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겁환상(前劫喚想) 下 2화 (9/21)

2.

희사가 현극의 방을 찾았을 때, 현극은 진작 랑쿤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국의 태자임에도 데려온 하인 하나 없이 혼자뿐이었다. 비공식적인 방문에 여러 무리를 데리고 이동한다면 눈에 띄기 마련이긴 했다. 현극은 희사의 결정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여유가 있었다. 

“나를 따라 가기로 결정했는가?”

“네, 하지만 제 목적을 이룰 때까지만 입니다. 만일 도착하는 날에라도 당장 제 목적이 실현되면 전 주저 없이 태자님을 떠날 것입니다.”

다소 일방적인 계약에 현극이 비웃었다.

“심히 그대에게 유리한 조건이군.”

“거절하시겠다면 지금이라도 말씀해주시죠.”

“아니 아니, 그대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방도가 그리도 쉽게 나올 것이었다면 나를 따라 랑쿤까지 가지도 않겠지. 그러니 나는 그 방도를 찾는 기간이 꽤나 길 것이라는데 내기를 걸어보지. 하하.”

현극은 규태휘에게 아무런 인사 없이 북방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규태휘는 해훈이 희사를 지키고 있는 이상, 희사가 아무데도 떠날 수 없을 것이라 안심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위치는 해훈이 훨씬 높지만 속사정으로는 희사가 더 높은 위치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현극과 희사는 며칠 동안 갈아입을 옷가지와 음식을 챙겨서 규성주 궁 내부를 벗어났다. 희사가 떠나면 해훈도 곧 북방을 벗어나 황궁으로 향할 것이다. 희사는 손에 지니고 나온 나비 장신구를 장옷의 속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현극과 희사는 성문 근처에 배치된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지기가 현극을 알아보고 묶여있던 그의 말을 밖으로 끌어내주었다. 현극이 랑쿤에서부터 타고 온 토리라는 이름의 말은, 산과 계곡을 막론하고 달릴 수 있는 뛰어난 준마로 현극이 가장 아끼는 녀석이었다. 사실상 궁을 벗어난 뒤 말을 사서 떠나는 것이 가장 안전했으나 현극은 자신의 말을 버려두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제후인 규성견의 건강이 좋지 않아 그의 일을 대신 처리해야하는 규태휘가 현극의 말 한필 사라지는 것을 쉽게 알아챌 리가 없었다. 현극이 말 위에 올라타며 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희사는 그의 손을 잡기 전, 두건처럼 생겨 머리를 감쌀 수 있는 장포 안으로 칭칭 동여맨 머리카락을 말아 넣었다. 북방의 백성들 중 현극과 희사를 알아볼 사람은 없기에 굳이 얼굴을 숨기지 않아도 별반 문제는 없었다. 현극이 조심성이 많아 보이는 희사를 돌아보며 픽하고 웃었다. 희사의 오른팔을 위로 잡아끌자 가벼운 몸은 쉽게 들렸다. 희사는 지끈하는 어깨의 고통에 신음을 삼켰다. 

자주 북방을 찾음으로서 이미 궁 밖의 마을에 익숙한 현극은 미리 봐뒀던 마방으로 향했다. 현극이 향하는 마방은 규성주에서도 내로라하는 상인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곳으로 말을 빌려주기도, 살 수 있기도 한 장소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에 일각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어서 오십쇼.”

손을 싹싹 비벼가며 상인이 현극에게 인사했다. 상인은 푸른색의 비단을 입고 있는 현극을 봉 잡았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푸른색의 비단은 저 멀리 남방지역에서나 들여올 수 있는 값비싼 천이었다. 현극이 먼저 말에서 내려섰다. 현극이 손을 내밀기도 전에 희사가 바닥으로 쿵하고 다리를 떨궜다. 

“어이쿠, 이 비단이 아무에게나 어울리는 것이 아닌데, 손님께선 아주 훌륭한 미남자이십니다요.”

“말 한필 튼튼한 녀석으로.”

현극은 상인의 아첨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차갑게 말을 뱉었다.

“어디로 가시게요? 산을 타고 넘어가실 거십니까? 아니면 장시간 평지를 달리실 거십니까요?”

“둘 다 할 것이니 이곳에서 가장 뛰어난 준마로 사겠다.”

총 세 개의 큰 울타리로 이루어진 마방은 말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상인은 그 많은 말들 중에서 허벅다리와 목 근육이 제일 튼실한 녀석을 데려왔다. 윤기가 흐르는 진한 갈색말이었다. 고삐에 끌려나오는 말이 어서 달리고 싶다는 듯 거칠게 푸룩푸룩 투레질을 하였다.  

“이리 와서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말들 중에서도 최고로 뛰어난 명마랍니다.”

상인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의 안장을 툭툭 쳤다. 

“나쁘지 않군. 얼마인가?”

“사실은 이 말은 팔려고 데려온 녀석이 아닙지요.”

가격을 올리려는 상인의 행태에 현극이 피식 웃었다. 흥정 따위는 됐다면서 은화 다섯 닢을 휙 던져주었다. 상인의 입이 쩍 벌어지며 순식간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기쁨이 극에 달한 표정이었다. 희사는 말 한 필의 가격이 얼마나 가는지 모르기에 그저 현극의 뒤에 서서 가만히 있었다. 상인은 넙죽넙죽 바닥에 머리까지 박아가며 현극에게 절을 했다. 현극은 상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휙 하고 희사의 허리를 잡아서 방금 구입한 말 위에 올려주었다. 희사는 자신의 힘으로 올라타려고 했지만, 그의 손길을 거부할 새도 없었다.

“혼자 탈 수 있겠나?”

“해봐야죠.”

“조금 가다보면 익숙해 질 거다.”

“네.”   

희사가 올라탄 말은, 희사가 말 타기에 익숙지 않은 것을 아는 듯 아까의 흥분된 기색을 지우고 얌전히 굴었다. 현극도 말에 올라타며 말의 엉덩이를 때려 박차를 가했다. 현극이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해 뒤따라오는 희사를 확인했다. 희사는 말 위에서 몇 번이나 휘청거림을 반복했다. 그리 빠르지 않게 달리는 현극을 따라가는 것만 해도 곤욕이었다. 현극은 속도를 조절해가며 희사가 완전히 말에 익숙해질 때까지 인내심 있게 행동했다. 두 마리의 말이 순서대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내를 질러나갔다. 

그때, 춘권을 손에 든 아이가 무작정 말이 달리는 길로 뛰어들었다. 아이는 뒤늦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말을 보며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다행히 현극의 말이 순발력 있게 아이를 뛰어 넘어섰고, 아이는 기겁을 하며 뒤로 자빠졌다. 현극은 자신의 말이 아이를 밟을 뻔했음에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희사는 깜짝 놀라며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희사의 말이 제자리걸음을 하며 뜨거운 콧김을 내뱉었다. 아이가 어디 다친 데가 없나하여 아래를 보자 어린 녀석이 씩씩하게 몸을 털고 일어섰다. 아이는 희사를 귀족이라 생각했는지 허리를 잔뜩 굽혀 인사를 했다. 희사는 금세 멀어진 현극 때문에 아이에게 더는 신경을 써줄 수가 없었다. 다시 말을 재촉했다. 희사는 현극의 짧은 뒷머리를 보며 간신히 따라가기를 반복했다. 

무사히 규성주 시내를 거의 벗어났을 무렵, 희사의 시야에 검붉은 깃발이 잡혔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의 그림은 쉬이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었다. 깃발을 든 여러 무리의 말을 탄 자들은 열을 맞춘 채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희사의 말이 반대에서 다가오는 말들의 기세에 놀라 앞발을 높이 들었다. 희사는 낙마하지 않기 위해 말의 고삐를 꽉 붙들어 맸다. 그 반동에 상체가 뒤로 휘청하며 두건에 숨긴 머리카락이 쏟아지며 마구 흩날렸다. 춤추는 머리카락이 불편했지만 말 위에서 다시 묶기란 쉽지 않았다. 희사는 순식간의 속도로 자신을 지나쳐간 붉은 깃발 무리들을 뒤돌아봤다. 희사는 그 순간 선두에 타 있는 어떤 인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 인영은 거센 흙바람 때문에 코와 입을 가린 복면을 쓰고 있었다. 희사는 무심히 고개를 돌리곤 조금 속력을 가해 멀어진 현극을 따라갔다. 

“……사!, 희사! 희사!!!”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던 음성이 어느 한순간 희사의 귓가를 스쳤다. 희사는 잘못들은 것이라 생각해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그때였다. 현극이 갑자기 달리던 말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뒤돌아 희사를 봤다. 아니 정확히는 희사의 뒤를 따라붙은 무리들을 봤다. 희사도 현극의 아연한 얼굴에 뒤를 돌아봤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자의 복면이 그의 손에 의해 벗겨져 나갔다. 그러자 멀리서도 알아 볼 수 있는, 지독히도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서현……. 희사의 가슴이 미칠 듯이 두근거렸다. 공포? 두려움? 분노? 아니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심장의 울림이었다. 현극이 말을 돌려 희사에게 다가왔다. 그 상태로 희사의 허리를 잡아 자신의 뒤로 희사를 태웠다. 현극이 순식간에 그의 긴 소맷자락을 부욱하고 찢었다. 희사가 타고 있었던 말의 눈을 찢겨진 푸른 비단으로 동여맸다. 말의 엉덩이를 후려치자 푸른 비단에 의해 시야가 가려진 말이 서현의 무리를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말은 그들과 충돌이라도 할 듯 거침없이 돌진했다. 

“꽉 잡는 게 좋을 거다.”

현극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희사와 현극을 태운 말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되지 않는 속도로 북방을 벗어났다. 희사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서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지만 현극의 허리를 꽉 감싼 채로 앞을 응시할 뿐이었다. 

북방에서 랑쿤으로 향하는 길은 가파른 산길이 대부분이다. 그 산길에도 지름길은 분명 있었다. 현극은 그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서현은 아니었다. 재빠르게 시내를 벗어나 산길을 향하는 그들을 보며, 서현은 자신의 등 뒤에 매달린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표적을 정확히 맞추기란 쉽지 않다. 서현은 몇 번이고 활시위를 다시 고쳐 잡으며 때를 기다렸다. 서현은 기회가 포착된 순간 망설임 없이 화살을 날렸다. 날아간 화살은 희사의 머리 위. 바로 현극의 어깻죽지에 꽂혔다. 

희사는 푹하고 살점이 찢어지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현극의 어깨에 화살의 촉이 박혀있었다. 현극은 신음 하나 내지 않고 여전히 앞만 향해 달렸다. 산길을 꿰고 있는 현극은 조금만 더 들어가면 서현들을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현극은 어깻죽지에 박힌 화살을 반으로 부러뜨렸다. 현극의 피가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댄 희사의 뺨까지 흘러내렸다. 희사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현극이 가는대로 몸을 맡겼다. 말의 거친 숨소리가 산을 가득 메우고, 이리저리 산길을 꺾으며 내달렸다. 평범한 말은 뛰어넘지 못할 장애물을 현극의 말은 두 사람을 태우고도 가뿐히 건너뛰었다. 현극의 애마인 토리는 태어날 때부터 평탄한 길보다 가파른 산길을 뛰어다녔다. 현극은 환진을 넘어올 때면 늘 토리를 데려왔다. 뛰어난 명마의 피를 이어받아 커다란 체구부터가 남달랐다. 다리 근육은 일반 말들의 두 배이며, 녀석의 제일 큰 장점은 겁이 없다는 거였다.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현극은 오늘 만큼 토리가 대견하다고 생각한 적도 드물었다. 여태까지 환진에서 랑쿤으로 향하는 데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근 한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려 나간 현극이 드디어 뒤따라오던 자들을 따돌렸다고 확신했다. 그리고도 반시진 이상 더 달려서야 말을 혹사시키던 것을 멈췄다. 현극의 상의 뒤편이 화살에 의해 흘러내린 피로 흥건했다. 다행히 깊이 박히지는 않아서 앞으로 랑쿤까지 향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을 듯 보였다. 현극은 아직 살얼음이 얼어있는 계곡물로 토리를 이끌었다. 튼튼한 것이 자랑인 토리도 힘에 부치는지 끈적한 침을 흘리며 거센 숨을 몰아쉬었다. 현극은 토리의 안장에 매달린 옷 보따리를 풀어헤쳐서 허리끈을 빼내었다. 

“어깨를 지혈하게 당겨라.”

복부를 다 덮을만한 넓이의 허리끈은 화살촉을 빼내고 상처를 감싸는 데 충분한 크기였다. 희사는 그 허리끈을 현극의 어깨에 두어 번 둘러매서 자신의 어깨와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 희사의 상처는 거의 아물어 가는지 커다란 충격 없이는 별다른 통증이 없었다. 

“하하, 하하하.”

응급한 처지를 마친 현극이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계곡물을 마시는 토리의 갈기를 쓱쓱 쓰다듬었다. 현극은 곧 어깨의 통증에 웃음을 멈추었다. 희사는 이상한 현극의 태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던 서현의 목소리만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북방에서 만난 서현은 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자신을 부르던 그 목소리는 가슴을 저밀정도로 애가 탔다. 희사! 희사! 하고 외치던 서현의 목소리는 아무리 떨쳐내도 떠날 줄을 몰랐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무시할수록 더 선명해졌다.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일부러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의 절규에도 가까운 외침에 연민과 고통이 밀려왔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 미워하고 증오해야 할 서현인데 왜 자꾸 그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거지? 그를 끔찍이도 싫어하기 때문에 생각한다는 변명은 집어치워. 서현을 미워하고 증오하게 된 이유가 뭔데? 당연한 걸 묻지 마. 그가 전생의 내 부모를 모두 죽였기 때문이잖아. 그리고 이유가 어찌됐든 나를 함부로 대하고 고통스럽게 했어. 

희사는 그만 생각하라며 머리를 쾅쾅 내려치고 싶었다. 현극을 통해서 한 번 깨우친 사실들은 둑이 열린 것처럼 마구 쏟아져 내렸다. 

그를 정말 증오해? 그래, 너무 끔찍하도록 증오해. 그렇지만 서현을 그렇게 만든 것은 너 일지도 몰라. 그래,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내게 한 짓들을 전부 증오해. 그가 네게 무슨 짓을 했는데? 억지로 안은 것? 너희 부모를 죽인 것? 그리고 높은님 행세를 하며 너를 속인 것? 사실 그 어느 것 하나 그를 완벽하게 미워할 이유할 이유는 없어. 네 가문이 그를 먼저 배신했고, 네 부모는 현성이 죽였잖아. 그런데도 모든 책임이 서현에게 있다고 생각해? 그가 우리 가문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 정의야? 예를 들어 규태휘를 봐. 그가 너를 억지로 안았어도 넌 그에게 일말의 감정이나 서현만큼의 증오심이 없지. 왜일까? 너는 서현처럼 규태휘를 증오해야 하잖아. 하지만 너는 규태휘가 죽기를 바라지 않지? 그저 따끔할 정도의 벌만 받았으면 했잖아. 너도 알고 있어. 남자인 네게 있어 강간은 수치스럽고 화가 나지만 거기까지일 뿐.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아니야. 서현의 경우는 네 스스로가 고통스러운 굴레를 만든 것이고. 안 그래? 

희사는 스스로에게 자문자답을 하며 깊은 소용돌이에 빠졌다. 그 때 현극이 정신을 못 차리는 희사를 건져 올리듯 웃었다.

“정말 재미있어, 그 서현이. 환진의 태자가 너를 위해 이곳까지 오다니. 하하. 아니 태자뿐만이 아니지, 황자까지 북방에 있으니 규태휘는 죽을 맛이겠군.”

현극은 방금 죽을 위기를 넘긴 사람답지 않게 쾌활했다. 현극에게 있어 죽음에 가까운 것이야 말로 생의 의미를 갖게 하는 순간이었다. 현극은 죽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죽일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두 팔을 벌려 환영해줄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현극은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만일 그 할 일이 성사가 되지 않는다면 현극은 자결하기로 결심했다. 희사는 현극의 속내를 모르는 채로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혀있었다.  

“앞으로 사나흘은 달려야 랑쿤에 도착한다. 수도까지 가려면 또 이레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지.”

“그렇군요.”

“우선 마을에 들러 상처를 치료해야겠군.”

현극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운용하며 희사를 토리 위에 태웠다. 토리도 기력이 되돌아와서 좀 전부터 다시 달리자고 아우성이다.

“저 산꼭대기를 지나기 전까지는 굉장히 추울 거다. 이틀은 쉬지 않고 달릴 테니 말 위에서 자는 연습이라도 해두는 게 좋겠군.”

현극은 토리의 허리춤에 매달아 두었던 두꺼운 곰 가죽을 희사의 어깨에 덮어씌웠다. 안 그래도 이미 으슬거리는 추위가 찾아오고 있었다. 하루를 꼬박 달려 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제의 추위는 별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극은 북방에서 입고 있던 옷과 별 다를 것이 없는데도 추위에 떠는 일이 없었다. 희사는 몸을 최대한으로 웅크려 촘촘한 털이 달린 곰 가죽을 덮어썼다. 뜬 눈으로 계속 같은 풍경만 보고 있자니 달리는 말 위에서 못잘 것도 없지 싶었다. 현극의 말대로 산 정상에 도달했다 다시 내려가니 기온이 점점 올랐다. 곰 가죽이 필요 없을 때쯤 되자 저 멀리 점 같은 마을이 보였다. 그 점이 원래의 크기로 보이는 데는 또 반나절이 걸렸다. 현극은 마을의 입구에서 토리를 세웠다. 현극이 고개만 살짝 돌려 희사에게 말했다.

“환영한다. 랑쿤의 첫 도시에 온 것을.”

현극이 주점에 토리를 맡기고 요깃거리를 주문했다. 희사도 며칠 째 마른 육포만 먹었기에 속이 쓰릴 정도였다.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으로 위를 채워서인지 희사는 평소의 절반도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놓아야했다. 반대로 현극은 삶아서 나온 닭고기며 돼지고기며 할 것 없이 싹싹 먹어치웠다. 일반 백성들처럼 거리낌 없이 식사를 하는 모습은 일국의 태자 같지 않은 면모였다. 희사도 마을에서 보이는 현극의 이런 모습에 몇 번이나 놀랐다. 차가우면서도 기품 있던 행동과 태자로서의 오만함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배를 채운 현극은 의원의 집을 들려 상처를 치료 받았다. 희사는 그 동안 의원의 집 안 뜰에서 토리와 단둘이 기다려야했다. 

현극이 의원의 방에서 나오며 어깨를 앞뒤로 흔들었다. 고통이 몰려오는지 설핏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자고 가겠나? 아니면 그냥 가는 것이 좋겠나?”

“저는 괜찮은데 태자님께서는 이곳으로 오면서 한 번도 주무시지 않으셨습니다.”

“일주일 정도는 자지 않아도 상관없다.”

“황궁까지 앞으로 이레가 걸린다 하셨으니,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실 희사는 어서 황궁에 도착해 현극에게 술사들을 소개 받고 싶었다.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현극은 생각해줘서 고맙군. 이라 말하며 픽 웃고는 다시 주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점은 숙박도 같이 겸하고 있었다. 현극이 마구간에 토리를 맡기고 방을 잡았다. 

“어이쿠야, 손님. 방이 하나밖에 없는뎁쇼?”

“그럼 할 수 없지. 그거 하나만 줘.”

“네이, 네이. 부인분과 찐하게 보내십쇼잉.”

턱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주점 주인이 뒤뚱거리며 현극과 희사를 앞장섰다. 주인은 장옷에 달린 두건으로 머리를 감싼 희사를 여자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현극이 웃으며 희사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희사는 장난으로라도 이런 짓을 하는 현극의 행동이 불쾌했다. 현극의 품에서 억지로 벗어나자 주인이 능글맞게 웃었다.

“으흐흐, 부인이 아주 앙칼지십니다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쇼.”

희사는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해 그들을 무시한 채 주인이 문을 연 방으로 들어갔다. 장옷을 벗고 이내 의자에 주저앉았다. 단 며칠 고생한 것인데, 온몸에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현극도 흙이 잔뜩 묻은 신과 긴 겉옷을 벗었다. 하나 뿐인 침상에 현극이 먼저 털썩 누웠다. 희사는 의자 앞 탁상에 상체를 무너뜨렸다.

“이리로 와라.”

현극이 침상의 옆 빈자리를 툭툭 쳤다.

“됐습니다. 전 여기면 충분합니다.”

“하룻밤 묶고 갈 것인데, 거긴 말 위보다도 더 못해 보인다. 내가 너를 어찌 할 것도 아니니 옆에 와서 자도 된다. 그리고 어찌 할 것이었으면 이미 그 산속에서 해치웠겠지.”

털을 곤두세우는 희사를 보며 현극이 비웃었다. 희사는 입을 꾹 다문채로 침상으로 향했다. 지금은 자신의 얄팍한 자존심보다도 침상의 유혹이 더 컸다. 얌전히 침상에 누운 희사는 이 딱딱한 침상이 마치 구름 위만큼이나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 만큼 몸이 고되었다는 소리다. 

현극은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멀쩡한 팔을 머리 뒤로 베곤 나무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희사는 현극의 첫 인상을 보곤 차갑고 거만한 태자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거만했지만 건방지진 않았고, 차가웠으나 적당히 자신을 챙겨줄 줄 알았다. 산을 넘는 내내 따뜻함을 유지해주던 곰 가죽도 희사에게 양보했다. 희사는 점점 더 현극이란 남자에 대해서 알 수가 없어졌다.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네.”

희사도 아직 잠이 들지 않았기에 바로 대답했다.   

“네가 말하는 현세에서 과거로 돌아온다는 느낌은 어떻지?”

“어떤 느낌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너는 미래에서 과거로 되돌아 온 것이지 않나. 하물며 너는 이곳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 직접오니 익숙했나? 아니면 새로웠나?”

“익숙한 것도 있었고, 새로운 것도 있었습니다.”

“만일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오게 된다면 과연 그 자는 쉽게 적응할 수 있을까?”

해훈이나 서현의 경우를 뜻했다. 물론 둘 다가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사람 나름이겠죠. 저는 알고 있는 세계임에도 적응하기 힘들었으니까요. 저와 다르게 서현은 곧 적응했던 것 같고요.”

“그렇군. 그대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면 무엇을 할 거지?”

“살던 대로 살아야겠죠. 먹기 위해 돈을 벌어야겠고……. 돌아가게 되면 요리를 배울 생각입니다.”

희사는 현극에게 이런 소리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몸을 가누기 힘든 피곤함에 그리고 며칠이나 같이 고생을 했던 터라 어느 정도의 경계심도 누그러진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지독한 피곤함에 몽롱해진 정신은 머릿속에서 떠오른 대로 이야기를 하도록 만들었다.

“요리? 음식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 건가?”

“네. 그게 제가 그곳에서 하는 일입니다.”

“신기하다. 네가 살다 온 곳에선 남자가 직접 음식을 만드는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만들고 싶은 사람이 만듭니다. 제가 하는 일은 여기 밑의 주점과도 비슷합니다. 저는 그 곳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하죠.”

“그래, 그대는 그곳에서 귀족은 아니었나보군.”

희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현극에게 희사의 현세를 이해시켜주려면 하룻밤을 지새워도 부족할 터였다.

“그곳은 신분의 차별이 없습니다. 귀족도 없고, 황제도 없죠.”

희사는 현극이 놀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조용한 반응에 오히려 자신이 더 놀랐다.

“범과 그가 말했던 세계와 같군.”

“네?”

“아니다. 그대는 차라리 이곳에서 귀족으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근본이 그곳인데 이곳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서 행복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희사는 전생을 기억해도 현대인이다. 전생에 갇혀서 산들 행복할 리가 없다.

“그대는 내가 생각해왔던 쿤과는 많이 다르다. 쿤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니, 그 전 쿤들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희사는 점점 현극의 말소리가 멀어져갔다. 몸이 침상 안으로 푹 꺼지는 기분이었다. 

“쿤의 능력이 각기 사람마다 다른 것은 알고 있나? 내가 아는 것은 흑영과 청영뿐이다. 그들은 비슷한 영혼을 가졌지. 그래서인지 같은 능력을 가졌고.”

희사는 현극의 말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정신과 몸이 서서히 분리되고 있었다.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희사, 어이. 자는 건가?”

희사는 현극에게 웅얼거리는 대답만 한 뒤 잠의 깊은 나락으로 빠졌다. 현극은 눈을 감은 희사의 얼굴을 보며 늘 다정했던 그래서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마음을 부서뜨렸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현극은 손을 내밀어 희사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마치 위안이라도 받듯 현극의 표정엔 전에 없던 그리움이 떠올랐다. 차마 그 그리움의 주인 된 이의 이름을 부르진 못했다. 현극은 앞으로 자신 때문에 불어올 파란을 예감했다. 하지만 무섭지도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씩 마음이 평온해져 갈 뿐이었다. 현극은 한참이나 희사의 잠든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현극이 잠드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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