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 111. 화산귀환(Homecoming)(3) >
장문인과 장로들에게 인사를 하고 천매전을 빠져나왔다.
화산파 장로 회의는 내가 나가고도 계속될 예정이었다.
공청유전 외에도 강호에는 사건 사고가 잦았기 때문이다.
본래는 내가 장로 회의에 참석해야 했으나, 나는 당분간 계속 바깥을 떠돌 계획이었으므로 업무 편의상 하던 대로 문주 대리에게 맡겼다.
팔자에도 없는 문주 대리 역할을 연장하게 된 검광자 장로가 내게 눈을 부라렸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고생들 하십시오, 문주님들, 장로님들."
"그래. 자주 찾아오거라."
"봄에도 제가 살아있다면 그러겠습니다."
"거 쓸데없는 말을."
천매전을 나와 저녁이 될 때까지 화산 여기저기를 가볍게 거닐었다.
가을 단풍이 예쁘게 피어 보기 좋았다.
봉우리 곳곳에 조금이라도 넓은 평지가 있으면 반드시 수련하는 문도가 있었다.
그런 광경이 있으면 서서 수련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수련하는 사람이 1대 제자일 땐 그냥 조용히 지나쳤다.
내 배분이 높다고 함부로 조언할 수 없었다.
현재 화산의 1대 제자는 나이대가 대략 지천명(知天命, Age of fifty)에서 위아래로 10살쯤 되었다.
대개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은 데다가, 나름대로 자기만의 무학 세계를 정립한 사람들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돕다가 괜히 마음만 상할 수도 있었다.
직접적으로 부탁할 때만 한두 마디 도와주는 것이 옳았다.
다만 이미 안면이 있는 경우에는 1대 제자가 아니라 그 위의 장로급이라고 해도 먼저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은 내가 암매화일 때 같이 임무를 수행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과는 단시간에 쌓아 올린 전우애가 있었다.
화산코리아 문주 백무강도 그렇게 친해진 경우였다.
장로들의 연령대는 대개 고희(古稀, Age of seventy)에 가까웠다.
범인이라면 몸이 약해질 나이였으나, 내공을 꾸준히 쌓은 무인이라면 오히려 젊을 때보다 건강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웃통을 벗고 강철 같은 근육을 꿈틀거리면서 느릿하게 목검을 휘두르는 저 노인도 그랬다.
그는 장로 중에서도 나와 특히 친한 편이었다.
무무문 출신이었기에 임무를 같이 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다.
"도 사형. 오랜만입니다."
"누구, 막내 사제? 어인 일이냐. 본산에서 보는 것은 거의 천 년만이구나."
"과장하는 건 여전하시군요."
"그만큼 막내 사제가 본산의 가르침을 멀리하고 바깥에만 싸돌아다녔다는 거 아니겠나. 안 되겠다, 이놈. 덤벼라. 내 오늘 사형으로서 매를 들어야겠다."
"……매요? 전 오늘 류천우와 곽유를 봐주기로 했습니다만……."
"히야압!"
도 사형은 손에 있던 목검을 휘두르며 그대로 돌진해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몇 수 맞춰주었다.
사형들 대부분이 그렇듯 도 사형 역시 초절정의 극한이었다. 상대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내공은 다루지는 않았다. 검술만을 겨루었다.
서로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검술로 서로 속이고 파헤치고 부딪쳤다.
누가 더 완성된 무인인지를 겨루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더 화산의 무공을 대성했는지에 대한 겨룸이었다.
물론 화산지검(華山之劍)의 완성도 역시 내가 좀 더 나았다.
사실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은 기공이 아니라 검술이었다.
나는 내 몸에 맞춰 깎아낸 화산의 검으로 틈을 찌르고 정석을 빗겨내고 기본으로 받아쳤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온전히 수법을 펼치고 파훼하는 데에만 힘을 들였다.
짧았지만 적지 않은 심력을 쏟아내는 비무였다. 서로 아는 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랬다.
순식간에 십수 합을 겨룬 도 사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까만 근육에 땀이 번들거렸다.
"오랜만에 땀을 제대로 흘리니 좋구나. 역시 이 맛이야."
"……이제 좀 만족하셨습니까?"
"만족은 무슨 만족이냐. 본산에 자주 오지도 않는 문주 놈. 오랜만에 봤을 때 본전을 뽑아야겠다."
"예?"
"진아."
"예, 스승님."
도 사형이 부르자 곁에서 비무를 구경하던 일대 제자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도 사형의 수제자인 여도사였다. 나이는 40대 초반쯤.
도 사형이 수제자를 향해 말했다.
"현재 본산에 있는 매영대(梅影隊, Shadow order of huashan) 전원을 당장 소집하거라. 오늘 제대로 특훈이다."
"……저기, 도 사형? 아니, 도 장로? 진 사질?"
"스승님, 대원들을 다 부르면 저는 특훈 언제 합니까?"
"너는 소집령 내리고 다른 애들 오기 전에 붙어라."
"예. 알겠습니다."
"두 사람?"
두 사제는 내 말이 전혀 안 들리는 듯 자기네들끼리 쿵짝을 맞추며 대화했다.
진은 망설임 없이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이것저것 빠르게 누르더니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비상. 매영대 전원에게 긴급 전파. 일각 안으로 일급 무장 태세를 갖춘 채 낙안봉으로 집결할 것."
"일급 무장 태세? 어디 전쟁 나가나?"
진은 나를 힐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상대는 의문의 화경 고수. 검을 다루는 것으로 추정."
"……의문의?"
삐이이이──.
그와 동시에 높은 주파수의 경고음이 화산 이곳저곳에서 퍼졌다.
화산파 무무문 장로이자 매영대주(梅影隊主)인 도미니크 밀러가 휘하의 모든 제자를 소집했다.
주어진 임무를 마친 무무문 일대제자 버지니아 벨이 자신의 스승처럼 목검을 들고 내게 검례를 취했다.
"한 수 가르침을 부탁합니다, 문주님."
"……아까는 의문의 고수라고 하지 않았나?"
"사실 존안을 너무 간만에 뵈어서 정말 우리 문주님이 맞는지 헷갈립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알아보자. 좀 맞다 보면 맞는지 아닌지 알겠지."
나도 자하신검 레플리카를 검집째 들고 진을 상대했다.
하긴 무무문은 이래야 정상이었다.
범상하게 비정상적인 무공광들이 모인 곳이었다.
매영대는 대원 대부분이 무무문 출신인 특임대였다.
대원 선정에 있어 출신, 성별, 국적, 인종을 가리지 않고 칼솜씨만 보는 화산의 최상급 무력대.
한 마디로 지금 나랑 붙어보겠다고 달려오고 있는 작자들 대다수가 무무문도였다는 뜻이다.
소집령을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낙안봉으로 경공을 밟아오는 고수들이 보였다.
개중에는 나이 지긋하게 먹은 양반들도 있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잔도와 절벽을 타고 오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화산에 들린 문주의 얼굴을 보겠다고 제자, 장로 할 것 없이 칼 들고 뛰어오는 중인 것이다.
그럼 나도 문주로서 마땅히 그들에게 화답할 의무가 있었다.
주먹과 검집으로.
사실 그 역할을 하려고 내가 무무문주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무문도들은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두드려줘야 말을 듣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보다 몸으로 배우는 유형이랄까.
그리고 그게 내가 성격이 더럽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이유였다.
날 패줄 사람이 이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해가 떨어질 때까지 문도들을 내리 상대했다.
***
"……문주님."
"왜."
"이제 안 헷갈립니다. 우리 문주님 맞네요."
"진작 그랬어야지."
"그러게요."
진은 기가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양팔에 기절한 제자 둘을 하나씩 잡고 끌면서 사라졌다.
낙안봉 험한 봉우리에는 문도 수십이 널브러져 있었다. 치울 만큼 치웠는데도 그 정도였다.
어디서 소식이 알려졌는지 중간부터는 무무문도 매영대도 아닌 인간들까지 합류해서 검집째 들고 달려들었다.
사실 원래부터 산책하는 목적이 온 김에 이대제자와 삼대제자의 수련을 봐주는 것이었기에 기껍게 받아들였다.
나는 잘한 것은 칭찬하면서도 아쉬운 점들은 지적했다. 핵심 위주였다.
"발놀림은 좋으나 과하게 가볍다. 몸이 뜨지 않게 무게 중심을 더 낮춰라."
붕.
삼대제자가 날아가고.
"검 끝이 흔들린다. 아직 매화검을 수련할 때가 아니다. 외공에 시간을 좀 더 쏟도록. 그래도 초식에 대한 이해는 훌륭하다."
퍽.
이대제자가 쓰러졌다.
"초식은 경지에 올랐으나 형이 너무 뻔하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네 것으로 삼아라. 그리고 경지에 비해 내력이 얕다. 심법에 공을 더 들여라. 포기하지 않으면 이십사수도 노릴 만하다."
쾅!
일대제자는 땅에 박혔다.
"……도 장로는 제일 처음에 이미 했잖습니까."
"문주! 나는 왜 훈수를 안 해주시오!"
"……외공의 완성도는 이미 충분하니 마음에 집중하십시오. 육신이 격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공과 심공이 뒤받쳐줘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으시겠으나."
"그래도 고맙소."
팡!
장로는 튕겨냈다.
어쩌다 보니 장로 제자 가리지 않고 다 패버렸다.
나는 곁에서 쓰러진 제자들을 보며 뭔가 가늠하고 있는 듯한 도 사형을 보았다.
"소집 속도는 이 정도면 훌륭합니다. 진짜 의문의 화경이 화산을 침입했어도 포위에 성공했겠군요."
"……알고 있었느냐?"
"뭘 말입니까? 도 사형이 매영대에 늘 열심인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만."
"열심이긴. 얼른 은퇴하려고 공들이는 거다. 수련할 시간도 부족한데 언제까지 대주 노릇을 해야 하는지. 오늘 소집 훈련도 겸사겸사 한 거다. 평소에는 안 한다."
"진 사질이 매영대주가 되려면 10년은 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들이박을 때 들이박더라도 요령이 있어야지요. 지금은 너무 무식하게 박습니다.""저 정도도 무무문에서는 득도한 수준이다."
"……그건 그렇지요."
"다 애들이 강자와의 싸움이 고파서 눈이 돌아간 것 때문 아닌가. 화경인 막내 사제가 주기적으로 가르쳐줘야 애들이 좀 얌전해지지."
"무무문에 화경이 저밖에 없습니까? 저기 검광자 사형도 있지 않습니까?"
"흥. 그 양반은 요즘 문주 대리 일에 치여 시간을 쉽게 못 낸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저것도 죄다 문주 탓이었구먼."
높은 산에서는 해가 일찍 졌다. 본격적인 가을이 되어서 더 그랬다.
어느새 화산의 하늘에는 샛노란 달이 떠 있었다.
도 사형은 초승달을 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니 막내 사제, 화산에 자주 좀 왔으면 좋겠다."
"예, 사형."
"이제 천우랑 유를 보러 가느냐."
"예. 약속했으니까요."
"우리가 힘을 좀 효과적으로 뺐나? 천우랑 유에게 가망이 생겼을까?"
"그 둘 중 하나가 최근에 화경이 되기라도 했습니까?"
"아니. 하지만 둘 다 몇 개의 벽은 넘었다고 들었다."
"그럼 저한테 안 됩니다. 사실 둘 다 화경이 되어도 안 되겠지요."
"왜?"
"풋내기 화경이랑 완숙한 화경이 다르기 때문이고, 그게 아니라도 아무튼 무무문이 최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문주들에게는 비밀입니다만."
"듣고 보니 아주 타당한 말이군. 논리에 빈틈이 없어."
나는 도 사형과 실없는 소리를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일어섰다.
"그럼 전 슬슬 가보겠습니다. 화산을 떠나기 전에 시간 되는 문도들이랑 밥이라도 한 끼 하겠습니다. 연락드릴 테니 그때 볼 수 있으면 보지요."
낙안봉을 떠나려는 그때 도 사형이 나를 불러세웠다.
"이보, 문주."
"……예, 도 장로."
그가 나에게 문주로 칭했기에 나도 그를 장로로 대했다.
"우리 오늘 어땠나."
"무슨 의미이신지."
"정녕 우리를 데려가지 않을 건가? 우리가 그리 모자란가?"
"……알고 계셨습니까?"
도미니크 밀러가 무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아랍 쪽에 파견 가기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던 게 우리와 이십사수 쪽이었네. 오늘 낮에 접근금지령을 들었지. 그런데 오늘 발생한 사건이라곤 문주의 방문뿐이군."
나는 그 말에 매영대를 둘러보았다.
지쳐 쓰러지고 널브러져 있었으나 그들은 한껏 빛나고 있었다. 성장 중이었기 때문이다.
"매영대가 모자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대세를 뒤집을 능력은 없습니다. 게다가 아주 위험하겠지요."
"위험은 무인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것이네."
"저들은 화산의 미래입니다. 아직 피기도 전에 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문주 역시 화산의 미래네. 그것도 화산에서 가장 빛나는 미래지. 동시에 화산의 현재이기도 하네. 부디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지 말게."
"……이 일은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또 화산의 미래를 위한다는 핑계로 문주 혹시 감당할 셈인가."
나는 도 장로를 노려봤다.
"……그만 하시지요. 이미 삼대문주가 모두 동의하고 결론을 낸 문제입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무공밖에 모르는 일개 초절정 대주에 불과하니."
그러면서도 도 사형은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문주와 마찬가지로 무무문의 제자라는 것을 기억하게. 전대 무무문주님의 유지를 이을 책임이 문주 혼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저도 장문인에게 그 말을 남기고 왔습니다. 제가 돌아오지 못하면 화산이 대신 이어달라고 말입니다."
"문주……."
"화산에서 누가 나선다면 마땅히 무무문에서 이어야 할 일일 것입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화경의 몸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을 아직 덜 핀 문도들에게 어찌 맡기겠습니까. 검선패의 회수 임무를 수행하는 자는 반드시 화경에는 올라야 할 것입니다."
"노력해야겠군."
"예, 얼른 화경이 되어서 이 막내 사제 좀 도와주십시오, 사형."
"조금만 기다리게. 이번 겨울까지는 무리겠지만."
"그럼 저도 이번 겨울까지만 무리하겠습니다."
말하면서 주변의 쓰러진 자들을 둘러보았다. 또 여기 없는 화산의 인재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화산의 미래였다.
반쪽짜리 화경과는 다른 무궁한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화산파는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와 같았다.
암매화칠수와 도하나, 초절정 끝자락에 있는 여러 명의 장로들과 제자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눈앞에 있는 벽을 부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내 백지 계약 따위에 엮여 의미도 없이 스러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나 홀로 감당해야 했다. 적어도 화산에서는 말이다.
암매화도, 장로회도, 무무문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도하나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화산에서 아랍 에미리트로 가는 문도는 오직 화산검룡 한 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