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113화 (113/120)

< 113 : 112. 화산귀환(Homecoming)(4) >

내 쪽에서 류천우와 곽유를 찾으러 갈 필요는 없었다.

"음? 저거 류 소문주 아닌가? 옆에도 곽 소문주 같고."

"맞네요."

봉우리 아래 멀리서 류천우와 곽유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둘만 있는 게 아니고 뒤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낙안봉에서 도 사형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들이 나를 찾은 모양이었다.

하긴 소란을 꽤 크게 피웠다. 초절정쯤 되는 고수가 못 들을 리는 없었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문도들의 기합(氣合) 정도는 화산에서 늘 들리는 것이었지만, 고주파로 퍼져 나간 매영대의 비상 소집령은 그렇지 않았다.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잠깐 고민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곧장 '그냥 또 무무문 훈련'인 것을 알아차렸겠지만.

다른 화산의 문도들을 배제하고 매영대만을 소집했기 때문에 그렇다.

진짜 비상사태였다면 결코 그들만 부르지는 않았을 테니.

일급 무장 태세를 갖추고 신이 나서 어딘가로 뛰어가는 매영대원을 본 사람은, 곧 그 길 끝에 내가 있으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는 무리를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류천우와 곽유를 필두로 젊은 고수들이 잔뜩 뒤따르고 있었다.

나이는 대부분 30대 근처로 보였다. 연화문과 홍설문의 이대제자들인 것 같았다.

류천우와 곽유는 각 문파의 소문주였다.

본산에 있을 때면 같은 항렬의 단체 훈련을 주도하는 위치라는 뜻이다.

연화문과 홍설문 역시 오후 시간 내내 모여 수련을 함께했을 것이다.

내가 낙안봉에서 무무문도들과 한바탕 난리를 친 것처럼 말이다.

방식은 다르겠지만 큰 맥락에서 보면 결은 같았다.

강호를 독보하는 개인이 아니라 화산의 일원으로서 함께 걷는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들은 곧 연화봉 정상에 닿았다.

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이 좁은 곳까지 뭐 하러 올라왔냐. 밑에서 기다리지."

나는 주위를 좀 둘러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휘저었다.

아직도 바닥에 쓰러져 골골거리는 무무문도가 한 무더기였다. 덕분에 발 디딜 장소도 많지 않았다.

사실 낙안봉은 몇 명이 수련하기에나 적당한 곳이었다.

수십 명이 모여서 무공을 펼치기엔 몹시 좁았다.

나와 문도들 간의 격차가 많이 났고 내공을 쓰지 않고 겨뤘기에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류천우나 곽유와의 '한 판'은 아마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말이다.

내공을 다뤄서 겨루기에 낙안봉은 적절하지 않았다.

류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낙안봉이 좁긴 하지. 그러게 왜 여기서 쌈박질을 한 거냐."

"내가 시작한 게 아니다. 제자들이 청한 거지."

"생각보다 환자가 더 많군. 살살 좀 하지 그랬나."

"살살한 게 이거다."

"밑에서 듣기에는 아니었다. 소란을 그렇게 멀리서 듣고만 있자니 참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누가?"

"누구겠나. 곽가(郭家)지."

류천우가 보라는 듯 곽유 쪽으로 작게 턱짓했다.

그러자 곽유가 고개를 팍 돌리곤 사나운 눈빛으로 류천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류천우는 목을 뻣뻣하게 고정하고 나만 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곽유가 사나운 시선을 그대로 내게 돌렸다.

나는 곽유의 눈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다. 궈 매."

"……연화문의 궈위, 검룡 사조를 뵙습니다. 강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궈위, 우리말로 곽유(郭瑜)는 나를 노려보다가 괜히 고개까지 숙이며 손을 모아 인사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직도 삐져있나?"

"……삐지다니요. 무슨. 하, 참. 허, 어찌."

곽유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본 제자가 속세의 나이와 사소한 친분을 떠나 사조께 존대하는 것은 문파의 질서를 생각해서 취한 행동입니다. 전통과 배분을 중히 여기는 것이 어찌 제가 삐졌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입니까. 옳지 않습니다."

곽유의 말이 아주 빨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그러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안 삐졌네."

"……."

불끈.

공감을 해줬는데도 어째 곽유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이게 아니었나보다. 나는 말을 돌렸다.

"그렇게 존중하는 사문의 존장을 한 번 패보겠다고 이를 갈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어찌 된 일일까."

"……누가 그런 소문을?"

나는 시선을 살짝 틀었다. 곽유의 눈동자가 나를 따라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류천우는 당당하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마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곽유는 시선을 다시 내게 돌렸다.

"……소녀가 지난날 수련하다 미약하게나마 결실을 이루었는데, 그것을 사조께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중간에 와전이 되었나 봅니다. 사조께서는 협잡꾼의 가벼운 말에 흔들리지 마시길."

"그래, 어차피 다들 말로 넘어갈 성정은 아니었으니. 어디 얼마나 큰 성취인지나 구경해보자."

나는 진 사질을 보며 말했다.

"매영대 부대주, 자리를 좀 만들어 주시오."

"예, 문주님."

진 사질이 휘하 매영대원들에게 지시하여 아직 누워있는 무무문도들을 구석으로 치웠다.

류천우와 곽유가 끌고 온 이대제자들이 매영대를 도왔다.

무무문도들은 아픈 몸 한구석을 부여잡으면서도 우리를 보면서 낄낄거렸다. 다들 싸움 구경할 생각에 눈동자를 빛나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류천우가 물었다.

"규칙은?"

"늘 하던 대로. 내공 제한 없이. 진검으로. 협잡꾼과 전혀 안 삐진 사손, 도하나까지 한꺼번에 덤벼라."

"도 사매까지?"

"그래. 합격을 많이 맞추지 않아 오히려 불편하겠나?"

"그렇지는 않지. 초면도 아니고."

"그럼 그렇게 해라."

"……쉽지 않을 텐데. 방심하는 것 아닌가?"

"내 의견은 다른데."

류천우는 고개를 돌려 무무문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맞고 나서 수련 핑계를 대지는 않겠지?"

"그건 피차 마찬가지지. 혹시 오후에 힘을 너무 많이 썼나? 그러면 지금 말해라. 감안해주마."

"……알겠다. 네 말대로 하자. 반쪽짜리 화경. 각오해라. 쓴맛을 보여주마."

"그래, 물오른 제철 초절정. 한 번 팔딱거려봐라."

"……."

낙안봉의 좁은 평지.

가장 중앙에 나를 두고 세 명의 초절정이 둘러쌌다.

곽유와 도하나가 서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도 사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안녕하세요! 유 언니(姐姐), 오랜만이에요."

"언니 말고 사저(師姐)라고 하라니까……."

"알겠어요, 언니!"

"에휴. 옥녀공은 잘 익히고 있고?"

"네! 물론이죠. 얼마 전에 6성이 되었어요!"

"벌써? 엄청 빠르네."

"히히. 잘한 거죠?"

"응. 자세한 건 합 맞추면서 볼까?"

"네, 언니!"

"그래,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네."

"저도 그래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있는 류천우에게 물었다.

"얘기 다 한 건가?"

"아직인 거 같은데. 다 네가 화산에 뜸한 탓이지. 풀 회포가 얼마나 많겠나."

"근데 화경이 그런 걸 기다려줄까?"

"당연히 실전에선 아니겠……, 피해라!"

나는 그대로 팔짱을 풀고 발검하며 횡으로 넓게 그었다.

검이 그리는 궤적이 내 등 뒤를 제외한 원에 가까웠다.

자하신검 레플리카에서 뻗어 나온 연보랏빛 강기가 한순간 낙안봉의 밤을 밝게 물들였다.

내공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강기는 곧바로 꺼트렸다.

낙안봉은 다시 어두워졌다.

밝기 차이에 순간적으로나마 초절정들의 시야가 어두워졌을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작."

"이런 졸렬한……."

원래 싸움의 시작은 급작스러운 법이다.

그리고 고수라고 해서 늘 하수를 기다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소 기습적인 발검에도 성공적으로 물러난 세 명의 초절정을 살피며 미소 지었다.

초절정 수준에 맞춰 검격의 속도를 조금 늦추긴 했지만 이 정도 대응이면 만족스러웠다.

이미 류천우는 검을, 도하나는 도를 뽑아든 상태였다.

곽유는 손바닥을 편안하게 펴고 몸 앞에 세웠다.

셋 모두 기화(氣火)를 상당 시간 유지할 수 있는 초절정의 끝자락이었다.

초절정이 화경을 상대로 시간이라도 끌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 구성이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곽유였다.

나는 아직 암적응(暗適應)을 마치지 못한 듯한 곽유에게 달려들었다. 반응이 살짝 늦었다.

검은 처음에 휘두른 이후 곧바로 납검한 상태였다.

맨주먹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옥색으로 밝게 빛나는 검기(劍氣)를 두 손에 두르고 쏟아내며 견제했다.

도하나도 익힌 화산파 홍설문 비전 옥녀신공 본래의 용법이었다.

옥녀검결(玉女劍訣, Jade blade).

오래전 홍설문의 여고수가 만든 공수검법(空手劍法), 즉 맨손으로 펼치는 검법이었다.

맨손으로 펼침에도 손끝 찌르기와 손날 베기에 극한까지 치중한 검공이었다.

익히기 위해서는 병장기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막대한 내기와 단단한 육신이 바탕이 되어야 했다. 정교한 손 기술을 말할 것도 없었다.

남자로 태어난지라 심법으로서의 옥녀신공은 익힐 수 없었으나, 옥녀검결은 나도 대성에 가깝게 익혔다.

내가 익힌 것 중에서 초식이 가장 실전적이고 살벌한 수공이었기 때문이다.

늘 병장기를 들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쓸데가 많았다. 일월마군이나 천마신교의 삼화경을 상대할 때도 써먹었다.

나는 곽유의 공격을 같은 궤적으로 응수했다.

순식간에 여러 합을 교환했다.

타격 순간에는 손에 아주 짧게 뇌강을 담았다.

"……파천!"

파천신공과 옥녀검결의 조합.

내가 맨손으로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공이었다.

"……신성한 화산에서 마교의 삿된 무공을 사용하다니!"

"파천공은 삿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정종 무공에 가깝지."

"아무튼! 마교의 무공이잖아!"

나는 사조에 대한 존대는 어디 갔는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곽유를 거대한 뇌강으로 후렸다.

"너도 기대했잖아."

"기대는, 무슨!"

"아님 말고. 무무문도들은 다들 좋아하던데."

"큭!"

곽유가 이를 악물고 손에 옥빛 검화를 둘러 뇌강을 쳐냈다.

나는 튕겨 나온 뇌강을 붙잡아 그대로 뒤쪽으로 몸을 돌리며 창처럼 던졌다.

그 방향에는 기로 된 매화의 꽃송이를 잔뜩 흩날리는 검객이 있었다.

만매난검이라는 별호에서 드러나듯이 류천우는 환검, 쾌검의 달인이었다.

뭐 실제로 피워낸 매화가 만 송이는 아니겠지만.

그만큼 많고 화려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매화는 한줄기 뇌강에 꿰뚫려 찢어졌다.

그리고도 류천우에게 닿았다.

류천우는 뇌강이 막기 위해 그 자리에 잠시 멈췄다.

내가 공격할 틈은 없었다.

나는 자하신검을 검집째로 들어 왼쪽으로 뻗었다.

도화를 묵직하게 두른 도하나의 내려치기를 그대로 밀어 막았다.

쿵.

그대로 잠깐의 공백이 있었다.

나는 그 상태에서 발검했다. 자하강기를 두른 자하신검 레플리카로 크게 팔자를 그렸다.

검강이 복잡한 형태로 공기를 찢으며 뻗어 나갔다.

콰콰쾅!

세 명 모두 물러나지 않고 이번에는 공격권 안에서 대응했다. 각자가 손, 검, 주먹에 기화를 두껍게 두르고 자하강기에 맞섰다.

"허."

반격할 틈을 잡기 위해서 무리하는 모양새였다.

내가 파악하기에는 서로 전음도 나누지 않았는데, 어째 의견이 딱 맞아떨어졌다.

일리는 있었다.

초절정이 화경을 사냥하려면 아직 기화를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극초반에 승부를 봐야 하니까.

제대로 된 검기성강과 억지로 피워낸 기화의 효율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야압!"

"죽어!"

"곽가야. 그래도 명색이 사조인데 죽으라는 건 아니지."

다음 순간 강기에 가깝게 응축된 기화가 세 방향에서 동시에 다가왔다.

어떤 계기만 있으면 당장 검기성강을 이룬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완성도였다.

검화와 도화가 내 머리, 허리, 허벅지를 거의 동시에 노렸다. 피할 틈이 극히 작았다. 낙안봉이 비좁아서 더욱 그랬다.

그들의 합공에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애초부터 초절정들에게 사냥당할 생각이 없었다.

"이기려면 차라리 나를 말려 죽이지 그랬나."

물론 내 운기법은 극단적으로 동공에 치중된 만큼, 초절정 셋이 합공한다고 내 내공을 마르게 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쪽이 차라리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나는 짧게 한 번 진각을 밟고 공격에 대응했다.

초절정이 '거의 동시'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은.

내게는 동시가 아니었다.

내게 세 명의 합공은 일련의 공격으로 보였다.

게다가 좁은 공간에서 펼치는 초근접거리에서의 합공은 서로 간섭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는 머리를 내려치는 도하나의 커다란 도를 오히려 아래로 찍어 류천우의 공격 궤적을 막아냈다.

허벅지를 노리던 류천우가 실시간으로 검을 비틀었으나 그곳에도 이미 곽유가 있었다.

곽유와 류천우의 공격은 어쩔 수 없이 같은 지점을 노렸다. 서로 위력을 상쇄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목표는 내 오른쪽 허리였다.

위력은 강할지 모르겠으나 수법적 측면에서는 한 명의 공격과 다를 게 없었다.

합공으로써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나는 한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그 검과 공수검의 찌르기를 피해냈다.

그리고 양손을 펼치고 류천우와 곽유의 명치를 동시에 후려쳤다. 손에는 찌릿한 뇌기를 가득 담았다.

"읏!"

"악!"

두 사람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두어 걸음 물러나다가 힘이 빠진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를 애꿎은 땅에 처박고 있던 도하나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더니 말했다.

"……항복?"

파직.

나는 뇌기를 쏘아 도하나의 기권 선언에 화답했다.

초절정 셋이 낙안봉 바닥에 누워 팔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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