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114화 (114/120)

< 114 : 113. 화산귀환(Homecoming)(5) >

비무가 끝나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내려간 낙안봉.

나는 기절한 류천우, 곽유, 도하나를 땅바닥에 내버려 둔 채 정자에 앉아 달을 구경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류천우였다.

그는 나와 기절한 여도사들을 한차례 번갈아 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류천우는 곧 커다란 아이스 버킷을 들고 돌아왔다. 안에는 얼음과 자소곡차가 빼곡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유와 도하나가 차례대로 눈을 떴다.

곽유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야, 한 번 져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기절한 사이 말투가 많이 변했구나, 사손아."

"사손은 개뿔. 어이, 사백님. 자꾸 까불래요? 그러다 진짜 한 대 맞아요? 예? 콱. 어?"

"곽매."

"왜."

곽유가 눈을 새침하게 대답하며 내게 눈을 흘겼다.

나는 그녀를 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때리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지 않나?"

"뭣, 뭐어!?"

곽유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나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었다.

"나한테 맞고 감전당한 채 흙바닥에서 팔딱거린 게 바로 직전이다. 지금도 온통 흔적이 가득하고. 그 얼굴에 묻은 거나 좀 닦아라."

"뭐? 뭐야, 이거!"

내 말에 곽유가 손거울을 꺼내 상태를 살피더니 소리를 지르며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아악! 진샨(金山), 진짜 개짜증나!"

"땅은 네가 뒹굴었는데 왜 나한테 짜증이냐."

"아무튼!"

"설마 진짜로 아직 삐진 거냐?"

"안 삐졌다고!"

곽유가 성큼성큼 걸어 정자를 오르더니 아이스 버킷에서 자소곡차 한 병을 꺼냈다.

탁!

입구를 손날로 쳐서 날리고 그대로 들고 병나발을 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류천우에게 물었다.

"이건 언제 이렇게 꿍쳐둔 거냐? 원래는 없어서 못 마셨잖아."

아이스버킷에 담긴 자소곡차가 열댓 병은 되었다.

류천우도 한 병을 꺼내 손끝에 기를 둘러 뚜껑을 따며 답했다.

"너 오면 마시려고 임무 나갈 때마다 한 병씩 모은 게 쌓인 거다."

"많이도 쌓였군."

"그만큼 탕아가 돌아온 것이 오랜만이라는 거겠지."

"그런가."

나도 자소곡차 두 병을 꺼내 들었다. 허공섭물로 뚜껑을 열어 한 병은 도하나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사형!"

"그래. 도하나는 적당히 마시고. 류천우와 곽매는 아무튼 오랜만이다. 반갑군."

"그래."

"흥, 반갑긴."

"반가워요! 언니!"

"……도 사매는 나도 반가워."

쨍─.

우리는 병을 한데 모아 부딪쳤다.

맑은 유리 소리가 화산의 밤에 깔려 사라졌다.

자소곡차는 일전 수련회 때 내가 학생들에게 나눠준 적 있던 영약주였다.

사실 여기 네 사람에게 영약주라는 것이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자소곡차는 너무 많이 마셔서 내성도 생겼을뿐더러, 그게 아니더라도 영약주로 큰 이득을 볼 수준은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소곡차는 그 자체로 향과 맛이 훌륭한 명주였다.

류천우가 술을 몇 모금 마시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이다."

"그래."

"말려 죽이는 쪽이 나았을 거라 하지 않았나."

좀 전에 있었던 삼대일 비무 이야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류천우가 그렇게 말하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다른 둘이 이쪽을 바라봤다.

류천우는 비록 패배했지만 비무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복기논검(復棋論劍)이었다.

나는 류천우의 말을 받았다.

"왜지?"

"일단 우리 셋의 내공이 너보다 앞선다는 자신이 없었다."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맞는 말이다. 허나 셋 다 나를 알기 때문에 근거가 되지 않는다."

"네가 내공을 어느 정도 복구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일리가 있군."

"그런 상황에서 네 내력 재생속도까지 고려한 실질내공(實質內功)을 계산하기가 힘들었다."

"흠, 그래서?"

"그래서 오히려 순간 출력으로 겨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말려 죽이더라도 초장에 내공 소모를 많이 하게 만드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계속."

"그리고 다른 둘의 기화 상태를 확인했는데, 둘 모두의 출력이 내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합공하면 한순간은 잘 짜낸 검강 급의 화력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인정한다."

"네 검강에 물러서지 않고 반격하려 했다. 곽매가 후방에 있었기에 가장 위협적인 중심을 맡을 것으로 생각했고. 도 사매가 위로 뛰는 순간 나는 즉시 하단을 노렸다."

"꽤 괜찮았지."

"내 판단이 틀렸나?"

"그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점에서?"

"셋의 합이 부족했다."

"합이?"

"네 말대로 기화의 순간적인 위력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위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동시에 공격을 한곳으로 쏟아야 한다. 그 경우 나는 복합적인 수법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딱 한 번만 상대하면 되니까. 너희 공격에 합공으로써의 가치가 사라진다는 거다."

"음."

"따라서 필연적으로 너희 공격은 흩어져야 했다. 그건 좋았다. 그러나 그 순간 너희 셋이 가진 위력의 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졌다. 모이면 검강보다 강하지만 흩어지면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군."

"가장 중요한 건 수법의 도달 시간이 동시가 아니었다는 거다. 위력이 밀리는 만큼 적확한 순간 한꺼번에 나를 노렸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내게 대응할 시간이 있었다는 소리다."

"……실제로 그랬지. 너는 도 사매의 공격부터 먼저 쳐냈다. 그걸로 내 궤적을 방해했고. 하지만 난 당시에는 시차가 거의 나지 않는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맞다. 차이는 거의 나지 않았다."

"한데?"

"그건 차이가 있다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

"흠."

류천우는 턱을 잡고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듣고 있던 곽유가 남은 자소곡차를 입에 털어내고 말했다.

"그럼 말려 죽이려 했다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초절정 셋을 한 번 둘러보았다.

"나는 그래도 결과가 바뀌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

"내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냥 강한 것도 아니고, 너희가 나를 아는 만큼 내가 너희를 잘 안다. 그런데 나는 나에 대해서도 잘 안다. 한마디로 너희에게 있어 나는 지피지기의 고수다."

"사백아, 그런 걸 본인 입으로 말하면 좀 오글거리지 않아?"

"……그러나 너희는 스스로에 대해서는 알지언정 다른 둘에 대해서는 본인만큼 모르고 있다. 거기서 합이 갈렸다. 너희가 승부를 조금만 더 길게 봤다면 지금보다는 좋았을 것이다. 설령 나를 말려 죽이지는 못해도 최소한 합은 좀 더 좋아졌겠지."

류천우는 다시 고개를 든 채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보다 합이 좋았고, 공격에 아무런 시간차가 나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이겼을 거다. 하지만 나 역시 손해를 보았겠지. 내공을 억지로 끌어 쓰다가 내상을 입거나, 어디 몸 한군데가 다쳤을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진짜 의문의 화경 고수였다면."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낙안봉과 산과 나무와 달과 돌을 보았다. 모두 화산이었다.

"너희 다음에는 옆에 있던 다른 화산도들이 의문의 화경을 상대했을 것이다. 그때 내 몸 상태가 다음 합공의 결과를 좌지우지할 것이다. 그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너희의 합공에 의미가 생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세 명을 보며 말을 이었다.

"승부를 너무 길게 끌지 않는 것은 좋았다. 너희의 내공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보는 게 맞다."

나는 내용을 정리했다.

"너희 내공이 고갈되기 전이며 동시에 내 실질내공이 한계에 달할 때가 너희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기점이다. 비무만 봐도 그렇고, 그림을 크게 그리면 더더욱 그렇다."

"결국 방금 비무에서 우리가 승부수를 건 시점이 너무 일렀다는 소리군.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느려도 안 되고."

"그래."

"어렵군."

"그럼 하수가 고수 상대하는 게 쉬운 줄 알았나?"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류천우가 도하나와 곽유 쪽을 보며 말했다.

"……나는 이제 졌다. 너희는 할 말이 더 있나?"

그러자 곽유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진작 승복했는데. 류가(刘家) 너만 미련 남아서 구질구질하게 김가(金家) 붙잡고 있던 거 아니었어?"

"……."

류천우는 입을 꾹 닫았다가 도하나를 바라봤다.

"……도 사매도 할 말 없나?"

"네! 다음엔 더 잘할게요!"

"……그래."

류천우는 말없이 자소곡차를 한 병 따고 쭉 들이켰다.

반을 단숨에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랍 에미리트에 간다던데."

"혹시 온 화산 사람들이 다 아는 소식인가?"

"그렇지는 않다. 소문주는 장로회의 결과를 공유받으니 아는 거지."

"그래. 간다."

"정말로? 혼자서 말이냐?"

"정확히 말하면 화산에서만 혼자지. 문외(門外)의 고수를 불러 동행할 생각이다."

"그게 누군데?"

곽유가 끼어들었다.

"있다. 한 번 나를 지켜주기로 백지 계약을 맺은 고수가."

"진짜? 무슨 일을 맡길 줄 알고 백지 계약을 했대? 강호에 정말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있단 말이야?"

"……그 친구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실력은 믿을 만해?"

"그래. 화경이니 제 몫은 하겠지."

"으음, 화경도 그런 멍청한 계약을 하는구나. 역시 무공이 전부는 아니네."

"……."

"그 사람은 자기가 이런 위험한 일에 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 에휴, 불쌍하다 불쌍해."

곽유의 말에 자꾸 내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아니, 나는 어쩔 수 없는 거였는데. 경우가 다른데.

그때 옆에서 구경하던 류천우가 입을 열었다.

"자신은 있나?"

"무슨 자신?"

"무사할 자신."

"없지. 아마 죽어나가는 화경이 적지 않을 거다."

"그런데도 혼자 가는 건가?"

"그래."

"왜?"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못 돌아오면 복수라도 해줄까?"

분명 훌륭한 어른이나 도사였다면 여기서 복수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철이 없었다. 내 눈앞에 있는 셋도 마찬가지였고.

"당연하지. 여기 셋이 아니면 누가 내 복수를 해주겠나."

"하긴."

"우리 말고는 친구도 없고."

"사형……."

"……대신 너희가 화경이 되면 그때 해라."

곽유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복수할 자격 얻기가 그렇게 힘들단 말이야?"

"내가 화경인데 그럼 복수할 상대도 최소 화경일 거 아니냐. 나보다는 세야 복수가 가능하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스승님의 패도 잊지 말고."

"그래야지."

"그때까지 수련이나 열심히 하고 있어라."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사백이면 다야?"

"꼬우면 지금 한판 뜨던가."

"……예, 사백. 밤낮없이 정진하겠습니다."

"오냐."

"화경 되면 봅시다, 진짜."

"그래."

"……꼭 살아와."

"노력은 해보마."

"멋대로 죽으면 죽인다, 진짜."

"또 삐질 거냐?"

"어, 존나 삐질 거야."

"그럼 살아와야지."

나는 남은 술을 들이켰다. 고수 넷이 남은 자소곡차를 처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그날 밤 불쌍하고 멍청한 화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이."

─뭐야, 너 누구야?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감히 대낮부터 날 깨워? 별일 아니라면 혼날 각오하라고.

"나 김산이다."

─누구?

"김산. 검룡."

─……와우, 오랜만이군, 버디. 갑자기 무슨 일이야? 요새 꽤 잘 나가던데? 잡지에도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리고 말이야. 다시 스타가 된 것 축하해.

"축하는 고맙군. 그건 그렇고 예전에 이어받기로 약속했던 일월교주 호위 임무 기억나나?"

─아, 기억나지. 버디, 드디어 내가 필요한 때가 온 건가? 언제? 무슨 일인데?

"올겨울."

─아하. 이번 타임지 연말 파티라도 참석하는 거야? 드래곤즈 앤 피닉시스 대표로? 웬일이야. 파티는 별로 안 좋아했잖아. 그런 거라면 내가 또 빠질 수 없지. 아주 제대로 모셔줄게. 내 밴드도 불러서…….

"아랍 에미리트로 간다."

─아랍…… 뭐?

"UAE."

─……혹시 두바이에서 파티라도 하는 건가? 버디가 못 들었나 본데 이번 겨울 UAE에서 열리는 파티는 아주 재미없을 거라는 소문이 자자해.

"정확히 그 재미없는 파티에 낄 예정이다."

─시발(Goddamn)……. 제발 농담이라고 해줘.

"그래도 화경 하나보단 둘이 낫잖아. 조만간 합류하지. 내가 그쪽으로 갈까, 네가 이쪽으로 올래?"

─왜, 내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설마. 릴 드레이크가 자기 밴드 버리고 도망이라고 치겠어?"

─……퍼킹 코리아. 애초에 돈 좀 준다고 거기 가는 게 아니었는데. 미친 사이비 교주가 본인이 천마라고 자칭할 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새 천마가 가라사대, 모든 것이 네 업보이니라."

─……조만간 한국으로 찾아가지. 유서 다 쓰고 말이야.

"오래 걸리나?"

─그럴 리가. 열여섯 마디면 충분할 텐데.

"기다리지."

─퍼킹 에이맨(Fucking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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