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 98. 시성(canonization)(2) >
행렬은 머지않아 천산 정상에 도착했다.
전원이 경지가 높은 무인이었던 만큼 등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산봉.
불과 사흘 전에 양일에 걸쳐 논검제가 열렸던 장소였다.
그러나 지금 천산봉의 모습은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화경 셋과의 연전을 거치며 찢기고 파헤쳐진 땅은 어느새 고르게 복구된 채였다.
교도들이 고생을 좀 했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벌판 중심에 자리한 거대한 제단이었다.
화려한 의복과는 달리 제단은 무채색에 단조로운 형식이었다. 그러나 무게감이 덜하지는 않았다. 크기와 높이만으로 느껴지는 위엄이 있었다.
교도들은 제단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이쪽으로."
혈마군은 나를 제단 옆에 세워진 간이 막사로 이끌었다.
"맙소사."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했다.
그건 제례용 의복이라기보다는 여성용 드레스에 가까웠다. 풍성했다.
다채로운 색을 가졌고 밑이 넓었다. 워낙 겹겹으로 이루어져 있어 혼자서 제대로 입을 수도 없는 옷이었다.
"……설마 이게 내가 입을 옷인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에이. 위옥을 위해 준비된 옷이겠지. 이건 누가 봐도 여성용이잖아.
헌데 혈마군은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잠시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서 환복하시지요. 시종들이 성인을 도울 겁니다."
그래. 알겠는데 그 눈빛은 뭔데. 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데.
나는 참을 인 자를 마음속으로 두어 번 새겼다.
그래, 어차피 십만대산에서의 마지막 행사였다.
파천혼원단도 받았고 파천신공이라는 절세 비급의 중후반부까지 접할 수 있었다. 호위까지 받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화경 셋과 수준 높은 비무도 치를 수 있었다.
거기에 초대 천마로부터 얻은 심득까지 고려하면 받은 것이 받았다.
받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법이다. 그것은 정사를 막론하고 지켜야 하는 도리였다.
이런 옷 좀 입고 시성식 한번 치러주는 것으로 마교도들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저 입꼬리가 올라간 혈마군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을 뿐이다.
본인도 크게 다르지 않은 행색을 하고선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나는 절로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천천히 펴고는 시종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영광입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시종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 시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럼 밖에서 뵙겠습니다."
혈마군은 끝까지 쓸데없이 밝은 표정으로 막사를 나섰다.
막사 중앙에 침울하게 서 있자 시종들이 조심스럽게 내 옷을 벗기고 한 겹씩 제례복을 입혔다.
팔을 올리라면 올렸고, 다리를 들라면 들었다.
열 명이 넘는 시종이 환복을 돕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내 계산으로는 천 쪼가리가 아홉 겹은 되는 것 같았다. 움직임에 방해가 될 지경이었다.
게다가 뒤가 얼마나 길었는지 사람 다섯은 편하게 덮고 잘 수 있을 만큼 옷자락이 길게 늘어졌다.
이 정도 천이면 시성식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에게 옷을 한 벌씩 지어줄 수 있겠는데.
차 한잔할 시간이 지나서야 환복이 끝났다.
"끝났습니다!"
"설마 다른 절차가 더 있나? 따로 화장을 한다든가?"
나는 시종 대표를 노려보며 물었다. 시종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평교도 이상의 직책을 가진 자들이었지만 말이다.
"있습니다만……."
"……."
"……성인께서는 피부가 몹시 희고 이목구비의 대비가 뚜렷하여 딱히 필요하지 않을 듯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환골탈태를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면 되는 건가?"
"그렇습니다."
"알았다. 나가지."
시종 대표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막사 입구를 열어젖혔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시종 몇 명이 옷의 뒷자락을 드는 기척이 났다.
그럴 거면 그냥 짧게 만들지 그랬어.
막사를 나오자마자 제단 좌우로 도열한 교도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교도들은 곧 고개를 숙였다.
논검제 당시에 있던 자들의 절반도 안 되는 숫자였다.
개중 익숙한 얼굴들이 꽤 보였다.
궁리당 한 노야, 삼연전을 치렀던 화경 삼인방, 그리고 소천마.
다들 나한테 뭐라고 할 옷차림도 아니군.
제단에 가까이 서 있는 자들은 대개 금강마군만큼이나 화려한 제례복을 입고 있었다.
그 뒤에는 그래도 단정한 복색을 한 자들이 서 있었다. 평범한 천마신교의 사제복이었다.
대개는 무인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도 간간이 있었다.
무인이고 아니고를 막론하고 교내에서 직위가 높은 자들만 모인 모양이다.
고수가 아닌 자들은 모두 어느 정도 종교적 성취를 이룬 듯 평화로운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낯빛에 드러나는 약간의 흥분을 숨기지는 못했다.
1호, 2호와 도하나도 있었다. 일월파 대표로서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이었다.
저벅.
나는 걸음을 옮겼다. 제단이 시작되는 곳으로.
도열해 있던 교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길게 이어진 제단의 끝에는 당대 천마 위천량이 서 있었다.
위옥과 혈마군이 내 좌우에 나란히 섰다.
시종들이 옷자락을 내려놓았다.
문득 사람들이 하나둘씩 동작을 멈추고 소리 내는 것을 삼갔다.
위천량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시성식을 시작하겠다."
─그냥 걸어오면 되네.
동시에 위천량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나도 전음으로 답했다.
─특별한 절차는 없소?
─물론 있지만 생략이다. 여기까지 이딴 옷을 입고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특별한 절차였다고 생각한다만. 외인에게 그렇게까지 꼼꼼한 절차를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동의하오.
과연 실리파다운 호탕한 판단이었다. 천마신교의 지배자 자격이 있었다. 훌륭했다.
실리파가 좀 더 득세했으면 좋았을 텐데. 금강마군이 조속히 실각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제단의 끝을 향해 걸었다.
마침내 계단을 마주했다. 위옥과 혈마군이 멈춰서 다른 교도들처럼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나는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제단의 끝에 다다랐다. 위천량과 좌우호법만이 있는 곳이었다.
위천량은 파천신공의 먹구름을 피워냈다.
어떻게 보면 후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두운 기운이 위천량의 뒤를 메웠다.
위천량이 입을 열었다.
"김산."
위천량의 목소리가 천산 벌판에 넓게 퍼졌다.
가공할 내공이 느껴졌다. 일월마군과도 궤를 달리하는 깊은 화후. 내력의 양만 따지면 감히 현경에도 비할 만했다.
"교도 김산은 교조님을 마주하여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교에 전하였다. 또한 땅에서 벼락을 치솟게 하고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였다. 또한 본교가 잃어가던 초심을 다시금 되새기고 교조의 무공을 수준 높게 재현하였다. 이상의 기적을 현현한 공을 근거로 김산을 본교의 성인으로 지정한다."
그리고 위천량은 내게 합장했다.
나도 마주 합장했다.
무인이 아니라 교인으로서의 인사였다.
이제 나도 빼도 박도 못하게 마교도구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도 그랬다. 세상이 몰라도 스스로는 속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역시 나의 업이었다.
일월신교를 바꾸기 위해 재림천마를 주창한 이상 천마신교와 대립하거나 화합하거나 하나를 골라야 했다.
시성을 받는 것은 피를 흘리지 않는 길이었다.
무인은 싸워야 할 때 싸워야 하는 법이지만 싸우지 않아도 될 때까지 싸울 필요는 없었다.
"기적의 증거로 교도 김산에게 '반추(反芻, Ruminator)'라는 성호를 하사한다."
결국은 교조의 계승자라는 뜻이었다.
어쨌든 천마신교 입장에서 내가 행한 기적들은 초대로부터 받은 깨달음에 기반을 둬야 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실제로도 그랬으니 딱히 반박할 것도 없었다. 편린에서 초대 천마를 마주하지 못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뇌강과 함께 폭사했겠지.
나는 위천량과 눈을 마주쳤다.
막상 성호를 받으니 어색했다.
─끝난 거요? 뭐 더 할 건 없소?
─글쎄. 일단 공식적인 절차는 끝났다만. 아쉬우면 대충 하늘에 벼락이라도 한번 쏘아주게. 교도들이 좋아하지 않겠나?
─농담이오?
─진담이네.
당대 천마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가볍게 말하지만 실리적인 종교 지도자가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일 것이다.
우리는 잠깐 그렇게 묵묵하게 서 있었다.
하긴 뭔가 마무리의 상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파천신공을 운기했다.
검은 먹구름이 주변을 덮었다. 아홉 겹이나 되는 장포가 거센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하늘로 뇌강을 뿜었다.
콰쾅!
"와!"
시성식에 참가한 교도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뱉었다.
뇌강은 하늘로 솟아 구름을 찢고 사라졌다.
논검제 때처럼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도들은 만족스러운 듯 환호성을 냈다.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천마신교 만세!"
"반추 만세!"
"초대께서 우리를 보살피신다!"
─거 보게. 다들 좋아하지 않는가?
─참 대단도 하시오.
위천량이 멀리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약간 어깨를 으쓱였다.
참으로 소탈한 양반이었다. 그만큼 실리를 확실히 취하는 자이기도 했다.
결국 나를 초대한 순간부터 위천량이 손해를 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와 천마신교를 무탈하게 엮었고, 파천신공의 문제점을 깨달았다. 초대 천마의 심득 역시 전달받았으며 나를 중심으로 근본파의 기세까지 꺾었다.
대문파의 주인은 일개 무인이라기보다는 기업인이나 정치인에 가까운 법이다.
나와는 달랐다. 나는 결국 현장을 더 좋아하는 무인에 불과했다.
물론 나 역시 이번에 딱히 잃은 것은 없었다. 얻은 것은 많았고. 이번 십만대산 방문은 내게도 썩 도움이 되었다.
실추된 건 도사로서의 명예 정도. 하지만 그건 이미 재림천마를 주창할 때부터 끝장난 거였다.
그렇게 시성식까지 끝났다.
이제는 돌아갈 때였다.
한국으로.
***
일단 내 시성은 비밀에 부쳐졌다.
시성식을 치른 사실 자체는 교내에 알려지겠지만 성인이 누군지는 비공개하는 식이었다.
논검제에 참여한 교도의 숫자가 적지 않아 알음알음 알려지기는 하겠지만 공식적으로는 그랬다는 것이다.
파천신공이라는 절세 무공은 물론 초대 천마라는 거물까지 연결된 바가 있었기에 그랬다. 더구나 그 성인이 된 자가 다른 종교의 교도이기도 했고.
"화산파는 안 들리실 거에요? 원하신다면 그쪽에 내려 드릴 수도 있어요."
천마 전용 전용기까지 배웅하며 위옥이 물었다. 이번까지만 특별히 사용을 허락받았다.
"마교의 성인이 된 게 뭐 자랑이라고 본문에 가겠냐. 한 소리 듣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것도 그렇네요."
위옥이 작게 웃었다.
이미 도하나는 전용기에 올라있는 상태였다. 나는 대충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잘 있어라. 간다."
"……파천신공 조금만 더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그래. 말했잖아. 나는 사천공대랑 전속 계약 중이라고."
"……그럼 제가 사천공대 가면 가르쳐주실 거예요?"
"내 학생이 된다면 물론 봐줄 수 있지. 물론 다른 기초적인 무공이 먼저겠지만 말이다."
"알겠어요. 그 말 잊으면 안 돼요."
"그래."
나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고는 전용기에 올라탔다.
위옥이 뒤에서 손을 흔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뭐, 설마 소천마가 사천공대에 오기야 하겠어?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약간의 정신적 피로를 느끼며 고급 리클라이너에 몸을 묻었다.
천마 전용기가 김해 공항에 도착하기까지는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간만에 보는 한국 땅이었다.
마침내 몇 달 동안 이어진 재림천마 문제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