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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경우 [아이리엔]
생기를 잃어버린 머릿결...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듯한 공허한 두 눈...
아이리엔은 그렇게 베라즈에게서 멀어져 자신의 숙소를 향해 비틀비틀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숙소는 그 누구의 침범도 받지 않고, 누구의 간섭 조차 받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숙소가 다름아닌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이르피온의 신전 옆의 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가장 마음이 편하고 모든 삶의 활력을 얻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돌아보는 것 조차 고통스러운 악몽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신전을 바라보며 아이리엔은 아릿하게 아파오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쥐었다.
“아...아아...”
자신도 모르게 신전으로 발걸음을 향하며 신음을 터트린 아이리엔은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 신전의 문을 열어젖혔다. 여태까지 일부로 가지 않았던 신전이었지만 오늘 그디어 제국의 성녀로 공식적인 발표가 난 후 왠지모를 강박에 시달리며 걸어온 그녀는 지금 자신이 왜 이러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다.
끼이익.
고작 얼마안된 시간만에 문에서는 소리가 날정도로 변해버린 신전을 바라보며 아이리엔은 한발자국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리고 말았다.
“흐윽...흐으윽...”
자리에 주저앉은 아이리엔은 곧바로 울음을 터트리며 네발로 기듯이 신전 안으로 몸을 질질 끌어대며 기어 들어갔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신전의 안은 여전히 처참한 상태 그대로였다. 신관들의 시체는 사라졌지만 온 사방이 갈색의 피딱지들로 말라붙어있었고, 쓰레기 마냥 질질 끌려가며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나온 피들로 만들어진 길들도 보였다.
이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자신만이 살아남았고, 또 그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아이리엔은 숨 조차 제대로 쉬지못할정도로 헐떡이며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왜... 대체 왜!! 아윽...아으윽... 미안해요...”
그녀가 아무리 사과하고 아무리 고통스러워 해도 아이리엔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용서해줄 자들은 이미 그녀의 곁에 존재하지가 않았다. 그렇기에 아이리엔의 가슴이 더욱 아파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혼자 깊은 고뇌와 고통 속에서 허우적 거리던 아이리엔은 엉망이 되어버린 신관복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서고는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리며 신전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하하하!!”
그렇게 웃음을 터트리며 신전 안을 돌아다니던 아이리엔은 갑작스레 한 곳에서 움직임을 멈추며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곳인가...”
그녀가 멈추어 선 곳은 바로 베라즈의 명령으로 처음 아이리엔이 사내들에게 온 몸을 더럽혀졌던 곳이었다.
생각에 잠긴듯 두 눈을 꼭 감은 아이리엔의 머릿속에서는 그날의 이미지가 곧바로 튀어나올듯 생생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웃고 즐겁게 인사를 나누던 신관들,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칠 것 마냥 주변에서 떠나지 않던 그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 돌변하며 마치 짐승과도 같이 자신을 범하려고 하던 그 모습들이 바로 눈 앞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 마냥 아이리엔의 머릿속에 펼쳐지고 있었다.
“하...하하... 모두 당신들이 나빳어요. 그가 시킨다고 나를 그렇게 범해? 하하핫! 아...아냐... 미안해요... 나는 당신들은 배신했어요... 흐윽...키킥... 웃기지마! 너희들도 살자고 나를 그런식으로 취급하고!! 으...우웁...우웨에엑...”
지하뇌옥에서부터 보이던 이상증세가 다시 지독한 갈등 속에서 표출된듯 횡설수설하던 아이리엔은 갑작스레 구토를 하며 숨을 헐떡였다.
“하악...하악....제국의 황제... 베라즈.... 히...히익! 무서워... 으드득... 모두 당신... 당신 때문이야... 용서 안할거야... 아, 아니야... 제발 용서하세요.. 폐하....”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듯 횡설수설 하던 아이리엔은 두 발을 모으고는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덜덜 몸을 떨기 시작했고, 그렇게 두려움에 취한듯 행동하던 아이리엔은 한참이 지나서야 떨어대던 몸을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게 끝이야,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갈수 없어. 그리고 돌아가더라도 나는 그들을 믿지 못하겠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세상은 내 뜻대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어...”
자그마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아이리엔은 한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머리칼을 풀어내렸다.
그녀의 은발이 마치 춤을 추는 것 마냥 어깨 위로 쏟아져내리며 등 뒤로 찰랑이며 흔들거렸고, 아이리엔은 담담한 표정으로 시전의 안 쪽을 향해 몸을 옮겼다.
“나는 이제 제국의 성녀야. 그에게서 벗어날수도 없고, 벗어날 방법도 없어.”
모든 것을 포기한 마냥 중얼 거리며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긴 아이리엔은 투명한 수정구가 놓여있는 한 방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추어섰다.
그녀의 앞에 놓여있는 그 수정구는 바로 아이리엔이 카룬 교국의 다른 대신관들과 대화를 위해서 사용하던 통신용 마법구였다. 더 이상 무슨 수를 쓰더라도 교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녀였기에 마지막 교국과 교단을 향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선 아이리엔은 수정구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수정구 위에 얹어 조용히 주문을 읇조렸다.
“연결(Connection)"
피이잉.
그녀의 입에서 주문이 끝나자 수정구의 옆 마나석에서 마나가 솟아올라 수정구로 흘러들어가 조그마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며,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흩어져 사방을 밝히기 시작했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그 빛들이 한 곳으로 모이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이리엔 대신관인가?-
빛의 뭉치에서 이제 완연한 하나의 형체로 만들어진 그것은 말을 하며 아이리엔을 불렀고, 빛들이 사라진 이후에야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그녀와 함께 이야기 한적이 있었던 카룬 교국의 또 다른 대신관인 라루인 신관이었다. 수정구 너머로 여전히 나이든 모습의 그는 아이리엔과의 통신구가 연결되자마자 그녀를 불렀고, 그의 부름에 아이리엔은 착잡한 표정으로 조용히 대답을 했다.
“네. 접니다, 아이리엔.”
아이리엔이 대답하자마자 수정구 너머의 라루인 신관은 분노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고함을 토해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얼마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인지 아는가! 그리고 이쪽에서 연락을 보내도 아무도 받지를 않는 것이냔 말일세! 제국 내의 정보망을 통해서도 그저 신전쪽에서 뭔가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났다는 것만 알 수 있을뿐 제대로 된 정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얼마나 기다릴 줄이나 생각을 해봤는가!!-
정말로 분노에 찬 라루인의 목소리에 아이리엔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럴 이유가 있었습니다.”
-시끄럽네! 이유? 이유란 말이지! 그게 만약 정당한게 아니라면 자네는 교단 회의에 회부 될걸세! 알겠는가!-
“상관없습니다.”
자신의 분노에 되려 더 담담하게 말하는 아이리엔의 행동이 더욱 신경에 거슬리는지 라루인 신관은 수정구 너머에서 방방 뛰며 그녀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그게 무슨 행동인가! 교단회의까지 갈 필요도 없겠네! 자네는 지금 당장 교국으로 복귀하게나! 이 일에 대한 응당의 벌이 있을 것이야!!-
애끓는 자신의 심정도 모르고, 자신이 이곳에서 어떤 짓을 당했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신경질적으로 외치기만하는 라루인을 보며 아이리엔의 가슴 안에서 무엇인가가 울컥 솟구쳐 올라왔다.
“....습니다...”
-뭐라고 하는 것이냐!-
조용히 읇조리는 아이리엔의 말에 라루인이 되물었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수정구를 노려보며 외쳤다.
“시끄럽습니다!! 닥치란 말이에욧! 당신이... 당신이 지금 내 심정을 알아!!”
-.......-
갑작스럽게 돌변하여 비명 같은 목소리를 내지르는 아이리엔을 보며, 라루인은 처음보는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하지못하고 그저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성녀도! 교왕도! 다 싫단 말이야! 대체 왜 성직자인 우리가 제국과 다른 왕국들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되는거냔 말이에욧! 교왕은 변했습니다! 이르피온만을 따르고 너그럽기 그지 없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그 때문에... 그 때문에 대체 내가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하냔 말이에요!! 흐윽...흐으윽...”
울부짖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은 아이리엔은 계속해서 울음을 터트렸고, 수정구 안의 라루인 신관은 그녀를 향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이런! 자네 대체 뭐하는 짓인가! 이 무슨 망측스런 짓이냔 말일세!-
계속되는 라루인의 재촉에도 아이리엔의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고, 되려 그의 강한 어조는 아이리엔의 가슴에 불을 지폇다.
“콜록...흐윽... 정했습니다. 더 이상 제가 교국과 교단에 있어야할 이유는 없는것 같네요. 마지막 인정으로 이것 하나만은 말씀드릴게요. 어차피 그것만 말하려고 했던거니까요.”
-무슨 말인가! 내가 이해가 되게 말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저 말하는거니, 이해 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교국과 교단에 몸 담았던 저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카룬 교국은... 아니 카룬 왕국은 조만간 큰 위험이 닥칠거에요. 준비하세요, 그리고 교왕에게 당신의 힘으로도 이길수 없다고도 전해주세요. 그럼...”
-아이리엔 대신관! 무슨 말인...-
탁.
라루인 신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정구로 공급되던 마나를 끊어버린 아이리엔은 두 손으로 수정구를 부여잡았다.
“이이익!”
쨍그랑.
강한 기합과 함께 있는 힘껏 수정구를 뽑아든 그녀는 곧바로 바닥을 향해 수정구를 던져버렸고, 땅에 부딪힌 수정구는 곧바로 강한 파열음과 함께 산산히 부서져나가버렸다.
“하아...하아...”
조각조각 파괴되어버린 수정구를 잠시 지긋이 쳐다보던 아이리엔은 천천히 신관복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네요... 아니 이제 시작인가요... 후, 그러고 보니 오늘로 삼일째가 되는 날인걸 깜빡했군요. 발작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먼저 폐하께 가봐야겠네.”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며 이야기를 끝낸 아이리엔은 깨진 수정구의 파편을 두 발로 밟으며, 신전 바깥으로 나와 그녀의 숙소가 아닌 황궁으로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아아.... 길고 길었습니다.
기다려주신분들 감사합니다 ㅜㅜ
회사에서 수련회를 보내는 바람에... 한동안 글을 못 적었네요. 토요일날 돌아왔음에도 망할 수련회의 근육통때문에
그저 귀찮아서 뒹굴뒹굴 거리다가 월요일 오늘 출근해서야 노트북에 손을 뻗었네요.
자~ 이제 다시 일일 연재의 시작입니다.
모두 기다려주셔서 감사르 합니당!
아, 그러고 보니 연재가 조금 늦어질수도 있겠네요. 3/24일날 기술능력평가 시험이 있어서 회사에서 공부하라고 닥달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