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 99. 백지(Blank paper) >
김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우리는 천마신교 쪽에서 준비해둔 리무진을 타고 사천시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복귀 사실을 알려야 할 몇몇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천공대 이사장 당초아부터 시작해서 자율무공학부 과대인 원지혜, 개방 후개 소걸과 일월신교 주교에게도.
우웅.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진동했다. 대부분이 빠르게 답장했다.
소걸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입국하기 며칠 전에 한국을 떠났다고 했다. 아쉬운 일이었다.
"여기서 내리지."
사천공대 정문쯤에서 리무진을 멈춰 세웠다. 천마신교 교도인 운전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조용히 돌아갔다.
어느새 시월 중순이었다.
학교는 2학기 중간고사를 치르는 중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정문 옆 대형 게시판에 붙어있는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2022년 사천공대 추계 비무대회 수상자]
[우승 ─ '해왕환생' 이신(자율무공, 1학년)]
[준우승 ─ '남해검랑' 조강현(검과, 4학년)]
[4강]
[8강]
[16강 ─ '투희' 당수련(자율무공, 1학년)]
[32강 ─ ……원지혜, 정이삭(이상 자율무공, 1학년)]
"흠."
내가 십만대산에서 논검을 하고 있는 동안 사천공대에서도 비무 대회가 치러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우승은 이신이었다.
약관을 조금 넘은 나이대에서 초절정은 압도적이라고 해도 될 만한 경지였다. 대학 비무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외였던 건 16강과 32강에 입선한 우리과 학생들이었다.
강호에서는 40대 이하를 후기지수라고 칭한다. 그중에서도 20대 초반은 신체가 나날이 완숙해지면서 무공에 있어서도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는 시기였다.
약관의 절정 고수는 천재라고 불리지만, 20대 중반의 절정 고수는 수재일 뿐이었다. 명문대 졸업반에서 절정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자율무공학부가 생기기 전에도 사천공대는 국내 최고의 무공대학이었다.
황금 세대라고 불리는 이번 학번에 수재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전 학번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스물과 스물네다섯.
그 고작 몇 년의 격차에서 생겨나는 신체 발달과 초식 숙련도, 내력과 경험의 차이는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신입생이 고학년과 겨루어 비무대회 본선의 한 자리를 쟁취해낸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포스터 가장 밑에는 다음 대회를 홍보하는 문구가 있었다.
[위 입선자들은 전국체전 대학부 비무 부문 사천시 대표 선발전 참가 자격을 얻게 됨]
전국체전이라.
사실 그렇게 중요한 대회는 아니었다.
자율무공학과 학생들 대부분은 고등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아이들이다. 이신은 경지를 한 급간 숨기고도 우승을 차지했고. 그나마 고등부는 입시에 있어 중요하기는 했다.
대학부, 일반부로 갈수록 전국체전의 중요도는 더욱 줄어들었다.
당장 현역으로 대문파 입문을 준비하거나, 이미 문파에 자리를 잡고 업무를 뛰어야 할 시기에 전국체전에 집중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부는 대대로 사천시가 압도적인 결과를 냈던 대회였다. 국내 최고의 무공대학이 있었기에 그랬다.
사천공대 교내 비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는 것 자체가 당해 전국 대학부 후기지수 전체에서 수위를 다툰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전통이 있고 근본이 있는 대회인 것은 확실했다. 경험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1학년 때 참가할 수 있다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넓고 동년배에 강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테니.
이신은 상관없고 당수련, 원지혜, 정이삭은 준비를 좀 철저하게 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발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준비한다고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외에는 흥미로운 게시물이 없었다.
우리는 교직원 숙소 쪽으로 경공을 밟았다.
"왕!"
"밤이다. 짖지 마라."
"왕……."
달려온 먼지가 조용히 몸을 낮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한 달 만에 왔는데도 멀리서부터 알아보다니. 여전히 기감이 뛰어난 녀석이었다.
최수아가 여전히 잘 돌봐주고 있는지 털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긴 이런 영물이 있는데 전국체전 우승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어린 나이(만 3세 추정)에 이미 초절정인 천재가 있는데. 후기지수의 영역을 인외까지 넓히면 먼지가 단연코 선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먼지의 콧잔등을 몇 번 쓰다듬어주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보자."
"왕."
먼지는 다시 제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다시 경공을 밟아 머지않아 숙소에 도착했다.
"내일 봐요, 사형."
"그래."
도하나가 웃으며 옆방으로 들어갔다.
숙소에 먼지 따윈 쌓여있지 않았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청소를 했던 모양이다.
대충 씻고 누웠다.
옆방에서 도하나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바람 소리, 벌레 소리 따위가 화경의 민감한 귀로 들어왔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흘려들으며 잠에 빠졌다. 간만에 긴장을 완전히 푼 숙면이었다.
***
챙!
눈을 뜨며 검을 뽑아들었다. 자하검 레플리카였다.
자는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바깥의 기척을 살폈기에 몸이 움직였다. 긴장을 아무리 풀어도 몸은 반응했다.
칼까지 빼 든 이유는 하나였다. 상대가 만만치 않은 고수였기 때문이다.
화경이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창밖이 어두웠다. 아직 밤이라는 뜻이었다.
짧은 수면이었지만 피로는 거의 없었다. 불청객을 상대하기에 충분했다.
거의 들리지 않는 발소리. 이어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오랜만입니다, 대협. 입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군."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희도 꽤 긴급한 일이라서요. 확정이 필요해 무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반가운 손님으 아니었다. 그러나 모르는 자도 아니었다.
딸깍.
끼이익.
나는 검을 집어넣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옆집 문도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도하나였다.
도하나는 이미 무복을 입은 채로 도를 꺼내 들고 있었다.
"그냥 자라."
나는 도하나에게 말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은 도하나가 피워올린 살벌한 도기를 보면서도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도기가 자신을 범하지 못함을 알았기에 나오는 여유였다.
도하나는 곧장 도를 회수하고 머리를 몇 번 긁적이더니 나와 밤손님을 번갈아 몇 번 쳐다보았다.
"우리 또 외국 가요?"
"그건 이야기를 들어봐야 알겠지."
그때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그건 제가 미리 말씀드리죠. 갑니다."
"……."
"멀리요?"
"지구 반의 반 바퀴 정도?"
밤손님은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서류를 든 채 서 있었다.
[천급 낭인 고용 계약서]
익숙한 서류였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반쯤 채워진 계약서 아래에 이미 내 서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 쓰여 있는 것은 난생처음 보는 것인데도.
사내의 이름은 제갈수. 별호는 선풍사였다.
고무림 블랙의 이사. 제갈세가의 장로. 더불어 제갈세가 한국 분가의 가주였다.
검룡패 조각을 선지급 받기 위해 서명했던 백지 계약서가 지금 이 순간 돌아왔다.
원래 빌릴 때는 좋아도 갚을 때는 늘 씁쓸한 법이다. 그게 아무리 정당한 계약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빚은 갚는 것이 도리였다. 그게 은혜이든 원수든.
"……들어오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제갈수는 섭선도 없으면서 태연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거기 대충 앉아라. 뭐라도 마실 건가?"
"주신다면 감사하죠. 뭐가 있습니까?"
"보자……."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유통기한 20일 지난 당 씨에게 산 요구르트랑 깨끗하고 맑은 수돗물 중에 뭐가 좋지?"
"……독이랑 물 중에서는 물이 좋지 않을까요?"
"나도 동의한다."
나는 수돗물 두 잔을 가지고 와서 제갈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내 것만 삼매진화로 끓이고 믹스커피를 탔다.
보글보글.
간만에 맡는 커피 향이었다. 싸구려였지만 충분했다. 근 한 달간 차만 마시는 나날이었으니.
"커피……."
제갈수는 물끄러미 내 잔과 자산의 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 뭐. 커피 믹스는 제공할 수 있다. 알아서 타 먹든가,"
물을 끓일 만큼 뜨거운 삼매진화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제갈수는 잠깐 생각하다가 씩 웃더니 잔을 들고 수돗물을 벌컥벌컥 단숨에 마셨다.
"저는 수돗물도 좋습니다. 계약 얘기나 하죠."
"……그러지."
나는 제갈수가 내민 낭인 계약서를 받아 읽었다. 천급 낭인 계약서. 밑에 내 서명. 그때 그게 맞았다.
"UAE(United Arab Emirates)? 혹시 종교 분쟁인가? 그런 거라면 질색인데. 최근에 질리도록 엮였거든."
"아닙니다, 아랍에미리트는 중동에서 종교적으로 꽤 자유로운 편이기도 하고요. 그것보다는 다른 것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다른 거라니? 또 유명한 게 있나? 글쎄, 석유?"
"맞습니다. 석유. 계속 읽어보시죠."
나는 계약서를 쭉 읽었다.
[아랍에미리트 토후국 아지만에서 초대형 규모의 유전 발견]
[토후국 샤르자, 푸자이라와 삼국 접경 지대]
[유전 소유권을 둔 격렬한 분쟁 예상]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중동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었다.
"아랍에미리트 연합 내에서 유전 소유권을 둔 분쟁이라고? 얘들은 어련히 잘 나눠서 쓰지 않나? 애초에 대부분이 아부다비이기도 하고."
"이번엔 유전 규모가 워낙 커서 연합 내에서도 주도권을 내어주기 아쉬운 거겠지요. 각 토후국 뒤에 이미 강대국들이 바람을 넣는 중입니다."
"얼마나 크길래?"
"밑에 다 나와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보시죠."
[고농도 공청원유(空靑原油, Crude azoth) 매장량 칠십만 배럴 추정. 정제 후 백 년간 최대 오천 리터의 공청석유(空靑石油, Azoth oil) 생산 예상]
"……오천 리터?"
"무학에 있어서 내공이 전부는 아닙니다만, 화경의 내공을 보통 두 갑자로 계산하긴 하죠. 아, 물론 대협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잘 정제된 공청석유가 일반적으로 한 갑자의 내공 증진을 보장해준다고 가정했을 때."
"일 년에 오십 리터면 화경급 스물다섯을 찍어내는 양이로군. 검증된 후기지수에게만 제공하면 그 두 배도 가능할 거고."
"그렇습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대문파들도 정사를 막론하고 눈이 돌아갈 만한 숫자죠."
나는 서류를 끝까지 읽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건 뭐지? 유전을 얻어달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겠지?"
"물론이죠. 아직 관련 자료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인들이 UAE로 몰리고 있어요. 공식 발표 이후에는 더 심해지겠죠. 각 국가의 앞잡이들부터 떡고물 뜯어 먹으러 온 하이에나들까지."
"그 상황에서 단독으로 유전을 쟁취하려면 최소 현경이어야 할 거다. 물론 다른 현경 보유국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만."
"그렇습니다."
제갈수는 빙긋 웃었다.
"이미 토후국 샤르자와 푸자이라는 낭인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그런데 면면들이 꽤 화려하더군요. 원래 낭인으로 뛰지 않던 자들이 꽤 있습니다. 남궁이나 모용이라든가. 뒤에는 뭐 안 봐도 강대한 세력이 있을 거고요. 원래도 아지만에 비해 강한 토후국들인 이상 둘 중에서 승자가 나오겠죠."
"그래서?"
"저희도 낄 겁니다."
"어느 쪽에? 누구로? 제갈세가로서 아니면 고무림으로?"
"둘 다 아닙니다."
"……그럼?"
"토후국 아지만에 보내는 지원 낭인들로요. 그 대표는 바스타드일 거고요."
"……샤르자와 푸자이라 중에서 승자가 나올 거라고 하지 않았나?"
"어느 쪽이 이기든 아지만 역시 유전에 대한 권리를 분배받겠죠. 유전이 아지만에 위치한 만큼 정당한 권리는 사실 아지만에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 부분을 노릴 겁니다. 강대국과 대문파가 보낸 대리 낭인들과 각축전을 벌이는 대신."
"……대신 나는 죽어나겠군. 아지만이 최소한의 저력은 보이도록 힘 써야 할 거고."
"그렇습니다. 천급 의뢰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백지로 계약된."
제갈수는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산 넘어 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