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겁환상(前劫喚想) 1부-4 by
2010-04-23 00:41:24 , Monday
희사는 어깨의 통증이 다시금 시작되는 바람에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뿌연 시야 사이로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만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긴 한숨을 내쉬며 눈앞의 자를 확인해보니 아까 전 맥을 짚었던 의원이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희사가 정신을 차린 것을 알아차린 의원이 공손하게 말을 건넸다. 어깨의 천을 새로 갈았는지 이제 검붉은 색은 보이지 않았다.
“기력이 많이 쇠약해지셨습니다, 공자님. 탕제를 달여 놨으니 곧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의원이 시동을 불러 탕제를 들여올 동안 희사는 아직도 자신이 꿈에서 깨지 않은 건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깨의 고통은 여전했으며, 몸에 닿는 이불의 감촉은 현실보다도 더 사실적이었다.
“어깨의 통증은 좀 어떠십니까?”
시동에게 탕제 심부름을 마친 의원이 희사에게 물었다. 희사는 어깨의 아픔보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더 불안했다.
“희사님?”
의원이 몸을 숙여 희사에게 얼굴을 디밀었다. 일단 몸을 일으키고 싶었다. 어깨뿐만 아니라 허리까지 뻐근했다. 부축하는 의원의 손을 빌릴까하다 곧 생각을 접었다. 희사는 다치지 않은 쪽 팔로 몸의 무게를 지탱하며 똑바로 앉은 자세를 잡았다.
“제 나이가 어찌 됩니까?”
“네?”
희사의 물음에 의원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안 그래도 의원의 이마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한데 희사가 그 개수를 보태는데 한몫했다. 자신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꿈에서 깰 때까지는 계속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소린데, 그렇다면 희사는 적어도 자신에 대해선 깨우치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나이 말입니다.”
“지학(志學)을 벌써 두 해나 지나셨죠.”
다시 묻자 의원이 순순히 대답했다. 지학을 두 해나 지났다면, 현재 십칠세가 되었다는 소리다.
“어깨 말고는 달리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네, 없습니다.”
의원이 어깨를 다치면서 희사의 머리도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듯도 했다. 의원이 다시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시동이 들어오는 것이 더 빨랐다. 여시동은 희사에게 무릎인사를 한 뒤 의원의 앞에 상을 두고 나갔다. 그 안에는 탕제로 보이는 갈색의 물과 묽은 쌀죽이 올라와 있었다. 의원이 탕제를 들어 희사에게 내밀었다.
“적당히 뜨거우니 천천히 들이키시면 됩니다.”
희사는 의원이 내민 탕제를 입 안으로 삼켰다. 어찌나 쓴지 마치 고삼차를 들이키는 것 같았다. 위액이 역류하며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참고 삼키십시오. 본래 몸에 좋은 약이 쓴 법입니다.”
의원은 다시 뱉어내려는 희사의 의도를 미리 짐작했는지 못을 박았다. 희사는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남은 탕제를 한 번에 삼켰다. 그것을 끝까지 지켜본 의원이 꿀을 묻혀놓은 수저를 내밀었다. 희사는 한달음에 그것을 받아들어 쓴 입을 꿀로써 달랬다.
“다치신 뒤로 삼일이나 주무셨습니다. 태자전하께서도 부인(夫人)께서도 많이 심려하셨습니다. 상처는 잘 아물고 있으니 이제 적당히 바깥바람도 쐬시고 활동을 늘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원이 상에 남아있던 흰 쌀죽을 희사의 무릎 위에 올렸다. 희사는 흠집 하나 없는 고운 은수저를 들어 쌀죽을 담았다. 그것을 입에 물자 안에서 굴러다니는 쌀이 사르르 녹았다. 좀 싱거웠지만 오랫동안 먹지 않은 속을 달래기엔 이정도가 딱 적당했다. 희사는 벌써 바닥을 드러내는 죽 그릇을 보며 아쉬움 섞인 표정을 했다. 외려 뭐라도 먹으니 더 배가 고파지는 것이었다. 정말 이상했다. 배고픔이나 고통이 이렇게 사실적으로 느껴지다니. 희사는 문득 어쩌면 이것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현실과 전생의 경계에서 희사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된 기분이었다.
“제가 왜 이렇게 다친 것입니까?”
“공자님, 어찌하여 제게 계속 말을 높이십니까, 듣는 제가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희사는 의원이 전부터 자신과 안면이 있는 것임을 직감했다. 아마도 아버지인 제후의 밑에 둔 사람인 듯했다.
“사실, 기억이 드문드문 납니다. 서현 태자전하도 어머님도 기억하나 의원님이나 그 밖에 다른 이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의원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혹, 충격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으나, 제 스승님께서 기억을 잃은 분들을 몇 번 뵈었다 했습니다. 그 중엔 공자님과 같이 충격으로 몇몇 기억만 잃는 경우도 있고, 머리를 다쳐 아예 모든 기억을 잃는 자들도 있다 했었습니다.”
자신의 경우는 정신적 충격에 의한 기억상실이 아니었기에 문제였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대게 몇몇 기억만 잃었던 자들은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였습니다. 공자님도 그러실 겁니다.”
“혹 어머니나 다른 이들이 걱정할지 모르니 이 사실은 의원님만 알고 계십시오.”
“예, 그리 하겠습니다.”
“헌데, 제 어깨는…….”
“아아, 태자전하와 함께 황제전하의 축일을 구경하셨지요, 불꽃놀이를 보러 유악산으로 간다 하셨는데 늦게까지 돌아오지를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불러 찾으려가려는 찰나 태자전하께서 다친 공자님을 업고 오셨습니다. 부인께서 어찌나 놀라셨는지 그 자리에서 졸도하실 뻔하셨고요. 태자전하를 노린 자객이 휘두른 칼에 공자님께서 베이신 겁니다. 태자 전하의 의복에 공자님의 피가 어찌나 많이 흘러있던지 보는 제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렇군요.”
의원의 말과 그 전 서현의 말을 합해보면, 자신이 서현을 노린 자객에게서 그를 감싸고 다쳤다는 소린데 그럴 리가 없었다. 혹시 희사는 서현이 자신을 벤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도 들었다. 허나 그럴 리는 없었다. 그랬다면 서현이 저리 걱정하진 못했을 것이다. 희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깨지 않는다면 가만히 침상에 누워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리 적극적이게 변했나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라는 기대가 들었다. 만일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전생도 어느 정도는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의원이 먼저 문을 나서고 희사도 그 뒤를 따랐다.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받으시면 몸도 개운해지실 겁니다.”
의원의 말 대로였다. 바람은 햇볕을 머금어 따스했고, 눈앞의 마당은 갓 피어난 형형색색의 꽃들로 화려함을 자랑했다. 의원은 부인이 있는 안채로 이동하고, 희사는 마당의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쓱 둘러보자 사면으로 사방이 쌓아진 높은 담이 보였다. 그 안엔 담과 같은 사면의 모양으로 본채와 사랑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그 네 개의 건물은 가운데의 마당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본채의 크기에 비해 마당의 크기가 한없이 거대했다. 희사는 마당 안의 못과 뜰이 마음에 들었다. 못의 주변에는 종류를 가릴 수 없는 석탑과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었다. 희사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수양버들을 구경하며 못 위의 구름다리를 건넜다. 고개를 올리자 흰 구름이 점점이 수놓아진 하늘이 바로 위에 있었다. 희사는 뜰에 핀 꽃들을 구경하며 알 수 있는 꽃의 이름을 맞추었다. 모란꽃, 양귀비, 천수국. 실상 희사가 알 만한 꽃들보다도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희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가로움 때문인가. 살아오면서 마음 편히 살았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성격이 과거의 일을 쉽사리 털어버리지 못하듯 그 무게에 눌려 살아왔다.
희사가 마당의 공기를 한껏 마신다음 뱉어냈다. 그러자 어깨 위로 낙화하는 꽃잎보다도 가벼운 무게가 내려앉았다. 어느새 안이 비칠 정도의 얇은 비단 겉옷이 희사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희사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서현이 희사를 보며 마당에 핀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게 웃었다.
“아픈데 왜 나와 있어. 아직 바람이 차.”
희사는 대답 없이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서현이 본래 저리도 다정했다면 대체 왜 변했을까. 왜 자신의 모든 일족들을 죽이고 망가뜨렸을까. 만일 자신을 사랑한다 말했던 서현의 마음이, 자신이 해훈을 사랑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마음이었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텐데. 희사는 검고 반투명한 왕나비가 꽃에 앉는 것을 바라봤다. 활짝 폈던 커다란 날개가 꽃술에 앉으며 작게 움츠러들었다. 서현이 황제가 되기 전 자신을 향한 그의 성품은 이렇게도 따스한 봄 햇살 같았단 말인가. 희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희사는 이 세계 어딘가에 해훈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미련하게도 그리고 멍청하게도 자신을 배신한 그가 보고 싶었다. 원망스러우면서도 그가 주었던 거짓 다정함에 눈이 멀어버렸다.
“희사, 네가 변한 것 같아.”
희사는 서현의 풀이 죽은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마음이 약해져서는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그전에는 어땠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무엇이?”
“네가 눈앞에 있는데도, 마치 저 멀리 있는 것만 같이 느껴져.”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희사가 고개를 휙 돌리자 좀 전의 나비가 접었던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랐다. 희사도 서현도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호접몽이란 것을 알아?”
서현이 문득 희사에게 물었다. 장자의 꿈.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대답 하지 않는 희사에게로 서현만이 말을 이었다.
“어느 날 장자가 꿈을 꾸는데 자신이 나비가 된 거야, 헌데 사람인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꾸는지, 아니면 나비가 꿈을 꾸는 것이 장자의 삶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졌대.”
그래, 결국 장자는 나비와 자신사이에는 그 어느 쪽이 현실이든 절대적인 변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둘을 구분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장자가 곧 나비이며, 나비가 곧 장자라고 여겼다. 장자에겐 꿈도 현실도 구별이 없다. 다만, 나비든 장자든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단지 세계만 변화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세계에 있어서 별거 아닌 생물일 뿐이다. 찰나에 지나쳐가는 하찮은 생물.
자신도 전생의 꿈과 현생을 구분하여 살지 못했으나, 장자와 같이 모든 것을 해탈하진 못했다. 오히려 그 꿈에 의해 분노하고 삶을 무너뜨렸다. 희사는 마치 자신이 호접지몽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와선 과연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네가 자고 난 사이에 달라진 것만 같아. 내겐 네가 여전히 예쁘지만 네 눈빛과 입술은 반대로 한없이 차갑기만 해. 어쩌면 너의 그 다정한 모습은 단지 내가 원했던 꿈이고, 지금이 현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어.”
자신이 아름답다라? 서현의 말이 이상했다. 저자는 분명 자신보다 더 아름답다. 그에 곁에 있자면 자신은 외려 볼품없었다.
“내가 서현, 네게 다정했어?”
“한없이. 자객이 내게 칼을 휘두를 때 네가 나를 감싸 안았지. 충분히 혼자서 막을 수 있었음에도 네가 감쌌다는 사실에 가슴에 가득 찬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기분이었어.”
“내가 너를 지키려 했다?”
서현이 이상하다는 듯 희사의 안색을 살폈다. 희사에 입가엔 얕은 비웃음이 맴돌아 있었다.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될 줄 알았지. 2황비의 외가 쪽 사람이니까. 하지만 내가 태자로 책봉되고 나서도 네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뻤어.”
희사는 서현의 입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깨우쳤다. 자신이 황가(皇家)의 친척인 것은 알았으나 황제의 부인중 하나인 2황비의 외가 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2황비는 여전히 나를 죽이고 싶어 하지.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만들려하니까. 내가 태자가 되고나서 너를 찾지 않은 건 두려워서였어. 다시 너를 찾았을 때 전과 다름없이 대하는 너에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를 거야.”
서현이 쑥스럽게 웃으며 희사를 마주했다. 희사는 가슴이 답답했다. 서현의 웃음에는 한 치의 어둠도 담겨있지 않았다. 희사가 다시 구름다리를 건넜다. 서현이 따라오는 것을 알았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늘 현성이 부러웠어.”
서현의 예상치 못한 말에 구름 다리위에선 희사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현성? 현성이라니. 희사는 동생의 이름이 서현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당혹스러웠다. 그럼 전생에서도 현성이란 자가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 어쩌면 이름만 같을 수도 있다. 희사는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현성? 어떤 현성을 말하는 거야.”
“하하. 희사, 네가 그리도 아끼는 동생을 묻다니, 나를 놀리는 거야?”
웃는 서현의 얼굴을 보고도 아무런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무표정한 채로 바라보자 서현이 입을 열었다.
“정말 모르는 거야? 2황비의 아들. 네 사촌이며 배다른 내 동생인 셋째 황자. 그럼에도 지독히도 나와 빼닮았지.”
희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서현과 닮았다는 말에 희사는 뒤통수를 누군가에게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이럴 수가. 단 한 번도 전생에서 현성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아닐지도 몰라. 자신의 동생인 현성이 아니라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인, 서현과 닮고 전생에서만 내 사촌일 뿐인 전혀 다른 현성일지도.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는 것을 알았다. 여태껏 현생에서 봐온 자신과 가까웠던 자들은, 거의가 전생에서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희사는 불어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희사, 왜 그래. 어깨가 또 아픈 거야?”
서현이 희사를 조심히 부축했다. 부서질까봐 두려워하듯이 그 손길엔 안타까움과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희사는 근심이 가득한 서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서현, 내게 이러지 마, 이렇듯 다정하게 하지 마, 너 따위가. 너 따위가! 내게 이러면 안 돼.
희사의 마음을 대변하듯 못 안에 잉어 한 마리가 펄쩍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 시간이 정지되었던 것만 같은 못에 잠깐의 생기가 찾아들었다. 잉어가 일으킨 그 미약한 물결은 곧 다시 사그라졌다. 희사는 꿈이라면 어서 깨었으면 했다. 만약 자신이 정말 호접몽을 경험한 것이라면…….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희사는 구름다리를 건너 안채로 향했다. 뒤돌아보지 않았으나 서현은 여전히 구름다리 위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사는 자신의 몸을 덮은 얇은 홑옷을 다치지 않은 오른손으로 끌어내렸다. 희사가 신을 벗는 찰나 안채의 문을 열렸다. 화려하다 못해 눈이 아플 정도의 붉은색 의복을 입은 여자가 사뿐히 걸어 나왔다. 자신의 어머니였다. 커다란 양귀비꽃 한 송이가 여자의 앞섶에 수놓아진 것을 보자니 새삼 위압감이 들었다. 야하다 싶을 만큼의 짙은 색이었음에도 여자에겐 그저 고풍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희사야, 안 그래도 내가 네게 들르려 했다.”
여자는 안채를 나오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섰다. 희사는 여자가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자, 마저 신을 벗었다. 일자로 길게 빠진 탑(榻)의자 위에는 희사의 몸집보다 큰 호랑이의 가죽이 깔려있었다. 그 위에 앉은 여자는 희사를 마주보는 앞 의자에 앉게 했다. 등받이가 없는 올등의자는 어깨가 아픈 자신에게 딱 좋았다.
“어깨는 좀 어떠하냐.”
여자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차가웠다. 눈을 떴을 때 자신을 걱정하던 목소리도, 방금 전 자신에게 들르려 했다는 그 음성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여자가 나올 때 희사가 느낀 위압감은 이것이었나. 희사는 현생과는 다르게, 전생에서 아주 어렸을 적 자신의 어머니는 다정한 여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서현이 말하는 자신도 그렇고 눈앞의 여자도 그렇고, 언제 어느 순간 이렇듯 변해버린 것일까. 여자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희사는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 여자의 눈썹 한쪽이 신경질적으로 치켜 올라갔다.
“네가 다쳐버리는 바람에 태자가 황궁으로 돌아가는 시기가 늦어졌지 않느냐.”
여자는 희사를 질타했다. 희사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를 하지 못하였기에, 여자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줘야할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허나, 이로써 널 더욱 믿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자가 너를 믿어야 앞으로의 일이 쉬워질 것이 아니냐.”
“태자가 왜 저를 믿어야 일이 쉬워진다는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희사가 진정 몰라 하자, 여자는 눈을 가늘게 떠 희사를 쳐다봤다. 탐색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깨를 다친 게 아니라 머리를 다친 게로군.”
다 알면서 희사가 능청을 떤다고 생각했는지 여자가 비웃으며 희사를 냉대했다.
“네가 본래 영악한 것은 알았으나 이번 일은 더더욱 잘해준 일일지도 모르겠다. 혹여 다른 꿍꿍이가 있어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여자는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희사의 전신을 훑었다. 희사에게서 대답을 얻어낼 때까지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희사는 그저 여자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야 여자에게서 더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의원을 앞에서 다짐했듯 계속 이대로라면 최대한 빠르게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현명했다. 희사는 호랑이의 가죽을 쓰다듬는 여자의 긴 손톱을 봤다. 마치 먹잇감을 향해 손톱을 세우는 여우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네가 다치는 것이 외려 전화위복이었다. 태자가 황궁에 돌아가지 않아 황제폐하께서 더 성이 나셨으니 말이다. 나라의 태자라는 자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다니. 쯧쯧. 진정 우리 현성 황자님이야 말로 태자의 자리에 어울리시는 분이시다.”
여자는 태자를 나무라면서도 입가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희사는 천천히 여자의 말들을 종합해보았다. 아마도 서현이 태자가 된 것을 자신의 집안에선 탐탁지 않아 했고, 계략들을 꾸며 서현을 태자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라고 곧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황손들의 황권 다툼은 아주 오래전부터 행해왔던 비공식적인 관례라면 관례였다. 허나, 결국 서현이 황제가 된다는 사실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는 그것도 과연 정말일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이젠 어느 것이 정답인지, 진정 자신이 봐왔던 전생이 사실인지도 불명확해졌다. 말도 안 되지만 지금은 단지 자신이 전생 속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밖에는 안 들었다.
“네가 부린 자객의 정리는 확실하게 해두었겠지?”
희사는 여자의 뜬금없는 말에 생각을 멈췄다.
“부린 자객이라니요.”
“쯧쯧, 왜 이리 멍청하게 구는 게냐, 희사 네가 아닌 것만 같구나. 눈빛도 아주 멍청하기 그지없어.”
희사는 혹 여자가 말하는 자가 서현과 자신을 공격한 자객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객을 왜 자신이 부렸단 말인가. 서현의 말로는 2황비의 첩자 같다 했다.
“시체는 가족에게 돌려보내지 말거라. 뭐 네가 알아서 했겠지만. 일단 네 어깨가 나을 때까지 태자를 이곳에 묶어두는 것이 좋겠다.”
희사가 연방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응대하자 여자가 혀를 찼다.
“현성 황자님이 태자가 되시는 것도 멀지 않았다. 그래야 우리 상공님도 그럼 이런 시골구석이 아닌 황궁으로 금의환향 할 것이 아니냐.”
희사의 아버지인 유악의 제후는 황족의 핏줄이었다. 현 황제가 즉위하기 전 황권다툼에 밀려 유악까지 쫓겨나게 되었다. 제후는 원래 권력에 큰 욕심이 없었으나, 핏줄과 관련하여 권력암투에 개의치 않게 연관되어 좌천된 것이다. 제후는 유악산과 순박한 자신의 백성들을 좋아했고, 정무를 보는 것보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을 즐겼다. 부인은 그것이 늘 못마땅하였다. 그녀는 호시탐탐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여자에게 제 3황자이며 외종질인 현성은 한줄기 빛이며 희망이었다.
희사는 그것보다 자신이 자객의 부렸다는 여자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여자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건대 마치, 서현을 끌어내리는데 자신도 꽤 깊이 가담했다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자신이 미래를 기억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현에게 복수하려 했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자객에게 어깨를 다치기 전의 희사는 아무런 미래를 알지 못하는 진정한 전생의 자신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서현을 죽이려 했을까. 자신이 여자에게 가담해 현성을 황위에 올려놓으려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희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여자와 희사는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마주보았으나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행여 상처가 깊어지면 큰일이니.”
여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희사는 그것이 순수하게 자신의 몸을 챙겨주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여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에 있어서 자신이 거치적거릴까봐 우려하는 것이다. 희사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분명 권력에 눈이 멀어 변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희사는 부모의 사랑을 원하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서운한 마음이 적지 아니 들었다. 그래도 마음 두지 않았다. 다만 여자에게 연민이 들었다. 그렇게 아끼는 현성을 왜 현세에서는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물음에 희사는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머리가 아프기 때문인지 어깨의 상처 때문인지 열이나 볼이 화끈거렸다. 희사는 안채를 나서며 시중에게 의원을 자신의 방에 들게 하라 일렀다. 열 때문에 부른 것은 아니다. 이 정도 열은 자고나면 그만이니. 거짓으로나마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의원에게만 물어볼 것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들어오십시오.”
문 밖에서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사는 의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보다 나이가 더 많은 자임을 짐작했다.
“이곳엔 얼마나 계셨습니까?”
희사에 앞에 자리를 잡은 의원에게 앞뒷말 없이 바로 말을 건넸다.
“제후님의 밑이라 하면 아마 제후님께서 공자님 나이였을 적부터지요. 그러고 보니 벌써 수십 년이 훌쩍 흘렀습니다.”
노인은 마치 옛날의 제후를 떠올리듯 자신을 보고 웃었다.
“혹, 태자 전하와 제가 막역한 사이였습니까?”
“예, 그럼요. 제가 보기엔 그러하였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황태자로 책봉되시고 나서부턴 이곳에 발길이 뜸해지셨지만 어렸을 적에는 항상 그 먼 길을 한달음에 오시곤 하셨죠. 황후마마께서 서신을 보내시며 늘 걱정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허허. 공자님께서는 셋째 황자님과도 사이가 좋으셨습니다. 원체도 공자님께선 셋째 황자님을 유독 예뻐하셨고요.”
의원은 희사의 상태를 잘 알기에 아무 의심 없이 곧바로 대답해주었다. 의원이 말하는 셋째 황자는 현성인듯했다.
“헌데 태자 전하께서 다시 이곳을 자주 찾으시고부터 셋째 황자님께서 오시는 일이 뜸해지셨습니다. 전에는 태자 전하와 셋째 황자님도 우애가 그리 좋으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차가워지셨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이번처럼 목숨의 위협을 느끼신 일이 몇 차례 있으셨는데, 그 때마다 셋째 황자님의 어머니이신 2황비님이 의심받으셨죠. 어이쿠, 방금 말은 잊어주십시오. 늙은이의 뜻 없는 헛소리였습니다.”
의원이 말실수를 했다는 듯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의원은 자신의 어머니까지 합세해 서현을 없애려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듯했다. 혹 말하는 도중에 알고 있다는 낌새를 보이면 바로 물어보려 했으나, 의원은 그저 다른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까지만 아는 듯했다.
황제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황자가 태자로 책봉된 서현이었고, 둘째 황자는 알려진 이름이 없다. 둘째 황자에겐 정신의 병이 있었다. 황가에선 쉬쉬하지만 둘째 황자는 어린 아이의 지능을 가진 채로 성장했다는 것이 이미 귀족들에게 있어선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둘째 황자는 다섯 살 때를 제외하곤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항간에 의하면 둘째 황자가 아파서 죽었거나, 황가의 수치라 여겨 서궁(西宮)의 깊은 곳에 가두고 유모와 그의 어미만이 드나든다 하였다. 그러니 자신의 어머니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은 서현만 아니었다면 현성이 바로 황태자로 책봉되었을 터였다. 서현만 사라지면 둘째 황자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희사는 의원을 내보낸 뒤 생각에 잠겼다. 만일 여자의 말대로 정말 자신이 자객을 부린 것이라면…….
그렇다면 왜 서현 대신 칼을 맞았을까. 희사는 과거의 자신이 행했던 일임에도 알지 못하는 이 상황이 매우 답답했다. 희사는 혹시 자신의 방에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을까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왼쪽의 기다란 책장을 보니 색이 바랜 책자들만이 가득했다. 희사는 손가락으로 책들을 주욱 훑었다. 3단으로 놓인 책장을 전부 확인했지만 딱히 특별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희사는 시선을 장으로 옮겼다. 낮은 장과 높은 장이 나란히 있었는데 그중 허리쯤 오는 낮은 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희사는 몸을 바닥에 최대한 닿게 만들었다. 장을 지탱하는 네 개의 다리 밑을 들여다보자 유독 어둡게 그늘진 곳이 있었다. 그 공간은 약 한 뼘이 조금 넘어 보였다. 그 안으로 성한 오른팔을 넣어 보았다.
성한 어깨가 깊숙이 들어가고 나서야 딱딱한 궤(櫃)하나가 만져졌다. 희사는 오른손에 힘을 주어 그것을 끄집어냈다. 장의 밑에 숨겨져 있었음에도 먼지 한 톨 쌓여있지 않았다. 그것은 의복 한 벌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조그만 궤였다. 궤는 잉어모양의 구리 장식이 자물쇠 역할을 해 경첩이 열리지 않도록 잠겨있었다. 잉어의 꼬리부터 아가미까지 긴 열쇠를 찔러 넣어야 자물쇠가 분리가 되는 형식이었다. 희사는 이번엔 큰 장의 밑으로 손을 넣었다. 몇 번 뒤적이자 차가운 구리 열쇠가 손에 잡혔다. 그것을 단박에 꺼내들어 자물쇠를 분리시켰다.
궤를 열자 그 안에는 수십 장에 달하는 서찰과 자신의 글씨체로 보이는 종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무늬가 새겨진 인장이 있었다. 희사는 서찰과 인장을 꺼내들었다. 서찰부터 몇 장을 순서에 상관없이 읽어 내려갔다. 곧 내용을 확인한 희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열이 나 발갛게 익은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서찰의 대부분은 현성과 그의 어머니인 2황비가 보낸 것이었다. 희사는 남은 서찰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서찰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용인즉슨 사신이 황제에게 죽음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그 안에 서현을 없어야 한다는 글들이었다. 서찰을 읽은 순간 희사는 자신이 서현을 암살하려 하는데 깊이 가담한 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역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 당시만 해도 자신이 서현을 증오할 일은 없었다.
서현은 저렇듯 다정하기만 한데……. 혹 자신도 현성을 태자로 책봉시키고 싶어 한 것인가? 어머니와 같이 권력에 욕심을 부렸단 말인가? 자신이 그랬을 리가 만무하나 절대 아니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이미 확신했던 사실들이 진실이 아닌 것임을 깨닫는 경우는 수다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문이 서현을 죽이려 반역을 꾀한 것은 사실이었다. 누명을 쓰고 참수당한 것이 아니다. 희사는 자신이 알고 있던 전생과는 다른 현실에 기가 찼다. 대체, 대체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무엇이란 말이지?
희사는 미닫이문 앞으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둘러 궤안으로 서찰을 밀어 넣었다. 어깨가 다친 것도 잊고 급하게 행동했는지 악소리가 날정도의 큰 고통이 따랐다. 희사는 함을 닫고 잠그는 것은 하지 못한 채 장의 밑 공간으로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문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서현이 장 앞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있는 희사에게 다가왔다.
“왜 이리 놀라?”
“아무것도.”
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현의 수발을 드는 시동은 다른 곳에 두고 왔는지, 아무 소식도 없이 방안으로 들어서는 서현에 의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희사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장 앞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이었다. 희사의 긴 의복을 타고 무언가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타닥. 그것이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희사의 심장은 그것보다 더 큰 소리로 뛰기 시작했다. 혹, 서찰을 제대로 집어넣지 않은 것인가 싶어 급히 바닥을 내려 봤다. 떨어진 것은 좀 전에 꺼냈던 인장이었다. 크기가 엄지손가락보다도 작아 마구잡이로 집어넣다 옷 사이에 떨어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희사가 급히 허리를 굽히자 서현이 붙잡았다.
“괜히 무리 하지 마. 그러다 어깨 덧나겠다.”
서현이 희사 대신 발밑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희사는 굳은 채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 인장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서찰과 같이 들어있었기에 서현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희사가 급히 뺏어 들려하다 곧 행동을 멈췄다. 오히려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보다 그가 자연스럽게 주워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서현은 인장에 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희사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희사가 내민 손앞에서 갑작스레 서현이 다시 인장을 자신의 쪽으로 향하게 했다.
“이리 줘.”
“뭔데 표정이 그래?”
서현이 인장의 밑을 그의 얼굴로 향하게 했다.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무늬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네 이름도 아니잖아. 그냥 이상한 무늬인데. 호랑이 같기도 하고. 개 같기도 하고. 하하.”
서현이 제대로 봤다. 새겨진 문양은 아주 작으나 사신(四神)중 하나인 백호였다. 희사는 서현의 안색을 살폈다. 좀 전과 딱히 다른 점은 찾지 못했다. 희사는 이 인장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더욱 걱정했던 것이다.
“집에만 있지 말고, 오늘 장이 들어선다는데 같이 나갈까?”
“가고 싶지 않아.”
서현이 희사의 손 위에 인장을 건네주었다. 그 상태로 서현이 갑자기 희사의 오른손을 꽈악 쥐었다. 인장이 손안에서 눌려지면서 손바닥이 아렸다. 희사가 인상을 쓰고 서현을 올려봤다.
“아파.”
“아, 미안.”
서현이 놀라며 손을 뗐다. 잠시지만 인장에 눌린 손바닥은 핏기가 사라져있었다.
“내 손과는 달라서. 어찌 이리 작지?”
서현이 신기하다는 듯 자신의 큰 손을 쫙 폈다. 희사는 어서 서현을 이 방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정말 장에 안갈 거야? 오늘은 태상인이 저번에 네가 사고 싶다던 도자기를 들여왔을 텐데.”
“그래? 잘되었네. 그럼 가야지.”
희사는 도자기든 뭐든 관심 없었으나 서현을 방밖으로 쫒기 위해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인장을 장위에 올려놓고 겉옷을 입었다. 팔에 끼워 넣을 수가 없기에 그저 어깨 위로 살포시 걸친 것으로만 만족했다. 서현이 먼저 문을 열었다.
“황궁으로 붙일 서찰도 있으니 사황과 먼저 가 있을게. 희사도 천천히 오도록 해.”
희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황은 서현이 데려온 종으로 불혹은 훌쩍 넘어 보이는 자였다. 몇 번 보지 못했으나 사람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속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희사는 다시 궤를 꺼내 정리한 다음 숨길까하다 곧 그만두었다. 또 불시에 서현이 들어 닥칠지 모른다.
희사는 방을 나서서 장이 서는 유성주로 향했다. 희사는 꿈이 아닌 현실 같은 이곳에서 장터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가슴이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유곽에 있을 때는 분명 자유로워진다면 상인이 되고 싶다했었다. 희사는 하늘을 올려봤다. 아직 해가 질려면 한참이었다. 서현은 먼저 마차를 타고 출발했는지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희사는 모든 생각을 접고 곧 집을 나섰다. 마차를 끄는 하인이 타고 가라 종용했으나 흔들리는 마차보단 걷는 것이 어깨에는 더 무리가 없을 듯했다.
희사는 유성주로 향하는 도중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장이 섰다면 주변이 이렇게 한가할 리가 없었다.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유성주로 향하는 길이 바글바글해야하는데 거의 도착할 때까지 마주친 사람이라곤 열댓도 되지 않는다. 희사의 마음에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희사는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다친 어깨 덕에 뛰지는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을 뿐이었다.
희사는 제후의 저택인 높은 담이 둘러진 사면을 돌아 중앙의 문에 도달했다. 문을 열자 집안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희사는 아름다운 정원은 관심도 두지 않고 구름다리를 건넜다. 왼편에 위치한 자신의 방을 향해 급하게 걸었다. 숨이 턱턱 막혔지만 불안함은 자신의 방에 도달할 때까지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희사는 정원의 끝에 위치한 누각을 지나치다 앉아있는 한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무얼 그리 빨리 걸어. 두고 간 것이라도 있어?”
“장이 서지 않았지?”
“그래.”
서현이 전과 다름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희사는 서현의 옆 자리에 매 한 마리가 내려앉아있는 것을 그제야 보았다. 매의 발목에는 하얀 종이를 감은 작은 서신이 묶여있었다. 매는 인간에게 완벽하게 훈련이 되었는지 도망갈 생각도 공격할 생각도 없이 서현의 옆을 지켰다.
“태상인이란 자를 알아?”
서현의 뜬금없는 말에 희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태상인이라면 좀 전에 자신의 방에서 서현이 말했던, 도자기를 들여왔다는 자가 아니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자기 상인을 내게 왜 물어.”
서현은 희사의 대답에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앉은 매가 푸드득 거리며 낮게 날아올랐다 다시 내려앉았다. 자신만큼이나 매도 놀란 듯 했다.
“네가 언제부터 도자기를 좋아했지? 넌 내게 한 번도 도자기를 가지고 싶다 말한 적이 없다. 게다가 태상인이란 자는 나도, 그리고 너도 모르는 자이지.”
희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중이었다. 혹시 서현이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참 신기하지. 그 동안 예상만 했지 아닐 거라 생각했거든. 그만큼 네가 영악했고. 네 눈빛과 나긋한 몸에 그대로 빠져들 뻔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멍청해진 거지? 혹시 바보가 된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만큼 우스워 보였나? 아니면……. 의원의 말대로 기억을 잃은 것이 정말인가.”
희사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현을 봤다. 서현의 매가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서현이 손짓하자 몇 개의 깃털을 바닥으로 낙하시키며 하늘 높이 올랐다. 매는 희사와 서현의 위를 두어 차례 맴돌더니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오직 의원만이 알았다. 그것을 의원이 서현에게 말했다면, 의원 역시 자신에게 거짓을 고했다는 말이다. 그 의원은 자신의 아버지인 제후의 밑에 있던 자가 아니라, 서현의 밑에 있는 자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 것도 모르고 자신이 실수한 것이다. 희사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졌다.
“정말 대단해."
웃으며 말하는 서현의 눈에서 괴로움이 비쳐졌다. 희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나를 배신할지 모른다고 머릿속에선 외쳤으나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했지. 결국 이리되었지만 말이야. 희사, 백호의 문양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멍한 희사의 정신을 깨우듯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날아오르는 승천용을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은 날카로운 백호의 이빨뿐이지.”
희사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 인장은 반역을 꾀하는 자들의 증표였던 것이다.
“나는 안 돼?”
서현이 천천히 일어나 희사에게 다가왔다. 희사는 어두운 그늘이 자신의 이마부터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더 다가온다면 발치까지 잠식한 어둠이 자신을 좀먹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굴이라면, 현성과 내가 다를 게 뭐야, 그런데도 왜 넌 현성만을 아끼는 것이지?”
“무슨 소리야.”
“네가 현성과 막역한 사이란 것을 모를 거라 생각한 건가? 어쩌면 서로가 연정을 통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내가. 네겐 진심으로 우스워보였나 보군.”
희사는 자신을 먹어치운 그림자 속에서 밭은 숨을 삼켰다.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햇빛을 등진 그의 표정은 하나도 읽히지 않았다. 희사는 물속같이 멍멍한 세계에서 서현의 그 한마디 말만이 계속 반복됐다.
어쩌면 서로가 연정을 통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지.
서현의 가슴이 희사의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그것은 자신의 몸이 휘청한 것인지 그의 몸이 떠는 것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말해봐, 희사.”
“무엇을…….”
“내게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 것인지. 내가 만일 태자의 자리에서 내려왔다면. 현성에게 내 자리를 주었다면 과연 나를 사랑했을지.”
서현의 목소리는 마치 비를 잔뜩 머금은 축축한 늪 같았다. 희사는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현재가 어쨌든 전생의 자신은 서현을 배신하고 그의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서현이 대답 없는 희사의 양 어깨를 부여잡았다.
“아악!”
쥐어진 압력에 간신히 아물었던 상처가 벌어졌다. 희사가 고통에 소리치자 서현이 비웃었다.
“아파? 이정도가 아프단 말이야? 나는, 나는!”
서현이 희사의 몸을 흔들었다. 희사의 몸은 다해져버린 헝겊인형처럼 힘이 없었다. 연달아 찾아오는 어깨의 고통은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파랗게 얼굴이 질린 희사가 서현을 올려봤다. 여전히 서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지, 자신을 비웃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답해. 그럼 나를 사랑할 수 있었는지.”
서현은 진이 다 빠져 마지막 말을 남기는 사람처럼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를 내뱉었다. 희사는 그저 눈을 감았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단 한 개도 떠오르지 않았다. 서현은 그것을 보더니 희사의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희사의 어깨를 감싼 흰 천은 이미 짙고 깊은 붉은 무늬를 수놓았다.
“그래, 그렇게 답하지 않아도 좋아.”
서현이 이를 갈며 뒤를 돌았다. 희사는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집안이 이토록 조용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안에는 서현과 자신 밖에 없었다는 것. 희사의 정수리 위로 여러 무리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들은 희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천으로 몸을 두른 자들이었다. 그들에겐 여전히 희사의 어깨를 적시고 있는 붉은 피 따윈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희사는 저항해봐야 허사인 것을 알기에 그들이 끌고 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중앙에 위치한 대문을 나서서 자신이 들어온 곳의 반대로 이동하자 대여섯 개의 마차가 세워진 것이 보였다. 수십 마리에 달하는 말들은 푸륵거리는 특유의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마치 서현이 부리던 매와 같은 느낌이 났다. 그들은 희사를 가장 뒤쪽에 위치한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차는 마차였으되 사방이 막혀있었다. 이 마차는 귀족들이 이동하기 편하게 내부를 꾸며놓은 것이 아니었다. 죄수를 호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옥마차. 옥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사방을 막아놓은 나무의 너비는 더 촘촘했다. 그 틈은 어린아이 주먹하나도 채 들어가지 못할 성 싶었다. 희사는 먼저 수송 마차 안에 타있는 자를 봤다. 깨진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앉아있는 자. 바로 제후였다.
희사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제후는 머리를 크게 맞았는지 작게 뜬 눈의 초점이 흐릿했다. 희사가 남자를 감싸 안았다. 어깨의 통증은 고통스러웠으나 그러한 자신보다도 아버지가 더 걱정됐다. 불쌍한 사람. 여전히 불쌍한 내 아버지. 희사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저 아름다운 유악산 밑에서 평화로운 삶만을 꿈꿨던 남자다. 검은 의복을 입은 자들이 희사와 제후가 타 있는 마차를 커다란 검은 천으로 온통 에워쌌다. 곧 마차 안은 한줄기 빛도 통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희사는 이제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귀를 세워 밖의 말을 엿들으려 했으나 쥐 한 마리 다니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 검은 의복을 입은 자들은 마치 벙어리와 같이 말이 없었다. 기척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마차가 마구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희사는 자신의 품안에서 연신 끙끙거리는 제후를 마차의 모서리에 기대게 했다. 어느 쪽으로 달리고 있는지 분간을 하지 못할 정도로 사위가 어두웠다. 희사는 어깨의 천을 매만져보았다. 동여맨 부분이 조금 느슨해져 출혈을 더 돕고 있었다. 희사는 그것을 이와 오른팔을 이용해 다시 단단히 동여맸다. 꽉 조이자 딱 한번 커다란 고통이 엄습하더니 곧 둔한 통증만이 반복적으로 찾아왔다.
“…희사, 희사냐?”
탁한 목소리가 제후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정신이 들었는지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더듬는 것 같았다.
“예, 아버지.”
의도치 않게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에 대한 연민이 희사의 가슴한구석을 메웠다. 전생의 자신이 왜 서현을 배반했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모든 일의 원흉은 곧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됐다.
“미안하구나.”
희사는 이내 메말랐던 눈물이 왈칵 번져 나왔다. 당신이 미안할 것은 하나도 없다.
“못난 아비를 둔 덕에.”
“아니, 아닙니다. 그러니 그리 말하지 마세요.”
울먹이는 아들의 소리에 제후도 흐느끼기 시작했다. 잡혀가는 이들은 어떻게든 죽을 것이 자명했다. 제후는 부인과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반역에 가담한 사실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자신으로선 막을 수 없으니 말을 하지 않은 것이고, 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무능력한 지방의 제후이니 또한 막지 못한 것이다.
“네 어미가 그리 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니 다 아비인 내 탓이 아니더냐.”
제후는 엉망이 된 채 흐느꼈다. 자신이 죽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어린 아들이 제 명도 다 살아보지 못하고 생을 뜨게 될 것이 애석할 뿐이다. 그것이 자신의 무능력함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불쌍한 내 새끼. 우리 아들.”
희사는 흐느끼는 남자에게 모든 사실을 고하고 싶었다. 자신은 후생에서 왔으며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도 내 어머니와 식솔들이 어떻게 세상을 떠날지도 전부 알고 있다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희사는 입을 다물었다. 하나라도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면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섣불리 제후에게 말을 꺼내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보다 혼자 짊어지고 가는 것이 나았다. 희사는 그러려면 이곳의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어야 했다. 자신은 정작 반역을 도왔다는 이곳의 현성에 대해서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현성의 어미인 2황비가 누군지도 말이다. 희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앞뒤를 전부 짜맞춰보면 깨진 도자기도 다시 붙일 수 있기 마련이다. 희사는 눈물을 거두고 바닥을 더듬어 제후의 거친 손을 찾았다. 그것을 맞잡은 채로 희사가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에 전부, 아시는 대로 답해주셔야 합니다.”
제후는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지 모르기에 희사의 말에 경청했다.
“제가 언제부터 현성의 편에 서서 태자를 암살하려했습니까? 혹 제가 서현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한 것은 아닙니까?”
제후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분명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황궁에 당도할 때까지 한참이나 남았다. 황궁에서 유악산까지 오는데 만해도 말을 타곤 사나흘이, 걸어서는 반달이 좀 안되게 걸린다.
희사는 기억을 잃었다고 의원에게 말했던 것과 같이 제후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제후는 그 말에 더욱 흐느낌을 참지 못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죽임을 당하게 됐으니 그것보다 더 최악인 상황이 어디 있나 싶은 것이다.
“태자전하와 넌 사이가 각별했지. 물론 태자전하께서도 너를 아꼈다. 그 분께서 네게 나쁜 짓을 할 것이라곤 주변인들이라면 절대 상상도 못할 일일 테지. 물론 현성황자께서도 너를 잘 따랐고, 너도 그분을 예뻐했다. 사촌지간이니 당연하겠지만서도 말이다.”
“헌데 왜.”
제후는 바로 말하지 못하고 조금의 뜸을 들였다. 그래봐야 소용없는 것을 알고 입을 열었다.
“네 어미가 욕심이 낫던 게지. 아무리 네가 태자전하의 총애를 받는다한들 그분이 황제가 되신다면, 우리가 황궁으로 들어갈 기회는 영영 없어질 테니 말이다. 허지만 현성황자가 황제가 되신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우리는 그분의 외척이 아니더냐.”
희사는 제후의 목소리에 그녀를 말리지 못한 죄의 무게가 실려 있다고 느꼈다. 희사는 감정적인 생각은 저 한편으로 치워두고 진정 자신이 궁금해 하는 것을 물었다.
“저도 황궁으로 가고 싶어 한 것입니까?”
제후는 희사가 돌려 말한 것임을 금세 이해했다. 즉 부인처럼 권력에 욕심이 있었느냐는 물음이었다. 제후는 보이지 않는 아들의 얼굴을 손으로나마 더듬었다. 겉으로 보이는 성품은 자신을 닮아 유약하나, 실상은 자신보다도 곧은 마음을 가졌다.
“넌 네 어미가 변하는 것을 참지 못했을 테지.”
희사는 남자가 한숨을 고를 동안, 마차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소싯적, 네게 어미는 한없이 다정했었지. 서현과 현성이 너를 아끼는 것도 처음엔 큰 은총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이 변하는 것이 한순간이 아니더냐. 2황비가 네 어미를 꼬여냈다 한들. 그게 황비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제후는 모든 존칭을 생략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제후에게 있어서 서현도 현성도 그리고 희사도 모두 자신의 자식과도 같았다.
“너도 처음엔 네 어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간은 방에 박혀서 나오지도 않았지.”
서현이 태자로 책봉되고 나서 여자의 조급함은 극에 달했다. 원래 2황비와 여자의 목표는, 서현이 태자가 되기 전 암살을 성공한 뒤 현성을 태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정신의 병이 있는 둘째 황자는 아예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살아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니. 희사는 머릿속에서 의문으로 남았던 것들을 제후의 말을 통해 천천히 짜 맞추어 넣었다.
“그렇게 네 어미가 변하는 것을 너는 받아들이기 힘겨워했다. 전처럼 그녀의 사랑을 받으려면 그녀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지. 내가 진정 어리석었다. 한없이 멍청했지. 백구름과도 같은 널, 네 어미가 더럽히는 것을 막지 못했다. 어린 네가 어미의 정을 원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도 보지 못한 척하였다.”
제후는 그 말을 마치고 마치 아이처럼 울었다. 자신은 어미 때문에 서현이 태자로 책봉된 이후, 그를 끌어내리려 했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그 음모에 가담한 이유를 서현은 자신이 현성을 사랑했기 때문이라 했고, 제후는 어미에게 미움 받지 않기 위해 그녀의 뜻을 따른 것이라 했다. 전자는 이해할 수 없다 치더라도 후자는 불과 지학을 넘기지 못한 아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지금은 어미의 사랑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나 전생의 어렸던 자신은 사라진 모정에 대해 두려워했을 것이다. 또 맹목적인 사랑을 주던 여자가 변하는 것에 괴로워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그녀의 말을 따른 것이다. 역시 자신과 현성이 연을 통하던 관계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전생에 현성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이번을 통해 알았다. 해훈을 향했던 마음은 뼈저리게 느껴졌으나 현성에 대한 것은 단 하나도 알아채지 못했었다. 아니, 그래도 어떠한 가능성이라도 배제해 둘 순 없다. 양파껍질같이 까면 깔수록 궁금한 것들이 더욱 늘었다. 제후는 흐느끼느라 기운을 다 뺏는지 곧 조용히 잠이 들었다.
희사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온몸이 무겁고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차는 새벽시간을 제외하곤 끊임없이 달렸다. 검은 천으로 가려져 밖이 보이지 않는 희사는 체감 온도를 통해서만 낮과 밤을 예측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벌써 여기저기가 멍도 들었다. 희사는 며칠인지도 모를 시간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그것은 제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젊었으나 제후는 그렇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제후는 잠만 자기를 반복했다.
희사는 그런 그가 미치도록 걱정됐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때 무기력하게 마차의 덜컹거림을 따라 흔들리던 희사는 귀를 바짝 세웠다. 쏴아아 하는 시원한 물줄기가 지면을 만나 환호성을 지르며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멍해지던 정신을 일깨웠다. 비다. 비가 내리고 있다.
희사는 제후에게 한 모금의 빗물이라도 먹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몸이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희사는 새까만 어둠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곧 기가 빠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검은 천으로 감싼 옥사와 같은 마차는 빛뿐만 아니라 빗물 역시 차단시켰다. 천이 빗물을 전부 흡수하는지, 낙숫물처럼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만 얼굴을 적실뿐이었다. 희사가 제후를 불렀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는 꽤 오랜 시간동안 쏟아졌다. 그것이 더욱 괴롭게 했다. 배고픔은 참을 수 있으나 목마름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희사는 손을 내밀어 천을 걷어보려 했다. 촘촘한 나무의 너비는 세 손가락이 간신히 나갈 틈 밖에 안 되기에 곧 포기해야했다. 희사는 마차에 등을 대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목이 타들어갔다. 눈앞의 진수성찬을 놔두고 투명한 막에 가려져 먹지 못하는 상황과 다를 바가 없었다.
희사도 제후에게 더는 걱정의 말을 건네지 못할 때쯤, 검은 천이 휙하며 걷어졌다. 갑자기 내리쬐는 햇빛에 희사는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눈알이 빠질 것만 같이 고통스러웠다. 검은 의복들이 나무 자물쇠를 풀어 제후와 희사를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희사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으려 했지만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것은 무리였다. 제후가 제 다리로 서지 못하자 검은 의복을 입은 자들이 그를 질질 끌고 갔다. 희사는 바닥에 내려섰는데도 아직 마차 안에 있는 것처럼 몸이 흔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희사가 디디는 바닥마다 그 밑에서 지진이 일었다. 희사는 이를 악물고 걸었다.
검은 의복 두 명이 희사를 황궁 안으로 이끌었다. 제후가 간 곳과 같은 방향이 아니었다. 희사는 눈을 최대한 가늘게 떠 제후가 가는 방향을 봤다. 황궁의 지리에 대해선 전혀 무지한 자신이라 눈여겨본다고 해도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희사는 눈을 감았다. 황궁 안은 마차가 흔들리는 소리보다 더 시끄러웠다. 반역이니, 모함을 했다느니 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희사가 걷는 곳마다 들려왔다.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이 서서히 줄어들자 검은 의복들은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긴 복도 끝, 마지막 방의 문을 열더니 희사를 밀어 넣었다. 그 반동에 희사의 몸이 데굴데굴 굴렀다. 희사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감싸 쥐었다. 재빠르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걸렸다.
희사는 눈을 깜빡이며 빛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햇빛이 그대로 쏘아 비치는 밖이 아니라서 그런지 좀 전보다는 눈뜨기가 수월했다. 희사는 자신이 앉아있는 곳을 내려 봤다. 폭신한 양털의 융단이 깔려있었다. 신기하게도 양털 융단의 색은 다홍색을 띄고 있었다. 양의 털은 누런색이건만 꽃잎을 우려내 염색을 한 것인가 싶었다. 희사는 아래서부터 위로 방을 훑었다. 가구와 장식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가히 그 수가 많다싶을 정도로 배치되어 있었으나, 방에선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온통 다홍을 뒤집어 쓴 것만 같다. 마치 새색시를 위해 준비해 놓은 신혼방처럼. 희사는 옥사도 아닌 이런 화려한 곳으로 자신을 가둬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희사는 목구멍까지 바짝 말라붙은 상태에서 방안 어딘가에 있을 물을 찾았다.
자신의 예상과 같이 생활감이 전혀 없는 방은, 꾸며놓은 것 외에는 사람에게 기본적이게 필요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희사는 문을 향해 이동했다. 황궁의 문은 제후의 집처럼 미닫이문이 아닌 여닫이로 만들어져있었다. 그것은 선대황제가 암살당할 뻔했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미닫이문은 본래부터 외관용을 우선시하여 만들었기에 문으로서의 기능은 매우 약하다. 아직 황궁의 모든 문이 미닫이문이였을 당시, 수십 명의 뛰어난 자객이 침입하여 선대 황제의 침상을 지키는 병사와 신하들을 제거했다. 선대 황제는 자객이 공격하는 것을 피해 여러 방을 전전했다. 황궁의 문들은 여는 데만도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문의 튼튼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선대 황제는 요행이도 자객의 공격에서 살아남자마자 황궁의 모든 문을 여닫이로 바꾸었다. 두꺼운 나무를 사용해 안이 비치지 않는 창을 내고, 충격에 약한 한지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궁의 내부는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나 전보다 딱딱해진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선대 황제는 결국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폐쇄적인 공간일수록 자객들이 들기는 더욱 쉬운 법이며, 문이 두꺼워질수록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희사는 선대 황제의 이야기를 해준 것이 누군지 알았다. 태자가 되기 전의 서현이었다. 그는 선대 황제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것이라며 애석해했다. 희사는 오른손을 펴서 문을 밀어보았다. 역시. 꼼짝도 하지 않는다. 희사가 멀쩡한 어깨에 힘을 주어 뒤에서부터 앞으로 몸에 힘을 실어 문에 콱 부딪쳤다. 쿵하고 낮은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이번엔 좀 더 뒤로 물렀다가 문을 향해 어깨를 날렸다. 그 순간 자물쇠가 풀리며 문이 활짝 열렸다. 희사는 그대로 튀어나가 문 앞의 사람에게 폭 안겼다. 희사는 황급히 몸을 떼어내려 시도했다. 희사를 품은 자가 그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희사는 다리가 공중에 뜨는 바람에 남자의 품안에서 버둥거렸다.
“가만히 있어.”
서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희사를 침상위에 내던졌다. 희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물이 확 끼얹어진 것 같았다. 서현의 오른손에는 작은 주전자가 들려있었다. 희사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서현이 주전자의 물을 그의 입에 담았다. 침대에 널브러져있는 희사에게 몸을 숙이곤 희사의 머리채를 잡았다. 빗질을 하지 못해 엉망이 된 희사의 머리가 더 헝클어졌다. 희사의 얼굴을 고정시켜놓고 서현이 입술을 맞댔다. 그의 입술은 뜨거웠으나 주변에 묻은 물은 차가웠다. 희사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피하려 하자 서현은 머리채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희사는 머리가 한 움큼 뽑혀져 나갈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앙다문 희사의 아랫입술을 서현이 깨물었다. 그의 입에 담겨있던 물이 희사의 턱 주변으로 전부 쏟아졌다.
희사는 목을 축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싫었다. 서현이 희사의 머리채를 잡은 채로 들어 올리자, 희사의 몸도 그가 원하는 쪽으로 이동했다. 서현이 이번에는 물을 머금지 않은 입술을 가져왔다. 희사가 입을 벌리지 않자 그의 날카로운 이빨로 희사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함부로 깨물고 빨았다. 희사는 연한 살에 가해지는 고통에 입을 벌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현의 혀가 파고들었다. 물을 담고 있었던 혀는 묽은 침과 함께 희사의 입안을 헤집었다. 희사의 머리를 움켜쥔 서현의 손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서현이 입을 떼었을 땐 희사의 눈가는 발갛게 변해있었다.
“이러지마.”
“무엇을?”
서현이 마치 희사의 말투를 따라하듯 말했다.
“반역을 꾀한 자에게 너무 관대한 처사였나?”
희사는 반박하지 않고 그를 올려봤다. 서현의 눈동자에 더 이상 다정함은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어미를 잃은 새끼짐승의 상처받은 눈 같았다.
“내게 무어라 말이라도 해봐.”
서현은 제후의 집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했으나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변명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서현이 들고 있던 주전자를 바닥에 내리쳤다. 와장창하며 도자기로 만들어진 주전자는, 담겨 있던 물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희사는 변명할 것이 없었다. 이유가 어찌됐던 간에 전생의 자신이 그를 배신한 것은 진실이었다.
희사는 제후와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현성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래야 과거가 달라질 것이라 확신했다. 바로 잡아야 한다.
“또 무슨 꿍꿍이지? 내가 또다시 너에게 속아줄 것 같나?”
서현이 다시 희사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대로 성큼성큼 걷자 희사는 허리를 굽힌 채로 그에게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빠른 걸음을 따라 머리가죽이 몸 밖으로 아예 이탈할 것 같았다. 희사는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휘청거렸다. 서현은 한 치의 자비도 두지 않고 가야할 곳을 향해서 걸었다. 궁의 복도를 몇 번이고 꺾어서 피보다도 더 진한 붉은 칠이 되어있는 방의 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불투명한 문의 창이 부서져 내렸다. 희사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휙 놓았다. 희사는 바닥에 엎어져서 숨을 골랐다. 그 방은 푹신한 양의 털도 화려한 가구도 없는 그저 싸늘한 하나의 빈 공간이었다. 크기는 희사의 정원만큼 거대했다. 희사는 시선을 옆으로 해 포박되어 있는 제후와 자신의 어머니를 봤다. 그 외의 많은 식솔들이 있었으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이 전부였다. 제후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멍해있었고 여자는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검은 의복을 입을 자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희사는 서현에게로 기었다. 이들을 죽인다면 또다시 그 지옥이 반복되는 것이다. 서현이 그 모습을 보더니 웃었다. 아니 우는 것도 같았다.
“이러지마. 제발 서현.”
“감히, 나를 서현이라 불러?”
서현이 바닥에 흐트러진 희사의 머리채를 밟았다. 희사는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엎드려있어야 했다. 검은 의복의 남자가 서현에게 다가와 작게 무언가를 고했다. 서현이 한번 고개를 까닥하니 그가 밖으로 나갔다. 희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다시 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지만 막을 수 있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 문밖에서 두 명의 남녀가 끌려 들어왔다. 그중 남자는 현성이었다.
희사는 현성을 보자마자 가슴 속의 미안함이 울컥 번졌다. 그의 옆에는 2황비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곱게 빗어 올렸을 금장장식이 이제는 머리카락 끝에 엉켜서 간신히 매달려있었다. 희사는 서현이 이들을 다 죽이고 자신을 겁탈할 것을 알았다. 희사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무언가, 다른 무언가를 생각해내! 자신을 채근했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2황비가 눈 안의 실핏줄이 다 터지도록 서현을 노려봤다. 서현이 비웃으며 말했다.
“저 여자의 눈을 뽑아라.”
현성이 재갈에 틀어박힌 채로 비명을 질렀다. 검은 의복을 입은 자중 하나가 황비의 양 팔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뒤에서 부여잡았다. 희사 역시 애원했으나 서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작은 단도를 꺼내든 또 다른 검은 의복이 2황비의 눈알에 그것을 박아 넣었다. 여자의 비명소리가 커다란 방을 가득 메웠다. 꼼짝 못하도록 고정된 몸은 경련을 일으켰다. 남은 한쪽 눈 역시 칼이 쑤셔 박히자 희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알면서도 아닌 척을 했지. 아니길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얼마나 나를 더 능멸해야 속이 시원했더냐.”
눈알이 파내지는 2황비를 보며 서현이 지껄였다. 현성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다. 마치 서현이 이렇게까지 할지는 몰랐다는 눈이었다. 2황비의 양 눈알이 파진 것을 검은 의복이 작은 주머니 안에 담았다. 2황비를 내려놓자 그녀가 바닥을 헤엄치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뭔지 알고 있느냐?”
이번엔 서현이 현성에게 물었다.
“아, 입에 재갈이 물려있으니 답을 하지 못하겠구나.”
서현이 다정하게 웃으며 현성의 입에 물려진 재갈을 벗겼다. 서현이 뒤에 놓아진 서찰 한 장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펼치더니 무감각하게 읽어 내렸다.
“커다란 암캐 한 마리를 죽였으니 이제 그 개의 자식만이 남았다. 작은 암캐는 제 새끼가 성하지 못하여 걱정할 것이 없다.”
현성이 눈이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희사는 서현이 읽는 서찰의 내용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현이 그것을 친절히 알려주듯 말을 이었다.
“내 친히 생각해보니 커다란 암캐라 함은 황후를 뜻하는 것이고 작은 암캐는 둘째 황자의 어미인 제 1황비를 뜻하는 것이렷다. 그래, 내 어머니를 죽인 것이 너희였더냐.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확신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더군.”
서현의 미소가 입가에서 자취를 감췄다. 희사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설마 자신 역시 황후를 죽이는 데 동참한 것인가! 아니 그런 짐승만도 못할 짓을 내가 할 리가 없다! 아니야. 희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자, 다시 묻겠다.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이 무엇일 것 같은가?”
서현이 현성에게 물었다. 현성이 쉽사리 답하지 않자 검은 의복이 황비의 허벅다리에 칼을 꽂아 넣었다. 황비의 비명이 다시금 공간을 울렸다.
“답하라. 현성. 그러지 않으면 네 어미의 팔과 다리를 천천히 하나씩 잘라 들개의 먹이로 주겠다.”
현성이 바닥에 널브러진 희사를 봤다. 희사와 눈을 마주치자 현성이 재빠르게 눈을 피했다. 현성은 서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형님, 아닙니다!!! 저는, 저는 절대로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무엇을 원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서현이 놀라운 표정을 지어내며 현성의 말을 경청했다.
“유악의 하찮은 저자들이 어마마마를 꼬여낸 것입니다. 저는 형님께서 황제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습니다! 헌데! 헌데!”
현성이 억울하다는 듯 이를 물고 희사의 어미를 노려봤다. 여자는 기가 막히다 못해 말도 안 나오는 표정으로 현성을 마주했다. 여자에게 재갈만 물려있지 않았다면 커다란 소리가 튀어나오고도 남았을 형상이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그러니 부디 제 어머니를 용서하십시오, 형님. 형님!”
서현이 그 꼴을 보더니 크게 웃었다. 다리를 굽혀 엎드려 있는 희사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희사, 그래. 이것이 그토록 네가 아끼던 자란 말이냐?”
서현의 목소리에는 희열이 담겨있었다. 희사는 그제야 확신했다. 자신은 서현의 말대로 현성과 연정을 통하던 사이가 아니었다. 제후의 말처럼 자신은 어미의 말을 따른 아이에 지나지 않았을 뿐. 그렇다면 저러한 현성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서현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현성에게 은혜를 베풀 듯 다정한 음성과 함께 그에게 칼을 쥐어주었다.
“너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했다. 그러니 네가 네 손으로 저 자들을 죽인다면 용서해주겠다.”
현성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입술마저 굳게 다물고 그 칼을 잡은 손엔 핏기조차 가셔있었다. 현성의 눈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제후를 향해 현성이 비척비척 걸었다.
“내 어마마마를 귀신같이 홀려 형님을 시해하려 했던 죄는 죽음으로 받겠다.”
현성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희사의 어미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현성을 노려봤다. 그 핏발이 선 눈에선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어째서, 어째서! 현성은 그 눈빛은 보지도 않은 채 제후의 심장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푹. 하는 소리가 희사의 귀를 파고들었다.
“안 돼! 이건…이건 아니야…이러면 안 돼! 서현, 제발!”
희사가 소리치자 서현이 희사의 몸을 들어올렸다. 희사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제후는 원래 서현의 칼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것은. 이것은 자신은 알고 있던 과거와 달랐다. 게다가 또 아비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희사는 무언가가 크게 잘못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잘했다. 그 다음은 잘 알겠지?”
서현이 여유롭게 이야기하자 현성이 제후의 가슴에 박힌 칼을 빼들었다. 푸슉하며 심장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희사는 서현의 품에서 울먹거리며 버둥거렸다. 서현의 완력에 마치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그의 품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현성이 이번엔 희사의 어미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다. 컥, 하며 여자의 재갈이 삽시간에 피로 물들었다. 현성은 여자의 몸 깊숙이 칼이 꽂히지 않자 수번을 반복해서 찔러 넣었다. 여자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 위에 올라가 현성은 그 후로도 몇 번을 쑤셨다. 파들거리던 여자의 몸은 현성이 마지막으로 쑤셔 넣은 칼을 빼냈을 때 그 움직임을 멈췄다. 일어서는 현성의 얼굴은 어느새 피 칠갑이 되어있었다. 희사는 끅끅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아직 한 명이 더 남았지 않느냐?”
서현이 자신의 품에 안긴 희사를 손짓하며 말했다. 현성은 희사의 눈을 보지 않았다. 칼을 세우고 그저 괴물과 같은 소리를 지르며 희사에게 달려들었다. 이렇게, 이렇게 죽는 건가…. 희사는 질끈 눈을 감았다. 푹. 칼이 몸속을 통과하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떠 가슴께를 내려 보자 서현의 손에서부터 길게 뻗어나간 칼날이 보였다. 칼날은 그대로 현성의 뱃가죽을 뚫어버렸다. 현성의 입에서 크륵거리며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찢어질 듯 커진 현성의 눈은 의문을 띄고 있었다.
“현성, 배신은 쉽다. 허나 신뢰는 회복하지 어렵지. 그러니 억울해 할 것 없다.”
서현이 현성의 배에 꽂힌 칼을 한 바퀴 비틀며 끄집어냈다. 안쪽에서 살이 갈리는 끔찍한 소리에 희사는 몸을 덜덜 떨었다. 서현이 그것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희사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모두 정리하라.”
서현이 차갑게 말한 뒤 희사를 안아 들었다. 희사는 눈도 깜빡 할 수 없었다. 그간 자신이 봐온 전생은 전부 거짓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자신이 전생으로 돌아왔기에 상황이 달라지는 것인지. 희사는 서현의 품에 안겨 몸을 웅크렸다. 떨리는 몸은 좀체 진정되지 못했다.
“이건 아니야……. 이러지 않았어…. 틀려. 왜, 대체 왜.”
희사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내뱉는지도 모르는 채 중얼거렸다.
예의 방으로 희사을 안고 돌아온 서현이 침상에 희사를 눕혔다. 작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을 건넸다.
“희사 무엇이 틀리다는 거지?”
희사는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한 서현이 두려웠다. 알고 있던 것과 직접 피부로 느끼는 것은 달랐다.
“무언가 이상한 것 같아?”
희사는 잔뜩 젖은 얼굴로 서현을 올려봤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희사는 서현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랐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전부 장악했다.
“이런 희사. 너만 다시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설마 했어.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미친 줄 알았다. 뭐, 다행히 미치진 않고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살 수 있었지. 그런데 네가 어깨를 다친 뒤 바보 같은 행동을 취할 때부터 너도 혹시. 라는 의심이 들더군.”
서현이 희사의 몸을 끌어안았다. 겨드랑이 안쪽으로 손을 넣어 그의 가슴팍에 희사를 가뒀다.
“난 너보다 더 이른 시간으로 돌아왔다. 너를 그 카페에서 다시 보고 난 뒤에 바로 말이다. 벌써 십 년이 넘게 흘렀나? 이젠 그곳에서의 기억도 흐릿해.”
쿵-
서현의 말에 머릿속을 장악하던 온갖 생각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희사는 경악스러운 눈으로 서현을 올려봤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으나 그럴 때마다 그의 몸은 더 조여 왔다.
“카, 카페라니?”
“너무하잖아, 모른 척 하다니. 사실 난 이곳으로 넘어와서 엄청 힘들었다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니까. 헌데 카페에서 본 너는 마치 전생을 다 알고 있는 듯 행동했지. 그 때 아마 나를 증오한다 했었나? 게다가 지금 네가 했던 말에서 확신을 얻었다.”
서현이 웃으며 말했다. 품에 안은 희사의 향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래 네 말처럼 전생이 달라진 이유는 나 때문이겠지.”
그는 이것이 단순한 꿈이나 상상이 아니라고 한다. 전생으로 회귀한 것이며 자신보다 그가 더 먼저 온 것이라고. 희사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라고 아닐 것은 무엇이지?
“네게 미칠 정도로 빠져들었지. 이 세계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너 뿐이니까. 네가 다른 속셈이 있었다하더라도 네가 내게 다정한 것이 마냥 행복했다. 난 네가 배신할 것이라곤, 알지 못했어. 네가 현성을 유독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알았으나 늘 설마설마했지. 내 휴식처는 단지 너 하나뿐이었으니까. 돌아온 것은 너와 나 뿐만이 아니야. 해훈도 돌아왔지. 제 2황자가 왜 정신병이 있는 지 알아? 자꾸 자신은 황자가 아니라며 헛소리를 지껄였거든. 그는 나보다도 더 먼저 이곳으로 왔다.”
희사는 서현의 쏟아지는 말에 복잡했던 것이 조금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서현의 말대로라면 가장 처음 해훈이 전생으로 회귀했다. 그는 제 2황자였으며, 이곳에서의 생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적응하지 못한 채 정신병이 있다며 황궁의 깊은 곳에 유폐된 것이다. 그 후로 서현이 회귀했고 가장 마지막으론 자신이 돌아왔다. 그래, 현생에서 이곳으로 온 이들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던 전생이 바뀐 것이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우리가.”
그래도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희사가 서현에게 물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검은 의복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그가 들어옴과 동시에 피비린내가 훅 하고 코를 스쳤다. 희사는 눈만을 빼고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덮어쓴 그가 낯설지 않았다. 그의 눈빛만을 보고도 그가 누군지 알아 챌 수 있을 정도로….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었다.
그렇게, 해훈이 말했다.
“오랜만이야. 희사.”
“해훈….”
그의 이름을 부르는 희사의 목이 멨다.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서현의 손에 일족들이 죽었다. 아니 정확히는 현성의 손이다.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자신의 기억과는 다른 전생에 우왕좌왕하다 그대로 파도에 휩쓸려버렸다. 자신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한들 저들이 전생의 자들이 아닌데 앞으로 어찌 될지 예측조차 불가능했다. 희사는 현생에서도 전생에서도 늘 생각해왔었다. 만일 그 때로 되돌아간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좀 더 잘했을 텐데. 모든 것을 알았다면 해훈에게 배신당하지 않았을 테고….
늘 그런 부질없는 과거의 후회들은 현생에서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전생에서의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거로 돌아왔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였으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고민 해봐야 제자리다. 희사는 현성이 그 자신만 살고자했던 비겁함에 그를 환멸 했던 것인지, 서현과 닮았기에 증오했던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변해버린 전생은 현세에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전생은 과거의 일이다. 아니 그런 것만도 아닌가, 우리 셋은 전생을 현생처럼 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