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115화 (115/120)

< 115 : 114. 그날(The day)(1) >

곽유는 그날의 무력감을 기억했다.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이었다.

당시 곽유는 이제 막 초절정에 오른 약관이었다.

대화산파 홍설문 소문주.

소녀 초절정.

옥녀신공과 옥녀검결의 적법한 후인.

화산이 내세우는 세 명의 어린 천재 중 홍일점.

곽유는 한창 빛나고 있는 후기지수였다.

비록 화경에 도달한 동문의 압도적인 경쟁자가 이미 용의 별호를 얻은 지라, 그녀는 봉이 되지 못했지만.

곽유 역시 명실상부한 무의 천재였다.

그때 곽유는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막 암매화칠수의 막내가 되어 무림맹의 임무를 맡았을 때도 그랬다.

애초에 실전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곽유는 초경에 들 무렵부터 여러가지 자잘한 임무를 받아 수행해왔다.

물론 그전에 수행했던 임무와 암매화로서 맡은 임무는 차원이 달랐다.

"핵폭단 연구시설?"

"그래. 연구소장은 마선으로 추정된다."

"……마선? 설마 그 마선?"

"삼대의선을 얘기하는 거라면 그자가 맞다."

"우와."

풍문으로만 듣던 거물의 이름이 나왔지만 곽유는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벌써 이런 거물을 상대할 위치가 되었구나.'

그저 감탄했다.

"임무 목표는 무엇입니까?"

류천우가 존댓말로 질문했다.

곽유와 동시에 암매화가 됐음에도 나이 몇 살 많다고 6호가 된 놈이었다.

'자기도 사석에서는 김산에게 반말하면서 공식 석상에서는 꼬박꼬박 말을 높이는 가증스러운 위선자 자식.'

곽유는 조만간에 서열 정리를 한 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지금은 말고 조금만 더 강해지고 나서.'

아직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곽유와 류천우 간의 실력차는 6:4. 아니, 거의 호각이었다. 몸 상태가 좋으면 지금도 할 만한 수준.

하지만 곽유는 때를 기다렸다.

화경만 되면 류천우가 김산이고 다 엎을 생각이었다. 그때부터는 홍설문의 시대였다.

딴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다.

곽유는 대주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연구자료의 수거 혹은 소거 이후 시설의 완전 파괴와 관련자의 완전 배제다."

"살수를 허용합니까?"

"그래. 방심하지 마라. 고수가 몇 명 있을지 모른다. 연구가 진행되었다면 복용자가 다수 있을 수도 있다. 임무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시 퇴각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도록."

"네, 대주."

"최고수는 내가 상대한다. 일단은 마선이 대상이지만, 상황이 변하면 맞춰서 대응하겠다. 6호와 7호는 나머지 암매화가 교전하며 시선을 끄는 사이 자료를 탈취하는 데 치중하도록."

"예."

"확인!"

곽유는 큰 소리로 대답했지만 딱히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암매화 전원이 투입되는 임무였다.

화경만 넷에 초절정 셋.

그 외에 무림맹과 개방이 지원한 정찰 인력들과 무인들까지 다수 있었다.

웬만한 중소문파 정도는 소리 소문도 없이 지워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구석진 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운영 중인 국제법 위반 병기 연구시설에, 대화산파 비밀부대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한들 아군이 도주하는 데는 아무 무리가 없을 거고.

아무튼 목숨이 위험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암매화가 파괴한 핵폭단 연구시설이 한두 개도 아니었다.

금지되었다고 한들 은밀하게 핵폭단을 연구하려는 국가들은 많았고, 무림맹은 언제나 그 흔적을 찾아 배제해왔다.

이번도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탕의 나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작전 당일은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습한 여름, 하루가 다르게 식물이 자라는 계절.

밀림의 풀들의 우거진 잎사귀가 키 높이에서 흔들렸다.

하늘에서 내리는 거센 물줄기는 고수의 시야마저 가릴 정도였다. 끝없이 땅바닥 두드리는 소리가 몹시 시끄러웠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옷과 칼은 진작 젖었지만.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날이었다.

눈을 가리고 귀를 속이는 날씨였기 때문이다.

─작전 개시.

암매화 1호가 전음으로 전달한 개시 명령에 남은 암매화 여섯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공을 밟아 순식간에 도달한 연구소 입구.

발에서 튄 진흙이 다시 땅에 닿기도 전에 김산은 보초를 서고 있는 정찰병 둘을 단숨에 제압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암매화칠수는 파죽지세로 연구시설을 차례차례 망가뜨리며 나아갔다.

약간의 소음은 있었지만 거센 빗소리에 가려졌는지 심처에서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암매화는 계속해서 기습의 이점을 노릴 수 있었다.

눈에 띌 만한 고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초절정 십수 명들 사이에 화경 하나.

화산의 검강이 연구시설의 고수들을 어렵지 않게 도륙 냈다.

홀로 암매화에 맞선 화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새 암매화는 연구시설에 중추에 도달했다.

중앙 연구실을 내려다보는 연구소장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단둘이었다.

"……응? 너희는 뭐냐?"

고개를 기울이며 느긋하게 묻는 거구의 노인.

숱이 없는 백발에 단단한 근육이 인상적이었다.

그 옆에는 창백한 얼굴로 대주를 보며 눈을 빛내는 미남자가 있었다.

'저 병약해 보이는 남자가 아마 마선인 것 같은데, 그럼 노인네는 누구지?'

곽유는 긴장감 없이 생각했다.

그러나 김산은 즉시 표정을 굳히고 전음을 날렸다.

─6호와 7호는 즉시 이탈하여 임무 목표를 탈취한다.

명령에 반응한 류천우가 먼저 몸을 뒤로 날렸고, 곽유 역시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일단 따라갔다.

'왜?'

곽유는 중앙 연구실로 들어가기 직전 돌아보았다.

어느새 지붕이 날아간 연구소 위쪽으로부터 거대하고 붉은 도강이 재앙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하늘을 가득 메울 듯한 시뻘건 강기.

그제야 곽유의 머리에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설마 저 사람…….'

전대의 고수.

사도삼문 중 일문인 산동왕가(山東王家)의 전대 가주.

거혈도(巨血刀, Gigantic crimson) 왕악.

세상에 화경 무위를 알린 지 50년은 훌쩍 넘긴 노괴물(老怪物)이었다.

***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전대 고수라고 해서 암매화칠수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거혈도와 함께 하는 것은 기껏해야 마선 하나. 화경이었으나 기본적으로 의원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선 것은 화산파에서 가장 비싼 임무를 처리하는 화경 넷과 초절정 하나였다.

흔한 정종의 온실 속 화경과는 달랐다.

손속에 자비가 없었고 칼의 궤적은 실전적이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검진은 유기적인 동시에 치명적이었다.

화경을 상대하는 것, 전대 고수를 상대하는 것, 화경끼리 합을 맞추는 것까지 모두 훈련된 상태였다. 익숙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것, 또 뼈를 주고 생을 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몸에 커다랗고 징그럽게 새겨진 깊은 흉터들이 그 고난의 나날을 증거했다.

화경을 죽이기 위해 훈련된 화경 넷.

전대고수와 의선 하나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거혈도가 일반적인 화경일 때의 이야기였다.

─암매화 전원 후퇴한다. 임무는 포기한다.

김산이 전음했다. 암매화라는 사실은 일단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상대도 알고 있겠지만.

"대주."

"반박은 듣지 않겠다. 5호부터 차례대로 신속히 퇴각하도록."

"……존명."

"5호는 도주하는 길에 6, 7호와 합류해라."

"예."

"허허, 어이 없군. 누가 보내준다더냐?"

거혈도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손을 작게 휘저었다.

손끝에서 거대한 강기가 뻗어나와 암매화 5호의 등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암매화 1호가 그 궤적을 쫓아 연보랏빛 검강을 뻗어 붉은 도강을 걷어냈다.

"그건 내가 결정한다."

쾅!

튕겨나간 혈강기가 연구소 벽을 부쉈다.

거혈도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허. 대체 누구냐, 네놈은."

"날 모르나?"

"화산에 너 같은 것이 있었던가? 검선은 아닌 듯한데. 혹시 천매(天梅)냐? 반로환동이라도 한 것이냐? 아니지. 그놈은 젊을 적에도 네놈처럼 반반하지 않았다. 허, 도무지 모르겠군."

"스승님의 이름을 함부로 담지 마라, 노괴."

"나보고 노괴라고? 누구보고 하는 소리냐. 반로환동까지 한 늙은이가."

거혈도가 신경질적으로 강기를 날렸다.

김산은 자하강기를 둘러 받아치고는 들고 있던 자하신검 레플리카를 힐끔 살폈다.

레플리카는 거혈도의 도강을 몇 번 받아내기도 전에 고철이 된 상태였다.

이미 가져온 레플리카 두 자루를 모두 소모했다.

김산은 등 뒤에서 자하신검 진본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거혈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하신검. 이번엔 진짜군. 게다가 검선의 제자라……. 검선의 제자 중에 너 같은 놈이……. 아니, 잠깐. 설마 네놈 반로환동을 한 게 아니라……, 검선이 몇 년 전에 제자로 들였다는 그 젖먹이냐?"

"맞다. 드디어 알아차렸군. 반갑다. 늙은이. 머리숱만 보면 귀하가 나보다 젖먹이 같지만 말이야."

"이런 미친…….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내게 감히……!"

"반대로 그쪽은 너무 말랐군. 거의 사막이야."

그러더니 김산은 하늘을 힐끔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늘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군. 오늘 실컷 물을 주고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기를 바라지."

"네놈을 산채로 뜯어먹고 검선 노인네에게 가죽만 선물로 보내야겠구나."

"스승님은 아직도 너보다 풍성하신데 정 궁하면 내가 비결을 한 번 물어보마. 대신 비급을 배우는 만큼 화산의 삼대제자로 입문해라."

"……네놈은 편하게 죽지는 못할 거다."

─4호 출발.

─예.

김산이 거혈도를 도발하여 공세를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사이 암매화가 하나하나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암매화 1, 2호뿐이었다.

"저도 갑니까?"

2호가 말했다.

김산이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미치셨소? 그쪽은 나랑 같이 가야지. 혼자 도망가면 나는 어떡하라고. 내가 저 둘을 동시에 상대해? 나 혼자 뒤지라고?"

"아깐 아래 순번부터 차례대로 가라길래."

"그걸 애들 차례고. 정신 좀 차리시오. 한 번에 갑시다."

"언제?"

"지금."

"지금?"

"지금!"

암매화 1호와 2호가 아주 짧은 순간 시선을 마주했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혈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참. 누가 보내준다더냐?"

"그건 내가 결정한다고 했을 텐데."

짧게 대답한 암매화 1호가 두 갑자 반의 내공을 거칠게 끌어 올렸다.

자하신검의 가느다란 검신으로부터 동명 무공의 거대 기공이 쏟아져나왔다.

──자하신검 벽(䧗).

산사태라는 이름에 걸맞게 거대하고 사나운 강기가 연구소를 깨부수며 나아갔다.

암매화 2호가 동시에 칼을 허공에 찔렀다.

검광자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고도로 정밀한 수법 전개였다.

──암향검법(暗香劍法) 찌르기(刺)

단출하지만 거대한 위력을 품은 반투명한 회색 검강이 소리 없이 산사태에 섞여 전대의 고수를 노렸다.

두 종류의 검강은 서로 위력을 반감시키지 않았다. 물 흐르듯 섞여 나아갔다.

그 파괴적인 기공 세례를 보면서도 마선은 책상에 손깍지를 끼고 앉아있었다.

거혈도는 그저 웃었다.

"이거 참. 벌써 좋은 기회가 왔군. 시험하기 딱 좋은 수준이야."

전대의 노괴가 여유롭게 웃었다.

장강이 흐르는 듯 '거의 무한한' 내공이 그 여유의 근거였다.

거혈도는 성명병기인 태도를 위로 높게 쳐든 채로 강기를 칼에 주입했다.

잠깐 사이에 도강이 웬만한 사람보다 커졌다. 그러나 거혈도는 계속해서 도강을 키웠다.

핏빛 강기가 하늘 높이 충천했다. 고층 건물에 달하는 높이였다. 뚫린 지붕 너머 언뜻 비 구름과 이어진 듯 보였다.

"이런 젠장."

"왜?"

"2호는 그냥 쭉 가시오."

거대 기공을 쏟아낸 후 달아나던 김산은 다시 몸을 거혈도 쪽으로 틀었다.

그리고 온 내공을 끌어올려 호신강기를 넓게 전개했다.

연구소 전체를 찢어내며 다가오는 핏빛 도강의 위력을 감소시킬 목적이었다.

자신과 2호가 아니라 비교적 수준이 떨어지는 다른 암매화들을 위해서.

손끝으로부터 반투명한 연보랏빛 기가 밝게 맺혔다. 닿은 비가 증발했다.

자하신공(紫霞神功) 만개(滿開, Full bloom).

마치 사람이 매화나무가 된 듯, 김산을 중심으로 매화 꽃잎이 끝없이 겹치며 주변으로 넓게 퍼져 나갔다.

쿠우우우웅──.

암매화 1호의 호신강기와 핵폭단을 복용한 노괴의 도강이 부딪쳤다. 매화꽃이 추적이는 비 사이로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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