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은 협객의 사회-105화 (105/120)

< 105 : 104. 선발전(Trials)(2) >

"……무슨, 50합? 지금 농담하자는 거요?"

"제가 가주와 농담 따먹기나 하겠습니까."

"하. 좋소. 50합 안에 지혜가 소류검(小柳劍子) 소협을 쓰러트린다면 전부 교수의 말대로 하겠소. 아니, 정녕 지혜가 사천오룡(慶南五龍)의 일원을 이길 정도로 컸다면 내 쪽에서 간청해야 할 일이겠지."

"그럼 그렇게 합시다."

소류검이고 사천오룡이고 참으로 거창한 별호였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세간에서는 후기지수들에게 용봉(龍鳳)을 붙여주고 싶어서 안달 난 경향이 있었다.

좀 친다 싶으면 지레 용이니 봉이니 난리였다. 전 세계 용들을 한 자리에 모으면 아마 작은 문파 하나는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용으로 불린다는 것은 어느 정도 유망한 후기지수라는 인증 마크이긴 했따.

물론 저 아이는 내수용이었고 나는 세계구급(World class)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소류검. 버드나무 칼을 쓰는 어린 검수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소류검이 검집에서 뽑아든 칼은 날 부분이 나무로 되어 있었다.

"저 목검이 버드나무로 되어있는 겁니까?"

"그렇소. 류진산 소협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지."

"……성씨도 류 씨던데 혹시 버들 류 자를 쓰는지?"

"그렇소만."

"과연. 훌륭하군."

내 혼잣말에 원세웅이 코웃음을 쳤다.

"하, 설마 이제 알았소? 그런다 한들 이미 한 이야기를 물려줄 생각은 없소."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가나 보겠소."

"어째 가주께선 아주 지혜가 지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건 아니오."

내가 원세웅과 입씨름을 하는 사이 비무는 이미 시작되었다.

선공을 가져간 것은 원지혜였다.

개전과 동시에 정면 찌르기.

"좋다."

"……흥."

한 수만 봐도 독하게 수련한 티가 났다. 자세로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소류검 류진산은 목검을 휘둘러 원지혜의 공격을 흘려냈다.

본래 버드나무는 무구로 쓸 수 있을 만큼 단단한 목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기로 쓴다는 것은 그만큼 유(柔)의 묘리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힘 싸움으로 가지 않고 기술 싸움으로 승리하겠다는 선언인 셈.

게다가 성도 류 씨였다.

버드나무 목검[柳劍]을 쓰고 유검(柔劍)을 다루는 류 씨 후기지수.

과연 무당에서 졸업도 전에 미리 컨펌할 만한 인재였다.

뇌리에 박힐 만한 특색이 있었다는 뜻이다.

죄 거기서 거기인 후기지수들이 쏟아지는 요즘 저 정도로 확실한 이미지 메이킹이라니.

자기 PR 시대에 적합한 무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장 사천공대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의 유망주는 아니었는데 왜 사천오룡인가 했는데, 실력 외적인 부분도 꽤 반영되었던 모양.

그래서인지 거창한 별호에 비해 원지혜와 실력 차이는 크지 않은 편이었다.

물론 원지혜가 몇 수 뒤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50합을 자신 있게 이야기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 이상으로 싸움을 지속했을 때는 원지혜가 이길 가능성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1학년과 3학년. 2년의 나이 차.

적다고 보면 적게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아직 몸이 완성되지 않은 나이대에서 2년간 벌릴 수는 있는 격차는 상당했다.

게다가 남녀가 타고나는 신체적 조건에 따라 겪는 불리함도 있었다. 체격이나 근육량 따위가 현저하게 밀렸다.

2년이라는 숫자로 보이는 것에 비해서 외공의 수준 차이가 더 많이 났다는 말이다.

그래도 원지혜가 오직 버티는 데에만 집중하면 100합을 넘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원지혜 역시 치열하고 단단하게 수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텨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단시간 안에 승부수를 걸어야 했다.

따로 전음을 보내지는 않았다.

잡기술까지 가르치면서 전국체전을 준비한 이유를, 학생들은 이미 알고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괜히 마음가짐을 흐트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믿을 뿐.

***

동기들의 응원을 뒤로하고 비무대에 오르는 순간, 원지혜는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학교 선배와 눈을 마주쳤다.

딱히 학교에서의 교류는 없었다.

자율무공학부는 폐쇄적인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학생이라고 으스대고 자기네들끼리 논다고 다른 학과에서도 알게 모르게 멀리하기도 했다.

원지혜는 억울했다.

으스댄 적 없었다. 안 놀았다. 그냥 수련만 했다. 수련만 하는데 수련 시간이 모자랐다. 악독한 삼재 스터디 때문이었다.

그래도 명목상 학교 선배였기에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상대도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사천공대 검과 3학년, 소류검 류진산.

사천오룡의 사석(四席)이었다. 그러나 실력으로는 사실상 말석이라도 봐야 했다.

왜냐면 현재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원지혜의 소꿉친구인 동기였기 때문이다. 그, 교내 비무대회 우승자.

그러니 원지혜에게는 소류검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결국 사천오룡이든 당수련이든 다 제치고 이신과 경쟁할 사람이었으니까.

심판이 올라와서 이것저것 설명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원지혜는 심판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내력으로 몸을 달궜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약간의 긴장감. 근육의 가동. 내력 순환. 모두 부드러웠다. 몸 상태가 좋았다.

'컨디션 좋고.'

내려가면 친구들한테 맛있는 것 좀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긴장을 덜었어.'

응원해준 친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느끼며 원지혜는 창을 뽑아들었다.

그 순간 다른 마음은 다 잊었다. 눈앞의 상대에 집중했다.

금속의 느낌이 서늘했다. 그러나 곧 신체의 한부분처럼 편안해졌다. 이미 길들인 무구였다. 원지혜만 아는 애칭은 지혜창이다.

반대편에서는 소류검이 검을 뽑아들었다. 유검의 달인이라고 들었다. 과연 칼의 날이 나무로 되어 있었다.

서로 병기를 앞으로 세운 채 인사했다. 무기를 든 상태에서의 격식이었다.

"잘 부탁합니다."

"나도 잘 부탁한다."

곧바로 숫자를 셋 심판이 개전을 선언한 순간.

쾅!

원지혜는 진각을 밟으며 극쾌의 초식으로 찔렀다.

이름 같은 건 없는 초식이었다.

그저 수십만 번 수련한 중단 찌르기.

굳이 무공으로 따지자면 삼재창법의 인창(人槍)이었다.

원지혜에게 가장 익숙한 자세였다. 움직임이 숨을 쉬는 듯 자연스러웠다.

제대로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가문의 무공에 비해 훨씬 익숙했다.

소류검은 원지혜의 찌르기를 목검을 휘둘러 흘려냈다. 또래에서는 빼어나다고 이름 높은 유검이었다.

그러나 공격을 흘려냈음에도 소류검이 받은 반동이 적지 않았다. 몸이 옆으로 조금 밀리고 자세가 약간 뒤틀렸다.

원지혜가 일격에 담은 힘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

원지혜는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이어나갔다. 소류검이 자신보다 최소 한 수 정도는 앞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복잡한 초식을 담아내지 않았다.

단순하고 강하게 가장 익숙한 걸 펼쳤다.

위아래로 누르고 올려치는 것은 천창(天槍)이었고.

좌우로 후려서 틈을 만드는 것은 지창(地槍)이었다.

그렇게 틈을 만들고 찌르는 것이 인창.

삼재창법의 가장 기본적인 삼초였다.

기본적인 걸 펼치고 섞고 꺾었다.

쐐애액! 쐑!

창이 공기 찢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렸지만 타격음은 들리지 않았다.

소류검이 대부분의 공격을 흘리거나 피해냈고, 설령 무기가 부딪친다고 해도 철창에 닿는 것은 목검이었기 때문이다.

'할 만하다.'

원지혜 입장에서 상성이 나쁘지는 않았다. 유검은 베어내는 공격에 강했다.

그러나 원지혜는 창을 다룬다. 사거리에도 이점이 있었고, 주공은 찌르기였다.

흘리기가 어려웠고 흘려낸다고 해도 완벽하게 흘리기가 쉽지 않았다.

'유검을 제외한 다른 수법은 다소 부족하다.'

공세를 이어나가며 승부를 가늠했다.

순식간에 쌓아 올린 이십여 합.

쉬지 않고 공세를 이어갔음에도 원지혜의 호흡은 일절 흔들리지 않았다.

타고난 근력은 어쩔 수 없더라도 체력 단련은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수련 시간만 되면 악마가 되는 교수가 개같이 굴려댄 덕도 조금 있었다.

내력은 어떤가. 날과 봉에 기를 가득 담고 휘두르고 있음에도 모자람을 느끼지 않았다.

원지혜 역시 영약은 남부럽지 않게 먹어온 금지옥엽이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당수련이면 몰라도 또래보다 내력이 부족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공격을 더 이어나가면서 새로운 게 보였다.

'……아니.'

내공에 여유가 많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은 많이 남았는데 교환비가 나빴다.

일방적인 공세를 이어가서 유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소류검은 최소한의 검기만을 주입한 목검으로 정확한 순간에 공격을 쳐내고 있었다.

내력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식의 불공정한 교환에서는 우위를 가지기가 힘들었다.

판도를 바꿔야 하는 상황.

화악.

원지혜는 내력 소모를 줄이는 대신 오히려 늘렸다. 날끝에 두른 기를 크게 키웠다.

이미 내공 소모가 많았고, 지속적인 공세가 슬슬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삼십여 합을 나눴는데 대부분이 원지혜의 공격이었다.

무기를 다루는 싸움에서는 받아치는 쪽보다 공격자의 체력 소모가 더 컸다. 뚫지 못하면 말라죽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지금 끝낸다.'

원지혜가 1년 동안 보고 배운 것이 내공 쥐꼬리만 한 교수가 한 갑자 내공의 후기지수들을 패고 다니는 거였다. 가끔은 같은 화경도 패고 다니기도 했다.

옆에서 지켜보니 핵심은 모든 것을 거는 거였다.

무공 말고도 배운 것이 있었다.

승부 자체에 대한 태도!

쾅쾅쾅쾅쾅쾅!

기를 가득 담은 원지혜의 철창이 비무대 바닥까지 부수며 소류검을 압박했다.

마침내 소류검이 참을 만큼 참았다 싶었던지 원지혜의 찌르기를 아래로 내려치고 반격을 시작했다.

물 흐르듯이 간격을 좁혀오는 공격. 기세가 무척 위협적이었다.

원지혜는 소류검의 연이은 공세를 필사적으로 막아내었다.

어느 순간 소류검이 진각을 밟으며 찔렀다. 여느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힘을 아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형상이 낯설지 않았다.

인간이 든 막대기가 다가오는 과정에서 어떤 궤적을 그리더라도 그건 결국 찌르기였다.

수없이 보고 듣고 쪼개고 막고 받아치고 해보고 분석한 삼재검법에 분명 그와 유사한 어떤 궤적이 있었다.

의외로.

삼재종합공 스터디를 시작하고 성장이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은 눈이었다.

안력.

정확히 말하면 안력 자체는 딱히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건 내공의 화후가 도드라지지 않는 한 체감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바뀌었다.

똑같은 안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는 초식과 모르는 초식은 보는 난이도가 달랐다.

시작부터 과정까지 모두 익숙한 초식은 그 끝마저 더 쉽게 보였다.

이미 가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는 법이 바뀌는 것만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퉁!

원지혜는 가슴팍으로 다가오는 목검을 위로 후려쳤다. 탄(彈)의 묘리를 담았다.

"음!"

소류검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목검이 원지혜의 몸을 찌르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공격이 성공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검기가 의복과 살갗을 베어냈다.

칼에 담긴 힘이 온전히 직선 방향으로 앞을 향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하단에서 올라오는 반격을 받자 흔들림이 컸다.

검을 놓치지는 않았으나 목검이 순식간에 하늘을 향했다.

완벽한 파훼였다.

원지혜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며 창날을 상단으로 휘둘렀다.

이미 상단세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소류검은 위로 향해 휘둘러지는 철창을 쉽게 쳐냈다. 그러나 간격이 좁아 힘을 흘려내지는 못했다.

빠각.

버드나무 칼날에 실금이 갔다.

소류검이 당황하고 검이 부러지지 않도록 검기를 키웠다.

그러나 원지혜는 실금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머릿속에 그린 그림을 실현했다.

애당초 상단세를 향할 때 다시금 탄의 묘리를 담아 창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상대의 검을 튕기게 하는 대신.

자신의 몸을 그대로 돌려세웠다.

반동으로 회전하며 창의 꼬리가 소류검의 하단을 노렸다.

'멀어. 허초다'

소류검은 정확한 간격을 벌리며 생각했다.

멀지 않았다.

원지혜는 휘두르는 궤적 그대로 창풍을 날렸다.

날카로운 기풍이 소류검의 발등을 노렸다.

"이런!"

소류검은 급하게 발에 기를 두르고 기풍을 발로 차냈다.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기풍이 멀리 뻗어왔다. 다행히도 발에 닿자 가볍게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 원지혜는 다시 최초의 찌르기를 하고 있었다.

인창.

그러나 개전 때의 한 수와는 달랐다. 창끝이 흔들렸다.

그 끝으로부터 뻗어나오는 기의 칼날은 모두 세 개였다. 환창(幻槍)이었다.

타타탁!

소류검은 이를 악물고 목검을 휘둘러 쳐냈다. 검이 부러질까 검기를 밀도 높게 둘렀다.

'……너무 가볍다! 속았…….'

그 사이 그 환영을 뚫고 다가오는 은백색의 창날이 있었다.

목으로 느껴지는 서늘한 예기.

소류검이 패배를 인정했다.

"……졌다."

"한 수 배웠습니다. 선배님."

46수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