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겁환상(前劫喚想) 1부-1 by
2010-04-23 00:36:58 , Monday
전겁환상(前劫喚想)
환진(奐振)의 21대(代) 황제는 한 명의 정실과 두 명의 후처를 두었고, 정실인 황후와 후처인 황비들은 전부 아들을 하나씩 낳았다. 황후의 아들인 첫째 황자는 그 모습이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고, 제 2황비의 아들인 셋째 황자는 첫째 황자의 생김새와 매우 흡사해 그 둘을 통틀어 모두가 황실의 꽃이라 불렀다.
환진실록(奐振實錄)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는 제 1황비의 아들인 둘째 황자는 어렸을 적 마음의 병을 얻어 황궁 내 서궁(西宮)의 깊은 곳에 유폐됐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기록서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단순히 둘째 황자는 정신병을 앓았던 것이 아닐까 유추할 뿐이다.
정실인 황후는 자식이 태자로 책봉된 후 동궁(東宮)내에서 숨을 거뒀다. 갑작스런 황후의 죽음에 귀족들은 그녀가 자연사가 한 것이 아니며, 암살을 당했을 것이라 한데 입이 모아졌다. 두 명의 후처 중 제 2황비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으나, 물증이 없기에 처벌할 수 없었다.
반년(半年)만에 황후의 국상이 끝난 뒤, 21대 황제는 정실인 황후의 자리가 비어있음에도 후처 중 그 누구도 정실로 승격시키지 않았다. 권력암투에 휩싸일 자신의 아들들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단 황제가 자신의 성품을 그대로 빼닮은 태자를 가장 아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황후가 죽은 뒤로도 경국지색인 태자는 몇 차례고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황제가 병으로 승하하고 태자는 무사히 22대(代) 환진의 황제로 즉위했다. 22대 황제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제 2황비와 그의 아들인 셋째 황자, 그리고 그들의 외척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들에게 역모(逆謀)죄를 물어 단칼에 참수시켰다. 황제의 칼에 죽은 이만 해도 수십이 넘었다. 그 난리 틈 속에서도 제 1황비와 둘째 황자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둘째 황자는 여전히 마음의 병이 있었고, 제 1황비 역시 정권에 아무런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해가 지난 후, 어느 날의 밤이었다. 22대 황제는 그 날을 기점으로 환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동시에 22대 황제에 대한 기록도 천년을 자랑하는 환진의 역사도 끝을 향해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
........(중략)........
삶에 있어서 죽음을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기 때문이고,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희망의 도약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멸(滅)을 향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릇 역사는 사실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역사의 대다수는 가히 개인의 주관적이며 편협한 시선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환진의 마지막 밤. 환진력(奐振曆) 1078-
후세의 자들은 이것을 기록으로 착각하지 말라. 그저 사적인 대화만도 못한 종잇조각일 뿐이다.
전겁환상 (前劫喚想) 1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고사리 모양이 빼곡히 박힌 벽지. 남자는 이 벽지가 익숙했다. 몸을 일으키자 침대 시트가 버석거렸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자 익숙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 가지의 가전제품이 전부인 생활감 없는 방. 남자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그래. 여긴 내방이구나. 남자는 마치 무슨 확신이 있는 사람처럼 침대를 벗어났다. 발걸음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 자신감은 남자 자신이 의도한 것도 아니요, 그냥 몸에 배어 있는 습관 같았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생각했다. 또 자신이 몇 살인지, 혹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쉽사리 떠올리지 못했음에도 남자는 불안하지 않았다. 남자는 다시 몸을 굽혀 침대로 향했다. 꿈뻑꿈뻑 졸음을 쫒아내는 사람처럼 눈을 움직였다. 늘 그렇듯 곧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욕실 앞에 선 남자는 방을 죽 둘러보았다. 10평이 조금 넘는 공간. 그럼에도 가구가 많지 않기에 좁아보이진 않았다. 욕실 안은 남자 혼자 들어가도 비좁을 만한 크기였다. 남자의 세면대엔 칫솔과 치약 그리고 비누뿐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수염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이란 것을 문득 떠올렸다. 남자는 샤워를 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남자의 집은 온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런 와중에 난방도 제대로 돌아갈 리가 만무했다.
남자는 발끝까지 얼려버릴 듯한 추위를 참으며 세면대에 고개를 처박고 버석거리는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남자에게 추위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드라이기로 머릿속만 대충 말린 뒤 남자는 출근 준비를 했다. 두세 겹 감은 목도리에 얼굴의 반을 파묻었다. 속에 양털이 빼곡히 박힌 카키색의 야상을 걸쳐 입은 남자는 거울한번 보지 않고 원룸을 나섰다.
오늘따라 거리가 유난히 조용했다. 사실 평소에는 이 거리가 시끄러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곧 동이 틀 아침을 예견하듯 푸르스름한 빛이 거리 전체에 퍼졌다. 남자의 모습은 그 빛과 도시의 배경에 가려져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초라했다. 남자는 자신이 그토록 초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하나 돌아보지 않고, 누구하나 관심두지 않았다. 무관심. 남자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 세 글자의 의미를 가장 처음 깨달았다.
남자가 일하는 곳은 집에서 도보로 한시간정도 떨어진 곳의 커피전문점이었다. 물론 커피만을 취급하는 가게는 아니었다. 샌드위치, 생과일주스, 아이스티. 메뉴는 남자가 자신의 자랑거리를 말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았다. 매서운 추위가 남자의 목도리 속까지는 파고들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남자는 어깨를 더 움츠렸다.
1층 도로변에 위치한 가게에 도착한 남자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찬바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남자의 손을 괴롭혔다. 가게의 셔터문과 자물쇠가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고 찼다. 기름칠이 다된 셔터문은 끼긱대며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남자의 방보다도 두 배는 더 큰 가게. 남자는 움직이기 쉽도록 야상을 벗어 카운터 뒤쪽에 걸치고 검은 색 앞치마를 둘렀다. 좀 움직이다 보면 따듯해질 것을 알기에 이정도 추위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남자가 커다란 전면 유리창 앞에 놓인 두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갓 전원을 누른 온풍기에선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따뜻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바람이 흘러나왔다. 바닥을 쓸고 닦자 30분이 훌쩍 지나갔다. 가게의 주인은 게으름을 싫어했다. 싫어한다는 소극적인 표현보다는 증오한다, 라는 말이 옳았다. 남자처럼 보잘 것 없는 자에게 주인이 가게를 맡긴 것도 남자 자신이 부지런했기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이제 가게 안은 먼지를 머금은 퀴퀴한 냄새도 가셨고 훈훈한 공기만이 구석구석 내려앉았다.
남자는 주문을 받을 작은 창을 열었다. 남자의 가게는 테이크아웃도 가능했다. 사실 커피숍이라기 보단 작은 테이크아웃 전문점이 맞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남자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사람들이 시선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심히 훑었다. 다들 뭐가 그리 바쁜지 남자의 가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회사를 출근하는 젊은 여자 두 명이 남자의 앞을 지나가다 잠시 멈춰 섰다. 서로 몇 마디를 나누더니 곧 남자에게 다가와 따뜻한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남자는 자랑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맛있게 만들 줄 알았다. 신이 보잘 것 없는 남자에게 준 딱 하나의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손이었다. 남자의 손은 재주가 많았다. 남자는 포타필터에 커피가루를 넣었다. 템퍼로 커피가루를 꾹꾹 누른 다음 머신에 장착했다. 남자는 어느 정도의 압력과 손놀림이 있어야 에스프레소의 맛이 좋을지 예측할 수 있었다.
“빨리 좀 주세요.”
두 명의 여자가 남자를 재촉했다. 주인이 보는 남자의 단점 중 가장 안 좋은 것을 하나 꼽으라면, 손님을 제대로 접대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잠시 만요, 하곤 거품을 냈던 우유를 추출한 커피에 조심스레 옮겨 닮았다. 갈색의 뜨거운 호수위에 떠다니는 나뭇잎을 그려 넣었지만 남자는 손님에게 보여주기도 전에 컵의 뚜껑을 닫았다. 커피 위에 우유로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은 남자의 단순한 취미였다. 남자는 바리스타를 꿈꿨으나 현실은 별보다도 멀었다.
굼뜬 남자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린 여자들이 카페라떼가 담긴 컵을 들고 휙 몸을 틀었다. 여자들은 남자가 들으란 식으로 함부로 내뱉었다. “커피는 확실히 저기 스타벅스가 난 것 같지?” 남자는 다른 여자의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여자가 어떤 대답을 하든 상관없었다. 여자들이 말하는 대형 커피 전문점은 얼마 전 맞은편에 새로 들어선 가게였다. 남자는 그곳의 커피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남자에게 있어서 4천원에 달하는 커피 값은 그야말로 사치 중에 사치였다. 남자는 카운터에 배치된 동그랗고 높은 나무 의자 위에 앉았다.
이번엔 검은색의 잘 빠진 몸체가 남자의 가게 앞에 섰다. 남자는 저 자동차가 올 때마다 늘 생각했다. 꼭 재규어 같다. 아니 퓨마일지도 몰랐다. 남자는 동물원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에 저 차를 어떤 동물에 비교해야 할지 몰랐다. 오늘은 유난히 더 반짝거리는 것이 마치 방금 목욕을 마친 맹수 같았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퓨마나 재규어보다 더 위압감이 넘치는 남자였다. 자동차는 오늘 따라 더 반짝거렸지만, 저 맹수의 주인은 늘 한결 같았다. 남자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늘 눈이 부셨다.
“샌드위치 두 개.”
남자는 올 때마다 항상 샌드위치 두 개를 주문했다. 아마도 조수석에 타있는 여자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늘 같은 여자인지 다른 여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재규어의 남자가 이 가게를 이용한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다. 많으면 일주일에 세 번, 적으면 한번이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요, 희사씨. 항상 잘 먹고 있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가슴 언저리가 따듯해졌다.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음성은 더 부드러워졌다. 희사는 누구에게나 맛있게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남자에게만은 좀 더 특별했다. 가진 거라곤 단 하나뿐인 재주를 최대한 발휘했다. 그래봐야 샌드위치일 뿐이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남자가 행여나 추울까봐 희사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베이컨을 아주 살짝만 팬에 데우고 계란은 남자가 늘 주문했던 대로 완벽하게 익혔다. 야채는 오늘 배달 온 파릇파릇한 양상추를 빵 위에 올렸다. 희사는 사실 샌드위치보다 자신 있는 음식이 더 많았으나 남자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기름을 흡수하는 종이로 샌드위치를 포장한 뒤 가게 로고가 박힌 봉투에 담아 남자에게 건넸다. 희사는 남자와 시선을 마주한 적이 드물었다. 희사의 고개는 늘 아래를 향해 있었다. 무언가 완벽해 보이는 남자에 비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보다 희사는 남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만 원권을 건네는 남자의 손이 커다랬다. 다섯 손가락 끝의 손톱도 마치 누군가가 다듬어준 것처럼 깔끔했다. 희사는 잔돈을 거슬러 주며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이용해 주세요.”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고마워요” 하고 희사에게서 멀어졌다.
재규어는 아침이면 목마름에 오아시스를 찾아온다. 허나 별 다른 휴식도 취하지 않고 메마른 목만 축이면 본래 미련 따윈 없다는 듯 휑하니 가버린다. 그 오아시스가 전부 메말라 사라져버린다 해도 재규어는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 튼튼한 근육과 빠른 다리로 조금 먼 곳의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아내면 그만이니까.
희사에게 얼마 전 주인이 가게를 접을지도 모르니 미리 알아두라 일렀다. 아이들의 교육상 유학을 갈지도 모른다고. 그 뿐만 아니라 가게 앞에 새로 생긴 대형 커피 전문점 때문에 가게의 장사는 전처럼 잘 되지 않았다. 희사는 이 가게가 사라지면 또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했다. 자신의 사정에 있어서 잠시라도 쉴 틈은 없었다.
결국 가게 주인은 그 날 오후 5시에 희사에게 가게를 접겠다며 최후통첩을 했다. 삼일내로 정리가 된다는 말에 희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나 주인이 원하는 대로 희사는 자신의 짐을 전부 오늘 빼내기로 했다. 원래는 밤 10시에 문을 닫지만, 내일부터는 가게 문을 열지 않기에 7시가 조금 넘어 셔터문을 내렸다. 기름칠이 부족해 끼긱대는 저 괴상한 소리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커다란 쇼핑백에는 자신의 짐이 가득 차 있었다. 별거 아닌 옷가지들이었지만 무게가 꽤나 나갔다. 목도리를 제대로 동여매지 않았는지 목덜미 안으로 싸한 바람이 파고들었다. 희사는 조금 걷다 쇼핑백을 내려놓고 야상 안의 목도리를 고쳐 맸다. 뒤에서부터 강렬한 불빛이 깜빡댔다. 희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규어가 매서운 눈빛으로 밤의 길을 밝히고 있었다. 재규어의 조수석 창문이 열렸다. 차 안은 남자 혼자였다.
“희사씨 맞네요, 어디가세요?”
“집에요.”
“집이 어디시죠? 아, 아니다. 일단 타세요, 마침 한가하니까 데려다주겠습니다.”
쏟아지는 말에 희사는 남자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뒤에서 있던 차가 거칠게 클랙슨을 울렸다. 희사는 그 기세에 남자가 열어준 조수석으로 급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쇼핑백이 조수석 밑자리를 가득 채웠다. 남자가 차를 출발시키며 쇼핑백으로 시선을 내렸다.
“집이 어디라고 했어요?”
“사거리 유성 은행 건물이요.”
“아아, 그 건물에 사나 봐요.”
“아뇨, 근처에요.”
“꽤나 먼데, 혹시 그 짐 들고 걸어가려고 했어요?”
“네.”
남자는 그 이상의 것은 묻지 않았다. 희사는 남자가 뭐든 물어봤다면 거짓말하지 않고 전부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에게 깊이 관여하기 싫어하는듯했다. 남자는 희사가 그 가게에 직원으로 일했을 때부터 계속 찾아왔던 손님이었다. 자주 오는 손님이기에 희사의 이름을 알게 됐고, 희사 또한 남자의 이름을 알게 됐다. 강해훈. 하지만 자신이 남자의 이름을 부를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남자의 차에선 원두커피 향이 났다. 퇴근시간이라 차가 좀 밀리는지 앞이 꽉 막혔다. 희사의 얼굴에 조금 불편한 기운이 돌았다.
“여기서 내려서 갈게요.”
“왜요?”
“차도 밀리고. 죄송해서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저도 그쪽으로 가야하니까요.”
남자는 피식 웃으며 쇼핑백의 끈을 쥔 희사의 손을 쳐다봤다.
“괜찮을까요?”
이번엔 남자가 시선을 올려 희사를 쳐다보며 손에 든 담뱃갑을 흔들었다. 희사는 남자의 배려가 오히려 더 불편했다. 담배를 문 남자의 옆모습을 흘낏 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위이이잉하는 소리가 희사의 정신을 화들짝 깨웠다. 자동차 계기판 밑에 내려놓은 남자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핸드폰을 집어서 앞에 뜬 화면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이쪽까지 흘러들어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약간 흥분한 기색이 느껴지는 높은 톤이었다.
“나중에 얘기해. 나 지금 운전 중이야. 일단 끊자.”
강해훈은 기분이 급격히 나빠진 듯 전화를 끊은 뒤로는 희사에게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유성 은행 건물 앞에 다다르자 천천히 차를 세웠다.
“여기서 세워주면 되나요?”
“네.”
“들어가세요. 희사씨 그럼 또 봐요.”
더는 볼 수가 없습니다. 내일부터는 가게 문을 닫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이미 남자는 출발 준비를 마친 듯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쇼핑백의 긴 끈을 어깨에 메고 남자의 자동차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강해훈. 자신이 아는 것은 남자의 이름뿐이다. 이 세계에서 그의 존재에 대해서 안 것은 반년이나 됐지만, 정작 길거리에서 부딪히는 사람보다도 그 연이 얕았다. 희사의 시야가 뿌옇게 짙어졌다. 오늘부터 또 다른 일을 찾아야했다. 남자를 보는 것은 지금이 마지막일 터였다. 남자의 재규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희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재규어는 야속하게도 재빠르게 자취를 감쳤다. 희사는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걸었다. 새벽에 느꼈던 고요함도 여전했다. 이제 갓 출근하는 여자들이 희사와 반대로 걸었다. 그녀들은 좁은 골목길과는 어울리지 않게 치장이 화려했으나 시끄럽진 않았다. 조금 걷다보니 인적이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희사의 집은 도로변까지 나가는데 무려 삼십분이란 시간이 걸렸다. 너무도 좁은 길에 차량도 들어올 수 없다. 덕분에 방세는 쌌지만 정작 건물에 사는 사람은 적었다. 오늘따라 집에 도달하는 그 삼십분의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희사는 밖의 온도와 별 다름 없는 집안에 들어서서도 한참을 쇼핑백을 들고 서 있었다.
***
그 다음 날 낮에는 가게에 임대문의란 종이가 붙었다. 또 그 다음날에도 그 셔터문은 닫히지 않고 종이만 커다랗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강해훈은 희사를 데려다 준 정확히 삼일 뒤 그 가게를 들렀다. 자동차에서 내려 주문을 받는 작은 나무 창문으로 향했다. 바로 앞에 다가가서야 가게 안이 텅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약간 옆으로 빼자 임대문의란 포스터가 보였다. 강해훈은 살짝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뭐야? 샌드위치는?”
옆에 앉은 여자가 강해훈의 빈손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 그게 문을 닫았네.”
“저 가게 휴일 없잖아.”
“아니, 아예 가게 문을 닫았어. 임대 놨던데.”
“아! 진짜? 아쉽다. 저기 샌드위치 정말 최고였는데.”
여자의 과도한 아쉬움에 강해훈이 자동차를 출발 시키며 말했다.
“하긴 오죽 네가 잘 드셨으니. 근데 난 영 빵은 싫어서. 어쩔래? 다른 가게 가볼까?”
“아니, 됐어. 그냥 회사로 가자.”
“샌드위치 두 개로도 양에 안차시는 분이 웬일이야?”
“누가 들으면 돼지인줄 알겠네. 그냥 가!”
강해훈은 여자에게 꼬집힌 팔을 으쓱거리며 속도를 올렸다. 그러다 문득 가게 점원이었던 희사를 떠올렸다.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성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못생기지도 볼품없지도 않았는데 기억에 잘 남지 않는 인상. 아니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기억에 남지 않는 건가? 강해훈은 뭐 무슨 상관이야, 하고 결론을 내렸다. 며칠 전 희사를 데려다준 후 백미러로 보았던 커다란 쇼핑백을 든 채 추운 도로에 서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괜스레 찝찝한 마음이 들어 다시 차를 유턴했었는데 이미 희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대체 뭘 말하려고 했던 것인지 저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은 차를 돌리게끔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었다. 그냥 변덕스러운 마음이었겠지. 강해훈은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었다. 그리곤 곧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을 전환했다.
가게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다른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 들어섰다. 강해훈도 여자를 데리고 새로 들어선 가게를 딱 한번 찾은 뒤로는 그쪽으로 발길도 하지 않게 됐다. 샌드위치 맛에 혀를 내두른 여자 탓이었다. 강해훈은 그 전에 희사가 만든 샌드위치가 얼마나 맛이 있었기에 강청영이 저럴까 싶었으나 강해훈이 맛 볼 기회는 이미 지나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샌드위치보다는 밥이 훨씬 좋았다. 그래도 조금 남아있는 찝찝한 기분은 아마 다른데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이곳이 어디인지 인식하는 것이 느려진 이유는 아마도 그것을 깨닫게 된 이후였던 것 같다. 희사는 오늘도 약 십 분의 시간을 정신을 깨우는데 할애했다. 그래도 전보다 몸은 조금 편해졌다. 세 개였던 아르바이트가 한 개로 줄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돈이 많이 나갈 곳도 없어져서 자신의 앞일만 생각하면 됐다. 기뻐해야하는데 기쁘지가 않았다.
배다른 동생이었으나 하나뿐인 형제는 삼개월전 병원 안에서 세상을 떴다. 동생은 뇌출혈로 2년을 입원해있었다. 엄마가 내려친 프라이팬에 머리가 부서져버렸기 때문이다.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은 동생의 머리를 아작 내기에 충분했다. 다른 여자가 낳은 동생을 키우는 자신의 엄마는 동생을 학대함으로써 그 분을 달랬다. 그것을 말려왔던 아버지도 끝까지 동생을 지키진 못했다. 그 모든 상황은 동생을 병신 만드는 것으로 엔딩을 맞이했다. 여자는 사람들이 보는 경멸의 눈과 질타가 두려워 동생보다 먼저 세상에서 퇴장했다. 지속적인 학대를 의심하던 경찰은 여자의 죽음으로 사건을 종식시켰고, 기사는 단 며칠 시끄럽다 말았다.
동생의 병원비로 모든 것이 다 사라졌지만, 희사는 단 한 번도 동생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여자에게 있어선 자신은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식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을 지키기만 급급했고. 동생은 학대받은 상처로 아파하기만 했다. 희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행복했던 기억이 없었다. 사실 행복이 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병원비로 이제 돈이 나갈 일은 없지만, 행복하진 않았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과연 그 행복이란 것을 맛볼 수나 있을까 의심이 됐다. 분명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카페 아르바이트는 그만두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다니고 있는 곳은 카페라기 보단 퓨전 요릿집이라고 해야 맞았다. 가게는 낮에는 카페로 밤에는 레스토랑으로 운영되는 실정이었다. 주인이 꽤나 열성적이고 도전적이라 낮에는 회사원들을 상대로 도시락 배달 서비스도 겸하고 있었다. 물론 음식은 희사가 만들었다. 주인이 요리사 자격증도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희사를 채용한건 희사가 만든 간단한 김치볶음밥을 맛보고 나서였다. 희사는 레시피만 있다면 무엇이든 만들 줄 알았다.
희사는 오늘도 조금 일찍 출근해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보다 먼저 온건 카페의 주인이었다.
“희사씨, 혹시 배달 가능해?”
희사는 의외의 물음에 주인을 쳐다봤다.
“점심 도시락이요?”
“응. 오늘 규태가 아프다네.”
“할 수는 있는데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지리를 완벽하게 몰라서.”
“아, 해주기만 하면 나는 땡큐지~”
“네. 그럼 제가 할게요.”
주인이 희사의 등을 두들기며 콧노래를 불렀다. 늘 생각하지만 주인은 경쾌한 여자였다. 손님을 잘 접대하지 못하는 자신을 배려해주기도 했다. 그래도 그 전 테이크아웃점에서 일할 때보단 낯을 가리는 성격은 많이 줄어들었다. 어차피 모든 건 익숙해지기 나름이었다. 게다가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나가려면 뭐든지 적응하게 되어있다. 희사는 점심 배달을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도시락을 만들기 시작했다. 월요일은 일본식 주먹밥인 오니기리와 우동국물, 스팸과 비엔나를 곁들인 정식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잡채 같은 볶음 종류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희사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도시락 포장을 시작했다. 대게 음식은 희사가 만들지만 점심 도시락 포장은 늘 옆에서 주인이 도왔다. 주인이 포장을 할 동안 홀 서빙은 또 다른 알바생인 규태가 함으로서 각자의 일을 도맡았는데, 오늘은 규태가 없으니 사장 혼자서 홀을 맡아야했다. 물론 희사도 혼자서 주방 일을 해야 했다. 30인분의 도시락을 싸고 나니 어느새 배달시간이 가까워져있었다. 희사는 보온통에 담긴 도시락들을 꺼내 주방 밖으로 나왔다.
“희사씨 오토바이 탈줄 알지?”
“네. 면허는 있어요.”
“이거 키. 운전 조심하고 다녀와.”
“네.”
동생의 병원비는 날이 멀다하고 불어났었다. 학대를 받는 처지에 보험에 가입해 있을 리도 만무했다. 동생이 첫 수술을 받았을 때 집을 팔아야했으며, 두 번째 수술 때는 그나마 수중에 남았던 돈을 전부 쓸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시작한 여러 개의 아르바이트 중에서도 월급이 가장 좋았던 것은 배달 일이었다. 배달 일을 하려면 면허가 필요했다. 무리해가면서 딴 면허는 때때로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때가 꽤 있었다. 오토바이에 장착된 뒷가방에 한꺼번에 30인분을 넣기는 무리여서 15인분씩 나눠서 배달하기로 했다. 주문서를 살펴보니 총 다섯 개 건물만 돌면 됐다. 다행히도 전부 아는 건물들이다. 고작 다섯 개 건물이니 15인분이라고 해봐야 금방일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30분도 넘게 소비가 됐다. 평소보다도 일찍 배달을 시작했는데도 점심이 늦게 왔다고 타박을 하는 것을 보니 규태의 노고를 새삼 깨달았다. 희사는 앞으론 점심을 더 미리 만들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규태의 이미지가 빈둥빈둥 거려서 그렇지 실상은 부지런한 녀석이었다. 희사가 다시 카페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반 녹초가 되어있었다. 사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힘들지 않냐고 물었지만, 희사는 괜찮다며 작게 웃었다.
나머지는 전부 배달을 마쳤고, 남은 마지막 5인분은 K&M건물 몫이었다. 제일 가까운 곳이라 먼저 돌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다. 희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배달지인 6층을 눌렀다. 한 겨울이라 잔뜩 무장을 하고 오토바이를 탄 터라 헬멧을 쓴 머리가 답답했다. 올라가는 동안 헬멧을 벗어서 옆구리에 끼고 6층에서 내렸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건물이 더 넓어서 주문지인 인사부를 찾는 데만 5분이 넘게 걸렸다. 주문서와 함께 도시락을 내려놓고 여직원에게 현금을 받았다. 희사는 잔돈을 거슬러줄 필요 없이 알맞게 주는 여자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 5인분의 비닐이 사라지니 몸도 한결 가벼웠다. 헬멧만 옆으로 낀 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앞뒤로 총 4대인 엘리베이터가 서로 다른 층에 머물러있었다. 가장 가까운 9층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미적거리지 않고 곧바로 내려온 엘리베이터가 희사의 앞에서 열렸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디뎠다. 무의식적으로 안에 타 있는 사람을 잠깐 쳐다봤다.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희사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강해훈이었다. 일 년 만에 보지만 그가 확실했다. 아마 저 남자를 수년이 지나서 봤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그를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남자는 항상 빛나고 있었다. 남자를 닮아 위압적인 재규어도 여전할 것이다. 희사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잠깐 시선을 위로 올렸다. 처음 보는 것 같지는 않아서 자신을 누군지 떠올리려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지 알 것 같기도 한데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엘리베이터가 2층에 도달했을 때 그제야 남자가 아! 하고 희사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희사씨, 희사씨 맞죠?”
엘리베이터 안엔 강해훈과 희사를 제외하고도 회사원 세 명이 더 있었다. 강해훈이 배달부를 아는 척하는 바람에 세 명이 전부 희사를 응시했다. 희사는 원래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다. 특히 지금같이 한꺼번에 몰리는 것은 더더욱.
“네, 안녕하세요.”
작게 답하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희사가 강해훈보다 먼저 내렸다. 강해훈이 질세라 따라내려 희사에게 말을 건넸다.
“그동안 희사씨가 안보여서 곤란했었어요.”
희사는 뜻밖에 남자의 말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자신이 사라져서 남자가 곤란한 것이 뭐가 있나 싶었다. 혹시 라는 기대를 품기에는 자신이 너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생이 희사씨 샌드위치 정말 좋아했거든요.”
희사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강해훈이 자신의 샌드위치를 좋아했다는 말을 기대했던 걸까? 아니면 더 큰 것을 바랐나? 저도 모르게 자라난 기대치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다.
“배달하나 봐요?”
“네.”
강해훈이 옆구리에 낀 헬멧을 보며 말을 건넸다. 희사는 원래 주방담당인데 배달꾼이 아파서 쉰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강해훈도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뭐 배달하시는데요?”
“도시락이요.”
헬멧만 가지고 있지 철가방이라든지 음식 배달통이 없기에 강해훈은 순수한 의문을 담아 물었다. 희사의 가게 도시락은 일회용품으로 배달 나가기 때문에 다시 그릇을 가지러 오는 수고는 없어도 됐다.
“혹시 희사씨가 직접 만드는 건가요?”
“네.”
어정쩡하게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이야기하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표정을 읽었는지 강해훈이 건물의 출입구 반대편으로 희사를 이끌었다. 그 앞에는 희사의 몸보다 두세 배가 넘어 보이는 물고기 조각상이 세워져있었다.
“전화번호 좀 줄 수 있어요?”
희사는 순간 네? 라고 반문하려 했다가 곧 카페의 전화번호를 물었음을 깨달았다. 희사는 주머니를 뒤적여 배달할 때 같이 넣어주는 홍보용 명함을 꺼냈다. 그것을 건네받은 강해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
“조만간 시켜먹겠습니다. 희사씨 음식 솜씨 솔직히 기대되거든요.”
남자는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할 줄 알았다. 남자의 말에 아무 뜻이 담겨있지 않음에도 희사는 기뻤다.
“가볼게요.”
“네, 희사씨 근데 키 많이 컸네요.”
남자가 자신의 머리에서부터 키를 재는 시늉으로 희사쪽으로 손을 내렸다. 희사는 학교를 그만 둔 고1 이후로는 키를 재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컸는지 알지 못했다. 희사는 고개를 꾸벅 하곤 다시 헬멧을 썼다. 주문을 하겠다는 남자의 말은 빈말일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남자가 주문을 한다면 다른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었다는 일 년 전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또 기대치가 자라기 전에 희사는 마음에서 그 싹을 잘랐다. 분명 그 말은 남자의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희사는 주문서를 확인하지 않은 그 다음날까진 정말 남자의 빈말로만 치부하고 있었다. 규태가 계속 아프다는 바람에 배달은 며칠 동안 희사가 하게 됐다. 주문 종이에 새로 추가된 K&M 이사실 강해훈님. 이란 글을 보고 희사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 세계의 강해훈이 자신을 기억해줬다. 그리고 약속을 지켜주었다. 희사는 들뜬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남자가 유능한 직장인일 것이란 예상은 어렴풋이 했지만, 말로 듣기만 해왔던 이사라는 직급은 참 멀게만 느껴졌다. 그래, 말 그대로 강해훈은 자신과는 먼 사람이었다.
오늘 점심의 마지막 배달 장소는 강해훈이었다. 희사는 강해훈이 아닌, 이사실 앞 안내데스크에 앉아있는 예쁜 여직원에게 대신 도시락을 주고 나와야했다. 혹시라도 강해훈을 직접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어차피 부질없는 바람이다. 직접 그를 봤다 해도 지금의 이 기분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을 테니까. 자신과 강해훈은 너무나도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 * *
점심 내내 카페는 평소보다 바빴다. 배달을 다녀오고 나서도 희사는 두 시간 정도 쉬지를 못하고 계속 음식을 만들어야했다. 아줌마들 계모임을 이 근처에서 가졌는지 한 부대가 우르르 몰려왔다. 사장이 미안하다며 희사에게 손을 모으곤 한쪽 눈을 찡그렸다. 희사도 음식을 만드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이렇게 바쁘게 일하는 것이 꼭 괴롭지만은 않았다. 밤잠도 없애가며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병행할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천국이었다. 아줌마 부대들이 나가고 한숨 돌리자마자 저녁 손님들이 차기 시작했다. 희사는 아마 오늘 집에 돌아가면 씻지도 못하고 바로 뻗을 거라 예상했다.
처음 이 곳에 왔었을 때, 주방을 맡았던 사람은 자신과 기존에 있었던 30대 후반의 여자였다. 여자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일을 그만뒀다. 그 후로 사장이 자신을 너무 믿는지, 아니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지 주방 보조를 구할 생각이 아예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못된 사장 밑에서 죽어라 노동만 착취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사장은 일한만큼의 월급과 추가 수당은 누구보다 잘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사실상 아르바이트를 세 개 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금액상으로 아주 큰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근본도 없는 자신을 고용해주는 사장에게 늘 고마워했다. 한겨울임에도 바지런히 움직이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똑똑, 희사씨. 바빠?”
“아뇨, 주문 받은 건 다 했어요.”
“그럼 아는 사람이 온 거 같은데 나와 볼래?”
희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는 사람이 자신을 찾아 올 턱이 없었다. 앞치마를 벗고 머리에 썼던 분홍색 토끼 두건을 벗었다. 사장이 사다 놓은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쓰고 있는 청결모였다. 어차피 음식 만드는 모습을 누가 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무리 없이 쓰는 중이었다. 당시 ‘희사씨는 은근히 무디다니까’ 하며 사장이 소리 내어 웃었었다.
희사는 창가에 앉은 한 커플을 보고 아아, 생각했다. 강해훈이었다. 옆에는 남자만큼이나 빛나는 아름다운 여자가 앉아있었다.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강해훈이 고개를 돌렸다. 앞에 선 희사를 보고 밝게 웃었다.
“희사씨. 오늘 점심 정말 맛있었어요. 저 그렇게 맛있는 알밥 처음 먹어봤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희사는 이 카페에 와서 연습해왔던 기계적 웃음으로 남자를 응대했다. 자연스러운지 아닌지 까지는 알 턱이 없었다.
“이 녀석이 희사씨 샌드위치 맛 못 잊는 녀석이에요. 큰일입니다. 쟤 입맛 희사씨가 다 버려놨으니까요.”
“어쩐지. 요새 배달시킨 음식이 진짜 맛있더라니까. 그 가게 계시던 분인 건 몰랐는데 정말 신기하다.”
마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선남선녀의 대화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주 찾아주세요.”
더는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아 희사가 먼저 마무리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강해훈이 조금 놀란 표정을 하며 희사를 쳐다봤다.
“희사씨 분위기가 좀 변한 것 같네요.”
그 전에는 어떤 분위기였고, 지금 역시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주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자린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이 크림 스파게티도 진짜 맛있네요. 희사씨는 뭐든지 다 잘 만드나봅니다.”
“그치, 엄마가 만든 것보다 맛있다.”
“엄마가 만든 건 요리가 아니지. 그냥 실험 작이야.”
“오빠, 엄마 울겠다.”
스스럼없는 대화에 희사는 더욱 불편해졌다.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도 솔직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저 둘이 남매이건, 연인이건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아니 거짓말이었다. 강해훈과 저 여자가 남매라는 사실에 기대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올라섰다. 말없이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사장이 주방까지 따라와서 눈을 반짝였다.
“희사씨. 저 사람들 누구야?”
“네?”
“저기 커플 아는 사이야?”
“커플 아닐걸요, 남매 같던데.”
“정말? 저 여자 완전 예쁘지.”
희사는 말을 건네는 사장의 핀트가 조금 빗나간 것을 느꼈지만 그러려니 했다.
“네.”
“그래, 진짜 예쁘다. 연예인같이 고급스럽다.”
여자에 대한 찬사를 퍼붓는 사장의 말에 희사는 고개를 조금 갸우뚱했다. 토끼 모자와 앞치마를 다시 두른 뒤 주문 들어온 음식에 열중했다. 오늘처럼 여러 음식을 만드는 날이면, 이러다 곧 한중일 모든 요리를 섭렵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희사는 찌뿌둥한 어깨를 이리저리로 휘저었다. 오늘은 이 가게에 와서 최고로 바빴던 날 중 하루였다. 정신없던 주방을 다 정리하고 카운터로 나오니 벌써 사장이 마감을 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닫을 생각인지 온풍기도 이미 꺼져있었다. 희사는 카운터 뒤편에 걸린 자신의 야상을 꺼내 입었다. 나갈 채비를 하려는 희사에게로 사장이 휙 무언가를 건넸다.
“희사씨, 이건 보너스야. 요새 많이 바빴지. 많이 못 챙겨줘서 미안.”
“감사합니다. 사장님.”
“웬일이래, 희사씨. 요새 부쩍 붙임성 좋아진 거 알아? 희사씨도 요 일 년 동안 많이 변했어.”
“사장님 덕이죠.”
“어머, 그런 소리도 다하고. 옛날에는 진짜 말도 없고, 붙임성도 없어서 어떻게 서비스업 할까 했는데 이젠 그것도 아니야. 내가 너무 붙잡고 늘어졌네. 피곤할 텐데 들어가 봐. 내일은 좀 늦게 출근해도 눈감아 줄게.”
사장이 희사의 손에 흰 봉투를 쥐어줬다. 보통 월급은 통장을 통해 들어오지만 이렇게 때때로 챙겨주는 보너스는 사장이 직접 봉투에 담아줬다. 희사는 그 봉투를 점퍼 주머니에 구겨 넣고 가게를 나섰다. 2층에 위치한 가게는 계단이 얼마 없어 1.5층에 가까웠다. 야상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걸음을 조금 빨리 하는데 뒤에서 불빛이 강렬하게 반짝 거렸다.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던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1년 전 이맘때였다. 희사가 고개를 돌렸다. 재규어가 희사를 쏘아보고 있었다. 희사가 인도에 가만히 서 있자 차가 앞으로 다가왔다. 조수석의 창문을 내리곤 남자가 말을 건넸다.
“퇴근합니까?”
“네.”
“데려다 줄까요?”
“…….”
“타세요.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희사는 뒤집어쓴 후드를 손으로 내렸다. 정리하지 않아 목덜미까지 자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부드럽게 휩싸였다. 이번엔 뒤에서 경적을 울리는 차는 없었지만, 희사는 조수석에 앉았다. 혹시 남자가 자신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으나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는 웃긴 상상이었다. 그때처럼 지나가던 길에 잠시 자신을 본 것뿐이다.
“어디 산다고 했었죠?”
희사는 속으로 또 다시 쓰게 웃었다. 남자가 자신에 대해 자세히 기억할 리 없는 것이 지당했다.
“사거리 유성 은행 건물 앞에서 세워주시면 되요.”
“아, 맞다. 이제 기억나는군요.”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어울리지 않게 최신가요를 틀어놓았던 남자가 오디오의 음량을 줄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남자는 보이는바와 같이 뜸을 들이지 않고 자신의 용건을 내뱉었다.
“희사씨, 혹시 아르바이트 안할래요?”
“아르바이트요?”
“네. 저 혼자 살거든요. 희사씨만 좋다면 저녁에 오셔서 음식 좀 만들어줬으면 하는데.”
남자의 제안에 깜짝 놀라서 희사는 입을 조금 벌렸다. 앞에서 봤다면 마치 벙찐 표정이었을 것이다.
“일이 늦게 끝날 때도 많아서요.”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페이는 지금 일하는 곳보다 더 후하게 줄 수 있어요. 아, 그만큼 희사씨 음식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니까 기분나빠하진 말아요.”
희사는 자신에게 너무 좋은 말이기에 헛것을 듣고 있는가 싶었다.
“유성 은행 쪽이면 우리 집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네요. 캐슬 아파트 알아요?”
“네.”
“일단 우리 집 가볼래요? 내일 당장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나 사실 입 되게 까다롭거든요. 혼자 나와 살면서 한 5키로 빠진 것 같아요. 얼굴도 많이 상했다니까요. 하하”
희사가 남자를 슬쩍 올려봤다. 말과는 다르게 남자는 여전히 멋진 모습 그대로였다.
“근데 희사씨 몇 살입니까? 고용주가 그런 건 좀 알아도 되겠죠?”
“이제 스무 살 됐어요.”
“네?”
강해훈이 놀라서 반문했다. 그럴 만도 했다. 시간상으로 따지자면 남자를 처음 봤던 곳에서 고등학생 때부터 일했단 소리가 되니 말이다. 강해훈이 조금 당황해서 핸들을 툭툭 두드렸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했네요.”
“사정이 그렇다 보니까요.”
“그래도 지금 미성년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미성년을 쓰는 건 좀 양심상 찔린 달까요. 희사씨는 한 달에 얼마정도가 좋겠어요? 생각하고 있는 금액 말해 봐요. 일단 원하는 대로 맞춰 줄 테니.”
강해훈이 호의를 담아서 희사를 쳐다봤다. 희사의 전신을 알 수 없는 쓰디쓴 기분이 장악했다. 남자의 말에는 가난한 네게 적선이라도 해 도와줄 테니 거절 따윈 하지 마라. 라는 것이 바탕이 깔려있었다. 자신의 성격이 꼬여서 그렇게 들었다면 별수 없으나 저렇게 흥정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희사로서는 비꼬는 것 같은 말투가 튀어나갔다.
“한 삼백이면 좋겠네요.”
“좋습니다. 가사 일까지 다 해준다면 달에 삼백 드리죠.”
희사는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제정신이 아니다. 지금 일하는 곳에서도 보너스까지 합쳐봐야 150만 원을 넘지 못하는데 가정부 일에 삼백을 준다니.
“그런데 희사씨, 혼자 나와 사는 겁니까? 그 나이면 부모님이랑 사는 게 제일 좋을 텐데요.”
“호구 조사까지 하셔야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혹시 화났어요?”
희사는 입을 다물었다. 가사일로만 달에 삼백을 주겠다는데 넙죽 엎드려서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가슴 언저리 아래가 뜨겁게 아팠다. 차라리 현실적인 금액을 권했다면 자신도 남자에게 고마워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삼백이면 저보다 훨씬 훌륭한 요리사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전 희사씨 음식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정도 조건이면 괜찮은 거 아닌가요? 흠, 혹시 더 필요합니까?”
희사가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냈다.
“내릴게요.”
“네?”
“내려주세요. 그냥 다른 분 고용하세요.”
강해훈이 조금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희사를 쳐다봤다.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썬루프를 열어 공기가 조금 통하게 하고 나서야 불을 붙였다.
“담배 괜찮다고 했었죠?”
이미 불을 붙여놓고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강해훈은 마치 이미 자신의 고용주라도 된 듯싶었다. 자격지심이라 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은 남자와 윗사람과 아랫것으로 있는 관계는 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연인사이라는 아주 큰 것을 바란 것도 아니다. 차라리 전처럼 손님과 가게 점원이라는 관계가 더 나았다.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남자는 모르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아주 예전의 관계가……. 더 좋았다.
“내가 기분 나쁘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그냥 난 희사씨 이렇게 젊은데 열심히 일하는 거 보니 도와주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요.”
희사가 고개를 내렸다. 다 헤져 실밥이 뜯어진 스프리스 신발이 보였다. 야상의 소매 역시 다닳아있었다. 그 때 자신의 동생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신이 엄마 몰래 상처에 바를 약을 줄 때나, 한겨울에 집밖으로 쫓겨난 동생에게 자신의 코트를 입혀줄 때. 이렇듯 비참한 기분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대받는 동생을 챙겨줄 때마다 우월감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가진 자의 오해일 뿐이다. 자신이 도울 때마다 동생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이기던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다. 못 가진 자는 그것을 거부할만한 배짱도 여유도 없다.
“1년 전이었으면 염치불구하고 흔쾌히 수락했을 텐데 지금은 그다지 돈이 필요하지 않아서요. 카페에서 버는 수입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희사는 눈앞의 유성 은행 건물을 보고 타이밍이 좋다 싶었다.
“아쉽네요, 제 호의를 저버릴 만큼 돈이 필요 없다니 희사씬 욕심이 없나봅니다.”
“네.”
왠지 강해훈이 자신을 살살 긁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남자는 거절이나 거부의 말을 들은 경험이 적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그것보다 희사는 어서 남자의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재규어와 남자가 자신을 숨 막히게 조여 왔다.
“전 원하는 건 여태 한 번도 놓친 적이 없거든요.”
희사는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우회전을 해야 할 곳인데 남자는 직진 선에 머물러 있었다.
“일단 난 그쪽 음식이 마음에 들었으니 달에 삼백 받는 걸로 하고 오늘부터 시작하죠? 말했듯이 나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제가 원치 않는데요.”
“흠, 그럼 죽어라 그 카페에서 일하시고, 얼마 되지 않는 월급가지고 근근이 생활하시게요?”
“네.”
“참 융통성 없게 사네요. 아니면 답답한 건지."
남자의 말에는 비웃음이 깔려있는 것 같았다. 희사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이제 깨우쳤다. 역시 꿈과 현실은 달랐다. 우습게도 희사는 남자를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미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알았다. 그렇기에 자신에 앞에 불현듯 현실로 나타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허나 지금과는 다르게 꿈에서의 남자는 항상 다정했다. 희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고 몇 번을 제외하곤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그 꿈은 현실만큼이나 실제에 자신과 가까웠다. 그래서 희사는 매일 아침 자신이 누군지, 또 이곳이 어딘지를 깨닫는데 항상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희사의 꿈에선 남자는 자신의 호위를 맡는 무사였다. 인정하긴 싫었으나 꿈과 현실은 아주 달랐다.
남자가 핸들을 틀어 차선을 넘어섰다. 아마도 우회전을 할 심산인가 싶었다. 신호가 완벽히 바뀌기도 전에 남자가 재규어를 몰았다. 남자는 더는 희사에게 권유하지 않았다. 은행 앞에 내려줄 때까지도 약간의 비웃음만 띄고 있을 뿐이었다. 희사는 무엇이 남자의 기분을 저리 나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내 호의를 거절해? 라는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희사는 남자에게 동정 받고 싶지 않았다. 이유 없는 호의는 동정밖에 되지 않는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사는 조용히 말하고 재규어의 품에서 벗어났다. 남자를 태운 재규어는 희사가 뒤돌아 걷기도 전에 그 자리를 떴다. 남자는 자신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좋았다. 자신을 모르는 남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잔인했다.
남자와 자신이 복잡하고 화려한 장터를 돌며 머리 장식을 고르던 때를 떠올렸다. 그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며, 그저 자신의 전생일 뿐이란 것을 알았다. 희사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꿈을 말하지 않았다. 꿈에서 남자는 항상 검은 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남자가 옆에 찬 칼은 남자의 눈빛만큼이나 날카로웠다. 그 곳에서 희사는 야화(野花)였고 해훈은 그런 자신을 지키는 무사였다. 자신이 살았던 전생에서의 야화는 남창을 뜻했다.
희사는 본래 반란귀족의 자손이었다. 황제에게 대항했던 지방 귀족은 반란이 실패한 뒤 전부 처형을 당했다. 황제는 반란 귀족들을 진압한 뒤 오직 희사만을 살려두었다. 그 이유는 희사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18살 되던 해 가족들은 전부 죽고, 희사는 화류가로 팔려나갔다. 그런 희사를 지키는 자는 오로지 해훈 뿐. 가게에선 본래부터 야화들을 지킬 호위무사를 한명씩 배정시켰다. 그 호위무사들은 실상 팔려온 야화들을 깔보고 겁탈하기 바빴다. 허나 해훈은 아니었다. 그들과는 달랐다. 해훈은 어느 귀족보다도 극진하게 희사를 모셨다.
희사는 피부만큼이나 하얀 장삼에 다홍 겉옷을 걸치고 장터를 걷고 있었다. 장터가 들어선 것은 근 보름 만이었다. 희사는 이곳에 상인들이 들어올 때가 가장 행복했다. 자신은 도망칠 수 없으나 상인들은 어디든 떠돌 수 있었다. 희사는 화류가에서 나갈 수 있게 된다면 꼭 상인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희사는 한 상인이 나무 가판대에 올려놓은 머리장신구들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한참을 구경하자 한걸음 뒤에서 희사를 따르던 해훈이 바싹 다가왔다.
“희사님,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십니까.”
“응, 이거. 난 빨간 게 좋다. 빨간 나비는 본디 없으니 장식으로나마 가질 수 있는 것이 어디냐.”
희사가 곧 다른 꽃을 향해 날아갈 준비를 하는 나비모양의 장식을 들어올렸다. 희사가 입고 있는 다홍의 겉옷보다도 색이 더 짙었다. 희사는 속주머니에서 주화를 꺼내려다 행동을 멈췄다. 나라에서 자신을 가게에 팔았으니 희사는 가게에 빚이 있다. 갚으려면 평생을 일해도 부족하지만 있는 돈을 허투루 쓸 수는 없었다.
“이거 주시오.”
행동을 멈춘 희사 대신, 해훈이 뒤에서 긴 팔을 뻗어 상인에게 주화를 건넸다. 나비는 해훈의 손에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해훈은 희사의 손을 오므리게 만들어 그 안에 나비를 가두었다. 희사가 깜짝 놀라서 해훈을 돌아봤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이러느냐. 나는 싫다. 사지 않으련다.”
나비를 가판대에 다시 내려놓으려 하자 해훈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저 내일부터 밥 한 끼씩 일주일 굶으면 되는 것이고, 난 희사님만 웃으면 좋습니다.”
네가 굶어 사주는 것이면 더욱 싫다. 라고 말하려 했으나 해훈은 이미 나무 가판대에서 멀어져있었다. 희사가 서둘러 따라잡다 신의 앞코가 바닥에 쿡 찔려 몸이 휘청했다. 해훈이 더 빠른 속도로 희사의 몸을 안아들었다.
“그리 좋아서 뛰다 코가 깨져도 난 모릅니다.”
“그, 그래도 네가 잡아주었지 않느냐.”
해훈이 그건 그렇습니다, 하며 다정하게 웃었다. 희사는 손안에 그러쥔 붉은 나비가 심장까지 날아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달칵.
어느새 걸어서 다다른 원룸의 차가운 철문 앞에선 희사는 생각을 멈췄다. 아직도 해훈의 다정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현실의 강해훈은 전생의 해훈과 같은 모습을 하고,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자신은 그를 기억하고 있으나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이곳에선 그에게 다가갈 수 없을 만큼 사는 세계가 달랐다. 자신은 한낱 아르바이트생에 어찌 흘러갈지 모르는 가난한 인생이지만 해훈은 탄탄한 앞날이 보장된 인생이었다. 동정을 베풀듯 말을 건넨 그는, 붉은 나비를 손에 쥐어주었던 자와 같을 수가 없다. 그것만큼 잔인한 사실이 있을까. 그저 그가 안겨준 붉은 나비만이 여전히 자신의 가슴 속에서 어지러이 돌아다닐 뿐이었다.
희사는 원룸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고개를 옆으로 하자 식탁 위에 동생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원룸 바닥을 걸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액자 안 동생의 사진을 들어올렸다. 단 한 장뿐인 동생의 14살적의 모습. 절대 웃지 않는다. 동생은 웃는 법을 몰랐다. 희사는 무표정한 동생의 사진을 보고 웃었다.
나는 계속 너를 살게 하고 싶었다. 정신이 나가버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들 조금 더 살았으면 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돈만 벌었다. 병원비로 나가는 돈 따위는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러니 네가 쉽게 세상을 떠서는 안됐다.
아마 강해훈이 없었다면 동생 현성이 죽는 순간 자신도 같이 죽었을지 몰랐다.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있다하더라도 너무도 먼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니 그전에도 완벽히 자신의 사람은 아니었다. 해훈은 늘 일주일에 몇 번씩 유곽을 떠나 돌아오지 않곤 했다. 그는 자신의 호위로만은 돈이 되지 않아 다른 호위일도 병행한다 말했었다. 희사는 전생의 다른 일들은 단편적이고 반복적으로 떠올랐으나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 전생에선 분명 결말이 존재한다. 꿈속의 전생은 진행되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닫혀서 끝나버린 세계였다. 그렇기에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전생의 끝은 늦든 빠르든 알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희사는 전생의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확신하진 못했으나 전부터 해훈과 관련되어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희사는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어느새 잠이 들면 또 다른 세상에서의 자신으로 태어난다. 그곳은 현실만큼이나 행복하지 못했지만, 자신을 알고 있는 해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세계였다. 희사는 눈을 감았다. 이렇듯 피곤한 날이 좋았다. 그런 날은 잠을 설치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었다. 으슬으슬 떨리는 추위는 피곤한 정신이 잠에 드는 것과 동시에 따스한 기운으로 변해갔다. 몸을 차갑게 만들었던 공기가 코 위를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했다.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 듦과 동시에 차갑고 딱딱한 무언가가 코언저리 위에 올라왔다. 희사가 번쩍 눈을 떴다.
“희사님 벌써 해가 중천입니다.”
해훈이 웃으며 붉은 나비 장식을 희사의 코에 짓궂게 가져다댔다. 희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유곽 안으로 봄의 꽃내음이 흘러들어왔다. 희사의 방에서 마루로 통하는 미닫이문이 활짝 벌어져있었다. 마당 안에 심어놓은 목련과 벚꽃나무가 단 한 번의 생을 불태우듯 최고조로 만개했다. 햇살과 그 빛을 머금은 바람은 따스했다.
“어디를 갔다 오는 것이냐?”
며칠 만에 돌아온 해훈에게 서운해 약간의 핀잔을 담은 희사가 입을 내밀었다.
“나비 장식을 사주었으니 다른 곳에 돈을 벌러 다녀왔지 않습니까. 하하. 나도 실은 굶는 것은 싫습니다.”
희사는 그것도 모르고 섭섭해 했던 해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유곽에서 희사는 날짜의 대중없이 손님을 받는다. 가게의 주인은 그런 희사가 운이 좋다했다. 어느 높은 님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여 희사를 샀다 했다. 그 높은 님은 희사를 집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사정이 있어서, 늘 유곽으로 직접 희사를 만나러 왔다. 허나 희사는 그 높은 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높은 님은 별조차 뜨지 않는 짙은 새벽이 되어야 찾아온다. 희사는 무거운 허리를 두들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젯밤 무리했던 것을 알리기가 싫은 듯 짐짓 아무렇지 않게 허리를 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엇이?”
“한 사람에게만 안기는 것이 말입니다.”
희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한사람이 해훈 너였으면 좋았겠다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아서.
“그래, 주인도 그러지 않았더냐. 나보고 운이 좋다고. 난 참 운이 좋다. 반역을 꾀한 가문에서 홀로 살아남고 또 이렇게 팔려 와서도 좋은 사람에게 또 팔리고. 난 정말 운이 좋지 않으냐.”
잔인하다. 왜 내게 그런 것을 물어보느냐. 따지고 싶었으나 희사는 해훈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해훈의 손에 올려진 붉은 나비를 집아들어 흘러내린 긴 머리채를 뒤로 고정시켰다. 미처 올리지 못한 실오라기 같은 머리칼 한 올이 희사의 뺨을 그늘지게 했다. 커다랗고 다정한 해훈의 손이 희사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무사의 투박한 손이 얼굴에 닿을 새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한 올을 귀 뒤로 쓸어주었다. 그의 손길이 떠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희사는 해훈을 지나쳐 걸었다. 발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도록 재빠르게 행동했다. 희사의 행동하나하나에 바스락거리며 발밑의 비단천이 속삭였다. 희사는 문지방을 밟고 마루에 서 만개한 목련을 바라봤다.
“그래. 난 참 운이 좋다.”
희사는 해훈을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쓸쓸이 중얼거렸다. 밖은 해훈의 말대로 해가 중천이었다. 마루 밑 신에 발을 맞춰 넣었다. 희사의 발보다 작은 나무 신발. 발가락을 전부 오므려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다. 오래 걸을 수 없게 하기 위해 또는 야화들이 도망치지 못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 야화들은 이 나무 신을 신지 않으면 유곽 밖을 나갈 수가 없다. 발에 느껴지는 고통은 마음에 고통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마치 아름다운 목각인형이라도 된 양 희사는 나무 밑에 멈춰 섰다.
“희사님. 아직 바람이 찹니다.”
해훈은 기척도 없이 다가와 희사의 등에 겉옷을 걸쳐주었다.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해훈의 행동에 처음엔 깜짝깜짝 놀라기가 일쑤였으나 지금은 사사로울 것도 없었다. 실제로 희사는 해훈이 검을 꺼내든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허나 이런 유곽의 호위무사로만 만족할 실력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다른 야화들의 호위무사들이 해훈과 친하게 지내거나 그에게 함부로 막말을 내뱉은 적이 없다. 오히려 해훈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피해 다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오늘 밤엔 나가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 오늘은 높은 님이 찾지 않으신다.”
고개를 돌려 해훈을 보자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희사는 오늘부터 사나흘동안 축제가 열리는 것을 생각해냈다. 황제의 생일인 절(節)을 경사하기 위한 축일(祝日)이었다. 황제에게 모든 일족이 죽임을 당하기 전까진 축일은 일 년 중 희사가 가장 좋아하는 행사였다. 특히 밤하늘의 별보다도 더 환히 빛나는 폭죽을 보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었다. 허나 두해 전 황제의 축일 날 일족이 전부 멸살을 당했다. 희사에게 있어서 이 날은 축일이 아닌 통곡일일 뿐이다.
“너도 이날이 좋으냐?”
일 년에 한번인 이날은 모든 이들에게 행복한 축제였다.
“난 그냥 희사님이 좋은 날은 좋고, 그게 아닌 날은 나도 싫습니다.”
해훈의 답에 희사는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모시는 자로서의 충정인지 연으로서의 연정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을, 산을 오르고 싶다.”
무리한 바람이었다. 그저 희사의 머릿속을 맴돌던 말이 나온 것이다. 고개를 내려 자신이 신은 신을 봤다. 발등을 덮은 나무 위엔 홍옥색의 나비 여러 마리가 무리지어 있었다. 처음 야화가 되어 유곽에 들어왔을 때 신발 장인은 발등의 무늬를 나비로 깎아달라는 희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었다. 보통 야화들은 목각과 다름없는 자신의 신에 화려한 꽃이나 그럴듯한 무늬를 깎아 넣는다. 볼품없는 나비를 넣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그 이유를 묻는 장인의 말에 희사는 그저 조금이라도 신이 가벼워질까 하여서 라고 대꾸했다. 그럼에도 행여 느낌이라도 신이 가볍거나 아프지 않은 날은 없었다.
“오르고 싶으면 오르면 그만입니다.”
해훈이 희사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희사를 끌고 걸었다. 희사는 절뚝거리며 해훈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마당을 거닐던 유곽의 주인이 희사와 해훈을 향해 소리쳤다.
“어디 가는 것이냐?”
“장에 가오.”
아직 장이 들어서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주인은 모르는 눈치였다. 주인이 더는 묻지 않고 뻐끔거리며 곰방대를 물었다. 해훈이 입 꼬리를 올려 시원하게 웃었다. 안쪽의 화류가에서부터 홍등가를 빠른 속도로 벗어났다. 야화들이 몰려있는 지역은 여자들이 즐비한 홍등가에서도 가장 안쪽에 존재했다. 야화들을 무리지어 있는 곳을 사람들은 화류가라 불렸다. 홍등가의 여자들보다 더 못한 존재가 바로 화류가의 남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