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겁환상(前劫喚想) 下 3화 (10/21)

3.

랑쿤의 황실은 시종이건 황족이건 할 것 없이 모두가 동분서주했다. 갑작스런 황제의 죽음이 불러온 여파는 모든 이를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황제의 승하 발표가 있은 지 불과 하루도 되지 않은 맑은 날이었다. 랑쿤의 중신들은 어느 하나 빠짐없이 회의장인 쿤테제에 모여 저마다 입을 놀리기 바빴다. 

“차기 황제는 태자님으로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 맞습니다. 황가의 핏줄은 태자님 한분뿐이십니다.” 

“하지만, 갑작스런 폐하의 죽음을 암살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어허, 운태상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암살이라니요, 폐하께서는 침상에서 붕어하셨지 않습니까? 어찌 암살이라는 망발을 내뱉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현극은 작은 벌레들처럼 조잘거리는 중신들의 행태에 비웃음을 삼켰다. 물론 운태상의 예상은 적중했다. 랑쿤의 황제가 죽은 원인은 독살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끈기의 승리랄까. 황제는 반년 간 소량씩 음식에 섞인 독약을 섭취했었다. 그 독약은 랑쿤의 술사들만이 제조할 수 있는 은밀한 약으로, 중독을 알아차리는 것도, 해독제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사실 그 독약의 제조법을 아는 자는 술사뿐만이 아니다. 현극도 알고 있었다. 

현극은 코앞에 놓인 황좌 앞에서 기뻐하지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중신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국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존 법대로 세 달을 채워야지요!”

현극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그들을 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국상은 없다.”

아홉에 이르는 중신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경악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졌다. 말을 잇지 못하고 붕어마냥 뻐끔거리는 모양새에 현극은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국상이라……. 그대들은 내 아버지를 진정 황제로 생각했었나?”

“태자전하! 대체 그 무슨 망발이십니까?!”

“맞습니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현극은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을 잠그는 표시를 했다. 싸늘한 현극의 태도에 다시 입을 여는 자들은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현극은 자신들의 태자지만, 그저 풍류를 즐기는 한량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태자가 환진의 영토인 북방의 규태휘와 친분이 깊은 것 또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랑쿤의 태자가 남 몰래 환진의 영역을 밟는 것이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랑쿤의 귀족들은 앞서가는 환진에게 남모를 적대감과 자격지심을 품고 있었다. 

“그대들의 눈에는 내가 어찌 비치지?”

“범의 기운을 이어받으신 뛰어난 제후의 자손이시며, 현재는 황가의 핏줄이십니다.”

“범의 기운을 받은 이는 내가 아니라 여기 있는 자를 뜻하지 않나?”

현극은 자신의 옆에 앉아 발등만 내려 보는 자를 가리켰다. 고개를 숙인 자는 현극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홉 명의 중신들도 태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 아리송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현극이 가리킨 하얗고 작은 얼굴을 가진 남자는, 어느 날부턴가 현극이 데려온 그의 애첩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시 번복하지 않는다. 국상은 있으되 없다. 승하하신 황제의 장례는 단 삼일에 걸쳐 치러진다. 그리고 그 나흘째에는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할 것이다.”

“아니 되십니다! 아무리 태자님이시더라 하더라도 국법을 뒤집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운태상의 거친 반발에 현극은 조용히 웃었다. 

“그래? 만일 그대의 목숨이 풍전등화라면?”

“목숨이 없어져도 국법은 지켜져야 할 것. 컥!”

운태상의 목구멍에서 말소리가 아닌 바람소리가 새어나왔다. 일자로 길게 그어진 목의 자상위로 운태상의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핏물이 솟구쳤다. 운태상은 늙고 주름진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다. 그의 손에 너덜거리는 살점이 느껴졌다. 쉼 없이 흘러나오는 피들을 막으려 발버둥 쳐도 이미 찢겨진 자상에 아무런 조취를 취할 수 없었다. 운태상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현극을 봤다. 현극의 손에는 운태상의 피가 얄팍하게 묻은 검이 들려있었다. 운태상이 의자 밑으로 털썩 무너져 내렸다. 쓰러진 운태상의 눈에선 더 이상 생기가 흐르지 않았다.

“이후로 내 말을 거역할 자가 있는가?”

중신들은 현극의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이미 그들은 충신이라기보다는 공포에 꼬리말은 개와 다름없었다. 현극은 옆에 앉아 어깨를 떨고 있는 자를 일으켜 세웠다. 현극이 쿤테제에서 볼일이 끝났다는 듯, 그를 데리고 그 곳을 벗어났다. 그는 현극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음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 같기도 했다.

“희사, 여전히 내가 마음에 들지 않지?”

“제 의사 따위는 상관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네 앞에선 그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제가 목격한 것만 세어도 다섯 손가락이 부족합니다.”

“하하, 이곳에서 나의 모습이 원체 가벼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현극은 색을 바꾸듯 성격을 연기했다. 북방에선 규태휘의 친우로, 랑쿤에선 철없는 태자로. 그리고 현극의 뒤를 따르는 희사 앞에선 가끔씩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 현극은 아이 같기도 했으며, 때론 실없는 농담도 했고, 어느 날은 일반 백성들과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하지만 현극의 가장 기본적인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내면에 숨겨진 차가움. 그것은 진짜였다.

“해훈과 소통을 하려했더군.”

현극의 차가운 질책에 희사는 어깨를 움찔했다. 

“희사, 너는 소용없는 짓을 반복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게 된다면 언제고 보내주겠다 하지 않았나? 왜 고집을 피우는 것이지?”

앞서 걷던 현극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희사는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희사는 현극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그를 지나쳐 자신이 쉴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랑쿤의 여름은 환진의 여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무덥고, 비가 오기 전은 지독히도 습했다. 희사는 눅눅하게 달라붙은 비단천을 등에서부터 천천히 떼어냈다. 등과 비단천사이의 작은 공간을 타고 시원함이 찾아왔다. 희사는 그 작업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부채질 하는 것만큼이나 등이 시원해졌다. 희사가 현극을 따라 랑쿤에 온지도 벌써 반년이었다. 반년에 걸쳐 희사가 이룬 것이라곤 몇 가지되지 않았다. 랑쿤에 존재한다는 술사만을 믿고 현극을 따라왔건만, 술사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다. 

범이 사라지고 환진으로 떠난 청영이 쿤이 되었다. 그로부터 수년 후 랑쿤의 황후 ‘자비’는 남아있는 술사들을 전부 몰살했다. 이유인 즉슨, 술사들의 황실 배척죄. 흑의대는 환진으로 떠나 황후의 손을 벗어났지만, 황무지와 황실에 남아있던 술사들은 비껴갈 수 없었다. 

자비는 범이 죽은 뒤 귀족들과 백성들이 따라야 할 자는 오직 하나 황제뿐이라 발표했다. 발표문이 있은 후에도 오랜 시간 랑쿤의 자들은 범을 믿었다. 범은 일종의 국교와도 같은 효과를 지녔다. 자비가 술사들을 처형한 것은 본보기였다. 다른 내막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겉으로 보기엔 황실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주려는 의도 같았다. 자비의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랑쿤의 자들은 여전히 범을 믿었지만 황후의 앞에서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 겉을 바꾸는 것은 쉽다. 하지만 속마음까지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귀족들과 백성들은 랑쿤 황실에 공포심은 있을 지라도 충성심은 부족했다. 

희사는 반년 전 이레에 걸쳐 도착한 황실에서, 술사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현극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현극은 그런 희사에게 유예를 부여했다. 

“태자께서 나를 속였군요. 그렇다면 나 역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가? 내가 너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데도?”

“그렇다면 죽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쿤이 어디선가 나타날지 모르지 않습니까?”

“너를 랑쿤까지 데려온 것은 아주 운이 좋았다 할 수 있다. 그다음 쿤이 어디에서 나타날지도 모르고, 또 그를 내편으로 회유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데 내가 그런 모험을 할 것 같나?”

그 날 오랜만의 태자의 궁으로 복귀한 현극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포획물에 대한 감상도 한몫했다.

“정확히 말해 나는 너를 속이지 않았다. 술사들은 전부 죽었으되 그들의 지식은 여기. 이곳에 담겨있지.”

현극의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희사는 현극의 또 다른 정체가 술사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당신도 술사의 무리 중 하나였단 말입니까?”

“하하,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뱀의 자식인데 어찌 범을 따를 수 있단 말인가.”

희사는 현극과 말장난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나도 네가 원하는 것을 알려주지.”

“태자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랑쿤의 폐망.”

현극은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듯 거침없었다. 누군가 들을까 염려하는 기색 또한 없었다. 분명 현극은 북방에서 희사에게 랑쿤 황실의 기반을 잡아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고 싶다 말했었다. 헌데 폐망이라니. 희사가 폐망의 뜻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태자인 현극이 미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대체 뜻을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이 나라를 망가뜨리겠다고 했다면, 과연 네가 이처럼 순순히 따라왔을까?”

“랑쿤과 제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저는 제 목표를 위해 태자님을 따라왔을 것입니다.”

“아니, 네 속을 봐.”

현극은 여우 털로 빼곡히 덮은 금의자(金椅子)에서 일어섰다. 서있는 희사에게 다가와 손을 펴 희사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희사의 몸이 움찔했으나 거기엔 어떠한 성적인 의미도 담겨있지 않았다.

“네 속에 무엇이 있지?”

“…….”

“범이 있다. 범은 뼛속까지 랑쿤의 신이지.”

“당신이 바라는 것이 랑쿤의 폐망이란 소리를 들었어도 제게는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의외로군. 범의 의식이 느껴지지 않는가?”

“범의 의식은 처음부터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단 몇 차례의 꿈만 꾸었을 뿐입니다.”

“신기하다. 내가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르군.”

현극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희사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다. 희사는 현극에게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 범의 기운은 애초부터 느껴지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해훈과의 소통과 내면의 감정 변화. 

그래, 미치도록 싫었던 그리고 증오했던 그들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변화만을 가져왔을 뿐이다. 

“희사, 너는 나를 떠날 수 없다. 네가 원하는 답은, 말했듯 내가 지니고 있으니.”

“제가 그 말을 어떻게 신뢰합니까?”

“신뢰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너는 이곳에 들어온 이상 벗어날 수 없다.”

현극의 여유로움은 단순히 쿤을 포획한 것이 아닌 다른 곳에서부터 나왔다. 

“이 곳에서 그대는 흑의대와 어떤 소통도 할 수 없지.”

현극이 불현 듯 희사의 몸을 껴안았다. 귓가로 내뱉어지는 음성은 소름끼치도록 서늘했다.

“말했듯이 술사들의 지식은 내 안에 있다. 쿤과 소통하는 것은 흑의대뿐만이 아니라 술사들도 마찬가지였지. 그러니 그 소통을 막는 것도 알고 있지 않을까?”

희사의 전신이 꽁꽁 얼어붙었다.

“네가 흑의대와 소통하는 것을 뻔히 알고 이곳에 데려왔는데 그 정도의 준비도 안했을까? 도망치는 것 또한 쉽지 않을 거다. 나는 규태휘와는 다르지. 잡은 고기를 방심하여 절대 놓치는 일은 없다.”

희사는 현극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냈다. 현극이 희사의 뺨을 핥으며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네가 지낼 거처가 마음에 들지 모르겠군.”

현극은 희사를 이끌고 태자의 방 안쪽에 달려있는 또 하나의 문을 밀어젖혔다. 현극이 움켜 쥔 똬리를 튼 뱀 무늬의 손잡이가 끔찍했다. 뱀의 비늘까지 세세하게 표현된 문손잡이는 만지기조차 꺼려지는 징그러운 것이었다. 

“네가 거처할 곳이다. 밤에는 문을 꼭꼭 잠그는 것이 좋아. 언제고 이성이 허물어진 내가 들이닥칠지 모르니. 하하.”

현극이 희사의 뺨을 어루만졌다. 희사는 현극의 말과는 다르게 그의 눈에서 애욕이 아닌 다른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어떤 시선과도 흡사했다. 원하는 것을 바라나 쉬이 얻을 수 없음을 알기에 그리움만 쌓아두는, 그렇다고 잊을 수는 없는. 결국 그 마음은 무한적인 희생에 가까웠다. 

현극은 자신의 방에 거처를 정한 희사의 정체에 대해서 황실의 사람들에게 일렀다. 랑쿤의 홍등가에서 사온 아이이며, 마음이 떠나지 않는 이상 애첩으로 두겠다고. 현극의 자유로운 사랑 놀음은 이미 랑쿤의 황실에선 유명한 것이었다. 황실내부에 첩을 들인 것은 처음이나 그동안의 현극의 행동거지를 보면 다들 사사로울 것도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현극은 단 한 번도 희사를 안은 적이 없었다. 희사는 그의 알 수 없는 속내에 불안해하다 현극이 자신을 절대 그런 쪽으로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일단 안도를 했다. 그렇다고 현극이 했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희사는 해훈과의 소통을 시도하려 했다. 현극이 현세로 돌아가는 방도를 알려줄 때까지 돌아갈 생각은 없었으나, 자신의 상황을 한 사람이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는 판단 하에 내린 행동이었다. 

그 날 희사는 꿈을 꾸었다. 북방에 도착하기 전 규태휘에게 의해 갇혀졌던 가택이 꿈의 시작점이었다. 희사는 그곳에서부터 해훈을 찾아 나서려했다. 문을 열자 집을 둘러싼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뱀들이 보였다. 뱀들은 쉭쉭거리며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도록 주변을 온통 에워싸고 있었다. 희사는 몇 번이고 가택의 밖으로 발을 내밀려 했지만 뱀들의 서슬 퍼런 기세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때였다. 살랑거리는 붉은 나비가 희사를 향해 날아왔다. 위태위태한 날갯짓에 희사가 나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가리를 쫙 찢은 뱀이 나비를 집어삼켰다. 날개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붉은 빛은 순식간에 점멸했다. 희사는 자신을 향해 점점 좁혀오는 뱀들 때문에 집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결국 그 집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꿈에서 깰 때까지도 없었다. 

희사는 현극이 말한 소통을 금지시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해훈과 희사는 꿈을 통해 소통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막는 것은 뱀이었다. 물론 어떤 방법으로 꿈을 방해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희사는 번번이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현극에게 들켜 날카로운 핀잔만을 들어야했다.       

현극은 랑쿤의 황제가 붕어한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아, 환진으로부터의 쿤의 귀환을 전역에 알렸다. 그 소식에 가장 당황스러워 했던 것은 랑쿤의 황비 자비였다. 소식을 접하자마자 황궁의 내실로 자비가 닥쳐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금 장신구로 장식한 여자는 눈부신 황금빛에도 뒤처지지 않는 수려한 외모를 자랑했다. 게다가 여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현극의 모든 것은 여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말하듯, 싸하게 풍기는 차가운 분위기가 매우 흡사했다. 내실에 모인 황실의 모든 귀족들과 중신들은 황비를 향해서 허리를 굽혔다. 현극은 자신이 앉은 황좌(皇座)뒤로 희사의 모습을 감췄다. 여자에게서 지키려는 것만 같았다.

“태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나치게 흥분한 자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하얗게 칠한 분은 발갛게 달아오른 노기까진 가리지 못했다. 자비는 희사를 한입에 삼킬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무슨 일은요, 어마마마.”

현극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웃었다.

“쿤이라니! 이제와 쿤이라니! 내가 공표한 이 나라의 국법을 잊었단 말입니까?”

“어마마마. 국법은 황제가 내리는 것이지 황후가 내리는 것이 아니랍니다.”

현극은 황후의 품속에서 놀아난 죽은 황제를 비웃었다.

“내 말이 곧 황제폐하의 뜻이었다는 것을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이 압니다. 그런 것을 태자께서 능멸하신단 말입니까?!”

“그것이 문제란 것을 모르시는군요.”

“무엇을 모른단 말입니까!”

자비의 흥분은 식을 줄 몰랐다. 현극과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언성이 높아져만 갔다.

“어마마마께서는 오늘부터 어떤 정무에도 참석하지 마십시오. 권한은 모두 제게 일임됐습니다.”

“그 무슨! 폐하께서 승하한 이상 태자님이 즉위식을 치루기 전까진 제가 바로 이 황실의 주인입니다!”

“국법, 국법……. 그리고 운운하시던 분이 정작 국법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시는군요.”

자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현극이 황좌에서 일어나 자신 대신 희사를 그 곳에 앉혔다. 중신들의 입에서 저마다 기가 찬 함성이 터졌다. 자비 역시 매서운 눈빛으로 희사를 노려봤다. 희사는 자비의 날카로운 눈을 피하지 않았다. 희사는 여자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현극이 희사의 긴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매만졌다. 애가 타는 부드러운 손길에 자비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마마마, 국법에 따르면 황위의 제 1계승자는 저입니다. 또한 국법에 따르자면 황제가 승하한 뒤 황실의 정권을 일임 받는 자 역시 제 1계승자에게 이어집니다. 허니 어마마마께서는 아무런 권리가 없으십니다. 그저 그 아름다운 얼굴을 한껏 치장하시고 오랜 동안 사교계를 활보하시는 것이 바로 어마마마의 정무십니다.”

“이! 무슨. 무례한!” 

“이 시간 이후로 황제외 승배 금지령을 푼다. 바로 랑쿤을 탄생시킨 범의 후계자가 여기 있다.”

현극은 앉아있는 희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중신들도 저마다 앞 다투어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희사에게 복종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들은 태자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현극을 내려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중신들은 잔뜩 고개를 숙인채로 드디어 태자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첩으로 데려온 이가 쿤이라니. 사랑 놀음에 정신이 홀려 저 흰 얼굴의 청년이 태자를 꼬여냈다고밖에 생각 할 수 없었다. 현극이 무릎을 폄과 동시에 중신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쿤의 정체를 의심하는 자들 일색이었지만 아무도 토를 달지는 못했다. 괜히 입을 놀렸다가 운태상처럼 불시에 목이 나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개중에 충신의 기개를 가진 자가 큰 소리를 내었다. 남자의 이름은 감찰사(監察司)소속 우천이었다. 

“태자전하, 범이 죽은 것이 벌써 수십 년입니다. 범의 기운을 가졌던 쿤도 흑영이란 자가 마지막이라 알고 있습니다.”

“범의 기운을 가졌던 쿤이 과연 흑영뿐이라 생각하느냐? 그래, 어디 말씀해보십시오 어마마마.”

자비는 다문 입을 깨물었다. 청영이 쿤이란 사실은 환진으로 떠난 흑의대와 이미 죽어 없는 술사들. 그리고 황가의 핏줄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쉬이 말씀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제가 대신 답하겠습니다. 그대는 왜 술사들이 죽었는지 알고 있나?”

“국법을 어긴 자들이었습니다. 처형이 하는 것이 마땅하옵.”

“아니.”

우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극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어마마마께서 술사들을 죽인 이유를 알고 있지. 쿤의 정체에 대해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내실에 모인 모든 이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음은 그 숫자가 가히 스물은 넘기에 소란스러움으로 바뀌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현극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시켰다. 자비는 자신의 아들을 분노에 찬 눈으로 노려봤다. 현극은 그런 자비를 보며 예의 웃음으로 마주하곤 말을 이었다.

“환진으로 넘어간 청영이 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그녀가 죽고 새로운 쿤이 나타났다. 바로 이자다. 희사라고도 하며 쿤이라고도 하지.”

“대체 무엇 때문에 황후마마께서 쿤의 정체를 숨기셨겠습니까?”

우천은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대들은 정녕 모르겠는가? 범이 죽었음에도 그대들은 쿤이란 자를 믿었다. 황제의 말보다 쿤의 한 마디가 파장이 더 강했지. 쿤은 신에 가까웠지만, 황제는 인간이었으니까.”

랑쿤의 시작은 신과 인간이 공존한 세계였다. 현극의 말대로 신은 이미 죽어 없는데 그 영혼을 받은 자들이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쿤. 그리고 랑쿤의 자들은 잃어버린 신을 버리지 못하고 쿤을 신격화시키기에 이르렀다. 흑영은 버려진 땅 황무지에서 지냈으나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하나둘씩 그곳에 늘어나기 시작했다. 만일 흑영이 죽지 않았다면 자비는 어떤 술수를 써서라도 흑영을 직접 죽였을 것이다. 후에 청영이 쿤이 된 사실을 알았지만 자비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환진의 제 1황비를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 일이 들켰을 경우에 랑쿤은 환진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가 없어진다. 흑의대 또한 자비가 상대하기에 편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자비는 청영이 쿤이란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려 했고, 술사들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비의 실수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됐다.

현극은 내실의 수군거림을 더는 제지하지 않았다. 희사를 일으켜 내실을 나가려는 때, 유천이 말했다.

“태자전하를 믿습니다. 허나 그가 쿤이란 것은 쉬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쿤에게 도술을 부려 이 자리에 비가 오게 만들어 달라 할까?”

현극이 비웃었다. 하지만 현극 역시 희사가 쿤인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선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야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현극이 희사의 귓가에 속삭였다. “잠시만 참아. 그러면 끝난다.” 희사는 현극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원래부터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이기도 했다. 현극은 희사를 이끌고 내실을 나섰다. 황제의 내실 밖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황제가 업무에 지칠 때마다 산책을 하는 길이기도 했다. 희사는 그 연못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통나무우리를 발견했다. 희사도 몇 번 그 연못을 지나치긴 했지만, 저 우리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우리 안에는 이를 드러내고 흉포함을 보이는 짐승 한 마리가 갇혀있었다. 버, 범. 아니 호랑이! 희사의 뒤에서 겁에 질린 음성이 터졌다. 어느새 중신들도 현극을 따라나서 있었다. 현극은 희사의 팔을 잡은 채로 우리 앞에선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남자는 양쪽 눈의 검은자가 뒤집힌 것처럼 동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장님이었다. 

“이봐, 그 호랑이가 굶은 지 얼마가 됐다고 했지?”

“예, 전하. 일주일이 넘었사옵니다. 난폭함을 줄여 장삿거리로 써먹기 위해 갓 잡아온 놈입니다요.”

장님의 말을 대변하듯 굶주린 호랑이의 포효하는 소리는 귓가가 아릴 정도였다. 호랑이는 사나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하나씩 쳐다봤다. 가장 맛있는 먹이를 고르려는 짐승의 본능이 그대로 드러났다. 현극은 망설임 없이 희사를 그 우리 쪽으로 이끌었다. 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떠서 현극의 눈을 쳐다봤다. 희사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차가운 눈빛에 희사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장님이 우리의 나무문을 열자 현극은 순식간에 희사를 그 우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희사는 문을 잡고 들어가지 않으려 발버둥 쳤지만 현극의 행동이 더 빨랐다. 희사는 우리 안에 갇힌 채로 호랑이를 대면했다. 

희사는 머리가 쭈뼛 서는 상황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의 힘이 풀린 것이다. 호랑이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녀석의 긴 혀로 훑었다. 천천히 희사의 주위를 돌며 곧 먹잇감의 목덜미를 뚫을 자세를 취했다. 희사는 공포에 질려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여기서 이대로 죽는 것인가 싶었다. 호랑이의 뜨거운 콧김이 희사의 정수리를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현실감이 떨어져 희사는 호랑이의 몸집을 보며 집채만 하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실감했다. 호랑이의 아귀가 벌어짐과 동시에 희사는 눈을 감았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아!”

희사는 호랑이의 송곳니가 자신을 발기발기 찢어 놓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호랑이는 송곳니가 아닌 오돌토돌한 혀를 내밀어 희사의 얼굴을 쓸어 올렸다. 희사는 호랑이가 자신을 죽이기 전에 간을 보려는 것인가 생각했다. 우스운 생각이나 당사자는 절대 재미있지 못했다. 호랑이는 희사의 앞에 네 발을 꿇어 복종하는 자세를 취했다. 희사가 깜짝 놀라 호랑이를 바라봤다. 호랑이의 눈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하게 바뀌어 있었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호랑이의 이마를 만졌다. 부드러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빳빳한 털이 느껴졌다. 호랑이는 마치 주인을 알아보는 개처럼 희사의 얼굴을 연신 혀로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현극이 만족하게 웃었다.

“달리 말이 필요한가? 짐승의 왕이었으며 신이었던 범이 저 작은 몸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희사는 그제야 현극의 뜻을 알았다. 그렇지만 만일 호랑이가 자신을 먹잇감으로 생각해 찢어발겼으면 그대로 꼼짝없이 죽을 뻔한 일이었다. 호랑이에게 온 몸이 찢기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희사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장님이 꼬챙이에 살아있는 닭을 꽂아 우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호랑이가 먹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장님이 우리를 열고 희사를 꺼냈다. 희사는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있지 못할 지경이었다. 현극이 희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본 자들은 전과 다른 눈으로 희사를 응시했다. 신을 믿었던 자들과, 신을 여전히 믿고 있는 자들에게 희사는 새로운 쿤의 탄생으로 확신되어졌다. 단순히 신을 전설로 믿는 것이 아닌 신과 같이 했던 그들이기에 이다지도 쉽게 믿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다시 나타날 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상황을 지켜 본 자비는 차가운 웃음을 내뱉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리 자비가 거짓을 꾸며 술사들을 죽였다하더라도 자비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황제가 살아있을 때는 그녀의 말이 곧 황제의 뜻이었기에. 술사들을 처형하려 일을 꾸민 것은 자비였으나, 그것을 명령한 것은 황제였다. 현극은 멀어지는 여자를 보며 얼굴에 만연했던 웃음을 지웠다. 희사는 안도에 한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게 현극에게 몸을 의지했다. 

“잘 참았다.”

현극은 아이에게 칭찬을 하듯 희사를 달랬다. 그 말에 희사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잘 참았다니, 잘 참지 않았으면 어쩔 것이란 말인가? 희사가 현극을 밀치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쿤이라 알리려는 현극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가득했다.

“희사, 화가 난 것인가?”

할 말이 많은 중신들을 뿌리치고 현극이 희사에게 따라붙었다. 희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처를 향해 걸었다.

“그들을 이해시키려면 저런 극단적인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시겠지요.”

희사가 잔뜩 비꼬며 대꾸했다. 하루 빨리 현극에게 현세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내고 이제 그만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현극이 태자의 궁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열심히 말을 붙였지만 희사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희사는 만지기도 싫은 뱀 모양의 문고리를 발로 차서 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희사의 포악함에 현극이 하, 하고 웃음을 토했다. 침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다홍일색이라 희사는 방에 와서도 기가 질렸다. 서현도 태휘도, 그리고 현극까지 자신은 여자가 아니건만 다홍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방의 색이 온통 현란했다. 

“화내지 마라, 네가 죽지 않았으면 된 것 아닌가?”

“죽지 않았으면요? 아, 그럼 제가 죽었으면 또 그걸로 된 것이겠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 그 호랑이는 절대 너를 죽이지 않는다.”

“이유를 물어보면 제가 쿤이기 때문이라 대답하시겠군요.”

“하하하.”

현극이 날카롭게 쏘아보는 희사를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현극의 웃음은 많이 접했지만 이처럼 그가 박장대소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희사는 놀림 받는 상황에 점점 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설마, 내가 그런 어쭙잖은 이유로 너를 그 우리에 밀어 넣었다고 생각하나?”

웃음을 끊지 못한 현극이 눈초리를 닦는 시늉을 했다.

“그 호랑이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손에 길러졌다. 그러니 개와 같지. 절대 사람을 물지 않는다.”

희사는 기가 막힘에 입을 벌렸다.  

“장님이 수렵꾼들과 잡아온 산 호랑이와 시장에서 장사용으로 길러진 호랑이를 몰래 바꿔치기를 했지. 장님이니 그 호랑이가 자신이 잡아온 호랑이인지 아닌지 그가 알 턱이 있겠나? 하하하.”

희사는 할 말이 더욱 없어져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리도 떨었다니. 아니 알았다고 해도 호랑이를 마주하는데 오금이 저리는 건 매한가지 일 것이다. 

“이제 슬슬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인내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지.”

현극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며 희사의 머리카락을 만져댔다. 희사는 그 손길을 쳐냈다. 

“나를 자극하지 마라. 오늘 밤을 평소와 같이 보내고 싶으면.”

희사는 턱을 괴고 답답한 시선으로 한 곳만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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