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 105. 선발전(Trials)(3) >
"자율무공학부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군. 다들 독하게 수련하며 나날이 일취월장한다더니."
"감사합니다."
소류검이 부드럽게 웃었다. 1회전에서의 패배가 꽤 속상할 것 같았는데 티를 내지 않았다. 확실히 우리 애들보단 좀 어른스러웠다.
"부디 최대한 높이 올라가기를 바란다. 후배에게 진 내 체면도 좀 세울 수 있게 말이다."
"흐흐. 알겠습니다. 그래야지요. 기대하세요."
척.
"한 수 잘 배웠다. 건투를 빈다."
소류검이 시원하게 웃으면서 먼저 포권했다.
"저, 저도 잘 배웠습니다!"
원지혜가 급하게 선배의 인사를 받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심판을 향했다.
"4조 1경기 승자 원지혜!"
심판이 선언했다.
원지혜가 소류검을 이겼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원세웅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부담을 느낄 만큼.
결국 원세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혹시 50합이 넘지는 않았는지……."
"정확히 46수째였습니다."
"……역시 그렇습니까? 혹시나 제가 잘못 셈한 게 아닌가 확인한 겁니다. 고수이신 교수님의 안목이 정확하겠지요. 하하……."
어느새 원가주는 다시 내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비무대에서 내려온 원지혜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쪽으로 다가오다 원세웅을 발견했다.
"어? 아빠?"
"그래, 딸."
"갑자기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연락도 안 하고."
"왜긴. 딸 응원하러 왔지."
"……응?"
내가 옆에서 본 바로는 별로 응원 안 하는 거 같던데.
내가 원세웅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냈으나 원세웅은 필사적으로 나를 외면했다.
"선발전 말고 본 대회 때 오지."
"거기까지 딸이 못 올라갈 거 같아서."
할 말은 하는구나, 원가주. 다시 봤다.
"아, 뭔 소리야. 방금 못 봤어?"
"봤어."
"나 엄청 늘었지? 잘 싸우지?"
"응."
"본 대회 올라갈 거 같지?"
"그건 좀."
"아씨. 아빠 누구 아빠야. 누구 응원하러 왔어."
"……물론 우리 딸 응원하러 왔지."
"당연히 그래야지. 엄마는?"
"저기."
"오……. 엄마아!"
원지혜가 원세웅이 턱짓한 쪽을 잠깐 살피더니 소리를 지르며 크게 팔을 흔들었다.
여기서 좀 먼 객석에 나머지 가족이 와있는 모양이었다. 얼핏 보니 중년의 여인 외에도 친척으로 보이는 닮은 무인 몇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원세웅의 대답이 뭔가 전반적으로 짧았다. 아까 나와 얘기할 때는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강원일극 원세웅 역시 딸 앞에서는 무뚝뚝하고 평범한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래도 간간이 보여주는 딸천재로서의 오성이 제법이었다.
하긴 나와의 내기 역시 결국 원세웅이 딸천재였기에 시작된 것. 그는 이미 훌륭한 딸천재였다.
원세웅과 몇 마디를 더 나눈 원지혜는 원세웅을 모친 쪽으로 보내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씨익 웃었다.
위풍당당한 모습이 눈꼴사나워서 나는 괜히 핀잔을 주었다.
"과대야, 그렇게 바닥을 다 부수면 어떡하냐? 네 창이 그렇게 튼튼해? 아주 내력이 남아돌지?"
"교수님, 저 잘했죠?"
"이사장님 울겠다, 야. 다음 경기도 바로 못 하고. 저기 스태프들 고생하는 거 좀 봐라. 이제 한 경기 했는데 비무대를 거의 새로 짓고 있네, 아주."
"잘했잖아요."
"잘하긴 했다."
"그쵸?"
"단기전으로 승부수를 건 부분이 좋았다. 50합 전에 끝낸 건 특히 칭찬할 만하고."
"그 정도예요?"
원지혜가 해맑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닌데 오늘만 그 정도가 맞아. 니 무생(武生)이 걸렸었거든.
사실 중요한 순간에 한 번 잘하는 것이 귀중하다.
비무를 아무리 잘해도 목숨 걸린 실전에서 실수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오늘 원지혜는 그 귀중한 한번을 해냈다.
사소한 전국체전 선발전 한 경기였지만 어쩌면 원지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더 올라갈 수 있겠냐? 첫 경기부터 환검도 쓰고 기풍도 쓰고. 밑천 다 털고 가능하겠어?"
"제대로 보였을까요?"
"너한테 위협이 될 만한 상대는 다 봤을 거다. 관전자 시점으로 보면 더 쉽게 보이거든."
"개망했다는 거네요. 여기 저한테 안 위협적인 사람이 없잖아요."
"근데 또 모른다. 걔들한테는 네가 아예 위협이 안 되었을 수도. 네 경기를 안 챙겨본 애들도 있을 거다. 다른 경기도 동시에 진행 중이었으니까 말이야."
"그럼 혼내줘야죠."
"그래야지. 감히 누구 제자 경기를 안 봐? 안 보면 모를 건데. 모르면 맞아야지. 맞아서 혼나야지."
"그쵸그쵸. 혼나야지."
원지혜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교수님, 전 애들이랑 엄마한테 좀 가볼게요. 다음 경기 시간 좀 남았으니까요."
"그래라. 긴장 너무 풀지는 말고."
"예."
원지혜는 꽁지머리를 휘날리며 우리 과 애들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야야야야, 봤어? 나 개쩔었지?"
"지혜찡, 진짜 잘했어. 나 스마트폰으로 찍어뒀는데 볼래?"
"오오. 수아찡, 고마워. 좀따 보여줘. 아니, 톡으로 보내줘."
"사천오봉(진) 원지혜 소저, 아니 대저(大姐). 오셨소이까?"
"아, 정이삭. 나 오봉 각이냐?"
"진짜 각이겠냐? 운빨로 오룡 한 번 이겼다고 정신 못 차리고 신났네, 아주."
"아, 뭐래. 존나 실력이었는데. 절정 고수 간의 치열한 수 싸움 안 보였음? 님 삼류임?"
"어, 다음 잡기술 원툴 럭키 펀치~."
"응, 네다삼~. 네 다음 삼류라는 뜻. 잡기술도 실력임~."
"어, 이미 절정이야~. 너보다 서열도 높아~."
"응, 조만간이야~. 인간 대나무 원지혜 매일매일 하루가 다르게 크는 중. 오늘 바로 정이삭까지 꺾을 예정~."
"어, 난 1조야~.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
"……아씨, 너 뒤질래, 진짜?"
"어, 때려봐~. 바로 무처법으로 고소할 거야~. 합의금으로 영약 도핑할 거야~."
"아, 미친놈인가 봐, 진짜."
……대체 뭔 소리야.
잘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 애들끼리 서로 진심으로 격려하는 중인 거 같았다.
근데 긴장을 너무 풀지 말랬는데 바로 푼 거 같기도 하고.
게다가 합은 어찌 저리 딱딱 맞는 건지 모르겠다. 미리 뭐라 말할지 짜두는 건가? 비무 합이나 좀 저렇게 열심히 맞추지.
하여튼 요즘 것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이들의 말을 해석해보려고 노력했다. 그 사이에도 애들은 계속 떠들었다.
"야, 이신. 어땠어. 나 잘했지?"
"응, 지혜야. 잘했어."
"어, 알지? 옛날에 니가 스터디에서 분석했던 초식이 딱! 나오는 거야. 바로 위로 쳐올리고 창풍 날리면서 한 바퀴 회전해서 환창까지. 좋았다. 좋았어. 절정 나부랭이는 못 봤을 수도 있는데 초절정은 제대로 봤을 거야. 그치?"
"……지도 절정이면서 절정 존나 무시해."
"아, 니는 좀 조용해."
이신은 그저 맑게 웃었다.
"봤어. 대단하던데?"
"그치그치. 너도 긴장해라, 이신. 내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응. 그럴게."
"당수련, 너도 마찬가지고."
"응, 지혜야. 우리 파이팅하자."
"어? 어. 그래, 파이팅."
원지혜가 원세웅과 내 앞에서는 담담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소류검을 이긴 게 꽤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친구들끼리 모이니까 터놓는 속마음이 시끄럽고 어지러웠다.
사실 한 삼 분의 일쯤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저 대화가 나한테 다 들리는 건 알까?
"그건 그렇고 바로 다른 애들 비무도 있지 않나?"
"네, 사형."
도하나가 태블릿을 슥슥 조작하더니 말했다.
"당수련이랑 이신은 지금 바로 경기 들어가고 정이삭은 그다음이에요."
말하기가 무섭게 당수련과 이신이 무리에서 떨어져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 둘에게는 해줄 말이 많지 않았다. 정이삭과 원지혜와는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신, 하던 대로 하고."
"예, 교수님."
"당수련, 사람 죽이지 말고."
"예?"
"얼른 끝내고 와라."
"예? 예……."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비무대로 올랐다.
이신이 만난 상대는 다른 학교의 4학년 절정 검수였다.
사천특별시에서 사천공대가 가장 명성 높은 무공대학이기는 했지만 다른 종합대학에 무과가 없지는 않았다.
전반적으로 실력이 사천공대생에 비해 밀리는 편이긴 했지만 가끔 낭중지추 같은 후기지수들도 있었다.
이신의 상대도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미 이신의 실력을 본 적이 있는 건지, 사천공대 추계 비무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에 쫄아버린 건지는 몰라도, 긴장해서 제 실력을 보이지도 못했다.
이신은 삼 초식을 방어한 후 바로 일검으로 상대의 검을 날려버렸다. 명백한 고수로서의 태도였다.
상대의 손에만 충격을 집중한 한 수였다. 상대는 검을 놓친 손이 저린지 손을 털고 있었다.
"선배님, 한 수 배웠습니다."
"네, 아, 응. 나도."
이신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비무대를 내려왔다.
"고생……은 안 한 거 같고. 쉬어라."
"예."
이신은 담담하게 우리 과 애들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원지혜가 아니고 이신이 우리 과를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여긴 경쟁 상대가 너무 없었다. 이신을 품기에는 사천공대가 좁았다.
당수련은 이신과 정반대였다.
당수련의 상대는 사천공대 도과 4학년. 당수련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고수였다.
게다가 당수련 입장에서는 전국체전 비무에서 치명적인 살수를 쓸 수는 없는 노릇.
대부분의 실전 암기와 독을 제한한 채 권각장으로만 싸운 당수련은 오래 버티지도 못했다.
환검과 검풍은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싸움, 수를 감추는 것을 택한 모양이었다.
하긴 잡기술은 드러날수록 위력이 약해진다. 자주 보여주면 다른 아이들이 승부수로 쓸 때 파훼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암왕의 손녀가 마음이 저리 여려서야. 진짜 필요할 때 암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당수련은 그렇게 오십여 합을 나누기도 전에 패배했다.
"고생했다."
"……죄송해요."
"아니다. 비무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네 것이든 상대 것이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거다."
"네……."
당수련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다소 침울해진 얼굴로 애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갔다.
정이삭은 운 좋게 사천공대 검과 2학년을 만나서 백여 합을 겨루고 이겼다. 상대방은 참가자 중에서 거의 최약체였다.
그 이후의 진행은 뜻밖이었다.
원지혜와 정이삭이 의외로 승승장구하며 올라갔다.
대진이 꽤 좋은 편이기도 했고, 개중 치열한 싸움도 있었으나 잡기술이나 기발한 한 수가 예상보다 잘 먹혔다. 꾸역꾸역 제 선배들을 이기고 상위 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날은 그렇게 끝났다.
다음날 일요일 저녁.
이날도 오전부터 치러온 선발전의 끝이 보였다.
조별 우승자 8명이 골라졌다.
전국체전 사천시 대표 선발전 8강이었다.
이제 여기서 한 번만 더 이기면 지역 대표로 전국체전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경지, 다른 비무대회 성적, 비무 시간, 학년, 나이, 심판의 평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8명에게 순위를 분배했다.
첫 경기는 1순위와 8순위의 비무였다.
전국체전 선발전 1순위. 해왕환생 이신.
전국체전 선발전 8순위. 남옥창 원지혜.
"……시발. 야, 너 봐주지 마라. 제대로 해. 봐주면 나 화낼 거야."
"……알겠어."
원지혜가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이신을 노려봤다.
비무가 시작된 순간, 원지혜가 펼친 수는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이었다.
첫 경기 때 그랬듯이 삼재창법의 인창이었다.
쾅!
내가 보기에도 원지혜 수준에서는 극한에 가까울 정도로 초식을 훌륭하게 펼치고 있었다.
원지혜로서는 최선이었다.
이신은 긴 검에 검화를 두르고 다가오는 창을 단칼에 베어냈다.
이후 곧바로 원지혜의 등 뒤로 넘어가 마혈을 짚었다.
"8강 1경기 승자 이신!"
굳은 표정으로 비무대를 내려온 원지혜에게 정이삭이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인간대나무 원지혜. 초절정 고수 앞에서는 그저 검술 연습용 허수아비였고."
"아, 좀 닥쳐."
원지혜의 전국체전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