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 97. 시성(canonization)(1) >
천산논검제가 끝난 지 사흘이 지난 이른 새벽.
가을 해는 아직 뜨지 않아 하늘은 아침보다는 밤에 가까웠다. 여름의 끝을 알리듯 바람이 선선했다.
위옥의 별장은 천산을 등에 진 성지였다. 주변에 오가는 인적이 드물었다.
나는 조용한 정원에서 검을 느리게 그었다.
검이 공기를 갈라도 일절 소리를 내지 않아 가을벌레 소리만 시끄러웠다.
새벽 검무는 어릴 적부터 계속해온 오랜 습관이었다.
마음을 가벼이 하고 밤새 굳은 신체를 푸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환골탈태를 거친 이후엔 관절이 뻣뻣해지는 일 따위는 없었으나 새벽 검무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몸을 푸는 효과보다 마음을 푸는 효과가 더 컸기 때문이다.
익혀온 무공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풀었다.
누가 보면 답답하다고 할 수도 있을 느릿한 동작들.
초식 하나를 펼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급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힘의 전달과 내공 통행의 원리였다. 속도는 부차적이었다.
화산의 무공들을 모두 꺼낸 이후에는 검을 집어놓고 다른 무공으로 넘어갔다.
삼재종합공으로 시작해 비무와 실전에서 한 조각씩 얻어낸 타 문파의 수법들까지.
마지막은 파천신공이었다.
먹구름은 이전보다 더 짙었고 뇌강은 더욱 빛났다.
논검제를 무사히 치른 이후 무공 자체에 어떤 격이 깃든 모양이었다.
내가 익힌 무공 중에서도 위력만큼은 수위를 다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본연의 위력과는 별개로 앞서 펼쳤던 오랜 시간 깎아온 무공들에 비하면 조잡하기까지 한 성취였다.
나는 세 명의 화경과의 비무에서 얻은 몇 가지 심득을 생각하며 파천신공의 초식들을 내 몸과 내공 성질에 맞게 천천히 깎았다.
여러 번 다르게 펼치고 오래 궁리했다.
파천신공을 깎는 과정에서 초식들은 천천히 나아졌지만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막혔다.
나는 번뇌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기운을 갈무리했다.
하나의 무공을 완벽하게 깎아내는 것은 하루 아침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수한 초(秒)를 쌓아야만 이룰 수 있는 일.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궁리하고 또 궁리했음에도 아직 알 수 없는 것은 시간과 경험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저 오늘 한 걸음 나아갔음에 감사하고 내일 다시 걸으면 될 뿐이었다.
그대로 내력을 갈무리해 일주천을 마쳤다.
눈을 떴다. 마음이 맑았다.
어느새 해가 낮게나마 떠올라 있었다.
아침이었다.
짝짝짝짝.
작은 박수 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정말 멋지십니다, 계승자시여!"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1호와 2호가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치더니 각자 물통과 수건 따위를 가지고 달려왔다.
수련이 끝나기 전까지는 나를 등지고 밖을 살피던 둘이었다.
"일찍들 일어났군."
"계승자께서 일어나셨는데 어찌 저희가 잠들 수 있겠습니까."
1호가 물통을 건네며 말했다. 딱히 목이 마르지는 않았으나 성의가 고마워 한 모금 마셨다. 청량했다.
"1호는 그렇다 치고 2호는 밤새 호위를 서지 않았나?"
"잠은 죽어서 자면 됩니다! 이 경사스러운 날에 불면이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럴 필요까지 있나?"
"물론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본인들이 좋다면야."
경사스러운 날.
그랬다.
오늘은 공식적으로 시성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성대하게 열지는 않는다고 했다.
논검 당시 천산봉에 올랐던 천마신교의 정예 교도들.
그중에서도 소수만이 참석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럴 만도 했다.
화산파의 도사가 천마신교의 성인이 되는 것은 천마신교 입장에서나 내 입장에서나 널리 알려지는 것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소수의 인사만이 확인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웠다.
문득 대문 너머를 서성이는 인기척들이 느껴졌다.
문을 두드리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는 절을 하고 누군가는 내게 기도를 했다.
논검이 끝난 다음 날부터 저런 이들이 많았다.
기세는 강렬하지 않았다.
무인이 아닌 신도였다는 뜻이다. 가끔은 고수들도 몇 끼어 있었으나 대개는 그랬다.
천산봉에서 증명한 것은 나의 무력의 정통성이었음에도 어쩐지 무인이 아닌 신도들의 지지를 많이 받는 느낌이었다.
아마 저들 대부분은 시성식에 참관하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내 시성을 축하해주고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굳이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기도를 말리지도 않았다.
몸을 깨끗이 한 다음엔 정원 한편에 앉아 1호가 내온 차를 마셨다. 커피가 그리웠지만 지난 몇 주간 커피 대신 차를 마시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눈을 비비며 도하나가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사형."
"그래."
"호위님들도 안녕하세요."
"네, 도 소저. 좋은 아침입니다."
"호위님들, 저 배고파요."
도하나가 어느새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호위들을 보며 말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할까요?"
"네!"
"아니."
신난 도하나의 대답을 듣고 별장으로 들어가려는 1, 2호를 내가 제지했다.
"아침 수련이 끝나고 식사를 준비하도록."
"다 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나 말고 도하나."
"……먹고 하면 안 돼요?"
"안 된다."
"……그럼 얼른 하죠."
도하나는 곧바로 도를 꺼내 들고 아침 수련을 시작했다.
휘잉!
도하나의 수련은 내 방식과는 달랐다.
거대한 도기가 넘실거리며 가을 공기를 격하게 갈랐다.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지적하지는 않았다. 각자 수련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을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도 소저께서 기침하신 모양이다."
"과연 기세가 범상하지 않군. 여장부답다."
대문 너머에 모여있는 신도들에게까지 소리가 닿았나 보다. 신도들은 자기들끼리 조용하게 속닥거렸으나 내 귀에는 닿았다.
"왜들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대."
도하나의 수련 소음에 일어난 것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뿐만은 아니었다.
곧 별장에서 위옥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걸어나왔다.
그리고 질세라 내 시선이 닿는 곳에 공간을 잡고 맨손으로 파천신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자코 둘의 수련을 지켜보다가 조언이 필요한 순간들에만 한두 마디씩 던졌다.
"굳이 모양에 얽매이지 마라. 구조가 단단해져야 한다. 겉모습이 아무리 도강과 같다한들 부러진다면 강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뇌기를 완벽하게 가두려고 하지 마라. 뻗어 나가려는 힘이 곧 위력의 원천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내 조언을 수용하고 때로는 수용하지 않으며 각자 무공을 수련했다.
이윽고 둘의 수련이 마무리되어 갈 즈음 나는 2호에게 식사 준비를 부탁했다.
"슬슬 식사를 준비해야겠군."
"넵!"
"그나저나 파천신공부터 익히는 것은 효율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계속 익히는 거냐?"
나는 수련을 마친 둘에게 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네. 어쨌든 파천신공의 성취가 차세대 천마 경쟁의 열쇠가 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외가의 무공에 주력할 생각이지만 파천신공 수련을 그만둘 생각은 없어요. 바탕부터 쌓기에는 이미 나이를 꽤 먹기도 했고요."
"그래."
본인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내가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무인이라는 종자들은 대개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이유도 명확했다.
천마신공을 먼저 익히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아도, 천마 계승을 결정짓는 중요한 제도가 하루 아침에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개선될 일이겠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당대의 파천신공 수련자들은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적 같은 성취를 바라며 계속해야 했다.
아무튼 이후에는 아침 식사를 마쳤다.
식후 다시 차를 마시며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아침 10시쯤 되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전부터 나는 문 너머로 다가오는 강렬한 기세가 느끼고 있었다.
"준비를 마치셨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그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1호가 대문을 열자 그 자리에는 거구의 남자가 화려한 복색을 갖춘 채 서 있었다.
천마신교의 광명우사, 금강마군 류청송이었다.
난잡하고 다채로운 색채의 장포를 걸치고 허리춤을 길고 가느다란 흰색 천으로 묶은 채였다. 팔다리 여기저기에는 종이며 팔찌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진중하기 그지없던 근본파 거두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꼴은 뭐지?"
"시성식의 제례복입니다. 표본이 남아있지 않아 최대한 사료의 간접 묘사와 비슷하게 복구한다고 한 것인데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논검제 이후로 금강마군은 내게 말을 높였다. 사실은 다른 자들도 모두 그랬다.
당대 천마 위천량만이 나와 서로 하오체로 이야기하는 수준이었고 다른 교도들은 대부분 내게 존대를 했다. 내가 맞존대를 하면 불편해하기까지 했다.
"시성식이 그리 자주 치러지지는 않나 보군. 하긴 나도 천마신교의 성인에 대해 딱히 들어본 적은 없으니."
"생자를 대상으로 한 시성식은 직전의 것이 20세기 초반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드문 일인가?"
"성인은 살아있으면 교주와 권력을 나누니까요. 안 그래도 현대 무림 이후 교주의 권위가 크게 줄었는데 그 어떤 교주가 성인을 환영하겠습니까."
"근본파답지 않은 분석이군."
"저는 정세를 몰라서 교리에 매몰된 것이 아니라 알고도 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음."
"일단은 가시지요. 식이 곧입니다."
"음? 아직 시간이 좀 남지 않았나?"
금강마군이 자신의 옷차림을 한번 훑더니 무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성인께서도 마땅한 복색을 갖추셔야죠."
"……나도 그런 옷을 입어야 하나?"
"제 안목으로는 이보다 세 곱절은 화려했습니다."
"……그것참, 아주 기꺼운 소식이군."
"성인께서 기꺼워하시니 저 역시 기꺼울 따름입니다."
금강마군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그딴 광대 옷차림은 못 하겠다고 말하려다가, 금강마군이 첫 대면에서 교리대로 행하지 못했다고 자기 뺨을 갈겼던 장면이 생각나 그냥 순응하기로 했다.
그래. 마교 생활도 마지막인데 조금만 맞춰주자.
이미 마교의 성인까지 되는 마당에 옷 좀 유치하게 입는 것이 얼마나 못할 짓이라고.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발걸음으로 위옥의 별장을 나섰다.
대문 좌우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도열해 길을 만들고 있었다. 대부분은 내 집 앞에서 기도하던 평신도들이었다.
개중 나를 시성식까지 데리러 온 자들도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자는 혈마군이었다. 대문 바로 왼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강마군과 마찬가지로 꽤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했다.
"아, 위 장로. 오랜만이군."
"반갑습니다. 성인이시여."
혈마군이 합장을 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쯤 되는 인물에게 포권이 아니라 합장을 받자 그제야 내가 종교적 거물이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혈마군과는 논검제 이후로는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그쪽도 옷이 꽤 화려한데. 마음에 드나?"
"비록 제 취향은 아니었으나 성인께서 입으실 의복을 확인한 후로는 기쁜 마음으로 입을 수 있었습니다."
"……날 놀리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놀림이라니요. 저 돌덩이에게 그런 유쾌한 능력이 있을 것 같습니까?"
혈마군은 금강마군 쪽으로 슬쩍 턱짓하며 말했다.
돌덩이. 금강석을 일컫는 말일 테다.
류청송은 금강불괴에 가장 가까운 사나이였다. 돌덩이라는 말이 꽤 어울리는 인간이기는 했다.
딴에는 작게 소근거렸지만 화경이 못 들을 리는 없었다. 금강마군 역시 분명 방금의 대화를 들었을 것이다.
금강마군은 혈마군을 바라보며 눈썹을 한 차례 꿈틀거렸지만 뭐라고 반박을 하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꽤 의외인 모습이었던지라 혈마군에게 물어보았다.
"광명우사보다 위 장로의 직위가 더 높은 건가?"
"일단은 당대의 혈마로서 교의 결전병기이기는 합니다. 파천신공이 세간에 공개되고는 무색해진 지위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오호. 무색해져도 근본파답게 존중해주는 건가?"
"그게 아니고 근본파답게 우호법은 파천신공에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교리상 파천신공은 위씨 일가에게만 허락된 비급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혈마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근본파에겐 진혈수라공이 깡패란 겁니다."
"……위 장로 보기보다 망나니 같은 인간이었군."
"후레자식이 어디 가겠습니까."
음. 그 부분은 나도 마음이 아팠다. 나 역시 고무림에서 쓰는 낭인명이 바스타드였으니 말이다.
"이만 가지."
"예."
그렇게 혈마군이 이끌고 금강마군이 뒤를 따르는 호화로운 호위 행렬이 위옥의 별장을 나섰다.
목적지는 천산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