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 108. 계약갱신(Contract renewal) >
오랜만에 연구실에 요구르트 아가씨가 찾아왔다.
손에는 요구르트가 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있었다.
"……요즘 바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도 그러고 다니십니까?"
"이왕 이런 모습이 알려진 거 아예 이쪽으로 이미지를 각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사천공대의 이사장, 사천당가의 직계, 당문제철의 부사장, 당가그룹의 후계 경쟁자, 서민계급 지원기구(H.A.O)의 사천지부장 목화, 건물에 뻔뻔하게 독접관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자율무공학부 창설자, 그리고 취미로 요구르트를 파는 아가씨.
독접 당초아였다.
독괴의 난 이후 당문제철을 받으면서, 요즘은 뉴스에도 가끔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덕분에 보통이라면 이사장 얼굴 따위는 몰라도 될 학생들마저 당초아를 꽤 알아볼 정도.
그러다가 우연히 교문 앞에서 요구르트 카트를 끌고 장사하던 게 찍혀 이슈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 이후엔 아예 요구르트 아가씨 이미지로 밀고 가는 모양이다.
"그게 도움이 됩니까?"
"그럼요. 서민적이고 친근한 무가 재벌이 얼마나 귀한데요. 저번엔 학생 하나가 요구르트 사러 와서 '이사장님 서비스 좀 주세요' 이러는 학생도 있었다니까요."
"참. 간도 크군요."
"왜요? 등록금 내고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이사장한테 좀 까불 수도 있지."
"그게 아니고 당문 사람한테 음식을 사 먹는 깡을 칭찬한 겁니다."
"……에이.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걱정을 해요. 교수님 어디서 당가인에게 데인 적 있어요?"
"저야 뭐, 많죠."
"에……, 그렇군요……."
당장 당가의 가주와 차 한잔하다가 무형지독을 강제 시음당한 것이 올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그 외에도 외국에서 활동할 때 당가놈들의 악질적인 수법에 당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일일이 세기가 힘들 정도. 최소한 손발로는 못 세는 것이 확실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당초아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한국에서는 그런 일 없어요! 여긴 우리 지지 기반인데 그런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되죠. 안심하고 드셔도 돼요!"
"그렇군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당초아에게 요구르트를 받아 가만히 탁자에 내려놓았다.
"……바로 안 드세요?"
"속이 좋지 않아……."
"……그거 속에 좋은 건데요."
"제가 유당불내증이 있어……."
"……요구르트는 괜찮지 않아요? 그리고 환골탈태를 거친 화경 고수가요?"
"……학생들 나눠줘야겠군요. 이 많은 걸 저 혼자 다 먹을 수는 없지요. 이사장님께서 주신 귀한 물건인데."
나는 허공섭물로 등 뒤에 있는 냉장고를 열고 요구르트 봉투를 대충 던져넣었다.
당초아는 입을 헤 벌리고 날아가는 요구르트를 멍하니 보았다.
"……한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아!"
당초아가 내 말에 놀라 움찔했다.
"일단 이건 저번 주에 말했던 물건이에요."
그러면서 품에서 조심스럽게 초콜릿 상자를 꺼내 탁자에 내려두었다. 고급 초콜릿 15구짜리였다. 뜬금없었다.
"저번 주에요? 무슨 이야기를 했었죠?"
"학생들한테 영약을 지급하기로 했잖아요."
"……그럼 이게?"
"네."
나는 초콜릿 상자의 포장지를 뜯었다.
각각의 칸에 진공 포장된 영약들이 보였다.
"……이걸 왜 초콜릿 상자에?"
"그래야 위화감이 없잖아요. 다른 과 학생들이 알면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고요."
아무래도 자율무공학부에 영약을 지급하는 것이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내공을 증진시켜줄 '초콜릿'을 제공하기로 하셨군요."
"그렇죠. 잘 이해하셨네요."
나는 내용물을 살폈다.
"생각보다 물건이 괜찮군요."
"그쵸. 그것 때문에 힘 좀 썼어요. 투자할 때는 확실하게 해야죠. 먹고 튀기가 부담스러울 만큼."
당초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럴 만했다.
먼저 15개 중에서 독보적인 기운을 가지고 있는 무당의 소청단(小淸丹, Azure pill)이 중앙에 하나 있었다.
복용 즉시 최대 5년가량의 내공을 증진할 수 있는 최고급 영단이었다.
시중에서 살 수 있는 정종 영약 중에서 최상품이라고 해도 좋은 물건이었다.
그 외에 6개월에 걸쳐 최대 3년의 내공을 추가로 얻을 수 있는 화산의 매화단(梅花丹)이 3개.
12개월에 걸쳐 1년의 내공을 늘리게 돕는 당가의 철심단(鐵心丹)이 9개 있었다.
전부 부작용이 전혀 없고 체질과 무공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영약들이었다.
내공 1년짜리 영약이라고 해서 우습게 볼 것은 아니었다.
단순 산술적으로 시간을 두 배로 살게 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이론상 철심단만 지속해서 복용해도 수련 30년 차에 한 갑자 내공을 완성할 수 있다. 실제로는 내성이 생겨서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철심단만 해도 값이 좀 나가는 수준이었고 매화단과 소청단은 그 이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약들이 파천혼원단이나 공청석유와도 비할 만한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하지만 그 쯤되는 영약은 사실 돈만 있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당장 올겨울에도 공청석유를 두고 피바람이 불 예정이었다. 나도 거기 가서 한 발 걸쳐야 했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얻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아무튼 당초아가 지급한 영약의 품질이 내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나는 기껏해야 철심단 정도가 이신에게 돌아갈 줄 알았다.
가문의 수하에게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지급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결국은 남이니까.
하지만 당초아는 자율무공학부에 제대로 투자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나는 영약에 분배에 대해 생각했다.
비무대회 순위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고 얘기했었다.
그렇다면 아마 소청단은 이신을 위해서 준비되었을 것이다.
매화단은 절정 삼인방에게, 철혈단은 나머지 학생들에게 돌아갈 물건이겠지.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나조차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영약이 두 개 더 있었다.
포장 너머로 느껴지는 기의 성질이 정종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영약은 겉만 봐서는 알기 어려운 법이다.
"이 두 개는 무엇인지?"
"아하. 보셨군요. 그 두 개는 교수님과 도 조교님을 위해 제가 아주 특별히! 준비한 영약입니다."
"저도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만……."
"이번에 하오문과 당문제철이 합작해서 새로 만든 영약이에요."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당문제약이 아니고 제철이요? 영약을요?"
"당문제약은 제 소관이 아니니까요."
"이사장님이 주도하셨다는 이야기군요. 제약 쪽에서는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은데요. 가뜩이나 제철이 잘 나가는데 연단술에까지 손을 뻗치다니."
"괜찮아요. 일단은 하오문의 연구를 당문제철이 돕고 있는 형태니까요."
"잠깐."
나는 손바닥을 들어 당초아의 말을 잠시 막았다.
"……연구요? 시제품이라는 소리입니까?"
"……거의 끝난 연구?"
"……거의?"
"……임상시험 도중이라고 할게요."
"……지금? 이 순간? 저한테요?"
나는 고개를 들어 당초아와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초아는 자신 있다는 듯 당당하게 눈을 빛내며 맞섰다.
그러기를 약 3초,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왜 눈을 피하시는지?"
"아, 그렇게 빤히 보시니까 그렇죠! 화경 고수랑 눈 마주치는 게 부담스럽겠어요, 안 부담스럽겠어요?"
"저는 지금 이 물건이 더 부담스럽습니다. 역시 당가인답게 결국은 제게 이런 걸 먹이려 드는군요."
"그거 진짜 좋은 거예요! 백년하수오 베이스에 공청석유랑 산삼 같은 몸에 좋은 거 잔뜩 넣어서 만든 거라고요!"
"공청석유는 한 0.000007% 정도 들어있겠네요."
"물론 그렇게 할 예정이긴 한데 지금 건 시제품이라서 함유량이 훨씬 높아요. 그대로 시판하면 엄청나게 손해 볼 수준? 진짜 귀한 거 겨우겨우 가져온 거라니까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재료의 질은 보장되어 있다고 봐도 좋았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이름은 뭡니까?"
"독접단……."
"……."
"……으로 할까 하다가 마케팅팀의 작은 반대에 부딪혀서 목화단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독접이나 목화나 다 이사장님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한국에서는 목화에 서민적인 이미지가 있단 말이에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약을 추구하는 의미에서 목화단으로 정했어요. 시판품은 싸게 많이 팔 거거든요."
"그렇군요."
나는 탁자에 목화단을 가만히 내려다 놓았다. 재료가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당문과 하오문의 합작품이라니, 전혀 믿음이 안 갔다.
"……지금 안 드세요?"
"……영약은 그런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늘이 맑고 별이 빛나는 어느 길일에 목욕재계하고 몸과 마음을 완전히 가다듬은 상태에서 복용해야죠."
"……영약 먹을 때 준비할 게 그 정도였나요?"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그럼 뭐 영약 이야기는 이 정도로만 하죠. 복용하고 나면 후기는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길일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요."
"……날은 좀 적당히 골라요. 그건 그렇고."
당초아는 문득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라는 듯이.
"타임지, 축하해요."
"보셨군요."
"안 볼 수가 없었죠. 밖에는 아주 난리거든요. 저한테도 인터뷰 요청에 학교 방문 요청에 방송 초대까지 소란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그래요?"
"네, 학교에 무슨 기자들이 이렇게 많은지. 가주님 생신 때나 일월신교 때보다 더해요. 교수님도 전화가 먹통이던데 연락 많이 받으셨죠?"
"뭐 그렇죠. 화산파 사람들부터, 학생들이랑, 스쳐 지나간 기자 몇 명에, 일월신교 교인들까지. 전화기가 너무 울려서 그냥 꺼뒀습니다."
"그쵸? 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 누가 해외에서 상 받는 거 엄청 좋아한다니까?"
"저도 좋아합니다. 제가 받았으니까요."
"사실 저도 좋아하긴 해요. 더 좋은 게 뭐냐면, 그 상을 교수님만 받은 게 아니고 우리 학교도 받았다는 거죠. 기사 마지막 부분 보셨어요?"
"드래곤 레어 이야기요?"
"네. 정말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교수님은 언제 떠날지 모르잖아요. 교수님이 떠나면 도 조교님도 언제 떠날 거 같고. 그럼 먼지도 모르는 거고."
당초아는 챙겨온 요구르트를 하나 따서 단숨에 들이키고 말을 이었다.
"그러고 나면 용의 굴이라는 이 멋진 별명도 끝장나는 거잖아요."
사업가 당초아가 눈을 빛냈다.
"교수님은 검룡패 값어치를 충분히 해주셨어요. 덕분에 학부는 잘 돌아가고 있어요. 교수님들도 많이 보충됐고 내년에는 지금보다 더 좋아지겠죠."
"다행이네요."
"그럴수록 발전이 멈추면 안 되죠. 저는 제가 만든 자율무공학부가 계속 잘 나갔으면 좋겠어요. 제 사람들을 양성하는 산실로 쓸 수 있게요."
"김소원과 김지원이 그랬듯이요."
"그렇죠. 이신 같은 낭중지추들은 당연히 빠져나가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그들을 제외해도 평균적인 인재 풀이 좋았으면 해요. 그런 의미에서 교수님을 잡아야겠다 싶더라고요."
당초아가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저희 계약 연장하는 거 어때요?"
"이제는 검룡패도 없는데, 제 몸값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엔 떨이로 안 할 겁니다."
"감당, 해야죠."
당초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학부장 역할 그대로 하시면서 수업은 하나만 맡아주세요. 지금처럼 학생들 전반적인 관리 해주시면 더 좋고요."
"보수는요?"
"돈만으로도 되나요?"
"충분한 돈이라면요."
"아니면 사천당가의 데릴사위 자리까지 제시할 수도……."
"돈으로 주시죠."
"……그렇다면야. 실적 상관없이 연봉 80억 드릴게요. 따로 '부업'을 하시는 건 상관 안 할 거고요."
"나쁘지 않은데요?"
"그쵸?"
"근데, 투자할 때는 확실하게 해보시죠. 제가 먹고 튀기 부담스러울 만큼."
"헐."
당초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거는 학생들한테나 그렇게 하는 거죠. 교수님이 부담스러운 정도를 제시하기도 힘들겠지만, 교수님이 마음 먹고 튀는 걸 제가 어떻게 잡겠어요?"
"그런가요?"
"그렇죠."
당초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120억! 여기서는 한 푼도 더 못 줘요! 내가 뭐 맨날 부려 먹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런 것치고는 암왕의 생일잔치 때도 부려 먹었던 거 같은데. 내가 딱히 손해 본 건 없었지만 그건 분명 학교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120억이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아니, 업무의 난이도를 생각하면 오히려 과다할 정도였다.
"본전 뽑으실 수 있겠어요?"
"그건 제가 알아서 잘해야 할 일이죠. 하실 거에요?"
용의 굴이라는 타이틀 값부터 시작해서 나와 도하나, 먼지를 덤핑한 값이라고 봐야겠지.
나로서는 당초아가 한 30억만 불러도 학교에 남을 생각이 있었던 만큼 감사한 금액이었다.
준다는데 굳이 몸값을 줄일 생각은 없었다. 사천당가가 돈이 없는 집안도 아닌데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정말요? 그럼 고무림 접속하시죠."
"네. 아, 근데."
"……근데 뭐요, 또."
"도 조교도 좀 따로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봉'이잖아요."
당초아가 울상을 지었다.
결국 도하나는 내 봉급의 5%를 받기로 했다.
학교 일하는 초절정으로는 과하게 높은 금액이었으나 20대 초반에 용봉임을 고려하면 이해 못 할 수준도 아니었다.
장학금이랑 영약만 받고 학교 다니는 이신이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하긴 먼지는 밥만 먹고도 행복하게 사는데. 돈도 많이 생겼는데 앞으로 밥 좀 잘 챙겨줘야겠다.
그렇게 계약을 마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는데 당초아가 연구실을 나가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근데 제가 뭐가 그렇게 별로라서 데릴사위는 싫다는 거에요?"
"……그게 마음에 남으셨나요?"
"그건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요."
"제가 도사라서……."
"예."
"……그렇습니다."
"그런 걸로 하죠."
쾅!
당초아는 문을 쾅 세게 닫고 나갔다.
나는 도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로 밥값 걱정은 마라."
"원래도 안 했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