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겁환상(前劫喚想) 1부-3 by
2010-04-23 00:39:48 , Monday
희사는 답답한 숨을 몇 차례 고르고 집에서 나섰다. 어젯밤은 눈이 많이도 내렸는지 걷는 내내 신발이 눈 안으로 푹푹 잠겼다. 희사는 그 누구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에 자신의 자국만을 남겼다. 고개를 내려 반복되는 하얀 길을 보며 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렇게 자살을 하고. 과거의 일에 얽매여서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희사는 꿈을 전생으로 인식한 후부터는 현생을 살아도 그저 전생의 연장선상일 뿐이라 여겼다. 그것은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지름길이었다. 어쩔 수 없다. 과거를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는 것은 힘들었다. 희사는 휴대폰의 시계를 들여다 본 뒤 달리기 시작했다. 눈이 밟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헉헉대며 가게 앞에 도착한 희사는 점심시간 전에 잘 맞춰왔다며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가게 앞은 쌓인 눈이 딱 다니기 좋게끔 쓸려있었다. 규태가 쓸었구나,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얼핏 둘러보니 가게 안에는 손님들이 제법 차 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희사를 보곤 사장이 반색을 하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희사씨! 얼굴이 아주 주먹만 해졌어. 지금도 아파 보이는데 괜찮아?”
희사가 아픈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지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었다.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사장은 그런 희사의 반응을 아직도 몸이 좋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희사씨가 오늘은 카운터 좀 봐줘, 아무래도 주방은 내가 봐야겠다.”
“괜찮아요, 제가 주방으로 갈게요.”
사장이 희사의 팔뚝을 그러잡았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팔뚝이 저릴 지경이었다.
“아냐, 나도 이참에 실력발휘 좀 해보지 뭐, 이래봬도 한식 자격증 있는 여자야. 희사씨 괜히 또 아파서 누우면 그게 더 민폐야. 그러니까 오늘은 카운터 좀 봐줘.”
희사가 거절하기조차 민망하게 못을 박아두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카운터에 앉았다. 희사는 차라리 음식을 만드는 것이 손님을 응대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은 삼일이나 가게에 나오지 않은 자신에 대한 벌이었다. 물론 사장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오, 드디어 나왔네. 어디 아팠어?”
“응. 조금. 미안하다.”
배달을 다녀온 규태가 들어오자 찬 기운이 전신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오늘은 바닥이 얼어서 빙판일 텐데 오토바이를 타려면 꽤나 위험할 듯싶었다.
“야야, 뭘 미안해. 나도 아파서 못 나왔었구만. 너 근데 정말 얼굴이 많이 상했다.”
삼일이나 먹지 않고 잠만 잤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규태와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호출벨이 울렸다. 15번이 어디더라? 아아, 창가 쪽이었지 생각하며 손님에게로 다가갔다. 희사는 15번 자리에 앉은 손님을 보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금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얼굴. 강해훈이었다. 자신보다 먼저 와 있었는지 다 피운 담뱃대 몇 개가 원두가루 안에 박혀있었다.
“며칠만이네요. 희사씨.”
“네, 안녕하세요.”
희사는 강해훈과 전생의 해훈이 겹쳐지면서 가슴 언저리가 뜨겁게 끓었다. 묻고 싶었다. 당신이 왜 내게 거짓말을 했고, 배신했는지. 그 때 당신이 나를 사랑하긴 했는지. 부질없는 기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묻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저께 배달 온 점심 맛이 달라져서 희사씨 실력을 의심하던 찰나였습니다.”
웃음기를 잔뜩 먹은 음성이었다. 희사는 예의상으로도 마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차라리 강해훈이 눈앞에서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표정이 안 좋네요, 사장한테 들었는데 아팠다면서요.”
“네, 뭐 시키실 거세요?”
남자가 더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화제를 전환했다. 이 남자를 더 보고 있다간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해훈이 자신을 배신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쏟았던 옛 감정을 한 번에 버릴 수는 없었다. 벌써 셀 수 없을 만큼도 더 전의 일이건만 왜 자신에게는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지, 그것이 왜 자신만 느끼는 감정인지 억울했다. 남자에게도 똑같은 배신의 감정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기엔 자신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희사는 강해훈이 권유한 아르바이트를 거절한 것이 참 잘한 선택이었다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를 마주쳐봐야 자신만 힘들 것이 뻔했다.
“일단 아메리카노 주세요, 점심은 한 사람 더 오면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오늘 점심은 희사씨가 만들어 주시는 거죠?”
희사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까닥하곤 카운터 안 커피머신으로 향했다.
“희사야 네 소중함에 대해서 나 새삼 깨달았어. 사장 누나하고 나랑 둘만 있을 때 진짜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
규태가 되도 않는 애교를 부려가며 희사의 허리에 매달렸다. 희사가 싹싹한 규태를 밀어내며 웃었다.
“배달이나 다녀와.”
“알았어.”
대답은 해놓고 아직도 희사에게 매달려서 떨어지질 않았다. 희사는 규태와 옥식각신하다 옆얼굴에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해훈이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의 강해훈은 자신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피할 생각 없이 계속 응시했다. 희사가 먼저 시선을 피하고 힘겹게 규태를 떼어냈다. 규태가 희사는 너무 차가운 그대라면서 짓궂게 장난쳤다. 아직도 강해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으나 그 것를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쟁반 위에 커피 머그잔과 받침대를 올렸다. 아메리카노를 내리는 시간이 어찌나 짧게 느껴지는지. 아니면 그에게 다가가야 하는 시간이 빨리 오는 것인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운터를 돌아 나와 쟁반을 들고 강해훈에게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카페 문이 열리며 딸랑딸랑 맑은 종소리를 울렸다. 밖은 그 사이 또 눈이 내리는지 들어선 손님은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있었다.
“어서 오세…….”
카페 문을 돌아보던 희사는 강해훈과 불과 두 걸음 앞에서 그대로 얼음이 되어 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를 보는 희사의 얼굴은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경악스러웠다.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가 이 세계에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자신이 잘못 본 것이야 한다.
희사는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그대로 떨어뜨렸다. 머그잔이 깨지며 뜨거운 커피가 발목을 적시는데도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강해훈이 깜짝 놀라서 희사를 자신이 앉은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희사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자를 보며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만을 하고 있었다.
“희사씨, 왜 그래요? 아직 아픈 겁니까?”
“아, 아뇨.”
희사는 눈은 그를 향해 못이 박힌 채 강해훈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제야 뜨거운 커피가 쏟아진 발목이 시큰시큰했다.
“다, 다시 가져다 드릴게요.”
희사는 급격하게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자가 강해훈과 자신 쪽으로 걸어왔다. 남자는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면서, 희사와 강해훈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번갈아봤다.
“뭐야, 왜 이리 난장판이야.”
희사는 남자의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뭔지 알려주겠다.’ 분명 그 때와 똑같은 음성이었다. 희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현생에서의 서현은 이미 죽었다. 현성이 서현이었고. 그리고 그는 죽었는데…….
희사가 남자를 쳐다봤다. 시선을 마주한 남자가 조금 곤란한 표정을 하고 희사를 마주했다.
“우리 어디서 본적 있어요?”
“……. 아니요.”
“흠, 근데 난 꽤나 낯이 익은데. 혹시 그쪽이랑 내가 전생에 인연이 있었다던가. 뭐 그런 거 아닌가요? 하하.”
남자는 희사를 보며 웃었다. 마치 해훈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려줄 때처럼 즐거워보였다. 희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강해훈이 부축하려 했으나 그 손길을 뿌리쳤다.
“여기서 까지 작업할 생각하지 마. 서현. 그것도 병이다.”
강해훈의 말에 희사는 그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서현, 서현이라니! 희사는 얼굴이 제멋대로 일그러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참았던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서현이 반가워서가 아니라, 그가 살아있어서 기뻐서가 아니라, 현성 때문에. 자신의 불쌍한 동생 때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성이 서현일 리가 없다는 것을. 그저 닮았을 뿐이었다. 자신이 인정하기 싫었던 것일 뿐. 서현에게 당한 억울함과 분노를 풀길이 없었기에 그것을 전부 현성에게 쏟아놓은 것이었다.
희사는 엉망으로 우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지도 못하고 그저 흐느꼈다. 서현과 강해훈은 서로 당황해서 희사를 어찌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카페의 남은 손님들이 이쪽을 전부 보고 있었다. 안 돼, 정신 차리자. 희사가 입술을 꽉 물었다. 저들의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다물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엉망이 되서 나뒹구는 머그컵의 조각들을 쟁반위에 올려 담았다.
연방 떨리는 어깨에 강해훈은 희사를 어떻게든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우는 모습을 안쓰럽다고 생각해보긴 처음이었다. 아니, 안쓰러운 것보다 가슴 한쪽 언저리가 왠지 아픈 것 같았다.
서현이 희사에게서 쟁반을 받아들려했다. 희사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서현이 힘으로 빼앗았다. 서현을 노려보는 희사의 눈엔 좀 전의 엉망으로 울었던 얼굴은 거의 사라져있었다. 서현이 쟁반을 든 채로 카운터로 향하자 희사도 그를 뒤따라갔다.
“주세요. 제가 치우겠습니다.”
“것보다 그쪽 나 진짜 몰라요? 난 그쪽 아주 옛날부터 알고 있는데. 진짜 옛날. 지금 모습 말고.”
희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서현을 쳐다봤다. 서현이 쟁반을 카운터 옆 테이블에 올리곤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로 희사를 내려다 봤다. 강해훈도 그렇고 서현도 그때와 한 치도 다름이 없었다. 그 전 모습 그대로였다.
“나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그쪽 지금 반응이 되게 강해서 물어 본거예요 혹시나 하고. 하하, 신기하네.”
서현이 대수롭지 않은 말을 하듯 거침이 없었다. 이 눈앞의 남자 말을 따져보면 그도 자신을 꿈속에서든, 또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봤다는 이야기가 됐다. 기가 막혔다. 그들이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게 서현이라면 더더욱. 만일 네가 정말 서현이라면, 네가 내게 한 일들을 전부 안다면! 그 따위로 내게 말을 건넬 수는 없어! 희사는 가슴 속에서 울분이 터져 나왔다.
“어이 그쪽 말 좀 해봐요, 이름이 뭐에요? 내 꿈에선 그쪽 되게 야하게 나왔는데 확실히 꿈하고 현실하곤 틀리네.”
희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함부로 말을 내뱉는 서현에게 침을 뱉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서현은 다시 한 번 희사를 재촉했다. 강해훈이 이쪽의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서현과 희사에게로 다가왔다.
“정말 이름 뭔지 알려주지 않을래요?"
“윤……. 사.”
“네?”
서현이 제대로 못 들었다는 듯이 커다란 키를 숙여 귀를 바싹 가져왔다.
“윤희사. 네 덕에 죽었고, 네 덕에 현생에서도 괴롭게 사는 자야.”
이를 갈며 말하자 서현이 놀랍다는 듯 희사의 얼굴로 손을 가져왔다. 동시에 다가 온 강해훈이 희사의 허리를 잡아 그 손길에서 도피시켰다. 서현이 허공을 머물던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곤 팔짱을 낀 채 웃었다.
“아, 내가 그랬어요? 뭐, 어차피 과거의 일인데. 지금과는 상관없지 않나요?”
희사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막말을 지껄이는 서현을 노려봤다. 강해훈은 대체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서현은 좀 전과 같이 여유롭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희사는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강해훈의 손을 떼어냈다. 강해훈이 강하게 한 번 더 허리를 휘어잡았다. 그러자 희사는 잔뜩 인상을 구기고 그를 노려봤다.
“둘이 아는 사입니까?”
강해훈이 딱딱한 목소리로 희사를 추궁하듯 물었다. 희사가 힘껏 힘을 주어 강해훈의 팔을 거칠게 떼어냈다.
“알기야 알지. 현실에선 처음 보는 거긴 하지만.”
서현의 의미심장한 말에 강해훈이 불만스런 표정을 자아냈다.
“현실?”
“아아, 그런 게 있어.”
서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강해훈에게 손짓했다.
“저쪽 분위기가 영 안 좋으니 다음에 다시 오는 게 낫겠어.”
희사는 한계를 넘어선 분노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서현의 뻔뻔함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자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됐다. 불쌍한 내 동생 현성이도. 내 삶도. 너와 해훈을 기억하기 때문에 모두 일그러졌다.
희사는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오늘만큼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다. 해훈에게 배신을 당했던 때만큼이나 가슴이 타들어갔다. 희사는 분에 못 이겨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마치 갈기갈기 뜯기는 것만 같아 휘청거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서현과 해훈이 놀라며 부축하려 하자, 희사는 마치 악귀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올려봤다. 희사의 몸에서 내게 손대지 말라는 무언의 거부감이 뿜어져 나왔다.
딸랑딸랑.
카페 내의 세 사람을 주목하던 사람들은 유독 크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시선을 옮겼다. 그 사이 배달을 다녀온 규태가 “아, 눈 더럽게 내리네. 거참.” 하며 헬멧과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그리곤 카운터 앞에 좋지 않은 분위기로 서 있는 세 사람을 보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규태가 희사와 두 남자를 번갈아봤다. 곧 입을 열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 필요한 거 없어. 두 분 다 가실거야.”
희사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규태는 희사가 이렇듯 감정을 실어 말하는 것을 봐온 적이 없기에 적잖아 당황했다.
“커피 값은 안 받겠습니다. 그럼.”
희사가 두 남자를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쟁반 위에 올려진 깨진 머그컵을 카운터 옆 쓰레기통으로 쏟아 부었다. “이봐요, 희사씨." 하고 서현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규태가 당황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거기까지 신경 써 줄 여력은 없었다.
“어라, 희사씨? 왜? 오늘은 카운터 보라니까.”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카운터에 앉아있으려니 외려 더 괴롭네요.”
희사가 토끼 두건을 쓴 사장을 보며 쓰게 웃었다. 원체 사람 상대를 잘 하지 못하는 희사라서 그런가보다 하고 사장이 앞치마를 벗었다.
“나야 그래주면 좋지. 그럼 잘 부탁해.”
손을 깨끗이 헹군 사장이 주방을 나가자마자 희사는 그 자리에 쓰러지듯 무너져 내렸다. 처음부터 카운터에 앉는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서현을 봤을 리도 없었을 테고. 현성이 그렇게 억울하게 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벌어진 일을 후회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희사는 현성을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어리석음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왜 현성이 서현이라고 생각했을까. 왜.
만약에 현성이 단지 서현을 닮았단 것임을 알았다면 그에게 따스하게 대할 수 있었을까. 희사의 눈가가 붉어졌다. 괴롭다. 어쩌면 이리도 괴로운지. 차라리 그전 생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이렇듯 괴롭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또는 해훈을 만나지 않았다면. 결국 부질없는 생각들이다.
“희사야, 왜 그래?”
좀 전에 희사의 상태가 이상해 따라 들어온 규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희사를 일으켜 세우려 손을 대자 희사가 손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좀 머리가 아파서 그래.”
“많이 아프면 들어가서 쉬지, 왜 또 주방에 와있어.”
“괜찮아, 가서 사장님 도와드려.”
“그냥 집에 가라, 거울 봐봐. 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괜찮다니까!”
희사는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규태는 희사가 아파서 그런가 보다하고 대수롭지 않아했지만 희사는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하는 중이었다.
“미안, 정말 괜찮아.”
규태는 더는 말을 걸지 않고 희사를 지켜봤다. 규태의 걱정스러운 표정은 여전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규태도 사장님도. 세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만 있다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도 않을 텐데. 희사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남은 점심 배달 도시락은 사장이 전부 준비를 끝내 놓았는지 보온통은 포장된 도시락으로 꽉 차 있었다. 규태가 보온통에서 도시락을 꺼내 배달 가방에 담았다.
“너, 뭐 좀 먹고 나온 건 맞아? 먹고 싶은 거 있음 얘기해. 배달 다녀오면서 사다줄게.”
“아냐, 먹고 나왔어. 늦겠다. 배달 가봐.”
먹은 것이라곤 바나나 하나가 전부지만 입맛이 없었다. 현성은 그렇게 떠났는데 자신만 맛있는 것을 먹고 즐길 수는 없었다. ‘형, 나를 미워하지 마.’ 애원하던 현성의 목소리가 귓가를 계속 맴돌았다. 희사는 규태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눈물을 참기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만일 자신이 해훈에게 마음을 주지만 않았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았을까. 부질없는 생각들만 계속 머릿속을 메웠다.
희사는 밀려드는 주문서를 보며 차라리 바쁜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이 바쁘면 이 괴로움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것 같았다. 카페의 피크인 낮 시간이 지나고,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 사장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규태는 홀을 보고 있는지 배달 다녀온 뒤로는 통 볼 수가 없었다. 희사가 주방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봤다. 이제 5시 밖에 안됐다. 오늘은 하루 종일 몸을 혹사시키고 싶었다.
“희사씨, 잠깐 괜찮아?”
“네.”
희사는 가스레인지에 묻은 재료 찌꺼기들을 닦던 동작을 멈췄다. 주방용 행주를 설거지통 안에 풍덩 빠뜨렸다. 이틀에 한 번씩은 꼭 새것으로 갈기 때문에 희사가 손보는 주방은 늘 청결했다. 사장은 주방에서도 희사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온다고 생각했다. 희사의 눈엔 열정은 없었으나 그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희사 나이쯤 되는 학생이면 그 젊음에 모든 것을 불태우고도 남건만. 옆에 있는 규태만 봐도 그 젊음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다. 사장은 희사가 자신보다 열 살이나 적은데도 어리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희사에게 좀 체 편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혹시, 뭣 좀 물어봐도 될까? 일단 실례가 될 수도 있으니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는 할게.”
“네,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희사는 혹시나 사장이 좀 전에 손님을 내쫒은 자신에게 한마디 하려는 것인가 생각했다. 규태가 이야기 할리는 없고, 아마 구경하던 손님 중 누군가가 말했을지도 모른다.
“희사씨 음식 만드는 거 좋아하지?”
“네?”
사장은 희사의 예상과는 달리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희사는 사장의 말대로 요리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커피도 좋아했지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만을 원할 만큼 염치 있지도 못했다.
“흠, 주제 넘는지는 모르겠는데, 제대로 한번 배워볼 생각 없어? 근처에 내 친구가 요리학원하거든. 여기 카페도 그 녀석이 추천해줘서 시작한 거고.”
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장을 쳐다봤다.
“아니, 그렇다고 희사씨 실력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고, 난 그냥 재능 썩히는 게 아까워서 그렇지.”
희사가 작게 웃었다. 사장이 나쁜 뜻이 있어서 한 말이 아닌 것은 이미 알았다. 가능하다면 배우고 싶었다. 그것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과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고 해서 마냥 순수하게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앞섰다.
“일단 생각해보고 말해줘, 나는 분명 희사씨가 우리 카페 일찍 그만두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사장이 찡긋 윙크를 하며 애교 있게 말했다.
“감사해요.”
“에이 뭘.”
희사는 사장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한번 숙였다. 설거지통에 넣었던 행주를 헹구어 다시 주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으로 하고 싶을 일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자신이 죽기 전에 현성에게 용서를 빌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자신도 단지 분노에 눈이 가려 아무것도 확인치 않고 의심한 것을. 과연 현성이 용서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오늘도 카페는 낮에 있었던 그들과 자신의 일을 제외하면 별 탈 없이 마감을 했다. 사장은 요 근래 수입이 눈에 띠게 불어 마감을 할 때마다 입에 함박웃음을 건지 꽤 됐다.
“데려다 줄까?”
규태가 패딩 점퍼 위에 목도리를 두르며 말을 건넸다. 주머니에서 오토바이 키를 꺼내 짤랑 짤랑 흔들었다.
“아니, 괜찮아. 걸어갈게.”
희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그럼, 앞에 까지만 같이 가자. 지금 나갈 거지?”
“응.”
희사가 야상 점퍼의 지퍼를 쭈욱 끌어올렸다. 이것도 소매 부분이 헤지다 못해 실밥이 드러난 것이 보였다. 색이 바래 짙은 녹색이 꼭 썩은 풀색 같았다. 뭐 따뜻하기만 하면 되지. 희사가 주머니에 푹 손을 찔러 넣었다. 양털이 포근하게 희사의 손을 감쌌다.
“사장님 저희 가요!”
“응, 그래. 태휘야 들어가.”
“저 태휘가 아니라 규.태.거든요.”
규태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사장을 쳐다봤다.
“알았다, 알았어. 태휘 이름이 얼마나 예쁜데 왜 그래. 진짜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여자도 아니고 남자이름이 태휘가 뭐예요. 우리 부모님 진짜 문제 있다니까.”
“작은 아버지가 너 얼마나 예뻐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속으로 우신다.”
희사는 저 둘의 대화를 통해 오늘 처음 규태와 사장이 친척 관계인 것을 알았다. 규태의 이름이 원래는 태휘인 것도 역시 오늘에서야 알았다. 희사는 자신이 주변인에 대해 정말 무관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부모에게 처음 배운 것이 무관심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너 또 뻥으로 아프다고 안 나오면 죽는다! 희사씨는 푹 자고. 알았지? 내일 또 아파 보이면 나 화낸다.”
“네, 가볼게요.”
사장이 카운터 의자에 앉아 들어가라며 손을 왔다갔다 힘차게 흔들었다. 규태도 그렇고 사장도 그렇고 늘 유쾌했다. 희사는 그런 그들이 부러웠다. 규태가 희사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너 그렇게 휘청휘청 걷다가 엎어지면 부러진다.”
“설마. 씩씩하게 걷고 있는데.”
“그게 씩씩한 거면 내가 걷는 덴 아주 무너지겠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규태가 희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마치 학교 친구들에게 하듯 서슴없었다. 희사는 전생의 꿈을 꾸기 시작한 14살 이후로는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무서웠다. 원체도 조용했던 희사가 더 소극적이게 변한 것은 그 이후부터였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분간하지 못했다면, 아마 지금쯤 정신병원에 입원해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꿈을 전생이라 여긴 뒤로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그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아침마다 정신을 차리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다름이 없었지만.
꿈은 시간의 순서가 아닌 뒤죽박죽이 되어 희사를 찾아왔다. 어느 때는 어린 아이였으며, 또 어느 때는 야화가 된 이후의 일들이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희로애락이 가장 강했던 때를 기억하는 듯했다. 물론 이 역시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희사는 규태의 오토바이가 세워진 곳까지 가는 길이 같기에 어깨동무를 한 채 걸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갑자기 규태가 짜증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 귀찮게 시리.”
희사는 규태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규태의 오토바이 옆에 여자 두 명이 몸을 움츠린 채 떨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었다. 코끝이 새빨개진 것을 보니 밖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기다린 듯 했다.
“정말 안 데려다 줘도 돼?”
“응. 누가 기다리네. 얼른 가봐, 나도 갈게.”
규태에게 손을 흔들고 발걸음을 돌렸다. 훤칠하니 잘생긴 규태를 좋아해서 카페에까지 찾아오는 여자 손님들이 많은 것은 알았지만, 고등학생까지 손이 미칠 줄이야. 희사는 뒤를 돌아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흘끔 본 다음 다시 걸음을 빨리했다. 점심에 내렸던 눈이 녹아 군데군데 얼음판을 형성했다. 희사는 빙판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걸었다. 신발의 밑바닥도 거의 다 닳아서 잘못 디디면 휙 하고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얼음송곳 같은 바람이 희사의 뒤통수를 따갑도록 쓸어갔다. 희사의 발길을 재촉하듯 뒤에서 부는 바람이 거셌다. 그것은 어쩌면 누구에게서 도망치라고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순간 희사의 팔이 뒤에 있던 인영에게 의해 붙들렸다. 희사는 규태가 따라왔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희사는 맞닿은 자신의 팔뚝을 떼어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무슨 걸음이 이리 빨라요? 카페에 갔더니 방금 나갔다고 해서 따라왔는데. 벌써 이만큼이나 왔네요.”
희사는 자신을 잡은 남자를 무시하고 앞으로 저벅저벅 걸었다. 운 나쁘게도 앞에 빙판 길을 못 봤는지 신발 바닥이 미끄러지면서 몸 전체가 휘청했다. 그런 것을 서현이 뒤에서 붙잡았다. 희사는 그와 몸을 맞닿을 기회를 준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봐요,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왜 아까부터 무시합니까?”
희사가 남자를 거칠게 밀쳤다. 단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 저 남자가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저 속은 새까만 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현이 빠른 걸음으로 걷는 희사에게 끝까지 따라붙었다. 누가 보면 열렬한 구애라도 하는 중인지 착각할 법도 했다. 계속 무시하는 희사에게 서현이 경고하듯 말했다.
“이봐요, 윤희사씨.”
“당신이 함부로 부르라고 있는 이름 아니야.”
희사가 멈춰서 남자를 쏘아붙이자 서현이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대거리했다.
“난 그쪽이 내게 왜 이렇게 적대적인지 모르겠네요. 작업 거는 거 아닙니다. 이상하게 들릴 진 모르겠는데, 매번 꿈에서 봤던 사람과 당신이 너무 닮았거든요. 이상하죠? 마돈나도 아니고, 꿈에 남자인 당신이 나오다니.”
희사는 입술을 잔뜩 비꼬아서 마주했다.
“꿈? 그게 꿈이라고?”
서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희사를 내려 봤다.
“그럼 그게 꿈이 아니면 뭐라고 생각해요?”
희사는 남자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노려보기만을 했다. 참 가볍다. 나는 네가 꿈이라 칭한 그것 덕에 인생이 망가졌는데, 너는 참 가벼워서 좋겠다. 비틀어진 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쪽이 과민 반응 했을 때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꿈을 꾸는 겁니까? 설마 혹시 그거 전생이라던가, 그런 겁니까?”
황제의 얼굴을 하고 시원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속이 뒤집혔다.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는 양 즐거워보였다.
“이야, 그렇게 표독스러운 얼굴은 처음보네요. 꿈에선 항상 다정하게 웃어줬는데. 뭐 둘 다 예쁘긴 합니다만.”
희사의 반응은 개의치 않다는 듯 자신의 말만 전하기에 여념 없었다. 사람 성격이 저리도 바뀌는가. 희사가 기억하고 있는 서현의 성격과는 너무 달랐다.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황제가 되어 서현이 변하기 전에는 저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당신에게 다정하게 웃어줬다고? 착각도 가지가지 하시는군.”
희사는 매몰차게 대꾸하며 돌아섰다. 자신은 한번도, 서현에게 다정하게 웃은 적이 없었다. 서현이 황제가 되고 나서는 더더욱.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서현이 전생의 가족들을 학살하기 전부터 자신은 그를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니 남자의 이야기는 거짓이었다. 다정하게 웃는다니. 말도 안됐다.
“그쪽 정말 그 꿈이 전생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서현 자신이 말해놓고도 장난에 가까웠다고 치부하듯이 희사를 나무랐다. 희사는 더는 말할 가치가 없었다. 화내는 것도 대꾸 하는 것도 입이 아깝다.
“거참 되게 비싸게 구네.”
뻔뻔함을 넘어서다 못해 막말을 던지는 서현에게 희사는 머리끝까지 올라온 말을 드디어 입 밖에 내뱉었다.
“죽어버려, 개자식.”
서현은 마치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더니 곧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웃기 시작했다. 희사는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를 타는 것은 사치였지만 그대로 가다간 계속 따라올 것만 같았다. 희사는 집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원룸의 문을 거칠게 닫은 희사는 야상을 벗고 바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분해, 분하다! 너무 분했다. 전생의 일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의 태도가 자신을 미치게 했다. 서현도 해훈도 전부 증오스러웠다. 고개를 돌려 식탁을 보자 동생의 액자는 자신이 엎어놓은 그대로였다. 저들도 자신만큼 괴로워했으면 했다. 그래, 어쩌면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복수를 하라는 누군가의 뜻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기억하는 자나, 기억하지 못하는 자나 뻔뻔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런 그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 따윈 없었다. 희사는 베게에 얼굴을 박고 신음했다.
희사는 침대 위에서 한참을 뒤척였다. 강해훈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 다음 이번에는 자신이 배신을 하는 같잖은 상상을 해가며, 또는 서현이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죄에 용서를 구하지만 눈길도 주지 않는 자신을 상상하며 적잖게 울분을 삭혔다. 우스웠지만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통쾌했다. 그만큼 해훈의 배신이, 모든 상황을 지옥으로 끌고 간 서현이 원망스러웠다. 희사는 입술을 앙다문 채로 눈을 감았다. 원룸은 전에 없이 추웠지만 침대에서 일어나기조차 싫었다. 오랜만에 터져버린 감정의 폭발은 지나친 피로를 안고 왔다. 그런데도 오늘 밤은 유독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희사는 그저 사는 것이 힘들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만 그것조차 희사에겐 고통이었다. 희사는 두 눈을 꿈뻑이며 형광등의 불빛을 계속 노려봤다. 형광등 불빛의 주변으로 까만 점이 생겨났다. 그 까만 점은 다시 눈을 감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이 아쉬워 다시 눈을 뜨자 까만 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보여주는 그림자이건만 그 모양은 마치 나풀나풀 춤추는 나비와도 같았다. 자신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붉은 나비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희사는 그것을 더는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잠이 들 때까지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3
“……. 님.”
“……님, 희사 도련님!”
희사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갓 잠에서 깨어 눈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마치 바닥에 풀칠을 해 놓은 듯 몸 또한 떨어지지 않았다. 희사는 안간힘을 써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어깨에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악.”
“어머, 일어나지 마셔요. 도련님.”
희사는 희미한 시야 속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를 봤다. 누구더라? 낯은 익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 여자였다. 희사는 어깨의 통증 덕에 비몽사몽간한 기운이 확 달아났다. 아무리 많은 꿈을 꾸었지만 이렇듯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희사는 고개를 내려 인두로 지지는 통증이 오는듯한 왼쪽 어깨를 봤다. 어깨와 겨드랑이 사이에 하얀 천이 여러 겹으로 감겨있었다. 분명 다친 것은 맞는데 어디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아니면 누구에게 맞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희사는 목이 말랐다.
“무, 물 좀.”
여자는 재빠르게 희사의 옆에 놓인 도자기 잔에 물을 따랐다. 여자가 희사의 등을 감싸 안아 천천히 일으켰다. 희사는 여자가 쥐어주는 다기잔을 들고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차가운 물이 금세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희사는 그 시원함을 만끽한 순간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 동안의 꿈은 텔레비전을 시청하듯이 이미 일어난 일들을 보는 것만 가능했다. 꿈속의 자신이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수 있었다. 마치 과거의 일을 떠올리듯 그저 자연스러운 장면 연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만 희사의 가슴 속을 파고 들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 마치, 현실처럼 생생했다. 희사는 다시금 어깨를 움직여보았다. 삽시간에 말도 못할 통증이 몰려왔다. 소리도 못 지르는 입을 벌린 채로 고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희사의 이상 행동에 앉아있던 여자가 밖으로 나갔다. 얼마 되지 않아 의원이 들어왔다. 그 뒤로 자신의 어머니도 따라 들어서고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희사가 앉아있는 금침(衾枕)옆에 앉았다. 여자의 작은 어깨를 감싼 붉은 망사천이 빛에 비친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어쩌다 그런 것이냐, 이 어미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 것이야!”
여자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희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여자는 분명 자신의 어머니가 맞았다. 같은 자이나 현생의 어머니가 아닌, 전생의 어머니. 희사는 여자에게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진심어린 걱정을 느꼈다. 의원은 희사의 손목을 들어 맥을 짚더니 몇 번 꾹꾹 누르기를 반복했다. 어깨를 다쳤는데 맥을 짚는 것이 미심쩍었으나 토를 달진 않았다. 희사는 어쩌다 자신이 이리 다친 것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여태껏 꿔온 꿈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일이었다.
“희사야, 서현 태자전하께서는 무조건 자기 잘못이라고 하시나 그럴 리가 없지 않겠느냐.”
여자는 마치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죄를 시인하라고 하는 듯한 말투였다. 허나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아마도 자신이 서현과 관련되어 다친 듯했다. 서현 태자라고 함은 황제가 되기 이전을 뜻했다. 서현이 태자였던 시기는 자신이 기억하기론 그의 나이가 14살에서 17살까지였다.
희사는 일단 정신을 차리기 위해 꿈에서 깰 때마다 반복했던 시간 할애하기를 시작했다. 다시 금침에 몸을 뉘이고 천천히 자신이 누구고 이곳이 어딘지를 되새겼다. 어쩌면 눈을 뜸과 동시에 현실로 돌아갈지 몰랐다. 희사는 천천히 귀를 닫고 숨을 골랐다. 그러자 주변의 잡음들도 점점 사라져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의 이름과 위치, 지금의 진정한 현실이 무엇인지 인지한 다음 눈을 떴다.
시동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와, 의원,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까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 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희사는 무언가가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 때 닫힌 미닫이문 사이로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자전하 드십니다.”
희사는 고개만 돌려 열리는 문을 응시했다. 희사의 곁에 있던 세 사람이 급히 자리를 일어섰다. 열린 문안으로 남자가 들어서자 방에 있던 자들이 뒷걸음질로 희사에게서 물러섰다. 희사는 서현의 얼굴을 보기 전에 눈을 감았다. 서현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 마다 방안 가득 사향(麝香)향이 짙어졌다. 서현이 희사의 몸을 덮은 금침을 봤다. 수 마리의 붉은 나비가 수놓아져 남자가 쓰기엔 화려하다 할법했다.
“많이 아픈 것이냐?”
눈을 감고 여전히 쳐다보지도 않는 희사를 보고 서현이 말을 건넸다. 희사는 서현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목이 메어 말을 간신히 잇는 자 같았다.
“희사.”
서현이 희사를 부르자, 대신 여자가 나섰다.
“태자전하, 우리 희사가 기력을 못 차리는 것 같사옵니다. 아직도 저리 고통스러워 하니.”
“그래서, 지금 내게 나가라 둘러말하는 것이냐?”
서현이 여자를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여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전부 나가 있거라.”
서현이 손짓하자 머뭇거리던 여자가 사람들을 밖으로 물렸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서현이 희사에게로 바싹 다가왔다. 희사가 눈을 떠 옆에 앉아있는 서현을 천천히 응시했다. 태자를 상징하는 한 쌍의 승천용이 수놓아진 금색의 비단 홑옷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렸다. 조금 앳돼 보이는 서현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제 갓 열댓 살을 넘긴 듯해보였다.
“많이 아파?”
서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희사에게 손을 가져왔다. 희사는 그 손길을 피하려다 어깨의 통증에 이를 악 물었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기에 이리도 시큰거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희사야, 뭐라고 말 좀 해.”
서현은 사람들이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어조로 희사를 대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전의 해훈보다도 더 다정했다. 희사는 지금 이 상황이 왜 이렇게 현실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도 꿈의 연장선상이라 여겼다. 곧 잠에서 깨어날 것이 분명했다. 허나 무기력하게 지나간 일을 봐왔던 때와는 다르게 현재를 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서현을 보지 않고자 눈을 감았던 것도, 목이 말라 물을 마신 것도 전부 자신의 의지였다. 희사가 생각에 잠긴 채로 서현을 봤다. 그 눈빛에 서현이 다정히 웃었다. 갓 피어나는 백일홍처럼 화려하다. 희사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도 독이라 생각했다. 저 아름다운 얼굴은 잔인한 일도, 누구를 상처 주는 것도 절대 행하지 못할 것만 같이 보였다.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그러지 그랬어?”
싸늘한 희사의 말에 서현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희사의 차가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괴로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다쳤어야해. 왜 나를 감쌌어.”
“감싸다니?”
“2황비(皇妃)의 사람들이 보낸 자객이 분명해. 제길, 그대로 죽이지 말고 문초를 했어야 하는데.”
희사는 서현이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서현은 분한 표정으로 희사를 끌어안았다. 희사가 그의 품을 벗어나려 틀었지만 어깨의 통증 때문에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거 놔.”
“왜 그래, 아파서 그러는 거야?”
서현이 희사의 어깨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희사도 고개를 내려 왼쪽 어깨를 보자 천의 깊은 곳에서부터 피가 묻어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출혈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선명한 붉은 색보단 검붉은 색에 가까웠다. 그래, 어깨의 어딘가가 찢어졌다면 이렇게 아픈 것이 이해가 갔다.
“주변 사람들이 이리도 고통스러울 거라면 태자 따윈 되지 않는 게 좋았어.”
서현이 쓸쓸히 중얼거렸다. 희사는 처음 보는 서현의 부드러운 모습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희사의 기억에 있어서 서현은 그저 악귀와 같은 잔인한 자였을 뿐이다. 저 아름다운 얼굴 그대로, 자신의 어미를 웃으며 난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안고 있는 그의 손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그래도 희사 너만은, 너만은 내 곁에 계속 머물 거지?”
서현이 확인하듯 한자 한자 물었다. 희사가 그의 품에서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희사의 이마에 서현의 입술을 내려닿았다. 희사가 화들짝 놀라 그를 밀쳐냈다.
“악. 아…….”
화끈하다 못해 온 몸이 저리는 통증에 희사가 말을 잇지 못했다. 다치지 않은 손으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가.”
“뭐?”
“여기서 나가라고!”
“대체 왜 그래, 나야 서현이야. 내게 왜 그렇게 차갑게 구는 거야.”
“…….”
“앞으론 나 때문에 희사 네가 다치거나 아프지 않게 할게. 그러니 내게 그렇게 말하지 마.”
서현이 마치 다정함을 구걸하듯 희사에게 매달렸다. 희사는 전생을 꾸준히 경험했지만, 아주 어릴 적과 자신이 죽기 전의 일을 제외하곤 꿈을 통해 봐온 것이 거의 없었다. 대게 꿈은 해훈을 만나고 나서의 일이나 서현에게 모든 것을 잃고 나서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특히 서현이 태자로 있을 때의 일은 거의 보지도 알지도 못했었다.
“황궁으로 갈까? 아니야 황궁은 위험하니까 이곳에 있는 게 좋겠다. 2황비의 동생인 네 어미도 믿을 순 없지만. 그래도 네게 필요한 사람이니까.”
서현은 희사를 바로 눕히고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려주었다.
“한동안은 나도 이곳에 머물 거야. 네가 다 나을 때까지.”
희사는 눈을 감았다. 서현이 더 뭐라고 말을 건넸으나 대답하기도 상대하기도 전부 귀찮아졌다. 어깨의 둔탁한 통증만이 기분을 점점 가라앉히고 있었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이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희사는 점점 감은 눈 속의 어둠이 깊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완벽하고 새까만 어둠이 눈 안에 자리 잡았을 때 서현의 목소리도 완전히 멀어졌다. 서현의 입술이 다시 이마에 닿았지만 그 때는 그것을 거부할 힘도 생기지 않았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