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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104화 (104/120)

< 104 : 103. 선발전(Trials)(1) >

토요일 오후 1시 30분.

사천무공대학 철두철미 아레나.

전국체전 지역대표 선발전이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사천 대표 선발전이 이곳에서 치러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천특별시의 대학부 대표가 대부분 사천공대에서 선발되긴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철두철미 아레나가 사천시에서 가장 좋은 비무 시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무대의 만듦새와 강도, 각 비무대 사이의 안전거리, 객석의 질, 대기 중인 의원의 수준, 기타 편의시설 등이 모두 최상급이었다.

일반적인 체육관은 유지비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

사천공대는 당가의 지원을 듬뿍 받는 돈 많은 학교라서 시설을 유지할 여력이 있었다.

실제로 대학부를 제외한 고등부와 일반부 선발전도 철두철미 아레나에서 치러진다.

넓은 객석에는 이미 참가자의 가족과 교수, 친구, 동문, 연인 등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개중에 일반인으로 보이는 관객들도 많았다. 사천시는 유력한 우승 경쟁 지역이기 때문에 선발전치고는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 외 지역방송 기자나 대회 스태프 등이 아레나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내게 집적거리는 기자도 있었지만 바로 취재를 거절했다.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건 대회 참가자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몸을 풀고 있는 원지혜에게 말을 툭 던졌다.

"긴장되냐?"

"아뇨. 뭘 이 정도로. 전국체전이 처음도 아닌데요."

원지혜가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하게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상체 근육이 다소 굳어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대학부는 고등부랑은 주목도가 달랐다.

게다가 포식자였던 고등부 때와는 달리 지금 우리 애들은 먹이사슬의 밑바닥인 상황.

다소 긴장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비무에 악영향을 줄 정도여서는 안 될 일이지.

툭.

나는 손등으로 그녀의 어깨 혈을 가볍게 두드렸다.

"악! 뭐에요!"

원지혜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굳은 근육 풀어준 건데 괘씸하긴.

"긴장 좀 풀어라. 근육이 너무 딱딱해서 연무장 대신 써도 되겠다."

"예에?"

"어차피 교내에서 32등인 1학년한테 기대하는 사람도 없다. 내려놓고 보여줄 거 다 보여준다는 마음가짐으로 다녀와라."

"아씨. 자존심 상해."

원지혜가 어깨를 몇 바퀴 돌리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긴장이 좀 풀린 거 같았다.

"저 32등 아니거든요. 17등일 수도 있어요. 일일이 붙어봐야 알지."

"그럼 증명하고 와."

"그럴게요."

원지혜가 창을 들고 비무대로 올라갔다.

반대편에서도 검을 들고 올라오는 남자 하나가 보였다.

원지혜는 동시에 치러지는 개막전 4경기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원지혜 파이팅!"

"남옥창! 남옥창!"

"당신은 남옥창의 성장이 두렵습니까?"

"아, 하지 마! 조용해!"

자율무공학부 애들이 놀리듯이 원지혜를 응원했다. 원지혜가 고개만 돌리고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건 숨길 수 없었다. 근육의 움직임도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

"원래 애들은 금방 크는 법이죠."

"긴장 풀어주는 건 쟤들이 나보다 낫네."

"저맘때 애들은 어른보다 친구가 더 중요하거든요."

도하나가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애들이라니. 너 쟤들이랑 몇 살 차이 나지도 않거든?"

"에이, 사형. 저는 그 몇 년 사이에 벌써 큰 거죠."

"저맘때 그렇게 중요하다는 친구는 다 어디 가고?"

"사형도 친구 없잖아요."

"……자율무공학부의 자랑 남옥창 파이팅!"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원지혜를 큰 소리로 응원하는 척했다.

할말이 전혀 없지는 않았는데 어째 말하는 편이 더 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과 애들은 선발전 참가자 4명은 물론 나머지 애들까지 모두 모여있었다.

주말인데 학교를 나오다니.

할 게 없어서 놀러 온 건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응원하러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후자일 것이다.

원래 세상에서 싸움 구경이 가장 재밌는 법이다.

게다가 이런 비무 대회는 관전하면서 얻어갈 것도 많았다.

이번 선발전 참가자들은 놀러 온 우리 애들보다 딱 몇 수 정도 앞선 정도였다. 배울 게 가장 많은 격차였다.

재미도 있는데 얻을 것도 있다니. 심지어 맨날 다니는 학교에서 열리고. 생각해보니 오는 게 당연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원세웅입니다. 지혜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원지혜가 비무대로 올라가는 도중 문득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남자가 있었다.

50대 초반의 초절정. 굳은살의 위치로 보건대 숙련된 창수였다.

원주원가의 가주였다.

"강원일극(江原一戟) 대협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김산입니다. 사천공대에서 교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대협이라니 과찬입니다. 저야말로 명성 높은 벽력자 대협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예, 뭐."

"……?"

강원일극. 강원도에서 가장 뛰어난 창잡이라는 뜻이다.

언뜻 보면 극찬 같지만 사실 곰곰이 뜯어보면 그렇게 대단한 칭찬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원제일검도 아니었고 반도제일창도 아니었다.

강원도에 창수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 데 그 지역에서나 먹힌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원주를 주름잡고 있는 무가가 원주원가였다.

사실상 원주원가의 가주에게 붙여주는 존칭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어찌, 우리 지혜는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습니까?"

"예. 교우 관계도 원만하고 무공 역시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재능이 있는데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미래가 기대됩니다."

딱히 빈말할 필요도 없었다. 원지혜는 실제로 썩 괜찮은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하하. 다행이군요. 지혜가 처음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들었을 때는 걱정도 많이 했는데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원세웅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곡선을 그린 눈썹과 달리 눈동자에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원세웅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발언의 의도가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삼재종합공을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만."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가르치는 과정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 뛰어난 고수라고 한들 잘 가르치는 것은 별개지요. 이미 약관을 넘은 학생들에게 아직까지 삼재공을 수련하게 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원세웅이 말을 이었다.

"우리 지혜는 가문을 이어야 하니 교수님처럼 삼재 대가가 될 수도 없고요. 그렇다고 소녀화경이 될 재목은 더더욱 아니니 말입니다. 이만 본가로 데려가 가문의 무공에 집중시키려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지혜를 자퇴시키고 본가로 데려가겠다는 이야기입니까?"

"네. 문제가 있습니까?"

"많습니다."

많다. 너무 많았다.

나는 원세웅의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원세웅은 잠깐 움찔했다. 기세를 담지는 않았으나 일개 지역 무가의 가주에게는 위압감으로 느껴졌을 수 있었다.

잠깐 눈을 감고 눈가에 준 힘을 풀었다. 내 위치를 생각했다.

나는 고수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교수였다.

원지혜는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었다.

원지혜에게 자율무공학부는 아주 잘 맞는 환경이었다. 열등감을 노력으로 극복하려는 성격 덕에 그렇다.

동년배 후기지수, 강력한 경쟁자, 끝없는 무공 교류가 다 그녀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사천공대라고 완벽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여기보다 더 잘 맞는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원주원가 본가는 아니었다.

차라리 더 경쟁적인 환경에 보낼 생각이라면 이해했을 것이다. 산동악가와 교류를 하겠다던가, EU 아카데미를 간다든가.

그런데 강원도에 가는 것? 비단잉어를 어항에서 기르는 격이었다. 잘 커봐야 관상용 물고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가문의 무공 역시 중요한 건 맞았다. 원지혜는 가문의 독녀였고 추후 가주가 될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중요했다.

그러나 기초를 단단하게 쌓는 것도 중요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재종합공을 '충분히 익혔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익힌 삼재종합공은 무학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능케 한다.

그러니 삼재종합공을 익히고 넘어가는 게 가문의 무공을 성취하는 것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었다.

만류귀종(萬流歸宗). 결국 모든 물줄기는 바다로 흐르기 때문이다.

천마신교의 파천신공 같은 신공절학마저 무학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제대로 성취할 수 있었다. 원가의 창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빨리 시작한다고 빨리 가는 것이 아니었고 빨리 가는 것이 전부인 것도 아니었다. 멀리 가는 것 역시 중요했다.

나는 그런 긴 이야기를 한 문장에 담았다.

"원지혜는 우물에 있을 아이가 아닙니다."

결국 못 참고 그렇게 얘기했다. 어쩔 수 없었다. 교수로서 학생이 망가지는 방향을 그냥 둘 수 없었다. 강하게 나갈 수밖에.

곧바로 원세웅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가문을 우물에 비유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 말은 원주원가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되오만."

"그저 사실을 얘기한 겁니다. 원주원가에 원지혜를 가르칠 만한 인사가 있습니까?"

"나는 강원일극이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원지혜를 가르치겠다고 나선 게 원세웅 자신이었다. 정확하게 그게 문제였다.

나는 굳이 화산검룡이나 소년화경, 벽력자, 재림천마 따위의 내 명성을 내세우지 않았다.

원세웅이 그런 걸 모를 리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원지혜가 가주를 따라가면 기껏해야 강원일극으로 클 겁니다."

"……귀 교수가 가르치면 그보다 훨씬 나을 거라는 말이오?"

"비단 제가 아니라도 원지혜에게는 후기지수들과 교류할 환경이 필요합니다. 원지혜가 여기 남으면 늦어도 십오 년 후에는 강원일극이 바뀔 겁니다. 그 이후는 하기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글쎄, 아무튼 별호 앞에 행정구역을 달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어찌 그리 쉽게 장담하시오."

"눈으로 확인하시죠."

나는 비무장 쪽으로 턱짓했다. 원지혜와 상대방이 이제 막 인사를 마치고 무기를 맞대었다.

상대는 사천공대 검과 3학년. 원지혜와 다른 조에서 32강에 들었던 다른 학생이었다.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원지혜에게 쉬운 상대는 이 대회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는 고수도 아니었다. 반 호흡에서 한 호흡 차이.

"가주께서는 어떻게 될 거라고 보시는지."

"당연히 힘들 거요. 저 소협은 절정에 이른 지 이미 1년이 넘었소. 그럭저럭 숙련되었겠지. 알아보니 이미 졸업 후 무당파 한국지부(Wutang korea)에 입문하는 것으로 컨펌도 받았다고 하더군. 지혜는 100합을 버티지도 못할 거요."

음. 컨펌까지 받았다는 건 몰랐다. 역시 내 정보력은 명가와 비교하면 부족했다. 이미 꽤 이름을 날리는 유망주였나 보다.

그렇지만 화산이 아니라 무당이라니. 크게 대단한 녀석은 아니었다. 뜻있는 검수라면 당연히 화산을 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보기에."

나는 고개를 돌려 철두철미 아레나 전체를 쭉 둘러봤다.

면면을 확인하고 일일이 기감을 살폈다.

"우승은 못할 겁니다."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를."

원지혜의 대진 전체를 확인하고 예상되는 승자를 추렸다.

신상은 진작 파악해두었으나 실제로 기감을 살피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물론 내가 예측한 대로 승자가 딱딱 나올 리는 없었다. 몇 수 차이는 뒤집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고려하고도 할 만한 대진이었다. 나름대로 꿀조라고나 할까. 결승까지는 말이다.

"조별 결승은 갈 만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수. 전국체전이 우습소? 지혜의 오성이 뛰어난 건 맞지만 참가자들 수준 역시 만만치 않소. 지혜가 고학년이 되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턱도 없소."

"가주는 원지혜의 성장을 모릅니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성장해봤자 얼마나 성장한다는 말이오?"

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원래 애들은 금방 크는 법입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저는 50합 안에 원지혜가 이기는 것에 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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