 아흐레 날이었다. 간자는 잠을 최소한으로 줄여 최대한 빠르게 황궁으로 돌아왔다. 집무실 위에서 내려선 간자가 서현을 향해 부복했다. 서현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간자를 채근했다.

“희사를 찾았나?”

“네. 헌데 그것이.”

“뜸 들이지 말거라, 내가 그리 한가한 자더냐!”

초조함에 입술이 전부 닳아질 지경이었다.

“랑쿤의 황제가 죽은 것은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현극이 황제에 즉위한 다음 알게 됐다. 헌데, 그것이 희사와 무슨 상관이지?”

“희사님께서 랑쿤의 쿤이라 발표되신 것도 알고 계십니까?”

서현은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커다란 몽둥이였는지 정신이 돌아오는데 수십 초의 시간이 걸렸다. 랑쿤의 현극이 황제에 즉위하고 수 일이 지난 후에, 랑쿤의 신이 돌아왔다는 하찮은 이야기를 귀족만을 상대로 하는 장사꾼에게 접해들었었다. 서현도 랑쿤의 신이 범이란 것을, 그리고 그 신의 기운을 받은 자가 쿤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다. 그 덕에 랑쿤의 자들은 미개하다며 한심해했으니까. 서현은 쿤이 있다고 해도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자일 것이라 여겼다. 신이라 사칭한 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그런 인간 말종 쯤으로 생각했다. 헌데 그 쿤이 희사라니. 믿기지 않다 못해 기가 막혔다. 

“네가 직접 봤는가?”

“직접은 보지 못했으나 불확실한 정보는 아닙니다. 쿤의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랑쿤의 황실에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

“그, 그것이.”

“내게 같은 말을 두 번하게 하려는 것인가?”

“아닙니다. 전하. 저도 그저 듣기만 하여서.”

평소와 다르게 간자는 쉽게 서현에게 보고를 하지 못했다. 대체 어떤 이야기이기에 저리도 뜸을 들이는 것인지. 서현의 손이 검집으로 이동했다. 간자가 화들짝 놀라 바삐 입을 놀렸다.

“산 호랑이가 희사님의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짐승들이 희사님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고…….”

“하, 희사의 앞에서 호랑이가 무릎을 꿇어?”

서현은 얼토당토않은 간자의 말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쿤이 아무리 랑쿤의 자들에게 있어 신화격인 존재라고 해도 믿기지가 않는 말이었다. 서현은 곧이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곳에서 현세로 갈 방도를 알아낸 것이 아니라, 신 행세를 하러 간 것이었군. 희사.

서현이 여전히 부복하고 있는 간자를 내려 봤다. 물어보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앞선 이야기로 전의를 상실했다.

“그래, 아픈 사람도 한 번에 고쳐주고 가뭄이 든 지역엔 비까지 내려준다더냐?”

비웃음이 명백한 서현의 말투에 간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희사님이 쿤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현극이, 아니 랑쿤의 황제가 왜 이제와 쿤을 끌어들이지? 그가 황제가 되기 전이었다면 쿤을 이용해 황위를 하루빨리 차지하려 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황제에 오른 뒤 쿤을 이용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도 랑쿤 황제의 뜻은 모르겠습니다.”

서현은 자신의 실수를 느꼈다. 당연하다. 시키는 일만 하는 간자가 알 턱이 만무했다. 서현은 급히 해훈을 부르라 지시했다. 간자는 한숨을 돌릴 새도 없이 해훈이 거주중인 유악 제후의 가택으로 향했다. 간자는 불평도 불만도 없이 서현이 준 금화를 들고 홀어머니가 계신 행성에 들렀다. 간자는 행성이 유악 가는 길과 접목해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품었다. 서현의 간자는 환진이며 랑쿤이며 할 것 없이 모든 지역을 누빈다. 그로 인해 홀어머니가 계신 집에서 잠을 청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어도 마음은 든든했다. 서현은 간자가 자신의 할 일만 충실히 이행하면 과하다 싶을 정도의 상을 내렸다. 간자는 서현이 두려웠으나, 그의 밑에서 일 한지 두 해가 지나서야 그가 그저 무섭지만은 않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에서도 첩자들은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다. 오히려 열심히 부려 먹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 당하는 게 이 직업의 비애였다. 간자는 자신이 서현의 밑에서 일하게 된 것을 크나큰 행운이며 복이라 여겼다. 홀어머니가 주무시는 틈을 타 솥뚜껑 안에 금화를 넣어두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유악 제후의 가택을 향해 달렸다. 

해훈은 희사의 방이었던 곳 앞마루에서 검을 닦다 문득 인기척에 어깨를 굳혔다. 지척까지 다가왔는데 이정도의 인기척을 숨길자라면 만만한 칼잡이는 아니었다. 물론 칼잡이일 경우가 그렇다는 말이다. 만일 그가 단순한 간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해훈이 천장을 향해서 검을 겨눴다.

“모습을 드러내라.”

간자는 나무 기둥을 번갈아 타며 바닥에 내려섰다. 복면을 눈 아래까지 쓴 모습에 해훈은 자신의 전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모습을 드러낸 자는 흑의대도 해훈이 알고 있던 자도 아니었다.

“인사드립니다. 서현님 밑에 있는 서춘입니다.”

“그런데?”

해훈은 놀라지 않고 간자의 말을 기다렸다.

“서현님께서 해훈님을 급하게 부르십니다.”

“이유는?”

“저 같은 자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저 말씀만 전해드릴 뿐입니다.”

해훈이 서춘을 향한 검을 거뒀다. 서춘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바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목숨이 어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서춘의 전달이 끝나자 해훈은 생각에 잠겼다. 서춘은 그런 해훈의 모습을 보며 그의 정체에 대해 다시금 떠올렸다. 해훈. 서춘은 제 2황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물론 제 2황자의 이름은 누구나 알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나 행적은 늘 묘연했다. 정신병을 앓아 서궁 깊은 곳에 유폐됐다는 소문도 있고, 이미 죽었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서현은 거의 반년 전, 서춘에게 유악에 가 있는 흑의대 수장의 뒤를 캐라 지시했었다. 그 때 서현은 흑의대 수장의 이름을 해훈이라 지칭했었다. 서춘은 그 때도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런 생각을 품지 않고 서현의 말을 따랐다. 후에 생각하니 해훈이라는 이름은 제 2황자 이름이었고, 황궁 내에서 그 누구도 황자들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었다. 그것이 곧 환진의 법이었다. 그렇다면 흑의대의 수장은 즉 제 2황자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서춘은 이 같은 사실을 자신의 하나 뿐인 모친에게조차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입 밖에 내는 순간 곧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다. 황궁은 일개 백성들이 바라보기엔 화려하고 마냥 부러운 장소였으나, 아름다운만큼 위험한 독을 품고 있는 장소기도 했다. 서춘은 현명했기에 누구보다 그것을 잘 이해했다. 그것이 서현이 그를 오래 곁에 두고 부리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해훈은 신변을 정리하곤 황궁을 향해 나섰다. 흑의대들은 조용히 해훈의 뒤를 따랐다. 유악에서의 시간은 지나치게 한가했다. 환진에 넘어와서 흑의대들이 이토록 한가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사들에게 있어 한가함은 곧 죽음과 같다. 황궁으로 다시 향하는 흑의대들의 발걸음엔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실려 있었다. 표정이 무거운 것은 해훈과 감인령 단 둘뿐이었다. 흑의대는 쉬지 않고 황궁을 향해 달렸다. 해훈의 애마인 천둥이는 오랜만의 장거리 여행에 한껏 신이 나 있었다. 해훈은 거침없이 질주하는 천둥이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고작 이틀 만에 황궁에 도착한 흑의대는 태자의 집무실로 향하는 해훈을 제외하고 전부 서궁의 숙소로 이동했다. 눈도 부치지 못한 해훈이었으나 서현이 급하게 부른 데는 필시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해훈은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복면을 꺼내들어 얼굴을 가렸다. 황궁에서는 얼굴을 알리고 싶지가 않았다. 

“사황, 흑의대의 수장이 드는 것을 알리옵니다.”

집무실 앞에 대기 중이던 사황의 외침이 끝나고 복면을 착용한 해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현은 어김없이 집무실에서 태산 같은 서류더미에 파묻혀있었다. 근 넉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해훈도 서현도 그 잠시의 기간 동안 남성스러움이 배가 되어있었다. 서로에게 놀라움도 없이 그들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훈, 너는 알고 있었지?”

“무엇을?”

“희사가 쿤이란 것을.”

“서현 너는 쿤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어. 헌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는 거지?”

“청영이 흑의대를 데려온 것에 대한 이유는 황제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해훈 역시 서현이 흑의대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라 어렴풋이 예상했다. 

“너는 흑의대의 소속이 아니었어.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순간 네가 그 옷을 입고 있더군.”

“청영이 나를 이곳에 집어넣었다.”

“그래, 그렇겠지. 황제에게 청영이 쿤이란 사실 또한 들었었다. 어이가 없지 않나? 신의 영혼이 내린 자라니. 그게 말이나 될법한 일인가?”

“우리가 전생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것보다 더한 어불성설이 있겠나?”

“네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그럼 희사가 쿤이라는 것도 진실이란 말이지?”

“그것은 누구에게 들은 건가?”

“내 간자에게서. 그리고 이미 랑쿤의 모든 사람이 안다더군.”

해훈이 그제야 드러난 눈으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네가 유악에 있는 동안 랑쿤의 황제가 죽었다. 그리고 현극이 랑쿤의 현 황제로 즉위했지. 쿤의 대해 알려진 것도 그 즈음이라더군.”

해훈은 그렇게 희사를 보낸 뒤 한 번도 희사에게 소통을 유도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희사 쪽에서 먼저 알려올 것이라 생각됐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하지 않은 것이었다. 

“왜 현극이 쿤의, 아니 희사의 정체에 대해 알리기 시작한 거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희사는 그곳에서 신의 행세라도 할 셈이었나?”

“내가 말했던 대로다. 희사는 우리가 되돌아가는 방법을 찾으러 떠난 것뿐이었다.”

“확신해?”

“그래.”

서현도 희사가 신 행세를 하려 랑쿤으로 갔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극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해훈은 서현에게 흑의대와 희사가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서현은 쿤도, 신도 믿지 않는다. 흑의대도 단순히 쿤을 지키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길 뿐이었다. 해훈은 이제야 희사에게 소통을 시도하려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가슴속에 답답하게 쌓여있던 체증이 단번에 내려간 느낌이었다. 

“랑쿤으로 향해야겠다. 따라올 텐가?”

“그래, 나도 가겠다. 뭐라 얘기하고 황궁을 뜰 거지?”

“막나가는 수밖에.”

서현이 말 그대로 아름답게 웃었다. 서현은 조만간 해훈의 정체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태산 같은 집무를 혼자 이행하는 것도 억울한 일이다. 해훈도 어차피 황자이니 나눠서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서현이 해훈에게 보이지 않는 모호한 웃음으로 눈앞의 서류들을 치웠다. 

“사황 들라!”

해훈은 사황을 지나쳐 걸으며 서궁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내일 당장 랑쿤으로 떠난다.”

“예?”

이번엔 또 무슨 일로 황궁을 뜬다는 것인지 사황은 가슴이 철렁했다. 

“랑쿤의 새 황제가 즉위했다지? 이 내가 축하를 하러 가야하지 않겠나?”

“하지만 전하, 랑쿤에게 보낸 전하의 서찰에 대한 답이 아직 도착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쪽에서도 사람을 선별 중일 테니.”

“아, 그 볼모 말인가? 이젠 필요 없다. 랑쿤의 황제가 그리도 빨리 뒈졌으니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됐지. 내가 원한 것은 현극이 볼모로 오는 것이었지, 다른 이를 원한 것이 아니다.”

“저, 전하?”

“계속 내 이름을 연호할 생각이면 그 시간에 채비를 서두르는 게 좋지 않겠나?”

서현은 희사를 데려가던 현극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규태휘는 억지로 북방에 희사를 데려온 적이 없으며, 희사가 본인의 의지로 규태휘를 따라갔다고 이야기했다. 그건 둘째 치고 북방에서 희사와 현극을 도망치게 방치한 멍청한 규태휘는 북방에서 삼 년간 나오지 못하도록 벌을 내렸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북방을 고립시킬 생각이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규태휘와 서현 사이에는 남들이 모르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서현은 잡힐 듯 말 듯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희사에게 이를 갈았다. 

뭔데 이렇게 어렵지?, 내 사람을 내 곁에 두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것이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하나였다. 

희사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 또는 나를 미워하기에. 

서현이 쓸쓸히 웃었다. 애달파 보이는 그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이든 다 내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을 들게 했다. 물론 서현이 원하는 단 한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희사. 증오스럽게도 아름다운 내 사람.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몸이라도 가져야 하건만. 이 가슴 한쪽에 부는 스산한 바람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 생각하며 서현은 집무실을 벗어났다.   

피곤에 곤죽이 된 흑의대들은 모두 숙면 중이었다. 해훈은 내일 아침이 돼야 그들을 깨울 생각으로 별채에 마련된 그들의 거처를 벗어났다. 해훈은 주인을 잃어 유악만큼이나 쓸쓸한 서궁을 올려다봤다. 아직 황제가 해훈을 위해 남겨둔 곳이지만, 황제가 죽고 난 뒤에는 서현에게 이곳을 다른 이로 채우게 해 달라 부탁할 셈이다. 만일 현세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서현이 황제가 된 후 해훈은 황궁을 떠날 생각이다. 물론 희사와 같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해훈은 그저 희사가 행복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것이 자신과 함께하는 행복이기를 다만 바랄뿐이다.

“어이 거기. 이봐.”

해훈은 누군가의 경박스런 외침에 미간을 좁혔다.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고 하얀 속옷만 걸친 여자가 뒤에서 해훈을 부르고 있었다. 해훈은 그 낯익은 여자가 누군지 떠올렸다. 행성대신의 여식. 물론 이름은 알지 못했다. 

“너, 그 때 나를 황궁 내부로 안내했던 녀석이지?”

해훈은 대꾸 없이 그냥 지나칠까하다 생각을 고쳤다.

“네, 그렇습니다.”

“호오, 오늘은 말도 잘하는구나. 그때는 고마웠다. 상을 원하면 줄 테니 아무것이나 말해 보거라.”

이 여자에게서 상이라면 이미 받았다. 동성을 탐하는 여자를 보고 희사에 대한 마음을 깨우치기도 했고, 저 여자처럼 마음껏 감정을 드러내고 희사를 사랑하고 싶다 생각했다.

“상이라면 됐습니다. 그보다 지금 모습이 가히 좋지는 못하십니다.”

“아하? 이거? 어차피 속만 안보이면 되는 것이지. 서궁의 궁녀들은 하나같이 새침하단 말이야. 하하.”

해훈은 서궁의 궁녀를 건드렸다는 그녀의 간접적인 말에 관자놀이에 힘줄이 섰다. 아니, 뭐 어떻단 말인가. 서궁의 주인이었던 청영은 이미 이곳에 없고, 해훈 역시 궁녀들을 간섭할 이유가 없다. 따지고 보면 서궁의 궁녀들은 모시는 주인이 없는 채로 방치 중이었다. 아직 제 2황자라는 해훈이 있기는 했으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유령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계집들이 말을 못해 신음을 참는 모습이 얼마나 동하던지. 하하. 너도 한 번 땡겨 볼 테야? 행여나 들킨다면 내 핑계를 대라. 난 행성대신의 여식인 명휘다. 내 이름을 대면 웬만한 것은 눈감아 주니 네게도 한번쯤은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지. 아, 두 번은 안 돼. 으하하.”

저 혼잣말을 해대던 명휘가 아차차 하면서 다시 입을 놀렸다.

“헌데 너는 누구냐? 복면을 썼는데도 이리 황궁을 활보하는 것을 보니 간자 같지는 않고, 아! 어느 황실 귀족 여편네의 첩인 게야?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편히 이야기해봐라.”

“서궁에 잠시 거주중일 뿐인 용병입니다.”

“용병? 돈 받고 사람 패고, 귀찮은 일 대신 해주는 직업 말이냐?”

“네.”

“너도 참 피곤하게 산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도 필요할 때가 있으면 요긴히 너를 부르겠다. 물론 값은 비싸게 쳐주마.”

“아마 저를 부리실 정도의 능력은 되지 못할 듯싶습니다.”

“뭐야? 지금 네가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행성대신은 황국 내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다. 그런 사실도 모르는 것을 보아하니 네놈은 분명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이구나.”

“그렇군요.”

해훈은 여자의 말에 더는 대꾸하기가 귀찮아졌다. 상대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이 후회되는 중이었다.

“그래, 네놈 이름이 무엇이라고?”

“해훈입니다.”

“해훈, 그래 해훈이라. 잘 기억하겠다!”

해훈의 예상대로 여자는 제 2황자의 이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만일 후에 알게 되더라도 별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명휘는 해훈을 지나쳐 걸었다. 이번엔 동궁에라도 가볼까 하며 헐떡대는 행색이 꼭 나이든 호색한 노인 같았다. 

“아, 해훈. 근데 그대는 왜 항상 그런 표정이지?”

걷던 걸음을 멈추고 명휘가 팔짱을 꼈다. 해훈은 천천히 답하며 고개를 비틀었다. 

“제 표정이 보이십니까?”

복면 안에 가려진 표정이 보일 리가 없다.

“네놈 눈빛만 봐도 알겠다.”

해훈은 덤덤히 명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신을 나락에 빠뜨릴 말이라는 것은 예상도 하지 못한 채.

“누구를 그리 좋아하는 게야? 그리 좋아하면 눈으로만 찾지 말고 실행하는 것이 좋아. 네 놈 눈빛처럼 점점 썩어서 문드러지기 전에. 복면으로 가린다고 그 감정도 가려지나? 한심한 놈.”

명휘는 자신이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다시 시원함 걸음으로 서궁을 벗어났다. 한차례 바람이 불어와 해훈의 복면을 흔들었다. 해훈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제 2황자라는 것을 알리기 싫어, 또 얼굴을 가리기 위해 복면을 썼었다. 또한 그 안에는 자신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심리도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북방에서 희사를 만난 이후 변하였다. 이제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황궁에만 돌아오면 습관처럼 얼굴을 가리게 된다. 해훈은 이제껏 자신의 가려진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눈빛이 그런 줄 알지 못했다. 저리 경박한 자도 아는 것을 자신 혼자만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눈만을 드러냈기에 더욱 쉽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해훈은 서둘러 희사가 보고 싶어졌다. 잠은 오지 않았으나 희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했다. 

해훈은 빠른 걸음으로 서궁의 거처로 들어갔다. 복면을 쓴 자의 등장에 오랜만에 궁녀들이 긴장했다. 해훈은 방에 들어서기도 전, 복면을 벗어 내리고 복도에 떨어진 그것을 밟고 지나갔다. 해훈을 앞에 둔 궁녀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가 문을 연 곳은 몇 십년간 사용한 적이 없는 황자의 방이었으며, 처음으로 복면의 남자가 맨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복면을 쓴 자가 황자일 것이다, 아니다. 눈 아래가 흉한 얼굴이라 가린 것 뿐이다로 나눠졌던 의견이 드디어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복면은 역시 황자였고, 태자에 못지않은 절세 미남자라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가린 것이다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 서궁의 궁녀들 사이로 복면의 이야기가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해훈은 자신의 침상이 이다지도 편한 것이었나 하고 생각했다. 황자를 위해 마련된 방, 하지만 쓰인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청영의 손길이 여기저기 느껴졌다. 그녀가 한땀 한땀 수놓은 베개하며 꽃잎 물로 우려낸 형형색색의 벽화들. 해훈은 시선만을 돌려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감았다. 지금은 저런 것보다 희사를 찾아봐야했다.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심장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해훈은 천천히 희사의 얼굴을 그렸다. 잠이 드는 것은 한참 뒤였지만 그리 지루한 시간은 아니었다. 

해훈은 처음 꿈속에서 희사를 발견한 북방 가택의 앞에 검을 쥔 채 섰다. 그 가택의 주변은 전부 들끓는 뱀들로 가득했다. 그 안을 들어가려 뱀들을 베고 또 베어내도, 잘린 부분에서부터 새로운 뱀들이 증식했다. 오히려 뱀의 몸뚱이를 잘게 썰수록 그 숫자가 늘어났다. 해훈은 가택 안으로 한발자국도 향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가택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희사가 난감한 얼굴로 발밑에 깔린 뱀들을 내려다봤다. 해훈 앞의 뱀들이 길게 몸을 일으키며 시야를 방해했다. 희사도 뱀들의 기세에 한발자국도 나오지 못했다. 해훈이 소리쳤다.

“희사, 희사!”

희사는 해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뱀이 집 안까지 들어서기 전에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해훈은 꿈속에서 내내 뱀을 베어내고 밟고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제자리걸음만 할뿐 끝내 희사를 만날 수는 없었다. 

“제길!”

해훈이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소통이 막힌 것이다. 희사도 어쩌면 저 뱀들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당장 랑쿤으로 향해야한다. 해훈은 옷가지를 주섬주섬 걸치고 방을 나섰다. 얼마나 긴 시간동안 꿈속에서 사투를 벌였는지 벌써 아침 해가 밝아있었다. 충분한 잠을 취했는데도 자지 않느니만 못했다. 

콰당하고 문이 열리는 바람에 앞에 선 궁녀가 꺅하고 무언의 비명을 질렀다. 궁녀는 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해훈은 궁녀의 손에 들린 은쟁반 위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잔 옆에는 복면이 놓여있었다. 해훈은 그것을 반사적으로 들어 올리다 다시 내려놓았다. 타는 갈증은 물 한잔으로는 부족해 주전자 들어 비어버린 잔에 가득 물을 따랐다. 궁녀가 다소 당황해하며 쟁반을 받쳤다. 해훈은 다시 한 번 목을 축였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말을 해도 좋다. 이 말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라.”

궁녀는 양손에 쟁반을 꽉 췬 채로 굳었다. 눈뜬 채로 꿈을 꾸는가 싶었다. 수년 동안이나 말을 해오지 않아서 황자의 지시가 내려졌음에도 그저 뻐금거리기만 했다. 해훈이 그런 궁녀를 두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궁녀는 해훈을 향해 힘껏 허리를 굽혔다. 서궁의 궁녀들이 입을 열기시작하면 얼마나 수다스러울지 모르는 해훈이었다. 아마 이제부터 나오는 황실의 모든 크고 작은 이야기는 서궁에서부터 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해훈의 등장에 집무실 밖을 지키던 사황이 우물쭈물한 모습을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기에 누구라고 고해야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흑의대의 수장이라고 전하라.”

사황은 서궁의 궁녀들보다도 더 화들짝 놀랐다. 해훈의 외모에 놀란 것도 있지만, 흑의대의 수장이 얼굴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 더 컸다.

“전하, 흑의대의 수장이 들었사옵니다.”

해훈은 집무실의 열린 문틈 사이로 서현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것이 보였다. 

“피곤할 텐데 일찍 일어났군. 헌데 표정이 한결 가벼워보이는군. 이제 숨기기는 그만하기로 한 건가?”

서현은 자신의 생각이 읽힌 것도 아니 텐데 하룻밤 사이에 복면을 벗어던진 해훈이 마냥 신기했다. 서현에게 있어선 오히려 좋은 소식이다. 

너도 어디 한 번 서찰들의 바다에서 헤엄쳐보라고. 네가 그동안 얼마나 편했는지 알게 될 거다.

서현은 해훈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일단 희사를 랑쿤에서 데려온 다음에 이행하기로 결심했다. 

“흑의대를 데려가는 것이 좋을 거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나는 나대로 데려가겠다. 쉬지 않고 달려갈 것이니 미리 전해두는 것이 좋아.”

“사사로울 것도 없지. 최대한 기간을 줄여서 도착하게 하겠다.”

“랑쿤의 황실에는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으니 어디 부지불식간에 찾아 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두고 보자고.”

물론 희사의 반응이 가장 궁금한 서현이다. 자신을 보고 기뻐할까? 아니면 그 차가운 얼굴로 무심히 내칠까? 후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에 서현의 웃음은 씁쓸했다.

태자가 황궁을 나섰다는 말이 퍼진 것은 서현이 출발한지 만 하루가 지난 이후의 일이다. 사황은 서현의 지시대로 손님도 하인들도 들지 못하도록 그 하루 동안 집무실의 문을 닫아두었다. 서현이 언질 없이 출타한 것을 알게 되면 혼쭐이 날 것은 물론 사황이었다. 사황은 집무실 문밖에서 대기하는 동안 내내 불안에 떨어야했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서현이 갑작스레 사라졌단 사실을 황제에게 고하였다. 서현의 집무실 탁상에는 한 장의 서찰이 놓여있었다.

-랑쿤 황제의 새 즉위식을 축하하고자 랑쿤을 방문하겠다. 국가간의 우의를 다지기 위한 것이니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출타인가!- 

서현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뒤에 숨겨진 것만 같았다. 병색이 짙은 황제는 서현의 출타 소식을 듣고도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하루에 절반이상 정신을 놓고 지냈다. 가끔은 어린 아이 같은 실없는 소리를 했으며, 대소변을 가리지도 못했다. 그런 상태가 반년이상 지속되니 서현으로서는 황제가 빨리 죽어주는 것이, 자신에게도 그리고 황제에게도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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