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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서의 이동은 시간을 잊어버리기 좋을정도로 사람을 괴롭히는 힘이 있었다.
베라즈 역시 그 범주에 속하는 인간이었기에, 점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견디지 못하겠다는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얼마나 더 남았나, 카이아린.”
“후우...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곧 도착이에요.”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카이아린 역시 약간은 지친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베라즈를 향해 가볍게 웃어보이고는 다시금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실 카이아린의 머릿속은 지금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들켜버린 임신 사실과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이 공간까지, 무엇하나 정리되지 않은 상태는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 베, 베라즈!”
“?, 왜그러나, 카이아린.”
카이아린은 자신의 복잡한 머릿속을 잠시나마 사라지게 해줄 것을 발견한듯 기쁜 표정으로 베라즈를 불렀고, 그 역시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며 가리켜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건, 리리안인가?”
“아마 맞을거에요.”
둘의 시선이 끝나는 곳에는 베라즈가 카이아린을 처음 발견했을때와 비슷한 점이 있었고, 둘은 황급히 걸음을 옮겨 그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타닥, 탁.
“하아하아...”
“흐으읍...후....”
공간과 시간의 감각이 무감각해질때쯤 발견한 목표는 둘의 몸에 힘을 실어주기 충분했고, 어느새 점 처럼 보이던 물체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도착해서 확인한 그것의 정체는 기대했던대로 리리안, 그녀였다.
정신을 잃고 에메랄드 빛 머리칼이 마음대로 흩어져있었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다소곳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청순한 모습이었다.
“휴우... 이걸로 엘프계집은 찾았고!”
그저 목표를 찾았을뿐! 이라는듯한 카이아린의 감상과는 달리 베라즈는 리리안을 발견하자마자 황급히 그녀의 곁으로 달려가 살며시 앉아 올리며 약하게 뺨을 두들기며 이름을 불렀다.
톡톡.
“리리안! 리리안, 정신을 차려봐라.”
“칫...”
리리안을 끌어안는 베라즈의 모습이 조금은 아니꼬운듯 혀를 찬 카이아린은 잰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려놔보세요, 베라즈. 내가 깨울께요.”
카이아린의 말에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베라즈는 말없이 자신의 품에서 리리안을 내려놓았고, 카이아린은 리리안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는 무언가의 주문을 읇조리기 시작했다.
“......웨이크업.”
피이잉.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손에서 일어난 푸른 빛이 리리안의 몸으로 스며들듯 사라졌고,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는듯 리리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으음...음...”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리리안의 눈꺼풀을 확인한 베라즈는 카이아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했다, 카이아린.”
“헤헤.”
카이아린은 그에게 칭찬 받은게 기분 좋은듯 빙긋 웃음을 지었고, 몇 번 더 그런 그녀를 쓰다듬어준 베라즈는 곧 바로 깨어난 리리안에게 다가갔다.
“정신이 좀 들었나.”
“으음...아... 베라즈...네요...”
아직 덜 깨어난듯 조금은 느린 반응으로 대답을 한 리리안은 스스로 정신을 차리려는듯 자리에서 일어나 긴 머릿결을 흔들며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린 리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 앞의 둘을 바라봤다.
“휴우... 베라즈와 카이아린은 괜찮은거에요?”
“흥, 하찮은 엘프계집에게 걱정 받을 정도로 이 몸은 약하지가 않다고.”
“나는 괜찮다, 너의 상태는 어떤가.”
“아, 딱히 이상있는 곳은 없... 아...아앗!!”
베라즈의 말에 살짝 웃어보이며 자신의 무사함을 알리려던 리리안은 순간 깜짝 놀라 카이아린을 가리키며 손을 떨었다.
“카, 카이아린?!”
“왜? 왜그러는건데?”
“그...배...배는...흡...”
리리안은 자신 스스로도 말하다가 놀란듯 입을 가렸고, 대략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카이아린은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베라즈한테 이미 다 말했어. 너무 그렇게 안 놀라도 괜찮아.”
“아...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하기로......”
“시끄럽군.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일단 이 곳으로부터 나간 뒤에 제대로 이야기 하도록 하지.”
길어질것 같은 카이아린과 리리안의 이야기를 끊은 베라즈는 둘의 사이로 걸어나갔다.
“카이아린, 나머지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해라.”
“아음...그거라면 크게 걱정안해도 되요. 두 인간 계집들은 지금 이쪽을 향해서 오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리고 거의 다 도착했어요.”
카이아린의 이야기에 베라즈는 조금 놀랐다는듯 자신의 턱을 한번 쓰다듬었다.
“호오, 그렇군. 역시 세레나가 먼저 일어나 이동을 시작했겠지, 보면 볼수록 대단한 소녀란 말이지. 하하하! 갖고 싶을정도로...”
베라즈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때마침 이야기를 끝낸 그들의 시선 저멀리 희끗희끗한 무언가의 움직임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하게 마지막 남은 일행인 세레나와 레이린이 틀림없었다.
“우리도 움직이도록 하지.”
그의 간단한 말 한마디에 리리안과 카이아린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서로 만날때까지 얼마의 시간조차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
“........”
레이린과 세레나,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일행이 모두 모이고 난 뒤 그곳은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체의 두 여인은 베라즈를 보자마자 교왕과 함께 보인 추태가 떠오르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자신들의 중요한 부분만을 가린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베라즈는 굳은 얼굴로 침묵하고, 다른 일행들은 무엇이라 말을 건낼지 찾지못해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흐음...”
움찔.
더 오랜 정적이 흐르고 있던 중 흘러나온 베라즈의 기척에 나머지 여인들은 무언가 잘못이라도 한듯 깜짝 놀라며 몸을 움직였고, 잠시 세레나와 레이린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의 웃옷과 셔츠를 벗어 둘에게 건내며 말했다.
“일단 이것이라도 입어라.”
“하, 하오나 이것은 폐하의...”
“말이 많다. 그대로 있을것이냐.”
“으...가...감사하옵니다.”
베라즈의 단호한 어조에 세레나는 두 손을 들어 그의 손에 있는 상의 중 하나를 집어들며 최대한 몸을 안보이도록 움직여 그것을 입기 시작했다.
레이린 역시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에서 남은 한 장의 셔츠를 받아든 뒤 자신의 몸에 걸쳐나갔다.
옷을 다 입은 두 여인들은 베라즈와 자신들의 몸집차이를 보여주기라도 하는듯 세레나는 코트를 입은것 마냥 무릎 위까지 상의가 걸쳐지고 있었고, 레이린 역시 아슬아슬하게 허벅지를 살짝 가릴정도로 옷이 컷다.
“옷이 많이 크네요. 세레나 이리와봐요.”
소매까지 축 늘어진 그녀의 옷을 보기가 힘들었던지 리리안은 몸을 움직여 옷을 둘둘 걷어올렸고, 몇 번을 접은 끝에야 세레나의 조그마한 손이 보일수가 있었다.
“자, 그럼 레이린도...... 아, 벌써 하셨네요.”
“다 끝났는가. 그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보지.”
세레나의 옷매무새를 만져준 리리안은 마찬가지로 옷이 컷던 레이린을 향해 몸을 돌렸으나 이미 그녀는 스스로 옷을 정리한 뒤였고,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베라즈는 입을 열어 모두를 불러모았다.
“이 이후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하겠다. 혹여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합당한 벌을 내리도록 하지. 자, 이제 중요한 것은 이곳이 어디이며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
베라즈의 이야기가 끝나자 나머지 여인들은 하나씩 그의 앞에 서며 하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어라? 100화 였네요...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