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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118화 (118/120)

< 118 : 117. 매화만리(Huashan forever)(2) >

거혈도의 시신에는 일말의 생기조차 없었다. 사망한 직후부터 급속도로 말라붙었다.

진원진기를 당장의 내력으로 치환한 무인의 최후였다.

김산은 한참 동안 말없이 거혈도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김산에게도 거혈도와 비슷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진원진기를 분해하기 시작한 핵폭단의 작용은 절대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탐욕스럽게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진원진기를 분해한다. 금약의 복용자는 결국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신기에 가까운 내공 제어력을 가진 몇몇만이 간신히 그 속도를 조절할 수 있을 뿐이다.

김산은 무공에 관한 재능이 모자라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김산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부를 관조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필사적으로 내공을 갈무리하려고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천살성의 생명을 맛본 단전은 진원진기의 분해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김산은 곧 흐름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기가 기맥을 거칠게 타고 흘렀다. 매 순간 생산되는 내력의 양이 너무 많았다. 완전무결한 화경의 육신에도 부담이 될 정도였다.

이 연구소에서 만든 화경용 핵폭단은 지나치게 잘 만든 물건이었다. 핵폭단 본연의 성능이 효과적이었고 탁월했다.

그러나 제작 과정에서 복용자가 천살성일 것을 상정한 적은 없었다.

너무 많은 기운을 담고 있는 진원진기가 문제였다. 분해되며 뿜어나오는 막대한 내력이 기맥을 찢고 할퀴며 달렸다.

전투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했던 천살성이 별의 주인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었다.

김산은 내공이 멋대로 흐르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른 암매화들이 죽음을 받아들였던 순간처럼 김산 역시 다가올 미래에 순응했다.

후회하지 않았다.

여태 화산파의 문도들이 화산의 미래를 향해 희생했을 때와 매한가지였다.

김산 역시 다른 화산의 미래를 위해 희생했을 뿐이다.

김산은 옳다고 믿는 일을 행했다. 그러니 맞는 일을 한 것이다.

암매화들의 시선이 마음 아팠지만 애써 외면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정신을 놓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쉴 수 없었다.

끝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조금 더 있었다.

귀에서 피를 흘리는 상태로 흙바닥을 뒹구는 회색 무복의 무인들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그들은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큰 외상 없이 공포만으로 기절한 자들도 있었다.

문제는 잔챙이들이 아니라 한 명의 고수였다.

마선.

무위가 예측되지 않았다. 최소 화경의 끝자락이라고 봐야 했다.

마선은 화경용 핵폭단을 이 수준까지 제작했다.

무림공적으로 여기는 것이 맞았다. 가능하다면 제압하거나 사살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김산은 당장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었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내력을 밖으로 분출하는 것만으로 기맥이 타들어 갔다.

게다가 속에서 미친 듯이 살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눈앞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이고 그냥 편안해지고 싶었다.

막대한 내력을 마음껏 다루고 거대 기공을 원없이 펼친 경험이 한 명의 무인으로서 비할 바 없는 쾌감으로 다가왔다.

무공이 한낱 놀이가 된 듯한 감각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자제력이 약해졌다.

피와 죽음과 폭력에 한껏 자극받은 천살성의 본성이 꿈틀거렸다.

세상이 하찮았다.

김산은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애써 출수는 참았으나 그 대가로 눈알의 실핏줄이 모조리 터졌다. 눈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본인을 가까스로 다스리고 있는 김산의 눈앞에 마선이 나타났다.

마선이 창백한 얼굴에 눈을 빛냈다.

"놀라운 재질이다. 한낱 인간의 무재가 아니구나. 가히 용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그냥 가라."

규정상으론 마선을 제압하거나 사살해야 했다.

그러나 잠시 고민한 후 김산은 마선을 보내 주기로 했다.

한 명이라도 직접 죽이면 끓어오르는 살심을 자제하지 못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피아를 막론하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여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임무가 아니라 화산의 미래였다. 그리하여 죽을 각오로 핵폭단까지 복용한 것이 아닌가.

일의 선후를 틀려서는 안 됐다.

그렇다고 제압만 하기엔 섬세한 내력 제어가 힘들었다.

내력이 점점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다.

단순한 초식마저 거대 기공으로 화할 만큼 막대한 기운이 촛불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코끼리가 개미를 피해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공격하고 살려둘 자신이 없었다.

"움직일 수 없는 건가?"

김산은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허공섭물로 몸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허공에 날아오른 자하신검 주변에는 검강을 두껍게 둘렀다. 날개 뼈로부터 피어오른 호신강기가 주변을 넓게 덮었다.

그걸 보고도 마선은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동자를 더욱 빛냈다.

"어린 용[小龍]아. 왜 나를 살려주는 건가? 나를 죽이거나 사로잡는 것이 네 임무 아닌가?"

"네놈은 몰라도 된다."

김산이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철도 씹을 수 있는 이빨이 갈렸다.

"이미 핵폭단을 복용한 김에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떤가? 네 몸을 살피면 연구의 진전이 훨씬 빨라질 거 같다. 거혈도보다 훨씬 이상적인 몸이다. 따라온다면 연구가 끝난 후에 내가 너를 치료해보겠다."

"지금 당장 꺼지지 않으면 그냥 죽이겠다."

자하신검이 우뚝 섰다. 그 위에 검강이 곧게 뻗었다. 연보라색 기둥이 구름을 가를 듯 높이 솟구쳤다.

화경을 제압하는 것은 몰라도 죽이는 것은 한 수면 충분한 위력이었다.

천하의 마선도 그 모습을 보고 헛소리를 계속할 수 없었다.

"흠. 알겠다. 나는 아직 궁금한 게 많다.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낫지. 다음에 보자."

마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순히 멀어졌다.

그러나 마선은 한껏 멀어진 후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몸이 점으로 보이는 거리에서였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검룡을 공격해라."

그건 회색 무복 무인들에 대한 사형 선고였다.

"……존명!"

진작 전의를 상실했음에도 회색 무복 무인들은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일제히 품에서 단약을 꺼내 삼켰다. 느껴지는 내력이 순식간에 증폭되었다.

무인들은 공포심마저 잊은 듯 무기를 빼 들고, 없으면 적수공권으로라도 돌격했다.

"……개새끼. 넌 내가 언젠가 죽여버리겠다."

김산이 마선을 노려보며 씹어 삼키듯 내뱉었다.

무인들이 복용한 단약은 잠폭단인 듯했다.

핵폭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통상 유통되는 잠폭단에 비해서는 훨씬 성능이 좋은 물건으로 보였다.

김산이 결심했다.

자하신검이 한번 횡으로 휘둘러졌고.

촤악.

김산을 향해 돌격하던 50여명의 무인들은 모두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핏물이 넓게 튀었다. 끔찍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공격권 끝자락에 마선이 있었다.

마선은 검강을 쳐내며 거세게 튕겨나갔다. 제대로 막아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였으나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쫓을 수는 없었다.

김산은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살인에서 쾌감이 느껴졌다. 둑을 무너뜨리는 듯한 해방감이 있었다.

김산은 그 쾌감을 애써 외면하며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끝없이 치솟는 살인 욕구를 어떻게든 달래려 했다. 이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는 무림맹원, 개방도, 암매화 모두의 기척을 잡았다.

하늘에 수십 개의 강기로 이루어진 매화가 떠오르더니 그들을 목표로 잡았다.

그러나 매화는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김산은 그들을 향해 매화를 날리는 대신 진신지기의 분해를 오히려 가속했다.

손을 뻗어 자하신검을 잡고 그대로 하늘로 검강을 뻗었다.

검강이 구름을 뚫고 높이 치솟았다. 검강 주위로 무수히 많은 매화가 회전했다.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 매화는 수천, 수만 송이에 달했다.

김산이 현시점에서 펼칠 수 있는 무의 정점이었다.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막대한 내공을 다루며 김산은 화경 끝에 있는 벽을 두드렸다.

이대로 내공을 모두 쏟아내고 죽을 생각이었다.

이성으로 살심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모든 의식을 무의 벽을 뚫는데 집중했다.

암매화들은 대부분 이미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그들은 그 광경을 눈을 뜬 채 보고 있었다. 그저 볼 수밖에 없었다. 몇몇은 피눈물까지 흘렸다.

김산은 그 상태로 한나절 내내 강기를 쏟아냈다.

3시간째.

살아남은 무림맹원들과 개방도가 의식을 차렸다. 정비를 하고 물러섰다. 암매화를 챙겨 사라졌다.

9시간째.

무인들이 조금씩 다시 나타났다. 적은 아니었다.

무림맹도들이 김산 주변으로 넓게 포위망을 형성했다.

맹의 협객들이 다수 모였다. 화산검룡이 폭주했을 때 제압하기 위한 임무를 자진해서 맡았다.

20시간째.

어느 순간 김산은 그의 앞에 다가서는 인기척을 느꼈다. 그러나 기척에서는 그 어떤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김산은 안도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렸다.

"저 잘했죠?"

눈앞에는 협객이 있었다.

협객이 소년 같은 눈망울에 물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여린 목소리로 소년화경에게 대답했다.

"잘했다."

검선이 검룡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김산은 의식을 놓았다. 실핏줄이 터져 붉은 눈자위가 뒤집혔다.

종일 하늘 높이 솟구쳤던 거대한 검강이 천벌처럼 땅을 향해 내리꽂혔다.

쾅!

스승은 제자의 목숨으로 만들어진 검강을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내고 다시 말했다.

"잘했다."

이후 스승과 제자는 격렬하게 싸웠다.

현장에 있던 무인 대부분은 그 격전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화경 극한에 다다른 몇 명만이 어렴풋이나마 양상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하수들은 포위망을 넓히고 현장에서 멀어지기에도 바빴다.

부서진 강기의 파편마저 동격의 고수가 펼치는 필살의 검격에 가까웠다. 한참이나 거리를 둬야 했다.

고오오오오오오오─.

물러난 무인들은 먼 하늘에 보이는 거대한 강기의 격류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경외심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뜨거운 검강이 비구름마저 가르고 지나가며 습기를 그대로 증발시켰다. 공기가 말라붙었다.

녹색 밀림은 황무지가 되었다.

***

검선과 제자의 싸움은 김산에게는 희끗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천살성의 광기를 제어하지 못했던 것이 처음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검선은 김산을 제압하는 과정에서도 여유롭게 말을 계속했다.

뭐라 그랬더라.

─잘했다.

─훌륭하다.

─믿고 맡기마.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먼저 가서 기다리마.

정신을 차렸을 때 김산은, 처음으로 본인의 선택을 후회했다.

3시간 동안의 격전 후.

온몸에 진이 다 빠진 김산이 볼 수 있었던 것은, 평안히 웃는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스승의 모습이었다.

천하제일인은 이미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시대의 마지막 협객.

화산검선 주태평.

향년 126세. 등선(登仙).

"스승님……?"

김산은 멍하니 스승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곧 기겁하며 스승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화산검선의 주검을 건드리는 순간.

검선의 사해가 빛이 되어 그대로 사라졌다. 미약한 기의 흐름을 제외하면 일절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김산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피눈물이 흘렀다. 그제야 전신에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사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몸 상태였다. 핵폭단이 진원진기를 완벽하게 태워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산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몸 안에서 진원진기의 존재를 느꼈다.

그 따뜻하고 거대한 진원진기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내공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천하제일인의 진원진기가 김산에 몸 안에 있었다.

그건 김산이 각오한 대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매화만리의 논리였다.

***

그날.

'화산의 현재'가 사라졌고, '화산의 미래'는 폐인이 되었다.

다른 암매화들과 마찬가지로, 곽유는 그 무력한 날을 기억했다.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아마 죽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빚을 졌다. 너무 커서 갚을 수도 없는 빚이었다.

당시의 암매화 여섯은 그날부터 필사적으로 살았다. 검선과 검룡을 자리를 조금이나마 메꾸겠다는 마음이었다.

잠을 줄여 수련하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고, 수없이 다치고, 계속 싸웠다.

화산의 용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해도, 그들이 화산을 이을 수 있도록.

그 모든 희생을 딛고서라도 매화는 영원히 이어져야 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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