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겁환상(前劫喚想) 1부-5 by
2010-04-23 00:44:10 , Monday
해훈이 침상을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희사는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분위기가 낯설었다. 전에도 쉽사리 다가갈 수는 없는 자였으나 지금처럼 두려운 느낌은 아니었다. 지금 해훈의 모습은 마치, 황혼이 찾아들고 땅거미가 스며드는 습한 길을 홀로 걷는 사자(獅子)같았다. 어쩌면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이 진짜 해훈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는 전생으로 회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아왔다. 희사는 무엇 때문에 저 둘과 자신이 이곳으로 돌아온 것인지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말해봐.”
해훈이 희사에게 물었다. 서현은 뭔가 심기가 불편한 듯 희사의 곁에서 일어섰다. 희사는 침상의 가운데 몸을 일으켜 앉은 채로 그들을 올려봤다. 엉망이 된 머리와 가슴근처까지 흘러내린 옷 사이로 비치는 투명한 피부는, 피냄새와 함께 남자의 욕망을 그대로 쏟아낼 정도의 자극적인 것이었다. 허나 그것을 희사 자신이 알리는 없었다. 어깨를 동여맸던 천 역시 느슨해져있었다.
“말해봐, 희사.”
희사는 답을 재촉하는 해훈의 물음에 아무것도 해줄 말이 없었다. 서현은 희사의 젖은 눈을 쓸어 올렸다. 눈물에 짓이겨진 연한 살에는 그 부드러운 손동작마저도 쓰라림이 대단했다.
“너를 기다렸다.”
해훈은 수백 년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고독해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희사의 착각일 수도 있다. 서현이 해훈의 말을 막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게 좋겠다. 다친 것부터 어찌해야 하지 않겠어?”
서현이 희사의 드러난 어깨를 고갯짓했다. 다시 터진 어깨의 피는 굳었지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곪아서 썩을지도 몰랐다. 해훈은 그런 것 따위는 별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말해, 우리가 왜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
자신도 궁금한 것을 묻는 해훈이 물었다. 희사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알고 싶어.”
해훈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어두운 분위기가 더 짙어졌다. 희사는 목덜미부터 시작해 온몸이 차가워졌다. 해훈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한다면 그대로 그의 칼이 심장을 관통할 것만 같았다.
“그만해, 해훈.”
“무엇을 그만하란 말이지?”
“그를 몰아세우지 마. 그 역시 정확히 알지 못한다.”
“네가 내게 말했던 것을 있었나? 우리는 아마도 전생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 했지. 서현 너는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희사도 언젠가 돌아올지 모른다고 했어. 만일 희사가 돌아온다면 뭔가 열쇠를 쥐고 있지 않겠냐는 말 역시 했었고. 네가 현세에서 희사와 이야기를 했을 때 마치 희사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했었지.”
해훈의 비웃음 섞인 말에 서현이 침묵했다. 저 둘도 자신과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더 오래 살았지만 전생으로 회귀한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풀지 못했다.
“헌데 지금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이지. 희사 네가 모르겠다니.”
해훈이 희사를 보며 이죽거렸다. 희사는 해훈의 저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을 속이고 배신하는 것보단 저렇게 면전에서 차갑게 구는 것이 나았다. 희사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다른 생각에 잠긴 해훈을 봤다.
그 전의 일은 꿈에서도 몰랐기에 여기까지 왔으나 앞으로의 일은 알았다. 서현이 자신을 가지고 놀다 유곽에 팔 것이란 걸. 하지만 그 역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서현은 현세에서 온 자다. 희사는 그렇다고 저들의 손에 그리고 시간에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과거로 돌아왔다면 무언가는 바꿔야한다. 제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신이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몰랐다. 희사가 한동안 이어진 정적을 깼다. 물기에 젖어 촉촉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서현의 말이 맞아. 난 전생을 기억하고 있었어. 전부 다는 아닐지라도.”
해훈은 그제야 성이 식은 짐승처럼 그저 희사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꿈을 통해서 전생을 봤어. 그게 전생이란 것을 알기까지도 꽤 걸렸지만 말이야. 그래서 너희를 이미 알고 있었지. 하지만 현세에서는 말할 생각이 없었어. 미친 사람취급 받을게 분명했으니까. 서현, 네가 카페에 네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저 전생은 나만 기억하는 줄 알았다.”
희사의 말에 서현과 해훈은 아주 먼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인상을 썼다. 그래, 카페에서 만난 것은 그들에겐 벌써 10년도 전의 일인 것이다. 이미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뿌옇게 변한 기억이다.
“네가 본 꿈에선 이곳이 어땠지? 지금과 같았나?”
“나도 정확히는 알지 못해. 늘 단편적인 것만 봤으니까. 세세한 것까지는 하나도 몰라.”
“나와 서현을 알았다면서?”
“그래, 서현이 황제가 되는 것과 해훈 네가 그의 곁에 있던 것은 알았어. 하지만 정말 거기까지야. 감정적인 부분이나 미래의 일들까지는 알지 못해.”
서현이 황제가 된다는 희사의 말에도 두 남자는 그다지 놀라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희사는 해훈의 물음에 반은 진실, 반은 거짓을 담아 답했다. 전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럼, 네가 이쪽으로 넘어오게 된 건 정확히 언제지?”
해훈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동안 전생의 꿈을 꿨을 때는 그저 일어난 일의 영상만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어. 카페에서 너희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난 뒤 집으로 들어가고 나서 잠에 들었지. 그리고 깨어보니 이곳으로 와 있었어. 나도 이유는 몰라, 그저 이것역시 꿈인 줄 알았는데…. 이렇듯 전생이 현실적인 적은 없었어.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해훈이 기가 차다는 웃음을 내뱉었다. 해훈은 현세에서 자신이 넘어온다면 뭔가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것 같았다. 아니면 그저 희망의 한 가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해훈은 다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사실 희사에서 있어선 이곳이나 현실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5살 아이의 몸을 하고 어른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사실이 어떨 거라 생각해.”
자신을 보고 말하는 해훈에게 희사는 저도 모르게 반감이 들었다. 마치 일방적인 피해자라는 말투가 희사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해훈이 배신을 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그곳에서 뛰어내릴 일도, 현세에서 전생을 꿈을 꿀 일도 없었을지 몰랐다. 머릿속에서 수없는 말들이 오갔지만 희사는 정작 해훈에게 따지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러려면 저들의 과거에 어땠는지 낱낱이 고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어찌 보면 유리한 패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더군.”
서현이 해훈을 보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이곳이 현실일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현세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꿈이 아닐까라는 생각 말이야.”
해훈은 그의 말에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희사도 마찬가지였다.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살아야한다는 사실엔 다를 것이 없거든. 몇 번이나 죽을 뻔했고, 몇 번이나 이 자리를 지켰어. 그러기 위해선 많은 죽음이 필요했고……. 그것은 해훈 너 역시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해훈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럼에도 서현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일국의 황태자와 황자다. 자신의 어머니와 현성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저들을 암살하고 싶어 한 자는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전생을 전혀 모르다시피 했던 저들도 하물며 이렇게 살아남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다. 희사는 앞으로 저 둘을 상대하려면 자신도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아버지인 제후처럼 나약해봐야 이리저리 휩쓸리다 죽는 것이 전부다. 희사는 두 번이나 부모가 죽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것이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매한가지다. 외려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막지 못한 것은, 자신의 무기력함을 더욱 실감케 했다. 울고 후회해봐야 소용없다. 저들처럼 강해져야 한다. 희사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태자 전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문 밖에서 카랑카랑한 궁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현은 쯧하며 귀찮게 됐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침상에 앉아있는 희사를 보더니 몸을 숙였다. 다가오는 서현을 피해 희사가 뒤로 물러나자 서현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일단 정리는 해놔야겠지. 의원을 보낼 테니 쉬고 있어.”
서현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힘 있는 걸음으로 방밖으로 사라졌다. 서현의 등은 마치 견고한 벽과도 같아서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희사는 그가 나가자마자 해훈과 둘만 남았다는 사실이 불편해졌다.
“이제 울지 않는군.”
마치 희사가 결심한 마음을 꿰뚫기라도 하듯 해훈의 말은 거침없었다. 희사는 해훈을 올려다봤다. 새삼 자신의 무사였던 그가 떠올랐다. 검은 의복은 같았으나 지금의 해훈에겐 다정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해훈은 자신에게 한 톨의 관심도 없어보였다. 단지 같은 현세에서 넘어온 자일뿐이다. 희사는 곧 감정적인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웠다.
“키가 다시 준 것 같다.”
해훈이 자신의 머리에서부터 앉아있는 희사의 쪽으로 키를 재듯 손을 내렸다. 희사는 그의 회사에서 해훈과 일 년 만에 조우했던 것을 생각해냈다. 저 때도 저런 식으로 자신의 키를 쟀었다.
“십년도 더 전의 기억이라 확실친 않지만.”
해훈이 쓰게 웃었다. 희사는 저 웃음에서 비록 거짓일지라도 다정했었던 자신의 무사 해훈을 떠올렸다. 희사는 아무것도 몰랐을 적처럼 해훈을 맹목적으로 사랑하진 않으나, 과거의 기억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이따금 고통스러웠다.
오히려 해훈처럼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해훈은 기억하는 내 자신이 더 다행이라 착각할 테지만.
희사가 그를 따라 쓰게 웃었다. 해훈이 희사가 앉아있는 침상의 가운데로 다가왔다. 희사는 그의 커다란 손이 자신 쪽으로 오는 것에 약간의 불안함을 비쳤다. 그의 의도를 알지 못하여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기다렸다. 해훈은 이리저리 꼬이고 느슨해진 희사의 어깨 천을 풀었다. 피가 굳으면서 찢어진 상처와 천을 접목시켰는지, 천을 떼어내는데 살갗이 들리는 것 같았다. 희사가 저도 모르게 단발의 신음을 질렀다. 해훈이 깜짝 놀라 손동작을 멈췄다.
“아무래도 의원이 보는 것이 좋겠다.”
해훈은 마치 자신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해훈이 다시 풀어진 천을 희사의 어깨에 둘둘 감았다. 좀 전보다 더 엉성해진 상태로 변했다. 해훈이 몇 번 다시 고쳐 메더니 결국 누더기와 다름없는 채로 만들어놓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
“이곳으로 오고 나서 기회는 많았음에도 너를 한 번도 보러가지 않았다. 서현의 말을 듣고 솔직히 너 때문에 우리가 이곳으로 돌아온 것 같았지. 왜냐고 물어보면 해줄 말은 없다. 그저 가슴이 그리 가르쳤을 뿐.”
희사는 침상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서현이 엉망으로 깨버렸던 주전자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희사는 이런 와중에도 목이 마르단 사실이 우스웠다. 희사는 몸의 긴장이 조금 풀리자 마치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온몸이 무거워졌다. 침상의 등받이 쪽으로 뒤로 물러서 고개까지 젖혀 등을 기댔다. 그러자 해훈의 모습이 더 잘 들어왔다. 희사는 단 한차례 그를 보곤 곧 눈을 감았다.
“우리가 만났던 현실에선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했다.”
힘이 빠진 해훈의 목소리에 어두움은 여전했으나 차가움은 많이 사라져있었다.
“꿈속에서 네가 봤던 나는 어땠지?”
해훈은 전생의 자신이 어땠는지 묻고 있었다. 한없이 다정했고 자신의 위해 붉은 나비 머리 장신구를 사주었던 내 무사. 자신을 업고 유악산을 한달음에 올라 같이 했던 시간들. 그렇게 그와 함께 했던 꿈의 단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거짓이었고 일말의 다정함도 없이 자신을 배신한 것이 바로 당신이란 것을 고할 생각은 없다.
“지금과 다르지 않아. 그때도 지금도 이런 모습이었다.”
희사는 조금 지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해훈은 더는 희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희사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해훈이 본다면 앉아서 자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여길 정도로 미동도 없었으며 고요했다. 서현을 배신한 것은 자신이 먼저였으니 그를 탓할 것도 없다. 탓하려면 어머니의 뜻을 막지 못하고 따른 자신을 탓해야했다. 전생의 자신이 서현을 죽이려했기에 그 역시 자신에게 복수한 것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한 짓은 너무 잔혹한 처사였다. 그로인해 자신의 한 인생뿐만 아니라, 그 내세의 인생까지도 망쳐버렸다. 차라리 부모와 함께 자신을 죽였다면 더 나았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배신의 감정도 가슴의 찢어짐도 느낄 일이 없었을 테니까. 자업자득이라 여길지라도 희사는 여전히 서현이 증오스러웠다.
비록 지금은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꿈인지 구분하기조차 힘드나, 결국 자신과 저 둘은 현생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아무리 전생이든 현생이든 다를 것이 없다 해도 본래의 자리를 찾아야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시 돌아왔으니 다시 돌아갈 방법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희사는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 이 생을 바꿀 생각이 있었다.
“의원 들었사옵니다.”
아까의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희사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해훈은 얼굴을 가렸던 복면을 다시 눈 밑까지 끌어올렸다. 의원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의복을 입은 해훈을 보고 몸을 움찔했다. 의원은 자칫 서둘러 정신 차리지 않았으면, 손에 들고 있던 왕진도구들을 그대로 쏟을 뻔했다. 희사는 그런 의원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해훈은 의원에게 일말의 시선도 두지 않았다. 희사의 앞에 해훈이 그대로 서있자 의원은 다가오지 못하고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해훈이 희사의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다 곧 뒤로 걷었다. 들어왔던 것과 같은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의원은 해훈이 나갈 동안 고개를 한번 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희사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저는 익홍이라 하옵니다. 다친 곳을 봐드리겠습니다.”
익홍이라 자신을 칭한 의원이 넝마처럼 둘러진 천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리곤 곧 상처에 달라붙은 천을 약초로 달인 물로 살살 부어 고통이 적게 떼어냈다.
“아프셨을 터인데 잘 참으셨습니다.”
익홍은 마치 아이 달래듯 말했다. 희사는 어깨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으나 소리 내지 않았다. 익홍은 그가 가져온 것 중 누런 천을 둘둘 둘러싼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엔 남색과 녹색이 애매하게 섞인 잎이 담겨있었다. 익홍이 그것을 손에 들자 코를 찌르는 쓴 내가 퍼졌다.
“원래 이 약초가 좀 쓰옵니다.”
익홍이 사람 좋게 웃었다. 그는 희사의 어깨에 굳은 피딱지들을 제거하곤 알 수 없는 약으로 한 단계 골고루 펴 발랐다. 보자기에 쌓여있던 약초를 어깨에 올려놓는 것을 마지막으로, 익홍은 새하얀 천을 꺼내 희사의 어깨를 감았다. 그다지 치료를 한 것 같아 보이지 않음에도 익홍이 들어온 지부터 벌써 일각이란 시간이 흘렀다.
“푹 쉬시고, 푹 주무시고, 많이 드셔야 원래 상처는 빨리 낫습니다.”
익홍은 희사의 집에 있던 의원보다는 한참이나 어려 보였다. 아마 삼십이나 되었을까. 희사는 익홍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상처를 고치겠다 다시 약을 바르고 헤집어 놓으니 어깨가 더 지끈거렸다. 그래도 익홍의 말대로 빨리 낫는 것이 중요했다. 거동이 편해야 뭘 해도 되는 법이다. 익홍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음에도 쉽사리 나가지 않고 정리하는 것을 천천히 행했다. 희사가 보기에도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치였다. 이미 많이 지친 터라 말을 꺼내기도 귀찮아 그냥 내버려두었다. 희사는 앉은 채로 또 눈을 감아버렸다. 먼저 말을 걸지 않을 것이란 희사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익홍이 왕진도구를 보자기에 싸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어깨는 어쩌다 이리 다치신 것입니까?”
희사는 감았던 눈을 떠 익홍을 봤다. 익홍의 눈은 순수한 의문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냥 다쳤습니다.”
“혹, 좀 전의 흑의대(黑衣隊)에게 당하신 것입니까?”
“흑의대?”
희사는 익홍의 입에서 처음 듣는 말을 접했다. 흑의대(黑衣隊)라니.
“예, 아까 이 방에 있던 자가 흑의대지 않습니까.”
희사는 해훈의 옷을 떠올렸다. 온통 검은 옷을 입었다하여 흑의대인가. 희사는 그 명칭을 가진 이들이 무슨 일은 하는지 몰랐다.
“흑의대가 무엇입니까?”
익홍이 깜짝 놀라며 희사를 쳐다봤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뚝 떨어져왔느냐는 눈빛이었다. 뭐 반은 맞췄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
“세 살배기도 아는 흑의대를 모른다는 분은 처음 뵙습니다. 하긴 흑의대에게 당한 것이라면 이렇게 살아계실 수도 없겠지요.”
익홍은 마치 희사가 자신을 놀린 것이 아니냐는 말투였다. 희사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황궁에서 일을 하는 자들이나 수비대와는 다른 이들입죠. 쉽게 말씀드리자면 황궁의 모든 병사들은 황제폐하의 소유이지만 흑의대는 다릅니다. 그들은 어느 곳의 소유도 아닙니다. 그저 우두머리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단체라고 하는 것이 알려진 흑의대입니다. 그들 모두가 잔인한 손속은 두말할 것 없고 온통 흑의를 입고 다닌다 하여 흑의대라고 불린답니다. 그 이름역시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제멋대로 만들어 갖다 붙인 이름일 뿐이죠.”
“그들이 무슨 일을 합니까?”
“글쎄요, 저도 알려진 것이라곤 몇 가지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현재 태자전하의 밑에서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쉬쉬하는 분위기지만서도 뭐 다들 알고 있으니….”
익홍이 말을 잇다 안으로 들어선 자에 의해 입을 다물었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희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수다스런 자는 죽음을 빨리 자초하지.”
익홍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의 목에 드리워진 칼날의 그림자를 내려 봤다. 희사가 일어서서 해훈을 제지했다. 해훈이 그런 희사를 감정 없는 눈으로 한차례 쳐다봤다. 그리고 희사의 어깨에 깔끔하게 둘러진 천을 보고 나서야 익홍의 목에 겨눴던 칼을 내려놓았다. 익홍이 뒷걸음질 치며 부리나케 방을 벗어났다. 나가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목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느라 목덜미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희사는 침상 아래에 놓인 왕진 도구를 보고 혀를 찼다.
해훈 자신이 방에 있으면 의원이 겁에 질려 제대로 치료를 못하는 것을 알기에 밖에 나갔다 온 것이다.
“흑의대가 당신이 있는 곳이야?”
“다른 의원으로 갈아야겠군.”
“당신은 2황자가 아니던가? 왜 그런 집단에 속해있는 거지?”
해훈은 말없이 희사의 어깨만 응시했다. 희사는 재차 묻지 않았다. 해훈은 전혀 다른 말을 희사에게 건넸다.
“약의 향이 여기까지 진동한다. 마치 독초같이 쓰군.”
“독초는 쓰지 않아, 오히려 좋은 향이 나지.”
“맞다. 좋은 향이 날수록, 아름다울수록 독이 들어있지.”
해훈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졌다. 여전히 복면은 내리지 않은 채 그의 눈만 드러나 있었다. 희사를 계속 응시하던 해훈이 왕진 도구를 들었다. 아마도 의원에게 돌려준 심산인 듯싶었다. 아니 그보다 의원이 그를 보자마자 겁부터 집어먹을 것이 뻔한데. 희사가 왕진 도구를 든 해훈의 손을 손짓했다. 그냥 내려두라는 뜻을 알아들었는지 침상 옆 기다란 탁자 위에 올렸다. 뒤를 돌아서 나가는 해훈에게서 복면에 가려져 막힌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왜 그동안 너를 보지 않았는지 후회 되는군.”
희사는 너무도 작은 목소리에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잘못 들은 것인지 분간 할 수 없었다. 희사는 그대로 나가려는 해훈을 붙잡았다.
“굳이 내 부모와 그들을 죽여야 했어?”
해훈이 몸을 틀어 희사를 봤다. 그의 눈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해훈이 허리춤에 걸린 칼집을 쥐어 잡았다. 그 어두움에 희사는 의원과 같이 본능적인 두려움을 맞봤다. 여전히 그는 해훈이지만 잘빠진 재규어를 타고 샌드위치를 사가던, 자신에게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던 그가 아니었다.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나와 서현이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나?”
해훈이 무거운 걸음으로 희사와의 거리를 좁혔다. 희사는 등이 침상의 끝에 닿아있지 않았으면 앉은 채로 뒷걸음질 했을지도 몰랐다.
“이곳의 규율과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면 나처럼 낙오자가 된다. 서현은 금세 적응했지만 나는 달랐지. 하긴, 이젠 나도 그곳의 생활보다 이곳이 더 익숙해졌지만.”
그가 지칭하는 그곳은 현생이고 이곳은 전생의 세계란 것을 안다.
“3황자 세력을 죽이지 않았으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됐겠지.”
희사를 질책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훈도 서현을 배신하려 한 것은 지금 눈앞의 희사가 아니라, 전생의 희사란 것을 안다. 희사는 그의 답을 끝으로 해훈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해훈의 날카로운 눈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를 마주보진 않았다.
“헌데 나는 그곳이 그리웠던 건지, 단지 네가 그리웠던 건지 모르겠군.”
해훈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곤 방을 나섰다. 뒷모습을 감싼 그의 흑의가 무겁게 펄럭였다. 희사는 그것만큼이나 마음이 더 무거웠다. 해훈의 말이 맞았다. 역모를 꾸민 자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저들이 죽었을 것이다. 저 둘은 이곳에서 십년이상을 살아왔다. 자신도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미지수다. 방법을 찾되 그동안은 저들처럼 이곳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희사는 눈을 감았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계에 다다랐다. 좀 더 맑은 정신을 되찾으려면 수면이 필요했다. 화끈거리는 어깨에서부터 열이 퍼져 온몸을 달궜다. 희사는 침상의 끝에 등을 댄 채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희사는 깊은 수마가 몰려오는 것을 더는 막지 못하고 잠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5.
황제는 앞으로 살날이 길이야 일이년이었다. 병세는 짙어졌고, 고칠 약은 없었다. 원래 노쇠에는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런 이유 하에 제3황자의 세력은 서현을 빠른 시일 내로 암살하려 한 것이었다. 서현을 죽이기 전에 황제가 붕어한다면, 태자인 서현이 황제가 되는 것을 뒤집기는 더욱 요원했다. 황제가 된 서현을 끌어내리자면 그에 맞는 대의명분이 필요하다. 허나 누가 황제를 배신하고 한낱 3황자의 손을 들어준단 말인가. 어불성설이었다.
서현은 3황자들을 암살세력이라 부르지 않고, 반역세력이라 불렀다. 서현이 태자가 된 것은 황제의 뜻이다. 그러니 그것을 반하고자 하는 일은 반역이나 마찬가지다. 황제는 제 2황비를 총애하긴 했으나 황후의 아들인 서현만큼은 아니었다. 죽을 나이가 가까워오면 여자보다 자신의 핏줄이 더 중요하는 것을 깨닫는 법이다. 서현은 황제가 지금 자신을 부른 이유가, 단지 화를 내기 위해서만이 아님을 예측했다.
“어찌하여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일을 행했느냐.”
황제의 목소리는 마차의 바퀴가 메마른 사막을 굴러가는 것처럼 탁하고 거칠었다. 들끓는 가래를 천에다 뱉었다. 어의(御醫)는 황제가 앉은 옥좌 밑에서 연방 따뜻한 용정차를 수시로 올려 바쳤다.
“어찌 할 것도 없습니다. 폐하께선 반역은 극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진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황제가 쯧쯧하며 혀를 찼다. 어렸을 때부터 지나치게 총명했던 서현이다. 본래 총명한 자에게는 어중간한 자비가 없다.
“그래도 네 동생이지 않느냐, 왜 그리 매몰찬 게야.”
서현이 엷게 웃음을 띠었다. 그 모습을 황제가 알리는 없었다.
“동생이 제 목을 조여오니 반대로 동생의 목을 죄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비의 눈까지 파낸 것이냐.”
냉소를 담고 있던 서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아직 황제의 귀와 눈이 죽지 않았다. 물론 황제에게 낱낱하게 고한 자가 흑의대 일리는 없다. 그렇다면 시체를 치운 자가 고한 것인가. 황제가 비록 이빨이 빠진 호랑이라 해도 아직 맹수임에는 틀림없다. 서현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되새겼다.
"그들을 항천(降遷)으로 보냈느냐?"
"예, 그리 했습니다."
반역을 꾀한 자는 목이 잘려 성문 꼭대기에 보름간 매달린다. 허나 반역을 일으킨 자가 황족이라면 극형에 처해진 뒤, 유배지역으로 잘 알려진 항천의 묘에 묻힌다. 그것은 반역을 일으킨 황족에 대한 마지막 예우가 아니다. 환진의 국법상 일개 백성들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황족의 얼굴을 제멋대로 쳐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서현은 전보다 황제가 많이 약해졌다고 생각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그는 성왕이었으나 자애로운 자는 아니었다. 그 역시 배신자에게는 일말의 용서가 없었다. 황제가 서현을 총애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자신의 성품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람을 잘 다스릴 줄 알았으며 또한 사람에게 미련이 없었다. 사람에게 미련이 두는 자들은 결국 사람 때문에 망한다. 황제는 더는 서현을 질책하지 않았다. 과연 자신 또한 자신의 동생이 반역을 꾀했다면 서현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헌데, 극형에 처해지지 않은 자가 있다지?”
황제가 서현을 떠보듯 말을 건넸다. 사실 황제의 진정한 용건은 이것이었다. 서현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유악 제후의 아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런 게지.”
“그는 반역에 깊이 가담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제 친우였습니다.”
“헌데?”
황제의 물음에는 동생도 죽이는 네놈이 친우란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살려두었겠냐는 말이 숨겨져 있었다.
“친우라 생각했던 제 마음을 배신당했으니, 그냥 죽이기엔 그저 아까웠을 뿐입니다.”
황제는 아무 말도 않고 서현을 쳐다봤다. 마치 서현의 마음을 꿰뚫듯 예리한 시선이었다.
“내 사람에겐 미련을 두지 말라했다.”
“알고 있습니다. 미련이 아닙니다.”
서현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직시했다. 무례한 시선임에도 황제는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황제가 곧 껄껄껄 웃었다. 옥좌 밑에 있던 어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황제를 올려봤다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비와 아들이 죽었는데 저리도 웃을 수 있다니, 진정 무서운 자라 생각했다.
“좋다, 네가 알아서 하거라. 더는 말하지 않겠다. 허나, 다른 자들에겐 무어라 할 것이냐? 사사로운 네 복수 때문에 반역자의 자식을 살려두었다 할 것이냐?”
서현 역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황제에게 낱낱이 고할 생각이 없었다.
“물러가라, 어차피 네가 황제가 된다면 지금보다 더 숫한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황제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말에 어의가 폐하,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황제는 그 어의를 한번 내려 보더니 미소를 머금었다. 나이가 들어보니 이젠 사람의 마음이 어느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무렴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라고 생각했다. 이제 황제는 죽을 날만이 남아있었다.
***
서현은 황제의 처소에서 나오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희사가 있을 방을 향해 걸었다. 불안했다. 저 영감이 말은 저리해도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다. 이미 희사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해훈이 있었을 테니 쉽게 해코지 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황궁의 내부에서 동쪽 외궁으로 향하는 서현의 걸음에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담겨있었다. 황궁의 신하들과 귀족들은 처음 보는 그런 서현의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서현은 동궁(東宮)에 도착해서야 발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동궁은 황후와 황태자인 서현만이 거주하던 궁이었다. 5년 전부터는 서현 혼자만이 남았다. 2황비의 간악한 술수에 5년 전 황후가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그 날은 2황비가 황후의 동궁을 다녀간 날이었다. 황후는 그녀가 가져온 황금으로 수놓아진 봉황 비단 옷을 입고 죽은 채 발견됐다. 서현의 감이 부르짖고 있었다. 2황비 때문에 황후가 죽었다고.
2황비는 황후에 앞에선 누구보다 순한 양이었다. 물론 가면에 지나지 않았지만. 2황비의 그 간악한 마음을 읽은 자는 서현과 해훈, 그리고 몇 안 되는 동궁의 궁인들이 전부였다. 만일 서현이 있었다면 2황비가 가져온 것을 절대 먹지도 입지도 못하게 했을 텐데, 운명은 늘 그렇듯 원치 않는 방향으로 비껴나간다. 서현이 북방제후를 만나고자 보름간 동궁을 비운 첫째 날이었다. 황후가 붕어했다는 급한 서신을 받은 서현은, 북방 제후가 다스리는 지역인 규성주를 가다말고 다시 황궁으로 당도했다. 서현은 황후를 죽인 2황비의 술수를 알아내고자 이리저리 캐보았지만 딱히 진실을 밝힐 만한 단서는 없었다.
황후가 죽었을 때 입고 있던 것은 황금 비단으로 지어진 의복이었다. 화려하고도 바느질이 촘촘하여 보통 장인이 만든 의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등 뒷단이 뜯어져 있는 것을 보면, 2황비가 그 안에 독침을 넣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황후를 죽인 후 2황비가 동궁의 궁녀와 경비병 중 하나를 매수하여 그 바늘 침을 등 뒷단에서 뜯어낸 것이다. 물론 가설이었다. 열흘이 채 되지 않아 서현은 동궁 안에서 2황비가 매수했던 궁녀 하나를 찾아냈다. 며칠 사이에 씀씀이가 아주 헤퍼진 궁녀를 수상하게 여기던 밑의 시동인 어린 계집이 고한 것이다. 서현이 그녀를 직접 질타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2황비의 손이 더 빨랐다. 황궁의 죄인들을 가두는 옥사에서 하루 만에 궁녀는 짐새의 독을 마신 채 죽어있었다. 그 궁녀를 지키던 옥졸 두 명도 같이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궁녀의 죽음으로 인해 2황비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고, 결국 서현은 5년이란 시간이 흘러서야 2황비를 죽일 수 있었다.
서현이 황후에게 어미의 정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다. 허나 서현이 전세로 넘어오고 나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었던 것은 희사와 황후 둘뿐이었다. 자신이 총애하던 자를 그리 죽였으니 2황비는 비참히 죽어야 마땅했다.
서현은 황후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희사가 있는 곳이다. 그 앞을 지키는 병사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문을 열자 향기로운 내가 방안에 그윽했다. 꽃의 향기도 아니며, 달콤한 음식의 내도 아니다. 그저 희사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서현은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희사 역시 현세에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서현은 자신을 배신한 희사를 이리 가만둘 리 없었다. 같은 사람이되 저 희사는 자신을 배신하려 한 희사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자신이 제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서현은 침상에 앉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잠이 든 희사를 봤다. 얇은 머리칼이 제멋대로 구불거리며 금침 위를 수놓았다. 새까만 머리칼은 다홍의 금침과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절로 탄성이 나올 한 폭의 그림이다.
서현은 희사의 머리카락을 아래서부터 매만지기 시작했다. 마치 넝쿨이 손을 휘감듯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현이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날, 카페를 나서는 희사를 따라가 말을 걸자 매몰차게 냉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현세에서 손꼽도록 희사를 봐왔던 동안 희사는 서현에게 지나칠 만큼의 냉대와 증오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서현이 희사의 얼굴을 가린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 넘겼다. 작은 귀 뒤로 넘기자 가느다란 턱 선이 드러났다. 서현은 참을 수 없어 그 뺨에 입술을 맞대었다. 희사가 깨지 못할 정도로 가벼운 입맞춤을 그의 입술로 옮겼다. 서현의 바람도 허무하게 입술이 맞닿는 순간 희사가 눈을 떴다. 상황이 판단되지 않는지 멍한 채로 꿈뻑대던 희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서현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다친 것도 잊어버리고 과도하게 움직인 탓인지, 희사는 어깨의 아픔에 몸을 웅크렸다.
벌써 몇 번이나 어깨를 다친 것을 잊는 것인지, 희사는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멍청했다.
“뭐하는 거야.”
냉대는 여전했다. 서현은 차갑게 올려보는 희사를 보며 작게 웃었다.
“해훈은?”
“그걸 왜 내게 물어.”
“그렇지.”
서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희사를 본 첫날, 카페에서 했던 말들을. [네 덕에 죽었고, 네 덕에 현생에서도 괴롭게 사는 자야.] 서현은 지금 상황이 돼서야 그 말뜻을 이해했다. 희사는 전생을 기억했다.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몰라도. 전생의 자신은 그의 배신을 참지 못하고 아마, 지금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들을 행했을 터였다. 그 몸을 벗겨놓고 원하는 대로 안에 처넣어 휘저으며, 울부짖는 입을 막았을 것이다. 원할 때마다 몸을 탐해가며 어느 곳 할 것 없이 온통 정액 투성이로 만들어주고 말았을 것이란 걸. 여러 생각을 담은 서현의 눈빛을 희사는 피하지 않았다.
서현은 머릿속에선 이미 몇 번이고 희사를 범했었다. 도망가는 것을 붙잡아 손목을 그러잡고 애원할 때까지 놔주고 싶지 않았다. 서현이 희사에게 몸을 기울였다. 희사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의원이 나가고 나서도 정신없음에 옷을 추스르지 못했다. 서현이 희사의 가슴께까지 흘러내린 비단 천으로 손을 가져댔다. 희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희사는 역시라며 이를 물었다. 것 보라, 전생에서와 다름이 없다. 서현의 눈은 이미 희사를 향한 정욕으로 가득했다. 가슴 안쪽으로 손을 넣어 연한 살을 주물렀다. 희사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자, 엄지손으로 튀어나온 작은 젖꼭지를 간질였다. 목덜미까지 다가온 서현의 입술이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깊은 그의 한숨이 목을 싸하게 만들더니 곧 서현이 몸을 떼어냈다. 희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현을 올려봤다. 서현이 희사의 머리칼을 뒤로 쓸었다.
“머리가 엉망이군.”
서현은 그래도 내겐 한없이 아름답다. 라는 말을 삼켰다. 서현이 탁자 뒤쪽에 놓아진, 한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나무 의자를 끌어왔다. 희사는 서현이 왜 저러는 것인지 이상했다. 자신이 알던 예전의 그였다면 이미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도 남았다. 희사는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듯 자신이 알던 과거와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네가 왜 나를 배신했는지 알고 있어? 혹 정말 현성을 사랑한 건가?”
서현은 지금의 희사에게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물어보지 않고서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
서현은 희사의 대답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만일 희사가 전생에 반역을 꾀한 것을 기억했다면 그 인장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 그것만으로도 좋아. 넌 여전히 내가 증오스럽겠지. 아무리 과거의 자라고 한들 네 부모와 현성을 죽였으니.”
“……”
희사는 부정할 수 없었다. 허나 그것은 자신들이 판 무덤이었다.
“저들을 살려두면 언제고 내 목숨이 위험했을 거다. 이곳의 희사 역시 나를 배신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너무 나를 증오할 것도 없어.”
해훈의 말이 맞다. 자신처럼 안이한 생각으로 살아왔다면, 과연 자신은 저들처럼 이곳에서 십년이 넘도록 버틸 수 있었을까. 그래도 희사는 아직 저들보다 현세의 기억이 더 강했다. 저들은 현세보다 이곳의 기억이 더 강할 테지만.
“희사, 너는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래야 하겠지.”
“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지. 사는 것이 더 중요했거든.”
희사는 서현을 보던 시선을 거뒀다. 약해지려 했다. 해훈과 마찬가지로 저 남자는 자신이 알던 서현이 아닌 것만 같았다.
“서현, 너 역시 내가 증오스럽지 않아? 기억하지 못한들 과거의 나는 너를 배신하려 했다.”
희사의 말에 서현은 쉽사리 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직 잠에 취한 몽롱한 희사의 눈을 들여다 볼뿐이었다.
“그래, 지금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서현은 진정 다행이라며 웃었다. 희사는 그 웃음에서 짐승의 숨겨진 송곳니와도 같은 흉포함을 엿봤다. 희사는 몸이 무거웠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마치 자신의 무게보다 무거운 짐을 이고 있는 것보다 힘들었다. 지금 당장 눈을 감지 않으면 수명이 몇 년은 줄어들 것 같았다. 희사는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나고 서현이 희사의 몸을 안아 제대로 눕히는 동안에도 희사는 잠에 취해있었다.
서현은 깊이 감긴 희사의 눈을 보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차라리 마음대로 해버릴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전생으로 돌아온 것은 무언가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희사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거짓으로도 다정하게 웃어주는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서현이 기억하는 전생은 희사의 화사한 웃음뿐인지도 몰랐다. 서현은 조용한 발걸음으로 황후의 방을 나왔다. 방을 지키는 두 명의 병사가 고개를 숙였다.
“혹여 이 안에 있는 자가 사라지거나 다친다면 너희 목이 가장 먼저 날아갈 것이다.”
“예, 태자 전하. 분부 받들겠습니다.”
서현은 황후의 사건이후 동궁 경비대와 궁녀를 모두 갈아치웠다. 자신의 영역이 자신의 손 안에서 놀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뒤통수를 맞을지 몰랐다. 밑의 자들이 서현에게 진심을 다해 충성을 하게 되는 이유는 공포심과 더불어 후한 대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일만 잘 이행한다면 화를 당할 일이 없다. 외려 성격이 괴팍한 황족이나 귀족의 밑에 있는 것보다는 서현의 밑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았다. 경비들은 이 안의 사람에 대해 궁금했으나 그것을 물어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서현은 내궁을 향해 걸었다. 늙은 황제대신 해야 할 집무가 산더미였다. 게다가 내일 정오(正午)에는 북방제후의 새끼 호랑이가, 병든 황제에게 문안 인사차 황궁에 도달하겠다는 서신을 전해 받았다. 말이 문안인사지 중앙 귀족들의 환심을 사러오는 것이었다.
북방의 제후는 서현의 나라인 환진(奐振)의 백호랑이라 불릴 정도로 세력이 뛰어났다. 환진(奐振)의 지방제후들은 사병들을 거느릴 수 없으나 북방제후는 예외였다. 수십 년 동안이나 환진의 옆 국가인 랑쿤의 지방 세력들을 막는 데 항상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환진의 북방이 뚫린다면, 환진 국가 병력의 총 2할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멍청한 귀족이나 황족들은 그깟 2할 정도야 라고 할지 모르나, 그 부족한 2할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서현은 북방제후 역시 황제와 같이 노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들인 규태휘는 환진의 황태자만큼이나 총명하다 소문나 있었다. 우습게봐선 안 된다. 북방제후는 황제의 이종 사촌이다. 그러니 언제든지 중앙 황제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다. 북방제후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두텁고 현재로선 늙었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으나, 그의 아들인 규태휘는 달랐다.
서현이 내궁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미리 도착한 객(客)이 있었다. 서현을 보자 그 객이 복면을 내렸다. 서현이 저벅저벅 걸어 의자에 앉았다. 그도 서현과 마주 보는 곳에 앉았다.
“그를 어쩔 셈이야?”
해훈이 말하는 자는 희사였다. 서현은 해훈이 희사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서현으로서는 다행이었지만 이곳으로 넘어와 희사를 마주치기 싫어한 것은 해훈 자신이었다.
“글쎄, 너는 어찌 했으면 좋겠어?”
“이번 일로 귀족들이 너를 우습게볼지 모른다.”
해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반역죄인의 자식을, 게다가 그 일에 가담한 자를 살려두는 것은 또 다른 불씨를 제공하게 된다.
“그럼 죽여 버릴까?”
해훈이 웃었다. 서현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비웃음이었다.
“유곽으로 보낼까 생각중이다. 물론 다른 이들이 품지는 못하게.”
해훈이 꽤 놀란 표정을 했다. 곧 차라리 그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고 수긍했다. 해훈은 희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의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저 현생에선 기가 막히게 음식을 잘 만드는 일꾼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더 깊은 감정도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집에서 일하길 권했던 것이다. 서현이 해훈을 보자, 해훈은 다시 복면을 위로 끌어올렸다. 얼굴 표정을 읽히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것이 없다.
“내일 북방제후의 아들이 방문키로 했다.”
“그가 왜.”
“병든 황제를 위해 공물을 가져온다는데 사실상 그게 이유겠어? 내가 보기엔 그 아들놈이 보통이 아니다, 아마 지 아비가 죽고 제후가 될 때를 대비하여 귀족들을 만나는 것이겠지. 북방은 자칫하면 홀로 고립될 수 있는 곳이니까.”
해훈도 이미 예상한 대답이었다. 심드렁하게 대꾸하곤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 앞을 지키는 병사가 깜짝 놀라며 칼집에 손을 가져댔다. 해훈이 그를 한번 훑어보자 병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 숙였다. 흑의를 입은 자중 두 개의 검을 찬 자는 황궁의 어느 곳에 있던 제약하지 말라는 서현의 지시가 있었다. 해훈이 찬 검은 얼핏 보면 하나의 검 집으로 보이나 그 안쪽엔 길이가 조금 더 짧은 검 집이 하나 더 매달려 있었다. 병사들은 방금처럼 그가 들어간 것을 본 적이 없는 방에서 그가 나온다던지,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본 적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제재를 하려야 할 수 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