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 119. 특훈(Special training)(2) >
다음날 특강에 참석한 수강생은 열 명에 불과했다.
일반부와 중등부에서 각 한 명씩이 빠졌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전국체전 일반부 대표쯤 되면 제법 완성된 무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는 이미 경지를 이루고 있는 자들이었다.
단기 특강에서는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일련의 비무를 통해 당사자들 역시 딱히 얻어갈 것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와 그들 사이에는 기술로 극복할 수 없는 격의 차이가 있었다.
일반부 선수들의 실력이 수강생 사이에서 가장 뛰어났던 만큼 누구보다 확실하게 와 닿았을 것이다.
화경과의 비무.
벽을 넘기 위해서라면 뭐든 시도해봐야 하는 평소라면 몰라도, 전국체전이 며칠 안 남은 시점에서의 특훈 내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차라리 푹 쉬면서 컨디션 관리라도 확실히 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애초에 일반부 선수 네 명 중에서 두 명만 나를 찾아온 이유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고.
그래서 일반부 선수들은 오늘부터 안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둘 중 한 명은 오늘도 왔다.
내게는 한 명이라도 또 왔다는 것이 의외였다.
그래서 물어봤다.
곰 같은 얼굴에 곰 같은 몸을 한 곰 같은 사내였다.
"그쪽은 왜 오늘도 왔는지?"
"어제 좀 덜 맞은 거 같아서요."
곰 같은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얻어갈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얻어가면 될 일이었다.
때로는 그냥 깨져보는 게 필요할 때도 있었다. 내가 굳이 말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반대로 돌려 중등부 쪽을 바라봤다.
중등부에서도 최소한 한 명은 빠질 것으로 예상했다.
점창 속가 내정이랬나. 첫 합공에서 반응조차 하지 않았던 녀석이었다.
녀석은 이후 반복되는 수련에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지쳐갔다.
칼 솜씨는 나이치고는 제법이었다. 나름대로 재능은 있었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기초 체력이 턱없이 약했다. 내가 굴리는 방식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견디지 못해서 도망가는 것을 굳이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걔가 뭐 화산의 제자도 아니고.
나는 내 방식이 옳다고 믿었다.
무인에게 체력이란 것은 때로 목숨과 동의어였다.
칼질을 생업으로 삼는 이상 그만하고 싶다고 그만할 수가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 칼질 한 번 더 할 수 있는 힘이 생사를 결정짓기도 한다.
그러니 내가 항상 체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체력은 모든 것의 기본이었다. 칼솜씨가 뛰어나다고 한들 휘두를 체력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쯤 불참자는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차피 앞으로 엮일 일도 없었다. 이런 기회가 두 번 있지는 않을 테니.
나는 홀로 나온 중등부 선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키가 작고 왜소한 남자애였다. 이름은 이수민이었나.
이수민이 내 시선을 피하더니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명은 수련이 너무 힘들다고 못 하겠대요……."
"그래. 알았다."
예상했던 바였다. 이유가 딱히 중요하지도 않았지만.
어제 일정은 어린 학생들에게 확실히 고됐을 것이다.
쉴 틈을 거의 주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초고수를 상대로 한 합공 비무를 반복했다.
체력을 극한까지 갉아먹으며 정확한 무위와 나쁜 습관을 파악하는 과정이었다.
이수민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외공의 완성도가 가장 부족했다.
나이가 가장 어리기도 했지만 타고난 신체 자체가 약하고 작기도 했다.
분명 어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아이는 오늘 다시 왔다.
"너는 왜 왔지? 어제 힘들지 않았나?"
"힘들긴 했는데…… 전 그냥 아직 할 만한 거 같아서요……."
"흠."
절대로 할 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러 할 만하지 않게 굴렸기 때문이다.
이수민의 신체가 보기보다 특별히 튼튼한 게 아니라면, 정신력이 강한 거겠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통스러운 수련을 하러 다시 찾아올 정도로.
이수민은 정신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 뛰어난 것처럼 보였다.
극한의 상황을 견디고 다시 앞으로 걷어나갈 마음의 힘이 있다는 뜻이다.
그건 무인에게 있어 체력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을 매일 반복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극한의 고통을 마땅히 감내하는 자만이 고수가 될 수 있다.
어쩐지 이 아이는 나중에 자율무공학부에 들어올 것 같았다. 높은 회복 탄력성은 우리 애들도 드물지 않게 지닌 덕목이었다.
내가 몇 년 후에도 교수 일을 하고 있다면 이곳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꽤 기특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자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오늘부터는 어제보다 더 힘들 거다."
"히익……."
내 경고에 이수민이 기묘한 소리를 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역시 어제도 그렇게 할 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빠지고 싶으면 지금 빠져도 좋다."
"음……. 아, 아니에요. 한번 해볼게요……."
이수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한 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제 오늘 특강을 시작할 차례였다.
나는 수강생들을 쭉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는 숙련된 조교들이 수강생 여러분의 특훈을 도울 것이다."
"……조교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여러분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기 위해 본 교수가 특별히 초빙한 조교들이다. 아까 말한 것처럼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힘든 과정이 될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지금 포기해도 좋다."
물론 여기까지 온 사람 중에서 이제 와서 빠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입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교들, 입장."
기를 담은 목소리가 연무장을 지나 길게 퍼졌다.
끼이이익.
철두철미 아레나의 거대한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철문 너머로 보이는 밖은 벌써 어두웠다. 가을 저녁은 해가 일찍 떨어졌다.
십수 개의 인영이 문밖에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척척척.
조교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입장했다. 각자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수강생들이 몇몇 조교의 얼굴을 알아봤다.
"……도봉."
"남옥창?"
"니들이 왜?"
이신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어, 어린애도 있는데요?"
"야, 너도 어린애잖아."
김소원을 보고 놀란 이수민에게 고등부 한 명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저기, 고딩아. 그렇게 말하는 너도 충분히 어린애란다.
조교들의 정체는 물론 도하나와 자율무공학부 1학년들이었다.
이게 내 비장의 특훈법이었다.
바로 특훈 복사기. 특훈 돌려막기. 특훈 자동 사냥. 일거양득. 일타쌍피. 취견자 패고 소걸 부려 먹기. 파천신공 익히고 파천혼원단 얻어먹기.
아무튼 아주 나에게 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이었단 뜻이다.
어차피 전국체전이 얼마 남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나흘 뒤가 개막전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화경과의 비무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리 없었다.
그러니 수준에 맞는 비무 상대를 무더기로 불렀다.
도하나부터 김소원까지.
초절정부터 일류까지.
경지도 무기도 성향도 다양했다. 일반부에게도 중등부에게도 맞출 수 있었다.
수강생들을 빡빡하게 굴릴 환경이 마련되었다.
이대로 로테이션을 돌려 비무를 치르게 한 뒤 피드백이나 좀 해줄 계획이었다. 단기간 특훈에 적합한 경험치 이벤트였다.
우리 과 애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은 덤이었다. 경지에 맞는 재능 있는 상대를 맞붙이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몸까지 편했다. 옆에서 구경만 하다가 몇 마디 떠들면 끝이니까.
그야말로 완전무결. 흠을 잡고 싶어도 도저히 잡을 수가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나는 내심 만족하며 입을 열었다.
"경지에 따라 조를 4개로 나누고 계속 상대를 바꿔가며 비무를 치른다. 비무 당사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옆에서 매 비무 결과를 예측하고 과정에 대한 소감을 쓰도록."
조교들이 일사불란하게 각 연무장 쪽으로 나눠서 이동했다. 각 조의 조장이 가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었다.
[초절정조]
[절정조]
[일류조]
[U-17조]
수강생들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경지에 따라 각 조로 이동했다.
원래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사람은 중등부의 이수민뿐이었다.
U-17조 조장 겸 유일한 조원인 김소원이 혼자 멀뚱히 서 있는 이수민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야, 뭐해. 이쪽으로 와."
"나, 나?"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는데?"
"나랑 너랑 둘이 한 조야……?"
"어. 뭐, 왜. 불만 있어?"
이수민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너, 넌 너무 어리고 또 여자잖아……. 손을 보니 무공을 오래 익힌 거 같지도 않고……."
이수민이 소심한 어투로도 할 말을 다 했다.
"하. 야, 니가 무공을 그렇게 잘해? 연무장으로 따라와."
김소원은 그냥 코웃음을 쳤다.
***
퍽! 퍽퍽! 퍽!
김소원이 이수민을 말 그대로 후려 패고 있었다. 검을 뽑지 않았는데도 일방적이었다.
이수민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으나 모든 공격을 차단하지는 못했다. 종종 뚫릴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작고 하얀 주먹이 소년의 몸에 닿았다.
퍼억!
묵직한 타격음에 바로 이어 쥐어짜내는 듯 앓는 소리가 났다.
"끅."
옆 연무장을 맡은 조교 몇 명이 그 광경을 구경했다.
"와. 우리 소원이 봐. 존나 살벌해."
"웃을 때가 아닐 텐데. 정이삭. 긴장해라, 너. 맨날 소원이한테 까불잖아. 내 생각에 너도 저렇게 맞을 날이 머지않았다."
"뭐래. 내가 소원이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 근데 지원아, 혹시 소원 님이 어떤 디저트를 가장 좋아하시는지 아니? 제발."
조교들이 구경하며 떠들거나 말거나 김소원은 이수민을 열심히 팼다.
사실 이수민의 말 중에서 틀린 것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상식적이었다.
김소원은 실제로 어리고, 여자였으니까.
게다가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은 당연히 없었고 오랜 투병 생활 탓에 신체마저 부실했다. 당연히 내가 공부를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김소원의 나이는 열다섯. 이수민은 열여섯이었다.
이 나이대에서는 여자보다 남자가 무공에 있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아직 내가 공부의 수준이 높지 않아, 재능과 별개로 남녀가 타고난 신체 조건의 격차를 뒤집는 것이 어려운 시기였다.
때문에 유소년 연령대 비무대회에서 여자 선수가 우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김소원은 제대로 된 무공을 올해 익히기 시작한 초짜. 이수민은 경쟁이 치열한 사천시의 지역 대표였다. 무심코 얕잡아 볼 만도 했다.
그러나 김소원은 남들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상식의 바깥에 있었다. 누구보다도 생의 밀도가 높았다.
성장 속도만 따지면 전 세계에 경쟁자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신은 물론이고 나보다도 빨랐다.
무공을 익힌 지가 반년 조금 넘었는데 김소원은 벌써 절정이 코앞이었다.
게다가 무한히 샘솟는 내공이 그녀의 뛰어난 오성을 뒷받침해주었다. 총량은 적어도 곧바로 채워졌다. 부족함을 체감할 수 없었다.
열화 핵폭단을 복용한 칠음절맥은 그런 존재였다.
기껏 무공을 10여 년 익힌,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은 중학생은 김소원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빡!
연무장을 바라보니 마침 김소원이 이수민을 쓰러트렸다.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 배를 부여잡고 있는 이수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다른 조는 몰라도 U-17조는 가장 적절한 비무 상대를 데려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김소원이 그 연령대의 진짜 최강자였다. 전국체전의 그 누구보다도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