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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조교 연대기-15화 (1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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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異常)의 시작

똑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똑같은 일들이 반복되며 리리안과 베라즈가 이 절벽 아래 갇힌지도 십수여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들의 하루일과는 베라즈가 음식을 구하러 가고 리리안은 그 시간동안 동굴에서 기다릴 뿐이었다.

전혀 바뀌지 않는 일과와 지루한 시간 속에 그들이 유일하게 할수 있는것들이라고는 서로 대화를 나누는것 뿐이었다.

그마저도 베라즈가 음식을 구하러 나간 반나절간은 리라안 혼자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아무것도 새로울것이 없는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바뀌는게 있다면 그건 리리안의 다친 두 다리와 그녀의 마음이었다.

여전히 걷는데는 무리가 있지만 살짝 움직이는것 만으로도 아프던 다리는 이제 어느정도는 나았고, 베라즈를 항상 적으로 의심하던 리리안의 마음은 이제 완전히 그에 대한 의심을 버렸다. 아니 참 웃긴 일이지만 그녀는 이제 되려 그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엘프라도 혼자 있는다는건 꽤나 심심하고 고독한 일이었다.

게다가 적막한 동굴 안에서 유일한 위안이라고는 그와의 대화뿐이었으니 말이다.

오랜 시간 수많은 대화 끝에 리리안은 베라즈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믿게되었다. 인간들을 위한 애정이 너무 지나치다보니 이종족에게 편협하게 대할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는건 아마도 그녀가 엘프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것은 베라즈가 내린 이종족에 대한 명령을 보지 못했기때문이리라.

아무리 엘프인 그녀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레이린에게 구속 당한뒤에 인간들에게 무참히 참살당하고 능욕당하던 자신의 종족들을 봤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것이다.

그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자신도 모르는사이에 싱긋싱긋 웃던 리리안의 긴 귀에 동굴 밖에서 물소리 외에 조그마한 소리가 들려오는게 느껴졌다.

차박차박.

확실한 발자국 소리였다.

자갈을 밟고 동굴쪽으로 들어오는듯한 소리가 들려오자 리리안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리고 그 발소리의 주인공은 이내 동굴로 도착해 자신을 바라보고있는 리리안에게 손을 번쩍 들며 그 손에 잡혀있는 고기를 살랑살랑 흔들며 웃었다.

“하하, 리리안. 오늘은 꽤나 많이 잡았다고, 어제는 완전히 허탕쳐서 오늘은 힘 좀 써봤지.”

마치 동네 청년 처럼 외치는 그는 바로 베라즈 였다.

아무리 봐도 둘 사이의 표정은 적과 적 사이였다고는 생각 할수 없을정도로 가벼운 얼굴들이었다.

매일 같이 계속되는 대화 끝에 리리안과 그는 서로에게 편하게 말을 하기로 결정했고, 이제는 완전히 몸에 익은듯 그는 왕이아닌 그 나이대의 청년 처럼 리리안을 대하며 말을 했다.

리리안 역시 그를 가볍게 대하며 그의 손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물고기들을 보며 입을 조금 삐죽거렸다.

“베라즈, 제가 먹을만큼만 잡아오라고 했잖아요.”

리리안의 칭찬을 바란듯한 베라즈의 말이었지만 되려 핀잔을 듣자 그는 조금 삐진듯 툴툴 거렸다.

“쳇, 엘프들이 그런식으로 하니까, 발전이 없는거라니까. 저축을 해둬야 다음을 대비해서 사용을 하지. 내일 허탕칠지는 누가 알아. 그치? 맞잖아.”

“그건 또 그때의 일이지요.”

자신의 의견이 통하지 않는듯하자 베라즈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에휴... 그래그래, 알았습니다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테니 지금은 그냥 드시지요. 그건 그렇고 다리는 좀 괜찮아졌어?”

“네, 이제는 뭐 살짝 움직여도 통증이 일어날 정도는 아니네요. 그래도 엘프의 회복력은 인간보다는 빠르거든요,”

“그거 다행이네............”

그녀의 말에 뭔가 더 할 말이 있는듯 우물쭈물 거리는 베라즈를 보고 궁금해진 리리안이 물었다.

“뭔가 더 할 말이라도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베라즈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별건 아니고... 조금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도 얼마전까지 죽이니 살리니 하던 우리 둘이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것도 그렇고, 리리안의 다리가 다 나은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도 그렇고, 뭐 좀 싱숭생숭한 기분이네.”

그의 대답에 잠시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던 리리안은 이내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것도 그렇네요. 당신이 나를 가둔건 용서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래도 그게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거라면 뭐 한번쯤은 용서해줄수 있죠. 아직 다리가 다 나은것도 아니니 너무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가? 하하하. 자, 일단은 다 잊고 밥이나 먹자구!”

정말로 모든 걱정을 풀어버린듯한 표정을 지은 베라즈는 차곡차곡 장작들을 모아 불을 지피고는 고기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여기에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그 원대한 꿈과 끝이 없던 욕망이 고작 이곳에 갇혔다는것 하나만으로 사라진것일까?

베라즈는 어떤 의미인지 모를 미소를 리리안에게 지으며 고기 손질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 리리안은 그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것을 알아차리고는 조금 부끄러운듯 빨개진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뭐, 뭐 때문에 그렇게 쳐다보는거죠?”

그녀의 질문에 되려 당황한 베라즈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애꿎은 물고기만 주물럭 거리며 꼬챙이에 꽂아갔다.

“아, 아니. 그냥, 하하하. 내 인생에 이종족과 이렇게 오래도록 이야기하며 앉아있던적은 없었거든, 그래서 좀 신기한 기분이든것 뿐이야.”

“흐음? 그래요? 저도 인간과 이렇게 오래 이야기 해본것도 처음이네요. 서로가 서로를 먼저 배척했으니 말이에요.”

“그것도 그렇지, 이렇게 있다보니 서로에 대해 잘 알게되는것 같군.”

“그렇네요.”

“....................”

“....................”

한참을 대화하던 둘 사이에 약간은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조용해진 가운데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만이 동굴을 시끄럽게 하고 있었고, 베라즈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전환하려는듯 불 위에 노릇노릇 익어가는 물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흐흠, 리리안.”

“네?”

그녀의 대답에 베라즈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오, 오해는 하지 말고 들어,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거니까.”

리리안은 그의 말에 궁금한듯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예, 말 해봐요.”

“그...그 리리안은 혹시 부족에 나, 남자친구라던지 그런거 있어?”

화끈.

베라즈의 질문을 듣자마자 리리안의 두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 아니. 그...그러니까 오해 하지 말라고 말했잖아. 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당황해 하는 베라즈를 보며 리리안은 그다지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그에 대한 대답만큼은 꽤나 단호하게 나왔다.

“아직, 그런쪽으로는 생각해본적이 없어요. 그리고 저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니 오해는 하지 마요. 인간과 엘프는 맺어질수 없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에 베라즈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약력했지만 억지로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소리야. 하하, 그냥 물어본것 뿐이라니까. 아, 고기 다 익은것 같네. 리리안 먼저 먹어. 자 여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잘 익은 물고기를 건네는 그에게 리리안은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웃으며 물고기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건네받은 물고기를 바로 먹지 않고 마치 무엇인가를 기다리듯 가만히 들고는 베라즈를 쳐다봤다. 그녀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의아한 표정의 베라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아, 그 소금은 이제 다 떨어진건가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베라즈는 씨익하고는 웃었다.

“응, 미안하지만 이제 다 떨어졌어.”

“그렇....군요.”

여태까지 먹어보던 어떠한 감미료보다 맛있었던 그의 소금이었기에 리리안은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들고있던 물고기를 들어 한입 살짝 베어물었다.

탱탱하고 야들야들하게 잘 익은 살점이 입안에 퍼지며 혀의 식감을 자극했다.

“?!”

물고기의 살을 입으로 꼭꼭 씹어가며 삼켜가던 리리안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맛이 느껴지지가 않아?’

분명 입에서 씹히는 느낌이라던지, 다른 것들은 느껴지는데 유독 맛만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이 물고기에는 맛이라는게 존재하지 않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리리안은 다급하게 몇 번이고 물고기의 살점을 뜯어 입 안으로 넣어갔지만 여전히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니 구지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느정도의 옅은 맛은 느껴지지만 무엇인가가 엄청나게 결여된듯한 맛이었다.

그녀가 골똘히 생각하는듯하자 베라즈가 옆에서 궁금하다는듯 물었다.

“리리안,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의 질문은 황급히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리리안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아, 아니요. 그냥 조금 혼자 생각을 좀 하느라. 걱정하지마요. 그건 그렇고 베라즈는 물고기를 참 잘 굽네요.”

“하하, 맨날 굽다보니 실력이 느는거지. 괜히 칭찬하지마. 하하핫.”

자신의 칭찬에 머리를 긁적이며 상냥하게 웃고있는 베라즈를 향해 싱긋 웃어준 그녀는 다시 한번 물고기를 입에 넣으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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