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107화 (107/120)

< 107 : 106. 뒤풀이(Wrap-up party) >

결국 선발전 우리 과에서 전국체전에 지역대표로 진출한 것은 이신 뿐이었다.

정이삭이 사천공대 4학년 권사와 수백 합을 겨루며 마지막까지 분전했지만, 결국 이변은 없었다.

이미 8강까지 진출하는 과정에서 환검, 검풍을 과할 정도로 써먹은 상태였다.

잡기술은 인식되는 순간부터 효력이 급감했다. 알고 나면 대비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 비무에서는 본연의 실력으로 겨룰 수밖에 없었다.

4학년에서도 손에 꼽는 권사를 정면 상대하기엔 정이삭의 실력이 아직 부족했다.

정이삭은 결국 이백 합을 조금 넘긴 시점에서 패배를 선언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사실상 진작 승부가 결정난 것을 억지로 끌고 간 결과였다.

"고생했다."

"예."

그렇게 우리 과 절정 삼인방의 전국체전은 여기서 마무리되었다.

대표 선발을 한 걸음 앞두고 진 게 조금 아쉽긴 했으나, 그마저 내 생각보다는 훨씬 잘해준 것이다.

결국 상위권으로 올라갈수록 운과 잡기에 기댈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8강에 오르는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선발전을 치르면서, 무공 격차 뒤집는 경험을 새겨주고 싶었을 뿐이다.

상대가 하수라고 우습게 보지 않고, 고수라고 하여 압도당하지 않았으면 했다.

일단 싸움이 시작된 후에는 무공의 고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칼침 제대로 맞으면 가는 것은 고수나 하수나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애들의 표정을 보니 목표한 바를 충분히 달성한 것 같았다.

다들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초에 자기들이 하수였음에도.

"꽤 할 만했지?"

"예."

"다음엔 이길 수 있을 거 같아요."

정이삭과 원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없다. 원래 승부가 그렇다. 쟤들은 이제 곧 졸업이니까. 다시 붙게 되는 날이 있다 해도, 그때는 너희도 실무를 뛰고 있을 때겠지."

"진짜 아쉽네요. 한 번 더 붙으면 진짜로 이길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사실 지금 당장 붙어도 괜찮은데. 운이 좋았네, 우리 선배님들."

"개소리 그만하고."

"예."

"먼 미래에 어떨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때도 지금만큼의 격차일 수도 있고, 너희가 더 강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정진하도록 해라. 전국체전 선발전 따위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최소한 너희는 오늘을 잊지 마라. 승리만큼 패배도 가슴에 새겨라."

"예."

"그럼 됐다. 해산. 각자 집에 갈 사람은 가고 고기 먹을 사람만 따라와라."

"교수님이 사주시는 거에요?"

원지혜가 물었다.

"아니. 내가 왜."

"아, 뭐에요. 돈도 많이 버시면서."

"그건 내가 잘 나서 번 돈이지 너희가 벌게 해준 돈은 아니잖아."

"……그건 맞는데."

"고기는 과 운영비로 사 먹을 거다. 이미 이사장님한테 결재받아뒀다. 이런 날엔 사비 말고 학교 돈으로 먹어야지. 1학년들이 이만큼 잘했으면 학교도 마땅한 성의를 보여야 하는 법."

"오."

"역시 교수님입니다. 존경합니다."

"이게 진짜 '잡기술'……?"

"이신아, 고맙다. 잘 먹을게."

다들 이신에게 몰려가 어깨며 머리를 두드렸다.

얘들 지금 회식이 이신 덕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이신이 전국체전에 진출한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회식비가 그래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원래 교내 비무대회는 몇몇 군계일학들을 제외하면 고학년들이 성적을 거두는 대회였다.

1학년이 4명이나 32강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자율무공학부를 신설한 당초아로서는 충분히 기가 사는 상황.

게다가 이신은 우승까지 차지해버렸다. 1학년이 사천공대 비무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신을 딱히 사천공대가 키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당초아로서는 자율무공학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생겼다.

아직 창립 1년도 안 된 신설학과에서 전국체전 진출이라는 외부 성과까지 거둬버린 것.

특히 자율무공학부는 당초아가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사장으로서 직접 주도한 계획이라는 데서 의의가 컸다.

그러나 고작 1년이었다.

이를 제대로 업적으로 삼기 위해서는 선순환하는 구조가 필요했다.

더 좋은 교수진을 확보하고, 최고의 시설을 제공하고, 학생들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는 투자가 시작이었다.

벌써 1학년들은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으니 남은 건 하나였다.

재능 있는 학생들을 놓치지 않고 계속 새로 오게 하는 것.

지금 우리 과는 올해의 대문파 제자가 아닌 재능 있는 애들이 모두 모인 수준이었다.

그러나 내년도 그럴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내년 신입생 나이의 후기지수들을 대문파가 점찍어두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사천공대 대신 다른 곳을 갈 학생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올해만큼 재능 있는 유망주들을 영입하려면 홍보가 필요했다.

자율무공학부는 최고의 후기지수들에게 걸맞은 최고의 무학원이라는 홍보.

그리고 우리는 공대(功大)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홍보를 이미 해버렸다.

1학년의 1/3이 교내 비무대회에서 입상하고, 전국체전 선발전에 진출했다.

이신 한 명쯤은 아웃라이어로 취급할 수도 있었다. 어디나 낭중지추가 있으니까.

그러나 여러 명이 다 같이 잘하면 그건 확실히 학교 덕이라는 증명이었다.

이 모든 걸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신만 잘한 게 아니고 우리 애들이 다 같이 잘한 덕이라는 것이다. 물론 나도 잘했고. 도하나도.

다들 학교 돈으로 고기 먹을 자격이 있었다.

그런 세세한 뒷사정을 학생들에게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집에 갈 사람은 얼른 가라."

학생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원지혜, 안 가냐?"

"저 고기 먹으러 갈 건데요?"

"……부모님 멀리서 오셨잖아."

"이미 가셨어요. 원래 교수님이 고기 안 사줘도 우리끼리 뒤풀이할 예정이었죠."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력이 제법이었다.

너흰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럼 바로 고기나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넵!"

"따르겠습니다, 교수님."

"교수님, 저희 술 마셔도 돼요?"

"내일 오전 비무에서 날 이길 수 있을 거 같은 사람은 마셔도 좋다."

"취검(醉劍) 각인가. 정이삭 일생일대의 도전이다……."

"뭐라고?"

"아닙니다."

"하긴 고생한 건 사실이지. 각자 한 병까지는 허락하겠다."

나는 마지못한 척 말했다.

몸이 만들어지지 않은 학생들이 과음하는 것은 좋지 않았으나 술을 너무 멀리하는 것도 좋지 않았다.

강호행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술이나 독을 접할 일도 있을 것인데, 결국 경험을 쌓아둬야 했다.

"뭐로 한 병이에요? 소주요?"

"각자 감당할 수 있는 걸로 골라라. 소주든 맥주든 백주든 포도주든 똑같이 한 병이다. 내일 오전 비무에서 주독(酒毒)을 검사하겠다. 아, 이신은 금주다."

"……교수님, 저는 왜……?"

"넌 전국체전 2주 남았잖아. 근데 술이 생각이 나냐?"

"……예."

"예?"

"아니요……."

"그래야지."

사실상 올해 일정이 끝난 다른 학생들과 이신은 사정이 달랐다.

전국체전까지 컨디션을 최대한 좋게 유지해야 하는 이신은 당분간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이 맞았다.

상태를 망치는 건 금방이지만 온전하게 되돌리는 것에는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나는 맘껏 마셨다.

고급 백주를 물처럼 들이켜는 나를 보면서 원지혜가 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교수님은 술을 왜 그렇게 많이 드세요? 저희보고는 마시지 말라면서요."

"난 괜찮다."

"왜요."

"다 이유가 있다."

"무슨 이유요?"

아, 거참. 나는 소고기를 한 점 집어먹고 다 삼키고서야 대답했다.

"일단 나는 몸을 완성하는 것을 넘어 환골탈태까지 거쳐 주독이 쉽게 침범하지 못하며, 설령 독주를 마셔 악영향이 있다고 해도 주정(酒精)을 즉시 몸 밖으로 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는 영약을 복용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

"……딴 건 그렇다고 치고, 영약이요?"

"술과 영약은 상극이다. 몸이 받아들이기에는 약이나 독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수련은 알 테지."

"네. 오래전의 약선(藥仙)께서 '약과 독은 투여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도 남겼죠."

"……진짜야?"

"응. 파라켈수스(Paracelsus)라고 중세 서양의 약선이 한 말이야."

원지혜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와 당수련을 번갈아 보았다.

하여튼 잘 모르는 애들이 의심은 제일 많다.

"확인. 그건 알겠어요. 근데 그게 영약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약독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과다한 음주는 영약의 효력을 저하시킨다. 간장이 망가지면 아예 영약을 복용할 수조차 없는 몸이 되는 거고."

원지혜는 입가로 향하던 술잔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옆 테이블에서 앉아 있던 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괜히 고기만 먹으면서 이쪽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기색이었다.

쟤들은 마음만 먹으면 옆옆옆 테이블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무인이었다.

"저기요, 이쪽 테이블에 콜라 좀 주세요."

옆 테이블에 앉은 정이삭이 손을 들고 점소이를 불렀다.

그쪽을 잠시 쳐다본 원지혜가 내게 물었다.

"……콜라는 괜찮아요?"

"건강한 무인이라면 그 정도는 부담 없지."

"저기요! 여기도 콜라요! 두 병, 아니, 세 병이요!"

점소이가 금세 탄산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술잔을 비우고 그 자리에 음료를 채워 넣는 애들을 보니 나는 술을 더 달아지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맛있을까. 안주가 따로 필요 없었다. 그래도 고기를 먹었다. 그냥. 맛있으니까.

백주를 한 병 더 시키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특히 영약 같은 경우는 웬만한 독 이상으로 몸에 부담을 꽤 주는 편이다. 자연지기가 가득 담겨 있어서 그렇다. 신체와 기맥에 동시에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종의 영약을 복용한 순간을 노려서 효력을 발휘하는 극악한 독도 있었다. 무형지독이라고……. 나는 덕을 봤음에도 생각할 때마다 왠지 속이 쓰렸다.

"그래서 영약을 한꺼번에 먹지 말라고 하는 거군요? 몸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그렇지."

"그럼 우린 대체 언제부터 술 맘껏 마실 수 있는 거예요?"

"그거야 간단하지."

나는 손가락을 네 개 펴서 하나씩 접으면서 말했다.

"환골탈태를 하거나, 만독불침이 되거나, 주정을 배출할 수 있을 정도로 기를 잘 다루게 되거나, 그냥 성장을 포기하면 된다."

"아씨, 어느 세월이에요, 그게."

"성장을 포기할 생각은 없고?"

"그건 에바죠."

"……에바?"

"도를 지나치는 일이라는 뜻이에요."

"그렇군. 에바라……."

또 하나 배웠다.

사실 아이들이 쉽게 포기할 리는 없었다.

아직 성장 한계치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련한 만큼 바로 늘고 그게 체감이 되는 시기였다. 그러니 노력하는 것이 한없이 재밌을 수밖에.

그러나 그런 성장기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재능과 노력을 갈아 넣어도 큰 변화가 없는 때가 곧 온다. 남들보다 성장이 빠른 아이들이었기에 오히려 그 시기가 머지않았을 것이다.

벽이라고 부르는 시기였다.

많은 무인들이 그때 성장을 포기한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자만이 결국 고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한테 영약도 곧 지급된다고 들었다. 다음 주 중이라던데. 빠르면 내일일 수도 있다."

"예?"

원지혜가 마시던 콜라를 내려놓았다.

"누가요?"

"이사장님이지. 누구겠냐?"

"이사장님이 저희한테 영약을 주신대요? 왜요?"

"역시 교내 비무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 덕분이지. 애초에 학부 규정에 있다고 하더군. 순위에 따라 차등 지급되기는 하지만 입상자가 아니더라도 꽤 괜찮은 걸 받던데."

참고로 김소원 몫의 영약은 당초아의 사비로 제공된다고 들었다. 김소원은 엄밀히 말하면, 하오문의 스폰을 받는 거였다. 우리 과 학생이 아니었으니까 학교의 공식적인 지원은 받을 수 없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대회 때 더 열심히 할 걸."

"열심히 했으면 올라갈 수는 있었고?"

"그러게. 대진표를 잘 뽑아서 인간 대나무를 만났어야 올라갔을 텐데."

"대나무로 맞아볼래?"

학생들이 저들끼리 투닥거렸다.

차등 지급이라는 보상 체계는 경쟁을 유도하는 제도였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결국은 어떻게 학부 분위기를 조율하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경쟁과 협력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아무튼 오늘 술 한 잔이라도 마신 사람은 영약을 바로 복용하는 일 없게 해라. 최소 2주는 미루도록."

다음 순간, 꿀 먹은 벙어리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뭐."

"교수님, 저는 괜찮죠?"

"그래."

이신이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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