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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108화 (108/120)

< 108 : 107. 용의 굴(Dragon lair) >

전국체전까지 남은 시간은 약 2주였다.

결국 처음에 예상하던 대로 이신 혼자 진출하게 되었다.

전국체전을 대비해서 뭔가를 특별히 준비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공식 대회에서 쓸 만한 잡기술은 이미 다 가르쳤고, 애초에 잡기술이 없어도 대학부 수준에서 초절정의 무인은 규격 외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사천당가를 제외한 나머지 칠대세가와 구파일방이 모두 참가하는 중원 무림맹주배(武林盟主杯, The union president's cup)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물론 역사상 단 한 번 예외인 시기가 있긴 했다.

바로 사상 초유의 천재 검사인 화산검룡이 주요 비무대회를 모조리 박살 내고 다녔던 시대가 그랬다.

그마저도 청년부 대회는 아주 짧게만 뛰었기에 그저 전설로만 남은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대강 다 한 거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이번 주에 영약 받으면 복용을 도와주는 것과, 그 외에는 전국체전에 가서 응원 좀 해주는 것 정도일까.

자율무공학부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십만대산에 갔다오고도 느꼈는데, 앞으로 교수들이 충원되면 더 좋아질 것이다.

얼마 전에 당초아와 연락하면서 들었는데, 벌써 물밑에서 이름 있는 교수들과 접촉 중이랬다.

이미 영입이 반쯤 진행된 사람도 꽤 있다고 들었다.

그 상황에서 이신이 전국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까지 하면 바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을까?

사실 사천공대는 다른 학교의 직접적인 견제를 받을 정도로 좋은 학교였다. 학교가 영입하는 것이 아니고 교수가 오고 싶어서 난리여야 했다.

특히 우리 과 교직원 같은 경우엔 시설은 물론 봉급과 연구비 지원까지 모두 업계 최상위 대우였다.

게다가 자율무공학부는 이사장 당초아가 대놓고 밀어주는 학부였다.

그 의미는 당초아가 당문 직계에서도 가장 한미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던 파리 목숨 시절과는 달랐다.

지금의 당초아는 암왕이 공식적으로 사천당가의 후계 경쟁자로 인정한 거물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당가 후계 경쟁자와의 인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혜택이었다.

더불어 자율무공학부에 오면 이신 같은 걸출한 후기지수를 가르칠 기회도 있었다.

어쩌면 추후 한국 무림사에 이름을 남길지도 모르는 현시점 최강의 후기지수.

그 역사에 한 발을 걸치고 싶은 교수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결국 교수를 영입하는 것 역시 시간 문제였다.

자율무공학부의 정상화가 머지 않았다.

슬슬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애당초 당초아와 나의 계약은 개강 직전 도망가버린 교수들의 자리를 메꾸는 것이었다.

자율무공학부가 정상화될 때까지 학부가 어떻게든 돌아가도록 시간을 끌어달라는 계약.

계약 기간은 1년에서 최대 2년으로 정했다.

나는 지난 1년간 계약을 꽤 잘 수행해왔다.

후기지수들에게 적합한 커리큘럼을 짜기도 했고, 필요에 따라 특강을 할 때도 있었다.

소걸이나 도하나 같은 걸출한 조교들이 이 학교에서 잠시나마 일한 것도 다 내 덕이었고.

게다가 추가로 당초아가 독괴와 자기 오라비들과 대적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그만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애들과 부대끼다 보니 어느새 정도 많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가르치는 맛이 있는 애들이기도 했고.

그러나 언제까지 학교에 있을 수는 없었다.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이번 겨울에는 석유 재벌들 잔칫상에 목숨 걸고 뛰어들 예정이었고, 그 이후엔 사부님과 막역했던 벗들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마선과, 핵폭단을 제조하는 배후도 추적해야 했고, 남은 검룡패도 모아야 했다.

물론 페이만 적절하게 맞춰주면 교수 일을 더 못할 것도 없긴 했다.

지금도 이미 전반적으로 학부를 관리하는 것 외에 수업은 1과목만 맡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초아가 내 급여를 맞춰줄 수 있을까?

사실 지금 업계 최고 대우랍시고 받는 연봉 역시 화경의 몸값을 생각하면 매우 저렴한 수준이었다.

교수 치고는 많이 받는 편이지만, 애초에 검룡패로 엮인 게 아니었다면 자릿수부터 안 맞는 조건이었다.

문파에 묶이지 않은 프리랜서 화경은 다 합쳐봐야 전 세계에 100여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문파에 묶여 있었다. 돈이 있다고 움직이기가 쉽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그에 따라 프리랜서 화경 1명의 몸값은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인맥과 은원, 무위, 업무 등에 따라 그들이 받는 연봉은 한화로 100억 원에서 300억 원가량이었다.

교수 한 명에게 순수 연봉으로 투자하기에는 과하게 높은 금액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쉽냐?"

"음. 네, 사형. 그런 거 같아요."

"그래?"

"아주 조금요."

의외였다.

도하나는 아쉬운 소리를 잘 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도하나도 지난 1년 동안 꽤 변했다. 물론 대부분 좋은 쪽이었다.

밝은 또래 애들과 매일 어울려서 그런가, 과거에 잃어버린 감정을 조금씩이나마 찾는 것 같았다.

"그럼 가지 말까?"

"그 정도는 아니에요. 늘 하던 일이잖아요."

늘 하던 일.

그랬다. 도하나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늘 떠돌이였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다. 익숙해진다 싶으면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검룡패를 찾아보겠답시고 화산을 떠난 순간부터 계속 그랬다.

하지만 늘 하던 일이라는 게 계속 견뎌야 하는 일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아쉬우면 너는 남아있어도 된다. 자주 놀러오마. 너 정도면 정교수도 시켜줄 거고."

"아니에요. 전 사형 따라갈 거에요."

"……그래? 알았다."

도하나가 여전히 대부분의 판단을 내게 의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의자를 뒤로 쭉 눕히고 연구실 책상에 발을 올렸다. 그 자세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열기를 느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그저 열기의 존재만을 감각했다.

뜨겁지는 않았다.

우리는 뜨거움이랑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나는 한서불침이라서 몸이 고온을 뜨거움으로 느끼지 못했다.

스승님이 돌아가시고는 감정도 그랬다.

분노해야 할 상황에 머리가 오히려 차갑게 식었다.

감정이 격하게 흔들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도하나는 나보다 마음이 더 미지근했다.

뜨거운 아이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온기를 온전히 전달받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내게서 떨어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담담했으나 도하나는 늘 위태로웠다.

나이에 비해 무공은 고강하지만 우리는 뭔가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고수라고 해서 언제나 더 나은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

***

결과적으로 학교를 떠날 결심은 아무 쓸데가 없었다.

그날 점심이 끝나기도 전에 원지혜가 달려왔다. 우리 과 애들 전부를 뒤에 세우고 우르르 연구실로 들어왔다.

"교수님! 봤어요?"

"뭘."

"타임지요!"

"그걸 왜 봐? 너 요즘 영어 공부하냐? 잘하고 있네. 국제 무인이 되려면 영어랑 중국어 정도는 기본적으로 해야지."

"아니! 저 영어는 못해요!"

"그걸 자랑이라고 하는 거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원지혜가 스마트폰을 내게 내밀었다.

"봐봐요!"

"참나. 뭔데. 별거 아니면 넌 오늘 마칠 때까지 나랑 일대일 집중 대련이다."

"그건 좀."

"줘봐."

원지혜가 내민 화면에는 타임지 홈페이지가 있었다.

대문짝만한 기사 하나가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2022 타임지 선정 칠룡칠봉(七龍七鳳, Times dragons and phoenixes)]

이제 시월 중순인데 올해 게 벌써 나왔구나.

"근데 이게 왜. 뭐. 어쩌라고."

"눌러봐요."

기사를 클릭하자 당연히 올해의 칠룡칠봉 명단이 나왔다.

그 최상단에 있던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

[1. 후기지수의 왕이 돌아왔다(King of rising rookies is back).]

[세상에 검수들은 많았지만 몇 년 동안 누구도 '검룡'이라는 별호를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직전의 검룡이 보여줬던 놀라운 퍼포먼스를 따라잡은 어린 검객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죠.]

[결국 비어있던 검룡 자리를 다시 얻어낸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최근 인터넷에 떠돌았던 유명한 비디오를 본 누군가는 이제는 그를 '뇌룡'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의 귀환에 대한 특별한 존중(Special respect)을 담아 검룡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따로 소개가 필요 없는 후기지수의 왕이 마침내 귀환해 용봉지회의 상석을 차지합니다.]

[올해의 검룡(Dragon of sword of the year)]

['소년화경' 김산(San 'S-boy' kim)]

부들부들.

손이 절로 떨렸다.

감정이 무뎌진 내게 이 정도 충격을 주는 일은 흔치 않았다.

"내가……. 후기지수……?"

"그럼요. 교수님은 당연히 후기지수죠. 아직 삼십대 초반이잖아요. 용봉에 교수님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있는 걸요."

"지금 나이가 중요하냐? 내가 처음 용봉에 꼽힌 게 12년도 전인데 이제 와서 다시 용봉으로 불릴 문번(門番, Clan serial number)이냐?"

"그런 것치고는 검룡 별호 좋아하시는 거 같던데."

"……."

그래. 사실 검룡이라는 별호가 마음에 들기는 했다.

타임지가 다른 사람을 검룡으로 선정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은근히 마음에 들었고, 재림천마나 벽력자에 비해서는 선녀였다.

도사인 내가 선녀라고 하는 건 정말 엄청난 칭찬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용봉으로 다시 뽑히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나 정도면 후기지수 취급이 아니고 검절(劍絶, Ace of sword)도 될 만하잖아."

"에이, 교수님. 그건 아니죠."

"왜. 내가 어때서."

"지금 검절은 모용세가 가주님잖아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내 내공이 온전하더라도 당대의 검절한테는 힘들 거 같았다.

"그 양반은 대체 언제까지 해먹는 건데?"

"그래도 교수님이 더 오래 살지 않을까요? 그때 하시죠."

"그렇게 이기는 게 의미가 있겠냐? 아무튼 잘 봤다. 괜히 호들갑 떤 건 아니었네."

나는 원지혜에게 폰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원지혜는 고개를 저었다.

"더 내려보세요."

"뭐가 더 있다고?"

나는 그 밑을 대충 쭉쭉 내렸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실 용봉도 대부분은 유망주에 그치기 때문이다. 용봉이 되었지만 실력을 만개하기 전에 사라지는 무인도 적지 않았다.

중동 분쟁에서 활약한 30대 후반의 화경 사룡(沙龍) 할리드 정도가 눈에 띄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처음 보는 자였다.

스크롤을 더 내리다 보니 아는 사람이 나왔다. 놀랍게도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7. 반도의 어린 검수(Peninsular young swordsman)]

[검룡의 제자인 대한민국의 젊은 검수가 칠룡의 말석을 차지합니다.]

[해왕이라 불리던 위대한 명장의 자손인 이 어린 검수는 검룡이 용이 되었던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같은 나이 때 스승이 보여준 것에 비해서는 다소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요.]

[유명한 비디오에서 '독괴'와 '후개'와 '개(The dog)─아쉽게도 개는 용이 되지 못했습니다. 개는 용이 아니고 개이기 때문입니다!─' 등과 손을 맞춰 '마선'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보인 놀라운 재능에 찬사를 담아 그를 올해의 마지막 용으로 선정합니다.]

[알려진 바로는 이 재능 있는 검객은 올해 대한민국 최고의 후기지수를 겨루는 비무대회에도 참가한다고 합니다. 그가 사용하는 커다란 칼처럼 대단한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군요.]

[해왕의 후손. 반도에서 나온 젊은 무인. 뛰어난 검객이지만 검룡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했기에 우리가 그에게 선물하는 별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올해의 해룡(Dragon of sea of the year]

['해왕환생' 이신(Sin 'Reincarnation of Neptune' Yi)]

"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약관의 초절정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신이 대외적으로 보인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 용봉은 대외적으로 검증된 실력을 따지는 편이었다. 아마 독괴의 난과 일월신교 사태에서 보인 무위를 증명한 셈 친 것 같았다.

원지혜가 말했다.

"더 있어요."

"……또?"

이 밑은 이제 봉인데?

나는 아는 여자가 별로 없었다.

설마 원지혜나 당수련이 봉이 되었을 리는 없었고.

나는 미심쩍은 심정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제일 아래에 가서야 아는 여자가 나왔다.

[7. 신비로운 자(The Mysterious)]

[올해의 마지막 봉황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누구에게 배웠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그 무엇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 어린 소녀가 악절을 상대로 혼자 수 분을 버텨냈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독괴를 상대로 시간을 끌었다는 증언이 있고요.]

[신뢰할 만한 매체에 따르면 이 재능 있는 도객은 몇 년 전부터 검룡과 함께 강호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둘이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주 친밀한 관계인 것은 확실합니다.]

[화경을 상대로 버텨낸 어린 초절정 도객이 마땅히 가져야 할 별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올해의 도봉(Phoenix of blade of the year)]

['무명' 도하나(Hana 'Unknown' Do)]

"오."

하긴 이신이 되었는데 도하나가 부족할 건 없었다.

"하나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사형."

"오늘 기념으로 고기 먹자."

"아싸."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밑에는 사설이 붙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용봉에 대한 기사는 아니었다.

[PS. 이로서 사천무공대학은 용봉이 3명이나 함께 있는 유일한 무학원이 되었군요. '개'까지 더하면 3명과 1마리고요. 커서 용봉이 되고 싶은 어린 무인들은 이 용의 소굴(Dragon lair)을 주목해야겠습니다.]

그날 오후부터 전화가 폭발했다.

나는 그냥 전화기를 꺼두었다.

고기는 다음으로 미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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