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 118. 특훈(Special training)(1) >
"그럼 간다."
"어. 꺼져."
곽유가 퉁명스럽게 턱짓했다.
"모래 적당히 먹고 돌아와라."
옆에서 류천우가 덕담인지 뭔지 모를 말을 뱉었다.
화산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첫날처럼 제자들이 우르르 따라오지는 않았다.
무무문 제자들을 제외하면 친분이 깊은 몇 명만 나를 배웅하러 나왔다.
"문주님, 몸조심하세요!"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문주야. 또 수련하자."
"도 사매도 다음에 봐!"
무무문도들이 제각기 고개를 까딱이거나 손을 흔들며 난잡하게 인사했다.
하여튼 이런 합은 더럽게 못 맞추는 인간들이었다. 이런 쪽은 연화문에서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손을 몇 번 저은 후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집에서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일하러 갈 때가 되었다.
"다음에 또 올게요!"
도하나가 인사 몇 마디를 받아주다가 등 뒤를 따랐다.
"야!"
한참이나 멀어졌을 때 곽유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왜, 뭐."
"무조건 살아 돌아와!"
"그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정문 앞에는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문도 중 하나가 눈치껏 부른 모양이다.
운전석에는 전에 봤던 기사 아저씨가 있었다.
"타시죠, 대협! 제가 공항까지 빠르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 것까지야. 빨리 간다고 비행기가 일찍 뜨는 것도 아닌데……."
"아닙니다! 섬서의 기사가 화산검룡 대협을 못 알아보다니,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게 속죄할 기회를 주십시오!"
"속죄……. 예, 뭐……. 그러세요, 그럼……."
눈동자에 의지가 가득 찬 기사님을 굳이 말리기도 뭐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끼익!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대협!"
"감사합니다."
기사 아저씨가 장담한 만큼 택시는 정말로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덕분에 비행기 탑승 시간이 한참 남았다.
남는 시간 동안 공항 근처 빵집에서 도하나에게 빵이나 먹였다. 나는 커피를 마셨다.
"사형은 안 드세요?"
"난 아직 배가 안 고프다."
사실 화산에서 떠나기 직전 문도들과 점심을 같이 먹은 참이었다.
그러니 아직 배가 안 고파야 정상이었다. 오히려 도하나가 이상한 거지.
원래 무인들의 식사량이 일반인의 몇 배라지만 도하나는 무인 중에서도 많이 먹는 편이었다. 뱃속에 개방도라도 들었나.
도하나는 나와 빵 접시를 번갈아 보더니 좋다고 몇 인분을 그 자리에서 먹었다.
도하나야말로 내가 중동에 가 있는 동안 잘 지낼 수 있을지 가장 걱정되는 사람이었다.
뭐 능력은 출중하니까 당초아가 어련히 잘 챙겨주겠지만.
이후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이니 사천이었다.
"……너 설마 기내식도 먹었냐?"
입가에 뭔가를 묻히고 있는 도하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네, 사형. 쪼끔?"
일가족이 배부르게 식사할 양도 도하나에게는 '쪼끔'이었다. 그래서 그 말은 도하나의 식사량을 파악할 지표는 되지 못했다.
"……그쯤 되면 경이롭구나."
"칭찬이에요?"
"칭찬이겠냐?"
공항을 나와 바로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햇빛이 맑은 월요일 오전이었다.
이번 주말이 전국체전이었다.
***
사실 원래라면 내가 전국체전을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 과에서 참가하는 유일한 사람이 이신이었기 때문이다.
늘 하던 대로만 해도 최소 입상이 기대되는 인재.
심지어 이신은 올해 우승을 못 하더라도 괜찮았다. 아직 1학년이었으니까.
올해부터 4년 내내 전국체전을 먹으면 그거야말로 너무한 독재였다. 내년부터는 우리 과 다른 애들도 합류하기 시작할 테고.
올해 정도는 우승 못하는 게 장기적으로 오히려 좋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굳이 설렁설렁 싸울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갑자기 일거리가 조금 늘어났다.
"특강이요?"
"예. 사천시 대표 선발전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나 봐요. 짧은 기간에 우리 애들 실력이 엄청나게 올라왔잖아요. 지혜는 사천오룡 중 한 명을 꺾기도 했고요."
"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원지혜와 정이삭의 선전이 기대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비록 전국체전까지 진출하지는 못했으나 선발전 결승까지 올라간 것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사천시 주선으로 내게 특강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전국체전 참가자들을 짧게라도 가르쳐줬으면 좋겠다고,
"제가 이번에 가르친 건 잡기술 몇 개밖에 없습니다만. 애들 실력은 원래 올라오는 중이었고요."
"교수님께서 그러시다면 물론 그게 맞겠지만 사천시 생각은 좀 다른가 봐요. 사천시쯤 되면 인재 풀이 전국에서 최상위인 지역인데 여기서도 그 잡기술들이 통했으니까요. 그 잡기술들, 전국체전에서는 안 통할까요?"
"작게나마 방송 중계도 있었으니 아마 가르쳐도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예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사실 잡기술이라는 게 알려질수록 효과가 반감되거든요. 사천 지역대표 선발전은 어느 정도 분석도 당했을 테고요."
"그래도 부탁해요. 정 안되면 짧게 자세 교정이라도 봐주시는 건 안 될까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그 정도야. 스스로 원하는 무인에 한해서라면 가능하죠."
"감사합니다!"
"한데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요? 대체 이사장님이 왜 그렇게 열심이신 건지."
"사천시가 전국체전에서 잘하면 저한테도 좋은 거 아니겠어요? 어차피 이번 참가자들은 다 우리 과 학생들이니까요."
"그건 그렇네요."
"게다가 자율무공학부 이미지를 좋게 하는 데도 의의가 있고요. 다른 과에서도 결국 교수님과 우리 과를 인정했다는 거잖아요."
"저야 그런 이미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만."
"그래도요. 저한테는 중요해요. 더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리 말씀하신다면 뭐. 그래도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고마워요! 잘 부탁할게요!"
아무튼 그리하여 예정에도 없는 특강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악절이 아직 내한하기 전이라 한가했기도 했고, 당초아는 나를 장기 고용한 갑인 만큼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물론 특강비를 따로 받기는 했으나 어차피 백억 원대의 교수 계약에 비하면 푼돈 수준이었다.
특강은 바로 오늘 저녁이었다.
매일 철두철미 아레나를 빌려서 저녁마다 조금씩 봐주기로 했다.
"음?"
막상 도착하니 안에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내가 알기로 수강생들은 이신을 포함한 사천지역 대학부 대표 4인이었는데.
"흠."
대충 살펴보니 어린 애들이랑 성인도 있었다.
그러니까 전국체전 중고등부랑 일반부 참가자들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양이었다.
"아, 교수님!"
당초아와 정장을 입은 여자 하나가 나를 발견하자 후다닥 달려왔다. 여자는 아마 이번 특강에 연관된 사천시 측 인물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화산검룡 대협! 팬이에요!"
"아, 네. 저도 반갑습니다."
사천시 관계자인 듯한 여자가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읽어보니 사천시의 7급 공무원이었다.
"그런데 수강생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은데요?"
"아, 그게. 특강 사실이 알려지자 다른 연령대 참가자들도 청강하고 싶다고 찾아온 모양이에요. 특강이 오늘 급하게 열린 거라 다들 일단 와서 일단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군요."
"어떡할까요?"
나는 청강생들을 물끄러미 살폈다. 다들 꽤 긴장한 모습이었다.
줄을 딱딱 맞추고 말없이 자세를 곧게 세웠다.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눈은 반짝였다.
사실 이런 식으로 미리 말도 없이 가르쳐달라고 찾아오는 것은 아주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온 무인을 내쫓을 만큼 모질지는 않았다.
오늘 화산의 비전 무공을 가르칠 계획도 아니었다.
그냥 자세 좀 봐주고 잡기술이나 몇 개쯤 알려줄 예정이었다.
누가 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의지로 직접 찾아왔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화경 고수에게 특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절호의 기회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어쨌든 기회를 필사적으로 움켜쥐려 한다는 점을 높이 샀다.
"품이 특별히 더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니 일단 해보겠습니다. 다만 제 지시에 불응할 시 즉시 돌려보내는 것으로 하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천시 공무원이 달려가 그 사실을 전달하자 청강생들은 신이 났는지 소리를 질렀다.
"감사합니다! 대협!"
"감사합니다!"
나는 연무장으로 올라갔다.
앞에 수강생들이 쪼르르 집합했다.
대학부 참가자 4명 외 중등부 2명과 고등부 4명, 그리고 일반부 2명이 있었다. 총 12명이었다.
"중등부와 일반부는 2명뿐인가?"
"예. 대협. 그들은 특강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여."
"중등부도요. 그, 걔가 무당파 내정이라서 좀 그런가 봐요……."
"그렇단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갑자기 좀 열심히 가르치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준비해온 내용을 갑자기 바꾸지는 않았다.
첫 수업에서 내가 요구하는 것은 늘 같았다.
"일단 실력부터 좀 보지."
나는 준비해온 목검을 꺼내 들고 까딱였다.
"덤비도록."
"하, 한꺼번에요?"
중학생 둘이 당황한 표정으로 망설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먼저 검화까지 흩뿌리며 달려드는 인영이 있었다.
"검화……."
중고등부 애들이 굳어있는 사이 선두에서 덤벼드는 건 이신이었다.
그동안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연습도 실전처럼.
그 공세가 퍽 강렬했다.
출발하며 전음까지 날렸는지 불과 한두 호흡 사이에 일반부와 대학부 청강생들이 일제히 뒤를 따랐다.
나는 웃으며 목검에 얇은 검강을 두르고 다가오는 검화를 차례차례 깨부쉈다.
그 과정에서 각 수강생의 외공 수준과 초식의 완성도, 내공 운용 방식과 내기의 양은 물론 그것들의 조화와 가진 것을 활용하는 재기 따위까지 읽어냈다.
내 기준으로 한참이나 하수였기에 실력 파악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초절정 끝자락에 다다른 일반부 두 명이 개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전국체전 일반부는 결국 나라에서 비살상 비무를 가장 잘하는 인간을 뽑는 대회였다.
물론 사실상 대문파 소속은 참가하지 않는 아마추어 대회라는 한계가 있었으나 그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았다.
당연히 사천시 지역대표로 뽑힌 둘은 어느 정도 실력이 있었다.
게다가 둘 다 비무 전문가라서 그런지 잡기술과 임기응변이 기대 이상이었다.
딱히 내가 더 가르칠 것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대학부와 중고등부 애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지향점으로 보였다.
그냥 화경과 한 번 칼을 맞대고 싶어서 찾아온 것 같았다.
이신이 그 밑을 바짝 쫓고 있었으나 확실히 수준 차이가 났다.
사천공대 4학년 3명은 이신보다도 뒤처졌다. 이신과 큰 격차는 나지 않았으나 합공을 따라오는 데도 급급해 보였다.
그 6명을 정리하는 데는 스무 초식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얼을 타고 있는 중고등부 6명을 향해 다시 목검을 까딱였다.
"얼른 덤벼라. 빨리 맞고 배울 건 배워가야지."
스릉.
그들은 애써 검을 뽑아들었으나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는 못했다.
하긴 아직 절정은커녕 일류와 이류 수준인 애들이었다. 화경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이겨내기도 힘들어 보였다.
"안 오면 내가 가지."
파바박!
나는 가볍게 걸어 다가간 후 목검을 크게 횡으로 휘둘러 여섯을 한 번에 후려쳤다.
"아악!"
애들이 울상으로 주저앉았다.
나는 그 와중에 뭐라도 대응을 해보려고 한 녀석과 굳어서 아무것도 못 한 녀석을 구분해서 기억했다.
아무것도 못 한 녀석은 곧 자진해서 특강을 포기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율무공학부의 방식대로 험하게 굴리고 굴리고 또 굴릴 생각이었다.
결국 자기보다 강한 고수에게도 대들 수 있는 자만이 승자가 될 수 있다.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 감각을 심는 게 먼저였다.
"이번엔 삼재종합공만 사용해서 다시 덤비도록."
일반부 선수들은 딱히 배울 게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나머지 학생들은 오늘 자율무공학부가 그렇게 빠르게 강해진 이유를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다시."
자세 교정은 구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내 목검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새로운 동작이 몸에 각인되는 순간이다.
"다시."
특강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어느새 달이 하늘 높이 걸렸다.
"내일도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는 저녁을 일찍 먹고 이곳에 오도록. 너무 많이 먹지는 말고."
중고등부 학생 중에서는 간신히 벽에 기대서서 헛구역질을 하는 애도 있었다.
특강 첫째 날 과정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