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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전조
치욕스런 시간 뒤에 씻지 못해 마구 헝클어지고 엉켜버려 찬란히 빛나던 원래의 빛을 잃어버린 은발, 모든 의욕이 사라져버린듯 멍하니 자신이 갇혀있는 뇌옥의 한곳만을 응시하는 두 눈. 몸만 겨우 가릴정도의 누더기 같은 조그마한 천조각만이 걸치고 있는 전부인 그 여인은 카룬 교국의 차기 성녀이자 대신관이었던 아이리엔 이었다.
그녀는 비참하게 신전에서 끌려와 제국의 지하 뇌옥에 갇힌채 모든 것을 잃어버린듯한 표정을 하고 아무런 움직임 조차 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인생에 실패란 없었고, 좌절이란 존재하지 않았었기에 신전에서 일어났던 살육과 치욕스런 일들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일인지도 몰랐다.
오랜 시간동안 뇌옥에 갇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가만히만 있던 아이리엔은 불현듯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증오, 살의.
그리고 왠지모를 뜨거움...
그녀는 이 모든 감정들의 시작인 그를 생각했다. 제국의 황제이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금발의 청년, 사람들에게 강철왕이라 불리는 베라즈를...
철컹.
그리고 갑자기 뇌옥의 철창이 큰소리를 내며 열리고 아이리엔의 불안정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향하고 있던 장본인이 나타났다. 그것도 얼굴에는 만면의 미소를 품고서 말이다.
그녀는 웃고있는 베라즈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엇인가 가슴에서 울컥 끓어 오르며 터져나오는게 느껴졌다.
“으아아아! 이 더러운 자식!”
축 늘어져있던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번개 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리엔은 베라즈에게 달려들었고, 그녀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온통 세상이 붉게 변하는것을 느꼇다. 그리고 그 일그러지고 망가진 세상의 끝에는 베라즈가 있었다.
“주...죽여버릴테야!”
증오와 살의로 점철된 그녀의 마음은 더 이상 자애로운 대신관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르피온의 말을 지키고 따르며 행하던 순한 양도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괴성을 지르며 베라즈에게 달려드는 아이리엔은 상처받은 짐승,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성을 잃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아이리엔을 능숙하게 밀어쳐낸 베라즈는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그녀의 목을 붙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쾅!
“꺄아악!”
꽤나 큰 소리와 함께 아이리엔의 머리가 벽에 부딪혔고, 그녀의 입에서는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나왔다. 베라즈가 목을 잡고있는 손에 점점 힘을 줄때마다 그녀의 목에서는 점점 가늘어지는 비명이 흘러나오며 두 손을 버둥거리며 그의 팔목을 잡고 고통스러워했다.
“끄으으으...끄윽...”
이르피온의 신관 중에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는 아이리엔도 그 육체는 보통 여인의 몸과 다를것이 없었다. 부드러운 살결과 연약한 근육으로 이루어져있는 여인 말이다.
베라즈가 목을 잡고 있는 통에 계속해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 탓인지 아이리엔의 얼굴이 조금씩 새파랗게 질려가며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가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질식으로 인해 정신을 잃기 직전 베라즈는 잡고있던 손을 풀고는 아이리엔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크하아...히익...흐으으으...”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자마자 터질듯이 숨을 들이키며 호흡을 하고 있는 그녀의 옆으로 베라즈가 나타났다.
“그래, 이제 제정신으로 조금 돌아오는가.”
“하아...흐으... 더러운...놈...”
“아직 정신이 덜 든 모양이군. 크큭.”
호흡이 돌아오며 조금씩 원상태로 돌아오는 정신에 아이리엔은 눈 앞의 베라즈를 보며 이를 갈았다.
“당신...당신 반드시 죽여버릴테야. 교국, 교단 그 모든 것을 동원해서 당신을 파멸시켜 버릴거라고! 아니, 그럴필요도 없어. 지금 바로 죽여버릴거야!”
악을 쓰듯 외치는 아이리엔의 두 손에 조금씩 빛이 모여들기 시작하며 옅은 빛을 생성해내기 시작했다. 베라즈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지금 나를 공격하려는건가.”
기본적인 기도로 인한 신성력의 발현이 아닌 공격성향을 지닌 발현은 그 두 손에서부터 신성력을 모아 사용하는 것이기에 무엇을 사용하려는 것인지 눈에 쉽게 띄고 그 두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묶어버리면 발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치유하고 창조하는 신성력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행위에 사용하려는 패널티 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지금 그녀가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게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베라즈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신성마법에는 그것 외에도 또 다른 약점이 있었다. 주문과 마나배열만 끝내면 발동되는 마법과는 다르게 신에 대한 믿음과 정신 집중으로 이루어지는 신성마법은 시전자가 집중할 틈만 주지 않으면 발현 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잘 아는 베라즈는 아이리엔이 공격에 사용할 신성력을 다 모으기전에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그녀의 얼굴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날려버렸다.
빠악!
“아아악!”
아이리엔의 얼굴에서 피가 튀며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베라즈의 주먹에 맞아 볼이 찢어진듯 입술을 타고 주르륵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머리를 뒤흔드는 고통에 그녀의 두 팔에 모이고 있던 신성력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베라즈는 신성력이 사라졌음에도 아이리엔의 머리채를 붙잡고 바닥에 내팽겨치고는 발을 들어 가녀린 그녀의 육체를 짖밟기 시작했다.
빠악, 퍽!
“아아악! 꺄아악!”
돌로 되어있는 석실의 벽에 아이리엔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이 튕기며 울려퍼졌다. 무자비한 그의 발길이 한번 지나 갈 때 그녀의 육체에는 시뻘건 피멍이 새겨지며 그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지독한 고통에 파르르 떨어댔다.
그녀의 비명과 신음이 울부짖던 것에서 새어나오듯 바뀔때쯤에서야 구타를 멈춘 베라즈는 겨우 숨만 헐떡이고 있는 아이리엔의 머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악...하악...”
입에서 단내가 날정도로 숨을 헐떡이는 아이리엔을 보며 베라즈는 빙그레 미소지었다.
“음... 좋은 얼굴이 되었구만. 그래 또 뭐 나한테 할 말은 없는가?”
“그, 그만...하악...그마안...”
너무도 지독한 육체적 고통에 바르르 떨어대는 아이리엔은 더 이상 그에게 반항할 생각을 잃은듯 울음을 터트렸고, 베라즈는 그녀를 보며 기쁜듯이 웃었다.
“크큭, 크하하.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나왔으면 나쁠 일은 없었지않나.”
정액이 말라붙어 뭉쳐버린 그녀의 은발을 몇 번 손질해준 베라즈는 천천히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참, 그리고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말이지, 자네에게 중요하게 들을 말이 있어서라네.”
“무, 무슨...”
왠지 모를 불안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아이리엔을 보며 베라즈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미소지었다.
“내가 전쟁을 할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말이지, 교국의 약점과 중요한 기밀들을 나에게 좀 말해주어야 하겠네.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지 않나. 나의 약점을 붙잡고 흔들려고 보낸 그들이 나에게 보낸 그대가 되려 나에게 붙잡혀 그들의 약점을 발설해야 한다니 말일세. 크하하하! 뭐 이해는 하네, 그 누구도 자네가 제국에서 이런 취급을 받을지는 상상도 못했을테니 말이야! 용도 봉인한 신관이 인간의 왕에게 붙잡힐 줄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광소를 터트리는 그를 보며 아이리엔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의 몸과 바꾸어서라도 절대로 교국과 교단에 해가 되는 일들을 그에게 말할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공포와 고통에 지친 몸을 움직여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저, 절대 말하지 않을거에요. 차라리... 나를 죽여요!”
쥐어 짜내듯 외치는 아이리엔의 목소리를 들으며 베라즈는 구타로 인해 피범벅이 된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런, 자네는 앞으로 살 날이 많이 남았는데 함부로 그렇게 죽는다는 소리를 하면 안되지. 자네는 꼭 살아야하네,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자네의 말대로 나한테 교국과 교단의 기밀을 말해서도 안되네. 알겠지?”
“?!”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하는 베라즈를 보며 아이리엔은 그를 향해 의문의 눈빛을 보냈다.
“가, 갑자기 왜?”
궁금해 하는 그녀를 보며 빙글빙글 웃던 그는 살짝 몸을 풀며 뇌옥의 바깥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크큭, 절대로 말해서도 안되고 죽어서도 안되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게 궁금하다는 눈빛을 하니 말을 안해줄 수가 없겠군. 크큭, 아이든 메이언!! 들어오게나!”
그의 외침과 함께 닫혀있던 뇌옥의 문이 다시 한번 열리며 비쩍 마르고 기괴하게 생긴 노인이 한 손에는 이상한 가방과 손수레를 끌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리엔은 그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사이한 기운에 움찔 몸을 떨며 신음과 함께 뒷걸음질 쳤다.
“히이익!”
“이런 너무 그렇게 이 사람을 피하면 안된다네. 앞으로 자네와 계속해서 놀아주실 분인데 그렇게 홀대하면 쓰겠나. 그것도 대신관이라는 자가 말일세. 크하하. 일단 소개하지, 이 자는 제국 최고의 기술자인, 아이든 메이언이라네. 무슨 기술자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건 이제부터 자네가 겪어보면 알게 될것이네. 크크큭.”
무엇인가 기대하는 듯한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곁에서 같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있던 메이언이라는 노인은 손수레와 가방에서 이상한 도구들을 꺼내며 아이리엔을 가리키고는 감격스럽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오, 제 평생 이렇게 성스럽고 고귀한 분을 작업 할 수 있다니,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라즈 폐하. 그리고 신관님, 신을 모시는 자로서 강인한 정신력과 신앙을 가지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아마도 제가 해왔던 그 어떤 작업보다도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이 될 듯 하군요. 우히힛.”
괴상한 도구들을 손에 붙잡고 아이 처럼 즐거운듯 팔짝팔짝 뛰는 노인에게 다가간 베라즈는 그의 어깨를 붙으며 다독였다.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는 말게. 참, 그리고 자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되 이것 하나만 지켜주면 된다네, 절대 그녀의 육체에는 심한 흔적이 남지 않게 할 것. 어때 괜찮겠는가.”
“우히힛,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저 완벽한 육체를 손보지 못한다는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충분합니다. 우히힛!”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좋아하는 노인을 뒤로 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리엔에게 다가간 베라즈는 다시 한번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대신관. 자네의 다짐대로 절대, 절대 말해서는 안되네. 난 말이지 자네가 너무 쉽게 말해버리면 즐길 거리가 없어서 실망해버릴지도 모른다고. 크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아이리엔에게서 멀어진 베라즈는 노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시작하게 메이언.”
그의 명령과 함께 다시 한번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오른 노인은 들고 있던 도구를 바지에 몇 번 슥슥 닦은후 아이리엔에게 다가갔다.
“히히힛,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관님. 뭐든 처음이 힘든 법이지요. 나중에 가면 편해지실겁니다. 우히힛.”
============================ 작품 후기 ============================
으아... 사고 난뒤로 머리가 멍해서 글이 안풀리는거 억지로 적었더니 5시간이나 걸렸네요;;
차는 결국 새로 사기로 했습니다. 중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