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 96. 혈마군(Bloody archfiend) >
"상서로운 일이다."
"아무렴. 저 서광 어린 무지개를 보아라."
맑은 하늘에 떠오른 무지개를 보며 천마신교의 교도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파천신공의 성취가 하늘까지 닿았구나."
"궁리당 한 당주에게 선견지명이 있었군. 교조를 계승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무공깨나 익힌 고수들마저 절로 피어오른 경외감을 숨기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어느 종교에서나 그렇듯 천마신교의 교도들 역시 기적을 신앙했다.
옛 시대와 교리에만 적혀져 있는 기적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는 것은 교인으로서 기꺼운 일이었다.
대관절 왜 기적은 옛날에만 일어났던 것인가. 지금 시대에는 가장 신실한 교도조차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
그 깊이와 정도가 달랐을 뿐 어느 종교인이나 의식 혹은 무의식에 품고 있는 의문과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천마신교의 교도들은 직접 현세에 행하여진 기적을 보았다.
인간이 하늘에서 벼락처럼 내려오고, 벼락을 다시 하늘로 올려 비를 내리고 무지개를 그렸다.
들은 적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것을 어찌 일개 인간이 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초대 천마를 잇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야 했다.
게다가 김산에게 저 이름 높은 천마신교의 이단사냥꾼 선봉장, 검마가 고작 삼초지적이었다.
서른을 갓 넘겼다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출중한 무위. 존재 자체가 기적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검마는 삼초지적이 아니었다.
검마와 김산의 짧은 교전 속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공격, 대응, 속임수, 묘리 들의 수 싸움이 있었다. 비무가 짧게 끝났다고 하여 격하시킬 내용이 아니었다.
게다가 김산의 무위는 소년화경 시절부터 이미 기적에 가까웠다. 특출났던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나 교도들에게 있어 그런 '사실'들은 더 이상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김산이 행한 것을 보고 기적이라고 부르며 김산을 신성화하기 시작한 순간, 김산이 천마신교의 성인이 되는 것이 기정사실과 다름없었다.
실제로 이미 김산에게는 교도들의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어떤 새로운 격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천산에서의 논검제는 끝까지 치러져야 했다.
교단의 신성한 의식이었다.
적법한 절차를 치른 후 무결하게 마무리되어야 했다.
공식적으로는 아직 강자존의 검증이 끝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땅과 풀에 남아있는 물기만큼이나 어수선한 분위기 속.
혈마군 위지호는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천산의 중심에 가까운 유일한 타인이었다.
소나기가 내렸음에도 혈마군이 입은 장포에는 물방울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따로 기막을 피워올리지도 않았음에도 그랬다. 극양기를 바탕으로 하는 무공 덕분이었다.
혈마군 근처까지 다가온 빗줄기는 곧장 증발해 사라졌다.
혈마군의 시선은 김산을 향해 있었으나 머릿속으로는 지난 두 번의 비무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혈마군 역시 검마와 흑나찰을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현대에서 가장 천마신교다운 무공을 익히고 있는 혈마군의 무력은 두 명의 장로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둘의 합공이라면 몰라도 하나하나를 상대하는 것은 혈마군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게는 불가능하겠지. 더구나 익힌 지 얼마 안 된 무공으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혈마군이 만약 둘과 생사결을 펼쳤다면 최소한 사지 한둘은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산은 지금 태연하고 오연하게 서 있었다. 생사결이 아니었다고 한들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논검제를 치른 과정 역시 심상치 않았다.
검마를 쓰러트린 뇌정벽력의 응용이나, 흑나찰을 상대하면서 보여준 초식의 점진적인 변화 모두 놀라운 수준이었다.
하수들보다 화경들에게 더욱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 충격은 비무 내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어중간한 무인들이 보내는 경외와는 감정의 깊이와 질이 달랐다.
특히 흑나찰과의 비무에서 보여준 행적은 그야말로 불가사의였다.
'검마와의 비무에서 보여준 것은 파천신공에 대한 놀라운 적성이지만, 흑나찰과의 비무에서 드러난 것은 무재(武材) 그 자체다.'
벼락을 쏘아 무지개를 뜨게 한 건 신비로운 일이었다. 파천신공에 대한 적성은 위씨로서 한없이 부러운 것이었고.
'만약 내게 저런 적성이 있었다면 내가 차대의 천마가 되겠지.'
그러나 실시간으로 동격의 고수를 상대하면서 초식마다 변화를 주는 것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무곡성이라도 타고난 게 아니어서야…….'
아니. 설령 무곡성을 타고났다고 해도 너무한 일이었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상대가 무곡성이든 천살성이든 검성이든 논검제는 끝까지 치러져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혈마군이 패배한다 한들 좌우호법이 참가하지는 않을 터.
결국 혈마군의 비무가 논검제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혈마군 위지호는 장포를 벗고 얇은 무복을 드러낸 채 앞으로 나섰다.
***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원 여럿이 달려와 검마를 데리고 갔다. 검마는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텅 비어버린 벌판 중심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몸 안으로는 자하신공을 극성까지 돌리고 있었다. 사실상 서서 눈 뜬 채로 운기조식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마와의 비무에서 소모된 내공을 보충해야 했기 때문이다. 단기 결전이었음에도 소모된 내공이 적지 않았다. 뇌정벽력의 응용은 거대 기공에 가까운 수준이었기에 그랬다.
그렇게 잠깐 있자 서서히 교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을 때쯤 천산봉의 중심으로 걸어오는 자가 있었다.
혈마군 위지호.
위옥의 나이 많은 사촌 오라비였다. 한 마디로 위씨 일가의 방계.
위천량이 '형제의 난'을 치르고 당대의 천마가 될 때 자기 아비 대신 위천량에게 붙은 유명한 후레자식이었다.
은인의 목숨을 대가로 생을 구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공통점이 있었다.
중요한 건 무공이었다. 교 외부에는 공개되지 않는 절세비급을 익히고 있다고 들었다.
진혈수라공(眞血修羅功, True blood asura).
이름만 알려져 있었다. 현대에 남은 가장 옛 천마신교스러운 무공이라고 들었다.
그 외에 덧붙여진 설명이 없어 어떤 형태의 무공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눈앞까지 다가온 혈마군에게 물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나?"
"그런 것은 없소."
혈마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왜 이 자리까지 나온 건가?"
"내 목숨이 여태 붙어있는 이유를 다시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지."
"목숨?"
"말로 할 것은 더 이상 없소."
"좋다."
나는 파천신공의 먹구름을 둘렀다.
어찌 되었건 마지막이었다.
더는 내력을 안분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필요한 만큼 끌어 쓰고 상대를 쓰러트리면 될 뿐이었다.
"오라."
혈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대각선으로 크게 할퀴었다.
푸슛!
혈마군의 손끝에는 강기가 어려있었다.
피륙을 깊게 가르고 간 상처에서 피 분수가 높이 튀었다.
"……무슨 짓이냐."
"놀랄 것 없소. 내 무공을 펼치기 위해 마땅한 수순이니."
"무슨……."
나는 말을 멈췄다.
혈마군의 몸에서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핏줄기가 천천히 위로 솟고 있었다.
세 줄기의 흉상에서 흘러나온 핏물은 위로 흐르더니 이내 알알이 떠서 공중에 작은 구체 무리를 형성했다.
화경 고수의 뜨거운 피는 그대로 허공에서 강기를 띠었다.
진혈수라공.
옛 천마신교다운 무공이라는 표현이 이해가 되었다.
진혈수라공은 피를 다루는 혈마공이었다.
혈강으로 이루어진 구슬들이 호신강기처럼 혈마군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허공섭물과 호신강기, 기막 구성의 원리를 조합한 고도의 강기공으로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그 궤적이 심오하여 파훼가 쉽지 않아 보였다.
혈마군이 손짓하자 몇 개의 피구슬이 뭉치며 얇은 검의 형태를 이루었다. 혈마군은 그 혈검을 오른손에 가볍게 쥐었다.
"……외형이 몹시 살벌하군."
"걱정할 것 없소. 어차피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니."
혈마군은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구색 맞추기? 무슨 말이지?"
혈마군은 대답하지 않고 팔을 움직였다.
즉시 살벌한 기세와 함께 혈강옥들이 혈마군의 인도를 따라 움직였다.
일견 파천신공의 뇌강이 움직이는 것과 흡사한 움직임이었다.
혈강옥은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범위를 넓혀 회전했다.
이윽고 혈마군이 쥐고 있는 혈검 주위로 몰려들었다.
우우우우웅──.
거대 기공이었다. 수십 년 치를 넘는 강기가 피를 타고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단순히 구색 맞추기라고 보기엔 기세가 파괴적이었다.
화경의 피를 매개로 형성된 거대 기공의 위력이 쉽게 가늠이 되질 않았다.
이 정도 규모면 사파 전체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강기공이었다.
대체 왜 이런 무공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외형이 좀 흉하기는 하나 그 정도는 극복할 수 있는 위력인데 말이다.
최소한 뇌정벽력을 큰 규모로 사용해야 완벽하게 대응할 수……
"움직일 필요 없소."
"……뭐라고?"
뇌강을 형성하려는 찰나, 진혈수라공의 거대한 소음 사이로 혈마군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움직일 필요가 없다니.
물론 혈마군은 일절 살기를 내뿜지 않고 있긴 했다. 그러나 살기를 임의로 감출 수 있는 수준의 고수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지표였다.
쿠우웅──.
나는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곧장 폭풍처럼 다가오는 거대한 혈검의 궤적을 마주했다.
피하지는 않았다. 혈마군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파천신공의 먹구름을 부풀렸다. 짙은 먹구름을 두껍게 쳤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호신강기 구실을 하기 위해서였다.
구름 사이로 뇌강들이 줄기 채로 꿈틀거렸다. 혈검을 막아서는 즉시 일점으로 찔러 반격하기 위한 준비였다.
혈검은 주변의 풀을 집어삼키고 땅을 파헤치며 천천히 다가왔다. 혈검과 혈강옥의 전진이 강풍을 야기했다. 머리와 옷자락이 거칠게 펄럭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진혈수라공의 혈검과 파천신공의 암운이 접촉하는 순간.
"……."
파악!
혈검은 그대로 부풀어 터졌다. 물 쏟아지는 소리를 내며 멀리까지 흩어졌다. 그러나 조각이 강기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단순한 핏방울이었다.
"……뭐지?"
"혈마공의 금제요."
혈마군이 태연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금제?"
"교조가 복속시킨 초대 혈마 때부터 진혈수라공에 가해진 금제지. 나는 뇌강 경지에 이른 파천신공을 침범할 수 없소. 내가 형제의 난 당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지."
"그렇다면……."
"나는 그대가 교조의 적법한 계승자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논검제를 마무리 짓는 역할이오."
그제야 진혈수라공이 보여준 강대한 위력에도 익히는 자가 많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후대 천마들의 파천신공 성취가 더뎌지면서 파천신공을 세간에 공개한 것. 그로써 파천신공에 대항할 수 없는 진혈수라공마저 가치가 급락한 것이다.
아무리 위력이 강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상성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무공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결정적이었다.
진혈수라공에 대한 정보를 외부에 일절 공개하지 않고 비급으로 삼을 만도 했다. 무공이 널리 알려질수록 이 치명적인 약점도 드러나게 될 테니.
"……긴장한 게 바보 같군."
"구색 맞추기라고 하지 않았소."
"그건 농담인 줄 알았지."
"난 농담 같은 거 할 줄 모르오."
"그렇게 보이긴 하군."
"……무슨 의미요?"
혈검이 파훼된 이후 천산봉 전체가 잠깐 조용하더니 여기저기서 환호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평교도들의 목소리가 컸다. 그들의 눈빛은 놀라움과 기쁨에 물들어 있었다.
"천마신교 만세!"
"교주님 만세!"
"천마재림 만마앙복!"
혈마군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런 파괴력을 지닌 무공을 대성했음에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을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보시오? 다른 장로들이 헐벗고 기절한 것보다는 나은 처지라고 생각하는데."
"……사고 방식이 아주 긍정적이군."
"그래야 좀 살아갈 만하오. 아무튼 이로써 논검제는 모두 끝났소."
"……그래."
척!
혈마군은 내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했다.
"논검제의 승자가 된 것을 축하하오. 성인이시여."
"……생각보다 마냥 상쾌한 기분은 아니군."
"원래 세상사가 다 그런 것 아니겠소. 도사가 마교도들의 성인이 되는 것이 어찌 즐거운 일이겠소."
"그 말을 천마의 직계 후손에게 들으니 기분이 아주 산뜻하군."
"기분이 산뜻해졌다니 다행이오."
"……."
생각보다 농담을 잘하는 마인이었다. 농담이 아니라면 그 역시 놀라운 일이고.
나는 천산봉을 넓게 둘러보었다.
나를 향해 절을 하고 기도하는 신도들을 보며 상단전을 새롭게 채우고 있는 격의 존재를 느꼈다.
천산의 논검제가 끝났다.
나는 천마신교의 성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