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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협객의 사회-101화 (101/120)

< 101 : 100. 싸움의 기술(Arts of fighting)(1) >

"일정은?"

"내년 봄이 오기 전에는 결론을 짓는 게 목표입니다. 날 풀릴 때까지 끌어 봐야 다른 세력이 끼어들 기회를 줄 뿐이니까요. 다만 지금 당장 상황에 개입하지는 않을 겁니다."

"왜지?"

"아직은 아지만이 그렇게 급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바로 이해했다.

"고래들 싸움에 등 터질 때가 되어서야 새우에게 손을 내밀겠다?"

"그렇지요."

제갈수가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듯 웃었다.

현대 무림에서는 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제갈세가는 남의 잔치에 칼자루 쥐고 끼어드는 입장이었다. 모든 행보가 비즈니스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약자를 돕는 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었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장 값이 비싸지는 순간까지 기다리는 건 장사치로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소위 명문 정파라는 것들마저 대개 이랬다. 거대기업과 거대 문파는 크게 다른 말이 아니었다.

특히 제갈세가 놈들은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가장 먼저 기업화한 무림세가였으니 말이다.

물론 아지만 측에도 좋은 일이긴 했다. 그들이 무력 지원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윈윈(win-win)이었다.

다만 그 이득 비율을 한쪽이 양아치처럼 가져가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제갈이 낀 일에서는 대개 제갈이 많은 부분을 챙긴다.

"대략적인 임무 개시일은 언제로 생각하고 있지?"

"아마 12월 말이 될 겁니다. 상황이 급변한다면 일정이 당겨질 수도 있습니다만."

"12월 말. 일단 알았다."

"다음번엔 자세한 작전 개요를 가지고 오도록 하지요."

제갈수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서류를 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뒤돌아 나가는 그를 불러세웠다.

"선풍사."

"네?"

제갈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슬쩍 돌렸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검룡패 말이다."

"검룡패 말씀이십니까?"

"의뭉 떨지 마라. 백지 계약서와 거래했던 검룡패, 어디서 얻은 거지?"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지셨는지."

나는 제갈수를 노려봤다. 그런다 한들 섭선의 고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혹시 가짜였습니까? 그렇다고 한들 계약을 물릴 수는 없습니다만."

"아니, 물건은 진짜였다. 출처가 궁금할 뿐이다."

"흠."

제갈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라면 물건의 출처는 비밀이지만, 대협에게는 특별히 말해드리겠습니다. 패는 예전부터 제갈세가에 있던 물건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무림 초대 사장님의 물건이었지요."

고무림 초대 사장. 즉 전대의 '천뇌(天腦)'를 일컫는 말이었다.

진작 타천한 전대의 고수. 스승님과 연이 있을 법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내게 가져왔다?"

"이제야 필요성이 생겼으니까요."

"그렇군."

"질문은 그게 끝입니까?"

"혹시 추가로 발견한 검룡패는 없나?"

"네, 하지만 곧 찾게 될 겁니다. 이번 일을 마치고도 대협이 살아있으시다면요."

제갈수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대협의 가치가 점점 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일까지 무사히 마치신다면 온 강호가 알게 될 겁니다. 비고 구석에 굴러다니고 있던 낡은 패가 보기 드문 귀물이었다는 것을요."

"……과연."

머리로 먹고사는 세가의 장로답게 상황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래. 7년의 내공과 그 몇 배의 내공은 확실히 달랐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었다.

당초아로부터 받은 검룡패는 그 첫 단추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덕분에 호신강기와 거대기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초고수 간의 교전에서는 생사를 가를 만큼 중요한 부분이었다.

내가 대외적으로 활약할수록 검룡패의 가치는 더 오를 것이다. 7년 치의 내공에 익숙해지는 동안은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이었다.

7년 내공의 반쪽짜리 화경과 거대기공을 구사하는 최상위권 화경의 가치는 확연히 다를 테니.

내 능력에 따라 검룡패의 가치도 자연스럽게 변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초아는 가장 비싼 값을 치르고 나를 고용한 셈이었다. 화경 7년산과 계약했으니. 여러모로 내게는 은인이었다.

거의 동시에 계약했음에도 고무림은 달랐다. 백지 계약서를 통해 차례를 미뤄 일월신교보다도 나를 싸게 고용한 셈.

만약 내가 당문에서 독괴와 싸우다 죽었다면 어차피 검룡패의 가치는 돌 조각과 다를 게 없으니 제갈세가 입장에서는 잃을 거 없는 투자였던 것이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똑똑한 건 알겠는데 괜히 싫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명성이었다.

아직은 누군지 모를, 남은 검룡패의 주인들 역시 언젠가 그 패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내가 먼저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날 필요하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대협께선 그저 기다리시면 됩니다. 검룡패의 주인이 대협을 먼저 찾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저희가 패를 찾겠습니다."

"또 이런 뻔뻔한 계약을 하기 위해서 말이지."

"네. 낭인 중에 대협 같은 매물은 귀하니까요."

"오히려 알기 쉬워서 좋군."

상대가 계산적으로 나오는 만큼 되려 관계가 깔끔했다. 비즈니스에는 비즈니스로 대하면 된다.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신가요?"

"그래."

"그렇다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 자주 오지는 말고. 꼭 필요할 때만 오도록."

"하하. 그럼 이만."

제갈수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문을 열고 가볍게 보법을 밟아 사라졌다.

문이 채 닫기기도 전에 이미 먼 거리에 있었다.

단거리 보법에서 중장거리 경공으로의 빠른 전환이 인상적이었다.

그 뒷모습이 하늘을 나는 새와 같았다. 천하에서 빠르기로 손에 꼽는 제갈가의 비전 경공인듯 싶었다. 어떻게 한 수 얻어 배웠으면 좋겠는데.

"겨울이라."

나는 달력을 보며 일정을 생각했다. 시간은 꽤 남았다.

자칫했다가는 제갈세가를 위한 제물로 죽을 수도 있었다. 만반의 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괴의 난이나 일월마군 사건, 천산논검제 등에 비하더라도 그 위험도가 월등히 높았다. 다수의 화경급 고수가 부딪치는 격전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화경 중에서는 강한 편이라고 해도 결국은 일개 화경이었다. 동격의 고수를 동시에 상대하면 승리는커녕 생사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전장에 함께 뛰어들 전력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늘 하던 것을 계속할 뿐이었다.

나는 검을 들고 방을 나섰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새벽 수련을 시작했다.

십만대산에서 얻어온 화두가 많이 남아있었다. 지금은 휘두르는 검이 내 생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

새벽 수련을 마치고 찬물로 샤워하며 달아오른 몸을 식혔다.

치이익.

한껏 뜨거워진 몸에 찬 물이 닿자 김이 피어올랐다.

눈을 감고 찬물을 즐기며 검룡패에 대한 생각을 했다.

첫 번째 패는 화산파 무무문에서 발견했다. 스승님의 유품이었다.

두 번째는 사천당문에 있었다. 당초아가 조부인 암왕으로부터 얻었다.

세 번째는 제갈세가. 당대 천뇌의 유산이라고 했다.

네 번째는 천마신교의 비고. 일월신교 측에서 천마신교에 로비를 하여 받아온 물건이었다.

전부 일찍이 스승님과 교분을 나눈 일대 종사가 있던 세력이었다.

나, 암왕, 전대의 천뇌와 천마.

세력보다는 사람에게 주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다른 패들의 위치도 어느 정도는 예상해볼 수 있었다.

물론 완벽하게 특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스승님과 깊은 교분을 나눈 고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숫자를 유의미하게 추릴 수 있었다.

백두의선, 전대 무림맹주, 숭산의 큰 스님, 아퀼라, 검후, 서소 등등.

이번 일을 끝내고 나면 내년 수업 개강 전에 그들을 만나러 전 세계를 일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나를 만나줄 지는 모르겠다만 시도할 가치는 있었다.

알아서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굳이 생각나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

다음 날 독접관으로 출강했다.

자율무공학부에 교수도 몇 명 충원된 참이라 일단은 한 과목만 맡으면 됐다.

<삼재종합공 II> 수업이었다.

참고로 내가 짠 커리큘럼 상 삼재종합공 수업은 4학년 2학기 <삼재종합공 VIII>까지 이어진다. 학기마다 한 과목이 있는 셈이었다.

"다들 오랜만이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나는 오랜만에 보는 자율무공학부 학생들을 한눈에 살폈다. 열셋.

자율무공학부 1학년 열둘에 청강생인 김소원까지 다 있었다.

눈동자들이 조금이나마 깊어져 있었고 몸도 더 단단해져 있었다. 다들 내ㆍ외공을 불문하고 전반적으로 나름의 성과를 일군 듯했다.

정진하는 학생들을 보니 교육자로서 의욕이 고무되었다.

"조만간 전국체전이 있다고 들었다. 이신, 정이삭, 원지혜, 당수련이 지역 대표 선발전에 참가한다고 봤는데. 맞나?"

"네, 교수님!"

"당분간은 선발전 및 전국체전 준비를 겸하여 비무 위주로 무공 수업을 진행하겠다. 이번에 체전에 참가하지 않는 학생들도 후일을 기약하여 집중할 수 있도록."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오랜만이니까."

나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숙련된 조교가 앞으로 나왔다. 도하나가 묵직한 도를 등 뒤에서 꺼내 들었다. 살벌하게 기세를 드러냈다.

학생들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애들이 학교에서 수련하는 동안 도하나 역시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철저하게 수련하면서 천산논검제까지 견식했다.

학생들과 차이는 이전보다 벌어졌다고 해도 좋았다.

"실력 테스트부터 다시 하겠다."

오전 동안 학생들은 도하나와의 일대일 비무, 나와의 검진을 활용한 육대일 지도 비무를 치렀다.

이후에는 학생들끼리의 서열전까지 연속적으로 치르는 중이었다.

최소 3회에서 최대 5회 정도 연속해서 휴식하지 않고 싸웠다.

실전에서는 흔치 않게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현장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싸울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후……."

"죽겠다……."

일련의 비무를 마친 학생들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은 약관의 아이들에게는 체력적으로 부담되는 과정이었다.

의도했다. 체력은 싸움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경주 수련회에서 수중 비무를 시켰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아직 서열전을 치르는 아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열전 마지막 차례, 이신과 정이삭의 대결이었다. 둘은 내공없이 초식으로만 겨루고 있었다. 내공을 사용하는 대결은 의미가 없기에 이신이 양보한 그림이었다.

외공만으로 겨루고 있음에도 둘의 몸놀림이 무겁지 않았다.

확실히 올해 초에 비하면 외공과 체력 측면에서 상당히 성장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삼재종합공도 꽤 숙련된 모습이었다.

"스터디는 3회차에 들어섰다고?"

"네. 심법과 보법은 아직 2회차 종반입니다만 나머지는 다 3회차에 진입했어요."

과대표 원지혜가 그동안의 성과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무서를 가볍게 몇 번 회독했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무공을 낱낱이 해체하고 분석하고 재구성하면서 깊게 여러 번 다시 익히는 것.

무공을 통째로 다시 익히는 것과 다를 게 없는 난이도였다.

회차가 늘어날수록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이 보이게 된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쉬워지는 게 아니라 어려워질 때도 있다.

초식의 의도와 순서 배치. 연계 과정에서의 역학. 시간과 거리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변초에 대한 이해.

무공을 체화한 이후에 비로소 드러나는 날카로움과 번뜩임. 의식적인 수 싸움과 무의식적인 반응.

종합공 특유의 폭넓은 대응 능력과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 등.

대다수 무인들은 입문공으로 쓰고 있으나 삼재공은 내재된 심득의 깊이가 상당한 상승 무공이었다. 최소한 삼재검신이 정립한 삼재종합공은 그러했다.

입문이 쉽고 초반 성취가 빠르다고 하나 대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만큼 삼재종합공을 입문공으로만 쓰고 다른 상승 무공으로 넘어가는 것이 효율적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깊이 있게 익혔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절대로 다른 무공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화산에 수많은 상승 무공들이 존재함에도 삼재종합공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 대가로서 장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과연 벌써 종합공으로써의 삼재공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활용하는 몇몇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완성도가 아직 모자랐다.

별개의 무공이 아닌 유기적인 형태로 조화된 복합 무공. 그것이야말로 삼재종합공의 가장 특출난 장점이었다.

전반적으로 학생들은 '무공으로서의 삼재공'은 괜찮은 수준까지 익힌 모습이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었으나 병아리치곤 꽤 의젓해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직 어린 학생들이 실전 없이 무공을 수련해봐야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있었다. 책에는 없는 것들.

전국체전을 대비한 몇 주간의 특별수업에서는 그걸 다루려고 한다.

이제부터 내가 가르치려는 것은 '싸움 기술로서의 종합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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