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 94. 만병대가(Weapon master)(3) >
파바박!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박투.
초근접 거리에서 서로 모든 공격을 쳐낼 수는 없었다.
나는 만병대가의 연검에 팔다리를 몇 차례 베였으나 대신 그녀에게 주먹을 몇 대 꽂아 넣었다.
서로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으나 천봉 벌판에 옅은 피 냄새가 흐를 정도는 되었다.
금나수를 시도하면서 흑나찰의 몸을 덮은 문신을 쥐어뜯었을 때 오른손에 검은 것이 묻어 있었다. 슬쩍 살폈다.
"문신이 아니었군."
흑요석을 갈아서 바른 점성 있는 유체였다. 비수나 암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병기로서의 능력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조각들 사이로 독기가 느껴졌다.
미약하게 악취가 나는 수준이었다. 만독불침에 위협이 되지는 않을 정도. 최고급 독은 아니라는 뜻.
하긴 상식적으로 몸에 극독을 바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만독불침을 침범할 만한 극독이 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일 독공에 대비를 하지 않은 보통의 무인이었다면 이 순간 이미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아무튼 확인. 흑요석은 몹시 날카로운 물질이었다.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쾅쾅쾅쾅!
초근접 거리에서 손과 검을 끊임없이 마주하는 상황. 만병대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방금 뭐였나?"
"뭐가."
"아까의 반응 속도. 게다가 흑소수(黑搔手)는 대체 어떻게 풀어헤친 거지?"
"수법이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만병대가의 공격과 나의 대응 양쪽 모두에 대한 답변이었다.
위력과 수준과는 별개로 수법 자체에 특별한 묘리가 담긴 것은 아니었기에 그랬다.
흑소수라는 수공. 손이 검게 물들고 음의 강기를 다루는 점은 특이했지만 결국 그 궤적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이미 잘 알려진 편이었다.
"특별하지는 않다? ……그렇단 말이지."
"그래."
오히려 이해하기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박투 도중 한 번씩 무공을 완전히 출수하기도 전에 미리 차단당하는 감각.
익숙하지 않은 불쾌감 속에서 위기가 느껴졌다. 이 부분이 아마 이 대결의 승부처가 될 터였다.
"아줌마야말로 방금 그 기묘한 속도감은 뭐지? 그것도 무공의 일종인가?"
"몰라도 된다."
만병대가는 실실 웃으며 살기를 흘렸다.
"그렇단 말이지."
대답해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던져봤을 뿐.
곧장 만병대가의 공격이 이어졌다.
보법을 밟으며 다가오는 도중 연검 두 자루를 뽑아 양손에 쥐고 있었다.
천마신권의 먹구름을 둘러 낭창하게 휘어지는 연검을 정권으로 받아쳤다.
콰앙!
또 타격점이 내 생각과 달랐다. 발경력이 온전히 담기기 전이었다.
만병대가의 공격이 이번에도 예상보다 미묘하게 더 빨랐다.
아니.
달랐다.
만병대가의 움직임은 정확하게 보였다. 연검을 투척하기 전보다는 빨라졌으나 그녀의 속도는 여전히 내게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출수가 막혔다.
"……읽혔나?"
만병대가가 나의 공격을 읽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병대가는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마신권을 받아내며 깨진 연검을 집어던지며 반대쪽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읽혔다고? 어떻게?
나는 뇌강으로 받아쳤다.
아니, 받아치려 했다. 그러나 뇌강이 미처 손끝에서 뻗어 나가기도 전에 연검과 닿았다.
쿠웅─.
주르륵.
뒤로 크게 밀려났다. 출수에 발경력을 온전히 싣지 못했기에 힘에서 밀린 탓이었다.
채채챙!
기회를 잡았다는 양 만병대가는 몰아치듯 연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연검을 휘두르며, 내가 물러날 곳을 유도했다. 그곳에는 그녀가 미리 꽂아둔 예비 연검들이 있었다.
만병대가의 공격은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일단 그녀의 유도를 따르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벌판 곳곳을 헤집으며 곡선을 그렸다.
내 움직임이 미리 읽혔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녀의 움직임을 읽었으면 읽었지, 역으로 읽힐 리는 없었다.
없어야 했다.
나는 양손과 양발의 사용 비율을 의도적으로 비슷하게 조정하는 데다가, 초식을 시전하기 직전 준비 동작에서 드러나는 움직임을 거의 숨기기 때문이다.
출수 이후에나 내 수법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이렇게 쓸데없는 습관과 빈틈을 없애고 준비 동작을 최소화하기 위해 초식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며 체화하는 과정을 나는 '깎아내기'라고 불렀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원하는 초식을 사용할 수 있도록 나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내가 익힌 무공들을 깎았다.
무기의 대가들과의 교전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본기 아닌 기본기였다.
그러니 만병대가가 내 움직임을 읽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사용하는 것이 파천신공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나는 당연히 화산의 무공들과 삼재종합공 같은 주력 무공은 완벽에 가깝게 깎았다.
하나의 동작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게 취한 무공을 갈고 다듬었다.
그러나 파천신공을 깎는 것은 아직이었다. 시작이 부족했다.
뇌공은 그나마 좀 나았으나 십만대산에 와서 새로 접한 보법과 신권 같은 경우에는 초식을 완벽하게 시전하기에 급급한 수준이었다. 그 셋을 연계하는 것? 당연히 깊이가 얕았다.
배움이 짧았고 천마신권과 천마군림보를 이용한 실전을 경험한 적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초식을 시전하는 과정에서 무서의 교본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파천신공 같은 상승 무공은 온전하게 시전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준비 동작에서 초식의 징조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법의 위력은 부족하지 않았으나 준비 동작에서 상대가 고려해야 할 선택지가 극단적으로 줄었다.
다른 자는 몰라도 분석력이 좋고 파천신공에 익숙한 만병대가를 상대로 한 교전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만병대가가 다소 부족한 속도를 가지고도 내 초식이 완전히 펼쳐지기 전에 미리 차단할 수 있는 이유였다.
과연.
나중에 싸울수록 강하다는 만병대가의 말.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만병대가는 눈이 좋은 무인이었다.
뛰어난 안법은 다양한 무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보지 못하는 것은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병의 대가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무공을 익힌 자라면 필연적으로 좋은 눈과 뛰어난 분석력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뛰어난 편인 것이 분명했다.
하긴 만병을 익히고도 화경의 경지에 도달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화경은 싸움의 대가였으며 각자 남들보다 유독 뛰어난 점을 여럿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박투는 이어졌다.
만병대가는 좀처럼 거리를 두지 않았다. 내가 물러나도 계속 따라붙었다. 근접 박투가 아니면 준비 동작을 읽는 것만으로는 뇌강의 속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만병대가의 파상공세 도중에 몇 번 기회를 잡은 내 반격은 번번이 차단되고는 했다.
깨닫고 나서 보니 확실하게 보였다.
준비 동작에서 이어지는 기의 흐름과 자세만으로도 만병대가는 나의 초식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문제는 알았다.
그에 대해 생각나는 해법은 둘이었다.
일단 그녀가 알고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속도를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그녀와 나의 속도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이다.
화경이라면 누구든 날아오는 총알을 쳐낼 수 있었다. 즉,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속력이 음속은 가볍게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초고속 카메라가 아니면 일반인들이 초고수의 교전을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화경이 음속을 넘는 속력을 낼 수 있는 것은 환골탈태를 거친 신체 본연의 위력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듯 화경도 개체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었지만 인간의 능력이 거기서 거기이듯 화경 역시 그 개체 차가 크지 않았다.
내가 만병대가보다 빠르다는 것도 결국은 한끗 차이에 불과했다. 내공을 아무리 사용해도 속도를 이 이상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만병대가는 내 초식을 미리 읽고 있었다. 웬만큼 빨라지는 것으로는 반격까지 하는 것이 쉽지 않을 터였다.
두 번째는.
지금의 박투를 그냥 계속하는 거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내가 자신이 있는 방면이기도 했다. 늘 하던 일이었으니.
결국은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몸에서 힘을 빼고, 준비하고, 주먹을 질렀다.
파천신공의 첫 번째 초식부터 하나하나 차례대로 펼쳤다.
파천신공이 끝나고는 천마신권.
그러면서 발로는 끊임없이 천마군림보를 밟았다.
그리고.
그냥 반복했다.
"……무슨 생각이냐? 포기한 건가? 초식을 순서대로 펼치다니. 미친 거냐?"
"그런 게 있다."
"……내가 너의 초식을 읽고 있다는 건 알고 하는 짓인가?"
"그래서 하는 거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만병대가는 잠깐 눈썹을 찡그렸으나 당황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곧 연검 연계를 다시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만병대가의 공격을 받아치며 초식을 하나하나 펼쳤다.
"……뭐지?"
어느 순간.
만병대가가 다시금 당황하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게도 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무아지경.
신들린 듯 그저 파천신공의 동작에만 집중했다.
무공 자체에 심취했다.
"이게……, 어떻게……."
만병대가가 눈을 부릅떴다. 손은 멈추지 않고 계속 연검을 휘둘렀으나 이제는 내가 행하고 있는 행위의 목적을 깨달은 듯했다.
그리고 만병대가가 나의 반격을 차단하는 횟수가 서서히 줄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근접 박투를 시작했을 때는 만병대가는 내가 하는 반격의 8할을 차단했다.
그것은 파천신공을 일순(一循)했을 때 그 비율은 7할이 되었고, 십순(十循)했을 때는 5할까지 떨어졌다.
그 이후에는 나도 제대로 감을 잡았다.
그때부터는 만병대가의 후발선제(後發先制)가 연속적으로 실패하기 시작했다. 차단 비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마침내 어느 시점.
만병대가는 더는 내 준비 동작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파천신공을 실시간으로 서서히 깎았다.
무공을 반복해서 시전하며 두드러지는 파천신공 초식의 예비 동작들을 비틀고 눌렀다.
이게 두 번째 해법이었다.
예비 동작을 읽히는 것이 문제라면 그 뚜렷하게 드러나는 예비 동작을 바꾸면 될 일이었다.
파천신공을 순환해서 행하면서 천천히 초식에 변화를 주었다.
예를 들면 천마신권 운해를 취하기 전에 나타나는 구름의 흔들림은 등 뒤로 숨기면서 동시에 뇌강으로 가렸다.
모든 준비 동작을 완전히 없앨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행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직 오랜 시간을 들여 무공을 수련하고 다양한 실전을 경험하면서만 만들어갈 수 있는 경지였다.
그러나 지금 그만큼 완벽하게 깎아낼 필요는 없었다.
초식에 약간의 변화만 주면서 만병대가가 읽어내는 부분만 하나씩 확인하고 깎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하나의 무공을 완벽하게 깎는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쉬운 일이었다.
마침내 내 반격이 먹히기 시작했다.
만병대가는 분석과 파훼에 특화된 고수였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중요한 무기였다. 그 무기가 제한된다면 나머지 만병을 다룬들 의미가 없었다.
그건 무학자로서 나의 무기이기도 했다. 덕분에 약점을 하나 지웠다. 오늘 만병대가부터 상대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캉!
발경력이 온전히 실리는 순간에 만병대가의 연검을 쳐냈다.
팔이 반동에 올라가며 크게 틈이 열렸다. 아직 만병대가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시점. 지금이 분기점이었다.
나는 한발씩 나아가며 공격했다. 더 이상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이미 파천신공으로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검을 꺼내지도 않았다. 대신 주변에 꽂힌 연검진에서 연검을 뽑아 휘둘렀다.
챙! 챙! 챙!
"이런 미친……."
세상에 만병의 대가는 많다. 물론 그중 화경은 드물다.
천마신교의 흑나찰은 여러 가지 무기를 수련하여 화경에 도달했다. 흔치 않은 경우였다. 그러나 유일하지는 않았다.
만병을 익히는 무공은 이미 주류 무공이다. 어떤 한 천재가 이미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켰다.
기본이 되는 무공을 중심으로 다양한 무공을 폭넓게 배우고 익혀 대처한다.
비록 벽을 넘는 것은 몹시 힘들어도 노력을 쌓아간다면 충분히 한 명의 무인으로서 완성될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것을 우리는 종합공이라 불렀다.
천변호접공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종합공의 변종일 뿐이었다.
기운을 복잡하게 비틀고 궤적을 묘리의 영역까지 끌여올렸으나, 그 근본 부분에서는 필시 영향을 받았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공의 영향을.
결국 흑소수라는 것도 그 궤적을 따르고 있었다. 검술을 포함한 다른 무공들 역시 세세한 변화는 있을지언정 큰 틀은 다르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공이 종합공이다.
삼재종합공.
그 어느 때보다 만병대가가 많은 시대였다.
삼재종합공의 삼재 대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만병대가를 일컫는 또 다른 호칭이기도 했다. 다양한 병장기를 다루는 종합공의 고수. 만병대가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 삼재 대가 중에서도 삼재종합공의 모든 무공을 완벽하게 통달해야 1급 대가의 호칭이 허락되었다.
물론 1급 대가 역시 대부분은 초절정에 불과했다. 깊게 파고들자면 한없이 깊은 삼재종합공을 폭넓게 수련했으니 벽을 넘기가 힘들 만도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화경이 존재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만병의 대가였다.
흑나찰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뒤는 이제 벼랑이었다. 나는 흑나찰의 팔을 잡고 금나수로 휘감았다. 그리고 뇌기를 끌어올렸다.
만병대가의 팔을 감고 있던 흑요석들이 전기의 흐름에 따라 유체의 칼날을 형성했다.
칼날은 만병대가의 몸을 타고 구부러져 그녀의 목젖에 닿아있었다.
"논검의 답은 충분히 얻었나?"
"……물론. 훌륭하군. 개안했소."
"나 역시 그대와의 논검에서 얻은 답이 있다. 고맙군."
"……본녀는 천마신교 장로로서 논검의 결과에 승복하고 그대를 교조의 계승자로 인정하겠소."
만병대가는 눈을 감고는 고개를 숙이며 포권했다.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만병대가와 마주 포권했다. 그리고 시선을 멀리로 돌렸다.
어느새 검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주시하는 검마와 양손을 뒷짐지고 서 있는 혈마군이 나란히 있는 곳으로.
이제 둘이 남았다.