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겁환상(前劫喚想) 1부-7 by
2010-04-23 00:45:42 , Monday
8.
서현은 기가 막히다 못해 우스운 상황에 병사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빼들었다. 희사의 방을 지키던 병사는 서현의 광적인 화에 자신의 목숨이 그야말로 풍전등화라 여겼다.
“다시 고하라. 이 동궁 안에서 나의 사람이 없어졌다라?”
서현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궁을 떠나 있던 것이 불과 나흘도 안 되건만 그 사이에 희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니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희사에겐 궁을 떠난다 직접 언급을 한 적도 없었다. 물론 그 누군가가 희사에게 말해줬을리도 만무하다. 황후가 죽은 뒤로 동궁은 서현의 손바닥 안이었다. 서현의 의지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함부로 언행 할 수 없다. 희사가 동궁 안에서 사라진 것은 그 스스로 도망쳤거나 누구에게 붙잡혀갔거나 둘 중 하나다. 서현은 희사의 어깨가 많이 나았다 하더라도 그 혼자의 힘으로 도망쳤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서현은 희사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계속마음에 걸렸던 자가 있다. 규태휘. 그만큼 못을 막아두었는데도 그가 희사를 데려갔다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서현은 눈앞의 멍청한 병사를 그대로 죽여 버려 화를 풀까하다 행동을 멈추었다. 아랫것들을 다스릴 때 상전에 대한 공포는 더없이 좋은 효과를 나았으나 과도한 공포는 외려 화를 초래한다. 그렇다하여 실수를 용서할리 없다.
“저자는 이제 동궁의 근위대가 아니다. 당장 이곳에서 저자를 치우거라.”
서현은 그의 검을 발치에 던지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서현의 측근인 사황(事黃)이 그의 뜻을 받들었다. 서현은 초조한 기분을 감출수가 없었다. 양털 융단 위를 거친 발걸음으로 서성이자 사황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전하, 사람을 풀어 조용히 찾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시끄럽게 찾으면 안 될 일이 있는가?”
서현이 신경질적이게 대꾸했다.
“황비마마의 상(喪)이 치러지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나더러 그동안 그를 찾지 말라 이 소리인가.”
“그런 말은 아니옵고.”
“사황, 너도 나이가 꽤 들었구나. 이제 쉴 때가 된 것 같은데 말이다.”
사황은 서현의 마지막 말에 입을 다물었다. 서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희사가 없어진 이유는 분명 규태휘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규태휘는 황비가 죽은 날 북방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북방 제후의 아들이라고 한들 일국의 황비가 죽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다니, 절대로 행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무리해서까지 북방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희사를 데려갔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서현은 황비가 죽은 후부터 해훈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도 의심이 갔다. 서현 자신은 어머니인 황후를 부모의 정으로서 바라본 적이 없었으나 해훈은 아니었다. 그는 황비를 아꼈다. 물론 그 이유는 서현도 알았다. 그녀는 현세에서 해훈의 여동생이었다.
해훈으로선 그녀를 향한 마음이 부모의 정보다는 가족애가 더 강했을 터다. 그런 그가 지금 상황에서 희사를 데리고 도망쳤을 리는 없다. 현세에선 꽤나 희사에게 관심을 보였던 해훈이 전생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희사를 보지 않으려했다. 서현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미워서 보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니라 혹여 보고 싶어도 보지 않으려 한 것이 아닐까라는. 억측이다. 서현은 쓰게 웃었다.
검지를 세워 이마를 톡톡 두들겼다. 그와 동시에 서현이 집무실 문이 열렸다. 고하는 말도 없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자는 황제와 해훈뿐이다. 현재 황제는 거동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터이니 저 문을 연자는 단 한명이다.
“해훈.”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가 들어서자, 안절부절못하던 사황이 허리를 굽히고 뒷걸음질로 집무실을 나섰다. 사황의 입에서 다행이라는 얕은 한숨이 배어나왔다.
“심심한 조의를 표하지.”
서현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해훈 역시 그녀의 죽음은 안타까웠으나 서현이 생각한 것처럼 마냥 슬프진 않았다. 자신의 동생과 황비는 같은 인물이었지만 동일시하진 않았다. 다만 그녀가 왜 동궁에서 죽어있었는가가 의문이었다. 원래도 약한 여자이긴 했다. 그녀는 해훈과 같이 황궁 내에서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해훈에게 흑의를 준 것도 그녀였다. 아는 자들은 지극히 적으나 흑의대는 사실 청영 황비를 따르는 무리였다. 그 흑의대의 무리는 전부 랑쿤에서 온 자들임을 해훈은 알고 있었다. 물론 황궁에서 표면상의 흑의대는 돈을 주고 부리는 용병에 가까웠다. 그 표면상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흑의대는 몇 차례 귀족들의 의뢰를 수락했었다. 그리고 그 무리를 이끄는 것이 바로 해훈이었다.
흑의대의 속한 자들은 지나칠 정도의 충성심으로 청영을 모셨다. 청영이 죽었으니 흑의대는 해산을 하거나 각자의 길로 흩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해훈의 예상이 비껴나갔다. 흑의대의 가장 노장인 감인령이 청영의 상(喪)이 시작되던 날 해훈을 찾아왔다. 해훈은 그 흑의를 입은 노장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건넸다.
“그대들은 더 이상 나를 따르지 않아도 좋다, 각자의 길을 가거나 남아 있을 자들은 따로 몫을 챙겨주도록 하겠다.”
해훈의 뜻을 알아들은 감인령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뜻을 지닌 자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뜻을 지니고 있으며 모시던 분이 죽는다하여 해산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생에 단 한사람을 모시지 않습니다. 신이 정해준 분을 따를 뿐입니다. 그것이 생에 단 한번일수도 또는 여러 번 일수도 있습니다.”
“신이 정해주다니?”
“해훈님께서도 느끼실 것입니다. 저희가 청영님께 충성하며 해훈님의 뜻대로 움직인 것은 그렇게 운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노장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군.”
“어느 때고 아실 때가 올 것입니다.”
노장인 감인령은 해훈을 찾아온 것과 같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해훈은 청영이 죽었을 때를 떠올렸다. 죽은 시체만을 보았으니 감인령의 말대로 그녀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흑의대는 신의 사자(使者)를 지키는 자들이다. 황비는 신의 사자였으며 명이 다해 죽었다. 사실 그것이 명이 다한 것인지 아니면 신의 분노를 사 죽은 것인지는 모른다. 그저 흑의대는 신이 정한 사자를 지킬 뿐이다.
흑의대는 자신들이 지키는 자를 통칭하여 희사(僖詞)라 부른다. 그것은 기뻐하며 신의 말을 전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해훈은 한 번도 청영이 주술을 부린다던지 이것이 신의 뜻이다 하며 전달한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저 평범한 여자에 한없이 가까웠다. 처음 해훈이 흑의대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의 뜻이 아니었다. 제 2황자는 모두가 정신이 아픈 것으로 알고 있으니 해훈이 함부로 밖을 내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청영은 자신의 아들이 흑의대라는 집단을 통해 세상에 나가기를 원했고 해훈 역시 받아들였다.
현성의 어미인 제 2황비는 이들이 무력한 자들이라 손가락질 했건만 실상은 이들이 제 2황비를 가지고 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나 흑의대의 소속한 자들이 해훈을 필두로 따르게 될 줄은 청영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해훈은 그녀가 준 복면을 벗었다. 해훈이 입고 있는 옷이 그의 아버지인 흑영의 것임을 해훈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흑의대는 청영을 찾아오며 흑영의 흑의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고이 간직하다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 준 것이다. 해훈이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해훈은 청영이 자신이 어머니라 생각하지 않았듯 흑영도 자신의 아버지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너도 꽤나 우스워졌나보군. 동궁 안에서 희사가 사라졌다니 말이다.”
“황궁에서 내가 우스워 진 것이 아니라 북방의 녀석이 나를 우습게 본 것이겠지.”
“규태휘가 데려갔다고 확신하는군.”
“너 역시 그리 생각하지 않아?”
해훈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희사가 저 혼자의 몸으로 도망갔다면 이미 잡히고도 남았다. 어깨도 아직 성치 못한 몸이니 말이다.
“희사를 데려갔다면 아주 꽁꽁 숨겨놨겠지. 과연 행동력으론 환진에서 최고라 칭할만하군.”
해훈이 엷게 웃었다.
“우리가 북방으로 간다 해도 답은 없을 거다. 규태휘를 이곳으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그래, 오히려 우리가 희사를 찾겠답시고 북방을 뒤집어 놓는다면 더 찾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서현이 이를 갈았다. 혹시라도 규태휘가 희사를 함부로 품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녀석을 찢어발겨 죽일 정도였다. 혹, 희사와 정말 그가 눈이 맞아 도망간 것이라면. 그렇다면 두 놈을 잡아와 가만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서현은 더 생각하다간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기에 상상을 멈추었다. 일단 규태휘를 황궁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희사가 북방의 어느 곳에 있는지만 안다면 가장 쉬운 일일 텐데 말이야.”
해훈이 중얼거렸다. 서현은 해훈의 말에 별 의미를 두지 않을 채 그 호랑이 새끼를 끌고 나올 궁리를 모색했다.
9.
희사는 며칠이고 마차에서 시달린 바람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있었다. 재갈은 풀어주었으나 검은 천은 벗겨지지 않았다. 멀미까지 동반한 어둠속에서 희사는 결국 참았던 토를 하고 말았다. 그 소리에 태휘가 깜짝 놀라 희사의 얼굴을 가린 천을 벗겼다. 희사가 옆으로 누워있었기에 기도라도 막히면 큰일이었다. 먹은 것도 얼마 없기에 토한 것이라곤 묽은 위액뿐이었다. 희사가 자신을 마주 보고 앉은 태휘를 노려봤다. 그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진 토식이가 희사를 갸우뚱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희사의 눈에 여전히 토식이는 귀여웠다. 왜 저런 귀여운 생물의 주인이 저자 인 것인지 인정하기 싫었다. 희사는 다시금 깨달았다. 눈앞의 자는 규태는 규태이되 자신이 아는 자는 아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나도 지금 곰곰이 생각 중이니까.”
희사는 손목이 묶이고 발목까지 꽁꽁 포박되어 있어 중심을 잡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관자놀이를 괴롭혔다. 태휘가 흰 천을 꺼내어 희사의 입에 묻은 액들을 닦아주었다. 희사는 기운 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자자, 그렇게 노려보면 우리 토식이가 무서워하잖아.”
태휘가 희사의 눈앞에 토식이를 흔들어댔다. 녀석의 다리가 아등바등 거렸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희사는 더는 눈앞의 남자에게 존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태휘도 존대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개의치 않았다.
“말했잖아. 토끼를 찾으러 갔는데 다른 것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겼다고. 그게 바로 너야. 동궁에서는 참을 수가 없어져서 너를 데리고 나오긴 했는데 나도 참 큰일을 벌였지. 하하. 그런데도 후회되지 않는 걸 보니 네가 정말 좋긴 한가보다.”
태휘가 토식이의 주둥이를 희사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희사는 토식이를 차마 노려보지 못하고 시선만 위로 올려 태휘를 노려봤다. 저번 생에서는 서현에게 휘둘리고 이번에는 태휘란 말인가. 희사는 어이없음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황비가 이야기 했던 것 말이야. 너와 그들. 정말 이 후생에서 왔다는 것이 진실인가?”
태휘가 흥미롭게 물었다.
“랑쿤은 원래 주술과 술법이 성행하는 나라니 이상할 것도 없지. 그래서 네가 나를 처음 봤을 때 규태라고 부르며 놀랐던 이유가, 혹시 후생에서도 우리가 아는 사이였기 때문인가?”
눈치도 기가 막히게 빠른 남자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청영은 모든 사실을 자신만이 알기를 바랐다. 태휘까지 알게 되어 지금의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야 말로 또 다른 운명의 꼬임이 아닌가 싶었다.
“당신이 잘못 들었겠지. 후생이니 전생이니 그런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희사의 말에 태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더니 토식이를 희사가 옆으로 누워있는 허리 앞에 내려놨다.
“넌 참 거짓말을 못하는 것 같아. 황비가 전생과 후생의 이야기를 할 때의 네 반응은 진짜였거든. 그것을 거짓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반응할 수 없지.”
희사는 자신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태휘가 부담스러워 눈을 감아버렸다.
“네가 후생에서 왔고 나를 알고 있던 자라면. 후생에서의 나는 너와 무슨 관계였지?”
태휘가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뜻으로 물었다. 희사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 관계도.”
“지금 나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면 일부러 냉정하게 구는 건가?”
“적어도 이렇게 무례하진 않았지.”
“그러면? 배려심이 깊고 남을 잘 챙겨주었던가?”
“지금보다는.”
희사의 말에 태휘가 크게 웃었다. 토식이도 깜짝 놀랐는지 몸이 움찔했다. 마차의 밖까지 새어나갈 정도로 호쾌한 웃음 소리였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잘 알지 못했던 거군.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얼마든지 다정할 수 있지. 본성이 이쪽에 가까운데 후생이라고 달라지겠어?”
태휘는 자신을 걱정하고 챙겨주었던 규태의 모습이 실제로는 그의 성품이 아니라 말한다. 아니다, 규태는 저렇지 않았다. 희사는 그저 규태와 태휘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다.
희사는 태휘를 바라보기가 싫어서 마차의 전창을 보게끔 몸을 돌렸다. 아예 반대로 틀고 싶었으나 왼쪽 어깨가 지탱하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애초에 포기했다. 그 반동에 토식이가 옆으로 밀리자 태휘가 읏차하며 토식이를 들어 희사의 배 위에 올려놨다. 희사는 대체 뭐하는 짓이냐는 눈빛으로 그를 봤다.
“무시하는 건 좋지 않아. 내 성질 건드려봐야 희사 너만 손해니까.”
희사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식이가 희사의 가슴팍까지 올라와 꼬물거렸다.
“난 환생이나 전생을 믿지 않지, 아니 어쩌면 믿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데 그런 건 별 의미가 없잖아.”
남자의 말이 맞다. 현재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남겨진 전생의 기억은 쓸데없는 감정소모와 오해 그리고 불신을 안겨주었다. 그렇다하여 그 기억들을 과거나 환상이라고 치부하여 살아가기엔 자신은 무디지 못했다. 매일 밤 꿈은 자신을 전생으로 데려갔고, 행복과 슬픔을 번갈아가며 안겨주었다. 해훈의 배신이 있기 전까진 차라리 메말라버린 현실이 아닌 꿈속의 전생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참 나약하다. 그래, 한결같은 바람이 있다면 과거든 현재든 늘 강해지고 싶었다. 심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자신을 지킬만한 능력이 있다면 지금 같은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해.”
“전생을 믿지 않는다면서 왜 나와 그녀의 말에 연연하지?”
“희사는 참 바보네. 그녀와 네가 한 말에서 내가 관심 있던 부분은 후생이든 전생이든 그런 별 의미 없는 얘기가 아니야. 바로 2황자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지.”
웃고 있는 태휘의 얼굴이 다가왔다. 희사의 얼굴에 그늘이 지더니 남자의 입술이 맞닿았다. 희사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남자를 노려봤다. 태휘의 혀가 굳게 다문 희사의 입술을 쓱 쓸어 올렸다. 마치 육식동물이 눈앞의 음식을 먹어치우기 전 간을 보는 형상 같았다.
“내가 관심 있는 쪽은 이거지만. 그렇게 노려보면 다시 천으로 가려놓는 수가 있어.”
남자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마차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팔짱을 끼고 희사를 내려 보는 눈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암시했다. 희사는 어느 정도라도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짐짓 남자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넸다.
“북방으로 가는 건가.”
“뭐, 네 덕분에 좀 돌아왔긴 하지.”
아마도 서현은 자신이 도망쳤다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사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별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북방으로 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황궁에서 도망치는 것보다 태휘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더 쉬울 것만 같았다. 물론 희사는 북방의 병력과 경비가 황궁 못지않게 삼엄하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나흘이나 더 달려서야 북방인 규성주에 도착했다. 희사는 마차 안에 누워서만 있는 것도 상당한 체력을 소모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휘는 이런 여정이 자주 있는 듯 익숙한 모습으로 마차에 내려서서 기지개를 한번 크게 핀 것이 다였다. 같이 따라온 태휘의 병사들이 희사를 마차 밖으로 끌어냈다. 마차에 남은 토식이가 커다란 눈으로 희사를 빤히 쳐다봤다. 마차의 문을 닫는 순간 어디를 가냐고 묻는 듯이 통통한 몸을 들어 펄쩍펄쩍 뛰었다.
두 다리를 묶어놨기에 걷지 못하는 희사를 덩치가 엄청난 한 병사가 어깨에 들쳐 멨다. 희사는 그 병사의 어깨에서 덜렁거리며 뒤집힌 세상을 바라봤다. 언뜻 봐도 주변은 북방의 제후가 사는 성이 아니었다. 시야에 잡히는 것은 온통 갓 솟아나온 푸른 풀들과 논이 전부였다. 사람이 살 법도 한데 주변은 지나치게 한가했다. 조금 걷자 그 넓은 땅덩어리에 딱 한 채뿐인 가택이 보였다. 수십 명이나 됐던 병사들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앞에서 걷는 태휘와 자신을 들쳐 멘 병사뿐이었다. 희사는 그 가택이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네모난 모양의 담 안에 정원이 딸려있는 보편화된 귀족들의 가구 양식이 아닌, 유약(釉藥)을 칠한 흙벽돌로 지어진 그리 크지 않은 가택이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가택과 연결되어있는 하나의 문이 전부였으며 그 외는 흙벽돌로 전부 막혀있었다. 들어가는 문이 하나 있는 무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사는 저곳에 들어가면 생각보다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커다란 덩치의 위에서 몸을 버둥거렸다. 덩치는 희사의 발버둥 따위는 간지럽다는 듯 성큼성큼 걸었다. 문을 열고 태휘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이 가택은 환진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이었다. 마당이 없으며 대문이 곧 집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마치 전에 자신이 살던 원룸 같았다.
큰 덩치는 중앙의 새끼 양털로 만든 두터운 융단위에 희사를 내려놨다. 던지듯이 내려놨음에도 몸의 충격은 예상보다 덜했다. 거꾸로 매달려오는 바람에 얼굴로 온통 피가 몰렸다. 벌게진 얼굴을 달래며 주변을 두르자 밖에서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내부는 깨끗했다. 현세에서의 원룸 같다고 예상했듯이 방 하나를 집으로 만들어놓은 형태였다. 자신이 황궁에서 거주하던 동궁의 방보다도 조금 더 컸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다홍방과 비교하자면 이곳은 삭막 그 자체였다. 가구의 색은 온통 칙칙했으며 밝은 색이라곤 희사의 몸 밑에 깔린 양털 융단이 전부였다. 덩치는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육중한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나갔다.
조용한 방안에 바스락거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위를 올려보니 태휘가 어깨에서부터 발목까지 감쌌던 긴 겉옷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중이었다. 태휘가 바닥에 깔린 것만큼이나 두꺼운 양털이 깔린 탁상 위에 앉았다. 그 탁상은 삼단으로 나누어진 문갑이었지만 의자로도 겸용하고 있는듯했다. 태휘는 바닥에 널브러진 희사를 천천히 감상했다. 희사의 까만 머리카락이 양털 위를 어지러이 돌아다녔다. 희사는 태휘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전에 없이 부담스러운 것을 느꼈다. 희사는 자신도 남자기에 그 눈빛의 의미를 반쯤은 알았다. 욕정이다.
“태자가 너를 찾으러 올까? 아니 분명 오겠지. 차라리 기간을 두고 내기를 하는 것이 낫겠어. 희사 넌 어찌 생각해?”
태휘의 말에 웃음기가 머금어 있었다. 이 남자는 서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개 제후의 아들이 일국의 태자를 만만히 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서현이 자신을 찾으러 오는 기한을 놓고 재미삼아 내기를 하다니. 황궁의 누군가가 듣기라도 한다면 바로 경을 칠 소리다. 희사는 태휘의 말대로 과연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올까 생각했다. 서현이 자신을 살려둔 이유는 예전처럼 자신을 가지고 싶어서 일수도 있고, 그와 같은 곳에서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희사는 어느 것에도 확신을 가지진 못했다. 물론 그가 자신을 찾으러 온다는 확신 또한 없었다.
“참 신기하군. 규성주 최고의 일색이라는 천화 계집조차도 몇 년 동안 내 마음 한 톨 끌지 못했건만, 넌 단지 한순간에 나를 사로잡으니 말이야.”
태휘는 자신이 희사에게 빠진 것이 희한하다는 듯이 말했다. 태휘의 말대로 희사는 아주 빼어난 미모를 가지지도 요부의 교태를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폄하해서 말하자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외모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하여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는 아니었다. 희사의 까만 동공을 보자 있자면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감정이 다 죽어버린 까만 눈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보고 싶지만 생기를 가득 담아 쳐다봐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컸다. 남들보다 조금 흰 피부도 새까만 머리와 어우러져 만지면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것이 태휘의 마음을 가져가버린 희사의 전부였다. 태휘가 탁상에서 내려와 희사의 앞에 가부좌를 틀어 앉았다. 그럼에도 희사는 그를 올려봐야 했다.
“나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말해봐.”
“뭘 말하라는지 모르겠군.”
저도 모르게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동의 없이 너를 데려온 것에 대해 화가 났겠지. 차라리 너를 황궁에서 데리고 나갈 때 황궁경비병에게 붙잡혔으면 더 좋았을까? 나 역시 생각보다 쉽게 데리고 나올 수 있어서 내심 놀랐다.”
태휘는 황궁경비병을 깎아내리기라도 하듯 빈정댔다. 태휘의 손이 양털 위를 맴도는 희사의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태휘는 그 단순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에 참을 수 없는 욕정이 끓어올랐다.
“그가 죄인의 자식인 너를 그냥 살려두었을리는 없고…. 그래 태자와의 잠자리는 어땠지?”
희사는 태휘가 자신을 납치해온 것이 이런 연유에서라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했다. 그 많은 미인들이 도처에 널려있는데 평범한 자신에게 욕정하다니. 이해불가였다.
“말해봐, 순진한척 할 필요 없어. 난 음란한 것도 좋아하니까.”
희사는 태휘의 희롱에 코웃음 쳤다.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당신도 남색에 취미가 대단한가보군.”
“당신도 라니, 태자 역시 너를 마음껏 탐했다는 말인가?”
희사가 기억하는 전생에선 수없이 서현에게 안겼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서현은 한 번도 자신을 품은 적이 없다. 입술과 입술이 닿은 것이 전부다. 그것을 떠올리자 희사는 문득 서현이 이상하다 여겼다. 전의 그였다면 자신의 가문을 멸한 뒤 제멋대로 몸을 탐했을 것이다. 헌데 지금의 서현은 왜 자신을 가만 놔두었지? 혹, 청영의 말대로 변하고 있는 것인가. 희사는 자신감이 지나치다 생각했다.
하지만 서현이 지금도 태휘와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본다는 것은 익히 잘 알았다. 차라리 광적인 면모는 태휘보다 서현에게서 더 많이 읽혔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안지 않았다. 희사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곳의 모든 이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같은 자는 자신 혼자뿐인 것 같았다. 아니다. 어깨를 다치기 전까지는 자신도 전생의 자였다. 달라진 것은 누구하나 빼놓을 것이 없다.
“넌 참 생각이 많아. 네 눈이 몽롱하게 잠길 땐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더군. 그게 또 남자를 자극하는 것은 알고 있나?”
밧줄로 묶인 희사의 양손을 태휘가 자신의 사타구니 위로 가져갔다. 확연히 드러난 발기한 그의 것에 희사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태휘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희사의 손목을 더 꽉 쥐었다. 희사의 손으로 위로 솟은 기둥을 훑었다. 희사가 그의 것에서 손을 떼려했지만 태휘의 힘에 비할 바가 못 됐다. 희사가 계속 반항하자 태휘가 벗어놓은 겉옷 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들었다. 희사가 숨을 삼키고 태휘의 단도에 시선을 고정했다. 불안한 눈으로 올려보는 희사의 모습에 태휘는 다시 한 번 아래가 더 딱딱해졌다. 단도의 칼날을 세워 희사의 손목을 묶은 밧줄을 끊었다.
태휘는 시선을 내려 희사의 묶인 발목을 보더니 거기까진 풀어줄 필요 없다는 듯 단도를 옆으로 밀어치웠다. 희사는 갑작스레 자유로워진 손목이 시큰거렸다. 처음부터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묶이진 않았지만, 마차에서 내내 손을 빼려 시도해도 풀어지지가 않았었다. 희사가 작게 저릿거리는 통증에 반사적으로 손목을 돌렸다. 태휘가 바지의 끈을 풀었다. 스르륵 내려간 천이 태휘의 허벅지에 걸터앉았다. 희사의 오른손을 강제로 펼치게 해 태휘가 자신의 것에 가져다댔다. 희사가 뜨거운 감촉에 소스라쳤다.
“뭐하는 거야! 놔!”
“얼마든지 소리 질러.”
기둥을 쥐게 한 채 희사의 손을 태휘가 감쌌다. 아래위로 훑자 태휘의 기둥이 더 단단해지며 부피를 팽창시켰다. 희사가 얼마 자라지 않은 손톱을 세워 그의 것을 긁어내렸다.
“이거 이거 위험한걸.”
태휘가 행동을 멈추고 희사의 양 손목을 위로 그러잡았다. 잘못한 아이를 타이르기라도 하듯 희사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태휘가 희사의 윗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옷을 고정시켰던 허리의 끈을 푸르자, 양옆으로 여민 천은 쉽게 벌어져 희사의 속살을 전부 내비쳤다. 태휘가 고개를 숙여 희사의 가슴을 빨아올렸다. 빨아올린 가슴을 혀로 굴리자 희사의 의도와는 다르게 유두가 점점 딱딱해졌다. 태휘가 그 부분만 다시 세게 빨아올렸다.
희사는 따끔한 통증에 허리가 위로 들렸다. 태휘가 재빠르게 허리 아래로 팔을 둘러 희사의 몸을 지탱시켰다. 다친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같았으나 지금상황에서는 전혀 고맙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가 들리는 바람에 어깨만 바닥에 닿아있어 상처가 더 욱신거렸다. 위로 그러쥔 손을 하반신으로 내려 희사의 속옷을 벗겼다. 희사가 자유로워진 손으로 그를 밀쳐냈다. 어깨가 다시 덧난 다해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또 힘으로 밀려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았다. 희사가 태휘의 얼굴과 가슴팍을 어디고 할 것 없이 주먹질했다.
“적어도 정성껏 해주려 했는데 네가 싫다면 별수 없지.”
태휘가 희사의 묶인 발목을 위로 끌어올렸다. 허리까지 공중에 뜨자 태휘가 그 밑을 파고들었다. 그의 사타구니에 엉덩이가 가까이 닿았다. 희사가 허리를 틀어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태휘가 상체를 조금 세우더니 안쪽의 가장 약한 살인 양 허벅다리 사이로 기둥을 밀어 넣었다. 희사는 아직도 들려있는 하반신을 내려 봤다. 희사의 고환 바로 위에, 태휘의 발기한 기둥이 두 허벅다리 사이를 뚫고 들어와 있었다. 허벅지 안으로 여실하게 느껴지는 그의 기둥을 피하려고 양옆으로 다리를 벌리려 했다. 발목을 묶어놓은 밧줄에 의해 일자로 올려진 다리는 조금도 벌릴 수가 없었다.
태휘가 몸을 희사쪽으로 기울였다. 다리를 위로 들었던 손을 놓고 희사의 양 허벅지를 붙잡았다. 그 상태로 허리를 앞으로 밀어붙였다. 그 움직임에 의해 허벅지의 연한 살이 그의 기둥과 마찰하며 이리저리 쓸렸다. 희사는 자신의 허벅지를 붙잡은 태휘의 손을 떼어내려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왼쪽은 어깨의 고통 때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오른손으로 그의 손목을 힘주어 쥐었다. 그 반동에 태휘의 손이 조금 느슨해지는가 싶더니 허벅지를 더 세게 조여 왔다. 외려 그 반응이 더 흥분됐는지 태휘는 좀 전보다 허리를 재게 놀렸다.
“네 안은 이 허벅지보다 끝내주겠지?”
조금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지껄였다. 희사는 그가 분탕질하는 허벅지에서부터 열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허벅지의 살만 발갛게 달아오른 흰 피부를 보는 태휘가 참치 못하고 넣었던 기둥을 빼냈다. 그와 동시에 양 엄지로 희사의 엉덩이를 벌렸다. 아직 굳게 닫힌 구멍을 향해 남자 정액이 쏘아 올려졌다. 태휘의 기둥에서부터 여섯 일곱 차례에 걸쳐 쏘아진 정액이 희사의 구멍이며 엉덩이며 할 것 없이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첫 사정인터라 양이 제법 많았다. 태휘가 희사의 엉덩이 골을 타고 허리까지 흘러내린 그 끈적한 정액을 검지로 쓸어 올렸다. 그대로 희사의 구멍 주변을 몇 번 만지더니 안으로 쑤욱 들이밀었다.
“흐앗.”
순식간에 들어온 이물감에 희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현과의 기억하는 잠자리는 늘 그가 준비한 유액으로 아래를 풀고 나서야 그의 것이 들어오곤 했다. 마지막에는 서현의 정액이 안쪽을 전부 메운 경우도 많았지만 밖에다 사정한 것도 적진 않았다. 정액이 내장 안으로 바로 들어오면 배가 꼬이도록 아픈 것은 물론이며, 안의 내벽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꿈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그 느낌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분명 지금이 좋지 않은 상황임에는 틀림없었다. 태휘는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고 구멍을 연하게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액은 유액만큼 미끌거리며 구멍을 풀어주었다. 구멍을 파고들어온 태휘의 손가락이 세 개가 되었을 때, 희사의 입에선 저도 모르게 약한 신음이 흘렀다.
연해진 구멍이 자제력을 잃고 태휘의 마음대로 벌어졌다. 정액을 머금은 아랫배가 움찔움찔했다. 태휘는 그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다시 한 번 발기한 기둥을 구멍에 끼워 맞췄다. 도톰한 귀두를 구멍이 꽈악 조였다. 태휘가 기둥을 완전히 뒤로 뺐다가 푹하고 처넣었다. 그 단번에 충격에 의해 희사의 입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신음소리 하나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아래의 고통에 어찌할 줄 몰라 했다. 태휘가 아직 반쯤 밖으로 드러난 자신의 기둥을 들이밀자 희사의 몸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그만. 아아아아!”
희사는 언제까지고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것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앞섰다. 아랫배가 그대로 꿰뚫리는 느낌이었다. 태휘는 자신의 기둥을 전부 감싸는 내벽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뱉었다.
“처음 쓰는 것도 아니니 할 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허리에서 힘 빼.”
희사는 더는 그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자신의 아랫배를 감싸 안았다. 잘게 신음하며 온몸을 떨었다. 경련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태휘는 순간, 희사가 아래를 쓰는 일이 익숙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태휘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혹시 태자와 잔 적이 없어?”
“아파. 아파….”
희사는 그저 몸의 아픔에 같은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처음으로 뒤를 뚫린 사람처럼 아래를 헤집는 기둥에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젠장.”
태휘가 낮게 욕설을 뱉었다. 분명 서현과 관계를 했다고 생각해서 저도 모르게 거칠게 한 것인데 예상외의 일이었다. 기쁘긴 했으나 이미 넣은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태휘는 저 옆으로 밀쳐놨던 단도를 다시 쥐어들었다. 희사의 몸이 같이 딸려오며 크게 한번 신음했다. 발목을 묶은 밧줄을 끊어버리고 희사의 다리를 어깨에 걸쳤다. 태휘가 희사쪽으로 잔뜩 몸을 기울였다. 좀 전에 빨아올려 발갛게 부은 가슴을 다시 한 번 축축한 혀로 핥아 올렸다. 희사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한껏 괴로워 보였음에도 태휘는 그런 희사의 모습이 더 선정적이게 느껴졌다. 자신이 하는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천이 감긴 왼쪽 어깨가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바닥에서부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태휘가 아차 싶어 희사의 몸을 위로 끌어안았다. 태휘의 위에 올라앉은 자세가 되자 희사가 그의 가슴으로 쓰러졌다. 가쁜 희사의 숨이 태휘의 가슴 위로 흩어졌다. 태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희사를 안아들었다. 아래에서 단단한 것이 쑥 빠지자 희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탁상 옆 침상 위에 희사를 눕히곤 허리 위에 베개를 받쳤다.
무릎 자세로 앉은 태휘가 그새 모습을 감춘 구멍을 찾아 엉덩이를 벌렸다. 희사는 다시 닥쳐올 고통에 대비하며 이를 앙다물었다. 태휘가 혀로 희사의 입술을 쓱 훑었다. 동시에 구멍을 헤집고 기둥을 넣었다. 처음보다는 풀어졌어도 고통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희사는 자신이 태휘에게 애원의 말도 하는지 모르는 채로 중얼거렸다. 태휘의 고환이 희사의 엉덩이에 퍽퍽 부딪혔다. 희사의 얼굴을 참았던 눈물이 적시기 시작했다. 눈꼬리를 타고 침상의 이불을 축축이 적셨다. 태휘는 희사의 까만 눈동자가 겁에 질린 것이 안쓰러웠다. 그에 비례해 더 망가뜨리고 싶은 광폭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희사의 신음이 거의 가라앉을 무렵에 태휘는 그의 안에 두 번째 사정을 시작했다. 태휘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정액을 삼키는 구멍을 내려 봤다.
구멍이 하얀 거품을 채 머금지 못하고 옆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 위로 희사의 기둥이 중간쯤 발기해 있었다. 원치 않더라도 구멍 안의 어느 지점을 건드리면 상대방이 흥분하는지를 태휘도 알고 있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와도 몇 번 관계를 해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휘는 자신의 것을 빼지 않은 채로 희사의 기둥을 쥐어 잡았다. 손바닥 안에 폭 들어왔다. 아래위로 부드럽게 흔들어 주자 희사의 몸이 움찔했다. 희사의 내벽도 구멍 안의 태휘의 기둥을 콱 조였다. 태휘는 자신의 것이 다시 발기하는 바람에 희사의 안에서 뺄 수가 없었다. 희사의 것도 태휘의 손에서 점점 단단해졌다. 태휘는 금세 발기한 자신의 기둥으로 희사의 구멍을 다시 메웠다. 태휘가 허리를 잘게 놀리며 희사의 것을 더 빠르게 훑었다.
자극에 약한 것인지 힘이 빠진 것인지 희사의 것이 사정을 시작했다. 가슴팍까지 튀어 오른 정액은 발갛게 부어오른 희사의 유두위에 하얗게 흩어졌다. 태휘는 그 정액을 희사의 유두부터 쇠골까지 혀로 쓸어 올려 담았다. 작게 벌어진 희사의 입안으로 입에 머금은 정액을 밀어 넣었다. 희사는 숨을 쉬기 위해 자신의 정액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마셨다. 그 모습을 보던 태휘는 참을 수 없어진 욕망에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힘껏 내벽을 향해 처박았다. 희사는 마구 흔들리는 몸에 시야가 점점 무너져 내렸다. 천장이 희사의 눈앞으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희사는 어지럼증에 눈을 감았다. 태휘가 제멋대로 휘젓는 아래의 고통도 어깨의 욱신거림도 남의 일처럼 멀어져갔다. 희사는 잠을 자는 건지 기절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정신을 잃었다.
10.
“…….”
“왜 당신이 희사(僖詞)인 것이야.”
청영이 애절하게 울부짖었다. 해훈과 같은 검은 복면에 흑의를 입은 남자는, 자신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여자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도망가자, 흑영. 나와 함께 도망가자.”
“나는.”
청영이 처참하게 젖은 얼굴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흑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목소리 역시 젖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갈 수 없다. 청영아.”
흑영의 말에 청영이 하늘이 무너지듯 울부짖었다. 여자도 알고 있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을. 희사는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연인으로 보이는 자들의 마지막 헤어짐을 멍하니 지켜봤다. 이젠 자신의 전생도 모자라 남의 과거까지 엿보는 건가.
희사는 자신의 몸을 내려 봤다. 그저 새까맣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서 있는데 발밑은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우리가 도망간다 한들 행복하게 살 수는 없다. 그것은 청영 너도 알고 있지 않는가.”
청영의 눈에는 원망과 슬픔이 복잡하게 뒤섞여있었다.
“랑쿤의 운명은 곧 다한다. 황제가 신을 내쳤으니 신도 그를 내칠 터. 제 아무리 황후가 발악한들 우리가 세워놓은 랑쿤을 먹어치울 순 없다.”
“신의 뜻이든 뭐든 그 어떤 것도 상관없어. 난 단지 당신하고 영생을 약속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후로 너의 소원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허나 이들을 버리고 가지 못한다. 설사 버리고 간다하여도 그들은 나를 찾아낼 수 있다. 나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소임이듯 나 역시 신의 뜻을 지켜야한다.”
희사는 흑영이 뜻하는 그들이 흑의를 입은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
“신의 뜻? 정말 그런 것이 있기는 한가.”
청영이 처연하게 웃었다. 비척거리며 흑영의 발치에서 일어섰다. 청영은 뒤를 돌아 어둠속으로 걸었다. 흑영은 청영의 뒷모습을 보고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었다. 희사는 해훈과도 지독하게 닮은 그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청영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흑영이 시선을 희사에게로 돌렸다. 희사는 꿈속에서의 일이라 놀랍지 않았다. 아마도 흑영은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던 것일 테니까. 흑영이 쓸쓸히 말했다.
“하늘이 우리에게 생을 준 것은 이유가 있어서임에 틀림없다.”
흑영은 마지막말을 끝낸 뒤 복면을 끌어올렸다. 남자는 커다란 그림자가 되어 흩어져갔다. 새까만 그림자는 곧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희사의 눈앞에 또 다른 환영이 펼쳐졌다. 황무지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버석버석함이 도처에 가득했다. 흑의를 입은 자들과 두건을 뒤집어쓴 술사들이 좀 전의 청영만큼이나 힘없이 비척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겨서 피난을 가는 행색이었다. 특이하게도 선두에 선 것은 사람이 아닌 짐승이다. 사막을 걷던 짐승은 기력이 쇠한 것처럼 비실비실 걸었다.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짐승보다도 더 위태해보였다.
그들이 꽤나 오랜 시간동안 아무 음식도 섭취하지 못했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달았다. 그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뒤를 돌아 그들에게 짐승이 말했다. “내 몸을 먹거라.” 희사는 짐승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범이다. 일반 범보다도 덩치가 그 배는 컸다. 흑의인들과 다른 이들이 일제히 범 앞에 무릎을 꿇었다. 범은 랑쿤의 가장 커다란 산인 인랑산(寅浪山)을 지키는 신이었다.
랑쿤은 본래 황제국가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 여러 개의 부족들이 모여 하나의 나라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랑쿤이었다. 그 각개의 부족들은 각자 자신들의 핏줄이 랑쿤을 통일하기를 바라왔다. 긴 시간동안 랑쿤은 그야말로 난세였으며, 통일되기 바로 이전까지도 제후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남의 땅을 침범해 백성들을 약탈하기 바빴다. 랑쿤 곳곳 아수라장의 싸움 속에서 마을이 불타기는 부지기수며, 산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전란의 랑쿤을 통일한 자는 인랑산(寅浪山)이 품고 있는 고을의 제후였다. 제후는 랑쿤의 모든 백성들이 전란 속에 더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제후의 두 아들도 다른 세력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제후는 인랑산을 지키는 범을 찾아갔다. 그 전에도 제후는 자신의 고을을 지켜주는 범에게 늘 극진했다. 그는 일개 짐승이 아니었으며 신에 가까운 자였다. 제후의 고을을 쳐들어오려면 범이 지키는 산을 넘어야했기에 누구도 쉽게 그곳을 넘보지 못했다. 사실상 범은 제후의 고을을 지키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랑산을 지키려 한 것뿐이었다. 범이 살고 있는 인랑산 안에 삶의 터전을 잡은 것은 제후의 아주 오래된 조상이었다. 범은 그 오래된 조상보다 더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조상은 범을 극진히 모시는 대신 이곳에 살 수 있도록 허락받았고 그 관례는 지금의 제후에게까지 이어내려 오고 있었다. 흑의인의 시초는 그 고을에서 범을 모시며 따르는 자들이었다.
범을 찾은 제후가 말했다. “이 난세를 없애고 통일하여 고통 받는 이가 없도록 하고 싶습니다.” 범은 제후의 깊은 뜻을 알아들었다. 범도 랑쿤의 산들이 불타는 것을 더는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인간들의 아귀다툼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자가 바로 신이건만 범은 그것을 알면서도 제후의 뜻을 받아들였다. 제후는 범의 은혜를 받은 흑의인들과 술사들의 도움으로 십년 만에 랑쿤을 통일했고, 랑쿤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4대에 이르기까지 황궁을 지킨 범은 5대째 황제에 이르자 인랑산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다. 황실은 이제 범의 도움 없이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5대 황제 역시 범을 내쫓고 싶어 했다. 백성들은 황제인 자신보다 범을 더 숭배했기 때문이다. 범은 세대를 거쳐 가며 자신의 곁에 머물던 흑의인들, 그리고 술사들과 함께 그 고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범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운명의 날이 왔다. 헌데 이른 아침부터 범의 행동이 이상했다. 기개는 사라지고 없으며 인랑산이 아닌 삭막한 황무지를 향해 끝없이 걸었다. 범을 따라는 자는 그 누구도 범의 뜻을 묻지 않았다. 보름을 가까이 황무지를 걷던 자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자신의 몸을 먹어치우라는 범의 마지막말과 함께, 쿵하고 황무지 위로 거대한 범이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흑색과 적색이 뒤섞인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죽은 범의 몸 위를 잠시 머물렀다. 색을 띤 기운이 숙주를 잃어버린 벌레마냥 이내 범에게서 멀어졌다. 곧 다른 몸을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희사는 그 기운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몸체를 발견 한 것처럼 재빠른 속도로 희사를 향해 다가왔다.
그 기운은 막을 새도 없이 희사의 심장을 향해 그대로 박혀들었다. 컥. 마치 심장에 균열이 가는 것처럼 모든 신체의 흐름이 멈췄다. 희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범 앞에 무릎을 꿇었던 흑의들이 일제히 희사에게로 방향을 돌려 다가왔다. 희사는 그 흑의들에게 시선 뿐 아니라 전신이 압도당했다. 멈췄던 심장이 빠르게 뛰며 두근거렸다. 희사가 몸을 일으켜 황무지를 달렸다. 이따금씩 뒤를 돌아 그들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흑의들은 점점 더 가까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희사가 다시 고개를 돌은 순간 흑의들의 무리에서 복면을 쓴 한 남자가 훌쩍 모습을 드러냈다. 희사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황무지의 모래가 진흙탕처럼 휘감기며 희사의 발을 묶었다. 검은 손이 휙 희사의 목을 끌어안았다. 희사는 더는 달릴 수가 없었다. 복면을 타고 나온 남자의 목소리가 희사의 귓가를 맴돌았다.
“……어, 잡았다.”
****
해훈은 끝없는 배고픔과 갈증을 느꼈다. 꿈을 자주 꾸지 않는 편인데도 오늘은 이상했다. 커다란 범이 자신의 앞에서 힘없이 걸었으며 자신은 그 범을 따르고 있었다. 뒤에는 흑의인들과 술사들이 즐비했다. 해훈은 자신이 왜 범을 따라 걷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대열을 이탈할 수가 없었다. 몇날 며칠을 굶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것처럼 식도가 타들어갔다. 해훈은 날카로운 눈으로 갈증을 해소해줄만한 것을 찾았다.
황무지는 그야말로 죽어있는 땅 같았다. 비척거리며 걷던 범이 쿵하고 몸을 쓰러뜨렸다. 해훈의 심장도 같이 쿵 내려앉았다. 범의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해훈 역시 심장의 고통에 의해 원치 않게 무릎을 꿇었다. 범의 마지막 말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해훈만이 범의 말을 듣지 못했다. 분명 뭐라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심장의 고통만이 전신을 무력하게 했다. 그 때 황무지의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해훈은 이 괴로움을 씻어줄 무엇인가가 주변에 있다고 확신했다.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형형한 눈으로 주변을 둘렀다.
까만 머리를 마구 휘날리고 있는 한 인영이 보였다. 해훈은 그의 모습이 익숙했다. 해훈은 그 익숙함이 갈증을 해소해 줄 것이라 여겼다. 모래를 이끌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까만 머리칼의 인영이 나타난 해훈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곧 뒤를 돌아 황무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해훈은 놓칠 수 없음에 더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굶주림, 그리움, 안타까움, 목마름, 섞일 수 없는 그 모든 감정들이 뒤엉켰다. 까만 머리카락이 해훈의 손끝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이내 그의 몸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됐다. 그러자 심장의 고통은 사라지고 몸을 태우던 갈증도 잦아들었다. 만족스러움에 해훈은 저도 모르게 낮게 웃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희사. 드디어…. 잡았다.”
그 순간 해훈의 품안에서 희사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몰아치는 폭풍에 파도가 잘게 부서지듯 희사는 흔적도 없이 해훈의 품에서 사라졌다. 잡은 것은 착각이었나? 해훈이 손바닥을 내려 봤다. 그의 손 위에 붉은 나비가 올라앉았다. 붉은 나비는 곧 해훈의 품을 벗어나 다른 꽃을 향해 날갯짓을 하려는 것처럼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그럴 일은 없었다. 그 나비는 살아있는 생물이 아닌 조금 화려한 머리 장신구였다. 해훈은 문득 그 장신구가 희사와 굉장히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 손안에 그러쥐자 붉은 나비역시 순식간에 연기처럼 퍼졌다. 이제 해훈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훈의 눈꺼풀 위를 작은 날개가 파닥이며 눈을 깜빡이게 만들었다. 손안에서 사라졌던 장신구의 붉은 나비였다. 붉은 나비가 해훈을 한 바퀴 빙 돌더니 방향을 뒤로 틀어 날기 시작했다. 해훈도 붉은 나비를 따라 적막하고 고요한 황무지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해훈의 뒤를 따르는 흑의들의 발걸음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도착지는 희사(僖詞)가 있는 곳이다. 붉은 나비의 앞으로 아직 눈이 채 녹지 않은 산의 배경이 펼쳐졌다. 이곳은 랑쿤이 아닌 환진이다.
초록이 무성한데도 산의 중턱부터 눈이 녹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저 산은 규성주의 설장산(雪粧山)이었다. 북방인 규성주에 도달하려면 설장산의 고갯길을 넘어야한다. 붉은 나비는 고갯길을 향해 날갯짓하다 산의 중턱에도 한참 못 미친 곳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중턱과는 사뭇 다르게 푸른 풀들이 무성했으며 단 하나의 가택만 그 넓은 대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비는 그 가택 앞에 섰다. 대문 앞의 홍등[紅燈]이 붉게 타오르며 해훈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붉은 나비는 그 시뻘건 홍등에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해훈이 저벅저벅 걸어 문을 열었다. 안을 들여다보자 양털 융단 위에 긴 머리카락이 짙게 흩어져있었다. 이쪽을 봐. 해훈이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등을 보이던 자가 해훈을 향했다.
겁을 먹었는지 반가운 것인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해훈은 더는 다가가지 않고 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양털 융단 위를 가볍게 일어선 희사가 고개를 숙였다. 해훈은 그 잠시의 틈도 봐줄 수가 없었다. 희사를 품 안에 들이려 하자 희사가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옆으로 꺾자 긴 머리채가 출렁하고 희사의 어깨를 벗어나 낙하했다.
“배신하는 자는 믿지 않아.” 희사가 차갑게 말했다. 해훈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난 배신하지 않는다.” 희사가 쓰게 웃었다. 해훈은 그 웃음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치솟았다. 이번엔 희사가 해훈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해훈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맞잡았다. 끓어올랐던 화는 희사의 피부가 닿자 신기하게도 단박에 식어버렸다. “찾으러 가겠다.” 해훈의 말에 희사는 여전히 모호한 웃음만을 머금었다. 희사가 잡은 손을 놓는 순간 해훈은 잠에서 깼다. 손에 쥐어진 칼집이 뜨끈했다.
방금 잠에서 깬 사람답지 않게 해훈은 멀쩡한 눈으로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창밖을 응시했다. 짙은 새벽하늘은 마치 희사의 머릿결 같았다. 칼집에서 손을 뗐다. 마치 좀 전까지도 희사의 피부를 맞대었던 양 그 촉감이 현실적이었다.
흑의대의 노장 감인령의 말대로라면 희사(僖詞)가 된 자를 흑의들은 알수 있다했다. 해훈은 침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어차피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자본 적이 드물었다. 그것은 다른 흑의들도 마찬가지였다. 황비였던 청영을 비롯하여 흑의대들은 전부 서궁에 거주하였다. 청영이 죽은 이후로 이제 서궁의 주인은 해훈이다. 그러나 해훈은 한 번도 공식석상이나 황친(皇親)들이 모이는 만찬에 참석한 전례가 없다.
그저 그들은 제 2황자에게 정신의 병이 있다고 알고 있을 뿐이다. 황제 또한 해훈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실은 해훈이 황제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무관심이 청영이나 해훈에게는 다행인 사실이었다.
해훈은 서궁에 별도로 마련해 놓은 흑의대들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밤새 서궁을 지켰던 궁녀들이 교대를 하는 시간이었다. 복면을 뒤집어 쓴 해훈을 보고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다. 동궁과는 다르게 서궁의 궁녀들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궁의 궁녀들은 글이나 저들만의 수화로 대화를 해야 했다. 그 안에는 청영이 랑쿤에서 데려온 궁녀도 있었고 환진에서 직접 뽑은 자도 그 수가 꽤 되었다. 서궁의 궁녀들은 청영이 살아있을 당시, 항상 그녀와 같은 위치에서 걷는 검은 복면이 어쩌면 제 2황자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 생각을 말로 내뱉은 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 대신 다른 궁에 비해서 서궁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대우가 매우 좋은 편이었다. 한 사람당 다달이 쌀 12되씩은 받았으며 보름에 한번 출궁을 허가 받을 수 있었다.
그 때마다 궁녀들은 다달이 받은 쌀이나 비단을 친정으로 가져갔다. 본래 궁녀들이 도망칠 위험을 고려해 타 궁에선 외출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다. 허나 서궁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며 굉장히 자유로웠고 대우도 후했기에 여태껏 출궁을 했다 돌아오지 않는 자는 없었다. 굶어죽고 귀족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서궁의 이런 대우는 가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앞을 걷는 복면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일 줄은 상상도 못할 테지만 말이다.
해훈은 서현처럼 황제의 자리에 욕심도 없었뿐더러 그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랬기에 황궁에서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말이 많으면 뭐든지 망하는 법이다. 그것이 서궁의 궁녀들에게 침묵을 강요한 이유였다. 서현은 해훈과는 다르게 오래전에 돌아갈 것을 포기하고 이 세계에 완전히 적응했다. 외려 지금은 해훈도 원래의 세계보다 이곳이 더 익숙해졌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곳에서 또 어찌 적응을 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감인령,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군.”
“예, 해훈님께서도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해훈의 등장에 옷매무새를 갖추고 있던 노장이 허리를 숙였다. 서궁에서 그 누구도 해훈을 황자라 부르지 않는다. 해훈으로서도 제 2황자는 여전히 정신의 병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편했다. 해훈이 다리가 긴 둥그런 탁자형 상 옆의 배치된 의자에 앉았다. 노장 감인령은 해훈 다음으로 흑의대를 총괄하는 자였다. 노장답지 않게 그의 방을 구성한 천들은 무척 고상한 것들이 많았다. 해훈이 팔꿈치를 올린 둥그런 탁자 위에 깔린 천도, 눈이 부실 정도의 화려한 금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온통 금색인 천안에는 강렬한 붉은 실이 커다란 양귀비꽃을 수놓았다. 해훈이 그것을 내려 보다 곧 인상을 찡그렸다. 감인령이 험험 거리며 해훈을 마주보고 앉았다.
“처소에 오신 까닭이.”
해훈이 감인령의 말에 복면을 내렸다. 감인령은 그의 맨 얼굴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저리 대단한 미남이면서 늘 복면으로 가리고 다니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정작 본인은 개의치 않으니 상관없지만 제 삼자의 입장에선 그것이 더 안타까운 법이다. 감인령은 해훈의 얼굴을 통해 옛 기억의 한 사람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었다. 해훈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내게 왜 까닭을 묻는 건가?”
“예?”
해훈이 자신의 손을 내려 봤다. 비어있으나 무언가를 그러쥐듯 꽉 주먹을 쥐었다.
“그대가 말했었다. 새로운 희사(僖詞)가 나타난다면 몸이 먼저 알 것이라고.”
“예, 분명 그랬었습니다.”
“본래 처음의 희사(僖詞)는 인간이 아닌 범이었나?”
감인령이 깜짝 놀라며 해훈을 쳐다봤다. 그것은 흑의대로 선택 받을 때 가장 처음 꾸는 꿈이다. 끝도 없는 황무지를 걷다 따르던 범이 죽으면, 그 범의 몸을 먹은 자들이 희사(僖詞)를 지키는 흑의대가 된다. 감인령과 그 외의 흑의들이 그 계시를 받지 못했던 해훈을 흑의대에 들였던 이유는, 실은 청영의 간곡한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해훈이 커감에 따라 무예가 하찮고 생각이 짧은 자였다면, 아무리 청영의 아들이라 해도 흑의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해훈은 노장인 감인령보다 더 무예가 뛰어났고 노련했으며, 자신이 아는 한 남자를 그대로 닮아 현명하기까지 했다.
감인령은 해훈을 보며 누구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만일 해훈이 없었다면 흑의대를 이끄는 것은 감인령이었을 것이다. 감인령은 오히려 해훈의 밑에서 그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더 적성에 맞았다. 그런 그가 정말 희사(僖詞)을 접하는 꿈을 꾸다니. 게다가 감인령은 전혀 느끼지도 못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밤이었다.
“예. 우리들의 희사(僖詞)는 본래 랑쿤의 인랑산을 지키는 범이셨습니다. 그가 희사(僖詞)라기 보단 그 분 자체가 신에 가까우셨습니다.”
“산을 지키는 신이라.”
해훈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비웃음이 내재되어 있었다. 감인령은 가끔 해훈이 이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지켜야하고, 당연히 모셔야하는 신의 뜻을 해훈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계속 말해보아라.”
“그분께서 랑쿤의 황궁에서 나오실 때에 다시 인랑산으로 돌아가시지 못하고 풀 한포기 없는 황무지로 가게 되었습니다.”“어찌 범이 황궁에서 살았단 말인가?”
“그 분이 계셨기에 랑쿤이 통일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저희들의 시초는 그 분을 지키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희 역시 그분이 지키셨던 산의 보호를 받는 백성들이었습니다.”
해훈이 마치 오래된 전래동화를 듣는 다는 식으로 다소 귀찮은 표정을 지어냈다. 해훈은 노장의 말이 길어질 것을 감지했기에 가장 궁금한 것만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 범의 기운을 받은 자가 희사(僖詞)가 되는 것이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
“헌데 그대는 왜 꿈을 꾸지 않았지?”
“해훈님께서는 꿈을 꾸셨습니까? 청영님께서 세상을 뜨신 이후로 저는 아무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랑쿤의 자가 아니어도 희사(僖詞)가 될 수 있나?”
“그것은…”
감인령 역시 알지 못하는 사실에 확답을 주지 못했다. 해훈은 그만하면 되었다는 식으로 손을 내저었다.
“떠날 채비를 하라.”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아니, 사시(巳時)경에 출발한다.”
“예, 그리 준비 하겠습니다.”
해훈은 현란한 식탁 천에 혀를 휘두르며 감인령의 방을 나섰다. 몇몇 흑의들은 수련장처럼 꾸며놓은 마당에서 대련을 하고 있었다. 해훈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워 주변에 아무렇게나 세워놓은 목검을 들었다. 감인령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벌써 여명이 밝았는지, 어둠이 자리를 뺏기고 물러나는 중이었다. 해훈은 복면을 다시 끌어올렸다. 이리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다시 목검을 내려놓고 서현의 집무실로 향했다. 서현 역시 잠이 많지 않은 것은 해훈과 마찬가지였다. 서궁을 벗어나 황궁으로 향하는 찰나 타박타박하고 재빠른 걸음소리가 들렸다. 굉장히 경박한 소리였다. 해훈이 그 소리를 향해 몸을 틀었다. 머리를 몇 번이고 틀어 올려 한 올도 흘러내리지 않도록 장신구를 수십 개나 찔러댄 여자가 해훈에게 다가왔다. 해훈은 여자의 머리 장신구중 하나인 금색의 나비가 여자와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봐, 거기 나를 황궁 내실로 안내하라.”
여자치고는 키가 굉장히 커다랬으며 목소리도 전혀 여성스럽지 못하고 걸걸했다. 해훈은 그런 여자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었다. 여자가 씩씩거리며 해훈의 팔을 움켜쥐었다. 해훈은 거칠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확 뒤로 밀린 여자가 소리쳤다.
“무엄하다. 감히 행성대신의 여식인 내게 이리 굴다니!”
해훈은 행성대신이 누군지 떠올리는데 한참이 걸렸다. 황가의 먼 친인척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 행성대신의 여식이 종년과 대식(對食)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그래. 재미있군. 해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훑었다. (對食)
“네 놈의 눈알을 뽑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해훈이 복면 안으로 피식 웃었다.
“어찌 된 것이 이곳의 자들은 전부 벙어리인 것이냐. 사람이 말을 했으면 대꾸가 있어야지 답답할 노릇이다. 네놈도 혹 벙어리인 것이냐? 그럼 이번 무례는 봐줄 터이니 나를 내실로 안내해라.”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는 여자를 뒤로 한 채 해훈이 황궁으로 걸음을 틀었다. 여자를 황궁 내실로 데려다 줄 생각은 없었으나 자신도 용건이 서현의 집무실에 있으니 따라오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여자가 연방 입을 놀리며 궁시렁댔다.
“예쁘면 뭐하나, 내 말에 대꾸도 없는 벙어리인데. 아니 난 벙어리도 괜찮은데 내가 싫은가? 답답해 죽겠네. 확실히 황궁이라 그런지 계집들 얼굴이 반반하단 말이지.”
해훈은 마치 사내가 떠드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종년과 대식을 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싶었다. 그 아비가 황실에 연이 많아 딸의 정인을 찾으러 내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해훈은 왠지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희사에게 느끼는 감정이 저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인가? 같은 성에게 끌리는 것은 희사가 처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자에게 끌려본 적도 없다. 그 전 세계에서도 이쪽에서도 마음이 동요한 것은 단 하나 희사뿐. 딱 한번 이 곳으로 넘어와 이 세계의 희사를 본 적이 있었다. 희사와 그의 부모가 현성을 보러 황궁을 찾은 날이었다. 서현, 현성과 같이 있는 희사를 본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느낌은 이 모든 것들이 마치 희사 때문에 벌어진 일 같다는 생각이었다. 희사는 단순히 이 세계의 자이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그에게 자신의 집에서 일할 것을 제안하고, 그가 해준 음식을 먹으러 직접 찾아가고.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까맣고 잔잔한 눈빛에 매료되었던…. 그러한 기억들은 해훈 혼자만의 추억이다. 그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해훈은 그래서 그 이후로 희사를 보지 않았다.
“오, 너 제대로 찾아왔구나. 수고했다. 그럼 난 가보겠다. 헉, 저 계집 가슴 봐라.”
해훈은 여자의 수준 낮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확실히 재미있는 여자다. 이곳의 여성은 대게 조용히 남자를 따르거나 집안에서 수를 놓는 것이 전부건만. 저리 발정 난 짐승처럼 굴다니. 해훈이 더는 여자가 따라오지 못할 빠른 걸음으로 흑의의 뒷자락을 날리며 사라졌다. 여자는 자신이 궁녀에게 정신을 판 사이 자신을 내실에 데려다 준 남자가 사라진 것을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아했다.
해훈은 복면 안으로 연신 비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자신도 저 여자처럼 본능에 충실하게 굴었다면 희사와의 관계가 어찌 되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현세에서의 희사는 자신에게 호의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너무 오래도 전의 일이라 희사의 반응이 어땠는지도 희미하다. 무의미한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서현의 집무실에 도달했다. 예상대로 서현이 온갖 서류를 쌓아두고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군.”
“너 역시 한가해보이진 않는데.”
서현이 서류와 인장을 한꺼번에 옆으로 밀었다. 해훈의 눈빛을 보더니 서현이 웃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나?”
“이곳에 오다가 행성대신의 딸을 봤다.”
“헌데?”
“종년과 대식을 했다는 소문이 정말인 것 같더군. 여자 주제에 여자를 밝히더란 말이지.”
“하하, 그것이 뭐가 중요해?”
“행성대신이 그 딸의 정인을 마련하기 위해 황궁에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나?”
“그럼 상대 할 남자가 불쌍할 따름이군. 헌데 네가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갖다니…. 나는 그것이 더 신기하군.”
서현이 여전히 웃으며 해훈을 보자 해훈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사실상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서로가 알았다.
“북방에 다녀오겠다.”
“규태휘를 끌고 나오는 것이 더 빠르지 않겠냐고 한 것이 엊그제인데, 마음이 왜 변했지?”
“규태휘가 바로 규성주로 들어갔을 것 같지 않다.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규성주의 궁에 희사를 가두진 않겠지.”
서현이 서랍을 열어 둘둘 말린 문서를 해훈에게 내밀었다. 해훈이 그것을 펼쳤다. 천천히 적힌 글을 읽어나가던 해훈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규태휘가 보낸 서신이지. 북제후가 많이 아프기에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는군. 그것도 상(喪)이 치러지는 기간에 말이야.”
서현의 목소리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꽃처럼 화사한 얼굴로 독을 가득 담고 웃었다.
“만일 규태휘가 희사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해훈의 꿈속에서 본 희사가 있던 가택은 북방이 확실했다. 꿈속에서 본 것이니 서현은 알 리가 없다. 해훈은 희사를 잡아온다 하더라도 서현에게 되돌려주고 싶지 않아졌다. 해훈의 꿈이 맞다면 이젠 흑의대들도 희사를 따를 것이다. 해훈은 앞으로의 일이 꽤나 복잡해질 것임을 예견했다. 서현과 해훈은 서로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을 메웠다. 서현은 한참이 지나서야 해훈의 말에 대꾸했다.
“희사가 그냥 도망친 것이라면 다시 잡아와서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지. 헌데 말했듯이 희사가 혼자의 힘으로 도망쳤다면 황성(皇城)안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서현이 해훈의 눈을 쏘아 본채로 말을 이었다.
“황성 안은 서현 네가 이미 최고의 수색자들을 보냈을 테고, 그런데도 희사를 찾지 못했으니 규태휘가 데려갔다는 말인가?”
“너 역시 그리 확신하지 않나.”
해훈은 서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집무실을 나섰다. 서현도 북방으로 떠나는 해훈을 붙잡지 않았다. 곧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생각보다 여정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해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뒤를 돌았다.
해훈이 나서고 집무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서현이 왼손을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천장에 가려져 있던 한 인영이 깃털이 떨어지는 것보다도 가볍게 바닥에 내려섰다.
“해훈을 따라가라. 매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고하라.”
“예, 분부 받들겠습니다.”
그 인영은 해훈과 같이 복면을 쓰고 있었으나 체구가 훨씬 작아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여자라고 착각 할법했다. 그 인영은 내려온 것과 같이 빠른 속도로 집무실의 천장위로 모습을 감췄다. 서현은 천장을 타고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얕게 울림과 동시에 밀어놨던 서류를 다시 자신의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서현은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하물며 현세에서 같이 넘어온 해훈일지라도. 남이 자신을 믿게 하는 것은 쉬우나 자신이 남을 믿는 것은 어려웠다.
황제가 병상에서 오래 누워있을수록 서현의 일은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그 노인도 살만큼 살았으니 빨리 세상을 떠주는 것이 자신에게는 이득이었다. 자신이 황제가 되면 바꿔야 할 규율과 법도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반대하는 이가 있으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면 되는 것이고, 희사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못을 박아 둘 것이다. 희사는 현세에서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도 자신에게 과도할 정도의 적의를 내비쳤다. 그래, 그래도 차라리 지금의 희사가 더 나았다. 원래 이 세계의 희사는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첩자를 부려 자신 대신에 어깨를 다친 것도 마음이 약해져서였는지 아니면 그것 역시 계획의 한 부분이었는지는 모른다. 희사가 자신의 앞을 막아설 때 첩자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그대로 깜빡 속았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어쨌든 현세의 희사 역시 이곳으로 돌아왔기에 아직도 적의가 있다면 그 불신을 없애주면 되는 것이다. 규태휘라는 방해물이 끼어들 줄은 몰랐으나 앞을 막는 것은 없애면 그만이다. 그것이 설령 해훈일지라도.
전겁환상(前劫喚想) 1부-완 by
2010-04-23 00:47:17 , Monday
11.
간신히 눈을 뜬 희사는 관자놀이의 지끈거림에 입을 벌렸다. 그 뿐만 아니라 온몸이 때려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특히 엉덩이와 그 안쪽의 둔탁한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각을 선사했다. 희사가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초점을 맞췄다. 부드러운 양털 위에 몸이 전부 감싸여있었다. 이곳의 침상은 대게 딱딱했는데 마치 솜털에 안겨있는 것처럼 푹신했다. 태휘는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희사의 몸도 누군가 정성스레 닦아놓아 끈적함이라든지 찝찝함은 없었다. 희사는 계속 엉덩이 안쪽의 구멍이 화끈거렸다.
그럴 리는 없지만 무언가가 들어있는 것 같은 기분. 몸의 부자유에 시선을 내리자 손목과 발목이 다시 포박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깨의 천도 새로 갈아져있어 희사가 기절한 사이 치료를 한 것 같았다. 침상의 천장을 향해 몸을 틀었다. 희사는 족히 하루는 잤다고 생각했다. 잠을 자는 동안 꿈속에서 만난 것은 해훈이었다. 범이 죽고 그 기운이 자신을 덮쳤다. 희사는 그것이 덮쳐올 때 범의 소리를 들었다. ‘네가 바로 희사(僖詞)다’ 희사는 그 순간 이후 평소와는 다른 심장의 두근거림이 이상했다. 몸은 지나치게 힘들었지만 정신은 그에 반하듯 매우 맑았다.
조금 전 눈을 뜨기 전까지도 흑의인들이 말을 타고 빠르고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그 선두에는 해훈이 있었고, 그 아주 뒤로는 그들과 비슷한 흑의였으나 보통 성인의 체구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자가 보였다. 흑의대에 속한 무리 같지는 않았으며, 뒤쫓는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레 미행하는 모양새였다. 희사는 그들이 자신을 향해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청영이 자신에게 이 모든 사실을 이야기 해준 것은 어쩌면 자신이 희사(僖詞)가 될 것임을 예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은 랑쿤의 자도 아닌데 희사(僖詞)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허나 그렇다하여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갖가지 도술을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천둥과 비구름을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희사(僖詞)의 능력은 각 개인에 따라 달랐다. 흑영과 청영은 인간의 영혼을 불러들일 수 있었으며 그에 따른 삶의 시간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저들의 마음대로 그 운명을 바꿨기에 분명 벌이 주어진다. 그것이 희사 역시 어떤 것일지는 알지 못했다.
희사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자신이 신의 뜻을 전달하는 희사(僖詞)가 되었다고 해도 확 와 닿는 무언가가 없으니 당연했다. 어쩌면 앞으로의 미래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헌데 자신이 유곽에 가지 않았고, 태휘가 자신을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희사는 눈을 감았다. 빨라지는 심장의 고동에 흑의인들이 점점 자신에게 가까워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희사(僖詞)와 그를 지키는 자와의 교감이었다. 어쩌면 해훈과의 교감일지도 모른다.
희사는 아직 알지 못하나 그의 가장 큰 힘은 바로, 흑의대를 희사의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매가 신경질적이게 울며 흑의인들의 위를 날았다. 희사는 그 매가 누구의 것인지 알았다. 서현. 그의 매였다.
까아아악. 매의 소리는 정신을 깨우고도 남을 만큼 날카로웠다. 흑의들은 땅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하늘의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희사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묶여있어 도망갈 수 없고, 규태휘가 자신을 북방의 어느 곳으로 끌고 왔는지도 알 수 없다. 마냥 해훈이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도 희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희사(僖詞)가 된 이상 흑의들은 끝까지 자신을 따라다닐 것이 분명했다. 흑의들의 사명은 희사(僖詞)를 지키는 것이다. 청영은 모든 악연을 없애기 위해 자신들을 이곳으로 다시 불렀다고 했다. 그것이 그리 쉽게 해결이 될 일인가. 자신만 해도 서현의 대한 적개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면 서현과 해훈 그 누구에게도 연관되지 않고 조용히 숨어 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 되었으니. 상황을 어찌해야할지 생각해도 난감하기만 했다. 허나 이 모든 생각도 자신이 자유롭고 볼일이다.
희사는 조금의 틈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손목과 발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살만 쓸릴 뿐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신의 뜻을 받드는 자가 되었으면 이정도 결박 따위는 쉽게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희사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침상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든 행동을 멈췄다. 쳐다보지 않아도 다가오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꽤나 피곤했나보군. 내리 이틀을 잤다.”
규태휘는 내심 걱정된다는 목소리를 지어냈다.
“계집애처럼 입을 꽁 다물고 있지 말고 뭐라 말이라도 해봐. 배가 고픈가?”
희사는 기가 막혀서 규태휘를 노려봤다. 규태휘가 고개를 설레설레 짓더니 안의 허리춤에서 예의 단도를 꺼냈다. 희사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규태휘는 희사의 다리를 묶은 밧줄을 썩은 줄 자르듯 쉽게 잘라냈다.
“혹시라도 도망칠까 걱정이 되어 말이지.”
“나를 어쩔 셈이야.”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도 참 속이 편한 자다. 안 그래?”
그럼에도 여전히 규태휘의 눈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규태휘는 희사가 현세에서 온 것은 알아도 랑쿤의 희사(僖詞)가 된 것은 알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규태휘에게 억지로 잡혀있는 것보다 황궁에 있는 것이 더 안전했다. 서현은 그럴 수 있음에도 규태휘처럼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규태휘가 갑작스럽게 희사를 일으켜 세웠다. 불안한 눈으로 올려보자 규태휘가 희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걱정하지 마, 아직 열상이 있다. 다 나을 동안은 건드릴 생각 없으니.”
자신이 자는 사이 이 자가 함부로 몸을 봤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규태휘의 말대로 그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엉덩이 안쪽의 살이 욱신거렸다. 희사가 문 앞에서 미동이 없자 규태휘가 귓가에 속삭였다.
“나가기 싫으면 얼마든지 이곳에 있어도 돼. 충분히 억지로 끌고 나갈 수도 있으니까.”
감싸 안은 어깨를 꽉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희사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규태휘를 따라나섰다. 밖에는 자신을 황궁에서 납치해왔던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규성주로.”
희사가 의문을 담아 올려봤다. 규태휘가 아아. 하면서 희사의 허리를 잡아 마차 위로 올렸다.
“규성주가 어딘지 모르나? 북방의 모든 지역을 칭하기도 하며, 북방의 제후가 살고 있는 궁을 말하기도 하지. 계속 이곳에 놔두고 싶었지만, 나도 규성주를 벗어나지 못할 일이 생겨서 말이야.”
마차 안에서 마주본 규태휘가 아쉽다는 눈길로 희사를 훑었다. 두 손이 묶여있는 채로 희사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덜컹거리며 마차가 출발했다. 희사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싫어서 계속 눈을 감은 채였다. 차라리 잠이라도 오면 좋을 텐데, 너무 오래 자뒀는지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한참을 이어지던 침묵을 참던 규태휘가 마차의 작은 창을 가려놓은 나무 발을 옆으로 밀었다. 자신에게 시선을 두지 않는 희사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답답하면 밖을 보기라도 해. 이만한 장관은 환진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으니까.”
규태휘가 발을 걷은 순간부터 희사의 눈은 이미 창밖을 향해있었다. 그의 말 대로였다. 장관이라. 규성주를 넘어가는 설장산의 고갯길은 그야말로 순백의 향연이었다. 동물도 사람도 거닐지 않은 눈 덮인 흰 산은 햇빛에 반사돼 눈이 시릴 정도였다.
“한여름이 되어야 겨우 눈이 녹지. 헌데 저 꼭대기는 한 번도 눈이 녹은 적이 없다.”
규태휘는 마치 동네자랑이라도 하는 한량처럼 들떠보였다. 희한했다. 밖의 눈만 보자면 추운 한겨울을 연상시키나 좀 전까지 갇혀있던 가택이나 마차 안은 봄의 훈훈한 기운이 머물러있었다. 자신들이 지나는 고갯길 역시 산봉우리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아 보이건만, 아예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었다. 희사는 그제야 지나치게 실감이 났다. 정말로 현실과 멀어졌구나. 이곳은 진정 전생의 환진이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넋 놓고 멍하니 있다간 다른 이들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게 될 것이다.
“네게 궁금한 것이 있다.”
규태휘는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희사에게 말을 이었다.
“1황비의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도 확신이 서질 않는다.”
희사는 그제야 규태휘에게 시선을 옮겼다. 늘 장난기 섞여있던 음성이 웬일로 사뭇 진지했다. 빛을 등진 규태휘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늘이 져있었다.
“네가 그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후생에서 돌아왔다면 원래 이곳의 너는 어찌 되는 것이지? 그리고 원래의 그들은 또 어찌되는 것이고?”
희사는 뜻을 알 수 없는 규태휘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내 말이 어려웠나? 원래 이 세계의 너희들은 어찌됐느냐는 말이다.”
규태휘의 궁금증은 그야말로 자신도 생각지 못한 내용이었다. 후생에서 자신들이 전생으로 돌아옴으로써 원래 전생의 자신들은 사라졌다. 쉽게 말해 후생에서 온 자들에 의해 먹혔다고 보면 된다. 전생의 서현과 현생의 서현은 같은 자가 아니다. 아니 같은 영혼을 가진 자는 맞으나 그 안의 내용물은 엄연히 다르다. 자라온 세계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조차 전생의 자들과 현생이 자들이 동일하지 않다. 청영의 말대로 후생의 삶을 끌어온 것은 아예 다른 사람을 새로운 세계로 끌어들인 것과 같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뜨고 나니 난데없이 떨어진 곳이 환진이라. 자신은 단편적이라도 전생의 기억이 존재했으나, 서현과 해훈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전생은 이미 한번 끝난 세계였다. 그러니 현생의 자들이 전생의 자들을 먹어치웠다는 이야기도 모순적이다. 규태휘가 궁금해 하는 것은 희사도 답해줄 수 없는 의문이었다.
“게다가 1황비의 말대로라면 넌 전생으로 돌아온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지. 반대로 생각했을 때 내가 만일 전생으로 돌아갔다면 너처럼 모든 상황을 당연하단 듯 받아들이진 않았을 거다. 분명 2황자처럼 꽤나 오랜 시간을 혼란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
“네 모습을 봐. 너무 순순히 1황비의 말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이곳에 적응하는 모습 또한 사사로움이 없지. 황비의 말이 아니었다면 난 네가 후생에서 온 자라고는 전혀 상상치도 못했을 거다.”
“정확히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말해.”
“태자인 서현 역시 너와 같았다고 생각된다. 그 역시 전생으로 넘어온 순간 바로 적응했고… 그것도 그 어린 나이로 돌아왔는데 말이지. 분명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을 것일 텐데도 아무거리낌 없이 그 자리를 유지했다. 참 이상하지 않나? 너와 태자는 곧바로 이곳에 적응했는데 2황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여전히 그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던데 말이야. 뭐 진실은 아니겠지만. 하하.”
장난기에 둘러싸인 모습은 규태휘의 실체가 아니었다. 그 웃음 안으로 늘 계산하고 사람을 재보았다. 희사는 지금 와서야 당연하다 생각했다. 자신이 현생에서 돌아온 자이기 때문에, 원래 있던 곳의 사람과 이곳 사람의 다른 점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규태휘도 자신이 알던 자와 같은 모습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규태휘는 엄연히 이곳만의 사람이다. 자신이 모르던 그의 전생의 모습.
서현만 해도 전생의 자신과 현생에서 돌아온 자신이 다르다했다. 며칠 사이에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꿈이 아닐까 싶었다 말했다. 결국 현생에서 알고 있던 모든 이들은 전생의 이들과 같은 모습을 했음에도 결국엔 껍데기만 같을 뿐이다. 자신도 전생의 기억에선 지금보다 심적으로 더 약했다. 허나, 지금의 자신은 그때와 같이 마냥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또한 더 냉정해졌으며 현세를 살아가며 더욱 무감각해졌다. 어쩌면 진정 청영이 원한 것이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영혼을 가졌으나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돌아와 얽혀버린 실타래를 풀어버리라는.
“그래서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 스스로 결론을 내려 봤지. 혹시 넌 후생을 살아가면서도 이곳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던 것은 아닐까라고. 태자 역시 마찬가지고. 하하. 너무 내 억측이 심했나?”
그 말 그대로다. 날카로웠다. 규태휘는 눈을 가늘게 하고 웃었다. 그 안의 눈빛은 사람을 캐보는 것처럼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규태휘의 말을 듣기만 하던 희사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전에 말했듯이 당신에게 있어서 전생이든 후생이든 어떤 것도 중요치 않다면서 무엇이 그리 궁금한 거지?”
“아니, 내 예상이 맞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희사의 불쾌하다는 듯한 말투에 규태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단한 꿍꿍이가 있는 사람처럼 표정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희사는 더 캐물을까하다 제 좋을 대로 생각하게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물어봐야 더는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규태휘는 고개를 창에 대고 밖을 보면서 규성주에 당도할 때까지 한마디도 붙이지 않았다. 희사 역시 다시금 시작되는 어깨의 통증에 인상을 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규성주는 희사가 있던 가택에서부터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오전에 출발해 정오가 조금 되기 전에 도착했다. 희사는 직접 눈으로 본 규성주 궁의 그 거대함에 다시 한 번 놀라움을 속으로 갈무리했다. 황궁은 그야말로 화려한 서현의 모습을 본떴다 싶다면, 규성주는 환진의 거대한 방어진 같았다. 성곽의 높이는 황궁의 배는 됐으며 금칠을 하여 그림들을 새겨놓아야 할 곳은 딱딱한 돌 벽이 전부였다.
“화려한 황궁과 같다 생각했다면 미안할 따름이군.”
규태휘가 희사의 손목을 묶은 밧줄마저 잘라내며 말했다.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선 이상, 더욱이 쉬이 도망갈 수 없을 것임을 뜻했다. 규성주 궁의 내부로 들어서며 규태휘가 희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희사의 체구는 보통 성인 남자보다는 작으나 어디를 봐도 딱히 여자 같지는 않았다. 환진에서는 남색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인가 싶었다. 생각해보면 남자를 파는 유곽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암암리에 동성이 인정받고 있음을 뜻했다.
규성주의 궁은 황궁과 달리 동서로 나뉘어져 있지 않았다. 오로지 중앙의 하나뿐인 건물이 궁의 전부였다. 희사가 살던 유악 제후의 가택보다는 규모가 이곳이 더 컸지만 서현의 동궁보다는 작았다. 궁의 긴 복도를 걷자 하인들이 규태휘를 보고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처음 보는 자를 데려온 터라 그들의 시선은 규태휘의 얼굴보단 희사의 얼굴에 시선이 더 집중돼있었다. 자신들의 주인이 성에 있어서 남녀를 가리지 않는 것은 알았으나 궁에 직접 데리고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 중요한 시점에 말이다.
“이곳이 네 방이다.”
규태휘는 희사를 복도의 중간에 위치한 방으로 밀어 넣었다. 서현도 그렇고 규태휘도 그렇고 방을 꾸미는 취미가 좋지 않았다. 온통 다홍색이라니. 희사는 꽃물을 빼내어 염색을 들인 방안의 온갖 비단 천을 경악스런 눈으로 훑었다. 탁자를 가린 덮개도 침상의 이불 조차도 죄다 다홍이었다. 동궁보다 한수 위였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면 당신 역시 위험해지는 것이 아닌가? 분명 황궁에서 사람이 올 것인데.”
“물론 그렇겠지. 헌데 내가 보기엔 희사 너는 황궁을 그리워하는 것 같진 않군.”
너만 얌전히 있으면 들킬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희사는 대체 이 남자가 어디까지 직감한 것인지 무서워졌다.
“네 부모와 친인척을 전부 죽인 남자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가. 그래 차라리 좀 더 인간적인 내가 낫지 않나.”
“겁탈이 취미인 자가 할 말 같진 않군.”
희사가 잔뜩 비꼬며 대꾸했다. 규태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빨리 몸조리를 하도록 해. 그래야 더 화끈한 밤을 보내지.”
질척거리며 엉덩이를 매만지는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면 토식이도 겁먹는다.”
규태휘가 말하며 손짓한 방향의 끝에는 토실한 엉덩이를 가진 토식이가 있었다. 탁상에 달린 의자에 얌전히 앉아, 동그란 눈을 연신 깜빡이며 이쪽을 응시했다. 곧 사태를 파악했는지 껑충 뛰어서 희사의 곁으로 다가왔다. 희사는 자신의 발밑까지 와서 부비적거리는 토식이를 가만히 내려 봤다. 토식이가 몸을 틀더니 희사의 앞에 서있는 규태휘의 신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앞에서 한껏 몸을 웅크렸다. 희사는 그 모양새가 꼭 하얀 솜털뭉치 같다고 생각했다. 몸이 한번 부르르 떨리더니 엉덩이 밑으로 작고 동그란 것들 몇 알을 쏟아냈다. 규태휘가 기가차서 한쪽 발을 들어올렸다.
“주인도 못 알아보고 아무데나 질러대는 자식 같으니.”
볼일을 끝낸 토식이가 다시 희사의 앞으로 뛰어왔다. 희사는 마치 든든한 아군이라도 생긴듯한 기분이었다. 뭐 사실 든든한이 아니라 귀여운이 맞겠지만. 고소한 마음에 토식이를 가볍게 들어 안았다. 희사의 품에서 토식이가 규태휘를 빤히 쳐다봤다. ‘뭐 어쩔 건데.’ 라는 도전적인 눈빛에 규태휘가 희사의 품에 안긴 토식이의 머리를 쑥쑥 쓰다듬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별로 크지 않은 규태휘의 목소리에 문 앞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음식을 준비하도록 하라. 속이 비어있으니 부담이 없는 것들로만 가져오고.”
규태휘가 토식이를 품에 안은 희사를 보며 말했다. 희사는 그제야 규태휘의 말에 속이 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예 음식이 들어가지 못한 속은 먹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멍한 상태였다. 희사는 볼일 다 봤으면 나가라는 식으로 규태휘에게서 시선을 뗐다. 토식이가 앉아있었던 의자로 가 몸을 기댔다. 희사의 허벅지에 얌전히 안긴 토식이도 편안한 자세를 취하며 앞발을 쭈욱 앞으로 뻗었다.
“달리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말해. 이곳은 황궁과는 다르게 음식이 남아나질 않아서 말이지.”
“나가지 않을 건가?”
“함부로 네 몸을 품은 상대에게 차가운 것은 이해해도 네게 기회를 주는 내게 너무 그러면 안 되지.”
“기회?”
“내 예상은 대게가 들어맞지. 설마하니 태자에게 돌아가고 싶어? 혹 그가 좋아서 태자가 원하는 대로 동궁에 갇혀있던 것은 아니겠지?”
“이곳이나 동궁이나 다를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군.”
“난 자유롭게 해줄 수는 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네가 갈 수 있는 곳이 있기나 한가 싶은데.”
자신은 눈앞의 남자에게 겁탈을 당했다. 허나, 전생처럼 무기력하게 원망만하고 있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전생의 꿈만을 통해 서현을 증오했다. 사실 그것보다 현생의 자신이 더 혐오스러웠던 것은 전생의 약한 자신이었다. 마지막에는 해훈에게까지 기대어 배신감을 맛봤고 그로인해 죽음을 선택했다. 지금 와 생각하면 별 것 아니다. 이제 엉덩이 안쪽의 구멍이 좀 뚫렸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증오만 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물론 당할 때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아팠으나 참지 못할 고통은 아니다. 게다가 착각일지언정 눈앞의 남자도 다시 그러한 강간을 반복할 것 같지가 않았다. 서현과의 잠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다소 부드러워졌던 자다. 그 생각은 희사의 예상대로였다. 규태휘는 희사가 서현과 성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억지로 품은 것을 조금이나마 후회했다. 그래도 한번 맛본 희사의 맛은 가히 황홀함 그 자체였다.
“과연 내가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의미심장한 희사의 말을 규태휘는 놓치지 않았다.
“태자에게서 피하려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 수 있다.”
“서현만이 나를 찾는 건 아니지.”
“어차피 숨기는 것은 똑같다.”
“내가 왜 당신의 도움을 받아 숨어야 하지? 필시 당신도 내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 이리 권유하는 것이겠지.”
“원하는 것은 희사 너 하나인데. 굳이 말해야 아는 건가.”
“나는 당신과 자는 것을 원치 않아.”
“언제고 원하게 만들어주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만큼 답답한 것이 없다. 규태휘와 옥신각신하는 사이 음식이 들어왔다. 규태휘의 바람대로 죽 같이 묽은 음식과 연한 나물이 대부분이었다. 순식간에 탁상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자 먹는 것이 기억났다는 듯 위가 아우성을 쳤다. 희사는 수저를 들어 열심히 죽을 퍼먹었다. 노란색의 단맛이 나는 것이 호박을 고아서 만든 죽 같았다. 한 그릇을 금방 비워내도 양이 얼마차지 않아 옆에 있는 두 개의 쌀죽그릇도 비워버렸다. 의외의 모습에 규태휘가 조금 놀란 눈치였다.
토식이가 희사의 무릎에서 탁상으로 깡총하고 뛰어올라 나물 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규태휘가 토식이를 들어 올리려 하자 희사가 만류했다. 규태휘는 팔짱을 낀 채 희사와 토식이가 먹는 모습을 구경하며 실소를 머금었다. 근 이틀이상을 굶었으니 당연할지도.
“부족하면 더 가져오도록 시키지.”
“아니.”
희사는 아직도 나물에 코를 박은 토식이를 놔둔 채 침상을 향해 걸었다. 다홍색의 이불은 취미가 아니었으나 덥고 자는데 포근하면 그만이었다.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가자 규태휘가 헛웃음을 쳤다.
“난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는데.”
“잘 거니까 나가주지 않겠어.”
희사는 규태휘의 대꾸도 듣기 전에 눈을 감아버렸다. 규태휘와 시답지 않은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느니 자는척해서 내보내는 게 더 편했다. 귓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희사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규태휘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희사가 계속 무시할 것이 자명했다. 봄나물을 입가에 범벅을 한 토식이를 깨끗이 닦아 희사의 배 위에 얹어놓았다. 저리 둘을 같이 놓으니 가슴 한 구석에서 만족감이 올라왔다. 자신이 가지고 싶어서 못 가진 것이 있던가. 희사 역시 처음이 좋지 않다 뿐이지 얼마든지 넘어오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설령 그것이 오만에 가까운 착각일지라도. 희사는 그저 자는 시늉만 할 생각이었는데 규태휘가 나가는 시간이 길어지자 정말로 잠에 빠졌다. 규태휘는 희사가 잠에 들 때까지 한참을 서서 지켜보다 곤한 숨소리가 퍼지자 방을 나섰다. 물론 밖에서 문을 잠그는 것은 있지 않았다.
12
희사는 꿈속에서 흑의대, 즉 해훈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았다. 잠을 안 잘 수는 없으니 좋던 싫던 해훈과 교감하기 마련이다. 서로가 전달하려는 내용은 같은 시간에 잠을 자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했다. 한쪽이 원하면 어느 때고 다른 한쪽의 꿈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번에는 해훈이 원하는 것이었다. 희사는 해훈이 설장산 밑에 위치한 가택에 도착한 것을 보았다.
간발의 차이로 희사를 놓치고 흑의대 전원이 규성주로 향하고 있었다. 곧 해훈도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서현의 매와 체구가 작은 미행자는 보이지 않았다. 따돌린 것인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희사는 몽롱한 기분을 유지한 채 꽤 오랜 시간을 침상에 누워있었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지.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마치 알바를 처음 시작했을 때 그 다음날 일어나지 못했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은 드는데 몸이 좀체 따라주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세에서의 일도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희사는 몽롱함속에서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청영이 소원대로 악연을 끊는 것도 희사의 목표는 아니었다. 단지 조금 더 강해지고, 조금 더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을 뿐이다.
희사는 그 마음을 가슴에 새겨 넣는 순간 몽롱함이 가셨다. 아랫배가 따끈따끈했다. 희사가 몸을 일으키자 토식이도 몽롱한 눈을 들어 희사를 멀뚱히 쳐다봤다. 희사는 토식이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겼다. 작은 동물이 참 영리하기도 하다. 토식이는 아직 덜 깬 몸을 이끌고 희사의 아랫배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금세 다시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희사는 토식이가 다시 깰세라 조심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자는 사이 탁상에 음식들은 치워지고 시원해 보이는 도자기 색의 찻잔만 놓여있었다.
밥을 먹고 바로 잔 터라 입안이 텁텁했다. 희사는 그것을 들어 한 번에 들이켰다. 규태휘의 권유를 다시금 생각했다. 해훈이 도착하기 전 결정을 내려야한다. 다시 서현에게 돌아가 유곽에 갈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아예 도망칠 것인지. 만일 해훈이 억지로라도 황궁으로 자신을 데려간다면 그것에 대한 대비 또한 해야 한다. 갑작스레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희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토식이도 커다란 소리에 깜짝 놀라 침상에서 부리나케 뛰어내렸다. 작은 동물은 쉽게 겁을 먹는다. 침상의 구석으로 숨었는지 털 뭉치는 보이지도 않았다.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규태휘가 문에 서있었다. 양옆으로 느슨하게 여민 옷은 규태휘의 쇄골부터 가슴팍을 그대로 드러냈다. 딱히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낮잠이 꽤나 길었군.”
해는 아직 기울지 않았다. 자신을 무시하고 잠이 든 것에 대한 비꼼이 가득했다.
“이곳 구경이라도 하겠어? 여유가 있는 것도 분명 잠시일 테지만.”
희사는 규태휘를 따라 방을 나섰다. 하릴없이 규성주를 구경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단 어느 한곳에 계속 갇혀있는 것에 이골이 났다. 궁 밖으로 아예 나서니 사실 규성주 내부는 이중의 성곽 안에 둘러싸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앙의 궁을 주변으로 한 차례 성곽이 둘러싸고 있고 그 밖으론 백성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 아주 밖으로 규성주를 온통 둘러싼 성곽이 있었다. 사방이 막힌 규성주는 어찌 보면 하나의 작은 나라와도 같았다.
환진의 봄이 만연했음에도 이곳의 꽃은 이제 겨우 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북방의 봄은 짧다. 여름은 덥지 않고 서늘한 편이며 추위는 혹독한 편이었다.
“어차피 아름다운 정원은 황궁이나 유악에서 질리도록 많이 봤으니 이런 것도 나쁘진 않을 테지.”
“아름다운 것은 질리지 않아.”
그 예로 유악산은 절대 질리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 환진의 태자 같이 말이다.”
규태휘는 무언가 오해한 듯 싸늘하게 지껄였다. 중앙의 궁 밖으론 그의 말대로 정원이라 할 것도 없었다. 그저 황색과 색이 밋밋한 초록이 전부였다. 그것을 보안하듯 북방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동물을 많이 길렀다. 자신이 있던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양떼들도 쉽게 보였다. 환진에서 나는 양털은 거즌 북방에서 나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사를 앞에 두고 규태휘는 뒤에서 천천히 따라왔다. 조금 싸늘했지만 겉옷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규태휘가 희사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은 딱히 북방을 구경시켜주고자 함이 아니었다. 중앙의 궁에서 직진으로 일각정도 걷다보면 연못에 딸린 누각이 나온다. 규태휘의 목적은 그곳이었다. 희사에게 말했던, 북방에서 그가 한동안 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도 그곳에 존재했다.
규태휘는 희사가 서현을 싫어하는지 또는 좋아하는지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 곁에 맘 편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 하에 희사에게 권유를 한 것이다. 일종의 도박이다.
희사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며 걸었다. 문득 불어온 바람에 머리를 쓸어 올렸다. 눈앞의 누각에는 푸른색의 긴 장포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희한하게도 이곳의 자 같지 않게 머리카락이 짧았다. 규태휘가 조금 걸음을 빨리해 그에게 다가갔다. 규태휘가 자신을 지나쳐가는 동안에도 희사는 느릿한 걸음을 서두르지 않았다. 규태휘의 인기척에 푸른 장포의 남자가 뒤를 돌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는 희사가 처음 보는 자였다. 남자도 눈에 띌만한 미남이었으나 서현처럼 아름답기만 한 얼굴은 아니었다. 사내다운 매력이 물씬 풍기는 자였다. 그럼에도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남자의 눈매 때문이라 생각했다. 희사가 걸음을 멈추자 이번엔 남자 쪽에서 희사에게로 다가왔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남자는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두어 걸음을 사이에 두고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규태휘도 어느새 남자의 옆에 서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로 희사를 바라보던 남자가 곧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소. 난 현극이라 하오.”
희사는 남자의 급작스러운 출현에 이은 인사가 어색했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저는 희사라 합니다.”
남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참 신기하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남자의 목소리는 좀 전보다 더 낮아졌다. 희사는 이 현극이란 남자가 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넸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규태휘가 자신을 데리고 나온 것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아마도 이 남자를 만나게 해주기 위함이었음을 깨달았다. 헌데, 왜?
“그대의 진정한 이름이 희사인가?”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가 간에 존칭을 쓸 생각이 없어보였다. 희사가 예감하기론 남자 역시 규태휘와 비슷한 위치거나 그 이상의 자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렇습니다만.”
희사는 덤덤히 남자의 말을 받아쳤다. 희사가 존대를 하는 것은 남자가 높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남자에 대해 자신이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가 황궁에서 데리고 도망 나온 사실을 알아내면 태자가 내 목을 칠자지.”
규태휘가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내뱉었다. 현극이란 남자와 규태휘는 꽤나 친분이 있는 사이 같았다.
“그대는 어디의 출신인가.”
남자는 자신에 대해 무엇이 궁금한지 물음을 이었다.
“전 어디의 출신도 아닙니다.”
그의 말은 어폐가 있었다. 어디의 출신인지 자신도 애매할 지경이다. 유악 제후의 아들이기도 하며 현세의 사람이기도 했다. 분명 규태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재차 물어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됐다. 희사 역시도 내심 남자가 어떤 자인지 의문이 들었다.
“제게 왜 인사를 주셨는지 의문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도 알지 못합니다.”
다소 건방지다는 표정으로 현극이 희사를 응시했다. 현극은 처음부터 속내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
“난 랑쿤의 태자다.”
희사는 생각지도 못한 현극의 답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랑쿤의 태자라니. 희사는 규태휘를 한차례 쳐다봤다. 심중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듣기론 랑쿤과 환진은 사이가 좋지 않다했다. 게다가 북방과는 더더욱 좋지 못하다. 랑쿤의 지방 세력들이 호시탐탐 북방을 넘어 환진을 침범하려 하기 때문이다.
“랑쿤이라면…”
그런 희사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현극이 말을 이었다.
“딱히 환진의 북방이 랑쿤의 황실과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지. 랑쿤의 황실도 지방 세력들을 통제하지 못해 골머리를 썩는 중이니까.”
남자는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기뻐서 나오는 웃음 아니란 것을 희사도 알았다. 희사는 규태휘가 왜 자신과 랑쿤의 황태자를 만나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희사(僖詞)라는 것을 안 것인가? 그래서 만나게 했다면 수긍이 간다. 사실 희사(僖詞)는 랑쿤의 신을 받는 자였다. 하지만 절대로 그것까지 규태휘가 눈치 챌 리는 없었다. 희사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도록 주의했다. 현재로선 그들에게 자신이 희사(僖詞)라는 것을 알려서 이득이 될 것이 없었다.
“그대가 후생에서 온 자라 들었다.”
희사는 다시 규태휘를 노려봤다. 대체 왜 그런 이야기를 랑쿤의 태자에게 한 것인지…. 규태휘는 여전히 여유로운 웃음만을 지었다.
“하물며 환진의 태자와 제 2황자 역시 그렇다 들었지.”
희사는 입을 굳게 다문 채로 현극을 응시했다.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으십니까.”
“태휘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허무맹랑하다 여겼겠지. 허나 지금 그대의 태도에 확신이 가해진다. 왜냐하면 난 전에 단 한번 그대를 본 적이 있었다.”
남자의 정체만큼이나 놀라운 말에 희사는 밭은 숨을 들이켰다. 랑쿤의 태자가 자신을 마주할 일이 오늘 말고 또 있었단 말인가.
“그대는 유악 제후의 공자지. 두해 전 환진 태자의 축일 전야에서 그대와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잊어버리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닌가싶군.”
희사는 현극의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희사에게로 현극은 더욱이 놀라운 사실들을 쏟아냈다.
“분명 환진의 태자와 네가 깊은 사이일 것이라 생각했다. 감히 태자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자는 그대 하나뿐이었으니까. 헌데 이상하군, 태자가 유악의 식솔들을 죽인 것과 그대를 놓친 것이 말이다.”
“오해가 과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대와 태자의 사이가 단지 내 오해였다면, 그대는 진정 태자를 암살하려 친족들과 함께 역모를 꾸몄던 것이겠군. 태자의 마음을 빼앗아 눈을 멀게 한 다음 말이지.”
사건의 전후전말을 자신보다 멀리 있는 랑쿤의 자가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진실일지는 희사가 모르는 이상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대들의 사정이 어떻든 이미 틀어진 것이 사실이 아닌가.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그대 역시 태자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황궁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태휘가 데리고 나올 것이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치 난봉꾼 취급을 하는군.”
허물이 없는 둘의 대화에 희사는 복잡한 머리가 더 꼬여갔다.
“제게 하실 말씀이 그것뿐이면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니, 설마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려 그대를 불렀을 리가 없지 않는가. 용건은 달리 있다.”
“저는 태자님께 받을 용건이 없습니다만.”
희사의 건방진 말에 현극이 크게 웃었다. 희사는 무엇이 웃긴지 불쾌감만 더해갔다.
“그대가 정말 이 세계의 자는 아닌 것 같군. 다른 이였다면 이미 목이 날아간 지 오래였을 것이다.”
희사는 남자의 엄포에 자신의 목을 한번 쓸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그만큼 남자의 말이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대가 진정 환진의 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면 그에게서 내가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희사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머리가 멍청하다 생각했다. 여태까지 여유로웠던 규태휘의 태도는 이자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반역죄인인 자신을 태자에게서 데리고 도망쳤음에도 얼굴에 만연했던 자신감. 그래, 다시 보니 참으로 간악한 자다.
“내가 서현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분쟁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희사는 그 말을 하면서 규태휘를 노려봤다. 랑쿤의 태자까지 끌어들인 것을 보면, 규태휘는 북방의 제후로만 만족하려는 심산이 아닌듯했다. 그러니 현극에게 자신들이 후생에서 왔다 고했고, 또 직접 현극을 만나게 한 것이다. 규태휘는 환진의 자면서 마치 랑쿤의 편을 드는 모양새였다.
“희사, 네가 원한다면 다시 황궁으로 돌려보내주겠다 했지. 그 말은 진심이다.”
규태휘는 희사에게 어차피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이용했다. 그렇다고 희사는 이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 또한 사양이었다. 차라리 그렇다면 놀아나는 척 자신이 이들의 위에 서야했다.
“저를 도와주신다면 태자님께 득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랑쿤의 태자가 환진까지와, 절대 이득 없이 자신을 도와줄 리는 없었다. 희사는 일단 이들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야했다.
“환진 태자의 심장을 뺏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던가.”
현극은 서현이 자신을 사랑한다 확신했다. 희사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가 확신하는 것이 우스웠다.
“커다란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오해라면 그만이지.”
“태자님께서 이러시는 진정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현극이 당돌한 희사가 마음에 든다는 듯 오른손을 올려 자신의 턱을 한차례 쓸었다.
“멍청이는 아니고, 내 입을 통해 듣고 싶다 이건가?”
희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말에 동조했다.
“난 랑쿤을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다. 환진에게 계속 고개 숙일 생각 역시 없지.”
희사는 현극을 보며 실소했다. 자세한 내막이 담겨있지 않더라도 나라간의 불화를 일으키기 충분한 말이었다. 현극은 아무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이 만일 서현의 사람이었다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다하여 자신이감이 지나쳐 오만 한 자 같지는 않았다.
“태자님께 도움을 받는다하여도 결국엔 저 역시 환진의 사람입니다.”
“아니, 그대는 분명 어디의 출신도 아니라 했다.”
현극이 말이 맞다. 자신은 환진이라는 나라에 일말의 애정도 없다.
“제가 아는 서현은 감정에 휘둘리는 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태자님의 그 큰 포부에 저를 이용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 같습니다만.”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 인 것은 없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희사는 서현이 미웠다. 전생의 서현이 미워서 현생의 서현 역시 싫었다. 이곳으로 돌아온 서현이 살기 위해 전생의 부모를 죽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말만 보자면 자신 역시도 서현을 죽이려 가담했으니까. 그럼에도 희사는 쉽게 현극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현극은 돌려 말했으나 그는 환진의 땅에 분명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극과 서현, 그리고 해훈은 언제고 부딪힐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칼날을 겨눌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자신이 서현의 편을 들이유가 없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바보 같다. 마음이 이렇듯 약하니 전생에서도 머저리 같이 계속 당해온 것이다. 선택을 해야 할 때다. 어차피 서현에게로 돌아가 역사를 반복하기는 싫었다. 단지 현극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희사는 이미 선택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계속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저들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척 그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서현과 해훈에게서 벗어나 그들에게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애초부터 그들과 엮일 일을 피한다면 악연이고 뭐고 없다. 희사(僖詞)까지 된 마당에 그들에게서 벗어나려면 현극의 위치정도에 있는 자를 이용하는 것도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이미 들으셨을 테지만, 저는 전생을 단편적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태자님이나 규태휘 당신에겐 미래의 일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환진의 태자도, 2황자도 저와 같은 곳에서 온 자들이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
현극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쳤다. 그 이야기를 끝으로 셋은 누각의 앞에서 침묵했다.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희사도 자신이 옳은 선택을 자행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 펼쳐진 한치 앞도 모를 미래에 단단히 대비해야했다. 마냥 현극이 원하는 대로만은 되지 않을 것이다.
순간 한동안 이어진 침묵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누각 전체에 울려 퍼졌다.
“공자님, 공자님! 황궁에서 사람들이 당도했습니다!”
희사는 소리의 시작점인 사내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한차례 솜털 같은 꽃씨를 머금은 바람이 희사의 뺨을 간질였다. 규태휘의 곁으로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생각보다 빨랐군. 그래 황궁의 누구라 하던가.”
“그것이. 흑, 흑의대라 하옵니다.”
걸걸한 사내의 말에 어느 누구보다 놀란 자는 바로 현극이었다. 흑의대는 환진의 볼모로 잡혀간 청영을 따라나선 무리였다. 게다가 청영은 인랑산 신의 기운을 받은 자다. 그녀가 죽은 이상 흑의대는 누구의 소속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현극을 포함한 랑쿤 황실 소수의 친족뿐이다. 현극은 미심쩍은 마음을 증폭시켰다. 여전히 작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머리칼의 주인을 봤다. 하얗고 작은 얼굴이 덤덤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흑의대가 어찌하여 당도한 것이지?”
현극이 먼저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태자의 밑에 있는 자들이니 부름을 받고 왔겠지.”
희사가 규태휘의 옆모습을 봤다. 해훈의 정체까지는 몰라도, 청영의 말을 통해 흑의대 자체가 사실은 태자의 수하가 아니란 것은 그도 이미 알고 있다. 현극도 랑쿤의 자이기에 흑의대가 희사(僖詞)의 소속인 것을 알 가능성이 컸다. 헌데도 규태휘는 흑의대에 대해 무지한 척 했다. 규태휘가 현극에게 모든 사실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희사는 나쁘지 않다 여겼다. 서로 한 가지씩 숨기려 한다면 외려 그들의 위에 서긴 편했다. 어차피 규태휘와 현극 그리고 자신은 완벽하게 한 뜻으로 뭉친 자들이 아니었다.
“네가 선택한 이상, 지금이라도 당장 희사 너를 숨겨두어야겠지?”
규태휘는 숨바꼭질놀이라도 하듯 즐거워보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다른 즐거움이 있는 듯했다. 좀 전부터 마치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아이처럼 표정이 밝았다. 희사는 그의 웃음이 신경 쓰였지만 이곳에 도착한 해훈이 먼저였다. 희사는 규태휘의 기대를 배반하듯 입을 열었다.
“아니, 그들을 직접 만나게 해줘.”
“그랬다가 억지로라도 너를 데려가고 나 역시 붙잡혀 간다면?”
“그럴 일은 없어. 오히려 그들이 나를 찾겠답시고 이곳에 계속 머무른다면 곤란할 것은 당신이지.”
잠시 생각에 잠긴 규태휘가 걸걸한 사내를 물렸다. 사내는 여전히 찝찝한 표정으로 이쪽을 연신 응시하며 멀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만나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니 걱정할 것 없어. 나 역시 지금은 황궁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
자신의 말이 맞다. 가장 아쉬운 것은 본인이다. 규태휘는 조금 누그러진 표정이었지만 영 못마땅해 했다.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좋겠다.”
현극은 왜인지 희사의 말에 수긍했다. 현극으로선 가슴에 미심쩍게 남는 것들 때문이었다. 그것 역시 희사도 눈치 채고 있었다. 랑쿤의 자이기에 자신보다 흑의대에 대해선 더 잘 알 것이라는 심중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설사 현극이 사실은 흑의대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 하더라도 밑져야 본전이다.
“나만 빼고 둘이 같은 마음인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규태휘가 웃으며 희사의 허리를 껴안았다. 희사는 신경질적이게 그의 손을 쳐내다 새삼 어깨의 아픔에 혀를 찼다. 이러다 나을 것도 덧나게 생겼다. 규태휘가 이런 이런. 특유의 말투를 지껄였다. 곧 규태휘도 사내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현극도 이내 모습을 감추듯 희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삽시간 만에 누각에 남은 것은 희사와 잔잔한 바람뿐이었다.
13
해훈은 인내심이라면 누구보다 질기다 자부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참을성을 다 쓴 사람처럼 초조하지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선 눈앞의 성문을 부시고 규성주 궁으로 한달음에 뛰어들고 싶었다. 설장산 아래의 이미 비어버린 가택에서 허탕을 친 후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아마 닫힌 성문이 조바심이 더 강해지기 전에 열리지 않았다면 충분히 뛰어듬을 행하고도 남았다. 해훈은 성문이 바짝 열리자마자 말의 엉덩이를 거세게 내리쳤다. 흙바람을 휘날리며 규성의 궁까지 도달하는 데는 불과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해훈이 선두에서 뛰어내리자 일제히 뒤이어 흑의대들도 말의 안장에서 벗어났다. 싸움과 오랜 말 타기에 익숙한 이들이지만 제대로 한번을 쉬지 못하고 내리 달린 터라 피곤함이 누적되어 있었다. 마구간지기 세 명이 나와 말의 고삐를 각자 서너 개씩 잡았다. 말의 수는 열두 마리가 채 되지 않았다. 규태휘 역시 흑의대의 정확한 인원은 파악하지 못해도 족히 서른은 넘는 다는 것을 알았다. 규태휘는 절반도 채 오지 않은 흑의대를 보며 팔짱을 꼈다. 해훈은 자신들을 마중하는 규태휘에게 다가갔다. 규태휘의 얼굴을 마주한 해훈은 목을 까닥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대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공자님 역시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일단 그 이유를 만나보는 것이 우선이 아니더냐.”
규태휘는 몸을 틀어 누각 쪽으로 해훈을 안내했다. 누각은 중앙의 궁에서는 좀 떨어져있으나 해훈이 말에서 내린 곳에서는 꽤 가까웠다. 해훈은 희사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뒤따르는 흑의대를 손짓으로 세웠다. 팔짱을 낀 규태휘도 그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쯤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해훈이 희사를 부르기 전 희사가 먼저 돌아봤다. 쿵-해훈은 그 순간 심장의 울림에 저도차도 이상하다 생각했다. 무엇이 이리도 자신의 마음을 울린단 말인가. 단지 같은 현생에서 돌아온 자이기에 마음이 더 끌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더 오랜 시간 같이 있었던 서현에게 조차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희사.”
자신을 부르는 해훈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려 있다 느끼는 것은 착각이다. 희사는 그에게 속지말자고 해훈에게 배신당한 것을 꿈에서 봤던 때부터 가슴에 새기었다. 해훈은 모든 이들이 멀찍이서 등지고 있는 상태로 복면을 내렸다. 희사의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해훈은 돌아가자. 라고 목구멍까지 찬 말을 내뱉지 못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해훈은 계속해서 희사를 서현에게 돌려보내기가 싫어졌다. 서현의 것으로 될 희사가 싫은 것이다.
“해훈, 느껴졌어?”
“그래.”
“참 이상하지. 희사가 희사(僖詞)가 되었으니.”
“이상하지 않다. 여전히 너는 너일 뿐이야.”
“지금 당신을 본 순간 돌아가고 싶어졌어. 원래의 곳으로. 헌데, 그럴 방도가 없으니 그저 이곳에서 당신들이 했던 것과 같이, 살기 위해… 살기로 했어.”
“나는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따를 뿐이다.”
희사는 해훈의 말에 작게 웃었다. 해훈이 유곽에서 자신을 지킨 것은 전부 연극된 것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자신이 희사(僖詞)가 되었기에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지켜야한다. 하지만 이제 자신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돌아가.”
“너와 같이가 아니면 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대로 따른다 했지 않아? 흑의대를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가.”
해훈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희사를 쳐다봤다. 그리곤 설마 했던 이유를 물었다. 그럴 리는 없었으나 물어야했다.
“규태휘에게 붙잡혀 온 것이 아닌가?”
해훈은 자신의 자의로 이곳에 왔느냐고 묻고 있었다. 희사는 가만히 해훈을 응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너희와 또 엮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직접 그를 따라 나섰다.”
희사의 말에 해훈은 크게 머리를 한방 맞은 듯한 표정을 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해훈은 불현듯 배신감이 찾아들었다. 자신들은 특별했다. 현생에서부터 같이 이곳으로 왔으며, 얼마 되지 않지만 두 개의 세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보다 규태휘를 더 믿는다는 말인가?
“희사, 너는 저자를 믿는가?”
“아니, 아무도 믿지 않아. 당신조차도.”
“내가 네게 한번이라도 믿음을 주지 못한 날이 있었나.”
해훈은 당혹스러움을 숨기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희사에게 물음만 쏟아낼 뿐이다.
“늘 믿음을 주었고 단 하루, 나를 배신했지. 그리고 그 날이 끝이었어.”
해훈은 희사가 기억하고 있는 전생이 정확히 무엇인지 오늘만큼 궁금한 날도 없었다. 게다가 해훈은 자신이 왜 이런 배신감을 희사에게 느끼는지 조차도 이상했다.
“네가 희사(僖詞)가 된 이상 네 곁에서 떨어질 수 없다.”
“아니 내가 희사(僖詞)가 되었으니 당신은 내 말을 따라야해.”
“서현에게 돌려보내지 않겠다. 원한다면 나와 멀리가자.”
희사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날과 똑같은 말을 내뱉는 해훈에게 더할 수 없는 가슴의 충동이 일었다. 그것은 기쁨도 아니며, 슬픔도 아니었다. 그저 해훈의 대한 불신이었다. 배신한 것은 전생의 해훈. 하지만 그 전생의 해훈도 현생에서 온 자였다.
“당신의 배신으로 인해 내가 죽었지. 아니 이제와 당신 탓을 하고 싶진 않아. 내 선택의 결과였으니까.”
“희사 말해봐. 네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이 전생의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내게도 말해.”
해훈은 인정하기 싫지만 이 이끌림이 무엇인지를 결론지어야 했다. 그것은 희사에 대한 마음이었다. 단지 그가 만든 음식이 훌륭했기에 그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현세에서의 동생이 그의 음식을 좋아해 그가 일하는 곳에 일부러 간 것도 아니며, 단순히 그에게 자신의 집을 맡길 요량으로 일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해훈은 인정했다. 처음부터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마음이 열리지 못했다. 이곳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더더욱. 자신을 모르는 이곳의 희사가 그저 원망스러웠을 뿐이다. 희사를 향할 자신의 마음이 보답 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있었다.
“내가 말을 하면 무엇이 달라지지?”
“네가 전에 말했었지. 이곳의 단편적인 것만 기억한다고. 그렇다면 네 기억이 모두 맞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 말해봐.”
해훈의 직설적인 말에 희사는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자신이 이곳으로 넘어온 후, 늘 생각했던 것 중 하나였다. 단편적이며 지극히 주관적인 전생의 기억. 해훈은 지금 그 기억의 사실들을 확신 하냐고 묻고 있었다. 조금씩 거세지던 바람이 희사의 머리칼을 춤추게 했다. 그리고 희사의 표정을 읽을 수 없게 숨겼다. 해훈은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희사의 머리를 매만져주고 싶었다. 허나 희사의 손이 먼저였다.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응시한 시선은 해훈이 아닌 그 뒤의 자를 향해 있었다. 해훈은 복면을 다시금 끌어올렸다.
“대화가 꽤나 길어지는군. 그래 이 자를 내가 납치했다 하던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것인지 규태휘가 둘의 대화를 두절시켰다. 해훈이 날카롭게 규태휘를 쏘아보았다.
“사실 그것보다 그쪽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
해훈은 규태휘의 물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해 보였다.
“흑의를 입은 자들이 따르는 사람은 랑쿤의 신이 정해준다 하던데? 그것이 이번엔 태자님이신가 아니면 희사인가.”
흑의대가 도착함과 동시에 규태휘가 지었던 미소의 정체는 이것이었다. 그는 청영의 말을 누구보다 귀담아 들었다. 청영이 죽은 후 자신들이 지킬 자가 사라졌으니 흑의대는 더는 용병의 탈을 쓰고 있지 않아도 됐다. 헌데도 북방으로 그 흑의대가 직접 이동했으니 규태휘는 의심이 갈뿐이다.
“신기하군, 그래. 북방의 공자님은 어디를, 얼마까지 아시는 겁니까?”
해훈이 규태휘의 앞에서 망설임 없이 복면을 벗어 내렸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규태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제 2황자의 모습을 아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니 규태휘도 2황자의 얼굴은 처음 접하는 것이다. 물론 규태휘가 눈앞의 해훈이 2황자인 것까지는 알리가 없다.
“흑의대의 우두머리는 접니다. 저들은 제 뜻대로 움직이며, 제가 희사를 찾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공자님의 예상이 틀리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잔뜩 비꼰 해훈의 모습은 희사 역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해훈이 자신이 희사(僖詞)라는 사실을 숨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본래 희사(僖詞)가 직접 흑의대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는 이상 흑의대의 지킴을 받는 자는, 자신이 희사(僖詞)임을 숨겨야 한다. 그들의 능력을 함부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흑영의 경우 그 자신이 바로 흑의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희사(僖詞)임을 모두가 알았다. 허나 청영과 희사는 다르다.
해훈이 얼굴을 드러낸 이상 그가 황궁으로 쉽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규태휘는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들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곧 박수를 두 번 가볍게 쳤다.
“뭐 좋다. 북방에 온 이상 편하게 있다 가는 것이 좋겠어. 그리고 난 당신의 정체가 꽤나 궁금해졌다. 흑의대의 수장이라. 그 정체는 황비에게서 미처 듣지 못했었군. 참으로 복잡하단 말이지.”
말과는 다르게 규태휘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처음부터 마치 둘만 있었다는 듯 해훈의 시선은 희사의 얼굴에 고정되어있었다.
“어쩔 생각이지? 저자를 따라나서서 이곳까지 온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말해봐.”
“내게 듣고 싶은 것도 참 많다. 처음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어. 말했듯이 서현과 당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야.”
“지켜주겠다. 네가 이 세상에서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이제 내 곁뿐이다.”
“내가 희사(僖詞)라서?”
그저 한낱 평범한 자인 자신을 지켜준 다는 것인지, 아니면 신의 기운을 받은 희사(僖詞)이기 때문에 자신을 지켜준 다는 것인지 묻고 있었다. 허나 해훈은 희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해훈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희사 역시도 계속 말해봐야 반복만 할 뿐이라 여겼다. 해훈이 돌아가지 않겠다면 이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만일 현극의 도움을 받아 해훈과 서현의 손에서 벗어난다면, 현극은 분명 자신을 이용하려할 것이다. 아니 사실상 자신은 이용할 가치조차 없을 가능성이 컸다.
현극의 생각과는 다르게 자신이 그의 편에 선 다해도 서현에겐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자신 역시 서현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전생의 서현이 지금의 서현과 영혼만 같을 뿐 아예 다른 사람이라해도 쉬이 그의 행동이 용서되지 못했다. 아마도 자신이 현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서현은 전과 같은 일을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서현에게 있어서 그를 배신한 것은 지금의 자신이 아닌, 전생의 희사였다. 처음부터 서현을 죽이려 한 것은 자신이면서, 왜 서현 너를 원망하느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그가 미운 건 여전했다.
희사는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해훈을 마주했다. 내 마음을 가지고 놀았던 당신에게도 슬픔을 맛보게 해주고 싶다. 당신은 서현보다도 더 질이 나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다시금 당신과 깊이 연결되어 버렸다. 당신이 나를 또 배신하더라도 이제 상처받지 않는다. 당신에게 마음을 준 것은 전생의 희사일 뿐이다.
희사는 해훈에게서부터 걸음을 뗐다. 뒤에 선 흑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희사를 보고 있었다. 그들이 지킬 자를 눈에 넣어두고 있는 중이었다. 희사는 이상하게도 그들과 쉽게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곁의 지나쳐 갈 때까지도 희사는 그저 묵묵히 앞만 보며 걸었다.
14
해훈을 포함한 흑의들의 숙소는 규성주 궁내부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배정됐다. 환진의 서궁 같이 좋은 잠자리는 아니더라도 편히 쉴 수 있는 시설정도는 됐다. 해훈은 도무지 희사의 심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전생이 대체 어떻기에 어찌 자신보다 규태휘를 더 믿는다는 것인지 인정하기가 싫었다. 해훈은 방에 배치된 좁은 탁상에 앉아 서찰을 작성했다.
서현에게는 아직 희사를 찾지 못했다 보고할 생각이었다. 아무런 연락이 없다면 그가 직접 북방에 당도할 가능성이 컸다. 서현은 현세에서 희사를 처음 봤을 때부터 과도한 관심을 보였었다. 이곳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더욱 희사에게 집착했다. 서현과 해훈은 한 번도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만일 희사가 없었다면 둘의 관계는 현세에서보다 더 끈끈해졌을지도 모른다. 서현은 희사의 관한 것을 해훈과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아했다. 이제는 해훈도 마찬가지다. 부정했던 감정들이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자 다시 재건할 수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해훈은 규태휘에게 얼굴을 드러낸 후 다시 복면을 쓰지 않았다. 희사 앞에서 더는 자신을 숨기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서현에게 전달할 서찰을 마무리 지은 뒤 흑의 중 가장 발이 재빠른 자에게 건넸다. 그는 산길에 밝았으며 말이 달리지 못하는 험한 산세를 손쉽게 탈 수 있었다. 해훈이 아는 어느 누구보다 더 재빨랐다. 물론 서현이 간자(間者)를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랬기에 해훈은 설장산의 가택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척, 흑의대를 두 무리로 나누었다. 자신을 포함해 총 열둘이 안 되는 흑의들은 지름길인 고갯길로, 나머지 흑의들은 전부 장사꾼들이 다져놓은 평탄한 길로 이동시켰다.
그 길은 서너개의 마을을 더 지나서 돌아와야 했기에 그들이 규성주에 당도하려면 아직 며칠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남았다. 간자가 고갯길을 넘은 자신들을 따라왔을 리는 없다. 동이 트기 전 장사꾼의 길을 가는 흑의들을 먼저 출발시켰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흑의대의 숫자가 조금 줄었다해도 눈치 챌 수 있는 자는 드물 것이다.
“흑의대의 수장을 공자님께서 부르십니다.”
허락도 없이 방안으로 들어온 궁의 여종이 흑의대를 향해 말을 건넸다. 오만불손한 태도에 감인령이 칼집을 쥔 채 일어섰다. 주인이 그 모양이니 여종이라고 나을 것이 있던가. 해훈이 여종의 앞에 우뚝 선 감인령을 제지시켰다.
“앞장 서거라.”
여종이 휙 돌아서더니 새침한 걸음으로 해훈을 이끌었다. 아직 북방의 주인은 규태휘의 아비인 ‘규성견’이건만 궁내부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 아비가 얼마 살지 못함 것임을 짐작케 했다. 예로 들어 하인들만 해도 방자하기 그지없었다. 황궁에서 방문한 자를 극진히 대접하지는 못할망정 가장 후미진 곳에 박아 넣기까지 했다. 환진의 충신인 규성견이 정정했다면 흑의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맨발로 뛰어나왔을 것이다.
흑의대가 황궁의 소속이 아닌 것은 알지만, 서궁에 거주하는 흑의대가 환진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쥐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해훈은 남들이 극진히 대접하든 푸대접을 하든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종은 중앙의 십자로 길이 나눠지는 첫 방 앞에서 멈춰 섰다. 황궁으로 따지자면 서현의 집무실 위치쯤 될법했다.
여종이 똑똑 문을 울리자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희사와 규태휘가 동그란 원탁에 순서대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희사의 옆으로 짧은 머리의 남자가 한명 더 착석해있었다. 해훈은 남자의 모습이 가히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누군지 떠올리는데 약간의 시간을 할애해야했다. 그는 몇 번의 마주침으로도 존재감이 남 못지않은 자였다. 랑쿤의 황태자 현극. 현극은 해훈의 정체를 몰랐으나 해훈은 아니었다. 그가 환진의 황궁을 몇 번 찾는 동안 멀리서 그의 모습을 접한 적이 있었다. 해훈은 덤덤히 네 자리 중 비어있는 자리에 착석했다.
“이제라도 인사하지. 내가 북방의 공자라는 것은 익히 알겠고, 이쪽은 현극이라 한다.”
“흑의대의 수장입니다.”
현극이 눈을 가늘게 해 아랫사람을 내려 보듯, 이름을 알리지 않은 해훈을 봤다. 희사는 지금의 이 상황이 꽤나 불만족스러웠다. 방으로 돌아간 자신을 부른 것도 모자라 이렇게 불편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
“통성명차 모이게 했습니까.”
희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말을 자르듯 현극이 입을 열었다. 현극은 앞뒤 말을 전부 자른 뒤 용건만 쏘아붙였다.
“청영이 죽었는데 그대들은 왜 아직도 환진의 황실에 남아있는 것이지?”
“제가 남아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해훈은 실상 현극의 위치보다 낮은 자가 아님에도 그의 하대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저 관심 없는 일인 양 희사만을 쳐다봤다. 희사는 여과 없이 직시하는 해훈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마치 자신을 나무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랑쿤의 태자다. 그대도 흑의대가 본래는 랑쿤의 소속이란 것을 잘 알고 있겠지?”
현극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흑의대의 소속이 자기들의 것임을 내심 강조하듯 주장했다.
“청영님을 볼모로 내쫓은 건 랑쿤이 먼저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내 의도가 아니었다. 그녀가 랑쿤으로 간 것은 내가 불과 갓난아일 적이 아니던가.”
“흑의대가 단순히 청영님만의 소속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실 텐데, 이렇듯 소속을 운운하시다니 참 재미있습니다.”
“하, 어찌 이곳은 시건방진 자들 투성이군.”
현극은 비웃음을 띈 채 희사를 봤다. 자들이라 싸잡아 말하는 것을 보니 자신도 포함시킨 말이었다. 현극에게 건방졌던 기억은 없다. 희사는 그 시선을 단칼에 무시했다. 그것이 더욱 현극에겐 건방져 보일 것임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 새로운 ‘쿤’이 생긴 것인가. 그대들이 환진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청영이 죽고 새롭게 나타났나보군.”
희사는 현극의 입에서 나온 쿤이란 단어가 어색했다. 범은 자신을 희사(僖詞)라 지칭했다. 해훈 역시도. 어쩌면 쿤이란 단어는 랑쿤의 자들이 희사(僖詞)를 달리 지칭하는 용어일지도 모른다.
“이제와 태자님께서 말씀하시는 쿤에게 관심을 두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랑쿤의 신을 받드는 자이니 당연히 관심이 갈 수 밖에.”
“그런 자를 내친 것이 랑쿤이었습니다.”
“그대와 말장난할 시간 따윈 없다. 내 아버지와 나는 다르다.”
팽팽한 둘의 대화에 규태휘는 끼어들 틈을 찾지 못했다.
“그래, 새로운 쿤이 누구인가. 그대는 이미 알고 있겠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현극이 입 꼬리를 한껏 틀어 올렸다. 해훈은 그 모습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가만있자, 쿤이 대체 뭐지? 혹, 랑쿤에선 흑의대의 주인을 쿤이라 지칭하는가?”
침묵으로 일관하던 규태휘가 입을 열었다. 그는 궁금한 것은 쉬이 참지 못하는 성격 같았다.
“쿤은 흑의대의 주인이지. 태휘 네가 내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 있다. 청영의 정체에 대해서지.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청영이 쿤이었으며 그녀가 죽은 뒤 새로운 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 흑의대가 환진에 머물러 있는 것이겠고. 태휘 너 역시 청영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흑의대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다. 헌데 내게 말하지 않았어.”
현극이 비웃음을 규태휘에게로 향했다. 규태휘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으나 금세 장난기 다분한 표정으로 탈바꿈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중요치 않다 생각해 빼먹은 것이겠지.”
규태휘에겐 2황자가 황제의 핏줄이 아닌 것만 중요했지 그녀가 쿤인 것은 상관없었다. 게다가 규태휘가 더 궁금해 하는 점은 드러나지 않은 2황자의 정체였다. 제 눈앞에 그 당사자를 둔지는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헌데 그대는 참으로 젊군.”
현극은 어색한 사실을 이제야 눈치 챈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흑의대는 대게가 노장일 것인데 그대는 어찌 그 젊은 나이에 수장이 될 수 있었지?”
“제 아버지가 감인령이며, 원래 제 아버지께서 흑의대의 수장이셨습니다. 제게 자리를 넘기신 것은 불과 한해가 채 넘지 않았습니다.”
해훈이 새빨간 거짓말을 술술 해댔다. 희사는 조금 기가 막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현극을 보아하니 그는 필요이상으로 희사(僖詞)에 대해 아니 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는 것 같았다.
“혹 그럴 리는 없겠으나 서현 태자나 제 2황자인 해훈에게 쿤의 자리가 넘어간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듣던 중 다행이군. 그럼 그대들은 랑쿤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는 것이겠고?”
“쿤이 원하는 대로 따라야하는 것이 저희 사명입니다.”
해훈의 말을 마지막으로 현극은 더는 묻지 않았다. 희사는 현극이 2황자의 이름을 해훈으로 알고 있는 이상 앞으로 그를 부를 때도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랑쿤의 신을 받든 자를 뜻하는 용어로는 자신의 이름과 같은 희사(僖詞)보다는 쿤이라는 말이 더 나을법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이름마저 그렇다는 게 내심 마음에 걸렸었다. 희사(僖詞)는 흑의대들이 주인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쿤은 랑쿤의 자들이 희사(僖詞)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다.
“친히 생각해보니 그대가 이곳에 온 것이 말이다.”
현극은 말을 바로 잇지 않고 조금의 뜸을 들였다. 나머지 셋이 현극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는 곧 입을 열었다.
“흑의대가 북방까지 이동했고, 하물며 수장인 그대가 왔다. 서현 태자의 지시 하에 그대가 이동했을 리는 없겠고… 흑의대는 서현 태자의 소속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물며 그대의 입으로 서현 태자나 해훈 황자가 쿤이 아니라 했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곳까지 왔다. 그렇다면 결국 흑의대는 쿤을 따라 북방까지 왔다는 소리가 되겠군.”
희사가 저도 모르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현극을 올려봤다.
“그래. 흑의대가 이유 없이 북방까지 올 필요가 없으니, 쿤은 이 안에 있다는 결론이 난다. 수장인 그대도 쿤이 아니라면 규태휘나 희사 중 하나겠지. 어떤가, 내 예상이 틀린가?”
현극은 눈앞에 있는 흑의대의 수장이 제 2황자이며, 후생에서 넘어온 자임을 알지 못한다. 만일 해훈의 정체를 알았다면 그저 같이 현세에서 넘어온 희사를 찾으러 온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허나, 현재 현극이 알기론 희사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제 3의 인물이 희사를 찾으러 왔으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희사는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가 걸려든 기분이었다. 그것은 해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내가 쿤인가 뭔가 하는 자인데, 현극 네게 숨길 이유가 있겠나.”
규태휘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희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해훈을 봤다. 해훈의 깊은 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새까맣게 잠겨있었다.
“너희들과의 놀이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겠군.”
갑작스레 하대가 된 해훈의 말에 현극과 규태휘가 동시에 그를 봤다. 건방지다 못해 감히라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희사는 여전히 묵묵히 입을 다문 채였다.
“궁지에 몰려도 쥐가 고양이를 물면 안 되지.”
규태휘가 최대한의 빈정거림을 자아냈다.
“궁지에 몰린 것은 내가 아닌 그대들이다. 한낱 북방의 공자 따위가 내게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가. 황궁에서 멀리 떨어졌다하여 그대들의 세상이 되어버렸군. 그대들은 일국의 태자 전하를 서현 태자라 불러서도 안 되며 나를 함부로 해훈이라 지칭할 수도 없다.”
해훈의 쏟아지는 일갈에 그 순간, 규태휘와 현극은 동시에 한차례 얻어맞은 모양새로 앉아있었다. 해훈은 말로 쳤으나 그 충격은 칼날이 날아오는 것보다도 날카로웠다. 희사 역시 그가 이렇게 정체를 밝힐 것임은 예상치 못했다. 혹시 자신이 쿤임을 저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서인가.
“또 다시 그 입을 놀려 보라. 현극 태자, 그대는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군.”
해훈의 말이 정말이냐는 듯 둘의 시선은 희사를 향했다. 희사는 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희사의 반응에 현극과 규태휘는 남자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행여나 흑의대의 수장이 함부로 제 2황자임을 지칭할 리도 없었다.
현극은 청영이 죽기 전, 자신의 아들을 흑의대의 수장으로 내세운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도 궁금해 하던 제 2황제의 정체를 알게 된 규태휘도 말을 잇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해훈은 그들에게 일침을 가하듯 거침이 없었다.
“랑쿤의 태자는 우리 황궁의 허락 없이 환진을 방문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괄시한 것인가. 그대들이 이 자리서 충분히 반역을 꾀하려 했다 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해훈은 잔뜩 그들을 매도한 다음,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사의 다치지 않은 오른쪽 팔을 잡아끌었다. 해훈이 희사의 몸을 의자에서 억지로 빼냈다. 희사는 그 반동에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탕-하며 의자가 거세게 뒤로 넘어갔다. 마치 개처럼 끌려 나가지 않으려는 희사의 굳건함에 해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만. 더 이상 나를 화나게 하지 마.”
“이것부터 놔, 내 발로 따라 나가겠으니.”
해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희사를 잡은 손을 놓았다. 희사는 해훈에게 잡혀서 구겨진 천을 툭툭 털었다. 희사는 해훈을 따라나서며 결국 뜻대로 되는 것은 이번에도 하나도 없음을 알았다. 그래도 건진 것이 있다면 흑의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해훈은 황자이기도 하며 희사의 밑에 있는 자기도 했다. 신분상으론 해훈이 더 높았으나 결국 해훈은 자신의 사명인 쿤. 바로 희사의 뜻을 따라야했다. 그것을 알기에 해훈은 더욱 희사를 자신의 손안에 가두고 싶었다.
***
해훈의 예상대로 서현의 간자는 평탄할 길을 가는 흑의들을 따라나섰다. 허나 불과 일각도 되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흑의대가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길을 놔두고 돌아갈 리는 없다고 예측한 것이다. 어차피 길은 여러 갈래라 하더라도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규성주. 간자는 해훈의 무리들이 도착한 것보다 조금 늦게 규성주에 당도했다. 규성주는 황궁만큼이나 경비가 삼엄하기에 처음엔 일반 백성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규성주 궁의 경비 상태를 파악하고 다시 그 안으로 숨어드는데도 간자는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어야했다. 그랬기에 희사와 해훈이 만났고, 랑쿤의 태자인 현극이 북방에 있다는 사실을 서현에게 알리는데 만해도 꼬박 사흘이라는 시간을 소비해야했다.
서현은 해훈의 서찰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그는 희사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행동했지만 속내는 또 모르는 일이었다. 간자의 서찰대로 해훈이 희사를 찾아낸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랑쿤의 황태자인 현극이 북방에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따름이었다. 서현이 현극을 만난 것은 손꼽을 정도로 횟수가 적었다. 그때마다 내리깐 눈 아래에서 불온함을 읽을 수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비공식적으로 랑쿤의 현극이 자주 북방을 찾는다고 했다. 랑쿤의 지방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북방과 함께 머리를 맞댄다 변명할 테지만 서현이 볼 때는 단지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짐승 새끼들이 이제 대놓고 나를 능멸하려 드는군.”
이를 가는 서현의 목소리엔 압박감도 불안함도 없었다. 그저 한낱 짐승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뛰어드는 행색에 대한 비웃음만 명백했다.
“사황 들라.”
서현의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 측근 사황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래, 그대도 알겠지만 랑쿤에서 온 청영이 죽었지.”
“저, 전하. 아무리 고인이 되신 황비마마라 해도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사황이 누가 들을까 걱정스럽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청영은 랑쿤에서 잡혀온 볼모가 아니던가. 볼모가 죽었으니 새로운 자가 다시 와야 하겠지.”
“황비마마가 환진에 오신 것은 랑쿤에서 보내온 군신의 예의를 다지기 위한 뜻이었습니다. 볼모라니요. 그런 말씀은 삼가셔야합니다.”
“아름답게 포장하면 역모를 일으킨 자들도 얼마든지 역사의 깊은 뜻이 될 수 있지. 요사이 내게 부쩍 말대꾸가 늘어났군. 사황.”
“용서하십시오! 전하, 저는 단지.”
싸늘한 서현의 태도에 사황은 허리를 바짝 굽혔다.
“그대는 폐하에게 이 서찰을 전달하라. 새로운 볼모는 랑쿤의 태자가 좋겠군. 태자는 또 만들면 그만 아니던가. 어디 내게도 군신의 예의를 다하는지 지켜보겠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서현의 모습에 사황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북방으로 가겠다. 그대는 따라나서지 말거라. 최소한의 인원으로 출발한다.”
“저. 전하!”
사황의 외침은 들리지도 않는 듯 서현은 집무실을 빠르게 나섰다. 동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전에 없이 무겁기도 했으며 일견 가벼워 보이기도 했다.
희사, 너를 만나러 직접 가겠다. 그래, 처음부터 그랬어야했다.
서현은 그제야 어깨에 무겁게 걸쳐졌던 승천용의 휘장을 벗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