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 95. 검마(Sword fiend) >
"어찌 된 일이지……?"
"이게 무슨……."
잠깐의 웅성거림 끝에 누군가가 작게 내뱉은 탄식 이후로 천산봉에는 잠깐 적막이 흘렀다.
연신 이어지던 만병대가의 파상공세 끝에 갑작스럽게 지어진 논검의 끝을 대부분의 교도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 경지에 도달한 고수들은 모두 표정을 굳힌 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스스로 무학을 완성하고 방금 교전의 내용을 읽을 수 있을 만한 고수들. 즉, 최소 초절정에 달한 무공의 달인들이었다.
나도 태연하게 그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쨌든 결과는 내용을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똑같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천마신교의 만병대가, 흑나찰은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게 전부였다.
"입지."
"뭐? 고, 고맙소."
겉옷을 벗어 흑나찰에게 건네었다. 칼에 군데군데 찢어져 상태가 좋지는 않았으나 입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였다.
내가 흑요석 문신까지 조종하는 바람에 흑나찰은 어느 부분은 살갗이 아예 드러난 상태였다. 겉옷 하나쯤 내어주는 것은 도사로서 당연히 행할 만한 도리였다.
팔짱을 끼고 내외를 관조했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팔다리에 자상이 여럿 있었으나 화경을 상대한 것을 고려하면 아주 싼 대가였다.
내공에도 여유가 있었다.
만병대가가 교전을 근접 박투로 끌고 간 덕이었다. 거대 기공을 사용할 일이 없었다.
강기와 호신강기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느라고 소모된 내공 정도는 이미 대부분 회복한 상태였다.
이 정도 내공 소모는 기꺼운 일이었다.
무리하게 거대 기공을 사용하느라고 단전에 부담이 갔다면 그거야말로 재난이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거의 만전에 가까운 태세였다.
그러니 나는 남은 둘을 오연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 수 있었다.
"다음. 오도록."
내 말에 검마와 혈마군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니, 정확히는 얼굴만 마주했다.
검마는 장님이었으니.
눈깔이 달린 지 안 달린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천으로 눈가를 가린 상태였다.
검마는 입을 꾹 닫은 채 혈마군에게 수화로 뭐라고 일렀다.
혈마군은 그 수화를 끝까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자네가 다음으로 나서게. 아까 말했던 신성한 제례는 이미 마친 거 아닌가."
그에 검마는 입가를 찡그리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도중에 멈추고 일어섰다. 설득을 포기한 모양이었다.
혈마군은 이미 시선을 내게로 돌린 채였다. 저치도 참 강단이 있는 작자로군.
검마는 거대한 중검을 들고 일어서 터벅터벅 천산봉의 중심으로 걸어왔다.
대륙 무림에서 주로 쓰는 검과 달리 길이가 길고 칼날이 넓은 중검. 기병(奇兵)이었다.
통짜 만년한철로 이루어진 거검. 천마신교의 보구. 검마의 성명병기 파산검(破山劍, Mountain breaker)이었다.
고대부터 오랜 세월 업을 쌓아왔다고 전해지는 신병이기였다. 한 번 휘둘러 산을 부술 수도 있다고 해서 파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들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게 실제로 가능했으면 핵폭단도 문제가 안 되었을 거다. 칼 좀 휘두른다는 무인들이 모조리 모여 파산검을 얻기 위해 혈투가 벌였을 테니.
내 가설은 파산검의 당시 주인이 현경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산을 가르고도 남지.
어쨌든 유명한 신병이기를 눈앞에서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만져보고 휘둘러보고 검에 관한 얘기도 나누고 싶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명검의 주인을 상대하며 검을 맞댈 수 있는 것 역시 충분히 기꺼운 일이었다.
우뚝.
검마는 나를 향해 걸어오다가 어느 순간 멈춰섰다. 공격권에서는 한참 떨어진 거리였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수화를 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천마신교 내부에서만 쓰는 암어인지, 이 지방에서만 쓰는 수화인지 표준 중국어 수화와는 너무 달랐다.
"미안하지만 표준어가 아닌 수화는 알아듣지 못한다."
사실 표준어 수화도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각종 작전 용어들이나 알아보는 수준이었다.
내 말에 검마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그냥 포권을 했다. 나도 허리를 굽히지 않은 채 마주 포권을 했다.
아마 대충 자기소개나 인사 비슷한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김산이다. 바라는 답을 얻었으면 좋겠군."
검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등에 멘 파산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만년한철 특유의 묵빛 검신에서 서늘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검마가 파산검을 그대로 내려 중단세를 취했을 때.
공기가 변했다.
묵직한 살기와 함께 물둘레처럼 촘촘한 기막이 순식간에 주변에 깔렸다.
시각이 없는 검수인 만큼 기감과 소리에 극단적으로 민감할 것은 예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정교한 기막이었다. 얇은 기막들이 숨 막힐 정도의 간격으로 펼쳐져 있었다.
꾸욱.
나는 척추를 곧게 세우고 발에 힘을 주어 뿌리내리듯 땅을 눌렀다.
무겁고 거대한 중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뒤처지지 않는 위력을 갖춰야 했다. 언제든지 촌경을 발동할 수 있는 상태로 대기했다.
충격을 땅으로 흩어내려는 목적도 있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Softness overcome hardness) . 검이 제아무리 무거워 봐야 땅보다 무거울 수는 없는 법.
출수할 준비를 마친 채 검마를 바라보았다.
검마는 아무 표정도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마. 검을 쥔 마귀라는 뜻이었다.
별호가 마군은 아니었으니 교내의 직책상 원로나 호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무력만큼은 천마신교 전체에서도 일절이라고 소문이 높았다.
검 한 자루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맹인 검사.
극복하기 힘든 장애를 가진 무인이 마도일교의 장로까지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걸출한 무력을 갖추어야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대문파의 장로로서 갖춰야 할 행정력은 모자랐을 테니 다른 부분을 메꾸었을 터.
검마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검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개전에 동의한 것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
쩌어엉──.
쇠와 천둥이 부딪치며 굉음을 만들었다.
"이런."
만년한철은 기 전도율이 우수한 물질이다. 통짜 한철로 이루어진 파산검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 만년한철제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수준일 것이다.
그것을 감안하고도 파산검을 두르고 있는 검강은 거대했다. 강기의 길이가 검마의 신장을 한참 뛰어넘었다.
검마의 깊은 화후를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영약을 밥 먹듯이 복용했던 일월마군에게도 내공이 밀리지 않는 수준으로 보였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중검을 볼 때부터 예측했던 강(强)의 묘리였으니.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거대한 중검을 다루는 주제에 검마가 중검수가 아니라 쾌검수(快劍手)였다는 사실이며.
다음으로는 중검의 위력을 땅으로 분산하려던 나의 의도가 일수에 읽혔다는 것이다.
맹인 검사는 땅에 거의 엎드려 달리는 듯한 기묘한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접근했다. 처음 보는 보법이었다.
그 속도는 상상 이상. 단언컨대 내가 올해 상대한 화경 중에서 가장 빨랐다. 최소 나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 아니, 나보다도 확실하게 빨랐다.
공격권으로 들어온 직후 검마가 거대한 검강으로 그린 첫 초식의 궤적은 다름 아닌 올려치기였다.
땅으로 충격을 흘려내려던 내 준비를 무용하게 하는 공격이었다.
나는 앞으로 반걸음 진각을 밟으며 정권을 쏘아내려던 오른손을 그대로 내렸다. 오른손으로 수를 바꿔 대응하기엔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대신 뒤틀린 무게중심을 이용해 왼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곧장 주먹에 뇌강을 담아 밑면으로 망치처럼 내리쳤다.
천마신권. 진천동지(震天動地, Sphere shaker).
초장부터 생각지도 않았던 강대강(强對强)의 대결이었다.
찰나에 가까운 교착 상태가 있었다. 내 주먹과 검마의 중검이 맞닿은 채로 잠깐 멈췄다.
투웅!
다음 순간 내 몸이 허공으로 쑥 치솟았다.
"하."
헛웃음이 나오는 괴력이었다. 아무리 급박하게 대응을 했다고 해도 위력에서 심하게 밀린 것이다.
강건한 신체 능력. 쾌검. 세밀한 기막 운용과 정교한 초식 연계.
별호가 검마라길래 검에 미친 사이코패스일 줄 알았는데 행동과 수법은 오히려 정종에 가까운 견실한 검수였다.
어느덧 천산봉이 한눈에 모두 들어오는 높이까지 몸이 떠올랐다. 위력에서 밀린다는 것을 확신한 순간 일부러 몸에 힘을 뺀 덕도 있었다.
위천량, 위옥, 도하나, 1호와 2호 같은 사람들의 면면이 잠깐 시선 끝에 스쳤으나 곧 사라졌다. 곧 벌판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검마만 남았다.
내겐 오직 검마만 보였다.
굳이 기막을 넓게 펼쳐 활공하지 않았다. 중력가속도를 받아 몸을 그대로 아래를 향해 내리꽂았다. 오히려 가속했다.
전신에 뇌강을 둘렀다. 거대 기공에 가까운 규모로 내공을 태웠다. 단전이 들끓었다.
검마가 기막을 통해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까지 고려한 출수였다. 공격 범위를 넓게 잡았다.
검마는 내력을 아끼며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이 아니었다. 물론 만병대가가 만만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대처법이 다를 뿐이었다.
검마에게는 거대 기공을 투자해야 했다. 기본적인 속도와 힘, 내력 모두 나보다 출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술로 제압해야 했다. 굳이 박투로 끌고 가봐야 수만 더 보여주게 될 뿐.
강을 제압하는 방법이 오직 유(柔)만은 아니었다. 더 강한 강도 강을 이긴다.
파지지직─.
하얀 뇌강들이 용처럼 꿈틀거렸다. 강기들이 곧바로 뻗어 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을 마음으로 억눌렀다. 아직. 내 허락 하에서만 날뛰어라.
벼락은 원래 하늘에서 아래로 치는 법.
파천신공 뇌정벽력. 뇌굉(雷轟, Rumble of thunder).
벼락처럼 땅으로 순식간에 내려왔다. 잇따르는 뇌강을 검마에게 유도했다.
검마는 자신의 기막권에 내가 접촉하는 순간 회피 기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뇌강은 정해진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무기가 꼬리 흔들듯 방향을 꺾어 검마를 따라갔다.
검마는 이를 악물며 땅에 발을 박고 파산검을 상단세로 들었다. 전신에 호신강기를 두르며 검강을 피워올렸다.
쾅──!
──쿠르릉.
뇌강이 검마를 후려치는 소리. 그 너머로 천둥소리가 곧바로 뒤따라왔다.
내 손을 떠난 뇌강은 자유롭게 주변 공간을 휘저었다. 비단 검마에게 한정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근방 풀을 태우며 뛰놀았다. 그러나 대개는 검마를 향하고 있었다.
뇌굉을 받아낸 검마는 어느새 눈을 가리던 천이 타버린 채였다. 허연 눈을 부릅뜬 채 검마는 곧게 서 있었다. 전신이 그을렸으나 아주 조금도 움츠리지 않았다.
뇌굉을 온전히 받아낸 모습이었다.
검마는 웃으며 상단세에서 검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살벌한 검강을 한껏 두른 채였다.
"훌륭하군."
공중에서 시간 들이며 완성한 거대 기공을 검 한 자루로 막아내는 정교한 호신술과 담력.
과연 검마라는 칭호를 얻을 만한 뛰어난 무인이었다.
하지만 흑나찰만큼 파천신공에 대한 공부와 분석을 열심히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아예 익히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파천신공 중반부와 후반부는 소수에게만 서적으로 허락되었으니. 글을 읽을 수 없는 검마는 애초에 접할 기회조차 없었을지도. 파천신공이 검공인 것도 아니니 말이다.
중요한 건 뇌정벽력의 뇌강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치 넘치는 파천신공 후반부의 응용이었다.
설령 알고 대비를 했다해도 피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벼락은 보통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땅에서 하늘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파천신공 뇌정벽력. 반뢰격(反雷激. Return stroke).
뇌강의 마지막 줄기가 땅에 닿는 순간.
그 최후의 점으로부터 위로 치솟는 한줄기의 뇌강이 있었다.
쩌저정!
뇌강은 검마의 발밑에서 시작해 검마의 몸을 태운 뒤 계속 올라가 구름을 찢고 저 너머로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검마는 내리치는 검격을 멈추지 않았다.
쐐애액!
툭.
그러나 검격은 이미 힘을 잃은 채였다.
나는 손끝만으로 파산검을 잡아 멈춰 세웠다. 만년한철 특유의 서늘한 감촉과 동시에 검에 아직 남은 뇌기가 느껴졌다. 그래도 이 검을 만져보기는 하는군.
검마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검을 휘두르는 건 아마 강철처럼 질긴 정신력이었을 것이다.
검마는 검수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완성형 무인이었다.
심리전과 수싸움이 모자랐을 뿐 움직임만 따지면 나 이상이었다. 박투로 대적하기 싫은 상대. 그런 상대는 오랜만이었다.
만약 검마와 흑나찰이 나를 협공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장단점을 나눴다면. 흑나찰의 지성과 검마의 무력이 나를 동시에 노렸다면. 생사결이었다면.
결코 오늘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개인으로는 내가 둘보다 더 뛰어난 무인이었다. 더구나 나 역시 파천신공이 주력은 아니었다.
나는 파산검을 검집에 넣어주고 기절한 검마를 땅에 눕혀주었다. 혹시 죽은 건 아닌지 확인해봤는데 단순한 기절이 맞았다.
툭.
투둑. 투두둑.
문득 뺨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적막한 천산봉에 작은 것들이 떨어졌다.
"비가……."
"대체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쏴아아──.
부슬거리던 물줄기는 이내 거세졌다.
반뢰격이 찢어낸 구름으로부터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기막을 펼쳐 간이 우산을 만들었다. 검마까지 가려주었다.
비와 벼락의 순서가 바뀐 기이한 일이었다. 나로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런 일까지 가능하다니. 이건 무서에도 적혀있지 않았는데.
이 정도 수준까지 뇌기를 신통하게 다루는 무공을 창시한 초대 기생오라비에 대한 작은 경외를 품으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아주 맑은 하늘이었다.
소나기는 곧 그쳤다. 인위로 만든 비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무지개가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