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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겁환상(前劫喚想) 1부-2화 (2/21)

         

전겁환상(前劫喚想) 1부-2    by  

2010-04-23 00:38:25 , Monday 

해훈은 홍등가로 들어서는 입구 근처에 도착하자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희사는 발가락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해훈이 “희사님은 잠시 여기 계십시오.” 하고 손님용 마차가 늘어서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희사는 신을 벗고 싶었으나 행여 해훈이 걱정할까 짐짓 아무렇지 않게 서있었다. 다시 돌아온 해훈이 희사를 제일 앞 마차로 밀어 넣었다. 대장간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것처럼, 바퀴의 마모가 거의 없는 깨끗한 마차였다. 희사가 당황해서 뭐라 하려하자 해훈이 손가락을 들어 쉿하는 시늉을 만들어냈다. 희사의 옆에 바싹 앉았다. 마차의 문을 닫자마자 말이 푸륵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마차의 바퀴와 흙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우렁찼다.

“이, 이게 무엇이냐.”

“희사님이 산을 타고 싶다 하셨지 않습니까.”

희사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자 해훈이 웃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은 얼굴입니다. 하하하.”

자신을 놀리는 해훈에게 희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면 너도 나도 큰일 난다.”

“그저 들키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돈은 어디서 났느냐. 마차 값은 어찌하려고.”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왔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꽤 큰돈을 벌었으니 희사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훈이 허리를 굽혀 희사의 신을 벗겼다. 자유로워진 발가락이 찡했다. 물집이 여러 번 잡혀 터진 맨발이 민망해 희사가 발을 뒤로 숨겼다. 해훈이 그런 희사의 발을 자신의 허벅다리 위에 올렸다. 희사는 얼떨결에 마차 옆문에 등을 받친 채로 해훈을 바라보는 형상이 됐다.

“놔, 놔라.”

“그러다 머리에 더듬이가 생기겠습니다.”

자신이 자꾸 말을 더듬는 것을 놀리는 해훈의 장난에 거부할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해훈이 한 손으로 희사의 발을 감싸 안아 꾹꾹 주물렀다. 그 압력에 희사의 입에서 앗, 하고 고통에 찬 신음이 샜다.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신이나 급히 뛰었나봅니다.”

작은 마차의 공간에서 희사는 해훈에게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까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다행히도 말의 거친 숨소리와 바퀴와 땅의 마찰소리로 인해 해훈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는 데도 해훈이 자신의 발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이, 이제 됐다.”

희사가 조금 힘을 주어 발을 빼내 다시 마차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지런히 놓인 나무 신 옆에 그 보다 더 가지런한 희사의 발이 보였다. 

“정말 더듬이가 생기면 더 예뻐져서 어떡하나 걱정됩니다.”

“그만 좀 놀려라. 근데 어디까지 가는 것이냐? 벌써 한참을 벗어난 것 같다.”

희사는 해훈에게 더 놀림을 당하면 홍당무가 될 것 같기에 화제를 전환했다. 아니 그보다 정말 너무 멀리 온 것만 같아 겁이 덜컥 앞섰다. 자신이 혼날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해훈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웠다.

“유악산(瑜岳山)까지 갈 겁니다.”

희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유악산은 희사의 고향을 안고 있는 산이었다. 게다가 유악산은, 산길잡이들도 꺼려할 정도로 가파르고 험난한 산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 본 산은 눈부시도록 푸르고 아름답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을 벌하기라도 하듯 험하기 그지없었다. 희사도 유악산의 중간까지 가본 것이 다였다.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해훈이 데려온 것만 같아 마음 안쪽이 더없이 따스해졌다.

“그럼 앞에만 보고 가는 거다.”

희사가 조금 누그러져 말을 건네자 해훈이 크게 웃었다. 희사는 창을 가린 천을 걷어 밖을 봤다.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이 그 길이고 그 산이 그 산 같지만, 자신이 살던 곳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차가 유악산(瑜岳山)이라 새겨있는 비석 앞에 멈췄다. 저 비석은 희사가 어렸을 적 아버지가 유명한 비석 장인에게 시켜 만든 것이었다. 지금은 누구의 것이 된지는 모르겠으나 유악산의 소유자는 그때만 해도 자신의 가문이었다. 

마차에서 먼저 내려 해훈이 대금을 치루는 동안 희사는 나무 신을 다시 신었다. 마차와 마차꾼은 해훈과 희사가 산의 입구로 가는 동안에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아마도 돌아가는 길 삯을 미리 지불한듯했다. 조금 걷던 해훈이 갑자기 희사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희사님, 제 뒤에 업히십시오.”

“뭐, 뭣?!”

“그 신으론 못 걸으십니다. 그렇다하여 맨 발로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싫다! 그냥 내가 걷겠다.”

“자꾸 우기시면 어깨에 메고 올라갈 겁니다.”

해훈이 희사의 두 종아리를 양 손으로 쥐고 앞으로 잡아당겼다. 그 반동에 희사가 휘청하며, 해훈의 등에 가슴이 털썩 닿았다. 희사는 여전히 자신의 심장 소리가 해훈에게 들릴까봐 조마조마했다. 분명 맞닿은 얇은 천 사이로 두근대는 맥박이 전해질 것 같았다. 

“어찌 이리 가볍습니까. 만날 한 수저 두 수저 먹고 마니, 마치 속이 빈 도자기 같습니다.”

“내려놓아, 내가 걷겠다는데도!”

희사가 위에서 발버둥 치자 해훈이 걸음을 빨리 했다. 성큼성큼 산길을 타는 해훈의 등이 단단했다. 푸르다 못해 눈이 멀어버릴 듯한 진청색으로 염색한 나뭇잎들이 휙휙 옆을 지나쳐갔다. 사람들이 터놓은 길은 해훈이 업고 가도 될 만치 다듬어져있었지만, 조금 더 올라가면 혼자 걷기도 힘든 가파른 산길이 나올 것임을 희사는 알았다. 그때는 꼭 내리겠다고 생각하며 희사가 조심스레 해훈의 어깨에 손을 감았다. 

뒤에 업힌 희사가 저항을 멈추자 해훈도 올라가는 속도를 조금 늦췄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산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색을 갈아타는 나뭇잎들이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희사는 유악산을 좋아했다. 산봉우리까지는 올라가보지 못했으나 언젠가는 꼭 그 위에까지 가보리라 마음먹었었다. 물론 앞으로 자신이 또다시 유악산을 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좋으십니까.”

“응, 좋다.”

“나도 좋습니다.”

마치 바보 같은 대화가 오가는데도 희사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사람들이 세워놓은 마지막 나무 이정표 앞에 선 해훈이 흠, 하고 멈춰 섰다. 

“내려가자. 이제 내가 걸어서 갈련다.”

“얼마 올라오지 않았는데 왜 벌써 내려갑니까.”

“얼마라니, 두식경은 충분히 올라온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한참을 올라왔는데도 해훈의 등이나 이마엔 땀 한 방울 맺혀있지 않았다. 희사가 뒤에서 다시 버둥거리자 해훈이 성큼성큼 길도 나 있지 않은 산을 올랐다.

“길도 모르면서 어찌 또 가느냐!”

“산길이 거기가 거기지 않습니까. 희사님은 걱정 마시고 그냥 뒤에서 경치나 구경하십시오.”

해훈은 평탄한 길을 오를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산을 탔다. 희사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는 자신이 일어났을 때보다 한참이 기울어졌다. 희사는 해훈이 오르는 길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몇 해 전 찾은 절벽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때 밤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은 자신을 찾겠다고 집안의 모든 일꾼들과 가족들이 나와 온통 산을 뒤진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귀가 파이도록 설교를 듣고 나선, 한동안 혼자선 이곳에 얼씬도 하지 못했었다. 

“이 위로 쭉 올라가면 정말 좋은 곳이 있다.”

희사는 마치 타지에서 놀러 온 친구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말을 건넸다. 해훈은 희사가 손가락으로 가르친 따라 윗길을 쭉 올랐다. 반각정도 오르자 앞이 탁 트인 전경이 보였다. 산이 품고 있는 마을이 한 눈에 다 들어왔다. 해훈도 그제야 희사를 내려놓았다. 희사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 가까이 다가갔다. 해훈이 희사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러다 떨어집니다.”

“난 높은 곳은 무섭지 않다.”

부드럽게 뿌리치자 해훈이 다시 붙잡지는 않았다. 몇 해 전 이곳에서 마을을 내려다 볼 땐 운명이 이렇게 바뀔 거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자신만 혼자 남을 것이라곤. 희사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훈은 희사의 눈물을 보지 못했는지 그저 산 아래의 전경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마을 아래는 수레를 길게 이은 마차가 오색 천으로 치장을 하고 일렬로 행진을 하고 있었다. 어찌나 긴 수레인지 이 높은 곳에서도 보일 만큼 눈에 띄었다. 마을에서도 황제를 위한 축제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희사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주먹을 꽈악 쥐었다. 여자처럼 길게 길러 치장한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는지도 모르고 몸을 떨었다. 그 몸의 떨림은 황제의 대한 두려움도 있었으며 그보다 더 큰 분노도 있었다. 황제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직접 부모를 죽였다. 포박되어있는 어머니의 가슴을 칼로 난자했다. 희사는 그것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도 반항도 애원의 말도 할 수 없었다. 황제가 희사 아버지의 몸을 잘라낼 때까지도. 그 피의 바다 속에서 희사의 몸을 더럽힘에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희사는 죽음보다 고통이 더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의 손에 죽은 희사의 친족 수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었다. 희사는 황제가 사람 같지 않았다. 사람의 가죽을 쓴 악귀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다정하게 웃을 땐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으나 그 웃음엔 진정한 다정함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정교하게 만든 도자기 인형같이 차가운 황제는 마치 독이 가득한 악의 꽃 같았다. 아름다움에 취해 다가가지만 실상 그 안은 독이 가득했다. 

황제는 희사의 먼 친척이었다. 어렸을 적 황궁을 찾아갔을 땐 몇 번이고 같이 어울렸으나 황위에 오른 뒤로는 어울릴 수가 없었다. 예전에도 누구에게나 부드러운 성품은 아니었으나 이렇듯 잔인한 악귀 같진 않았다.  

실상 희사의 가문이 반역을 꾀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는 단 하나뿐이었다. 얼마든지 위조 될 수 있는 종이 문서. 하지만 황제는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희사의 일족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몇 번이고 농락했다. 희사는 황제가 자신을 품을 때마다 아무 것도 듣지 않도록 모든 소리들을 차단해버렸다. 자신의 숨소리도 황제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듣기 싫었다. 그렇게 셀 수 없을 정도로 희사를 품은 황제는 어느 날 발로 걷어차듯 쉽게 희사를 버렸다. 황제는 그렇게 희사를 유곽에 팔아버렸다. 

희사는 차라리 황제에게 안기는 것보다 얼굴도 모르는 유곽의 높은 님에게 당하는 것이 더 나았다. 유곽의 손님이라고 해봐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명 뿐이다. 그 높은 님은 얼굴을 볼 수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사람이다. 희사는 오히려 그 높은 님께 감사했다. 그래 행운아라. 우스웠다. 희사가 한숨을 크게 내쉬자 해훈이 물었다.

“내려가고 싶으십니까?”

“아니, 조금만 더 있다가.”

해훈이 뒤에서 희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희사는 몸에 힘을 빼고 해훈의 가슴에 등을 댔다.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해훈 네게 기대도 되는 걸까. 

“넌 내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것이냐.”

“내가 희사님께 무엇을 잘해줬습니까.”

“전부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다면 내가 희사님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희사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워서도 기뻐서도 아니었다. 단지 울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이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희사는 누군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 이야기를 해준 것은 황제였다. 그때의 황제. 지금까지 왜 잊고 있었을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으로 말입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태어난다 했다.”

“그럼 다음 생엔 쥐로 태어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뛰어내리면 되는 겁니까?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해훈의 장난 섞인 대답에 희사가 쓰게 웃었다.  

“그 이야기는 누가 해주었습니까?”

“글쎄……. 모르겠다.”

희사는 절벽의 밑의 마을을 바라보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저 산꼭대기까지 도달하면 분명 구름과 같이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만일 자신이 뛰어내리게 된다면 그곳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희사님은 나를 좋아하십니까.”

“그래, 좋다.”

“그럼 여기서 우리 같이 뛰어내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럴까.”

희사가 작게 웃으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나무 신을 벗었다. 그것을 손에 들고 맨발인 채로 절벽이 아닌,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해훈이 희사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았다. 

“높은 곳은 안 무서워도, 뛰어내리는 건 무서운가봅니다?”

“그래, 무섭다. 내가 왜 뛰어내리느냐.”

“하하.”

해훈은 다시 희사를 업어들었다. 올라온 것보다는 더디게 산길을 내려갔다. 마치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둘이 같이 있고자 하는 바람이 느껴졌다. 희사는 이대로 둘이서 어디론가 사라지고만 싶었다. 해훈의 등에 뺨을 기댔다.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해훈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묵묵히 산길만 내려가고 있었다.

유곽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해훈은 평소와 다르게 말이 없었다. 마치 무엇을 곰곰이 생각해서 결심을 내리려하듯 이마엔 약간의 금이 가 있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소리만 유독 요란했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느냐?”

길게 이어진 침묵을 참지 못하고 희사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해훈은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인상만 쓴 채로 앉아있었다. 희사가 다시 물으려하자 해훈이 희사와 눈을 마주했다.

“희사님.”

희사는 해훈의 다음 말을 차분히 기다렸다.

“난 희사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함께이지 않느냐.”

해훈의 말이 이상하기에 정정하자 해훈이 희사의 몸을 감싸 안았다. 희사는 가만히 해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어찌 이리도 따스한가. 그것을 깨닫자마자 희사는 유곽으로 돌아가는 길이 마치 지옥 길로 향하는 듯 했다.

“희사님은 나를 믿고 따라올 수 있으십니까?”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둘이 도망가자는 말입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둘이서 말입니다.”

희사가 어깨에 기댄 얼굴을 급히 떼었다. 믿기지 않는 눈으로 해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해훈이 자신과 도망 칠 생각을 했다니. 그래, 기쁘다. 더 없이 기쁘지만 그래서는 안됐다. 행여 붙잡히기라도 하면 둘 다 죽거나, 자신은 또 다시 다른 곳으로 팔려가 살 수 있다 해도 해훈은 어떻게든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처음 희사가 유곽에 들어갔을 때 한 호위무사가 자신이 지키던 야화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했는데 보름이 안 되어 잡혀왔다. 야화는 싼 값에 다른 곳으로 팔려갔고 호위무사는 양 팔이 잘렸다. 그 후, 호위무사는 화류가의 더러운 길바닥에서 얼어 죽었다. 그것이 자신과 해훈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니 겁이 덜컥 앞섰다.   

“너, 너, 넌! 안 된다.”

“분명 더듬이는 한숨자고 일어나면 생기겠습니다.”

“농담을 할 때가 아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냐!”

“희사님은 나와 함께 하고 싶지 않습니까?”

해훈이 희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마차는 마구 흔들거렸으나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다. 희사는 안 된다는 독한 마음을 품다가도 해훈의 얼굴을 마주하면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정말 그와 다른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찾지 않고, 둘이서 행복할 수 있는 그런 곳. 과연 있기나 할까.

“함께… 나도 너와 함께하고 싶다. 행여나 붙잡히게 되면 넌 죽을 것이다. 난 그래서 싫다. 안 된다.”

“희사님 등에 업고도 그 험한 산길을 탔는데, 데리고 도망가지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외려 작정하고 도망가면 찾지 못하는 법입니다.”

단호한 해훈의 말에 희사는 입을 다물었다. 머리는 안 된다 안 된다 말하나 가슴은 이미 그와 함께 유곽을 도망치고 있었다. 정말 해훈이 자신을 사랑하고, 함께하고 싶다면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높은 님에게 빚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래 자신이 진 빚이 아니었으니 상관없지 않으려나. 희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엇보다도 도망친다면 유곽에서 보낸 자 뿐만 아니라, 황제가 알게 된 후엔 나라에서도 쫓기는 신세가 될 가능성이 컸다. 자신은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반역죄인의 자식이다. 

“지금 당장 답을 달란 것이 아닙니다. 나흘 후 자시에 유곽의 뒷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행여 오지 않는다면 난 희사님을 전처럼 호위할 것이고, 오신다면 아무도 찾는 않는 곳으로 희사님과 도망가겠습니다. 혹 오지 않으신다하여, 전처럼 희사님을 호위한다 해도 제 마음은 괴로울 것입니다.”

해훈이 쓴 웃음을 지었다. 희사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에게 왜 이렇듯 마음을 뺏긴 것인지. 그만이 내게 잘해주었기 때문에 그를 믿게 된 것인지. 아니, 그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 생각한 순간부터 아무것도 상관없어진 것이다. 홍등가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희사와 해훈은 서로를 감싸 안고 있었다. 희사는 다시 나무 신을 신고 해훈과 함께 홍등가의 깊숙한 곳으로 걸었다. 희사의 걸음은 어찌 보면 휘청거리는 것 같기도 하여서 보는 이로 하여금 위태하게 느껴졌다.  

희사는 유곽으로 돌아와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찌하지 못했다. 마음은 여전히 갈팡질팡했으나, 분명 약속한 날이 되면 그를 만나러 갈 것임을 확신했다. 붙잡히지 않으면, 그래 잘만 도망가면 되지 않는가. 희사는 얄팍한 희망에라도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해훈은 희사를 유곽으로 데려다 주고 나서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도 떠날 준비를 하려면 정리해야 할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훈도 자신이 나올 것임을 확신하고 있을 터였다. 해훈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연정이 가득한 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희사가 안절부절 못하고 마루를 거닐자 유곽의 주인이 이상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엉덩이에 불이 붙었어? 뭐가 안절부절 못해. 오늘은 높은 님도 오시지 않으니 그리 서 있을 것 없다.”

유곽의 주인은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다른 가게의 주인들처럼 야화들을 때리거나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그저 돈만 제때 벌수 있으면 그만인 남자였다. 주인이 긴 곰방대를 태우며 툇마루에 앉았다. 희사는 괜스레 가슴 한구석이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혹여나 도망갈 생각을 읽은 건 아닌지 심장이 더욱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이리 앉아봐라.”

희사는 떨리는 손을 뒤로 가져가고 경직된 얼굴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주인 옆에 앉자 곰방대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희사의 뺨을 간질였다. 주인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희사를 쳐다봤다. 옆에 앉은 희사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대곤 고개를 올렸다. 아래서 위로 희사를 올려보는 바람에 희사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희사는 주인이 한 번도 자신을 포함한 가게의 야화들에게 손을 대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이런 상황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희사는 더욱 불안한 것이다.

“희사야.”

“네.”

목소리가 행여나 떨리지는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평소와 다름없이 들렸다.

“괴로우냐?"

“아닙니다."

“아니야, 괴롭겠지 괴로울 거야. 곱게만 자랐던 귀족의 아이가 어찌 창부란 것을 견디겠어."

주인이 곰방대를 한계까지 빨아들였다가 뱉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황제폐하께서 왜 너를 죽이지 않고 이곳에 팔았을까?”

희사는 아무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저 황제의 뜻이었다.

“고통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 치고는 편안하지 않더냐? 아무리 높은 님이라 한들 누가 유곽의 야화를 사들인단 말이냐. 하룻밤 와서 자고 가면 그만인 것을.”

희사는 머릿속에서 마치 종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 종이 천천히 울려 퍼지듯이 골이 지끈거렸다. 주인이 곰방대 끝에 달린 재를 탁탁 털어냈다.  

“내 그리 사연이 많은 놈들을 봐왔지만 너처럼 안쓰러운 녀석도 없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더 말하다간 아마 내 목이 날아가지 싶구나. 허허.”

희사는 노인처럼 웃으며 일어나는 주인을 쳐다봤다. 주인은 희사보다 열댓 살은 많아보였지만 행동이나 말투는 그보다도 한참 더 들어보이도록 행동했다. 희사는 주인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더 물어봐야 알려주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시야에서 멀어지는 주인의 등만 응시했다. 주인이 희사가 거주하는 유곽의 방에서 사라지고, 기다렸다는 듯이 해훈이 들어왔다. 얼굴에 웃음이 한 가득이었다.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해훈이 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왔다. 희사의 어깨를 끌어안고 방으로 이끌었다. 바람이라도 들어올 새라 미닫이문을 꼭 닫고 해훈이 희사를 아랫목에 앉혔다.

“피곤할 텐데 쉬시지 왜 나와 계십니까.”

“주인이 왔었기에 나가있었다.”

자신이 안절부절 못했기에 마루에 있던 것이었으나 해훈에게 그런 말은 하기 싫어 거짓을 둘러댔다. 그러자 해훈의 표정이 눈에 띠게 굳었다. 희사는 자신이 무슨 말 실수라도 했나하여 그전 말을 생각해봤지만, 그럴 만한 것은 없었다. 

“주인이 왜 왔습니까.”

마치 추궁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였다. 희사는 그의 차가운 말에 조금 마음이 상했다.

“이곳의 주인이니 오지, 못 올 이유는 또 뭐가 있더냐.”

“혹, 우리 얘기를 한 것은 아닙니까.”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얘기할까. 너야말로 이상하다. 왜 이러는 것이냐.”

“아닙니다 희사님. 그저 걱정이 되어 그랬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해훈이 굳혔던 표정을 그제야 풀고 희사를 끌어안았다. 별다른 향을 뿌리지 않았음에도 희사에게선 계속 맡고 싶은 달콤한 향내가 났다. 해훈은 자신도 이상할 정도로 그 향기에 취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해훈이 살짝 몸을 떼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희사의 이마에 따스한 입술을 맞댔다. 희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해훈의 입술이 눈에, 코에, 그리고 마지막 입술에 닿을 때까지. 

희사는 어둠 속에서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부서질까 다정한 손길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황제와는 달랐다. 황제는 자신을 마치 헤진 헝겊종이 다루듯 늘 함부로 대하기만 했다. 어차피 황제에게 있어선 자신은 이미 발에 치이는 황궁의 먼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 먼지보다 더한 종자였다. 분명 그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허나, 희사가 유곽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귀족들은 모르겠으나 백성들은 황제를 좋아하다 못해 숭배까지 할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현 황제가 즉위한 뒤로 백성들은 제일 살만해졌다 말한다. 상인들의 늘어나 시장이 활성화됐을 뿐 아니라 썩었던 관리들도 싹 사라졌으며, 세금 또한 많지 않다 했다. 아름답고 현명한 황제는 노래까지 만들어져 사람들 사이에서 불리었다. 유곽 안에 있다 보면 이사람저사람을 통해 여러 이야기가 들려오기 마련이다. 희사는 황제에 대한 이야기는 되도록 듣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백성들에게 좋은 황제라 봐야 자신에겐 끔찍한 악귀일 뿐이었다. 희사는 쓴 웃음을 머금었다. 현명한 황제가 반역죄인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다니……. 맞대었던 입술이 부르르 떨리자 해훈이 조금 느슨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그럼, 나흘 후 자시에 기다리겠습니다.”

“어, 어디를 다녀올 것이냐?”

“예, 희사님과 떠나려면 제 신변을 정리해야하니 오늘부터 유곽에 저는 없습니다. 약속한 날짜 안으론 돌아오겠습니다. 부디 마음 성치 말고 계십시오.”  

해훈이 희사의 뺨에 작은 소리가 들리도록 입술을 댄 후 방을 빠져나갔다. 희사는 황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복수하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었다. 미약한 자신을 탓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자괴감뿐이다. 황제가 고통 받으라 자신을 살려두었으면 행복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황제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악이었다. 

4

희사는 유독 이 나흘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벌써 반식경만 있으면 해훈과 약속한 시간인 자시가 된다. 희사는 그제야 떠날 채비를 했다. 유곽은 큰 손님이라도 왔는지 평소보다 풍악소리와 사람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웠다. 오히려 희사에게는 기회로 느껴졌다. 자신이 사라진다 하여도 눈치 채려면 아주 한참이 지나야 알 것 같았다. 희사는 서랍 안쪽에 몰래 숨겨두었던 옷가지와 신발을 꺼냈다. 아랫도리와 윗도리가 따로 나눠진 활동복이다. 평민들이 자주 입는 의복이었으나 귀족의 의복처럼 색이 화려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것을 한 벌은 자신이 입고, 남은 하나는 얼마 되지 않는 돈과 함께 보자기에 쌌다. 혹시나 싶어 몰래 장터에서 산 뒤, 지니고 있던 물건들이었다. 이런 일에 쓸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말이다. 희사는 허리까지 오는 치렁거리는 머리를 질끈 묶어 하나로 틀어 올렸다. 평범한 의복과는 어울리지 않으나 해훈이 선물해준 붉은 나비 장신구로 고정을 했다. 이미 손톱도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바싹 가위로 잘랐다. 

미닫이문을 살짝 밀어 주변을 살폈다. 희사의 방은 손님을 받는 유곽의 중앙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희사의 방 주변을 밝히는 세 개의 홍등까지 중앙으로 전부 가져갔는지 주변은 한없이 어둡기만 했다. 희사는 자신의 몸 하나가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만 미닫이문을 열었다. 몸을 옆으로 비틀어 조심스럽게 나온 다음 다시 미닫이문을 꽉 닫았다. 희사는 마루 밑에 가지런히 놓인 나무 신을 한번 쳐다보곤 자신이 들고 나온 고무신에 발을 끼워 넣었다. 원체도 조심스러운 걸음걸이기에 평소와 같이 걸으면 되었다. 유곽의 뒷문까지 가는 길이 마치 유악산을 오르는 것보다도 멀게 느껴졌다. 

뒷문의 목련나무에 기댄 한 인영이 보였다. 노랗고 하얀 목련 꽃잎들은 어둠에 먹혀 마치 악의 꽃처럼 느껴지게 했다. 희사가 잰 걸음으로 목련 나무 앞에 다다랐다. 그제야 해훈의 얼굴이 보였다. 해훈 역시 자신을 기다리느라 초조한 얼굴이었다. 

“오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이제 이곳에 있기 싫다. 너와 함께 가고 싶다.”

희사는 마음 속 깊이 담아 둔 말을 꺼내놓았다. 그 말에 해훈이 밝게 웃었다. 뒷문을 빠져나가자 해훈이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검은 말 한 마리가 서있었다. 끈으로 매어 두지 않았음에도 말은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해훈이 입은 옷만큼이나 윤기 흐르고 까만 말이었다. 해훈이 희사를 안아서 말의 안장에 앉히고, 그 앞에 올라탔다. 해훈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말의 고삐를 쥐었다. 

말은 어두운 밤길을 마치 대낮을 활보하듯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희사는 해훈의 허리를 감싸 안고 부디 무사히 도망가기만을 빌었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밤의 바람은 꽤나 찼다. 해훈은 멈추지 않고 달리고 달렸다. 희사는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 채 해훈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해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희사는 보이지 않는 앞으로의 미래를 상상하며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희사는 귀족이었을 때부터 본래 말을 잘 타지 못했다. 대게 마차로 이동했으며, 어쩔 수 없이 말을 타는 날은 가장 얌전한 녀석으로 골라 타야했다. 어렸을 적 낙마를 한 것이 큰 무서움으로 자리 잡은 이유에서였다. 낙마를 한 희사에게로 말의 앞발이 내려 꽂혔다. 다행히도 희사의 몸을 살짝 비껴나가 크게 다치진 않았었다. 그래도 그 때의 위협적이었던 기억은 생생했다. 검은 말은 성인 두 사람을 태운 것 같지 않은 속도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예전이었다면 무서움에 몸도 펴지 못했을 터인데 이제는 해훈이 있기에 그런 것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쉬지 않고 달리던 말이 속도를 천천히 줄이기 시작했다. 해훈이 쥐었던 고삐를 느슨하게 잡았다. 희사는 어두운 주변을 둘러보다 이곳이 곧 익숙한 곳임을 깨달았다. 오늘 낮에 왔던 유악산이었다. 유악산이라 새겨진 비석 앞에 말이 아예 멈추어 서자 해훈이 땅으로 몸을 내렸다. 그리고 희사를 안아들어 역시 바닥에 내려주었다. 

“여기는?”

찬바람에 입술이 메말라버려 말을 하자마자 아랫입술이 찢어진 것 같았다. 따끔함에 혀를 내밀어 쓱 훑자 피 맛이 베어 나왔다. 

“산을 타고 넘어 갈 겁니다.”

“유악산은 한 번도 넘은 사람이 없다. 근데 어찌, 그것도 이 밤에 넘느냔 말이냐.”

“하하. 넘는 사람이 왜 없습니까. 전 수십 번도 넘어본 것 같습니다.”

희사가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해훈이 손을 들어 희사의 동그란 이마를 한번 쓸었다. 해훈도 조금 불안해 보이는 것은 괜한 기우에서일까.

“며칠을 더 가야 하니, 마을에 가서 요기할 거리 좀 사오겠습니다. 같이 가면 아무래도 눈에 띌 테니 희사님은 이곳에 천둥이와 함께 계십시오.”

해훈이 말을 고갯짓했다. 말의 이름이 천둥이라. 불안한 마음에도 희사가 밝게 웃었다. 

“천둥처럼 빠르다 하여 천둥이냔 말이냐. 이 녀석도 유치한 이름이다.”

“말 주제에 이름이 있는 게 어딥니까. 하하. 어디 가시면 안 됩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아이도 아니고, 얼른 다녀오너라.”

해훈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을까진 한식경이면 충분히 다녀올 시간이었다. 희사는 천둥이의 긴 머리 갈기를 쓰다듬었다. 천둥이도 싫지는 않은지 연신 푸륵푸륵거리며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말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천둥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속 만지고 있자니 해훈이 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 기분은 어릴 적 자신을 제일 예뻐했던 여시종 하나가 장을 보고 온다고 해놓고선, 마차에 치여 죽어 돌아왔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희사는 설마 설마 했다. 어서 해훈이 웃으며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뒤돌아 있는 방향에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해훈이 오는 소리이기를 바랐건만……. 그럴 리가 없었다. 얼핏 듣기에도 수 마리나 되는 말발굽 소리였다. 유악산은 험하기 때문에 원체도 사람의 왕래가 적었다. 저 요란한 말발굽 소리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과 해훈을 잡으러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리도 빨리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희사는 어떻게든 도망가기 위해 천둥이의 위에 올라타려 했다. 혹시 해훈이 먼저 잡힌 것은 아닌가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 쳤다. 차라리 무사히 도망간 것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면 다행이었다. 천둥이의 몸체가 워낙 큰 터라 잘 올라타 지지가 않았다. 희사가 간신히 천둥이의 위로 오르려 했을 때였다. 무언가 둔탁하게 박히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천둥이가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희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달려 나가는 천둥이의 허벅다리에는 화살이 꽂혀있었다. 천둥이는 마치 해훈이 사라진 것과 같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희사는 땅에 부딪힌 머리를 감싸 안고 끙끙댔다.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는 듯 신음 소리를 연방 흘렸다. 

얼마 되지 않아 시끄럽던 말발굽 소리들이 멈추고 말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등 뒤에 와 닿았다. 희사는 입술을 문 채로 고개를 돌렸다.

“꽤나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군.”

황제는 말 위에서 오른손으로 남은 손목을 주무르며 여유롭게 얘기했다. 남은 왼손에는 활이 들려있었다. 이 어두운 밤에 목표물을 향해 정확히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희사는 황제가 어찌 이곳에 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도망친 사실이 이렇듯 빨리 황제에게 보고 될 리가 없었다. 황제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희사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어둠에 가려진 새까만 동공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지만.

희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황제의 뒤로는 다섯 명의 호위병들이 말에 올라타 있었다. 앞으로는 도망 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의 최선은 산으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문제는 황제와 호위병들의 손에 들려있는 활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해훈이었다. 행여나 지금 오게 된다면……. 희사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나?”

황제가 비웃으며 말했다. 희사는 등골까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왜 말을 못해. 감히 내가 물어보는데 입을 다물고 있어?”

“제게, 제게 이러는 이유가 무어십니까.”

“내 소유의 물건이 도망갔는데 당연히 쫒아야하지 않겠어?”

“나를 유곽에 팔았으니 나는 폐하의 소유가 아닙니다.”

희사가 소리치자 갑자기 황제가 배를 움켜쥐고 웃기 시작했다. 그 반동에 황제가 타고 있는 말이 몇 번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네가 유곽의 것이라고? 대체 누가 그러더냐. 유곽에 판 것도 나이며, 다시 널 산 것도 나 하나뿐인걸 여태껏 몰랐단 말이냐.”

희사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주인과의 대화에서 시작된 머릿속을 울리는 종은 이제 쾅쾅거리는 소리로 뒤바뀌었다. 자신을 샀다는 높은 님이 황제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처음부터 팔지 않았으면 되었을 것임을. 희사가 뒷걸음질을 쳤다. 다각다각, 또 다른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희사는 황제의 뒤로 새로 나타난 또 하나의 인영을 봤다. 그리고 희사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황제는 뒤로 다가온 인영을 확인했다. 그리곤 그 아름다운 얼굴로 희사를 단 번에 얼릴 수 있는 차갑고 시린 독을 내뱉었다.

“말의 근육이 찢기진 않았나보군.”

“아무리 폐하라도 천둥이에게 활을 쏘신 건 너무하셨습니다.”

해훈이 웃으며 황제를 봤다. 희사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훈이 왜 멀쩡히 저기 있는지, 그가 황제와 왜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해훈, 그 동안 야화의 호위 따위로 있느라 참으로 수고해주었다.”

“아닙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유곽의 제 신변을 정리하는 사이, 조금 장난 끼가 발동되어서 말입니다.”

“장난 끼라니?”

“저 야화가 저를 너무 믿기에 조금 골려준 것뿐입니다. 이년을 같이 지냈는데 저 역시 잠깐의 재미라도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저 자가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말입니다.”

희사의 입에선 밭은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규칙적이지 못한 마치 곧 숨이 끊어질 듯한 미약한 소리였다. 심장이며 배가, 아니 온 장기들이 다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저 자는 내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재미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서현과 해훈은 서로가 아는 사이여선 안 된다. 하물며 해훈이 자신의 마음을 찢는 말을 해서도 안됐다.

“대, 대체….”

희사가 애원하듯 해훈을 바라봤다. 해훈은 그런 희사를 보며 전과 다름없이 웃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희사님. 아니 이젠 존대할 필요가 없나.”

희사는 저 자가 해훈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래 그럴 리가 없었다. 해훈은 다른 곳으로 도망갔을지도 몰라. 저 자는 내가 아는 해훈이 아니다! 희사가 뒤로 달려서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호위병들이 활을 들자 황제가 소리쳤다. 

“죽이지 마! 살려서 데려와. 어디라도 다치게 하면 너희부터 죽는다!” 

희사는 어두운 산길을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달리는 것보다 빠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속 달리고 달리면서 생각했다. 해훈이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 어찌 황제와 두터운 사이처럼 보이는 것인지. 왜 자신의 호위무사로 있었는지. 그리고 주인이 자신에게 왜 오늘 굳이 그런 이야기들을 꺼냈는지. 왜! 왜! 왜!! 희사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황제의 말대로 자신을 산 높은 님이 황제였다면 해훈은 그의 수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감시하고,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 것인가. 아아아아아! 희사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전부 찢어진다면 그대로 픽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정히 웃었던 그가, 나와 행복해지자 말했던 그가 전부 거짓이었다니! 

희사는 뒤에서 쫒는 자들에게서 도망쳐 달렸다. 유악산은 말이 달릴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었다. 희사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험한 길을 오름에 따라, 자신을 따라오는 호위병들의 소리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 어두운 밤에 산길을 마구잡이로 달리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법이 아니었다. 

이런 어두움 속에서도 희사는 전부터 올라가는 길을 이미 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해훈의 등에 업혀 올라왔었다. 희사는 그 행복했던 따뜻함을 떠올리며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아 내렸다. 이정표가 끝나는 곳까지 달리고 달렸다. 더 위로 올라가면 절벽이 나올 것이다. 더는 쫒아오지 못하는 것을 느낀 희사는 숨을 몰아쉬며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해훈을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유곽의 주인은 호위무사로 온 해훈을 탐탁치 않아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탐탁치 않아한 것이 아니라 어려워한 것이었다. 해훈은 한낱 야화의 호위무사 따위가 아니었다. 희사는 그 많은 의문에도 단지 한가지만이 가장 알고 싶었다. 해훈이 정말 자신을 사랑한 것인지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이 연기였는지. 왜 내게 그런 연기를 했는지. 그에게서 답을 듣고 싶었다. 황제가 자신의 가문을 멸할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희사 네게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이 뭔지 보여주겠다.’ 

과연 그것이 사랑이었단 말인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은 배신당한 사랑이었나? 희사는 연방 흐느끼며 깎아지른 절벽까지 걸었다. 어둠에 삼켜진 마을은 간간히 등불만 보일 뿐 그저 새까맣기만 했다. 희사는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다 바스락하며 흙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서 더 내딛으면 절벽 밑으로 떨어질 것은 자명했다. 희사가 새까만 하늘을 보며 울었다. 이제 산봉우리는 보이지 않았다. 

“희사님!”

희사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희사님!”

희사는 해훈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연방 떨렸다. 해훈이 희사의 곁으로 걸어왔다.

“내게 다가오지 마!” 

희사가 앞으로 몸을 휘청이자 해훈이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희사님 그러다 떨어지겠습니다. 제게로.”

해훈이 다급하게 외쳤다. 희사에게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 한 가지만 궁금했을 뿐이다.

“넌 대체 누구인 것이냐. 내가 아는 해훈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냐!”

“일단 이리로 희사님!”

“말해! 말하란 말이다!”

희사가 소리치자 해훈이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봤다. 희사는 저것마저도 진심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난, 난! 네가 누군지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그저……. 너를 믿었을 뿐이다”

희사는 눈물에 얼굴이 전부 적셔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희사는 해훈이 미웠다. 그럼에도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렸다. 제발 전부 거짓은 아니길 바랐다.

“저는…….”

휘잉하며 희사의 몸을 바람이 감싸 안았다. 조금만 휘청여도 바로 아래로 낙하할 것만 같았다. 해훈이 다시 손을 뻗으려 하자 희사가 소리쳤다.

“나를 가지고 노니 즐겁더냐.”

희사는 비참했다. 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지. 자신이 그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죄를 받는지. 희사는 서럽고도 슬퍼서 엉엉 울었다.

“나는 희사님을.”

희사는 자신의 울음소리에 막혀, 그 다음 말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황제와 잠자리 할 때와 같았다. 그래, 차라리 귀를 닫는 것이 좋았다. 해훈의 뒤로 곧 황제가 나타났다. 말은 올라오지 못해 뛰어 왔는지 늘 정돈됐던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숨은 여전히 고르기만 했다.

“이리와, 희사.”

황제가 절벽에 선 희사에게 으르렁 거렸다. 마치 희사는 두 맹수를 눈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서로 호시탐탐 자신을 뜯어먹을 기회만 노리는. 

“서현.”

황제는 황제가 되기 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희사를 쳐다보았다. 희사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질 꽃처럼 위태위태했다.

“서현.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헌데 내가 너를 받아주지 못했으니 나를 증오한다고도 했지. 헌데, 어찌, 어찌! 내 온 가족을 죽인 너를 사랑할 수 있겠어!”

“이리와, 희사. 넌 내 소유야. 그건 변하지 않는다.”

아아아……. 희사는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전부다 틀렸다. 

더는 서현의 것으로 있기는 죽는 것보다 싫었다. 

“서현,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그 다음 생에는 원하는 것으로 태어난다했지?”

희사의 울먹이는 말에 서현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치 희사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는 듯 놀라보였다. 희사는 다시 마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현과 해훈이 뭐라 말을 했으나, 희사는 바람 소리에 모든 걸 묻어버렸다. 희사는 마지막으로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해훈과 서현이 동시에 절벽 밖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희사의 몸이 떨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그래.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 이렇게 생이 괴로울 것이라면 그냥 살지 않는 것이 낫다. 

희사는 떨어지는 동안 하늘을 올려봤다. 여전히 산봉우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리 뛰어내릴 것이라면……. 올라가지 못한 저 끝 산봉우리를 바랐건만. 결국 이생에선 올라가지 못하는구나 생각했다. 질끈 묶었던 머리가 바람결에 마구 나부끼며 풀어졌다. 붉은 나비도 그제야 제 갈 길을 가듯 바닥을 향해 가라앉았다. 희사의 머리카락도 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축복하듯. 희사의 눈 위로 별을 가리는 폭죽이 피워 올랐다.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 자신은 이렇게 죽는다. 희사는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음 생애에 태어난다면 그저 행복하게 살고 싶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 받지 않고, 증오하지 않도록. 아니 그것보다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으련만.”

희사는 정신이 끊기기 전 서현과 해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이미 귀는 막혀버린 뒤였다. 이제 자신의 앞엔 내려다 본 마을만큼이나 새까만 세계만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헉!”

희사는 몸을 번쩍 일으켰다. 커다랗게 뜬 눈앞엔 고사리 모양의 벽지가 있었다. 희사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꿈속에서와 다르지 않게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게다가 아직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희사는 한참을 멍한 상태로 침대에 앉아 서럽게 울기만을 했다. 아주 오래 전 일이건만, 마치 불과 몇 분 전에 일처럼 여전히 가슴이 찢기는 것 같았다. 베개도 온통 희사의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희사는 현실로 돌아와서도 전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해훈의 배신에 대해서. 주먹을 들어 가슴을 탁탁 때렸다. 서현도, 해훈도 자신에게 슬픔만을 안겨준 존재였다. 자신이 전생에서 봐왔던 다정한 해훈은 단지 거짓에 지나지 않았다. 희사는 전생의 해훈뿐만 아니라 현재의 강해훈에게도 미칠 것 같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것은 동시다발적이었다. 희사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괴로워하지 말자. 그저,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다. 지금과는 전혀 관계없는 과거의 일일 뿐이야. 희사는 그렇게 울고 있는 자신을 계속 위로했다. 그럼에도 눈물을 쉽사리 거두지 못했다. 

희사는 꿈속에서 눈앞에 펼쳐진 새까만 세계가 죽음인가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높이에서 뛰어내렸으니 살아남을 수는 없다. 희사는 아직도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던 그 절벽의 아름다움이 생생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곳에서 삶을 끝냈으니 이 역시도 행운인가. 젖은 얼굴로 쓸쓸이 웃었다. 

희사는 슬픔을 떨쳐내듯 욕실로 터벅터벅 걸었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이상했다. 자신의 얼굴이 맞는데도 아닌 것 같은 기분. 전생의 자신과 지금이 크게 다를 것은 없었으나, 분명 다른 한 가지는 있었다. 지금 거울에 비치는 자신은 삶의 열정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마치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과 같은 눈. 전생의 희사는 행복하진 못했으나 이렇듯 마음이 비어있진 않았다. 해훈으로 인해 채워지고, 해훈으로 인해 비어버렸다. 또 한동안 멍하니 거울을 응시하다 희사는 전날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겉옷이고 속옷이고 할 것 없이 전부 벗었다. 욕실의 가장자리에 놓인 세탁기 안에 옷가지들을 집어넣었다. 샤워꼭지를 온수로 돌려놓고 한참을 틀자 미지근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욕실 안을 하얀 수증기가 가득 메웠다. 

몸을 때리던 따스한 물이 순식간에 얼음 같은 차가움이 되어 열을 앗아갔다. 뜨거운 물이 나오다가도 불시에 찬물로 바뀌는 것은 희사의 원룸에선 어차피 자주 있는 일이었다. 희사는 변덕스럽게 온도를 바꿔가는 샤워기의 물을 맞아가며 서둘러 샤워를 마쳤다. 세면대 선반 서랍을 열어 수건을 꺼냈다. 여유분이 두어 개 남은 것을 보니 오늘 중으로 세탁기를 돌려야할 것 같았다. 김이 끼어 뿌옇게 변한 거울을 손바닥으로 쓱쓱 쓸었다. 아직 눈가가 붉었다. 세면대의 차가운 물로 연방 세수를 하며 부어버린 눈을 식히려 노력했다. 수건을 허리에 걸치고 욕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휴대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샤워를 할 때부터 울려댄 건지, 아니면 막 울리기 시작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액정 위에 [사장님]이란 글씨가 떠다녔다.

“네, 여보세요.”

“어머, 희사씨!”

사장의 목소리가 잔뜩 높아져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소리야, 일은 내가 아니고 희사씨가 있는 거지.”

“네?”

희사는 뜻밖의 말에 반문했다. 휴대폰을 든 채로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통을 꺼냈다. 통 안에 물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뚜껑을 열고는 한 입에 털어 넣었다.

“희사씨 삼일이나 뭐한 거야, 전화도 안 받고! 혹시 무슨 일 생겼어?”

희사는 입안에 품은 물을 삼키다 콜록하고 기침을 내뱉었다. 삼일이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니. 희사가 놀라서 휴대폰 화면을 봤다. 하지만 전화중이기에 날짜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

희사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휴대폰을 다시 귀에 가져다대자 사장의 빠른 속도로 질문을 쏟아 부었다.

“왜 그래? 희사씨. 많이 아팠어? 아니면 내가 보너스를 너무 조금 준거야? 챙겨준다고 했는데 부족했다면 미안해.”

“아, 아니에요! 며칠 좀 아팠어요. 오늘은 출근할게요. 죄송합니다.”

“난 또~ 내가 섭섭하게 한지 알고 엄청 전전긍긍했다고. 혹시 오늘도 아픈 거면 쉬어도 괜찮아. 사실 요새 내가 희사씨 너무 부려먹었잖아.”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응 그래 희사씨, 그럼 가게에서 봐.”

“네.”

희사는 전화를 끊고 나서 날짜를 확인했다. 사장의 말이 맞았다. 잠든 날로부터 삼일이나 지나있었다. 희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전생을 보여주는 꿈을 자주 꾸긴 했어도 이렇게 긴 시간을 잤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희사는 며칠 전에 사두었던 바나나가 전부 썩어 갈색으로 변해버린 것을 봤다. 한 개를 떼어낸 뒤 입에 넣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집어넣었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데 또다시 해훈의 생각이 났다. 창포에 감은 자신의 긴 머리칼을 흰 천으로 툭툭 두드려 물기를 빼주던 그의 손길이 그리웠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그와의 생활을 당장 떠올리지 말라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허나, 그 다정한 행동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것을 안 지금은 차라리 모를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사는 모든 생각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흔들었다. 나갈 채비를 하고 현관으로 향하는 도중 식탁 위에 올려진 동생의 사진을 봤다. 무표정한 얼굴은 슬퍼보이지도 않고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래, 서현. 네가 그렇게 쉽게 죽어선 안됐다. 잔인하기만 했던 황제, 서현은 현세에서는 자신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아니 확신하진 못했지만 자신은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부모는 전세에도 현세에도 같은 자들이었다. 사실 전세의 기억은 드문드문 영상으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에 대한 사실은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다만 전세에서의 어머니가 더 다정했다는 것뿐. 현세에서의 여자는 자신에게 무관심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동생인 현성을 제어할 수 없을 만치 학대 한 것은 그전 생애에서 그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다른 여자가 낳아온 자식인 현성이 지독히도 미웠을 뿐인가. 이유는 희사도 알지 못했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전세의 업은 따라오기 마련이라 생각했다. 황제는 수많은 생명을 죽였으며, 그 대가로 현세에서 그 죽임을 당한 사람 중 하나에게 반대로 죽임을 당했다. 희사는 서현의 환생인, 자신이 동생 현성이 살아있을 적을 떠올렸다. 어머니에게 쫓겨나 한 겨울에 맨발로 정원에 서 있을 때를. 자신은 가져간 코트를 동생의 몸에 둘러주고 말했다.

“감기 걸리면 안 돼, 현성아.”

추위에 떨고 있는 현성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정확하게는 아니나 자신이 기억하는 서현의 어릴 적과 매우 비슷했다. 

“거짓말 마, 형은 내가 독감이라도 걸려서 죽었으면 좋겠지?”

현성이 희사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마치 희사의 얼굴 가죽을 뜯을 기세였다. 황제였다면 가능했을 일이지만 이 생애에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아니, 넌 그렇게 쉽게 죽으면 안 돼.”

목도리까지 둘러주며 현관문을 열었다. 현성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생각해. 난 친자식이 아니니까. 근데 형이 날 미워할 이유는 없잖아! 내가 형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데!”

14살의 현성이 소리쳤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용서받을 순 없다. 희사는 불쌍한 자신의 동생을 볼 때마다 서현을 증오하는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영혼은 같을 테지만 서현과 현성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현성은 그저 불쌍하게 학대받는 내 동생 같이만 느껴졌다. 허나, 꿈을 꾼 다음 날은 그가 용서할 수 없을 만치 미웠다. 현성이 언젠간 전생의 서현처럼 자신의 부모도 주변 사람인들도 전부 죽여 버릴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은 이미 그가 죽어버렸기에 그럴 일은 없었다. 

희사는 현성이 조금 더 살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번 생은 자신이 갚아줄 차례였다. 그러나 너무 싱겁게 떠났다. 병원에서 마치 잠을 자듯 입원해있는 2년 동안 그가 고통을 받았는지, 아니면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한 채 정신이 없어진 건지는 모른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살아가나 자신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현성의 병원비. 희사는 그가 죽음으로서 하나 뿐인 삶의 목적도 끝나버렸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이제와 생각하지만 서현과 해훈이 무슨 관계였는지, 또 자신을 왜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는지, 알고 싶은 답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차피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전생은 기억하는 자는 자신하나며 서현은 이미 죽었고, 해훈은 기억하지 못한다. 무표정한 동생의 사진을 보다 가슴이 저릿했다. 

얼마 전부터. 아니 동생이 죽었을 때부터 떠오른 물음. 진정 서현의 환생은 현성이고, 해훈의 환생이 강해훈이 맞을까라는. 그것을 다시금 되새기자 희사는 가슴이 더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만일 동생이 서현의 환생이 아니라면 그 둘이 그렇게 닮았을 리가 없다. 서현을 향한 분노에 눈이 멀어, 동생을 미워한 것은 사실이었다. 현성이 서현과 지독하게 닮았다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았다. 같은 집에 사는 같은 식구라는 사실 또한 소름끼쳤다. 

현성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 정확히 말해 어머니가 그의 머리를 부서뜨리기 전날 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건만 현성이 자신의 방을 찾았었다. 희사는 방문을 두드리는 그의 소리를 무시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현성은 허락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더니 희사가 덮고 있는 이불을 밖으로 제쳤다. 동생의 얼굴 곳곳에 난 생채기들이 아물 새도 없이 새로운 흔적을 만들고 있었다. 갑작스레 현성이 외면하는 자신을 보며 울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맞아도 절대 울지 않던 동생이 자신을 보며 소리 죽여 울었다. 희사는 그 얼굴을 무시하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현성은 얼마간 흐느끼다 자신에게 애원하듯 말을 건넸다. 

“날 미워하지 마. 그러지 마, 형.”

희사는 방을 나서는 현성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서현은 자신의 가족을 다 죽여 놓은 것도 모자라 자신을 능욕하고,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칭했다. 차라리 자신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현성을 지켜주고 사랑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병원에서 돌연 현성이 죽었을 때 깨달은 것은 그가 더 살았으면 했다는 것이다. 오래 오래도록 살아서 그전 생에서 사람들을 괴롭힌 것만큼 전부 다 갚고 갔어야했다. 

그런데 그가 정말 서현이 아니면? 

희사는 현성이 죽고 나서 늘 그 질문에 시달렸다. 그저, 불쌍한 내 동생이었다면……. 희사는 그랬기에 현성이 더 살기를 바랐다. 전생의 꿈은 현생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늘 희사의 뒤를 따라다녔다. 사람은 깨어있는 시간만큼 잠들어 있다. 그 잠들어있는 인생 절반의 시간이 온통 전생의 꿈으로 범벅되었기에 희사는 그것을 단순한 꿈쯤으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희사는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두 개의 세계를 살았다.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는 엇갈려가며 정신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희사는 액자를 식탁 위에 뒤집어 눕혔다. 자신을 보는 현성의 눈빛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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