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 101. 싸움의 기술(Arts of fighting)(2) >
서열전에서 딱히 이변은 없었다.
경지별로 수준 차이가 확연히 났기 때문에 그랬다.
당연히 이신이 확고한 선두였다. 격이 달랐다. 초절정. 교내에서 가장 강한 학생. 따로 덧붙일 말이 필요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정이삭, 원지혜, 당수련 등의 절정 삼인방이 그 뒤를 뒤쫓고 있었다. 자기들끼리는 엎치락뒤치락 경쟁하는 상황이지만 하수에게는 한순간도 밀리지 않았다.
학년을 가리지 않는 교내 비무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둬 객관적으로도 실력을 증명한 네 명이었다.
재밌는 건 절정 삼인방 중에서는 수준이 가장 떨어지는 당수련이 막상 비무 대회에서는 원지혜를 이기고 16강에 올랐다는 것이다.
경험도 적은 1학년 절정이 16강에 어찌 올랐나 궁금했는데 자기네들끼리 붙은 모양이었다.
하긴 특별반이라고 한들 1학년을 정리할 고학년이 열댓 명도 안 될 리는 없었다. 그래서야 사천공대를 세계 삼대 무공대학이라고 칭하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아마 32강에 오른 것조차 대진에서의 행운이 꽤 따라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평소에는 뒤처졌음에도 중요한 순간에 당수련이 원지혜를 이겼다는 것이 결과다.
당수련은 암왕의 손녀답게 내력은 막대했으나 초식의 완성도는 원지혜에 비해 모자란 편이었다.
그렇다고 원주원가의 금지옥엽인 원지혜가 당수련에 비해 내공이 크게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원지혜가 당수련보다 한 수 이상은 앞선다고 보는 게 맞았다.
실제로 방금의 서열전에서도 채 백 합을 겨루기 전에 원지혜가 당수련을 제압했다.
그럼에도 비무에서의 승자는 당수련이었다.
승부란 그만큼 오묘한 것이다.
단순히 무공의 고하만으로 승패가 결정 나는 것이 아니었다.
각자 익힌 무공 간의 상성부터, 그날의 몸 상태, 장소, 온도, 계절, 시간, 대치하는 방향, 날씨, 수 싸움, 잡기술, 마음가짐, 실전 감각, 행운 따위가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승패가 갈린다.
칼을 맞대어 봐야 안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한 수 차이쯤은 뒤집혀 지는 순간들이 강호에서는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절정 삼인방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일류였다.
그중 미친 듯이 수련에 매진하는 김지원, 김소원 자매가 일류 무리에서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록을 보니 나머지와의 상대 전적이 두드러지게 우세했다.
사실 김소원이 빠르게 성장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짧고 굵은 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남들보다 빠르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죽음이 더 빠르게 그녀를 쫓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절맥으로 빼앗긴 시간이 당장의 오성으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엔 수명과 오성을 바꾸고 싶은 무인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김소원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김지원의 성장이 놀라웠다.
하위권으로 입학했으면서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동생의 영약 값을 위해 하오문과 계약한 이후부터 실력이 쭉 상승세였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절정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남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아마 몇 년 안에 하오문은 두 명의 절정 고수를 얻게 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또 살리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그토록 위대했다.
마음만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것이 비슷하다면 마음이 강한 사람이 앞서나갈 가능성이 가장 컸다.
김지원, 김소원 자매는 삶에 대한 절박함을 그대로 무공에 대한 열정으로 바꾸었다.
애초에 마음이 단단한 아이들이었다는 뜻이다.
그건 분명 대견한 일이었지만 다른 학생들에게도 그 정신력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마음가짐 같은 것은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각자가 각자의 생에 따라 얻고 품어야 하는 것이었다.
승부를 결정짓는 수많은 변수 중에서 단시간에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잡기술.
이른바, 싸움의 기술이었다.
그건 무공 본연의 폭력에 밀접한 잡기였다.
아무리 도(道)로 포장해봐야 무공은 본질적으로 세련된 살인 기술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무림인들은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지 않았다.
무도(武道)를 설파하고, 고수를 우상화했다. 생명을 걸지 않고 치르는 비무를 전 세계에 중계했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도 무공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자체로 괜찮은 시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야만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는 무공 본연의 폭력이 무도보다 우선이었다.
여전히 아프리카에서는 채 이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년병들이 내전에 동원되었고.
중동에서는 마공을 익힌 어린아이들이 세뇌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불사르기도 했다.
살초(殺招)와 살초를 주고받고 거기에 돈을 거는 무규칙 비무대회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더 높은 경지를 이룩할 수 있는 상승 무공은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살아남아 눈앞의 상대를 죽이거나 제압하는 것이 더 절실했다.
그리하여 공부로서의 무공 대신 실전에 적합한 초식이 연구되었다.
고수가 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편법. 당장의 승리를 위한 잡기.
그러나 그만큼 그 잡기들이 비무대회에서는 아주 유용할 것이다.
특히 아직 실전을 경험한 무인이 적은 국내 대학 비무대회라면 더더욱.
그 중 비무대회를 위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단기간에 많은 것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래서 딱 두 가지 잡기만 엄선했다. 익히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 전국체전을 준비하는 네 명은 확실하게 숙지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해라."
"잡……네?"
"대답."
"아, 알겠습니다!"
나는 학생들을 앉혀놓고 검을 들고 연무장에 올랐다.
"첫 번째로 가르칠 것은 환검(幻劍)이다."
"환검이요?"
"환검이 잡기인가?"
"차례대로 설명할 테니 일단 보도록."
검을 휘둘렀다.
기를 담지 않고, 학생들의 눈을 속이기에 적합한 속도로, 직선과 곡선을 섞어서 검로를 그렸다.
그러다 학생들이 앉아있는 방향으로 허공에 찔렀다.
바로 이어서 베는 동작의 환검도 보여주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환검이다. 중세 중국부터 이어져 온 꽤 유서 깊은 잡기술이지."
"……유서 깊은 잡기술?"
"좋은데요?"
학생들이 하나 둘 떠들었다.
"그런데 이 전통적 환검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뭘까?"
"……단점이요?"
"군더더기도 없고 깔끔하고 좋던데요. 완벽하지 않았어요?"
학생들은 단점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일부러 시연하기도 했다.
"그럼 이렇게 묻겠다. 방금 내 검이 몇 개로 보였지?"
"전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는데요. 다섯 개쯤?"
"다섯 개요."
"세 개 아니었어?"
학생들이 각자 다른 숫자로 답했다.
나는 구석에 앉아 진지한 눈빛으로 집중하고 있는 이신에게 물었다.
"이신. 너는 몇 개로 보였나?"
"전……, 한 개요."
"그래."
이게 전통적인 환검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이 옛 환검은 무인들의 평균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뒤떨어졌을 때 개발된 방법이다. 모든 무서가 비급이고, 이류도 고수라 부르던 시절에 말이지."
그건 바로 수법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그게 왜요? 전통이 있으면 좋은 거 아니에요?"
"이 수법은 단순히 착시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문제가 뭐겠나?"
"딱히……. 저한테는 세 개였고 이신한테는 하나. 아."
"그래. 전통적인 환검으로는 동체 시력이 부족한 하수나 속일 수 있다."
시장통에서 이류 낭인과 동네 흑도가 싸우던 때는 필살의 비기가 되겠지만, 고수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법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엔 고수가 드물었으니 환검은 유용한 한 수가 될 수 있었다.
"절정부터 참가하는 전국체전에서는 안 통할 거라는 얘기지."
생활 체육으로도 무공을 익히는 현대에서는 어린애들 장난이 아니고서야 의미가 없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이게 그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현대의 환검이다."
나는 별 사전 동작 없이 허공을 빠르게 다섯 번 찔렀다. 그리고 검을 다시 거뒀다.
슈슈슈슈슉!
"……어?"
"몇 개로 보이지?"
"다섯 개요."
"……다섯 개."
"그래. 다섯 개다. 일류에게도 초절정에게도, 똑같이 다섯 개지."
학생들은 눈까지 끔뻑이고 비비곤 했다. 하긴 처음 보면 신기할 수도 있었다.
"이게 현대의 환검. '기 거품'이다."
학생들을 향해 검기 다섯 줄기가 느릿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진작에 납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형성된 환검은 남아있었다.
"원리는 간단하다. 검기를 내부까지 온전하게 형성하지 않고 껍데기만 갖춘 상태에서 그 자리에 남기는 거다. 발생한 검기는 관성을 받고 원래 방향으로 날아갈 테지. 설령 적중한다고 해도 살상력은 없다."
나는 다시 검을 출수했다. 그리고 검기를 담아 다섯 개의 환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찔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제대로 된 검기를 갖춰 초식을 시전하면 된다."
학생들의 시선에서는 거의 유사한 형태의 검기 여섯 개로 보일 터. 그러나 그 중 하나만이 명백하게 살상력을 가진 진검이었다.
학생들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을 줬다.
"질문 있습니다."
원지혜가 손을 들었다.
"그래. 과대."
"검기를 남겨두라고 하셨는데 그럼 어차피 환검을 남기는 횟수와 동일한 숫자의 움직임을 취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굳이 환검을 사용해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있나요?"
"일단 외형만 갖춘 검기를 사용하는 것은 내력 분배 측면에서 상대보다 우위를 가져가게 해준다. 무엇이 진검인지 모르는 이상 상대는 환초에게도 내력을 낭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음……. 그건 그렇겠네요."
"그리고 외형만 갖춘 검기를 짧게 날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굳이 초식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봐라."
나는 팔을 거의 다 뻗은 상태에서 손목만 까딱여서 검기를 뿜었다.
다섯 줄기의 검기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까는 일부러 느리게 한 거였고 이번엔 정상적인 검초의 속도로 날아갔다. 상대하는 처지에서 위협을 느낄 수 있게.
"……헐."
"조금만 연습하면 너희에게도 어려운 일이 아닐 거다."
물론 나만큼 완벽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상대도 비슷한 수준의 또래일 테니까.
모르면 한 번은 통한다. 그래서 잡기술이었다.
"검기를 제대로 완성하는 게 아니라 기로 된 거품을 짓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금방일 거다. 사실 너희는 이미 다 기 거품을 만들어봤다."
"저희가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아니. 왜냐하면 온전한 검기를 사용할 수 있기 전에 검기를 수련하는 과정에서 나오곤 하는 그 불안정한, 검기 비슷한 무언가. 그게 바로 기 거품이기 때문이다."
"아."
기술적으로 따지면 엄연하게 검기보다 훨씬 쉬운 수법이었다.
그게 3세계 뒷골목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더라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체화된 검기 형성 과정을 의도적으로 다시 무너뜨리는 것이 낯설고 헷갈릴 수는 있으나 어렵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제 막 검기를 형성한 수준의 무인에게는 위험한 수련법이었다. 기껏 체득한 검기 감각이 흐트러질 수 있으니. 그러나 우리 학생 중에 그 정도 하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각자 생각에 잠기거나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자율무공학부 특유의 자유로운 학풍이었다.
"저도 질문 있어요!"
"……도 조교, 자넨 학생이 아니잖아."
도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학생들도 궁금할 거예요!"
"……그래. 그럼 물어보도록."
"사형, 아니 교수님이 쓰는 무공 중에서도 환검이 있지 않나요? 그 막 꽃잎 날리고……. 그건 오늘 들은 두 가지 환검 모두 해당 안 되는 거 같은데요."
"그러게요. 화산은 원래 환검으로 유명하잖아요? 이십사수매화검법이라든지."
원지혜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나의 질문을 들은 다른 학생들도 궁금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환의 묘리를 담은 기공이다. 기 거품을 쓰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가 모두 실초다. 내공 소모도 환검에 비할 바가 아니고. 그걸 굳이 환검으로 칭하자면 도 조교의 말대로 제3의 방식이라고 해야겠지."
나는 검을 가볍게 좌로 휘둘렀다. 목검으로부터 검기가 얇게 퍼져 나가더니 어느 순간 찢어지면서 수십 송이의 꽃으로 화했다.
매화였다.
매화는 느릿하게 회전하면서 공중을 떠돌았다.
"와. 이쁘다……."
실전에서 강기공으로 사용하려면 막대한 내력이 소모되겠으나 검기의 형태로 사용하는 것은 내게도 별 부담이 가지 않았다.
대신 기 거품 따위와는 조형의 난이도가 한참 달랐다.
"만져봐도 돼요, 이거?"
"손이 날아가고 싶으면 그래도 되지."
"……."
"흠. 저 꽃을 봐라. 가장 작은 거."
대부분의 매화는 하늘로 날아가다가 어느 순간 흩어졌지만 가장 작은 한 송이는 연무장에 구석에 내려앉았다.
매화는 콘크리트를 갈아 그 자리에 그대로 꽃 모양 흔적을 새겼다.
최수아가 감탄했다.
"와. 개섬세해. 쩔어."
"……거기에 개가 꼭 붙어야 하나?"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됐다. 뭐. 아무튼 환검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다. 이제 한 명씩 실제로 해보자. 더 자세한 건 보면서 덧붙이겠다."
용법과 발상이 그럴듯한 거지 기술적 난이도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잡기술이란 게 다 그렇다.
취하기도 쉽고 대신 상대가 파악하기도 쉽다. 그러나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날 해가 지기 전에 학생들 모두가 기 거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학생마다 만들어낸 개수의 차이도 있었고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자연스러워질지는 모르겠다만 여기부터는 각자 노력 여하에 달린 부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