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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겁환상(前劫喚想) 下 1화 (8/21)

[채팔이] 

전겁환상(前劫喚想) 下 1    by  

2010-09-12 20:55:05 , Monday 

본편에 앞서, 외전인 진생환상은 희사의 본 전생 이야기 입니다. 

하편을 읽기 전에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겁환상(前劫喚想) 下 

1.

밤사이 황궁을 가로질러 북방으로 향하는 말발굽의 소리가 요란했다. 선두를 달리는 남자의 어깨부터 시작해 등 뒤를 전부 감싼 짙은 어둠을 닮은 휘장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나부꼈다. 남자의 그림자와도 같은 직속 근위대 다섯만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여명 직후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하는 부지런한 노인이 마을 어귀에 걸린 두 개의 등불을 소화(消火)했다. 그런 노인의 옆을 가로질러가는 말은 거침이 없었다. 선두에 선, 어둠에서도 빛을 발할 정도의 미남자가 노인을 향해 흘끗 시선을 주곤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관심을 거뒀다. 노인은 흙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인영들을 봤다. 흙바람은 새벽안개와도 같아 노인의 시야를 캄캄하게 만들었다. 노인은 그들이 안개 속에 완벽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세월에 변색된 탁한 목소리가 노인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바닷가 개가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잡히는 자는 바로 그 짝이구먼.”

노인은 끌끌끌 웃으며 손에 쥔 지팡이를 탁탁 집고 걷기 시작했다. 흙바람은 그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제자리를 찾았다. 그 노인이 서 있는 곳은 황성에 근접한 행성주(杏聖州)의 마을 어귀. 노인은 천덕꾸러기 여식을 황궁으로 보낸 자로, 환진 내에선 행성대신이라 불리는 곽제훤이었다. 

거침없이 목적지만 향해서 달리던 남자가 갑자기 말의 고삐를 뒤로 잡아 당겼다. 울음소리와 함께 말이 뜀박질을 서서히 멈췄다. 뒤이어 오던 근위대들의 말이 저마다 다투어 앞다리를 들며 우렁찬 짐승의 소리를 내뱉었다. 남자가 속도를 줄인 이유는 지나쳐온 단 한 명의 노인 때문이었다. 

방금 지나쳐 온 것이 행성주라. 행성제후이기도 하며 대신(大臣)이라 불리는 자가 그리도 부지런하고 사람의 위치에 있어서 종놈과 양반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하였다. 대신(大臣) 스스로가 매일 아침 마을 어귀의 등불을 끄고 해가 지는 저녁엔 등불을 밝힌다더니. 뜬소문은 아니었나보군. 하며 남자가 웃었다. 갑자기 멈춰선 남자의 뒤로 근위대 중 하나가 말을 건넸다.

“태자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환진의 태자는 다시금 말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잠깐의 눈을 붙일 시간을 제외하곤 끝도 없는 길을 달려나갔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날까지 예외는 없었다.

“도대체 너를 이해할 수가 없군.”

희사의 방으로 돌아온 해훈의 목소리엔 감정이 실려 있었다. 희사는 탁상 의자에 앉아 해훈을 마주봤다. 해훈은 딱딱하게 선 자세로 희사를 내려다봤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해훈 당신의 이러한 행동이야.”

“내가?”

비꼬듯 말하는 해훈의 태도에 희사는 답하지 않았다. 해훈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십분 이해한다. 납치든 도망이든 자신은 죄인의 몸을 하여 황궁을 벗어났고, 흑의대가 지켜야 하는 쿤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가자 했던 해훈의 심중은 헤아릴 수 없었다.

“난 어디로도 가지 않겠어, 황궁으로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유곽은 더더욱.”

“그럼 어쩔 생각이지?”

“서현과 당신에게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난 어디든 좋다.”

해훈이 허리춤에 걸린 검집을 꾸욱 쥐어 잡았다. 해훈은 희사를 향한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희사는 해훈의 손에 검집이 으스러지지는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당신이 내게 이렇듯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어.”

희사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올리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네가 좋다.”

“뭐?”

“네가 좋다했다.”

희사는 탁상에 팔꿈치를 올린 채로 해훈을 올려봤다. 멍하게 벌어진 입술은 이어질 말을 담지 못하고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내가 쿤이라서?”

“아니, 네가 희사라서 좋다.”

해훈의 눈빛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희사는 이곳으로 넘어와서부터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자신을 이제 그만 복잡하게 만들어도 될 텐데 상황은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희사는 옆으로 돌렸던 몸을 틀어 해훈을 마주봤다.

“나를 좋다한다라? 나는 여자도 아니며, 남자다. 해훈 당신 역시 그것을 알고 있지 않아?”

“물론이다. 그러니 더는 부정하지 않겠다. 너를 처음 본 현세에서도 네게 향하는 내 감정을 그저 착각이라 치부했지. 이제 아닌 것을 알았으니 행할 뿐이다.”

“난 당신을 믿지 못해. 당신이 나를 좋아한다 말하는 것도 과연 진실일지 궁금해.”

“내 생에 사람을 아름답다 생각한 것은 그때도 지금도 네가 처음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면 내가 아닌 서현을 좋아해야하는 것이 정답 아닌가?”

희사는 저도 모르게 비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이유는 필시 네가 기억하는 전생의 일 때문이겠지. 넌 내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아니라곤 말하지 못하겠지. 내가 알고 싶은 사실도 바로 그거다. 네가 기억하는 전생.”

“말하기 싫다면?”

“어느 때가 되던 기다리겠다.”

해훈의 손이 희사의 머리 위로 다가왔다. 희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주시했다. 희사가 미처 올리지 못했던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슬쩍하고 뺨에 닿는 해훈의 손이 뜨거웠다. 희사는 순간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을 그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내게 감정을 속삭이는 당신을 어찌 믿을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기도 했다. 

해훈의 고백이 그가 배신한 것을 기억하기 전이었다면, 심장이 터져버릴 정도로 기뻐했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불신이 너무 커져있었다. 하물며 전생에서 자신을 배신한 해훈은 처음부터 현세의 사람이었다. 희사는 문득 자신이 해훈을 좋아했던 감정이 정말로 사랑이었나를 떠올렸다. 그가 쥐어준 아름다운 나비 장신구와, 유악산을 같이 오르며 행복해했던 날들. 그 감정은 전부 전생의 자신이 아닌, 그 전생을 꿈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자신의 감정이었다. 희사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렴 어떤가, 더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의 일에만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여서가 아니니 오해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어차피 희사와 해훈은 운명이라는 파도 위에 한 배를 탔다. 물론 서현도 마찬가지지만. 희사는 기억하고 있는 원래의 전생을 굳이 숨기려 급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사자들이 이곳으로 다시 넘어온 마당에 자신만 알고 있어봐야 이득이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은 분명 자신의 합리화다. 해훈에게 이야기를 하려하는 이유는 유치한 복수심도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건 당신은 나를 배신했는데, 어찌 내게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단 말이지? 라는, 희사는 감정적으로 변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전생은 지금까지는 거의 흡사해. 서현에게 내 일족이 몰살을 당했고, 그 후에 나만 살아남아 유곽으로 팔려나갔지. 역모죄에 관한 것은 거의 기억하지 못해. 정말 우리 일족이 역모를 꾸민 것이 사실이었단 건 이곳에 돌아와서 알았으니까. 거기에 대해선 나 역시 할 말은 없어. 그 후에. 차라리, 서현이 나를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내 몸을 가지고 놀기 바빴지. 나를 유곽으로 보낸 것도 그 이유에서일 테고.”

희사의 무덤덤한 말투에 해훈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유곽에 있을 때 해훈 당신이 내 호위무사로 배정됐지. 난 당신이 제 2황자인 것 따위는 몰랐어. 그저 당신은 내게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일족이 멸살당한 이후 누구도 주지 못한 신뢰라는 것을 주었고.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게 있어선 치유의 시간과도 같았다고 생각해.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당신이 내게 도망가자 말했지. 나 역시 당신을 사랑……. 아니 그 감정에 대해선 이제 와서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당신과 같이 도망치기로 결심했고, 그날 당신이 나를 배신했어.”

미세하게 금이 간 미간 외에는 해훈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기억도 못하는 자가 용서라도 빌고 후회하길 바랐던 건가? 희사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당신과 도망친 유악산에서 요깃거리를 가지러 내려간 당신을 기다리는데, 근위병들을 대동한 서현이 오더군. 그리고 당신이 돌아왔어. 당신이 했던 말이 난 아직도 잊히지 않아. 나를 가지고 놀았다 했지. 내가 다시 서현의 노리개로 다시 황궁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내 마음을 가지고 잠시라도 희롱할 심산이었다고……. 그래, 그게 끝이야. 그 후에 난 유악산에서 죽었으니까.”

“누가 너를 죽였나?”

“아무도. 나를 죽인 사람은 없어. 동기를 부여한 사람들은 있어도.”

긴 이야기를 들은 해훈이 희사를 향해 괴로운 눈을 들었다. 그럴 리 없다고, 해훈은 자신이 희사를 배신할 일이 없다고 전했다. 

“그러니 내가 지금의 당신을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없지 않아?”

“혹, 사정이 있어서란 생각은 하지 않는가?”

“사정이 있다하더라도 신뢰가 무너진 것은 어찌할 수 없어.”

“억울하군.”

“무엇이?”

“전생의 내가 했던 일 때문에 지금의 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

희사는 전생의 당신이든, 현세의 당신이든 같은 자라고 말하고 싶은 대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남겨두어야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와서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은 자신만이 알아야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전부를 알려주면 자신이 들고 있는 패는 모두 사라진다. 해훈은 한참동안을 희사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희사는 해훈이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문을 향하는 해훈의 걸음에는 미련이 묻어났다. 문득 그 상태로 돌아보지 않은 그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신뢰를 잃었다면 믿게 해주겠다. 그러면 되지 않는가.”

희사는 답하지 않았다. 해훈 역시 답은 필요 없다는 듯 방을 나섰다. 희사는 해훈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탁상 위에 상체를 전부 쓰러드렸다. 양 팔을 맞물리게 해 그 위에 얼굴을 기댔다. 고요한 방에 의자가 길게 끌리는 소리가 났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 태휘와 현극도 해훈의 정체를 알게 됐으니 그들 맘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서현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나, 과연 그가 조용히만 있을까도 걱정됐다. 해훈이 이제와 자신에게 감정을 부딪쳤다면, 서현은 자신을 만난 순간부터 감정을 부딪혀왔다. 

서현이 원하는 것이 전생의 희사인지 아니면 지금의 자신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전생의 희사인 것이 클 테지만. 서현과 실질적인 시간을 오래한 자는 바로 전생의 희사니까 말이다. 변해버린 자신은 그가 원하는 희사가 아닐 수 있다. 단지 껍데기만 같을 뿐이다. 희사는 서현에 대해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이 이상했다. 그가 자신을 싫어하면 더 좋았고, 멀어질수록 감사해야했다. 헌데 그의 마음이 향하는 행방에 대해서 궁금해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실소만 흘러나올 뿐이다.

희사의 뒤통수가 따가웠다.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탁상에 엎어진 상태로 고개만 돌리자 방안에 홀로 남겨두었던 토식이가 융단 위에 여전히 토실한 엉덩이를 댄 채 희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복잡한 사연의 희사를 위로하듯 평소의 극성맞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희사가 허리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스락 거리는 비단자락 소리에 토식이의 귀가 여러 번 쫑긋거렸다. 희사가 토식이의 앞으로 다가가자 토식이도 통통한 엉덩이를 일으켜 앞으로 펄쩍 뛰어왔다. 희사가 손은 내밀자 그 위로 깡충 뛰어올랐다. 폭신폭신한 털의 감촉이 손안에 가득했다. 작은 생물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망가질 것 같았다. 희사는 토식이를 만질 때면 최대한 조심히 만지려 노력했다. 토식이가 희사의 가슴팍에서 여전히 희사의 눈을 올려다보고 있다. 

“녀석아, 안 그래도 작은 목이 부러지겠다.”

희사가 코끝을 검지로 퉁 하고 튕기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보는 거냐? 밥도 충분히 먹어 배가 고프진 않을 테고. 아 혹시 산책을 하고 싶어서야?”

토식이가 대답할리 없었지만 희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토식이가 고개를 숙여 꼼지락거리며 희사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쾅- 문이 열리는 소리에 토식이의 몸이 움찔했다. 아니 희사가 움찔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대의 방이 싫다면 밖으로 나가지.”

뒤도 돌아보지 않는 희사에게 현극이 말을 건넸다. 희사도 다시 방으로 들어선 자가 화가 난 채로 나간 해훈이 아닐 거란 예상은 했었다. 

“이곳은 제 방이 아닙니다.”

이 방은 규태휘가 마련해준 잠시의 거처일 뿐이었다. 희사는 토식이를 안은 채로 현극에게 몸을 돌렸다.

“그대와 말장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흑의대의 수장이 왜 2황자라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지?”

현극의 표정은 처음 봤을 때처럼 덤덤했으며, 궁지에 몰린 것 같은 사람의 형상은 아니었다.

“제게 물어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현극이 시린 눈보다도 더 차갑게 웃었다. 

“내가 물어본다면 무엇이든 사실대로 대답해줄 것이라는 말투군. 내 말이 틀린가?”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그대는 분명 서현과 2황자, 아니 해훈에게서 도망치고 싶다 했다. 헌데 2황자가 이곳에 당도했고. 그는 그대를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이송시킬 이유가 충분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십니까?”

“그대가 쿤이다.”

현극이 탁상 옆에 선 희사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고압적인 분위기가 현극의 전신을 휘감았다. 짐승의 육감이 더 뛰어난지 토식이는 희사의 품에서 펄쩍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곤 다시 그 작은 몸을 구석으로 숨겼다. 희사는 토식이가 야속하다거나 얄밉진 않았다. 그만큼 앞에선 현극의 분위기는 인간인 자신도 주눅이 들어버릴 만큼 위협적인 것이었다.

“만일 2황자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대를 찾으러 왔다면 흑의대를 데려오진 않았겠지. 안 그런가?”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헌데 내 감은 그대가 쿤이라 말한다.”

희사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현극의 눈빛을 피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쿤이 아니라 거짓을 말해도 그는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자신이 정말 쿤이 아니더라도 남자의 착각을 풀어줄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현극은 그가 판단한 사실에 대해선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것이라는 아집에 가득 찬 독선적인 남자처럼 보였다. 그러한 성격을 가진 자들은 살아가면서 대우받지 못하고 큰 실수를 범할 때가 많을 텐데, 현극의 위치가 태자이기 때문에 그는 위의 사실들을 겪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남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그 누구도 토를 달자가 없었을 테니까. 또는 남자의 감이 항상 맞아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자가 생각한 것들이 대게 들어맞았기에 남자가 저런 태도를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희사는 현극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았다. 다소 건방지다는 표정으로 현극이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내게 이런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얼마 되지 않는다. 그대도 오늘부로 그 얼마 되지 않는 무리에 끼워줘야 하겠군.”

남자의 말엔 비꼼이 가득했기에, 희사의 입장에선 랑쿤 태자의 은혜에 감복할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언급이라도 하고 앉아야겠군요.”

“그것이 당연하지 않나? 그대가 온 후생이라는 곳은 예의 따윈 없는 세상인가 보군.”

“글쎄요.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예의는 존재했습니다만.”

희사의 당돌한 말에 현극이 재미있다며 웃었다.

“그렇군. 그대의 도발에 일일이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대가 이곳의 사람이 아닌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야겠다.”

현극의 기억에 남아있던 희사는 서현의 그늘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던 것이 다였다. 아직 어린 티가 가득한 하얀 얼굴의 소년. 당시의 희사가 서현을 바라보는 눈빛엔 경의와 애정이 가득했다. 그런 자가 역모에 가담하고 서현에게서 도망치려 한다라. 본래 사람의 모습이란 무릇 꾸며내어 보기 좋게 남을 속일 수도 있기에 현극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희사가 후생에서 온 자이든 이곳의 자이든 간에 보통 내기가 아닐 것이란 사실을 가슴에 새겼다.

“이번 방문은 비공식적이기에 곧 나는 이곳을 떠난다.”

현극은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으나 말투에 숨겨진 굴욕감은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랑쿤은 중앙 집권 체제를 이룩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황권의 힘이 약했다. 각 지역의 제후들이 경외심으로 황실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통일된 나라라기보단 부족 국가에 가까웠다. 현 랑쿤의 상태가 그러했다. 환진의 경우 북방을 제외하곤 사병을 거느릴 수 없지만, 랑쿤의 지방 제후들은 사병의 수가 4천이 넘지 않으면 얼마든지 병사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 랑쿤은 선대 황제까지만 해도 중앙 집권 체제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으나, 현 황제가 즉위한 이후로는 어렵게 이룩해놓은 황권의 기반을 전부 깎아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현 랑쿤의 황제는 황후의 치마폭에서 놀아나기만 할 뿐이었다. 희사 역시 랑쿤에 관한 사실은 이곳으로 넘어와 지나쳐간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뱀에 대해서 알고 있나?”

뜬금없는 현극의 말에 희사는 의문을 표했다. 

“뱀의 턱은 뼈가 없어 자기 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생물이다. 자기보다 수십 배나 큰 동물을 잡아먹고 소화하지 못해 죽는 경우도 허다하지. 하물며 뱀은 귓구멍도 없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자신이 잡아먹는 동물의 울부짖음 따위는 뱀에게 있어선 한낱 소리 없는 절규에 지나지 않는다.”

희사는 현극이 말하고 싶어 하는 바를 뱀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 욕심이 과해 죽는 것은 뱀뿐만이 아니다. 내게는 그런 뱀과 닮은 인간이 하나 있다.”

현극은 그가 말하는 자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희사는 감정을 내비치는 현극이 어색했다. 그의 첫인상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몇 가지 없었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차가움. 냉혹함. 희사가 생각하기론 뱀과 닮은 자는 현극이었다. 하지만 방금 현극에게서 듣게 된 ‘뱀과 같은 사람’의 대한 정의는 자신이 알고 있던 차가운 사람을 뜻하는 것과는 본질이 달랐다. 현극은 뱀을 욕심이 많은 자에 빗대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어릴 적 즐겨보던 동물 관련 텔레비전에서 커다란 수사슴을 한껏 삼키곤 죽어있는 뱀의 사체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 역시도 뱀은 욕심이 많은 동물이라 생각했었다. 

“내가 아는 뱀은 모든 것을 잡아먹고 잡아먹어 몸집을 늘렸지. 이젠 그 뱀보다 큰 동물은 없을 정도다. 그 뱀은 단 하나뿐이었던 내 심장까지도 먹어치웠다. 심장이 먹히니 내게 있던 감정은 사라지더군.”

“태자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고자하는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내가 뱀의 정체에 대해선 이야기를 하지 않았군. 그 뱀은 내 어미다.”

희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현극의 어미는 현 랑쿤의 황후였다. 자신의 어미를 욕심 많은 뱀에 비유하는 현극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 여자가 랑쿤을 망치게 두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쿤이라면 좋겠다.”

“당신 말대로 제가 쿤이라 하더라도 전 당신을 도울 생각은 없습니다. 또한 쿤으로서의 능력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됩니다.”

“마치 쿤이라도 된 듯한 말투군.”

희사는 아차 싶었으나 정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현극은 자신을 쿤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봐야 소귀에 경 읽기랑 다를 게 무엇인가 싶었다. 

“왜 인랑산의 신이 죽었는지 알고 있는가? 범이 건재했을 때는 쿤이라는 지휘는 그저 흑의대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범이 죽고 남은 기운을 받은 자가 쿤이라 불리게 된 건 범이 없어지고 부터지.”

“범이 실재 했습니까?”

희사는 꿈에서 나온 범이 단순한 동물이 아님을 알았지만, 실재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단지 꿈이었기에 하나의 상징이 아닐까 짐작했을 뿐이다.

“물론 범은 실재했다. 인랑산은 랑쿤에서도 가장 거대한 산이었으며 나와 내 아비도 인랑산을 터전으로 자리를 잡았던 제후의 후손이지.”

국가의 황제를 아비라 부르는 현극은 이미 황후만큼이나 황제에게서도 마음이 떠난 것 같았다. 희사는 혹시 그들이 현극의 양부모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랑쿤이든 환진이든 황손을 양자로 들이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했다. 게다가 현극을 양자로 들여왔다면 환진으로 보낸 볼모는 청영이 아닌 현극이 됐을 가능성이 컸다. 

“범이 죽은 이유는 내 어미 때문이다. 산을 지키는 영물이 지켜야 할 것이 사라진다면 어찌 될 것 같은가. 바로 무(無)로 돌아가지. 내 어미는 범이 인랑산으로 돌아가려 마음먹었을 때 그 산을 전부 불태웠다. 그 안에 살던 모든 이들과 함께.”

희사는 꿈속에서 봤던 황무지를 걷던 무리들과 범이 사실은 인랑산을 가려했던 것임을 짐작했다. 랑쿤의 황후가 인랑산을 불태웠기 때문에 갈 곳은 잃은 자들은 황량한 황무지를 배회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범이 쓰러진 이유도 그 때문일 테고.

“랑쿤의 황후께서는 왜 범을 죽이려 했습니까?”

희사는 저도 모르게 현극의 말에 빨려 들어간 것을 느꼈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그리 존칭할 것도 없다. 그 여자는 황후라 불릴 위인도 되지 못하니.”

희사는 현극이 처음으로 인간답게 보였다. 그만큼 황후에 대해선 그의 감정을 전부 내보이고 있었다. 

“랑쿤이 통일된 이후, 모든 이들은 황제보다 범을 더 믿었지.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대대로 황제들의 입지도 단단해졌었다. 선대 황제폐하께서도 범만큼이나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경외를 받았으니까. 하지만 내 아비는 아니다. 내 아비가 집권한 뒤로 날이 갈수록 황실은 약해졌다. 그런 와중에 범마저 황궁을 벗어나 인랑산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다들 내 아비에게서 등을 돌리고 범을 따르겠지. 아마도 범을 필두로 다시 망가지는 황실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 지방 세력들이 반역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희사는 전생을 기억해도 지극히 현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현극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범이 그리 대단한 능력을 가진 영물인 것도 현극을 말을 통해 듣기 전에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었다.

“내 어미는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인랑산을 불태웠다. 그녀가 그렇게 할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 인랑산은 랑쿤의 상징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의 신성한 영역이었으니까. 물론 범이 그렇게 쉽게 죽을 것이라고는 내 어미도 몰랐을 것이다. 허나 범은 죽었고, 그 후로 범의 기운을 받은 이가 생겼다. 우린 그것을 쿤이라 부른다. 지금 보니 청영도 그렇고… 그 범은 랑쿤을 피해 환진으로 기운을 돌린 것 같군. 랑쿤에 있어선 황후의 눈을 벗어나지 못하니 말이다.”

이야기는 듣는 도중 어느새 희사의 발등에 토식이가 엉덩이를 부볐다. 희사만 버리고 본능에 도망친 것이 내심 미안했는지, 전처럼 달려들지 못하고 조심스러운 모양새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희사는 그 귀여운 녀석을 안아들어 무릎위에 올렸다. 얇은 천을 사이로 닿는 녀석의 온도가 따끈따끈했다.

“네가 쿤이라면 좋겠다. 그리고 네가 나를 도와주면 더더욱. 네가 쿤인 것을 모르고 내 손을 잡으라 말한 것은 환진 때문이었다. 아마도 환진은 청영이 죽었으니 새로운 공녀나 공물을 원하겠지. 그렇다면 내 어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나를 고민 없이 환진으로 내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 손에 네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서현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테니.”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하지만 난 네가 꽤나 마음에 든다. 건방진 점은 별로지만. 그렇다하여 규태휘처럼 네 몸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는 감정이 욕망 하나인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희사가 토식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녀석은 어느새 자신의 품이 따뜻했는지 끔뻑거리며 졸고 있었다. 잠보가 따로 없다. 현극과의 대화를 통해 처음 그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 꽤나 오해였음을 알았다. 현극은 규태휘처럼 권세 욕심이라기 보단 랑쿤을 위해 힘을 키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현과 해훈 그리고 자신처럼 살기 위해 삶을 유지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현극의 말대로 그가 환진의 볼모로 잡혀간다면 청영처럼 좋은 대우는 받지 못할 것임이 틀림없다. 환진에는 황자들 뿐, 황녀가 없다. 그러니 현극은 그저 황궁의 어느 곳에 유폐되다시피 해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왜 환진이 랑쿤에게 볼모를 요구하는 겁니까?”

정세를 모르는 사람처럼 순진한 물음이었다.

“한낱 백성들도 아는 사실을 묻는가? 그대가 바보도 아니니, 단지 후생에서 왔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겠군. 랑쿤의 지방 사병과 산적들은 환진의 지역을 자주 침범했다. 늘 그것을 막는 역할은 환진의 북방이 해왔고. 환진의 입장에선 골치가 아픈 문제였겠지. 랑쿤의 황권이 약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통제하지 못해 환진이 피해를 받는 것이니까. 환진에서는 랑쿤의 황손중 하나를 볼모로 바치면 랑쿤 황실에서도 지방 사병들과 산적들을 통제하려 노력할거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행하진 않았지만. 말했듯이 내 어미는 사리사욕 채우기에 급급하며, 내 아비는 그런 여자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삶의 낙이니 말이다.”

더불어 현극은 랑쿤의 산적들은 지나친 세금징수로 인해 배를 곪는 백성들이 대다수라 했다. 그들을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혀를 찼다. 환진에도 산적이 있긴 했으나 그 수가 적어 그들을 도둑이라기 보단, 산에 묻혀 사는 산인과도 비슷했다.

희사는 현극이 자신에게 이런 말을 전하는 이유를 깨우쳤다. 현극은 자신을 쿤으로 확신하고 있으며, 또 자신이 그를 도와주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희사는 그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도 모를뿐더러 그래야만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지금으로선 서현과 해훈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거나, 현세로 되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었다. 후자는 불가능에 가깝지만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흑영과 청영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후생에서의 삶을 끌어오지 않았는가. 

이곳은 누구를 죽고 죽이는 것이 너무 쉬운 세상이었다. 현세의 치안과 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자신이 황실에 잡혀있을 때만 해도 반역 때문에 죽어나가는 유악의 식솔들을 그 누구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삶의 존엄성을 외치긴 쉽지 않다. 서현과 해훈 역시 몇 차례나 죽음의 위협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희사는 그들만큼 죽음에 맞설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전생의 자신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자살을 결심했는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좀 더 감성적이었을 수도 있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감성적이며, 충동적이다. 자신도 아마 그런 부류였겠지. 처음에 이곳에 돌아왔을 땐 어차피 자신에게 있어선 이곳이 현세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겼으나 착각이었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현극이, 죽지 않기 위해 살아야했던 서현과 해훈이, 권세를 꿈꾸는 규태휘가. 그들은 전부 자신과는 다른 확고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 휘둘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은 멍청한 자신 하나뿐이다. 

희사는 지금 이 순간만큼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현세로 돌아가 주어진 일을 하며, 사장이 권했던 요리학원도 다니고, 미래를 위해 삶을 가꾸고 싶다. 이곳에서 서현과 해훈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은 진정 자신이 원했던 삶이 아니다. 물론 현세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복하게 살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다. 

만일 해훈과 서현이 돌아오지 않고 자신 혼자만 이곳에 떨어졌다면. 아마도 자신은 안도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그들이 현세에서 자신과 같이 온 자들인 것을 알게 된 순간 놀라움은 둘째 치고, 방금까지도 인정하진 않았지만 분명 안심했었다. 두려웠다. 알고 있는 세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이세계에 떨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서현과 해훈의 두려움은 자신보다 더 컸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단지 살기 위해서라는 신념으로 여기까지 왔고, 자신은 휩쓸리는 감정의 흐름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답해주었으면 한다. 그대가 진정 쿤인가?”

희사는 다리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토식이를 내려다봤다. 그리곤 현극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렇습니다.”

“두해 전 서현 태자의 축일 전야에서 그대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난 그저 신기했었다. 내가 찾던 자의 이름과 같은 그대이기에……. 알고 있듯이 쿤은 희사(僖詞)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저는 당신이 쿤이라 말하는 자이지만, 당신의 기대만큼 대단한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쿤이면 충분하다. 그대가 원한다면 나와 랑쿤으로 가자. 서현과 해훈에게서 벗어나게 해주겠다.”

“흑의대의 수장인 해훈은 저와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인 즉슨 그는 제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대는 어찌 나보다도 더 모르는군. 소통은 일방적일 수 없다. 어느 한쪽이 원하지 않는다면 끊어낼 수 있지. 2황자가 그대를 찾은 것도 그대가 황자의 소통에 응했기에 그리 된 것이 아닌가?”

희사는 현극의 말에 의해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자신을 찾아내려는 해훈의 소통에 응했다라? 분명 그들에게서 도망치기를 원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소리다. 억측이다. 희사의 난해한 표정을 엿본 현극이 물었다.

“그대는 도망치고 싶은지, 머물고 싶은지 사실 그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했군.”

예리하게 찔러오는 현극의 날카로움에 희사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이곳에 머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겠지. 그대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순리 아니던가?”

“방법이 있다면 말입니다.”

현극의 말대로 지금 희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세로 돌아가는 것이다. 허나 방법은 모른다. 장님보고 스스로 길을 찾아 목적지에 도달하라는 상황과 딱히 다를 것이 없다. 

“아직, 그 무리들이 남아있다.”

“무슨?”

“술사들. 쿤을 따르는 무사들은 전부 청영에게 갔으나, 술사들은 아직 남아있다. 그들은 분명 그대를 되돌릴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현극은 무지에 가까운 희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일러주었다. 

현재의 흑의대는 오직 무사들로만 구성되어있다. 처음 범을 따르는 자들은 무사뿐만이 아니라 술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쿤이 된 청영을 찾아 환진으로 넘어온 자들은 무사들로밖에 구성되지 못했다. 술사들은 개개인의 성향도 강할뿐더러 무사들과 같이 강인한 육체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청영의 입장에서도 음산하게 저주나 술법을 외우는 술사들을 환진의 황궁에 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무사들과 술사들은 하나같이 범을 따랐지만 서로가 가깝지는 않았다. 아마 무사들 쪽에서 먼저 술사들을 무시했을 가능성이 컸다. 늘 전쟁의 선두에 서는 것은 술사가 아닌 무사였다. 죽어도 무사들이 더 많이 죽어나갔다. 

처음 범을 따르던 인랑산의 제후 역시 무사출신이었다. 제후도 다루기 어렵고 까다로운 술사들보다는 단순하고 충성심이 강한 무사 쪽에 더 마음이 기울었었다. 랑쿤의 각 지역을 하나씩 통일하면서 자연스레 토지와 권력을 배분받은 무사들의 위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술사들보다 높아져갔다. 물론 술사들에게서도 불만은 터져 나왔다. 허나 그들은 뭉치지를 못했다. 불만의 소리는 나왔으나 직접적으로 그 불만을 토로할 이가 없었던 것이다. 무사들은 뭉쳐야 그 빛을 발휘하지만, 술사들은 개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힘을 냈다. 작은 목소리가 모여서 만든 우렁찬 함성이 한 명의 큰 목소리를 이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랬기에 랑쿤을 하나로 통일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던 술사들은 늘 제자리였다. 범이 황궁을 떠나는 그 날까지도. 

현극은 불현 듯 몸을 일으키더니 탁상에 놓여있던 잔을 들어 차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 탐욕스럽고 간악한 여자가 랑쿤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날 도와다오.” 

현극에게 있어서 그의 어머니는 더 이상 그를 낳고 기른 부모가 아닌 듯 했다. 희사는 말없이 토식이의 머리를 토닥였다.

“물론 나 역시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도록 하겠다. 이곳에서 남아 부귀영화를 바란다면 그렇게 해주겠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면 온갖 방도를 찾아 돕겠다.”

현극이 희사가 앉아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희사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현극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희사는 놀라지 않고 고개를 들어 현극의 눈길을 마주했다. 이상하게도 현극의 말과 달리 그의 눈빛에선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열정적인 남자의 그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차갑다 못해 시린 눈빛은 깊은 바닥까지 얼어버린 우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현극은 언뜻 보면 자신감과 오만에 가득 찬 거만한 남자로 보이기도 했으나, 어쩌면 그것마저도 현극이 자신을 그렇게 보이도록 포장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희사로서는 그가 어떤 인격을 가진 자이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제가 도와드려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현극이 손을 내려 희사의 다리 위에 올라와있던 토식이를 앉아들었다. 낯선 손길에 토식이가 답지 않은 반항을 했지만 커다란 손아귀에서 벗어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현극이 토식이의 등을 쓰다듬자 해를 가할 자는 아니라 생각했는지 토식이도 곧 얌전해졌다.

“그저 네가 쿤이면 된다. 나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이군요.”

“쿤인 그대가 내편에 선다면 랑쿤의 귀족들도 쉽게 회유할 수 있을 것이며, 술사들 또한 다루기 쉬워질 것이니.”

“그러니 저보고 황자님의 뒤에 서서 그저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라는 말씀이군요. 게다가 그들을 황자님의 편으로 만든다는 소리는 즉, 반역을 일으킨다는 말씀 같습니다만 랑쿤의 황제와 황후는 당신의 친부모님이 아닙니까?”

“부모가 가정을 망가뜨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자식이야 말로 불효라고 생각되지 않나?”

현극에게 있어서 가정이란 랑쿤 전 국가를 뜻함을 알고 있었다. 

“말씀대로 효를 행하신 다음엔 환진을 바라보시겠군요.”

희사의 비꼼에 현극은 답하지 않았다. 현극은 그저 묵묵히 손을 내려 토식이에게 원래의 자리를 찾아주었다. 희사는 토식이를 바닥에 내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표정한 현극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환진이 어찌되든 현극의 랑쿤이 어찌되든 희사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현생으로의 귀환, 그것뿐이었다.

“내가 랑쿤으로 돌아가더라도 후에 태휘에게 그대의 뜻을 알려주었으면 한다.”

“알겠습니다.”

희사는 방을 나서는 현극을 따라나섰다. 

“해훈이, 아니 흑의대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글쎄, 그것은 이곳의 자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빠르겠지.”

현극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희사는 현극보다 조금 더 걸음을 빨리해 빨랫감을 들고 나가는 어린 하인을 불러 세웠다. 어린 하인은 자신의 상체보다 더 큰 천들을 버겁게 끌어안고 있었다. 희사는 그 짐을 조금 덜어줄까 하다 하인의 제지에 행동을 멈췄다.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흑의대의 거처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흑의대라면… 아! 얼마 전에 황궁에서 당도한 사람들 말씀이시군요. 저를 따라오세요.”

희사는 무거워 보이는 천들 때문에 내심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어린 하인은 힘든 기색도 없이 가벼운 걸음으로 앞장섰다. 긴 복도를 따라 십자로 나눠진 곳에서 왼쪽으로 꺾자, 그 길의 끝엔 새로운 궁으로 통하는 길이 나왔다. 규성주 궁 안, 중앙의 네 갈래 복도를 벗어나면, 서로 다른 건물 세 채와 성문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 나온다. 궁을 가운데에 둘러싼 세 채의 건물은 모두 궁 중앙 복도를 지나야만 입출입을 할 수 있었다. 즉 그 세 개의 건물에서부터 궁 밖으로 나가려면, 달리 말하면 무조건 중앙의 복도를 거쳐야 성문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기이도 했다. 다소 폐쇄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침입자가 함부로 들어오기 힘들고 빠져나가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아마도 랑쿤의 침입을 막는 북방의 자들은 살고 있는 주거지마저도 방어조건을 고려해서 만든 것 같았다. 

왼쪽으로 꺾어 나온 복도를 완전히 벗어나자 정원이 보였다. 그 정원의 뒤편으로 중앙 궁과 흡사한 작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곳은 오래된 목조건물처럼 쾌쾌하고 눅눅한 분위기가 풍겼다. 어린 하인은 읏차 하면서 흘러내린 빨랫감을 다시 고쳐 들었다. 어린 하인이 희사에게 턱짓으로 그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분들은 저기 규성관 안에 계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희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린 하인은 존칭을 쓰며 아랫것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희사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도 잠시, 어린 하인은 원래 가려던 길로 돌아갔다. 황궁의 정원에 비하면 볼품없는 곳이지만 희사는 이왕이면 토식이를 데리고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도 방정맞은 녀석이 계속 방안에만 있으니 분명 답답할 것이다. 눈앞의 건물이 점점 커다랗게 희사의 앞으로 다가왔다. 희사는 빠른 걸음으로 흑의대가 거주하고 있는 규성관의 내부로 들어섰다. 규성관은 겉에서 본 것만큼이나 내부도 음습했다. 탁한 고동색으로 변색된 나무 발판들은 걸을 때마다 끼긱거리는 괴기한 소리를 질러댔다. 희사는 복도를 따라 규성관 내부를 한 바퀴 빙 돌았다.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아 방이라곤 다섯 개뿐이 되지 않았다. 하인들이 복도에 대기하고 있을 법도 한데 주변을 도는 동안에도 인영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희사는 가장 첫 번째 방의 문을 두드렸다. 어차피 다섯 개의 방 중에 한 곳은 해훈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현극과의 대화가 끝나고 희사가 해훈을 찾아야 했던 이유는 충분했다. 현극을 통해 가슴 속에선 어떤 결심이 일었던 것이다. 그 파동은 희사를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희사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부터 끼익하며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채로 희사를 내려다보던 늙은 남자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남자는 감인령이었다. 감인령은 희사를 이렇듯 가까이서 접한 적이 없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어리고 작은 소년이었다. 해훈의 말에 따르면 이 소년이 바로 쿤이라 했다. 감인령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게다가 희사는 환진의 자가 아닌가? 감인령이 마음속의 동요를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해훈이 희사를 쿤이라 말했다면 감인령이 따라야 할 자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희사님. 저는 감인령이라고 합니다.”

희사도 감인령이 흑의대의 전 수장인 것은 알았으나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감인령이 본래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인지, 자신을 쿤의 다른 말인 희사로 부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희사는 고개를 숙여 감인령의 인사에 답했다. 감인령의 뒤로 시선을 돌리자 그 안에는 흑의를 입은 몇 명의 낯선 남자들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훈은 없었다.

“혹시 해훈님을 찾으십니까?”

희사의 까만 눈이 몇 번 움직이는 것을 본 감인령이 말을 꺼냈다.

“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감인령은 대답대신 희사가 서 있는 복도로 나왔다.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다음 가장 끝에 있는 마지막 방에 희사를 데려다 주었다. 문을 두드린 것은 감인령이었다. 단 한 번의 두드림에도 해훈이 재빨리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해훈은 자신을 찾은 자가 감인령임을 확인한 후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문만 열린 채로 감인령이 들어오지 않자 해훈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용건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닌가?”

“희사님께서 오셨습니다.”

감인령의 말에 해훈이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풍채가 건장한 감인령의 몸에 가려져 뒤에 서 있던 희사가 해훈에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감인령이 옆으로 비켜서자 해훈의 눈에 입을 굳게 다문 희사가 비쳤다. 해훈이 조금 놀란 눈으로 희사를 마주했다. 방금전만해도 그리도 차갑게 해훈을 대했던 희사였다. 해훈은 희사가 직접 자신을 찾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눈치 빠른 감인령이 자리를 비켰다. 희사는 해훈이 말을 잇지 않자 스스럼없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해훈은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는지 하의만 걸친 채로 상체는 반라인 상태였다. 아직 덜 여문 희사의 몸과는 다르게 무예로 다져진 해훈의 몸은 탄탄하기 그지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매끈했으나 속의 딱딱한 근육은 칼조차도 쉽게 뚫지 못할 듯 했다. 해훈은 의자 위에 걸쳐뒀던 흑색의 상의를 들어 입었다. 회색의 매듭단추를 여미며 비어버린 의자를 향해 고갯짓했다.   

“앉지.”

“아니, 됐어.”

의자는 어차피 하나 밖에 없었고, 희사는 편히 앉아 해훈과 담소를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해훈이 희사를 응시했다. 희사는 해훈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원하는 것은 있으나 그 원하는 것을 받을 생각은 없는 자의 눈빛이었다. 해훈이 화가 난 채로 나갔기에 여전히 좋지 못한 기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였다. 

물론 희사가 직접 해훈을 찾아오기 전까진 해훈은 풀길 없는 분노로 기분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허나 자신을 직접 찾은 희사를 보자 그 화는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희사가 몸 위에 걸친 긴 장옷을 벗어서 의자에 걸쳐두었다. 목까지 여민 희사의 상의 안에는 여전히 흰 천이 감겨있었다. 그 상처에 대해 떠올리자 해훈이 딱딱한 음성을 흘렸다.

“어깨는 좀 어떻지?”

“많이 나아졌어.”

“그래.”

둘은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않았다. 해훈은 희사에게서 전생의 일을 들은 이후론 더는 묻고 싶은 것이 없었다. 희사의 말대로 과거의 자신이 정말 그를 배신했을지라도 현재가 중요했다. 지금은 희사를 배신하지도 상처주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희사가 기억하고 전해주었던 그 전생을 전부 믿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사실들은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법이었다. 희사는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봤고 그랬기에 더욱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아직 상이 치러지고 있지 않나?”

“그렇지.”

상의 주인은 청영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해훈은 황자다. 그것도 자신의 어머니의 상이 치러지는 동안에 황궁을 떠나있는 것은 법도가 아니었다. 희사는 해훈을 얼굴을 들여다봤다. 해훈은 슬퍼하지도 않은 채 담담했다. 아무리 전생의 어머니 일뿐이라 해도 지나치게 냉정해보였다.

“냉정하군.”

“무엇이?”

“그래도 이곳에선 당신의 어머니였고, 또 현세에선 네 동생이 아니었나? 그런 그녀가 죽었는데 말이야.”

“그렇지. 그래서 괜찮은 거다. 이곳에서 청영의 생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고. 어차피 그녀는 내가 아는 현실에서는 살아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희사는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지금은 그렇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라는 말은 꾹 삼켰다. 해훈은 희사가 자신을 찾아온 용건이 청영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희사가 스스로 말을 꺼낼 때까지 해훈이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

해훈이 희사의 까만 눈을 들여다봤다. 거짓은 아니었다. 해훈 역시 그리도 바라고 바랐던 바다. 희사가 있음으로서 이곳에서의 삶도 이유가 생겼지만 되도록이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 희사와 함께이고 싶었다. 

“해훈, 우리가 왜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해?”

“그러는 너는 알고 있나?”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면 돌아가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야. 정말로 방법이 존재할 지도 모르지.”

희사의 답에 멈춰있던 해훈의 심장이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희사는 쿤이다.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이곳에선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비정상적인 능력이 주어졌다. 물론 전생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현실적이진 못했다. 해훈이 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친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해훈을 손길을 희사는 피하지 않았다. 해훈은 단 몇 시간 사이에 희사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잔뜩 털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던 모습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많이 사라져있었다. 아니 저 분위기는 원래 희사의 것이다. 부드럽고 위태하지만 강해보이는. 현세에서 희사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그런 희사가 강렬한 적의를 드러낸 것은 현세에서의 마지막 날이 처음이었다. 그 때도 갑작스레 변한 희사의 태도에 의아했었다. 희사는 과거로 돌아온 후로 내내 그 싸늘한 태도를 지금까지 유지하다 이제야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해훈은 희사가 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차가워진 그때도 그랬듯이……. 해훈은 아주 오래 전 회사에서 마주친 희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무도 오랠 적이라 희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조차 희미했다. 하지만 지금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랑쿤의 태자와 이야기를 했어.”

희사의 어깨를 잡은 해훈의 손에 조금 힘이 실리는가 싶더니 곧 원래의 위치로 손을 거두었다. 현극의 이야기가 나오자 수그러들었던 해훈의 기운이 한층 사나워졌다.

“태자가 그러더군. 흑의대와 희사의 소통은 일방적일 수 없다고.”

물론 해훈 역시 아는 사실이다. 

“나는 당신과 소통하길 원치 않았어. 헌데 당신과 나는 만났지.”

희사는 바로 몽중의 일을 이야기했다. 찾아낸 것은 해훈이고 그 소통에 대답한 것은 희사다. 

“그래서 생각했어. 나는 당신과 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떨어뜨려 놓을 수는 없다고……. 우리는 같은 곳에서 왔으니 되돌리려면 모두가 돌아가야 하겠지.”

“희사, 나라고 방법을 찾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허나, 이후의 생에서 왔다는 소리 자체로 미친 취급 받기 충분했지. 나이가 차 황궁을 쉽게 벗어날 수 있었고, 그 덕에 여러 곳을 전전했지만 작은 실마리조차 얻어낼 수 없었다.”

해훈은 누구보다도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이젠 포기에 가까운 상태이기에 희사에게도 헛된 희망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듯 에둘러 말했다. 

“하지만 당신도 랑쿤까지는 가보지 못했을 거야.”

해훈이 희사의 팔을 부여잡았다. 순식간에 연기와 같이 사라져버릴 허상을 잡듯이 해훈의 행동엔 불안함이 가득했다.

“설마, 랑쿤으로 가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다녀올게. 그러니 나를 따라나서지 않길 바라. 당신은 황궁으로 돌아가.”

“듣지 않겠다.”

“방법을 찾아내면 모두를 되돌릴 테니……. 그러니 그곳에서 기다려.”

“만일 방법이 없다면? 얼마가 될지 모르는 시간을 너를 랑쿤에 내버려둔 채 보내라는 말인가?”

해훈이 희사의 몸을 껴안았다. 희사는 거부하지 않고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맡겼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해훈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해훈의 말대로, 그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에 그가 전생의 자신을 배신했든 아니든 이제와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과거의 잔재가 아니다. 희사는 뒤늦게 찬물을 맞고 정신이 들었다. 물론 깨닫기까지는 현극의 덕이 컸다. 애써 부정해왔던 사실도 가슴속에서 낱낱이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유악가문의 반역에 대해서. 그리고 서현에 대해서도. 

희사의 어머니와 현성들이 서현을 죽이려 한 것은 사실이었다. 서현은 반역을 꾀한 그들을 희사만 남겨두고 전부 죽였다. 희사는 전생의 자신 역시, 서현을 배신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방에서 봤던 서찰과 인장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서현은 자신을, 아니 전생의 희사를 사랑했다. 서현에게 있어서 희사의 존재가 한낱 발밑에 차이는 먼지와 다름없었다면 희사를 살리지도, 유곽에 팔아 높은님으로 둔갑한 채 그 몸을 품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크나큰 배신감으로 서현은 전생에서 그토록 희사에게 잔인하게 굴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이곳에 돌아와 만난 다른 이들은 서현과 자신의 사이가 아주 좋다했었다. 그것도 어렸을 적부터. 어쩌면 희사는 자신 역시 해훈이 말했던 것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를 배신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전생의 꿈에서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사실들이기에 섣불리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희사는 그저 처음 전생의 꿈을 꾸었을 때부터 서현이 싫었다. 그 싫음은 무조건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를 이해하고 싶지도, 당연히 그가 취했어야 할 행동들도 한없이 증오스럽게만 생각했었다. 아마도 희사는 서현이 싫었기에 꿈에서 보이는 다정한 해훈에게 더욱 끌렸던 것일 것이다. 

“희사, 너와 같이 가겠다.”

“내가 원치 않는다고 했어. 혼자서도 충분해.”

희사는 해훈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해훈은 비어버린 품에 싸늘함을 실감했다. 해훈은 고집을 부리는 희사가 이해되지 않았다. 희사는 쿤이고 해훈은 그를 따르는 흑의의 수장이니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당신이 나를 따라온다면 서현도 나를 찾겠지. 그럼 당신과 서현 그리고 나. 우리는 엉망이 되고 말거야.”

희사의 말이 맞다. 서현은 희사를 찾기 위해선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해훈과 같이 떠났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서현은 해훈과 희사를 그저 편히 두진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도망치지 않아.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아니까. 도망치는 것 외에 내가 할 일이 있다면, 그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내는 거야.”

“왜 마음이 바뀐 것이지?”

“무슨 마음?”

“나와 서현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태휘를 따라 나온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여기까지 와놓고 도망치지 않겠다 마음먹다니 참 이상하군.”

희사는 작게 웃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니. 자신이 정말 도망치려 했더라도 태휘를 따라 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이리도 무모하게 황궁을 떠나지도 않았을 테고. 그래도 희사는 태휘에게 납치되어 왔다는 진실을 삼켰다. 그 이야기를 꺼낸 순간 파란이 일어날 것임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이미 태휘는 해훈과 서현의 눈 밖에 났다. 태휘가 아무리 북방 제후의 아들일지라도 황손들에 비할쏜가. 희사는 억지로 자신을 품은 태휘가 벌을 받았으면 했지만, 죽는 것까지 바라진 않았다. 지금 해훈의 기세를 보자니 태휘의 목을 따놓고도 남았다.

“그래, 이상해도 할 수 없지. 이해해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아. 다만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나를 찾지 말아줘. 서현에게도 그렇게 전해.”

“하.”

해훈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찼다. 현극이 대체 무슨 사탕발림으로 희사를 꼬였기에 저럴까 싶었다. 

“희사 넌 지금 죄인의 몸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현과 내가 너를 찾는 것은 당연해.”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하는 거야.”

희사가 해훈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나를 모른 척 해줄 수 있으니까. 그렇지 해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당신과의 모든 소통을 닫아 버릴 거야.”

“끔찍한 협박이군. 만일 네가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면?”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하겠어.”

청영이 악연의 끈을 풀라며 이곳에 불러들였지만, 희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희사는 그들과 사이좋게 잘 지낼 생각이 없다. 차라리 서둘러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악연을 푸는 방법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해훈은 그런 희사의 생각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희사의 결정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희사, 나는 너를 서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네 부탁에 반하고 내 멋대로 행동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는 네가 괴로운 것이 싫다. 뿐만 아니라 네가 나를 적대시하는 것도 싫다.”

무뚝뚝한 남자의 고백에 희사는 가슴이 지끈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전생의 내가 너를 배신해서……. 내게 아무리 사연이 있다한들 그랬다면, 내게 복수를 해도 좋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내게 복수를 하려해도 도망치지 말고, 내 눈앞에서 행해.”

희사는 부딪혀오는 해훈의 감정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해훈이 이렇듯 그의 감정을 내보인 것은 전생의 꿈 이후처음이었다. 그 꿈에선 거짓으로 포장된 해훈이었기에 진실 되지 않았다 할 수 있으나 지금은 아니다. 희사는 그럼에도 해훈에게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희사는 그의 고백 속에서 하나만 알아차렸다. 자신은 해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해훈의 고백에 속이 시원하다거나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담담했을 뿐. 전생의 해훈과 지금의 해훈은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다르게 보였다. 

“받아, 네게 어울릴 것 같아서 샀다.”

희사는 해훈이 내민 긴 막대기를 내려 봤다. 품의 주머니에서 꺼낸 그 막대기는 긴 머리채를 고정시키는 여성용 비녀였다. 그 비녀를 장식한 것은 나비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듯한 붉은 나비. 희사는 해훈이 손에 쥐어준 그 머리장식을 멍하니 들고만 서 있다. 

해훈은 북방으로 향하는 도중, 꿈을 통해 희사가 있는 곳을 알았다. 그리고 희사가 있는 곳을 대려다 준 나비와 흡사한 장신구를 발견하곤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그 나비는 희사에게 무척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마치 희사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지금 희사의 손 위에 들린 것만 봐도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해훈은 직접 희사의 긴 머리채를 들어 장식을 해주고 싶었지만, 손재주라곤 칼 쓰는 것 밖에 없기에 그만두었다.

“이걸… 이것을 어디서 샀어?”

“북방으로 향하는 도중 우연히 유악에 장이 서 그곳을 지나게 됐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려도 좋다.”

희사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옛날의 그것과 한 치도 다름없는 나비 장신구를 내려 봤다.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다. 눈앞에서 돌풍이 일며 시야가 온통 희게 변했다. 그 돌풍은 희사를 가운데가두고 이윽고 주변을 전부 차단시켰다. 희사는 어지럼증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또 하나의 자신이 유곽의 목련 나무 앞에 서있었다. 희사는 비녀를 가슴에 움켜쥐었다. 지는 목련이 바로 눈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나의 무사. 보답하지 못해 미안해. 차라리 ……이 아닌 당신을 사랑했으면 좋았을 것을.

자신의 목소리인데도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마치 꿈속을 부유하는 것처럼 목련나무 앞에 선 자신이 멀었다. 희사는 손을 내밀었다. 뒤돌아서 목련을 바라보는 유곽의 자신이 낯설기만 했다. 희사의 손이 목련 나무 앞에선 전생의 몸에 닿자마자 그 공간은 와장창 부서졌다. 

“희사, 희사?”

희사는 지독한 현기증에 사로잡혔다. 까맣게 또는 하얗게 변색됐던 시야가 해훈의 부름에 의해 바로 잡혀졌다. 

“어디가 좋지 않나?”

몽롱한 희사의 눈을 들여다보며 해훈이 부축했다. 희사는 몇 차례 눈을 깜빡이다 그 비녀를 다시 봐라봤다. 전생의 자신은 정말로 해훈을 사랑하지 않았나? 죽기 전의 크나큰 자멸감은 해훈이 아닌 다른 이 때문에 만들어진 감정인가? 희사는 해훈의 부축을 받은 상태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좋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제 전생의 기억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기로 다짐했지 않는가. 희사는 걱정스런 해훈의 손을 물렸다. 길게 흘러내린 머리를 두어 번 틀어 올려 나비 비녀를 이용해 머리를 고정시켰다. 전생에 입었던 유곽의 의복이야 여성스러운 옷이기에 장신구와 어울리지만, 지금 희사가 입은 검은색의 평복은 수수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화려한 나비 장신구가 더욱 눈에 띄었다. 해훈은 그 장신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희사와 어울린다 느꼈다. 꿈속에서 저 나비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온 것처럼 익숙했다. 

“황궁으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어.”

“왜지?”

“서현에게 내 생각을 전해줬으면 하니까.”

“만일 서현이 현세로 돌아가는 것을 꺼려한다면?”

해훈의 말도 일리는 있다. 이곳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서현은 한 나라의 황제가 되는 것이다. 현세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황제를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해훈은 알고 있다. 서현이 원한다면 현세에서도 황제 못지않은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따지자면 국무에 시달리는 황제보단 현세에서의 생활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서현이 원하는 곳은 바로 희사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 희사가 돌아가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서현도 따라갈 것이다. 해훈은 자신이 물어보고도 쓸데없는 말이었다고 결론지었다.

“희사, 네가 어디를 가든 난 찾아낼 수 있다.”

“알아, 그래서 당신이 나 혼자 보내기를 마음먹었다는 것도.”

“황궁으로 돌아가면 규태휘와 현극에 대해 조치가 취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규태휘만 큰일이겠군. 현극은 랑쿤으로 돌아갈 테니.”

“현극이 너의 몸을 탐하거나 너를 함부로 하려 한다면, 그가 랑쿤에 있는 것 따위는 문제되지 않게 만들어주겠다 전해.”

“그리 말해주니 든든한걸.”

희사는 실없는 사람처럼 픽 웃었다. 되도록 자신이 빠른 시일 내에 해답을 찾기를 바랐다. 해훈은 방을 나서는 희사를 규성주 중앙궁의 네거리 복도까지 마중했다. 희사가 생각한 것보다 해훈이 쉽게 보내주긴 했지만, 해훈의 눈은 쉽게 결정내린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복잡함과 심란함을 띄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언제 떠날 거지?”

“아마도 내일이나 그 다음날이 될 것 같아.”

“랑쿤으로 가서도 답이 없다면 주저 말고 환진으로 돌아와라. 오늘만큼은 네가 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랬다면 내 뜻대로 너를 따라나섰을 텐데.”

“내가 쿤이 아니었다면 북방에 있는 날 발견하지 못했을 걸. 안 그래?”

“그렇군.”

해훈의 손이 희사의 머리채를 고정시킨 나비에 머물렀다. 해훈이 희사의 귀 옆으로 한 가닥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해훈의 손길은 기억하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희사는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르는 해훈을 뒤로 한 채 규태휘가 마련해준 거처를 향해 걸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현극을 따라 랑쿤으로 이동하면, 술사들에게서 좋은 대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희사는 흑의대와는 소통이 가능하니, 술사들과도 소통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흑의대라고 해도 해훈 한명과의 소통만 가능했다. 희사는 자신이 가진 쿤으로서의 기운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방으로 돌아온 희사는 머리를 틀어 올렸던 장신구를 떼어내어 탁상 위에 올려두었다. 해훈에게 다녀온 사이 규태휘가 토식이를 데려갔는지 방안은 조용했다. 희사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그대로 쓰러져 침상에 머리를 대자 참을 수 없는 수마가 몰려왔다. 순식간에 잠이 든 희사는 꿈을 꾸었지만, 일어나면 정확히 기억할 만한 꿈이 아님을 알았다. 

꿈속에서 희사는 서현의 품에 안겨서 새까만 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구경했다. 서현의 따뜻한 살갗의 감촉과 달콤한 냄새가 그리웠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 그럼에도 당신을 사랑해. 

누구 것인지 모를 외침이 흘렀다. 희사는 오랜만에 꿈을 꾸며 울었다. 일어나서는 자신이 운 것조차도 기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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