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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겁환상(前劫喚想) 1부-6화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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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겁환상(前劫喚想) 1부-6    by  

2010-04-23 00:44:59 , Monday 

6.

희사는 그 다음 날이 될 때까지도 정신없이 잠에 빠져있었다. 기어코 정신을 차려보니 창에서 무수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희사는 침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어깨의 둔탁한 통증은 어제의 약이 효과가 있는지 많이 개운해졌다. 희사는 창가를 향해 걸었다. 햇빛을 여과 없이 쐬고 싶었다. 왼손을 내밀어 창을 미는데, 밖에서 막아놨는지 꼼짝하지 않았다. 희사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침상 옆 긴 탁상을 보니 요깃거리와 다기잔에 물이 담겨 있었다. 희사는 다기잔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양에 안찼는지 옆에 있던 다기 주전자를 들어 안에 담긴 시원한 물을 더 따라 부었다. 한 번 더 털어 넣자 정신까지 말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옆에 화권과 비슷하게 생긴 빵을 뜯어서 입에 넣었다. 간을 적절히 잘했는지 단맛이 느껴졌다. 

희사는 종기 그릇에 꿀이 담겨있는 것을 보았지만 화권 자체도 달기에 그냥 내버려두었다. 화권과 깨과자 몇 개를 주워 먹으니 허기진 배가 많이 달래졌다. 희사는 먹기 싫어도 앞으로는 제대로 챙겨먹을 생각이었다. 무기력하게 있는 것은 이제 지겹다. 희사가 융단 옆에 놓인 신을 신었다. 아마 황궁 내부에서만 신는 실내용으로 그 안이 폭신폭신 했다. 희사가 문을 열자 두 명의 경비가 희사를 막아섰다. 역시나 자유로이 놔둘 리는 없었다. 자신이 도망갈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깍듯하지만 위협적인 음성이었다. 

“좀 씻고 싶습니다.”

“궁녀를 부르겠습니다. 일단 안에서 기다리십시오.”

희사는 경비를 밀치고 달아날까 하다 열 발자국도 못가서 따라잡힐 것임을 예견했다. 괜히 그렇게 해 서현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보다는 일단은 얌전히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멍하니 침상에 앉아서 궁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일각도 채 안되어 궁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몸을 닦으실 물을 대령했습니다.”

여자 궁녀가 희사에게 다가오더니 옷을 훌렁훌렁 벗겼다. 희사는 당황해서 발목까지 흘러내린 비단 홑옷을 끌어올렸다.

“왜 그러시어요?”

이들에겐 귀족의 목욕시중은 당연한 일이었다. 알고 있다하더라도 당황스러운 것은 매한가지다.

“내, 내가 하겠습니다. 나가주세요.”

“그럼 제가 혼이 납니다, 어깨도 안 좋으신데 제가 닦아드리겠습니다.”

“아니 됐습니다. 혼자 하는 것이 편합니다.”

궁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희사를 올려봤다. 자신보다 두어 살은 어려보이는 여자아이였다. 희사는 간신히 궁녀를 내쫓고 나서 몸을 닦기 시작했다. 커다란 물통을 보자니 저걸 어린 여자아이가 어찌 들고 왔는지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머리를 헹구고 몇 번이나 통의 물을 갈게 해 몸을 깨끗이 닦아냈다. 

희사는 적신 머리를 두꺼운 천으로 툭툭 두들겼다. 머리의 길이가 엉덩이를 다 덮고도 남았다. 새삼 이곳에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제대로 마르지 않은 새까만 머리를 틀어 올렸다. 주변에 머리를 고정시킬 만한 작대기를 찾았다. 그러다 문득 붉은 나비 머리 장식이 생각났다. 

희사는 이 세계 어딘가에 그 머리장식이 존재할 거란 사실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희사는 결국 침상 옆 바닥에서 나무젓가락같이 긴 작대기를 찾아냈다. 그것을 틀어 올린 머리에 찔러 넣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이라 몇 가닥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차피 다시 묶어도 깔끔하게 못 올릴 것 같기에 흘러내린 머리칼만 귀 뒤로 넘겼다. 누가 들어온다 고하는 소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궁녀가 가져온 옷의 앞섶을 여미던 희사가 문을 바라봤다. 

“날씨가 좋다.”

서현의 말에 희사가 햇빛이 드는 창을 바라봤다. 

“나는 모르겠는데."

“밖의 공기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해.”

서현이 만족스럽다는 듯 희사에게 다가왔다. 

“동궁 안은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좋아.”

희사가 의외의 말에 놀라서 서현을 올려봤다. 

“만일 도망치려한다면, 네게 더는 대우해 주지 않을 거다.”

희사는 도망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향후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좋았다. 아니 어쩌면 도망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서현이 언제까지 자신을 가만 둘지는 미지수이니. 이러든 저러든 답이 없다. 희사는 서현을 뒤로 한 채 방을 나섰다. 병사 둘은 희사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서현이 희사의 뒤에 따라섰다. 

“이 길로 쭈욱 나가면 정원이 있다. 네가 마음에 들어 할 거야.”

희사는 서현의 말을 따라 궁의 복도를 길게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더 이상 서현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복도의 끝에 커다란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밖의 모습을 눈에 담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서현이 자랑할 만하다. 유악 제후의 정원보다도 거대했으며,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심어놓은 식물의 종류가 수를 가릴 수 없었다. 희사는 서현의 말대로 이곳이 황후가 거주하던 동궁이란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을 황궁의 내부에 들여놓진 않았을 테고…. 서현의 밑에 있는 사람들 외에 반역자인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희사는 장인들이 정성스레 만든 것이 분명한 돌길을 걸었다. 

서현의 말대로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봄날은 여전히 따스하기만 하다. 한참 돌길을 걸으니 그 끝에 못이 있었다. 고여 있는 못이 아니라 수로를 이용해 연방 새로운 물이 채워지는 형식이었다. 희사는 신을 벗었다. 상처 때문에 천을 적신 수건으로만 몸을 닦아 내려서인지, 저 못 안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욕구가 가득했다. 희사는 그럼 아주 잠깐 이라 생각하고 밑의 옷을 둘둘 말아 올렸다. 허리까지 말아 올리고 못 안으로 발을 담갔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몸 전부를 담그기엔 차가우나 허벅지까지 담그기엔 딱 적당했다. 희사가 물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다행이 못 안은 깊어지는 곳 없이 일정했다. 

-바스락 바스락. 

희사의 뒤쪽에서 무언가 부산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자신이 물 안을 걷는 소리인가 싶었다. 희사가 행동을 멈췄는데도 다시 한 번 바스락 바스락, 했다. 희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우거진 정원 풀 숲 안에서 한 인영이 확 튀어나왔다. 인상을 확 쓰고 머리엔 몇 개의 이파리를 묻히고 있는 꼬락서니가 꽤나 재밌었다. 희사가 조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못 밖으로 나왔다. 그 인영도 희사가 있는 줄은 몰랐는지 에이씨, 하며 머리에 묻은 이파리를 털어냈다. 

그것을 대충 털어낸 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놀란 눈으로 못 근처에 서 있는 희사를 쳐다봤다. 희사는 허리춤까지 걷어 올렸던 옷을 내렸다. 삽시간에 털썩 하며 비단천이 낙하했다. 희사는 귀족 중 동궁에 거주하는 자는 태자와 황후뿐이라는 사실쯤은 알았다. 헌데 하인이 이리 정원을 돌아다니진 않을 테고…. 희사가 그 인영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럴 수가!

“규, 규태?!”

희사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남자의 이름을 발음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달랐지만 규태가 확실했다. 그 인영도 한참 희사를 바라보더니 곤란하게 웃으며 말했다.

“절반은 맞췄는데. 그쪽은 누구요?”

목소리도 진정 규태와 같았다. 희사는 반가운 기분에 그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다 쏟아내고 싶었다. 허나 저 자는 현세의 규태가 아니라 전세의 한 사람일 뿐이다.

“흠, 옷을 보아하니 하인은 아닌 것 같고. 혹시 누군가의 첩이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실례했소, 난 북방제후의 아들인 규태휘요. 그쪽은?”

남자가 밝게 웃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자신감에 가득 찬 청년 같았다. 

“전, 희사라 합니다.”

희사는 자신을 유악 제후의 아들이라 지칭할 수 없었다. 이제 유악 제후의 성은 반역자의 반열에 올라가 있을 뿐이다. 

“성이 없소?”

태휘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곧 그는 아아, 하며 수긍했다. 아마 황족이 노리개로 데려온 야화일지 모른다고 결론 내린 듯했다. 희사는 태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참 이상하다. 자신은 태휘를 단 한 번도 전생의 꿈에서 접한 적이 없다. 희사는 아마도 그전 생애에서는 태휘를 보지도 알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현과 해훈이 이곳으로 오고 나서부터 전생이 바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태휘를 만나게 된 것도 바뀐 전생 덕일 것이다. 태휘가 흠흠하며 주먹을 쥔 손으로 입을 가렸다. 희사는 그제야 무례할 정도로 그를 쳐다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이곳으로 뛰어 들어온 생물을 하나 못 보았소?”

“어떤 생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흠, 그러니까 내가 키우는 건데, 이만하고 귀와 눈이 커다란 흰 토끼요.”

태휘는 양 손바닥을 마주보게 해서 작은 빈 공간을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새끼토끼 하나 들어갈 크기였다. 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지 못했습니다.”

태휘가 난감해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헌데 여긴 어디요?”

희사는 태휘가 그저 달아난 토끼를 찾아서 정신없이 배회한 것이라 여겼다. 

“동궁의 정원입니다.”

“이런, 큰 결례를 범했군.”

황궁에 도착한 귀빈이 내궁의 황제에게 먼저 인사를 들지 않고, 동궁에 든 것은 황실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혹 토끼를 찾으면 나를 찾아오시오. 한동안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니.”

“알겠습니다.”

“정말 찾아오셔야 하오, 그 토끼는 내게 있어 특별한 것이오.”

태휘는 진지한 얼굴로 희사에게 당부를 했다. 몸을 틀어 비집고 들어온 우거진 정원으로 다시 몸을 감췄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와 남자의 옷을 스치는 풀 소리가 삽시간에 멀어졌다. 장신의 키만큼이나 빠른 걸음이었다. 희사는 다시 못에 발을 담갔다. 발바닥에 묻은 흙과 풀 때문이었다. 못의 물로 헹군 후 얌전히 벗어놓은 신에 발을 맞춰 넣었다.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발을 신발을 감싼 천이 흡수했다. 이 커다란 정원을 조금 더 돌아볼까 하는데 시야의 가장 밑에 하얀 털 뭉치가 잡혔다. 어느새 나타난 흰 토끼는 희사의 바로 옆에서 못을 바라본 채 앉아있었다. 

물을 먹으려 하는데 너무 깊어 겁이 난걸까? 희사는 몸을 구부려 앉았다. 토끼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 손을 탔는지, 경계하거나 도망가려는 기색이 없었다. 연신 그 작은 코를 움직여가며 못의 물에 입을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 형상이었다. 희사는 흰 토끼를 안아들었다. 희사의 손이 다가가는 동안에도 토끼는 얌전히 있었다. 태휘의 토끼가 분명했다. 그의 말대로 귀와 눈이 새끼치곤 더 커다랬다. 토끼를 양손에 그러쥐고 일어선 희사는 태휘가 들어간 곳의 우거진 풀을 보며 따라갈까 하다, 자신의 걸음으로는 무리일 테고 함부로 돌아다녀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토끼를 안은 채로 다시 주저앉았다. 

다친 어깨 쪽 가슴으로 토끼를 품에 안았다. 자유로운 한 손으로 못의 물을 담았다. 토끼의 입에 가져대자 빠른 속도로 그 물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흘러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과 토끼가 먹어치우는 물의 양이 비슷했다. 희사가 손안에 다시 못의 물을 담았다. 그렇게 두 번을 반복하니 토끼는 더는 물이 필요 없다며 고개를 휙 돌렸다. 

희사가 토끼를 데리고 다시 동궁으로 돌아왔다. 정원과 연결된 커다란 문을 지나쳐 온통 다홍으로 점철된 방으로 향했다. 흰 토끼는 사람의 품에서 편안히 안겨있는 법을 알았다. 희사는 작고 귀여운 동물을 안아본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보들보들한 털과 동공이 꽉 찬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토끼를 융단 위에 내려놨다. 녀석이 폴짝 폴짝 주변을 돌며 희사를 올려봤다. 마치 주인을 찾아달라는 눈빛에 희사는 난감해졌다. 저 녀석을 어찌 전해주지……. 시중을 통해 건네는 것이 가장 빠를 듯 했다. 

황제를 알현하려면 적어도 반 시진은 걸릴 것이니, 희사는 시중을 천천히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실은 자신이 이 눈앞의 귀여운 생물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 세계에서 답답한 마음을 달랠 것은 하나도 없다. 희사는 융단에 누워서 토끼와 시선을 마주했다. 토끼가 휙 몸을 틀자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희사의 뺨에 와 닿았다. 희사는 조금 짓궂은 기분에 토끼의 엉덩이를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아주 살짝 쳤음에도 토끼가 앞으로 펄쩍펄쩍 뛰었다. 엄살이 대단했다. 희사가 도망치는 토끼를 잡아 침상 위로 들어올렸다. 자신도 토끼의 옆에 걸터앉았다.

“재미있어 보이는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희사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기척도 없이 들어온 해훈이 희사와 토끼를 번갈아 봤다.

“어디서 데려온 거지?”

“동궁의 정원에서.”

해훈이 토끼의 정체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침상을 향해 걸었다. 희사는 그의 절제된 발걸음에서 사람 같지 않은 건조함을 느꼈다. 

“어깨는 좀 어때.”

“괜찮아.”

거짓이 아니라 정말로 전보다는 훨씬 편해졌다. 해훈은 여전히 복면을 벗지 않은 채로 침상 위의 토끼에게 손을 뻗었다. 희사는 순간 그가 토끼의 목을 꺾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흰 토끼도 새까만 장갑을 낀 손이 다가오자 놀랐는지 펄쩍 뛰어서 희사의 무릎에 앉았다. 희사가 토끼를 품안으로 더 끌어안았다. 

“누가 죽이기라도 하나, 하긴 저리 작아서야 조금만 잘못 만져도 죽겠군.”

복면에 가려진 해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음성엔 웃음기가 섞여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전과 같나?”

평소보다 딱딱한 목소리가 조금 풀어진 해훈이 희사에게 물었다. 희사는 그가 말하고자하는 의도를 짐작하지 못했다. 그런 희사의 표정을 읽었는지 해훈이 말을 덧붙였다.

“네 음식 솜씨 말이다.”

맞다, 저 남자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좋아했다. 희사에게 있어선 남자에게 음식을 만들어 준 것이 불과 일주일도 안 된 일이다. 하지만 해훈에게는 벌써 십 년도 더 전의 이야기다. 현생에서는 해훈이 자신을 몰랐기에 자신도 그를 손님으로서 대했으나 이곳에선 아니다. 그에게 존칭을 할 필요도 전생의 그의 배신에 혼자서 치를 떨 필요도 없다. 해훈도 전생으로 왔으며……. 그래 아마. 또다시 자신을 배신할지 몰랐다. 이번엔 각오하고 있으니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희사가 모호하게 웃자 해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곳에선 돈을 벌기 위해서였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해훈이 것도 그렇군. 하며 수긍했다. 희사는 해훈이 자신을 찾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해훈 역시 둘러말하지 않았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거란 기대는 버리는 게 좋아. 괜한 기대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해훈은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듯 담담했다. 희사도 해훈의 말뜻을 이해했다. 저들은 아주 오랜 시간 이곳에 있었다. 

“앞으로 원치 않는 일이 벌어질 거다.”

원치 않는 일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새삼스럽다. 토끼가 희사를 위로하듯 허벅지 위에서 앞발을 두어 번 굴렀다.

“너에 대해 서현과 이야기를 했다. 네 어깨가 다 나으면….”

해훈이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허나 희사는 그 뒷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래, 내 어깨가 다 나으면 나를 유곽으로 보낼 건가?”

희사가 웃었다. 해훈의 표정을 볼 순 없었으나 그가 과도하게 놀라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희사 역시 알고 있었다. 반역죄인의 자식을 곱게 황궁 안에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곽으로 팔아버리는 것이 가장 손쉬웠다. 과거의 서현은 자신을 품고 마음껏 농락한 뒤 유곽에 팔아치웠다. 물론 유곽에서도 자신을 안은 것은 서현 하나다. 서현은 어쩌면 자신을 상처주기 위해 유곽에 판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기 때문에 보낸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든 저렇든 지금와선 상관없는 일이다. 

“넌 어디까지 기억하는 것이지?”

해훈이 불신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기억하고 있다 한들 소용없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지금 자신처럼 너희들도 과거의 사람이 아닌 것을.

“기억해봐야 지금 너희가 그 때의 너희가 아닌데 무슨 소용이겠어. 내가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은 이미 뒤틀려있어. 내가 유곽으로 간다면 그럼 이것 하나는 그대로겠군. 해훈 당신이 내 호위무사로 온다는 것.”

희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훈이 검은 복면을 벗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희사를 쳐다봤다.

“당신이 2황자인 줄은 몰랐어. 과거에서는 그저 내 호위 무사였을 뿐이니까. 그러니 내게 그 이상의 것을 묻지는 마, 그 외의 것은 나도 기억하지 못해.”

“신기하군.”

“무엇이?”

“네가 편한 것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내가 편한 것? 유곽으로 팔려나가 당신의 호위를 받는 게 편하다는 거야? 차라리 당신이 없는 게 내게 있어선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희사가 코웃음 쳤다. 해훈의 표정이 좀 전보다 더 차가워졌다. 희사는 자신의 한 말에 해훈이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희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해훈에게 배신에 대해 언급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곳에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다.

“희사, 내게 말조심하는 게 좋아. 앞으로 너를 지킬 자는 나 하나니까.”

“아니, 나를 지키는 자는 나 하나 뿐이야.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

해훈이 희사를 쳐다보던 시선을 내려 그 품안에 안긴 토끼를 봤다. 희사는 해훈을 지나쳐 살짝 열렸던 문을 확 밀었다. 그 앞을 지키는 병사가 고개를 숙였다. 

“시중을 불러주십시오.”

“예, 바로 그리 하겠습니다.”

병사는 귀족임에도 자신에게 존대를 쓰는 희사에게 더 깍듯이 대답했다. 희사는 품에 안았던 토끼를 다시 침상 위에 내려놨다. 해훈이 뒤를 돌면서 복면을 끌어올렸다. 

“그럼 또 오지.”

희사를 보지 않은 채 말을 건넨 뒤 방안을 나섰다. 희사는 침상 위를 뛰어다니는 토끼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유곽으로 간다면 도망가지 못하고 계속 서현과 해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전과 다를 것이 없다.  

“부르셨습니까?”

희사는 전에 자신의 옷을 훌렁훌렁 벗겼던 궁녀에게 토끼를 내밀었다.

“어마,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북방 제후의 아드님이 두고 가신 것입니다. 그 분께 돌려주세요.”

궁녀는 놀란 표정으로 의문을 띄더니 눈치 빠른 여자답게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희사는 그 잠깐 사이에 바지런히 움직이던 생물이 사라지자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희사는 침상 위에 동그란 알맹이들이 한데 무리지어 있는 것을 봤다. 그 사이에 그 토끼 녀석이 배설을 한 것이다. 꽤나 건강한 녀석인지 변이 동글동글하고 단단해보였다. 희사는 그것을 쓰지 않는 작은 천 조각에 감싸서 바닥에 내려놨다. 좀 있다 정원으로 다시 나가 버릴 심산이었다. 

희사는 어깨가 낫기 전에 무슨 방법이든 갈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방법은 도망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혹여 다시 현세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면 그 역시도 찾아야한다. 과연 그런 방법이 존재하기는 할까? 어느 것도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쳇바퀴처럼 같은 생각만이 반복됐다. 

희사가 생각에 잠긴 사이 궁녀가 심부름을 다녀왔는지 문 앞이 부산스러웠다. 희사가 방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며시 문을 열자 병사와 토실토실한 털 뭉치를 안고 있는 자가 옥신각신 하는 것이 보였다. 희사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태휘의 얼굴이 보였다. 

“이 안에 있는 자와 아는 사이래도. 정 안되면 얼굴만 보여주면 된다.”

“안됩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안 된다 이 말인가?”

희사는 강경한 병사의 태도에도 유들유들하게 말을 내뱉는 태휘를 보고 그답다. 라고 생각했다. 

“안에 들이지 못한다면 제가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희사가 방안에서 성큼 걸어 나왔다. 두 병사가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저 분의 토끼를 찾아주어 감사인사를 하러오셨으니 잠시만 시간을 내겠습니다.”

희사의 말에 병사들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태휘가 씨익 웃으며 흰 토끼를 흔들었다. 희사는 혹여 태휘를 방으로 들인다면 병사들이 질타를 받을 것을 알기에 복도를 걸었다. 정원 정도면 어느 정도 이야기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찾아온 그를 무시하면 그만이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태휘도, 사실 그의 토끼도 다시 보고 싶었다. 희사는 자신이 이리도 감정적인 인간이었나 싶어 쓰게 웃었다. 

“우리 토식이를 찾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소. 왜 다른 시중을 보낸 거요?”

핀잔이 담겨있는 태휘의 말에 희사가 작게 웃었다.

“저는 동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귀족이라면 황궁의 내부를 못 다닐 것은 없다. 희사의 말대로 동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필시 황태자의 상대일 테고, 규태휘는 역시 처음 생각했던 대로 희사가 야화일 것이라 결론 내렸다.

“하하, 어쨌든 토식이를 찾아주어 고맙소.”

“헌데 암컷이 아닙니까?”

희사는 정원에 도달하자 쏟아지는 빛에 얇은 손을 들어 이마를 가렸다. 그 모습에 태휘는 저도 모르게 토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토식이가 깜짝 놀라 태휘의 품을 벗어나 바닥으로 뛰었다. 꽉 쥐어 괴롭게 한 태휘를 원망하듯 토식이가 뒷다리로 태휘의 발목을 쳤다. 희사는 태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제야 태휘가 아차하고 말을 이었다.

“암컷이 맞소, 헌데 녀석이 태어날 때부터 하도 허약하여 내 남자이름으로 지어준거요. 그럼 건강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습니까.”

옆으로 보이는 태휘의 웃음이 못의 물보다도 더 시원했다. 마찬가지로 태휘도 희사의 옆모습을 보며 이토록 어여쁜 야화는 처음 본다 생각했다. 뛰어난 미인상은 아니었으나 남자의 안에서부터 무언가를 자극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 감정은 욕정에 가까웠다. 허나 완벽하게 육체적인 것뿐만은 아니다. 태휘는 입안을 맴돌던 말을 기어코 꺼내고 말았다.

“혹, 실례가 될지 모르나 당신은 야화요?”

태휘의 말에 희사의 얼굴이 싹 굳었다. 태휘는 자신의 실수를 알았으나 정정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아닙니다.”

희사는 곧 야화가 될지 모른다고 덧붙일까하다 그만 두었다. 규태라면 저런 말을 함부로 하진 않았을 것이다. 같은 영혼을 가졌더라도 자라난 곳의 환경에 따라 사람은 얼마든지 변한다. 저 남자역시 저런 말을 함부로 꺼낼 수 있는 건, 자신이 일개 천한 야화들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황족이나 높은 귀족이 아니라면 예우를 갖출 것이 없다고 자라올 때부터 들었을 테니까. 

희사가 뒤를 돌아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가려했다. 태휘가 그런 희사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서현이 나타났다. 

“정원에 손님이 드셨군요.”

서현의 등장에 태휘가 희사를 잡았던 손목을 놓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태자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내용은 흠잡을 것 없이 예의 발랐으나 말투는 공손하지 못했다. 서현이 웃으며 희사를 봤다. 희사는 이런 분위기는 익숙지 않았을 뿐더러 계속 머무르기도 싫었다. 희사가 두 사람을 향해 그럼,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서현도 태휘도 그런 희사를 붙잡지 않았다. 토식이가 희사를 조금 따라오더니 곧 자신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희사는 방 앞에 선 병사들을 봤다. 분명 서현이 화를 냈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니면 돌아와서 이들에게 화를 내겠지. 희사는 너무도 미안한 마음에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병사 둘이 깜짝 놀라서 희사를 말렸다. 

자신의 사정에 감정적인 사치를 부려서는 안 된다. 태휘도 그저 처음 보는 자다. 그에게 정을 주고 현세에서의 그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 희사는 토식이의 통통한 엉덩이를 떠올리자 조금 아쉬워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

희사가 자리를 뜨고 나서 두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현과 태휘는 웃고 있었으나 서로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태휘였다.

“희사라고 하던가요?”

희사가 뜬 자리를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태휘가 떠보고 있다는 것을 서현은 이미 눈치 챘다. 서현이 진하게 웃었다.

“맞습니다. 그는 내 친우였으나 그 아비가 반역을 일으켜 처형을 당하고, 그 일족을 멸하였습니다.”

“혹시 유악의 가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하, 그새 북방까지 그 이야기가 들어갔습니까?”

태휘는 서현의 말속에서 멀리 떨어진 북방을 깔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허나, 그런 것에 하나하나 신경 쓸 규태휘가 아니었다.

“황궁으로 오는 도중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헌데, 어찌하여 저자만 살아있습니까?”

그 의문은 태휘 뿐만 아니라 모든 귀족들이 가지는 물음이었다. 서현은 과연 방법이 하나라고만 여겼다. 

“그는 곧 유곽으로 팔려나갑니다.”

“그렇다면 제게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토끼를 쫒으러 왔다 그보다 더 어여쁜 것을 보았으니, 이제 저는 그것을 따라 갈 생각입니다.”

“북방 공자님의 목이 열 개나 되신다면 얼마든지 권해드립니다,”

“하하, 전하께서 제게 말씀을 올리시니 제가 감히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말을 낮추십시오.”

“북방 제후라 함은 황실의 권력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따름인데, 어찌 내가 말을 놓는단 말입니까. 황제가 된다면 모를까 지금은 편히 말할 생각이 없습니다.”

서현의 말 속에는 자신이 곧 황제가 될 것이다, 라는 뜻이 역력했다. 게다가 서현은 희사에게 친우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비쳤다. 그를 건드리면 목숨까지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 충고했다. 태휘는 역시 생각해왔던 대로 황태자가 보통이 아니라 여겼다. 상대방에게 감정을 보이되 그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알았다. 별 뜻 없이 내뱉은 서현의 말에는 얼마든지 위협이 될 수 있는 뜻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동궁의 정원은 황궁에서도 유명합니다. 부디 다치시는 일 없이 즐기다 가시길.”

서현이 정원을 가로질렀다. 태휘는 동궁의 정원을 가로 지르면 내궁이 나온다는 것을 좀 전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태휘는 미소를 띤 채로 사라지는 서현의 뒷모습을 봤다. 태휘는 북방의 백성의 위하며 랑쿤의 위협에 맞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배웠다. 태휘를 가르친 그의 아버지도 그러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허나 태휘와 그의 아버지가 다른 점이 있다면 황실을 향한 충성심의 차이다. 태휘는 황족의 피가 흐른다고 한들, 얼굴도 몇 번 보지 못한 황제에게 충성을 다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아버지에게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면 이러한 뜻을 내비친 적이 없다. 

태휘는 자신의 발밑에 폭신한 털을 부비는 토식이를 들어올렸다. 희사의 피부는 이렇듯 하얗고, 곧은 눈 안은 꽉 찬 동공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에게 단박에 시선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긴 것은 과연 이번이 처음이었다. 태휘의 아버지도 다른 제후의 정인이 될 자를 사랑으로서 쟁취했다 하였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라. 태휘가 그 특유의 시원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정원에 남겨진 태휘에게로 거센 바람이 몰려왔다. 봄바람 치고는 격하고 아주 찼다. 그 거센 바람은 태휘를 지나쳐 희사의 창을 두드린 뒤 서현의 걷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지막으로 해훈을 찾아가 그의 흑의를 펄럭거리게 만들었다. 마치 운명의 바람이 한차례 휩쓸고 가기를 예감하듯이 말이다.

7.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서궁(西宮)을 벗어났다. 망사에 가려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음에도 여자가 서궁을 벗어나는 동안 모든 궁녀들과 경비는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예를 다했다. 여자는 서궁의 주인이었다. 여자는 동궁으로 그 발걸음을 옮겼다. 서궁의 주인이 동궁을 찾는 것은 꽤나 드문 일이었다. 하물며 황후가 죽고 난 5년 동안 여자는 단 한 번도 동궁을 찾은 적이 없었다. 동궁을 찾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아니 이 땅을 밟고 서있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기에 여자는 발걸음을 더 급히 옮겼다. 모든 것을 전해줄 사람에게, 그리고 용서를 받아야할 사람을 만나러 가야했다. 여자는 숨이 가빠왔다. 사신의 낫이 여자를 향해 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여자의 가쁜 숨소리는 마치 곡소리 같기도 했다. 여자의 가는 길을 위로하듯 그 슬픈 숨소리는 동궁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    

해훈은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긴 그 날을 기점으로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희사의 어깨는 이제 가벼운 짐 정도는 들 수 있을 정도로 쾌차했다. 황제의 기력이 점점 더 쇠한 덕에 서현 역시 희사를 찾는 날이 적었다. 아니, 사실은 서현과 해훈이 희사가 잠에 든 새벽녘에야 잠시 들렀다가곤 했다. 그것은 물론, 황후의 방을 지키는 병사들만 알고 있었다. 희사가 알 수 있도록 자주 찾는 자는 태휘와 토식이뿐이었다. 태휘는 희사가 현세에서 알던 그의 밝은 성격과 흡사했으나 어떤 날은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여전히 자신을 배려하지만 그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최대한의 호의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태휘는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존대를 하지 않았다. 

희사는 사시(巳時)경 태휘가 두고 간 토식이의 아랫배를 매만졌다. 토식이를 두고 가면서 하는 말이 오래 걸리지 않으니 어디를 다녀온다 했다. 희사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희사는 한 번도 동물을 길러본 적이 없기에 토끼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동물인줄은 처음 알았다. 

희사는 그제 밤이 돼서야 자신이 이곳으로 온 시점부터 보름이나 지났다는 것을 알았다. 유곽으로 가기는 싫었다. 어깨의 거동이 자유로워질수록 마음은 무거워졌다. 사실 자신의 마음은 이미 그들에게서 도망가는 것으로 절반 이상 기울었다. 수중에 주화(鑄貨)도 한 푼 없는 빈털터리지만 차라리 길거리를 헤매는 것이 유곽보다는 훨씬 나았다. 희사는 지금의 마음 같아선 자신이 도망갈 때 토식이도 데리고 가고 싶었다. 생각만 했을 뿐 실행할리 없다. 주인에게서 떨어뜨리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할 짓이었다. 희사는 토식이를 안고 동궁의 정원으로 향했다. 

방안이 답답하고 좁은 듯 마구 헤집고 뛰어다니는 토식이 때문이었다. 희한할 노릇이다. 개나 고양이는 주인과 그렇지 않은 자를 알아본다하는데, 자신의 뒤를 바짝 쫓는 저 작은 토끼마저 그렇다는 것이 말이다. 다른 토끼들도 그런 것인지 토식이만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꽤나 기특했다. 토끼로서는 꽤나 긴 복도를 뒤처지는 일 없이 잘도 따라왔다. 

동궁의 정원에 도착하자 토식이가 신이 나서 못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동안 동궁의 정원은 희사 외에는 거의 찾는 자가 없었다. 태휘도 서현의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했다. 아마 태자전하가 치사한 취미를 가졌다라고도 했다. 희사는 그 말을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희사는 동궁의 정원을 찾은 뜻밖에 사람의 등장에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자신보다 먼저 와있던 것 같았다. 얼핏 보니 꽤나 장신의 여자였다. 정수리부터 턱까지 얼굴을 가린 망사천은 누에에서 갓 실을 뽑아 베틀에 짠 것처럼 촘촘했다. 어찌나 촘촘한지 그 안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희사는 눈앞의 여자가 황후일리는 없다 여겼다. 황후는 2황비의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물며 자신도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 

여자는 희사의 등장에 놀라지도 않고 소매가 긴 비단을 들어올렸다. 하얀 손이 드러나며 여자의 얼굴을 가린 검은 망사천이 머리 뒤로 완전히 넘어갔다. 희고 고운 손을 봐선 자신의 또래거니 했는데, 망사를 걷자 드러난 얼굴은 자신의 어머니 또래나 될법한 연륜이 묻어났다. 희사는 눈앞의 얼굴이 낯익었다. 허나 누군지 떠올리진 못했다. 

희사는 여자가 전의 태휘처럼 길을 잘못 든 귀족중 하나일거라 여겼다. 시선을 못으로 향하니 토식이가 어디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뛰놀다 보면 못으로 몇 번 돌아온 전적이 있기에 개의치 않았다. 희사가 여자를 지나쳐 가려하자 소매에 가려진 여자의 손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희사의 팔목을 강하게 잡았다. 여자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제게 볼일이라도.”

희사가 여자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날카롭게 세운 손톱은 마치 매의 발톱마냥 희사의 팔목을 할퀴고 지나갈 것 같았으나 생각 외로 쉽게 물러섰다. 희사는 다시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름답다. 그리고 적당히 익숙하다. 단지 그뿐이었다.

“희사,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여자는 전부터 자신을 알아왔다는 듯 말을 건넸다. 아마 전생에 자신이 알던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익숙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희사는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어쭙잖은 변명이라도 하려는 찰나였다.

“그래, 역시 그랬구나. 너도…. 이제 돌아온 게로구나.”

여자가 그야말로 덤덤히, 책을 읽는 것보다도 더 무감각하게 말했다. 희사는 이 여자도 자신들처럼 현세에서 넘어온 사람인가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희사는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그 물음에 힘없이 웃었다.

“너희를 돌아오게 만든 자다.”

“!"

희사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눈앞의 이 여자가 자신과 서현, 그리고 해훈을 돌아오게 만든 자라니! 

희사가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자 여자가 손을 올려 희사의 입을 막았다.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 손이었다. 남은 손으로 여자는 희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조금 걷자는 뜻이 다분했다. 희사는 여자와 이 화려한 정원을 여유롭게 같이 걸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먼저 한발을 내디딘 여자가 희사를 돌아봤다. 희사는 여자의 눈빛에 그녀를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음을 예상했다. 

여자는 토식이를 보낸 못이 아닌 반대편 누각(樓閣)의 계단을 올랐다. 누각은 동궁의 정원이 한눈에 보일정도로 높았다. 느린 걸음으로 누각에 올라선 여자는 사방을 죽 둘러본 후, 뒤에 선 희사와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 전 밑을 내려 본 것은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동궁의 정원을 한번 감상하는 모습 같았다. 희사는 더는 침묵을 참을 수 없었다. 저 여자에게서 무엇이든 들어내야 했다.

“뭘 조급해 하는 게냐.”

여자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와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희사는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희사의 언성이 올라가자 여자가 한쪽 눈썹을 작게 찡그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여자는 다시 동궁의 정원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가 계속 말을 잇지 않았다면, 희사는 그녀의 몸을 자신에게로 돌려세울 참이었다.

“난. 제 1황비인 청영이다.”

환진의 하나뿐인 황후는 죽은 서현의 모(母)였으며, 첫 번째 황비는 해훈의 어미다. 희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여자가 1황비라 놀란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급작스레 떠오른 여자의 존재에 대해서 놀랐기 때문이다. 그래, 여자의 얼굴이 익숙한 이유는 자신이 여자의 젊을 적 얼굴을 이미 접했었기 때문이다. 시간상으로는 불과 약 보름 전에 카페 안에서 해훈과 같이 마주했던 여자. 현세에서는 해훈과 남매였던 여자였다. 비록 분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주름 때문에 나이가 들어 보인다 하더라도 카페에서 봤던 젊은 여자의 얼굴과 크게 다른 구석이 없었다. 머릿속이 멍했다. 희사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여자의 입에서 수많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내 나이 열여섯에 이곳 환진으로 시집을 왔지. 난 본래 환진의 사람이 아니다. 랑쿤의 황족이며 그들이 환진에 보낸 볼모였지. 난 랑쿤의 황제가 내친 황비의 자식이었다. 내가 랑쿤의 황족이었단 사실도 이곳으로 시집을 올 때서야 알았다. 어미가 내쳐진 것이 내 나이 세 살 때였으니 기억할 리 없지. 나는 랑쿤에서도 신이 버린 땅에서 자랐다. 그곳은 이렇듯 정원의 흔한 풀포기 하나조차도 보기 힘든 곳이지. 후후.” 

희사는 말을 잇는 여자의 얼굴이 굉장히 창백하다 생각했다. 분칠 때문이 아니었다. 여자의 가느다란 목덜미까지도 그 창백함이 여실했다. 여자는 자신에게 뭘 그리 조급해하냐며 물었으나 사실 조급한 것은 여자인 것 같았다. 여자는 한숨을 돌리는 시간마저 아까운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이곳으로 시집와 그렇게 열일곱 되던 해 해훈을 낳았다. 어찌나 예쁜 아이였던지… 그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그런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아팠다. 그래, 너무 아파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런 상태였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내가 괴로웠으면 했다. 아무리 신께 기도를 올려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

여자는 잠시 말을 쉬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긴 말이 잇는 것이 여자에게 있어서 꽤나 힘든 일임을 암시했다. 여자는 곧 죽을병에 걸린 사람처럼 위태해보였다. 여자는 떨어지지 않도록 누각의 앞을 막아놓은 긴 나무를 잡고 몸을 지탱했다. 여자는 점점 가빠 오르는 숨에도 불구하고 말을 해야 한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여자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곤 희사에게 자신이 랑쿤으로 보낸 서신의 내용부터 차근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폐하, 오랜만에 인사드리옵니다. 청영입니다. 

서로의 안부는 궁금치 않을 것이라 생각되어 여쭙지 않겠습니다. 출가를 한 제가 또 볼모로 잡혀온 제가 이리 서신을 보내는 것이 마땅치 않은 것을 알고 있사오나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저의 전부이며 제 삶의 의지인 아이가 죽어갑니다. 제 아이가 죽으면 저도 죽습니다. 제가 자결을 한다면 어찌 될지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랑쿤에는 이제 후사가 한명의 황태자밖에 없으니, 제가 자결을 한다면 그 갓난아이를 다시 환진의 볼모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영영 또는 언제 태어날지 모르는 황손들을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협박을 하자는 것도 아니요, 제가 지금 당장 자결을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 아이를 살릴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죽어갑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어미 또한 알아보지 못합니다. 의술로 유명한 환진의 의원들도 손쓸 수 없다하니 랑쿤의…. 신이 버린 땅에서 신이 믿는 자. 그 자에게서 답을 얻어 주십시오. 다음 서신은 부디 제가 죽음을 결심한 이후가 아니길 바랍니다.―

그 서신은 청영이 출가할 때 랑쿤에서 데려온 한 궁녀의 목숨을 걸고 랑쿤의 황제에게 전달됐다. 랑쿤의 황제는 서신을 읽은 뒤 그 종이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출가한 계집 따위 알바가 아니라며 궁녀의 목을 쳤다. 

그날 밤 황제는 잠에 들지 못했다. 서신을 받아보았을 때는 너무 노하여 앞뒤 상황보지 않고 궁녀의 목을 쳐버렸으나, 정말 청영이 자결이라도 한다면. 그때부터 문제는 시작이었다. 황제는 청영을 환진의 볼모로 보낼 때에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존재에 그녀가 한없이 어여뻤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황제는 급히 청영이 원하는 자를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신이 버린 땅에서 신이 믿는 자라 함은, 청영이 자란 땅에서 흑의를 입은 무리의 우두머리인 ‘흑영’ 뜻했다. 그들은 랑쿤의 귀족 또는 백성들이었으나 황제보다 신을 더 믿었기에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에 유배됐다. 

랑쿤의 황후는 청영의 어미였던 제 1황비가, 투기(妬忌)가 심하여 주술을 부리고 황제의 궁녀들을 몰래 죽인다라는 거짓 누명을 씌워 황제에게 고했다. 황후에게 마음과 정신까지 빼앗겨버린 황제에게 있어서 제 1황비는 수백의 첩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렇다하여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었으나, 황후의 흉흉한 기에 의해 그녀를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황후는 청영까지 신이 버린 땅으로 보내버렸다. 그렇게 청영은 세 살배기 적부터 그곳에서 자랐다. 자신이 황제의 자식인지도 모른 채 그저 부모 없는 아이로 컸다. 신이 버린 땅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태반이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청영은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온 흑의를 입은 자들의 우두머리와 사랑에 빠졌다. 그 우두머리는 성이 없었으며 그저 다들 흑영이라 불렀다. 청영과 흑영은 서로를 지극히도 사랑했으며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다. 청영이 열여섯 되던 해 황제의 명을 받은 병사들이 청영을 데리러 왔고, 그날로 그 땅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비록 볼모에 가까울 지언즉 환진의 황비가 되는 것이었으나 청영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랑쿤 황제의 명을 어기는 것은 곧 국법을 어기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환진으로 끌려가기 전날 밤 청영과 흑영은 첫날밤을 치렀다. 청영은 환진으로 볼모로 끌려가 사느니 차라리 자결을 하겠다 했다. 흑영은 그런 그녀를 만류했다. 흑영이 그녀에게 말했다. 

“하늘이 우리에게 생을 준 것은 이유가 있어서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쉬이 죽지 마라.”

청영은 그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흑영은 그 하룻밤 사이 청영과 자신사이에 아이가 생긴 것을 알았다. 신이 버린 땅에 사는 자들이었으나 실상 그들은 신이 선택한 자들이었다. 

랑쿤은 본래 술사들과 흑무사들이 이룩해놓은 국가였다. 랑쿤의 초대 황제부터 선대 황제까지는 그들을 믿고 자신의 곁에 두었으나 현 랑쿤의 황제는 아니었다. 그들의 능력을 두려워했으며 멀리했다. 또한 현 황후가 뱀과 같이 교활하게 황제의 눈과 귀를 막았기에 황제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현 황제가 즉위하고 나서부터 랑쿤의 황권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산적들은 들끓었으며 귀족들은 각자 사병을 거느렸다. 제멋대로 환진의 북방까지 넘어간 그 사병들의 약탈질은 환진의 분노를 사기 충분했다. 북방의 제후가 호랑이처럼 굳건히 막아서지 않았다면 환진은 무리를 해서라도 랑쿤과의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렇게 랑쿤은 황후의 치마폭에서 난세 아닌 난세를 맞이했다. 

황제는 그 다음 날, 궁을 찾은 흑영에게 서신을 건넸다. 황제가 만들어낸 청영의 거짓 서신. 본래 서신은 태워버려서 그 내용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거짓 서신의 내용을 본 흑영은 복면 속에서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곤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오지 말아야하는 것이 돌아온다면 그것마저 업이 되건만. 운명을 주관하는 신의 능력을 한낱 인간이 휘두른다면 그 벌 또한 얼마나 클지, 나는 고통스럽다. 청영아.”

황제가 만들어낸 거짓 서신은 어떤 수를 써서든 해훈을 살리라는 것이었다. 황제는 당장 답을 주지 않으면 청영이 죽겠다는 강경함 또한 지어났다. 해훈이 청영과 흑영이 아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황제에게 있어서 해훈이 죽는 것은 그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해훈은 환진의 제 2황자가 아니던가. 혹시라도 해훈이 환진의 황제가 된다면 랑쿤의 황제로선 뜻하지 않은 기적일 테니 말이다. 

흑영은 랑쿤의 황궁에서부터 몇날 며칠을 걸어 신이 버린 땅에 도달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신의 아이를 어둠속에서 그려보았다. 아니 그것보다 그녀. 청영을 보고 싶었다. 환진으로 가는 그녀를 데리고 도망가지 못했다. 그리 했다면 이 땅에 사는 자들이 전부 길을 잃은 양떼처럼 죽음을 맞이했을 테니까. 흑영은 흑의대의 우두머리이기도 했으며 랑쿤 신의 기운을 받은 사자(使者)이기도 했다. 그들을 버리고 바탕으로 얻은 삶으로 행복할 수는 없었다. 그것 역시 청영도 알았다. 그럼에도 흑영은 청영을 지켜주지 못한 마음에 늘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왔다. 새까만 하늘을 올려보는 흑영의 눈빛은 이미 마음의 결심을 한듯하였다.

“살리자, 살려내. 비록 내가 벌을 받는다 한들 그녀를 위해서라면 살리자.”

흑영은 죽어갈 자를 살려낼 단 한가지의 방법을 알았다. 그 자의 후생의 수명을 끌어오는 것이다. 후생의 수명만 끌어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 후생의 자아(自我)까지 가지고 오는 것인지는 모른다. 게다가 그것을 행함으로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흑영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두 번 다시 청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허나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이 받아야 할 벌이라 여겼다. 그녀를 구하지 못하고 환진의 황궁에서 괴롭게 한 죄의 값을 치르는 것이다. 흑영의 얼굴을 가린 복면의 색이 더 짙어졌다. 흑영은 새까만 하늘을 보며 복면을 벗어던졌다. 흑영에겐 후생을 볼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눈을 감자 자신의 모습과 지독히도 닮은 자신을 아들. 후생의 해훈이 보였다. 자신은 한 번도 짓지 못했던 그 행복한 웃음으로 눈앞의 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웃음은 낯설었지만 해훈의 눈빛은 흑영과도 같았다. 바로 사랑하는 자를 바라보는 눈이다. 해훈의 시선의 끝에는 한 인영이 서있었다. 하얀 피부에 까만 눈을 가진 남자였다. 그들은 이미 사랑을 완성했으며 더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 둘은 성(性)이 같음에도 마치 청영과 자신만큼이나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네게 용서를 바라진 않는다.”

흑영이 흐느꼈다. 해훈의 후생은 더없이 따스했다. 후생의 생을 끌어온다면 그 행복은 사라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도 흑영은 청영을 위해 포기할 수 없었다. 흑영은 더는 그 행복을 보지 못하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돌아가자 그 희고 까만 눈을 가진 남자와 해훈이 평생을 약속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또 돌아가자 얼마 만나지 않은 남자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해훈이 보였다. 흑영은 더 앞으로 돌아가려하다 생각을 멈췄다. 만일 후생의 수명뿐만 아니라 후생의 자아까지 같이 넘어오는 것이라면?

자신과 청영도 타의로 말미암아 인연의 끈을 잃었다. 그런 자신이 이번엔 아들의 행복을 빼앗는 것이다. 지독한 이기심이라 해도 좋다. 청영의 상처가 이것으로 아문다면… 

흑영은 그 순간 해훈 후생의 삶을 가져와 이곳, 다섯 살의 해훈에게로 옮겨 넣었다. 흑영이 곧바로 메마른 땅위에 풀썩 쓰러졌다. 해훈의 생을 옮기자마자 자신이 벌인 일을 후회했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삽시간에 흑영의 눈빛은 가라앉아갔고, 몸의 힘은 전부 빠져나갔다. 그의 입술은 마치 시간이 멈추듯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누각에 선 청영은 이미 죽어버린 흑영과 같이 힘이 전부 빠진 채로 눈물을 흘렸다. 여자의 몸이 누각의 밖으로 그대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희사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자신에게 무엇을 전하려는 것인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희사는 전생의 꿈을 꿨으나 불과 얼마 전까진 현세를 사는 현실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이곳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현실적이지 못했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흑영이 죽고, 흑의를 입은 자들이 따르는 자는…. 그래, 나로 정해졌지. 그것은 인간의 뜻이 아니야, 그렇다 해서 그것 역시 신의 뜻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여자는 이제는 더는 서있을 힘도 없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해훈의 정신이 돌아왔을 때. 더는 내 아들이 아닌 것 같았다. 아이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했지. 그리고 직감했다. 내가 모르는 다음 생의 삶을 가져온 것이구나. 그것이 해훈이 살리는 방법이었구나. 해훈은 이생에선 그 때 죽었어야하는데 그것을 거슬러 데려온 것이야. 단지, 내 욕심 때문에…. 흑영이 그렇게 행한 것이지. 처음 해훈은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유폐되다시피 했다. 그런 해훈이 세상 밖으로 나간 것은 모두 희사 네 덕이었지. 네가 서현을 위해 황궁에 머물던 날, 해훈은 너를 마주하고야 말았다. 해훈은 그 때부터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시도했지. 해훈이 원래 살던 후생에서의 너를 기억하고 있던 거다. 물론 너는 전생의 자니까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래, 운명은 늘 그렇듯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것을 우리가 바꿨을 경우에는 더더욱.”

청영은 이미 일어났던 일을 되새겨 떠올리듯 초점 없는 눈이 허공을 향했다. 

해훈과 희사, 서현. 결국 그들의 끝은 모든 것이 뒤틀린 채 전부 죽음을 맞이했다. 청영은 그 당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그들의 삶이 끝나는 날, 청영이 유악산에 도착한 것은 이미 한참 늦은 후였다. 희사는 절벽 밑으로 몸을 던졌고, 그를 따라 서현과 해훈이 죽었다. 청영이 원했던 것은 그저 해훈이 건강하게 살아서 자신과 같은 괴로운 사랑을 하지 않고, 진정 사랑하는 이와 만나 백년해로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허나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죽었어야 할 해훈이다. 그런 것을 후생의 삶을 가져와 이어놓았다. 그럴 운명이 아니었다면, 한낱 인간인 자신과 흑영이 그렇게 바꾸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청영은 유악산의 절벽에 선 그제야 알았다. 순리대로 돌려놔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을 되돌리려면 해훈 뿐만이 아닌 해훈 때문에 원치 않는 운명에 휘말린 이들까지 제자리를 찾아줘야 했다. 해훈이 만일 이생에서의 운명대로 다섯에 죽었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상황이 바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과연 한낱 자신의 이기심으로 운명을 뒤바꾸어 놓으니 뜻하지 않게 엉망이 됐다. 청영은 다시금 바로 잡자고 다짐했다. 허나, 또다시 이들을 원래대로의 운명으로 되돌려놓으려 한다면 피해를 입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허나 청영에게 선택권이 없다. 이렇게 이들의 인연이 비틀린 채로 죽게 만들 순 없었다. 청영은 시간을 되돌린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었다. 흑영처럼 죽을 것이다. 다음 생조차 기약할 수 없다. 그래도 청영은 결심을 굳혔다. 제자리로 되돌리기로. 

하지만…. 되돌려지는 것은 없었다. 해훈을 원래의 후생으로 되돌려 보냈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전생의 영향을 받아 이미 달라진 후생은 어떻게 해도 뒤바뀌지 않는다. 해훈 한 사람만이 돌아간다고 끝날 것이 아니다. 그와 연관된 모든 일들과 사람들은 이미 영향을 받았다. 희사와 서현, 그리고 해훈이 그렇게 죽었으니 그들은 후생에서도 풀을 수 없는 악연으로 남았을 뿐이다. 

결국 후생의 운명을 바로 잡을 방법은 하나였다. 악연이 될 수밖에 없던 과거를 바꾸는 것. 그래서 서현과 희사마저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을 후생에서 전생으로 끌어들임으로서 시간은 되돌아갔다. 서현은 해훈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그러니 이곳에서 서현이 여섯 되던 해 후생의 서현이 넘어온 것이다. 그 때 서현과 해훈을 전생으로 끌어들인 반작용으로, 청영은 흑영처럼 죽어야했다. 하지만 희사가 넘어오지 않았기에 죽지 않았다. 청영의 바람은 모두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희사가 가장 늦게 돌아온 이유는 후생에서 이미 현성과 그의 부모가 죽었기 때문이다. 청영은 그들마저도 되돌리고 싶었으나 현생에서조차 그들의 삶은 그것밖에 안 되기에 방도가 없었다. 희사가 늦게 돌아옴으로써, 희사는 결국 그 무엇도 막지 못하고 현성과 자신의 부모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현성이 그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이곳에서 살게 됐다면 바로 잡을 길은 영영 없어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들였다는 말입니까?”

희사는 여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아니면 자신이 미쳤거나.

“그래, 너희를 원래의 운명대로 되돌리고 싶었다. 너희 셋은 내 잘못으로 인해 악연이 되었으니. 그것을 풀길은 다시 되돌리는 것뿐이었다.”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이 마음대로 시간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혹시 지금 내가 미친 겁니까. 아니면 당신이 미친 겁니까."

“아니다, 흑영과 우리는 단 한번 후생을 내다볼 수 있었지. 그 후생을 볼 수 있기에 너희를 다시 이곳으로 되돌린 것이다. 처음부터 바꾸지 않으면 너희는 영영 악연일 뿐이니까. 흑영과 난 한 나라의 운명을 주관하는 신을 따르는 자였다.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으니 죽었고, 이제 나 역시 죽는다.”

희사는 점점 아래로 무너지는 여자를 봤다. 누구 마음대로 운명을 뒤바꾼단 얘긴가. 그렇다면 자신이 전생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도 다 흑영이란 자와 이 여자 때문이 아니던가! 

“난 네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했으니 더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허나 난 후회하지 않는다.”

희사는 눈앞의 여자가 소름끼치도록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미워하지 못했다. 이유는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이었다. 처절하게 우는 것도 아닌 그냥 눈물로 얼굴을 적시는 것뿐이었음에도 희사는 그녀에게서 더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당신….”

가빴던 여자의 숨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기운이 없어져 숨을 거칠게 쉴 수조차 없는 듯했다. 희사는 입을 한번 다물었다가 다시 떼었다.

“당신 자신의 후생은 보지 못합니까?”

청영이 힘겨운 눈빛으로 희사를 올려봤다. 눈빛에 생기라곤 이제 먼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의문을 띄고 흔들리는 눈동자에 희사는 여자가 자신의 후생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일 그랬다면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당신, 내가 살던 곳에선. 그래, 당신이 후생이라 칭하는 곳. 그곳에서 당신은 해훈과 친남매였습니다.”

여자의 눈이 파르르 경련했다. 희사는 이 밉고도 미운 여자가 한없이 불쌍해졌다. 여자의 말대로라면 이제 또다시 후생은 달라지게 된다. 여자도 해훈의 동생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희사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곳에서의 해훈은 다섯에 죽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해훈의 아버지란 자가 이 여자를 위해 해훈 후생의 삶을 가져와 전생의 삶을 잇게 했다. 그로인해 우리 셋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운명에 휩쓸렸고,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우리가 악연이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여자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그 당사자들을 다시 또 전생으로 되돌렸다. 라니… 이게 말이나 될법한 일인가. 

아니, 자신이 전생으로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허나, 만일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현세에서의 삶을 전생으로 가져왔기 때문에 다시는 현세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곳에서 죽어야 후생을 기약할 수 있다는 소리고…. 이럴 수가. 희사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결론 내린 것이 맞는지 조차 헷갈렸다. 희사가 눈앞의 여자를 흔들었다. 

“이봐요, 이봐. 당신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여자는 이미 도자기처럼 하얗게 식어있었다. 이딴 말을 전하려 나를 만나러 와서 이렇게 내 앞에서 죽는단 말이야! 앞으로 나는 어쩌라는 거야!! 희사가 여자를 흔들었다. 깊은 잠이든 사람을 깨우기라도 하듯 거침없었다. 여자의 몸은 희사가 흔드는 대로 마구 털렁거렸다. 

“호, 이거 이거, 굉장히 흥미로운데.”

희사는 갑작스레 나타난 낮고도 음산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평소에는 장난기 섞인 시원한 음성이 태반인, 익숙한 남자의 음성이었다. 하얀 털 토끼인 토식이를 안고 있는 자였다. 태휘. 언제부터 엿들은 것이지. 희사는 당황해하며 그를 올려봤다. 태휘가 그런 희사에게 바싹 다가왔다. 희사의 품에 토식이를 안겨주었다.

“번번이 이곳 동궁의 정원에서는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 토끼를 잡으러 왔다가 마음과 눈을 빼앗기고, 이번엔 귀까지 빼앗겼으니 말이야. 황비의 말이 진실이라면 둘째 황자가 진정 황제의 아들이 아니며, 랑쿤 술사의 자식이란 말이지? 이거 아주 재미있는데?”

태휘가 희사의 품에 안긴 토식이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눈으로 황비의 식어버린 몸을 내려다봤다.

“우리 제후님께서 돌아오라는 서신도 만류하고 황궁에 머무른 것이 다행이었군. 역시 황궁은 늘 그렇듯 재미난 일이 벌어진단 말씀이야.”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희사는 토식이를 태휘에게 다시 건넸다. 토식이의 발이 허공에서 몇 번 굴렀다. 태휘는 쭈그려 앉은 자세로 팔짱을 낀 채로 미동하지 않았다. 태휘가 받아들 생각이 없자 희사가 다시 안아들었다. 태휘가 소매를 걷어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엄지손을 여자의 손목에 꾸욱 눌러 맥을 잡는 시늉을 했다.  

“이미 죽었는데 의원이 무슨 필요가 있어.” 

희사도 이미 알고 있다. 여자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돌아온 뒤 바로 죽었어야 했는데 지금까지 살아있었다. 여태 버틸 수 있던 것은 혹여 자신에게 진실을 전해주기위해서 인가 싶었다. 해훈에겐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자신에게만 고한 이유는. 그녀는 분명 해훈에게 증오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사는 창백한 여자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만일 자신의 전부인 자식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게다가 그것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식을 살리려 했을까, 아니면 운명의 순리대로 죽음을 지켜봤을까. 

우리는 현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다. 후생에서 누가 어느 것으로 태어나건 지금의 생에선 그것이 중요치 않다. 그러니 바로 눈앞에 닥친 현생만을 위해 해훈을 살린 것일 테지.

희사는 누각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여자에게서 미움과 연민이 동시에 교차했다. 희사가 토식이를 안고 누각을 내려갔다. 그사이 따라붙은 태휘가 희사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눈빛에 풀리지 못한 의문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다면 너희는 이다음 생에서 왔다는 말이지?”

아마도 저자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것 같았다. 못으로 달려 나간 토식이가 갑자기 없어진 것 또한 태휘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태휘님, 태자 전하의 허락 없이는 동궁의 정원에 들지 못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랬지. 그럼 지금이라도 가서 허락을 받고 올까?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해주겠어?”

시원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를 보는 희사의 마음은 전 같지 않았다. 희사는 태휘의 손에서 벗어나 누각을 빠르게 내려갔다. 토식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동궁내부로 향했다. 태휘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희사의 뒤를 바짝 따라왔다. 

희사는 자신의 앞길을 막은 용을 올려봤다. 정원과 동궁의 복도가 연결되어 있는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실존하는 용이 양쪽의 문을 가로지르며 지키는 것만큼이나, 문에 새겨진 용의 그림은 생생했다. 대체 어떤 장인이 그려 넣었기에 그림에서 이다지도 강한 기운이 느껴진단 말인지. 희사는 그 그림 앞에서 압도당했다. 

동궁으로 들어서려 문을 연다면 문을 지키는 용이 자신의 몸을 통째로 삼킬 것 같았다. 희사는 고개를 저었다. 단지 그림일 뿐인데 겁먹을 것 없다. 희사가 손을 내밀어 문을 잡아당겼다.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빈틈없이 풀칠을 해놓았나 싶었다.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이 문은 이른 새벽에 열어 늦은 밤에 닫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꼼짝없이 정원에 갇혔군. 이래서야 허락도 받을 수 없겠는데.”

태휘 역시 문에 새겨진 그림에 시선을 빼앗긴 채 말을 이었다. 희사는 다른 길은 알지 못했다. 동궁은 자신이 살던 유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희사가 건물의 벽면을 죽 걸었다. 가다보면 다른 문이 있을 것이다. 저 멀리 수 명의 자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희사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태휘가 여유롭게 웃으며 토식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희사는 그들이 태휘가 아닌 자신을 향해서 오는 것임을 직감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며 희사를 둘러쌌다. 흑의를 입은 자들은 아니다. 적색의 긴 도포를 보아하니 황궁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희사에게 어떠한 제재를 가하지 않았으며 그저 사방으로 길만을 막아섰을 뿐이다. 

“저 누각에 황비님이 계십니다. 사람을 불러와야하니 이리 막아서지 마십시오.”

희사의 말에도 그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지금 당장 서현이 자신을 유곽으로 보내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된다. 희사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다. 그들은 둘러싼 구(球)를 더 좁혔다. 

“거칠게 대하지 마라.”

희사는 장신의 병사들 틈사이로 태휘를 노려봤다. 

“태자 전하는 굉장히 바쁘거든. 게다가 오늘과 내일은 황궁에 없다하니 이처럼 좋은 기회가 다시없단 말이지.”

“무슨 기회 말씀입니까?”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눈과 마음을 빼앗겼다고. 아, 쉽게 말해 납치인가?”

납치라니? 희사가 한 병사를 힘껏 밀쳤다. 병사들 틈을 빠져 나가는 순간 몸이 허공에 들렸다. 희사의 양 팔을 뒤로 그러잡고 병사중 하나가 입에 재갈을 물렸다. 희사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으나 그들에겐 반항 축에도 들지 못했다. 얼굴에 새까만 천이 덧씌워졌다. 희사가 발버둥을 쳤다. 희사가 생각보다 더 심하게 반항하자 태휘가 혀를 찼다. 희사의 목 뒤로 따끔한 통증이 닿았다. 침인지 아니면 사람의 손가락인지 그 감각이 애매했다. 희사는 목뒤의 천주혈(天柱穴)이 눌리자마자 마치 그 찔린 곳에서부터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누군가 희사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나는 목숨이 열 개는 되지 않더라도 쉽게 죽지 않을 자신은 있으니, 어디 한번 이 재미를 즐겨봅시다.”

태휘가 뜻 모를 말을 하며 낮게 웃었다. 희사는 제 뜻대로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태휘에게 혈을 잡힌 순간부터 순식간에 기운이 빠지더니 그 어떤 생각을 챙길 새도 없이 정신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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